설교 모음
1/7/2024 | (주현 후 제 1주, 신년주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1 '말씀 공동체' The bible community
요한복음 17:14-20
얼마전 보스턴에 한국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을 해서 많은 분들이 관람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영화속에 전두광이라는 인물이 ‘이 정도 각오도 안했습니까?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개혁’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 보면 개혁을 한 이들은 또 다시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혁 속에서 국민을 이해하지 않고 특정한 인물이나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에 개혁은 역사속에서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됩니다. 건강한 역사관이 중요하듯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정치는 특정한 세력의 호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른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틀을 견지(堅持)해야 합니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닮은 흔적이 지문처럼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양심을 두드립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참된 진리로 인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 엄청난 혁명을 일으킨 Chat GPT는 우리가 배운 성경의 지식을 뛰어 넘을 수도 있고 말씀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제공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기반한 정보 제공일 뿐 영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삶의 실제의 믿음을 갖지는 못합니다.
2024년 1월은 우리에게 다시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새해에 저는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로 설교를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며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정에서 예배가 회복되고 주일학교에서 장년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첫번째는 말씀 공동체입니다. 새해에는 성경 말씀을 정해 놓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결단이 필요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가장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일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2024년 새해에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삶의 언어로 삶의 자리에 담아내 보는 훈련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먼저 기도의 무릎으로 살아내야 하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살아내는 기쁨을 맛보아 아시는 교우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 안에 담긴 주의 교훈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때 마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됩니다.
14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처럼, 그들 역시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간의 본성과 부딪힙니다. 예수는 독선적이거나 이기적인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야 한다고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가 서로 충돌하면서 사람들은 돌이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따르지 않고 예수를 미워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부딪힌 것입니다.
웨슬리는 1730년 11월 15일 옥스포드 대학에서 첫번째 설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인간 존재를 세가지로 ‘형상화’ 하였는데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타고난 자질로 하나님과의 의식적인 관계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성과 의지, 자유로 옷 입혀져 있다는 것이 자연적 형상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속성이기에 지각함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하도록 지어진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을 통해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지가 타락으로 인해 부패하게 되었고, 의지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손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타락한 의지는 죄의 힘에 포로가 되어 자기요구, 자기중심적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한 의지와 선을 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정치적 형상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하여 창조물들을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의 소통의 역할을 하도록 청지기적 사명을 부여 받는 피조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지요. 창조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우주적 드라마는 정치적 소명 가운데 창조주께 통치를 받는 관계성에 서 시작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을 충만하게 하는 특별한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은 도덕적 형상입니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반영하고 있는데 웨슬리는 인간이 죄로 인해 거룩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봅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웨슬리 목사가 체험했던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에 마음을 열게 된 사건입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가 전달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추상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영역으로 나타났고, 웨슬리는 은혜의 삶을 영적 호흡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더 중요한 것은 구원 이후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질서와 가치에 저항하며 때로는 미움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질서를 향한 적개심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신 주께서 우리 안에 하늘의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세상에는 언약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의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세상이 우리를 유혹해도 하나님께 뜻을 정하고 예수로 사는 인생은 도리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가게 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을 떠나서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여 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으로 부터 불러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말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이 은혜를 누리며 세상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성도란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이들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 내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타인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이런 사람이고 저런 사람이라는 기준으로 규명해 버립니다. 그런데 건강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타인의 모습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의 기준과 시선 보다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일상속에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떠나서 교회만을 위한 길을 걷는다면 교회는 희망이 되는 빛을 상실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빛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에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새해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깊이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말씀은 우리를 악한 세력으로 부터 지켜 줍니다.
