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5/26/2024 | (성령강림후 제 1주, 야외예배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5 자연속에서의 예배 Worship in Nature
시편 133편 1 – 3절
오늘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느끼며 모든 교우들이 홉킨튼 공원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야외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더 많은 수고와 섬김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수고해주신 모든 교우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창조의 신비가 담긴 자연 속에서 공동체와 함께 좋은 추억을 쌓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시편에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주 속에도 계시고, 자연 속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계시가 자연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언어나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피조물에 제한받지 않고 보편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계시입니다. 온 우주를 운행하는 크신 하나님에 비하면 인간은 한 점과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자연 속에서 깨닫게 되면 삶에 감사가 회복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줍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보채거나 서두르게 하지도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편안함을 얻기도 하고,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몇몇 뜻있는 분들이 한국과 세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배출하자는 비전을 나누며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7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배웠고, 지금도 이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감사와 자부심을 느끼게 합니다. 매주일 모든 교우들이 함께 연합하고 교제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렇게 자연 속에서 사귐의 시간을 보내며 주안에서 이 교제를 몸으로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0년 동안 방치되고 빼앗겼던 언약궤가 성소에 다시 안치되며 드리는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오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지파와 민족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연합을 경험합니다.
1 형제가 서로 어울려 한 마음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그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가!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생활이 무기력해지고 침체에 빠지는 것은 교제의 생명력이 상실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이루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같은 팀을 만들어 목적을 성취해 나갑니다. 인간은 여러가지 방식들을 통해서 서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고 뜻을 달리 하는 이들과의 연합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류속에서 연합을 외치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분쟁과 다툼은 끊이질 않습니다. 서로가 감정적, 이성적, 현실적으로 옳고 그름으로 연합되어질수 없습니다. 다윗은 빼앗겼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회복함으로 진정한 연합을 이루게 됨을 노래합니다.
2 그것은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에까지, 곧 아론의 수염에까지 흘러서, 그 수염을 타고 또 흘러내려서 그 옷깃에까지 흘러내리는 것 같고,
첫째로 거룩함이 연합을 이룹니다.
'보배로운 기름'이라는 표현이 어떤 뜻일까요? 기름은 성소와 성물을 구별하는데 사용된 재료입니다. 이 기름은 아무나 만들 수 없었고, 아무데나 사용하지도 못했습니다. 제사장이 임직하게 되거나 성물들을 구별할 때에 사용했습니다. '아론의 수염에 까지 흘러 옷깃에 까지 내려간다'는 말은 대제사장의 성직이 이뤄질때 부었던 상황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 주시고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형제가 거룩함으로 함께하는 것이 성도의 사귐입니다. 진정한 연합은 윤리나 미덕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단이나 노력, 의지로 되지도 않습니다. 연합을 하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연합은 기도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통하여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지만 세상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배출하는 사명을 분명히 하고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아름다운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가기 위해 거룩함에 기반을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세상속에 큰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지친이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공간이며 낯선땅에서 외로워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품이 되는 고향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공동체의 연합은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고, 지친이들의 그늘이 되어 줍니다.
둘째로 시온의 복은 영생입니다.
3 헤르몬 산의 이슬이 시온 산 위에 수북이 내리는 것 같도다. 주께서는 그 시온 산에서 복을 베푸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로다.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자 하나님의 공동체가 함께 예배하는 장소였습니다. 다윗은 시온이 복을 명하신 곳이며 영생의 복이 있는 곳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헤르몬 산의 이슬이 시온 산 위에 수북이 내리는 것 같도다'라는 표현은 큰 은혜과 축복을 상징합니다. 헤르몬 산은 해발 2,770m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최고의 산입니다. 건조한 사막에 헤르몬 산으로 부터 내려오는 많은 양의 이슬이 흘러 팔레스타인 지역에 요단강을 이룹니다. 다윗은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흘러 넘쳐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하늘에서 내리는 강수량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헤르몬 산의 이슬같은 엄청난 양의 은혜와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복을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은 죽음조차 빼앗아 가지 못하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매주일을 정하고 예배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꾸 편하게 살라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옳은 길로 가며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헤르몬 산 위에 내린 이슬이 흘러 내려오듯 하나님은 세상에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흘려 보내도록 낮은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내 마음의 울타리와 담을 높게 쌓아올리며 살아가지만 교회는 나의 목적과 유익을 위해 쌓아 올린 마음의 담을 허물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본 시편이 성전 순례시가 된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는 것은 성도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이상입니다.
이 소중한 시간을 통해 우리가 함께 걷는 믿음의 걸음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시온에서 모여 예배한 백성들의 기쁨은 세상이 모방할 수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통하여 넘쳐 나기를 축원합니다.
