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3/17/2024 |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잃어버린 두 아들을 위한 잔치' The celebration of the 2 lost sons coming home
누가복음 15:24-32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더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특별 새벽기도를 결심하고 지키는 분들은 이쯤되시면 생체 리듬이 바뀌었을 겁니다. 이제 열흘 정도 남았는데 피곤하고 힘들어도 주의 생명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솟아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 갈망한 아들이고, 다른 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 곁에 머물러 있던 아들입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고 기질이 다름을 느낍니다. 이 두 아들의 선택은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을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본문에도 방황했던 아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끝까지 기다리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십가가의 정신 가운데 한가지는 포용성입니다. 포용과 환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가치입니다. 포용의 마음을 잃어 버린 공동체는 내 기준만을 높이기 때문에 파벌이 형성되고, 환대를 잃어버린 공동체는 새로운 이들을 환영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사랑과 협력 보다는 분열과 배척을 반복해 왔습니다. 편견과 분열은 성경 안의 가정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요셉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불안전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구속적 섭리로 믿음의 가정을 이끌어 가십니다.
누가복음 15:1, 2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두 아들을 잃어 버린 비유를 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다른 부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속에서 우리는 죄와 대속, 희망에 대해서 볼수 있습니다.
첫째, 둘째 아들은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아버지를 떠납니다.
12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소. ‘아버지, 제 몫의 유산을 미리 나누어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소. 13 얼마 후,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소.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남겨질 유산을 미리 분배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아버지의 굴레를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떠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인생에 도전도 하고, 꿈도 펼치고 싶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의 이 행동이 아주 잘못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멋진 꿈을 꾸며 인생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이해와 달리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기에 당시에 이런 요구는 아버지가 원로들에게 데려가 아들을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아버지는 당시 시대적 문화를 넘어서 자유를 열망하는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허락합니다.
유대사회 풍습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자에게는 재산의 2/3, 둘째에게는 아버지 유산의 1/3 할당이 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1/3 유산에 해당하는 꽤 많은 돈을 들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끝없는 자유를 향해 떠난 이 아들은 그 땅에서 오래 가지 않아 술과 여자로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로 선택하면 하나님의 주권의 바다를 벗어나 물밖에서 살고 싶은 죄된 욕망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로 인해 타락으로 가게 됨을 보게 됩니다. 죄가 하나님으로 부터 벗어 나려는 힘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했을 때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고, 그는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로 허기를 채우면서 지내야 했습니다.
13절로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얼마 후,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소. 거기서 그는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많은 돈을 다 허비해 버렸소. 14 돈은 이미 다 떨어진 데다, 그 나라 전역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 그는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길이 없게 되었소. 15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나라 사람의 어떤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가 돼지를 치게 되었소. 16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실컷 먹고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넉넉히 주는 사람이 없었소.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자유를 희망했지만 유대인들이 혐호하고 부정한 짐승이라 여기던 돼지를 치며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얼마다 그 삶이 절박했을까요? 돼지가 먹는 열매로라도 배고픔을 없애 보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뜻대로 안 됐습니다. 이 아들은 어느 날 아버지가 계신 자기 집을 생각했겠지요.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은 지금의 자기 신세 보다 나을 텐데, 아버지에게 품꾼의 하나로 걷어 달라고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잘못을 빌고 앞으로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한명으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요.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매일 매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날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임을 직감합니다.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들을 향해 뛰어 나오십니다. 유대사회의 체면 문화도 아버지에게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오직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아들만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끌어 안아 목을 껴안도 입을 맞추십니다. 하인들에게는 잔치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줍니다. 일꾼이 아니라 다시 아들의 신분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이 아들은 크게 혼나더라도 일꾼으로라도 아버지 곁에서 섬기려고 했는데,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자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고 싶은 자유,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며 마음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될때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날 존 웨슬리에게 찾아온 한 사람이 불신을 품고서 묻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설교를 하며 어디로 인도하시는 겁니까? 웨슬리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만물을 사랑하며 자신의 삶에 자족할 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깨닫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값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못해도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영혼의 굶주림 가운데 있을때에 배불리 먹여 주셨고, 자유를 향해 질주하며 공허함과 허무함에 갇힌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기뻤던 날 아버지 집에 머물던 큰 아들의 실체가 드러 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동생이 돌아온 시점에 드러났습니다. 평소에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 보였는데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24 자, 보아라. 죽었던 내 아들이 이렇게 다시 살아왔다. 내가 아들을 잃었는데, 이제는 다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큰 잔치를 벌였소. 25 ○ 한편, 그때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자기 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소.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자기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소. 27 종이 대답하기를 ‘동생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께서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시고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였소. 28 그 말을 듣고,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소.
둘째, 큰 아들의 관심은 아버지가 지닌 재산일 뿐입니다.
형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왜 불편한 것일까요? 아버지가 둘째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분노할 일이었을까요? 아버지가 동생을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자신의 것이었는데 또 다시 1/3재산을 나눠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내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인생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자신이 받게 될 이익을 기대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달랐지만 목적은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뜻에 반항하고 자유를 갈망했던 것이고, 큰 아들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한 한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 모두 아버지로 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큰아들에게도 아버지 보다 재산이 먼저 였습니다. 이 아버지는 큰 아들도 동일하게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아버지는 너도 이 잔치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1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하나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얻을때 우리는 아버지가 베푼 잔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율법을 통한 구원과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차이로 분열과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그리스도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큰아들은 이미 믿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예수의 비유에서 나오는 큰아들은 형식주의적 종교를 지적하며,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있으나 실제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의심을 버리고 아버지의 잔치로 들어오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착하게 살라, 성실하게 살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착하게 살고 죄를 이기려고 해도 더 많은 죄의 물결이 마음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좋은 열매는 뿌리 깊은 좋은 나무으로 부터 맺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9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투덜거렸소.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고,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저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잡은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이게 뭡니까?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왔다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시다니요!’