15 내가 지금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들을 세상 밖으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 통해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악에서 보존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가 드린 기도의 목적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을 악으로 부터 지켜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신 것은 예수가 떠난 후 다가 올 유혹과 핍박의 상황을 염두 해 두고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밑바탕에는 자기희생과 헌신,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독특성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세상을 떠나서 믿는 우리끼리 잘 살면 더 속편하겠지만 성도는 세상을 모른 체하고 살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온전한 복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악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이 세상속에 거하면 우리는 세상의 물결따라 속절없이 끌려 다니게 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를 구출하셔서 광야길을 걷게 하셨는데 출애굽 이후에 애굽에서 살던 옛삶을 씻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이 구원이라면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배우고 하나님의 이끄시는 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배워가는 일입니다. 이 마음이 있는지 없는 지의 차이는 믿음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4-28)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실제가 되는 감격과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부서가 있습니다. 이는 케임브리지 한인교회 안에 있는 작은 교회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살피고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야 합니다. 허락하신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연합을 하고 각자의 믿음의 분량은 다르지만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함께 걷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삶을 공유하며 머뭇거리지 않도록 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기독교가 가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공격 받고 있기에 절대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고(범신론 신앙) 세상은 다 섞어 버리려고 합니다.(혼합주의 신앙) 게다가 인간의 무지와 죄성, 교만과 욕심은 영적 분별력을 흐릿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본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살아 있는 믿음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주와 함께 지속적으로 걷기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핍박하는 악에 집중하지 말고, 말씀의 렌즈를 통해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교회가 할 일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기에 제자들이 악한 자의 공격과 시험으로 부터 보호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한해 동안도 주어진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마음에 몰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힘입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는 말씀으로 예수를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1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0 그리고 나의 기도는 오직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을 통하여, 나를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공황 장애를 앓고 있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미래와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도 있었고 주위의 평가에 대한 불안함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야할 길에 대해서 항상 불안해 하고 자신의 삶에 진정한 쉼을 차단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교제와 관계의 문도 닫고 자신의 삶만 붙들고 살아가던 그 청년과 어떻게 동행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계속하여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초대하였습니다. 긴 시간 동안 벗어내지 못한 불안과 염려의 시간을 걷던 그 청년은 어느날 예배안에서 뜨겁게 사모하는 친구들을 만나 지금껏 감추어 두었던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이제서야 세상속에서 끼고 있던 인공호흡기를 떼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삶의 악한 세력은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자신이 이루어야 할 것이라고 여겼던 마음이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와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찾는 순간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들과 세상속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힘을 발견하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의 풀무불속에서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맑고 순수한 믿음으로 만들어 가시며 우리의 영혼을 윤택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증인입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는 세상속에서 빛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서 세워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될 이들이 있습니다. 광야의 시기를 걸으며 어려움을 겪고 이들이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붙드는 제자로 서있으십시오. 기독교인은 성경책에 기록된 대로 세상속으로 들어가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을 늘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헌신도 해 보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힘써서 성경을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1:14)라는 말씀처럼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주님과 말씀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기도로 악한 세력을 이겨내는 삶, 말씀안에서 진정한 회개와 회복을 누리는 가정과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가야 합니다. 결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동일한 길을 걸어야 하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 계속해서 하나가 되어지는 사람들, 적극적으로 세상을 품기 위해 애쓰고 고민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2024년 우리 모두는 나를 위한 더 많은 소유에서 안전을 느끼는 삶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함 받는 삶에 도전해 보시며 주님과 하나되는 기쁨을 누리는 한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2/31/2023 | (성탄 후 제 1주, 송년주일)
마리아의 찬가 II The Magnificat: Mary’s Song of Praise II
누가복음 1:50-55
한해도 살아보지 않았던 낯선 세상을 마주하며 믿음으로 잘 살아내셨습니다. 2023년은 ‘기도시리즈’를 시작으로 성령강림절기를 기점으로 사도행전을 묵상하며 설교를 전했습니다. 대림절기를 시작하면서는 예수님을 기다린 여인들 시리즈로 시작하여 한해 마지막 주일설교를 ‘마리아의 찬가’로 마칠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도 지난 한해를 회고해 보면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걸어온 비전과 사명을 이어받기 위해서 씨름했던 시간들입니다.