5/19/2024 | 성령강림절
건강한 교회 시리즈 14 성령의 공동체 Community of Holy Spirit
사도행전 8:14, 17-25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50일째 되는 날 성령의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적색스톨은 성령의 불과 십자가 보혈을 상징합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 마음안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역사는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약속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복음의 증거자들로 흩어져 증인이 되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할때에 교회가 시작되었고 성령이 임한 후 교회는 흩어졌고, 흩어진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의 소식은 확장되었습니다. 건물 중심적인 교회는 모이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됩니다. 교회는 거대한 역사 가운데 형성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변화받는 개인의 이야기들이 모여서 교회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 부터는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을 넘어 사마리아 지역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종교와 우상숭배를 수용하고 혈통적으로는 혼합민족이라서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경멸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땅은 밟는 것 조차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경계가 무너지고 그토록 경멸하던 사마리아 지역에까지 복음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복음을 확장시켜 나가는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박해속에서도 복음은 확장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스데반이 돌맹이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를 계기로 핍박이 더 심해지고, 이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제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 가운데 고난을 통한 흩어짐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론의 핵심이 고난에 있는데,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다만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의 죄로 인해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죄에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분리된 삶의 모습이 고난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에 죄에서 자유로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써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전에는 죄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았는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믿고 살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 받은 성도들도 여전히 고난을 겪게 됩니다. 이는 고난이 죄와 깊은 관련이 있지만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바울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행렬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17절을 보시겠습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개선장군들은 전차를 타고 로마 시내로 행진하여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행진하는 길은 승리의 제사를 드리는 타오르는 향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들을 잡아 뒤에 세워 승리의 행렬을 이끌었는데 행진이 끝나면 포로들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개선행진 대열 끝에 서 있는 포로들에게 이 향기는 죽음의 냄새일 것이고, 승리한 군사들의 몸에는 전쟁의 상처가 남았지만, 그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이미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에 비유했습니다. 성도들의 고난은 이미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안에서 겪는 고난은 성도들이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증거가 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삶으로 그리스도를 그려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힘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뤄진 나라이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받고 살아가지만 어디까지나 첫열매이신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일 뿐이며, 종말의 때에 완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을 초월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며 얻게 된 흔적이 있다면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난 영광일 것입니다. 보냄을 받는 성도들은 보낸 자를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고난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니 복음이 증거되는데 고난이 없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견딜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빌 클린턴의 영적 멘토로 유명한 토니 캄폴로 목사님에게 한 여인이 찾아와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저희 남편이 암에 걸려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병이 치유되기를 기도해 주세요. 토니 목사님은 남편이 치유되어 가정이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주일 뒤 여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희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셨지요? 그리고 여인은 남편이 오늘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말을 할지 망설이던 목사님에게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제 남편은 그동안 분노에 차 있었어요. 하나님을 저주하기도 했고, 가족들이 찾아와도 상처주는 말만 잔뜩하고는 등을 돌려 버렸어요. 그런데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한 그날부터 남편의 그런 행동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데 남편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느낄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3일전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웃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으며 남편을 하늘나라에 보낼수 있었습니다.남편이 건강하게 되진 못했지만 영혼이 치유되었으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마음의 방에 마음의 얼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죄함, 자책감, 두려움, 외로움, 분노와 편견, 완벽주의, 질투, 후회 등의 감정이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게 합니다. 남편을 떠나 보내며 영혼이 치유되었다고 고백한 여인의 말에는 하나님을 만난 영혼의 기쁨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령은 죄에 묶여있던 마음에 찾아 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께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 임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이 차별받고 경멸받던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였다는 소식이 이를 증명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복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겨졌는데 성령은 이러한 생각을 변화시켜서 복음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도하자 믿는 사람이 많아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도들에게 들렸습니다. 14절을 보시겠습니다.
14 한편,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성읍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자,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으로 보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안수기도를 해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을 지나치게 해석해서 안수해야 성령님이 오는 것으로 여기며 안수만을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안수 자체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사도들의 안수로 인해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는 기도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었기에 사마리아 지역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은사 주의자들은 은사를 예수님을 믿는 것과 다른 차원으로 여기며 지나치게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에는 거듭남의 체험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신앙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변화시키는 주님을 실제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령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빌립이 전도할때 부터 유난히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마술쟁이 시몬인데 그는 스스로를 큰자라고 여겼습니다.