또 다른 아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셋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온전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통과하시며 죄와 어둠속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해 주시기에 우리는 넘어지고도 일어날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잔은 고통의 잔이고 쓴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우리의 고통의 잔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아드리기 힘든 그 잔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했기에 그 잔을 받아들일수 있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수 없을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는 근거는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존 스캇펙 박사는 평화만들기라는 책에서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고 싶다면 잘난 제안들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봐야겠다는 욕구를 먼저 버리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 돈에 대한 집착, 신에 대한 분노 등 이러한 것들은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평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고통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쟁의 시대에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예수는 우리의 고통도 축제의 일부분을 만드시며 이끄십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가 초대한 잔치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닮아갈 것인가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예수님과 함께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의 지친 호흡에도 계시고, 어두운 세상속에서 홀로 있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회개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삶의 방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삶의 방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더 이상 주안에서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탕자처럼 돌고 돌아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믿음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배하고 있지만 삶의 영역에서는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삶이 익숙하고 말씀을 읽지만 그안에 깊은 은혜는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지만 구원의 길에서는 여전히 방향을 잃은 자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둘째 아들에게만 베풀어 준 잔치가 아니라 누구든지 오라고 베푸시는 잔치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원망이 찾아 오는 순간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첫째 아들의 모습도 있고 둘째 아들의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어린 아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분량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청중일 뿐이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큰아들이나 작은아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가야 합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달라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걸음과 방향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걷습니다. 한번도 변한적 없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귀한 은혜 누리시고 사순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기억하며 묵상하는 한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3/10/2024 | 사순절 네번째 주일, 임직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첫번째 제자들' The First Disciples
누가복음 5:1-11
사순절기를 보내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누가는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시작되는 공생애의 첫번째 사건으로 나사렛에서의 배척사건을 위치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책을 펴서 이사야서를 읽으셨는데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앞을 못보는 이들에게는 눈을 뜨게 해서 다시 보게 하시고, 마음이 눌린 자에게는 자유를 주는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시고 책을 덮으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예수님을 통하여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어졌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예언이 자신을 통해 입증되고 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고향 사람들에게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지극히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자라셨기에 예수의 설교에 감탄하기는 했지만, 그를 메시아로 받아 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4장 22절입니다. "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고,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면서 “저 사람은 본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쉬운말 성경)
이후 누가는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예수가 성령의 충만하여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온갖 병든 자들을 찾아가 고쳐 주시는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절실했던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하는 예수께 많은 군중들이 몰려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기 위해 찾아 가신 곳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주일학교를 경험한 분들은 한번쯤 다 들어 보셨을 겁니다.
누가복음 5장은 게네사렛 호수를 배경으로 시작이 됩니다. 게네사렛 호수의 둘레는 50km이고, 남북의 길이가 21km, 동서의 폭이 12km입니다. 당시 헬몬산으로 부터 내려 오는 맑은 물로 인해 200여 종류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어서 호수 주변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누가는 호숫가에 두 척의 배가 있었고, 어부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장면을 한번 머리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그물을 씻고 있었으니 당시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지도 추측이 됩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말씀하십니다. 지친 몸으로 쉬어야 할 타이밍에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것이 불편하게 들릴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해가 뜬 오전에 깊은 곳에는 고기 잘 다니지 않는다는 지식을 베드로가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건 베드로의 전문 분야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베드로의 기질로 보아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있으니 베드로는 군중심리에 의해서라도 랍비의 권위를 스스로 부정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의 결말이 베드로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펼쳐집니다. 깊은 곳에 내린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서 찢어질 정도로 많은 양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배에 탄 동료들에게 소리를 쳐서 동료들이 도와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정확한 타이밍과 정확한 때에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하고 애썼던 베드로의 마음에 허전함과 공허함이 가득찼을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일생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찾아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일생을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기에 지금도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을 찾아가십니다. 이 장면을 마태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간단히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는 베드로의 회개 사건을 좀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제자는 주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5절과 8절을 보시겠습니다.