영성학자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51 ~ 1968)의 ‘사랑과 삶(Love and Living)’ 이라는 저서를 보면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아기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받아들이면, 이것이 우리 인생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소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의 ‘여관’에서 방이 없는 분을 받아 들인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그 아기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오만한 권력의 세상 속에서 그분과 함께 성장해야 하며,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간 그 길을 함께 여행하면서 세상의 권력에 맞서서 저항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의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주님은 어두운 세상에 씨앗이 되어 오셨습니다. 한 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밀알이 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한해도 섬김의 자리에서 수고한 모든 교우들에게 하나님이 채우시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원리 안에서만 자라갑니다. 어둠속에서 한줄기의 빛이 길을 밝혀 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굳어진 마음을 녹여 주지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도 저절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오신 말씀이 우리의 마음밭에 심겨져야 합니다. 씨앗은 심겨지고 죽어져야 씨앗이 발아 되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지난 주 마라아의 찬가 1악장은 아브라함때 부터 계획된 언약이 성취되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오늘 마리아의 찬가 2악장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하실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열어 줄 새로운 나라를 기대하는 노래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에는 악에 대한 승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찬양은 자유로운 영이면서 동시에 질서의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승리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확인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한해동안 교회력에 맞춰 매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력은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개인의 신비와 영성보다 하나님의 주권이 더 우월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대적해서 이길 절대자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절대자라는 수식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헤롯왕의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안전하게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혼돈과 어둠이 드리운 시대 한복판에 태어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이민자로 살아가며 낯선 세계속에서 약자로 서 있습니다. 나라를 떠나 살면서 겪는 고통과 설움은 약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는 경험이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주었던 찬송은 무엇입니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둔 길에서 마음을 위로해 주던 찬양은 무엇이었습니까? 마리아의 찬가에는 세상을 뚫고 들어오셔서 위 아래가 바뀌는 하나님 나라가 나옵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갈곳이 없는 이들의 고향땅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악에 대한 승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 힘없는 사람을 짓밟는 자들을 산산히 흩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어려워 질수록 누구나 더 움켜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의 뒤틀려진 마음으로 인해 세상은 전쟁과 폭력이 끊이질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하는데요. 저절로 성숙해 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빚진 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영혼을 향한 감각이 무뎌지고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지나친 탐욕의 마음 위에는 악이 자랄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때 사랑의 마음 위에는 거짓이 없는 선한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 사회학자가 현대사회를 평평한 운동장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 비유하는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차별로 인해 극복할 수 없는 불공정한 사회를 표현한 말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면 낮은 쪽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길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정점에 우뚝 선 사람들과 깊은 골까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엄연히 구조적인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를 거리낌 없이 흡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누리면 누릴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삶의 가치를 내 안에서 찾게 됩니다. 그러니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하나님의 가치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자신이 신이 되고자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비천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믿음으로 희망찬 나라를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성육신적 삶을 배움으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씨앗이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과 사랑의 토대위에서 자라납니다. 돈이 신이 되어진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이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같이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테레사 수녀는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 볼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탈무드에는 ‘누워 있는 자는 넘어질 염려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천천히 충분하게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울림이 되기까지 지속적으로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마음에 넘쳐납니다. 마리아는 이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깨닫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이나 왕들이라도 불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않으면 얼마든지 끌어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의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두렵고 무서웠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그 사명을 확인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를 가리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막 5:7)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에 중독되어 속절없이 끌려가던 사람도 주님을 만나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천사도 마리아에게 이르기를 예수는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녀를 감싸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눅 1:32,35) 사가랴는 자기 아들 요한이 가장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눅 1:76) 누가복음은 예수가 세상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거절한 이야기로 시작하며(눅 4:6) 십자가에서 세상의 임금들은 쫓겨났습니다. 예수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내신 것입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의 삶은 언제나 통제가 아니라 감화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성도들을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새해에 우리는 경제적인 힘, 지식의 힘, 인격적인 힘이 주어질 때에 바르게 사용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몸부림치며 바라는 소원들이 다 충족되면 만족하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따를 수 있을까? 질문하며 영향력을 행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해 주신 권력을 소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선한일에 사용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초대한 식탁의 자리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남과의 비교속에서 오는 불행을 떨쳐 낸다면 살아가는 삶이 한결 가벼워지라 생각이 됩니다.
1:53 그분은 굶주린 자들을 기름진 것으로 배불리 먹여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도다.