9절로 11절을 보시겠습니다. 9 ○ 한편, 그 성읍에 여러 해 동안 마술을 부리며 살아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인물인 양 행세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10 그래서 성읍 사람들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그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하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다.’라고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11 이처럼 시몬이 신기한 마술로 오랫동안 그곳 사람들을 놀라게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
오늘날 혼합주의 신앙은 무엇일까요?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시대에 돈을 목적으로 살아가면 신앙이 하나님과 혼합되어 집니다. 돈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목적과 수단이 바뀌면 혼합주의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돈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에 도전하여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일평생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도와 주십니다. 또한 지속할 믿음의 동력이 약해졌을 때 새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18 마술사 시몬도 그 광경을 보았다. 사도들이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는,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내밀면서 부탁했다. 19 “내게도 이런 능력을 주어,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게 해주십시오!” 마술쟁이 시몬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로 성령이 임하는 표적을 보자 자신도 그 능력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는 돈을 주고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술쟁이 시몬은 성읍에서 자칭 큰자라 여기며 살았는데 성령의 능력을 받고 더 큰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돈은 하나님 보다 높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보다 앞설 수도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돈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교회 다니며 예배를 드려도 여전히 신앙의 목적이 잘 살아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모든 일들이 잘 풀리는 것에만 둔다면 믿음은 갈수록 미신화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믿음의 결과일수는 있지만 믿음 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영적이다'라는 것은 통합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가치와 몸의 부활을 함께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구원을 통한 복도 함께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새생명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죄로 부터 자유케 하시고, 고난을 이길 힘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릇된 생각은 신앙 공동체의 질서를 깨트리고 매우 위험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깨달음으로 인간 본성의 자기중심성과 돈을 우상화하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딤후 3:1-2)
성령님은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 없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선한일 행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20 그러자 베드로가 시몬을 꾸짖으며 말했다. “감히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 하다니, 당신은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21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올바로 쓰지 못하니, 당신은 이 일에 아무런 상관도 없고 또 얻을 것도 없소. 22 그러니, 당신은 속히 악한 생각을 뉘우치고 주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런 악한 생각을 품었던 것을 용서해 주실지도 모르오. 23 내가 보기에, 당신은 마음이 뒤틀려 있고, 죄에 사로잡혀 있소.”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교회가 세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세상적 가치, 능력주의, 결과주의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할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그의 악함을 회개하라고 촉구하며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 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이들은 주님을 영접할때 한번 회개했으면 회개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릇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한번 목욕했다고 해서 몸을 씻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 강림절을 맞이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고 싶은 마음을 부어 주십니다. 주안에서 잘 지낸다는 것이 재정적, 물질적 번영을 이루고 아무일 없이 평안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다 보면 손해 볼 일이 있습니다.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에게 이미 주신 성령은 우리를 지키고 영원토록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서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구원받을 사람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성령 강림절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기대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여지고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기억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5/12/2024 | 부활절 일곱번째 주일, 졸업예배, 어버이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3 고난의 공동체 Community of Suffering
요한복음 15:18-20
우리교회는 전통적으로 매년 어버이 주일과 졸업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졸업은 새로운 삶의 문을 열고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올해도 졸업하게 되는 학생들은 총 44명입니다. 그 동안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는 이들의 삶을 축하하고 축복합니다. 학업의 현장에서 꿈을 위해 걸어가며 그 모든 과정을 마치기까지 기도해 주신 부모님의 마음을 잊지 마시고 이곳에서 함께 한 믿음의 여정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어머니의 기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네 어머니의 기도는 자녀를 살게 하네 어머니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으리 어머니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네 눈물로 뿌린 기도의 씨앗 기쁨의 열매로 거두리 눈물로 뿌린 기도의 씨앗 하나님 기억하시리 자녀의 삶에 열매 맺으리 시들지 않는 꽃 피우리 환경을 넘어 역사하리라 하나님 열매 주시리" 어머니라는 이름은 불러만 보아도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특별히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며 부모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진실한 믿음의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전하는 고별설교의 일부분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아갈때에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오늘 본문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이란 조건문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세상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반대였습니다.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미워하였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세상은 로마 황제가 숭배의 대상이 된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적생명을 지닌 성도들은 로마 권력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 보다 나를 먼저 미워했음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박해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됨으로 명확해 졌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적대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질적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과 정직함을 추구한다면,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불편함을 겪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소비주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쇼핑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 검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돈이 우상이 되어 숭배의 대상의 자리에 있습니다. 돈은 지배구조적 사회속에서 힘이 됩니다. 자신의 방법을 추구하며 힘을 강화하는 사회속에서 죄는 관계 안에서 파괴력을 지닙니다. 이 죄는 도덕적 윤리적인 차원의 죄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반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죄의 열매를 보며 죄라고 여기지만 성경은 근원적인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듣고도 거부한 자의 죄는 핑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말할수 없는 복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오히려 마음의 이기심으로 인해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21 세상 사람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는 이유로, 너희를 그런 식으로 핍박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 만일 내가 이 땅에 와서 그들에게 사실을 일러 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와서 일러 주었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른다면 그 속에서 생명을 지닌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지나온 교회 역사를 보면 고난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뜻이 있음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거룩한 공동체로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후대에 거룩한 공동체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을 보아도 복음전파하는 사역 가운데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이전의 삶의 가치와 지향하는 길이 완전히 변합니다. 