5 시몬이 대답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써 곳곳에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번 더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너무나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물을 내리기 전에는 예수에 대한 호칭이 선생님, 랍비 수준으로 여겼는데, 이후의 고백에서는 하나님의 신적 권세를 지닌 주님으로 변화가 됩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인식하면서 자신이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너무나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존재론적 변화이며 인식의 변화입니다. 육신의 감각으로 인식하지 못하던 것을 인식하게 되는 변화이고, 인생의 주인이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역사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죄를 짓기로 결정하기 전부터 죄의 성향을 지닌 채 태어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는데 존오웬(John Owen: 1616-1683)입니다. 그는 17세기 청교도 신학자이며 설교가였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총장으로 있을때 '죄 죽임'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청소년들에게 신앙적 도전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청교도의 황태자로 불리었으며, 교회사의 영적 거장으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죄 죽임'에 대한 설교를 통하여 당시 경건이 사라지던 시대에 성도의 경건한 삶에 도전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우리 안에 죄가 소멸되어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통해서 죄 씻김을 받은 사람은 이후에 본성 안에 내재된 죄를 이기기 위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다른 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2장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사람은 자신의 분야에서 논리적, 학문적 지식과 실력을 갖춰도 보이지 않는 죄의 속성 때문에 한순간에 삶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때에 죄는 가치가 없는 것이 분명하지요. 죄는 소리없이 이성적 판단을 넘어 죄의 징후를 나타내는데 이를 방치하면 안됩니다. 성령께 맡기고 기도할때 성령께서는 죄를 다스리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인생을 존귀하게 빚어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대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래서 한번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는 구원을 잃어 버릴까봐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구원의 확신을 갖고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신학적으로 의롭게 선언해 주시는 칭의는 하나님의 편에서 하시는 일이며, 성화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열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통해 맺어가는 열매인 것입니다.
둘째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269번이 나오는데요. 당시 유대인들은 훌륭한 랍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랍비들을 따라 다녔습니다. 랍비들은 후보생들 가운데 자격을 얻는 이들을 추려내고 뽑아서 인재만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명성있는 교수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 여러 나라의 대학에 들어가서 학위를 얻는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방식은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찾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는 죄의 지배 아래 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당신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오.” 11 그들은 배를 호숫가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를 따라갔다.
주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님이 싫어하는 것들을 하나씩 끊어내 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기 위해서 마음대로 먹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의 옷을 입기 위해서 연습하다 보면 제자의 길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이 세상의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몬이 경험한 것이 무엇이며, 그 마음 안에 무엇이 채워졌기에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를 수 있었을까요? 자신이 죄인이니 떠나 달라고 했던 그 경외감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내면의 깊은 곳에 있던 죄의 본심이 주님 권세 앞에서 들켜 버렸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척 했지만 내면에는 의심과 반감으로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죄가 주님 앞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평생토록 배에 가득차게 고기를 잡고 싶은 욕망이 주님 앞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결과 앞에서 삶의 목적과 인생의 관점이 재형성 된 것이라 생각 됩니다.
오늘날 시대는 전문가도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신을 믿고 신을 따르는 것이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무신론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사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며 신이 없다고 믿는 것도 신이 있음을 반증하는 삶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장로 권사 집사 임직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의 복은 언제나 교회를 통해 흘러갑니다. 교회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된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이 보다 더 명예로운 일은 없습니다. 직분자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시고 성도들에게도 칭찬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할 때에 믿음이 온전해 질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합니다.
두배에 가득찬 고기들은 베드로가 평생 경험해 보지 않았던 풍성한 복입니다. 그런데 평생 기대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 주님 앞에서 이전에 복이라 생각하던 것이 영원한 복이 아님을 깨닫고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달라지니까 주님을 평생 따르기 위해 자신이 지고 있던 짐을 줄이는 것입니다. 순례자들의 가방은 무겁지 않습니다. 믿음의 여행은 주님을 믿고 가는 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살아갈때에 주님은 언제나 개입하셔셔 다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 한복판에서 주님을 따르면 영화롭게 되는 날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영화롭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요한복음 10장 27-29절 말씀을 한번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생명은 구원의 확신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죽을 때 까지 보호할 것이고,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은혜의 값을 경히 여긴다면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죽음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의무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이 명예로운 특권은 우리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고 애써야 할 위대한 목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인생을 살아왔다면, 이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영어가 편하신 분들은 영어 성경을 많이 묵상하시고, 한글이 편한 사람은 한글 성경 중에 쉬운말 성경, 우리말 성경도 이해하기가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일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구절은 여러 다른 성경을 비교해 가면서 묵상하다 보면 때때로 이해가 더 잘되기도 하고 주님께서 어느 순간 깨달아지는 은혜를 주십니다. 읽고 묵상하다가 보면 말씀이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들려옵니다.
예수의 성실한 문하생으로 배워 가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주를 따르다가 겪었던 미움과 박해도 영원한 기쁨과 생명을 빼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잠시 겪는 고난은 보이는 것들과 비교 조차 안되는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진리를 더 깊이 알게 될수록 진리의 힘은 우리를 죄로 부터 자유케 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용기를 지닐 때 그제서야 나를 따르라 부르시는 주의 음성이 또렷이 들릴 것입니다. 세상은 마음이 가난해 보이지 않으려고 겉으로는 행복한척 포장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포장해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과 상황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중요치 않은 삶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찾아 오셨고,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성취하려고 하면 완벽하게 실패할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 받는 교회가 되려면 한 사람, 한사람씩 제자의 행렬에 들어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둠속을 걷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은 이전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제자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더 화려한 건물, 더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며 제자를 세워가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보여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생명은 영혼이 주를 만난 사람이 또 다시 영혼들을 소중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가르치고 지키게 할때 하나님은 죄를 이길 힘을 더욱 더 부어 주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을 율법적인 일로 생각하지 마시고, 제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길이라 여기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제자들은 주님을 매일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자라감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주님 닮아가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곧 고기가 가득 찬 그물과 같습니다. 2천 년 전 게네사렛 호수 배 위에서 일어났던 시몬의 하나님 경험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마음 속에서 가지고 있는 욕심과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기적을 보았으나 모든 사람이 주를 고백하고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게네사렛 해변가의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자신의 팔로워를 늘려갑니다. 우리는 주님의 팔로워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팔로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오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자격이 있어서 크리스챤이 되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자의 길에 서게 되는 것이고 이미 들어선 것입니다.