이스라엘 사회에는 약자들을 위한 보호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자주 언급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아와 과부는 누구입니까? 당시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부양의 책임이 아버지나 아들들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없을 경우에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 밖에 없었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고아 과부를 돌보는 것을 하나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민족 신들과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돕고 베푸는 것에 있어서 자선행위 차원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치장하는 도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겉으로 선한행위일지라도 그 동기가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자랑과 정치적 목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지요. 그러니 하나님은 주린 자를 배불리 먹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린 자란 육체적인 배고픔만이 아니라 심령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부족함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평생을 움켜지는 삶을 살면서 형의 장자권도 쟁취하고 형을 피해서 외삼촌이 있는 이방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공하고 난 후에 많은 식솔(食率)들을 거느리고 고국으로 돌아올 때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는 경험을 합니다. 평생 저는 다리로 살아야 했지만 야곱은 이후 과거의 이기적인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어 야곱이 아니라 민족의 조상인 이스라엘로 살게 됩니다. 환도뼈가 어긋나는 상처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한 사건이며 평생 치열하게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왔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출발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살아가며 우리 안에 소유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한 보배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 용기가 없고 내가 믿고 있는 힘의 원천이 무너질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도 예수의 흔적이 없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으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1:54 그분의 자기 종 이스라엘을 도우셔서, 자비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도다.
1:55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분의 자비는 그분의 백성들 위에 영원토록 있으리라.”
인간은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도 안되고 베풀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합니다. 돈이 힘이 되는 시대에 움켜쥔 손을 펼치면 잃어 버린다는 생각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을 펼치고 나눌 때에 빈손이 아니라 하나님은 놀랍도록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베풀고 흘려 보내면 또 채우시고, 공급하셔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베푸는 것도 섬기는 것도 내가 지닌 컵의 크기만큼 퍼내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더 큰 그릇으로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그동안 무시 당하지 않게 악착같이 모았던 돈을 토색한 것에 대해서 4배나 갚겠다고 결단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삭개오를 찾아 가셨던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도 찾아 오십니다.
예수의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자리에서 주께서 이미 이루신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오심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인생의 그릇에 담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이 마음에 이르러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비천한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지친 마음에도 이미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초대를 받고 초대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분의 하신 일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곱은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을 평탄해져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눅 3:4-6)
12/24/2023 | (대림절 네번째 주일, 성탄전일)
기다림 시리즈 4 마리아의 찬가 I The Magnificat: Mary’s Song of Praise
누가복음 1:38-42, 46-49
대림절기 4주 동안 기다림의 여인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라합과 수가성의 여인, 룻에 이어 오늘 성탄 예배를 드리며 마지막으로 살펴 볼 여인은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로 56절까지의 표제어가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누가복음 1, 2장 안에는 3개의 찬가가 나오는데 축복의 노래로 불리는 사가랴의 찬가(1:67-79),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므온의 찬가(2:29-31), 오늘 본문인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라틴어로 힘누스(Hymnus)는 ‘기도의 노래’라는 뜻인데요, 찬가를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성가집입니다. 위키백과 사전은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의 종류 가운데 하나라고 찬가를 정의합니다. 대개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찬미가(讚美歌)라고 표현하고, 개신교에서는 찬송가(讚頌歌)로도 말합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발표하는 부서별 드리는 찬송도 찬가인 것입니다. 헬라어로 ‘메갈뤼네이: Μεγαλύνει’ 라는 단어는 ‘크다’ ‘위대하다’ 등의 뜻을 지닌 ‘메가스: μέγας’단어에서 유래된 동사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를 라틴어로 마니피캇(Magnificat)이라고 부릅니다. 메시야를 기다린 마리아의 찬가에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찬양하는데 2주 동안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 곁에 들려오는 찬가를 통해서 마리아의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인류 구원을 이루는 약속된 말씀의 성취를 노래합니다.
누가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여인으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두려워 말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는 기다리던 메시야가 자신의 몸을 빌려 나온다는 천사의 말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합니다.(눅1:38) 마리아는 예수의 성육신을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마리아는 구약의 말씀을 믿고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기다린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를 수천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시작합니다.