이전에는 세속적 가치로 살아도 갈등이 없이 자연스러웠는데 예수님을 따르게 되니까 어둠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어 불편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의 뿌리가 달라지면 믿음의 열매가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속해 있으니 죄의 열매를 맺으며 자기의 것을 사랑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19 만일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너희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그토록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에 큰 영향을 미친 두 형제가 있습니다. 라인홀드 리버와 리차드 리버입니다. 동생 리차드 리버가 쓴 책 가운데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고전은 기독교의 종교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대립, 소속, 상위, 변혁, 역설 등의 표현으로 다섯가지 유형을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이 복음의 내용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하는 고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오늘날 인본주의 문화와 세상속에서 어떤 유형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점점 더 인간의 삶과 인간의 성을 상품화 하는 문화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은 세상의 불의와 악에 동조하지 않고 세상의 문화에 지배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해서 여러가지 유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시대에 직면한 현실적 문제들 과 미국 문화 속해서 그리스도는 어떠한 관계 가운데 있습니까?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날 세상은 초대교회의 상황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 졸업을 하고 우리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몇가지 단어들이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현대사회를 불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께 속한 믿음은 신앙인들의 중요한 가치라 생각됩니다. 이 믿음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 안에는 나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내가 바라보고 원하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가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또한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아버지께로 부터 온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요한 일서 2장 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믿음은 내가 이루고 싶고 잘 되기를 구하는 간절한 소망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삶으로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 방식은 누군가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 함께 하는 가족들과의 방향. 여러가지로 정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가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생의 기준임을 믿고 행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삶에 근심이 사리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삶속에 곤고한 마음이 찾아오지만 성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날 힘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는 방법은 초월적인 방법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환란 가운데 인내를, 인내를 통한 연단을, 연단 가운데 거룩한 소망을 이뤄 가십니다. 인생의 길을 걸으며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갈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언제나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더 나아가 인생을 살며 핍박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깊은 신앙의 차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바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숱한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가난과 궁핍함, 슬픔과 핍박이 성도들의 믿음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필요한 존재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며 마음안에 설레임과 두려운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선한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여러분은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은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애쓰고 구한다고 여긴다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얻게 되는 상처나 실망, 이유없이 받게 되는 고난에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고 약속한 성령이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원리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둘째, 주님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복음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이 되었고, 그 은혜는 낮은 곳에 임하게 됩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낮은 곳에 임하는 은혜를 망각하고 지나친 욕심과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세상의 화려한 것을 찾고 무한한 욕망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이제 기도의 방향을 바꿔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것을 삶의 태도 삼으시기 바랍니다.
반 고흐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 비극적인 화가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에는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결을 갈망하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예배 드리는 회중'(Church Pew with Worshippers)이라는 그의 그림을 보면 턱을 괴고 자고 있는 여인, 피곤함에 지친 여인, 고개를 떨구는 회중들의 모습속에서 노동자, 소외된 이들의 고단한 삶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그림이 당시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지만, 현대사회 불안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듯 합니다. 자신의 시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고흐가 남긴 그림과 편지들이 후대에 와서 그의 삶을 다시 재조명하게 되는 것은 한 사람이 그의 소명을 따라 산 예술의 힘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삶의 낮은 길로 가기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한없는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나를 핍박한 사람이라면 너희도 역시 핍박할 것이고, 내 가르침을 따른 사람이라면 너희 가르침도 역시 따를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강함을 드러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숨기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을 포장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십자가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르며 감사의 삶을 살아갑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선택을 믿고 세상과 다른 목적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국적이나 소속이 바뀌는 결정을 앞두고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얻으면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고난을 이겨 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이들에게 천국을 소유할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삶의 흔적으로 여기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자리로 그리스도를 앉히셨듯 우리를 성령을 통해 인도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26 그러나 ‘돕는 분’ 곧 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면, 그분이 와서 나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부터 나온 성령을 내가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14장 16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 위격이 하는 일에 대해 서로 동의하에 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성령께서는 증인의 삶을 도우십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제자들은 예수의 담대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주기철 목사님(1897-1944)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1938년 조선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강요하던 시절에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가혹한 고문을 받지만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다가 옥고를 치르고 순교하십니다. 당시 주기철 목사님의 나이를 계산해 보니까 47세였습니다. 너무도 짧은 인생을 주를 위해 사시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던 것입니다. 그가 남긴 신앙의 유산인 ‘일사각오’라는 그분의 설교 제목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우리의 힘과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깨우침과 함께하심을 통해 주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5/5/2024 | (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2 사랑의 공동체 Community of Love