때로는 환란과 핍박이 다가 와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해도 주님이 거하시는 그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선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성도들 곁에 주님은 지금도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를 따라가고 계십니까? 구원을 통해 얻는 영생은 길어야 100년이라는 인생의 숫자가 끝이 아님을 믿는 것입니다. 남은 인생은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두척의 배에 넘치도록 주신 은혜를 나눠 주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자도는 받은 은혜를 올바로 사용하기 위해 매일 십자가를 통해 보는 것입니다.
3/3/2024 | (사순절 세번째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말씀으로 이기신 시험 3' Overcoming the trials with the word of God 3
누가복음 4:9-13
사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말씀으로 이기신 시험'이란 제목으로 3주에 걸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요. 예수님은 광야에서 육체적 욕망과 높은 곳에서는 세상의 권력에 대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끈질긴 마귀는 이번에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예수를 데리고 갑니다. 성전은 유대교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믿고 예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은 이 성전을 찾았습니다. 마귀는 그 성전의 꼭대기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보호하실 것이니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한번 뛰어내려 보라'고 제안을 합니다. 정말 그럴듯 한 유혹입니다.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神性: divinity), 사람의 아들(人子, the son of man )로 성육신 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만 있으면 좋을텐데, 죄가 없는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니까 십자가의 사건을 죽도록 훼방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이뤄지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이땅에서 살아낸 나라가 될 것이고 성도들도 이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神性: divinity)을 증거합니다. 그 증거는 성경에 너무 방대해서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만이 소유할수 있는 신적인 권세를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고, 말씀으로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적은 떡과 물고기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셨고 자신을 팔자가 누군지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기록한 성경을 믿게 될때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해서 성령의 역사로 인해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다고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보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 낸 기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인간인 어머니로 부터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탄생하셔서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에게 잉태되게 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는 여자의 후손으로 부터 온 자가 마귀를 멸망시킬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창 3:15) 즉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어야 함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분 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은 당시 성육신의 진리를 부인하는 이단의 가르침이 심각한 문제였기에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을 부인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인자(人子, the son of man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가 86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 divinity)와 인성(人性)에 대한 신학적 교리는 여러분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어도 성경 그대로 믿는 것이 겸손이며,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지적 교만일 것입니다.
첫째,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한번 뛰어내려 보아라.
이단(異端)은 '끝이 다르다'는 의미로, 처음은 같은데 끝에 가서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단은 교주를 신격화시킵니다. 명품은 제품을 흡사하게 모방하는 유사품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 안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많은데요. 이단과 관련된 잊지 못할 뼈아픈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를 묵숨걸고 연구하고 파헤쳐 밝혀내던 현대종교 발행인 (고) 탁명환 소장은 1994년 2월 19일 이단 단체의 피습으로 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후에 그의 3명의 아들들이 뒤를 이어 이단에 대한 전문지를 발행하며 이단대책 사역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때 그의 아들 탁지일 교수를 초청해서 학교에서 세미나를 열었는데, 당시에도 해당 이단들의 속한 사람들이 찾아와 학교에서 열리는 세미나를 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관계로 결국 행사를 치르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 이단에는 교주들이 있어서 자신을 예수의 신성과 동일시합니다. 통일교의 문선명, 구원파의 박옥수,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신천지의 이만희, JMS의 정명석, 예수중심교회의 이초석 등 이단들은 일일이 다 열거 할수도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이단 단체 안에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교주들이 있습니다.
현대종교 연구소장 탁지일 교수에 의하면 요즘은 이단들이 사회 사업을 통해서 문화적 배경을 넓히고 있고, 경제적 뒷받침으로 기존의 교회까지도 통째로 접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교회의 잘못된 점을 고쳐야 한다는 미명아래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하고, 교회 안에 당을 짓게 하기도 하고, 교회보다는 자신의 개인에만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단은 성경의 진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책을 만들기도 합니다. 은혜의 교리나, 삼위일체의 교리, 그리스도의 위격(신성과 인성)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이기도 하고, 돈을 밝히기도 합니다. 주의 이름이나 성경적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남용하기도 합니다. 이단들은 유투브나 미디어를 통해서 포교활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합니다. 선교지에도 많은 이단들이 침투해서 신학교를 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속인 눈먼 돈으로 이단의 가르침을 주입합니다. 향후 이단 사상을 담고 있는 인공지능 챗GPT 프로그램도 개발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깨어 기도하며 바른 성경의 지식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건전한 신앙서적이나 간단한 신학교리를 설명한 책들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성경의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이단들의 말을 맹신하는 것은 다른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이제껏 일어났던 이단의 가르침을 다 합쳐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혹으로 부터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미혹하는 영을 경계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마귀의 3번째 시험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 위에서 한번 뛰어 내려 보아라.' 이 제안은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실테니까 사람의 아들로써 어려운 길을 가지 말고, 십자가를 지기 위한 뜻을 하나님의 아들인 신성(神性: divinity)으로 쉽게 이루라는 유혹일 것입니다. 이 시험은 예수가 태어나 유아시절부터 서른살 청년이 되기까지 고난 가운데 순종을 배우고, 성숙해져 가는 여정의 절정인 것입니다. 33년의 생애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실패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하고 여전히 우리가 실패한 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걸어 가신 좁은 길,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입니다. 주님은 기쁨을 바라보며 고통을 참으며 가시려고 하는데, 마귀는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은혜를 주려고 하니 다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 유혹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넓은길, 편안한 길, 고난이 없는 길로만 가고 싶어 합니다. 매주일 섬김의 자리와 헌신의 자리에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일은 피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않는 성도가 세상속에서 유혹을 이기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성도들이 주일날만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온전한 예배자로 설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순종하고 걸어 가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는 마귀는 그 길을 걷지 말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너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천사들이 너를 보호할꺼야 그러니까 천상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유혹합니다. 이 유혹 앞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엡1:22) 되셨습니다. 이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이뤄가게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 빚어 가시는 삶을 통하여,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을 통하여 서로를 살리는 삶을 이뤄가게 됩니다.