아브라함때 부터 계획한 언약이 마리아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음을 보도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토록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말씀의 성취를 실제적으로 누린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리아의 찬가’는 아기 예수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힘찬 팡파르 악기로 시작을 합니다. 이 구원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온 감사의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문을 쓰며 바흐의 마리아의 찬가를 들으며 준비했는데 여러분도 이번 성탄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헌신적이며 진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아브라함부터 계획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기쁨인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제품을 좋아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려운 시절에 독일이나 미제 제품을 좋아하던 이유가 생산품질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Made in God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처럼 인간의 모습 지니고 오셨습니다. 웃고 울고 외로움을 느끼는 분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주님은 궁극적인 인간의 허무함과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낮고 낮은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기 전의 이방인의 모습을 5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첫째는 그리스도 밖에 구원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둘째는 언약백성이 아닌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셋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언약에 들어오지 못한 외인이요. 넷째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소망이 없는 자요. 다섯째는 이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인생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이 담을 허물기 위해 예수께서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받는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삶으로 성도로 칭해 해주시니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는 일은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나 이방인들을 찾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데 마리아의 찬가는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찬양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예수가 이땅에 오시기 700여년전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것이요.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사 9:6,7)라고 예언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에서 가장 작은 마을 중의 하나이지만 너에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다. 그는 영원 전부터 있는 자이다.”(미가 5:2) 매우 세세하게 탄생을 예고합니다. 찾아보면 구약성경은 온통 예수를 이야기합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한 사건으로 끝나 버린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이 구원을 노래했고 현재까지도 생생히 살아서 우리 곁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2)마리아의 찬가는 말씀을 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침에 눈을 뜰 때 떠오르는 생각이 어떤 것들입니까? 우리 안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대면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말씀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도록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할 때에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마리아는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고백했습니다. 20세기 영국의 의사 출신 복음주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1981)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침체되어 있는 영국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아서 ‘영적침체’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침체하는 원인과 치료방법을 성경에서 파헤칩니다. 그리고 21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영국 성도들의 마음에 불신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유대법으로는 돌에 맞아 처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약속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반응한 마리아에게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이 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기쁨을 전하기 위해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약 150km 떨어진 남쪽 헤브론 유다 지역까지 족히 4일 이상 걸려서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서둘러 자신의 친족 엘리사벳에게 가서 천사의 소식을 전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감격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라고 마리아에게 용기과 확신을 줍니다. 이때 엘레사벳은 세례요한을 임신한지 여섯달쯤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눅 1:36) 뱃속에 있던 세례 요한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소식을 듣고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기록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얼마나 서로를 복되게 하는 만남입니까? 세례요한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참된 삶은 무엇보다 만남이요. 그 만남은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의 사건을 가져다 줍니다.
비천한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순간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엄청난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48 주께서 비천한 이 몸을 돌보셨음이라.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축복받은 자라 하리니, 49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그분께서 내게 큰일을 행하셨음이라
마리아의 찬가에는 분명한 자기고백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큰일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은 우리의 부요함과 가난함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자기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 자체가 복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부요함과 비천함은 아무런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낮은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주시는 은혜의 복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을 누리를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평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고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것을 믿었던 여인입니다. 메시아가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했던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서 준비한 옥합을 깨트렸고 순종함으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통하여 세상이 전해주는 낙심과 불안의 메세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수많은 낙심의 일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그분은 우리를 축복받는 자로 삼아 주셨고 우리를 통하여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마리아의 찬가가 울려 퍼지길 소망합니다.
12/17/2023 | 대림절 세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3 "아름답고 감동적인 고백의 이야기: 룻" The beautiful and touching story of confession: Ruth
룻기 1:1-5, 14-18
오늘 우리는 세례식을 하게 됩니다. 세례 받는 이들은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의 여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세례는 신앙세계 밖에서 외로움의 자리를 벗어나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처음에는 교회 문화가 낯설고 익숙치 않지만 신앙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지체들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환대를 경험하며 믿음이 깊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례 받는 모든 이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고백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과 동행해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신앙 여행의 동반자로 오늘 세례 받는 이들의 믿음이 더 깊어지도록 함께 기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먼저 된 자들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유아세례를 받는 자녀들은 축복의 기회를 얻은 자녀들입니다. 믿음의 부모와 함께 신앙공동체에서 자라갈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속에서 태어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 은혜가 덧입혀 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여인은 룻입니다. 룻기서는 룻이 모압여인이라는 사실을 여러차례 강조하며 밝히고 있습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룻기서는 신앙생활을 처음 하시는 분들이 읽어도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있었던 여인입니다. 성경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룻이라는 여인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녀의 확고한 믿음의 고백은 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살아갈 소망과 바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1)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 그 땅에 기근이 크게 든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남자가 기근을 피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떠났다. 2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아내는 ‘나오미’이고, 두 아들은 각각 ‘말론’과 ‘기룐’이었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으로, 에브랏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모압 지방에서 살았다. 3 그러던 중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4 그리고 엘리멜렉의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 큰며느리의 이름은 ‘룻’이었고, 작은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였다. 그들이 모압 땅에서 10년쯤 살았을 때, 5 말론과 기룐도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여의고, 홀로 남게 되었다.
룻기서는 유다 지방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은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 땅으로 이주를 합니다. 한 가정이 잘 살아 보려고 꿈을 안고 이민을 갔는데 외국땅에서 나오미는 남편 엘리멕렉을 잃게 됩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나오미의 두 아들들은 어머니의 삶의 전환을 위해서였을까요? 두 아들 모두 모압 지역에 있는 이방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큰아들과 결혼한 며느리가 성경책 제목인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10년쯤 지났을 때 나오미의 두 아들 마저 죽게 됩니다. 이때 나오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성경해석자들은 엘리멜렉 가문의 불행이 하나님의 땅 유대지역 베들레헴을 떠나서 이방나라 모압으로 이주한 결과라고 보기도 하는데 사실 성경은 불행의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말씀을 대하고 기도하면서 사는 삶을 산다면 남의 삶의 이야기와 불행을 쉽게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시대에도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나오미는 다시 역이민을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여인 두 며느리들에게 이제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종용합니다.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동행하고자 하는 결심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모압땅과 모압의 신, 평생 자라며 익숙했던 문화를 포기해야 하는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가는 길은 새롭고 낯선 지역으로 가는 모험인 것입니다. 믿음의 모험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떠나야 합니다. 익숙한 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안고 가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제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결심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깊은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늘문이 열리고 성령께서 자기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으로 증언하는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 요한에게 세례 받았던 세례식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으니 기독교에서 세례는 참 중요한 예식입니다. 세례의 본질이 마음의 변화라고 한다면 세례식은 앞으로 믿음의 여정에서 주의 사랑과 신비를 담아 내기 위한 그릇인 셈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익숙했던 옛삶을 청산하고 새삶을 얻는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자녀를 키울때에 아이의 모습을 우리는 끊임없이 사진과 영상으로 남깁니다. 그때의 순간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소중함을 간직하려고 합니다. 아이가 처음 말을 했을 때, 처음 걸었을 때, 처음 이유식을 먹었던 순간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는 사회로 한발 한발 내딛게 되고 어느 순간이 되면 부모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성장입니다. 사랑스럽다고 아이의 시절에서 성장이 멈추면 안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으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16 룻이 말했다. “저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저는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함께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함께 머물겠어요. 어머님의 동족이 제 동족이고, 어머님이 섬기시는 하나님이 제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겠어요. 어머님 곁에 묻히겠어요. 주께서 설령 제게 심한 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저는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전 어머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그토록 자기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룻의 이 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바꿔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 우리도 함께 가고, 예수께서 머무시는 곳에 우리도 함께 머물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주께하듯 섬기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백성이라 부르는 형제와 자매는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입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앞으로 함께 지고 따를 것이며, 예수께서 앉아 계신 하늘보좌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바라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땅에서 살아 내겠습니다.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주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백이 삶속에서 저절로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시간 간절하게 한번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장을 경험합니다.
룻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공동체 안으로 들어 섭니다. 유대 풍습과 문화가 룻에게는 낯선 것들일테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낮춰보는 문화였는데, 모압 여인으로 유대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이 고생일수도 있었습니다. 합리적으로 보면 룻이 모압 땅에 머무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기 1장 14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더라’고 기록합니다. ‘붙좇았다’는 ‘다바크’라는 단어인데 연합한다는 의미이며, 전인격적인 삶으로 함께하다라는 뜻입니다. 나오미가 볼때에도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모르고 눈에 보이는 보장된 것이 없었는데 시어머니인 자신을 믿고 발걸음을 떼는 룻을 책임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먼저 된 자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눠 주었습니다. 낯선 문화속으로 들어가 적응해 가는 나오미의 가르침을 룻은 순종함으로 따릅니다. 믿음은 개인의 회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 관계속에서 더 많은 배움을 얻게 됩니다. 공동체는 우리 안에 부족한 모습을 보게 해주기도 하고, 서로를 지지해 주고 격려 해주며 성장시켜 줍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게 될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생활은 참 중요합니다.