둘째, 마귀는 말씀을 변질시킵니다.
10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천사들에게 명하여 너를 보호하실 것이니, 11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지 않느냐?
마귀는 지금 시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께 제안을 합니다. 시편 91편11절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문제는 한번 뛰어내려 보라는 말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마귀는 그럴듯 하게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며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진정한 개혁이란 비난과 조롱하는 것을 멈추고, 교회를 다시 세워나가기 위해 성육신의 진리를 삶의 이야기로 써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우리의 마음과 몸을 내어 드리는 일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기도의 능력으로 지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성경을 가르치지만 성경의 교리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말씀 구절에 집요한 관심을 보입니다. '성경적'이란 단어만큼 애매한 것도 없습니다. '영적'이라는 단어도 내 믿음의 방식을 포장하기 위해 붙이는 수식어가 아닙니다. 원조 맛집이라고 홍보하듯, 마치 기업과 회사를 홍보하듯 '영적, 성경적'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붙이고 사용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연합되어지는 일은 평생을 통해 지속하는 일입니다. 한순간 초월적 경험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매일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행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맺은 사랑의 언약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세상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 안에서 끝까지 신뢰하고 하나님께 삶을 맡기는 겸손함을 지녀야 합니다.
미혹의 뿌리는 대부분 두려움에 사로잡혀 유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채 망치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의인인양 살아가는 자리에 서 있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는 이유는 보여지는 것 자체를 숭배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문자주의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록될 당시의 배경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자에 국한된 해석이 아니라 성경과 전통, 이성과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이성은 우리를 잘못된 해석에서 보호해 줍니다. 신앙적 경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도록 성령께서 함께함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신중하게 연구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한 복음, 온 민족을 향한 신학, 온세상을 향한 구원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함으로 구원의 깊은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천년 교회의 전통속에서 내려온 신앙의 유산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음악과 예술의 세계를 공부하는 이들이 이론을 넘어 심층적인 세계가 더 깊어 지듯이 믿음생활을 통하여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성육신의 신비가 더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사순절기에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나 두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공격하지만 주님은 네가 이미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깊어지기 위해서 실패하지 않는 연습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연습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다듬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 여기지 않으시고 친구라 부르시는데 그 안에 구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10분만 투자해도 매년 66권의 말씀을 한번은 완독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셋째, 마음의 확증이 있어야 시험도 끝이 납니다.
13 이처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당분간 예수를 떠나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맛사'라는 지역에 장막을 쳤습니다. 도착한 지역에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마음에 혼란과 불평의 마음이 찾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잊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 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시험은 주께서 마음안에 계심을 확증할때 끝이 납니다. 어린아이는 울다가도 엄마가 오면 금새 울음을 그칩니다. 부모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오는 것이지요. 주님이 내 곁에 계심을 마음으로 확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요즘은 부모들이 자녀의 주체성을 길러주고 인격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신앙도 스스로 선택하라도 하는데, 신앙교육은 자녀들이 어려서 부터 바른 믿음을 형성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도록 학습시켜야 합니다. 마음 안에 주님이 계심을 영접하게 되면 인생의 힘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실패의 순간에도 일어설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지니는 것이고, 부모의 손길이 미치는 않는 장소에서도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기에 죄의 유혹을 이길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예배하는 습관과 기도생활에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매일 기도로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게 할때는 자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주안에서 누리는 신앙체험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죄로 인해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말씀을 통해 마음의 확증이 생겨나면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됩니다. 찬송가 545장을 지은 쿠싱목사는 아내를 잃고 8년이 지난 어느날 오직 주님만을 따르며 주의 영광만을 위해 살기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단을 마음에 담아 가사를 써 내려갑니다.
"1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2 이 눈이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없이 살아갈때에 우리소원 주안에서 이루리 3 주님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자에게 능치못할 무슨일이 있을까 "
믿음은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판단을 최종적인 결론삼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달라지니까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믿음이 형성되고, 믿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의 기도는 의심을 사라지게 하고, 시험을 이겨내는 방패가 됩니다. 3주에 걸쳐 전한 인간의 탐욕의 시험, 세상의 명예와 권세에 대한 유혹,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믿음의 유혹들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열매를 거두는 증거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루 하루의 삶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주의 사랑을 확증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빚어 가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2/25/2024 | (사순절 두번째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말씀으로 이기신 시험 2' Overcoming the trials with the word of God 2
누가복음 4:5-8
사순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말씀으로 이기신 시험'으로 설교를 전하겠습니다. 사순절기 가운데 시험을 이기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도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데, 첫번째 시험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빵을 돌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자신의 능력으로 돈이나 나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욕망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끊임없는 유혹은 믿음의 성도들도 받을 수 있고,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을 볼때마다 보이지 않는 식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살아가자고 권면했습니다. 예수께서 마귀를 물러가게 할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날 다가오는 빵인가? 말씀인가?라는 유혹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며 살아보자고 했습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주며, 자신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처리할 수 있음으로 현혹하더니 자신에게 경배하면 모든 나라를 다스릴 권세와 영화를 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바실레이라 투 데우’라는 헬라어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다스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한순간도 통치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한 세상은 폭력적이고 혼돈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힘과 권력을 갖는 자가 살아남게 되는 시스템의 지배 아래 세상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귀의 이 유혹에 다 넘어 갔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은 매우 현실적이고 아주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만이 아니라 창세기를 보면 도시문명을 이룩하기 위한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바벨탑을 쌓아 올립니다. 바벨은 고대 근동에 있던 다른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큰 신전으로 신들의 왕국에 도달하기 위해 설계된 계단식 탑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쌓아 올린 바벨의 도시가 보기에는 거대해 보였지만 높이 계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마치 땅에 사는 개미들이 쌓아 올린 흙으로 올린 집에 불과했지요. 창세기의 기자의 말씀이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 오셨다. 라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11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땅 위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와 쌓아 올린 망대를 바라보셨다.”(개역개정)
힘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바벨의 신전을 높이 쌓아 올렸지만 하나님은 더 높은 곳에서 너희가 지은 탑을 한번 보자꾸나 하고 내려 오신 것입니다. 하늘 높이 이륙한 비행기 위에서 한번쯤 우리가 사는 도시를 내려다 본적이 있으실 겁니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높은 건물도 점 하나에 불과합니다. 작은 물체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의 권력은 길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을 절대화 하려고 했던 제국의 역사들을 보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영화는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춘몽 (春夢)에 불과합니다.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의 유혹은 어둠의 세력에 해당하는 일부 권세를 지니고 있기는 합니다.
고린도 후서 4장 4절을 보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허락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마귀가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화가 자기의 권세 아래 있어서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하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영원한 권세와 나라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설 것이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메시아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데 그 능력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경제, 사회, 무역, 국가 간의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과 보이는 전쟁들은 인간의 죄성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전쟁은 불신과 분열을 야기시키며, 힘이 없는 이들은 상처와 좌절,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며 세상의 권력이 사람들의 우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높은 곳으로 올려 놓고 땅의 것을 내려다 보며 세상의 권세와 영화를 줄 것이라 유혹합니다. 이 마귀의 소리는 땅의 것에 마음을 두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것입니다. 사순절기 40일 동안 시험 받으시며 이기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참된 지식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창조적인 권력이 파괴하는 권력을 이깁니다.
8 예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제국의 질서는 지향하는 방향이 다릅니다. 힘이란 것은 그 자체가 지닌 억압과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파괴하는 권력과 창조적인 권력이 양립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유혹을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으로 이겨 내셨습니다. 창조적인 권력이 파괴하는 권력을 이깁니다. 어떤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며 경험하지만, 어떤 이들은 경험을 하지 못해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데요. 창조적인 힘은 사람을 변화시키어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창조적 권력을 경험했습니다. 실제 그의 삶을 보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 성실하게 일을 하다가 여주인의 모함으로 누명까지 씌어져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당시 감옥은 지하 깊은 곳이라 햋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차가운 감옥에서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요셉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정확한 타이밍에 더 큰 지위에 올려 당대 최고의 나라의 권세의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때 요셉은 자신이 지닌 권력으로 복수하기에 더 없이 좋은 위치였습니다. 때마침 기근으로 인해 자신을 팔았던 형들까지 제 발로 요셉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힘을 사용해 복수가 아니라 화해를 선택합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의 파괴하는 권력은 요셉이 발휘한 창조적인 권력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지난 미국의 역사만 보아도 피한방울 섞일 수 없었던 백인과 흑인의 관계는 창조적 권력을 사용한 정치가들로 인해 흑인들은 존재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속에서 흑인들은 비인격적이고 부당한 대우와 불합리한 폭력을 겪어야 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된 성경 위에 세워진 미국사회속에서 흑인들은 원수의 범주 안에도 없는 천한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권력은 예수를 통해서 은혜 아래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잡는 악한 자들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파괴적인 힘에 눈을 뜨는 연령층이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돈의 힘에 눈을 뜬 어린이들의 범죄가 늘어나고, 학교 폭력과 따돌림의 현상들, 교칙의 질서와 가르침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현상들은 힘이 지닌 위험성들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관계속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도 하고 힘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 힘을 다른 이들의 삶을 착취하는데 사용하느냐? 다른 이들을 이끌어 주고 섬기는데 사용하느냐입니다. 진리의 힘을 잃어버린 채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죽은 물고기처럼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힘이 지닌 이러한 위험성을 이길수 있는 방법은 인간 안에 선하게 조절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권력은 돈으로 살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부어지게 될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해 주신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풍속을 쫓는 파괴적인 권력을 이겨 나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시다는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제국 문화 아래 종으로 살던 백성들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다.”