첫째는 기도생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인격적 관계에서 가능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수록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말씀생활입니다. 시편 119편 10절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둔 우리의 마음을 밝히 비춰 주십니다. 왜 사람들이 죄의 길, 욕망의 길로 가면서도 깨닫지 못합니까? 사랑의 빚 진자임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랑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지속적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거칠어 지고 메말라 지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뤄가는 자리이며 개개인의 마음안에 있는 외로움의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삶은 너무도 치열합니다. 걱정과 근심은 끊이질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안한 자아를 만나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풍조는 거대한 바다처럼 우리의 믿음을 요동치게 하고 공동체로 부터 밀려나게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공동체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믿음의 방향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3) 룻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국을 떠나 외국이라는 땅에서 믿음의 모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자기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며 수많은 인내와 아픔의 시간을 달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믿음의 길을 이민 땅에서 절실하게 만나 인생이 변화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반복되는 생활속에서 안전하고 평탄한 길만 찾다 보니 내 신앙의 자리도 예전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분도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제자의 삶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불행한 인생속에서도 믿음의 고백으로 찬란한 소망의 여인이 된 룻처럼,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관심을 갖어야 합니다.
룻기의 역사적 배경은 사사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사람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멈추지 않으시고, 우연처럼 주어지는 일상의 삶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룻의 이야기는 이름없는 들풀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말해 줍니다. 현실의 불빛만 보고 주저한다면 창조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빛을 못 본채 인공빛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에 죄와 사망의 삶으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일은 그 고백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합니다.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속에서도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딪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속에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나가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친족의 대가 끊기게 되면 대를 이어 주어야 할 ‘고엘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룻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된 여인임을 알려 줍니다. 나오미 가문에 기업무를 자로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삼고, 오벳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훗날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즉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룻이 모압에 머물렀다면 이 일 은 일어 날수 없었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이었지만 조각난 부분들을 하나씩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게 합니다
룻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믿음의 여정은 우리가 참여하기 전부터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룻의 삶은 조각난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은 조각난 부분들을 하나로 묶어서 회복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주님을 따라 주께서 지으신 세계속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알게 하시고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낯선 길을 걸었던 룻처럼 간절함으로 이 자리에 나온 지체들을 따뜻하게 환대하여 아픔의 자리를 대신해 주고, 살아갈 공간을 허락해 주는 아름다운 교회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2/10/2023 | 대림절 두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2 "이제 만나러 갑니다 : 수가성의 여인" On the way to meet you : Village of Sychar Woman
요한복음 4:6-14
대림절기 기다림의 두번째 여인은 라합에 이어 수가성의 한 여인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왜 자신의 마을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지 않고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여인은 불행한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섯명의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물 한모금 달라는 요청에도 까칠하고 야박한 대화속에서 다른 사람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픔과 상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들로부터 받은 공허함과 인간적인 배신감이었을까요? 지역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였을까요? 이 여인은 인생을 살면서 벼랑 끝에 서는 기분을 수차례나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태양이 뜨겁게 내려째는 낮 12시 무렵에 물을 길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설교나 찬양으로도 한번쯤 다 들어 본 것입니다.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참 샘물을 마실 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대림절기를 보내며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속에 담겨진 은혜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갈증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어느 깊은 경지의 단계에 올라 무소유로 삶고 살고 계신가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유의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구를 내려놓기 보다 지나친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적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비워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거룩한 갈증과 거룩한 목마름으로 세상의 욕망을 대체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일곱가지 표적 및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대한 보도입니다. 2장에서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이 나옵니다. 3장에서는 지체 높고 존경받는 대법관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질문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태앙이 내려 쬐는 한낮에 천대받고 부도덕한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먼저 우물가에 계셨습니다. 이후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옵니다. 예수께서는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구나. 주님이 먼저 이곳에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한 인생 시간표를 만들어 놓으시고, 나를 향한 인생의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영적인 눈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매일 살아가는 것이 영성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1) 예수께서는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과 유대지역을 왕래 할 때에 가장 빠른 경로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우회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에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 혈통적으로 혼합되어 부정한 민족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금기를 깨시며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빨리 가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예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씀안에는 유대인들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마름의 자리는 우리와 같이 피곤함을 느끼는 완전한 사람의 몸을 지닌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경험하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4:6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행길에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때는 낮 12시 무렵이었다.