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은 하층 계층의 사람들은 접근하기 힘든 신들이었던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아파하는 신음소리에 응답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통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가셔서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고 구체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곁에 함께 계시며 자기 백성을 삼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 약속의 첫번째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 즉 다른 신을 마음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랑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 공동체는 당시 고대 중동 지역의 제국주의 공동체와는 다른 세상의 대안 공동체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농경사회속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에게 떨어지는 이삭 등은 줍지 말라는 규례나 자기 밭이 아니어도 포도와 이삭을 먹을 것을 허용하도록 정하셨고, 땅의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서 있음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아들임으로 다른 나라들과 구별된 존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왕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에도, 다른 나라의 왕들이 되어지는 과정과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기름 부으심으로 왕을 세우셨습니다. 이후 왕정시대에는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다른 나라 왕과 같이 되어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조의 영원함과 메시야 오심은 다윗이 의롭거나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다윗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말할 수 없는 큰 죄를 범죄했을 때에 죄를 은폐하려고 했지만 나단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죄에 대한 값으로 왕국은 분열되고,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회복 시키시며,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심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학교와 일터의 현장에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은 세상속에서 다른 존재를 살아가게 하십니다. 온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낯선 땅에서 수도 없이 무너졌을 영혼들의 마음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온전한 복음으로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지켜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사순절기를 통해 주님을 향하는 노래가 더 깊어지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도 원수들의 한복판에서 그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셨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를 사랑했던 모든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홀로 남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원수 된 이들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며 세상의 유혹이 있으나 믿음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오히려 유혹의 자리로 나가셨습니다. 유혹의 자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사단은 매력적인 환상으로 예수를 세상의 명예와 영화의 자리로 끌어 당겼지만 예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때에 이집트에서 구원받아 나온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옛습관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는 이집트의 화려함이나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아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준비해 나온 자신들의 양식이 다 떨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40년 동안이나 먹어야 했으며, 광야에서 터져 나오는 샘물을 마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선택되고 하나님과 계약 공동체로 언약을 맺기까지는 그들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취한 것은 교만의 죄였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기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가나안의 풍요의 신들에게 눈이 멀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을 선택한 결과 역사속에서 또 다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세상이 말하는 돈과 권력과 명예가 더 힘이 된다고 말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 보호를 요청해야 합니다. 죄악의 권세를 이기신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십니다. 죄가 없는 예수께서 하늘의 능력을 포기하고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고통속에서 밤을 새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하나님을 예배하고 전심으로 섬기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 공중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권세와 영화에 현혹이 될 때에 그 힘은 가정이나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파괴적인 권력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로마시대는 군사적인 힘을 통한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제국의 힘의 의해서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다른 소수민족들에게는 절망적이었습니다. AD 70년 디도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 소수민족은 나라를 잃어 버리고 세계로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는 은혜를 선물 받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다스림인데, 예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평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에 의해 무너진 성전을 예배하는 이들의 마음 안에 다시 세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나라의 질서 안에서 역사하는 힘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으로도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룬 정책적 평화는 기울어진 방편일 뿐입니다. 오직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 분만을 섬기라.’ 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가운데 자신의 능력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예배하셨습니다.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탕감 해 주시는 은혜는 우리가 경험한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현대사회의 힘의 논리를 부정하며, 세상 권세와 영화의 유혹의 자리에 대항하게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우상으로 스타가 되고자 한다면 '스스로 타락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는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타인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예배하는 성도들이 주께 힘을 얻는 놀라운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의 삶으로 '말씀으로 이기신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2/18/2024 | (사순절 첫번째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말씀으로 이기신 시험 1' Overcoming the trials with the word of God 1
누가복음 4:1-4
사순절기가 시작되고 첫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연습의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다 언급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절기가 시작하는 시기에 이 본문을 예배 때 낭독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육체적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는 과정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40일 동안 순례길을 걷기로 결단한 교우들에게 말씀이 채워지리라 믿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충만해 졌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마귀의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왜 마귀와 영적전쟁을 해야 했을까요?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경은 마귀의 존재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시험 받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첫째, 구원받은 성도들도 마귀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유혹을 받게 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즉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죄의 뿌리의 대상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것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인간을 유혹하는 일들이 있었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유혹의 근원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현대사회는 보이지 않는 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천사나 마귀의 실존을 부인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믿을 수 있는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천사나 마귀는 비물질적 존재입니다. 마귀의 기원을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들이 심히 좋았던 동산에 뱀의 형태를 한 마귀가 하와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유혹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께서 성령에 충만한 상태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이 언급하는 마귀의 활동을 말씀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분쟁의 요인들을 보면 과거에 비해서 그 형태와 원인도 더 다양해 졌습니다. 기업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임금으로 인한 분쟁, 환경보호와 개발 간의 충돌로 인한 분쟁, 민족적 차별로 인한 폭력과 혐오 발언으로 인한 분쟁 등 정치 사회 문화속에서 분쟁의 요인들은 더 많아졌습니다. 인간의 이기주의나 자기 중심적 생각도 해결할수 없는 여러 갈등적 요인이 됩니다. 오히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유혹에 빠지게 하기도 하고,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들로 인해 인간의 배려와 조화, 균형 잡힌 생각을 이기적이고 독선적으로 형성시켜 갑니다. 진리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인데, 진리까지도 내 소유라고 생각하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기 보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혐오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신앙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처럼 현대사회에 마귀의 활동이 줄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귀의 특성은 죄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성경에 마귀는 뱀(창 3:1,14) 바알세불(마 10:25), 세상의 임금(요 12:31)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악한 자(마 13:19) 등으로 불리웁니다.
오늘 본문에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40일 동안 계속해서 시험을 합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을 3가지로 알고 있지만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셨다면, 아마도 여러 종류의 시험들을 더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보여 주는 3가지 시험은 우리가 겪게 될 시험을 대표로 하는 상징적인 것들이 됩니다. 금식을 하고 계신 예수님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보고 느낄수 있는 시험입니다. 인생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예수께서도 받으신 시험의 종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땅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우리의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이러한 유혹은 늘 있습니다. 더 잘 믿으면 더 외로워지는 세상입니다. 말씀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믿음도 우리의 삶을 더 곤고하게 합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뛰어 내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그의 사자들로 하여금 너를 받아들이게 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말씀으로 대응하셨지만 우리들은 현실의 압박과 환경에서 늘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거나 세상속에서 타협하고 숨어버립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마음 안에는 늘 불안과 공허함이 찾아 옵니다.
마귀의 공격은 예수의 사역 전체를 통해 계속됐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시대나 새언약 시대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 임금이라 불리는 마귀의 활동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는 우리도 날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예수를 닮아가는 자리가 아니라 시험하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충만했다면 마귀가 접근하지 못하는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충만한 예수를 유혹하는 마귀는 오늘날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도 유혹의 대상으로 삼을 것입니다.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에 성령의 충만한 순간에도 우리는 유혹 받을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시험을 이겨 나가는 것이 믿음생활에 찾아온 시험을 이겨 나가는데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우리가 늘 마주하는 가까운 관계들 안에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사순절 영적 절기를 보내며 홀로 있는 예배의 자리가 익숙하신 분들이라고 해도 여러분의 성경책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영적 여정을 걸어가십시오.
둘째, 예수께서는 마귀를 물러가게 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유지하며 자신의 믿음을 깊이 살펴 보는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고 대적합니다.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하도록 시험했었고, 예수님도 시험하여 메시아 사역을 실패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시험 받게 되는 이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히 2:18)
성도들은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귀로 하여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죄를 지속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곳이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치명적인 영역이 될 것입니다. 내게 실망을 주는 환경이 때때로 나를 어렵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진 환경을 이길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세상에 오셔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아버지께로 부터 오신 예수를 악한자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1서 5:18) 죄에 대한 책임은 잘못된 것을 지속하려는 우리의 선택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육체적 삶과 성령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인 증거들로 로마서 6장과 갈라디아서 5장을 통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에게 주님은 죄를 지배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고, 바울도 전도사역 중에 점을 치던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는 영적 권세를 사용했습니다.
예수의 시험은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예언의 완성이며, 메시아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망의 세력은 패배하고,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시험을 받으신 이가 능히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고, 죄가 더 이상 다스릴 수 없도록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마귀를 두려워 할 필요없이 하나님께로 부터 다시 태어난 자녀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유혹이 올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마다 말씀으로 이기셨음을 기억하시며 영적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유혹과 시험 앞에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 조차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일들로 사람들을 두렵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진리를 알아가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믿음의 확신 가운데 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의 문제나 마귀와 싸우는 일에 지나치게 호기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에 더 매진해야 합니다. 선하신 형상을 따라 세상속에서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지배 안에 있도록 마귀가 유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있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2천년 전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에게서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인생을 맡기며 복음이 없는 자에게는 복음을, 복음이 있는 자에게는 사명을 주어 사도행전의 후속편을 써 나가라는 것입니다.
셋째, 빵인가? 말씀인가?
우리가 잘 아는 3번의 시험의 과정 중 첫번째는 빵인가? 말씀인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선택 앞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채워야 할 무엇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과시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도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사단의 전략이 예리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빵을 돌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보라고 들려지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이 생겼을 것입니다.
게다가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주변에 돌들이 빵으로 보일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이 있는 것을 선택 할 것입니다. 물론 빵으로만 살수 없다는 것은 물질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목적이 된다면 자본주의 시대에 빵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거나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불의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기에 물질을 비유로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사역속에서 언제나 세상의 것을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이 빵은 내 몸이니 너희가 먹을 때 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은 빵을 비유로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할 것임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이다.”(요 6:51)
예수님은 구약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마 4:4)
요즘은 여가를 위해 인생을 즐기고 멋지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좋은 지 너무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맛집을 찾아가기 위해 몇시간을 달려가는 열정이 있지만 예배의 사모함은 줄었습니다. 익숙한 현장에서의 은혜는 이제 시시해 져서 더 크고 더 환상적인 은혜를 기대하기만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그럴듯하게 가지고 있지만 일상의 헌신과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소극적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존재하는 우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에 창조주에 대한 열망이 있는지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맘몬의 우상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살피며 십자가를 통해서 내 삶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앞에서 보이지 않는 식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기념해야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 받은 후에 광야에서 먹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였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 말씀 대신에 각자의 삶속에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갖기 위한 욕구로 인해 허기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채워진 말씀이 성도들의 삶에 나눔과 사귐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빵으로 둘 것인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유혹의 목소리를 매일 듣게 됩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면 예수님의 말씀은 유혹의 소리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광야의 시기를 걷고 있다면 시험을 이기신 예수의 믿음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인 셈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빵으로만 살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사순절기에 십자가 앞에서 끝없는 우리의 욕망을 깨닫고, 삶의 신비에 눈을 뜨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기를 보내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의 삶에 오늘의 양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