여러분은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십니까? 추운날 따뜻한 차 한잔이 얼었던 몸을 녹여주듯 , 지쳐 있던 마음에 진정한 사랑의 지체들의 위로가 마음이 힘이 되는 것처럼 믿음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고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함께 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목마름과 갈증, 아픔과 고뇌를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의 자리, 두려움의 자리, 낙심의 자리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이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건조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은 다른 행성이나 우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더 알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마음에 찾아오시는 주님에 대한 감각은 모조리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은 더 편리하고 물질적인 대상은 열렬히 추구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는 의심도 많고 냉소적입니다. 작은 소자를 보면서 주님이 보여지고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볼 때에 우리와 함께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7 ○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라는 요청에 ‘내가 목이 마르다’라고 하신 십자가의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이에서 목이 마르다고 외쳤습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 사이의 간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애타는 목마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나아갈 수 있게 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갈망하고 있으신지요?
대림절기에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고‘주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2) 경계를 너머 만나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는 곳’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하늘문이 열리고 친히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는 곳입니다. 유대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이른 대낮에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요청할 때에 이 여인은 마음을 닫은 채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까칠한 반응이지요. 이에 예수님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 대답합니다. 이 여인은 다시 퉁명스럽게 되묻습니다.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지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 주신다는 말입니까?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물입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정색을 하고 “선생님,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후에 예수님은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당황했는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했는지 나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시치미를 땐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17절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소. 남편이 없다고 말한 당신의 말이 옳소.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그 남자도 사실은 당신 남편이 아니오. 그러니 방금 당신이 한 말이 맞소.” 우물가의 여인은 눈이 열려지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여인은 예배하고 싶은 열망에 질문을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느껴질 때 우리 마음에서 끓어 올라오는 마음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경험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배고픈 경험이 없는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사람들의 마음을 어찌 알겠으며, 타는 목마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물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환대는 배고픈 자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은 상품이 아닙니다. 다 쓰고 나서 일의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소모품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주님은 거룩한 삶의 변화의 자리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과거에 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여인의 다섯 남편처럼 사회적인 업적과 취미생활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마음은 더 공허해져만 갑니다. 소비주의문화는 예배까지도 행위로만 여기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수고해서 길러내는 물이 아니라 실제적 삶으로 먼저 찾아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우리의 노력과 공로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샘물은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씻겨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힘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종교일 뿐입니다. 그 길은 수고와 고통 뿐입니다. 열매가 열리는 것 같아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은혜로 구원을 유지시켜 줍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세상을 보면 많은 아이들이 헤롯 왕의 손에 아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헤롯왕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끼고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권력욕과 거친 성격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죽어가는 갓난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예수가 성장해서 자신이 태어날 때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일들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느꼈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슬퍼하고 탄식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원동력이 되었겠지요. 우리가 잘 알듯 세상은 불의와 폭력에 의해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 희생량이 되는 일들을 적잖게 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말로 할 수 없는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고 온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절망의 파도 근심의 파도 두려움의 파도가 몰려 올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진행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세상의 시스템에 의해서 무고한 희생량이 되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점점 차가워져 가고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심을 받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고립된 채 내몰리는 연약한 이들에게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삶을 추적해 보면 삶의 면면에 따뜻함이 묻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인생의 상처와 멸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리였고, 남편과의 헤어짐 이후 새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고 지속하면서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 가는 여인의 삶은 우리 모두의 갈증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아로 만난 여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증언합니다. 그분을 만나 보라고 전도를 합니다.
대림절기의 기다림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에서 있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의 자리가 더 깊어질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과 선행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한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고립된 채 물을 길러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늘 가족이 되어 함께 동행하니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깊은 만남은 숨기고 가리던 것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마음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주님과 더 깊이 사귀십시요. 그리고 우리를 만나러 이미 와 계시는 주님과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메말라 무뎌져 있던 나의 마음과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복음이 전해지면 희미하게 느껴졌던 삶의 방향이 선명해짐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물질이 있으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결과와 성과만을 위한 길을 걷게 되면 그 안에 무수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만나는 일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 속에서 삶을 화해하게 하는 평화의 주님을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