요한복음 15:9-12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은 1901년 어느날 밖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상황을 말한 뒤 이혼하고 싶다고 전하고, 이후 그의 인생에서 평생 네번이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철학자 러셀은 충분한 사유를 통해서 사랑의 본질은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느낌이 사라지면 사랑도 떠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러셀의 사랑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내가 갖고 싶은 것, 우리는 소유하고 싶은 것에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사랑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랑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좋은 감정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게 되면 위선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감정적 사랑의 한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9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9절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을 깊이 인식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깊이 인식했으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듯이 예수의 계명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주셨으니'라는 구절속에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 모든 민족이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는 만큼 행동해 나가면 됩니다.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 주고 합리적인 판단과 생각을 넘어서서 말씀을 통해 주어진 생명을 경험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는 사랑으로 유지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표현됩니다(요한 1서 4:7).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에 하나님의 변함없는 포용성이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하는 주님의 고별설교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 주시고, 내가 너희를 선택해서 세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구절에서 제자들을 향한 주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13절로 15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내 계명을 너희가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15 이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주인이 종들에게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오래 사귀어 정을 나누는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친구로 부르시는 것은 서로가 깊이 교제하며 마음을 온전히 열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다 드러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정의하는 친구의 개념을 보면
첫째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생명까지 아낌없이 줄수 있는 친구가 한명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일텐데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순종이 사귐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의 계명을 소홀이 여기면 예수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로 친구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권을 얻는 것입니다. 종은 명령을 받는 관계이지만 친구는 비밀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종은 주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하는 반면에 친구는 주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됩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구가 되어 한 몸을 이뤄가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 사랑의 절정은 기쁨입니다.
15:11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 ~ 1965)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말의 위기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세가지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를 말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이용하다가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관계입니다.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만남입니다. 둘째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 지쳐 버립니다. 신앙생활도 이러한 방법으로는 지속되지 않게 됩니다. 셋째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인격적 관계인데 주님과의 연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 1:4)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얻는 기쁨은 무엇을 가졌느냐 안가졌느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하고 부족해 합니다. 욕망으로 채울수 없는 영혼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참된 만남속에는 만족함이 있고 기쁨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내면에 기쁨이 채워져야 인간 관계에서도 기쁨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항상'이란 말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쁘지 않는 상황도 만나게 되기도 하고 기쁨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고난중에도 주를 바라보며 기뻐하고, 슬픔 가운데서도 찬송하며 기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충만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삶의 목적이 이 기쁨을 가리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나를 둘러싼 일들과 환경을 온전히 대할수 있게 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co-worker)입니다.
15: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행동으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의 분쟁과 시기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랑을 말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 새 계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확실한 테두리가 있어 보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로가 함께하는 것이 어려워 집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일을 계획하며 나아가면 과정속에서 문제는 계속 발생하게 됩니다.
성경은 '서로간의 사랑'과 '모든이에 대한 사랑'을 둘 다 언급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쉬운말 성경)
하나님의 동역자는 그릇을 넓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보게 되고, 이웃의 범위가 확대되어 갑니다. 믿음을 통해서 믿음의 일을 하게 되고, 믿음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 선생에게 받은 질문 중에 한가지는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라는 책에서 '한계없이 넘쳐 흐르는 사랑의 삶'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도는 이웃의 개념을 확장해야합니다. 교회 안 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일터에도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 원하고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할수만 있으면, '여러분의 힘이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17절을 하나님의 동역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6 명심하여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 이유는, 너희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가 항상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다 주실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계명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며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가족만 사랑하여도 충분할 것 같은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이해 되어지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이해되어지지 않는 한없는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많이 사랑하는 것 처럼 많이 헌신하는것 처럼 보여질뿐 어쩌면 가장 가까운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연약함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 믿는 성도들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지쳐있을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쉬어 버리면 안됩니다. 지쳐있는 몸과 마음일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작은 일도 감당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비판과 정죄의 마음에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던 제자들은 위험한 순간에서 자신들의 믿음의 상태가 보였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이 예수의 공동체입니다. 형제 사랑은 먼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밑바탕인 동시에 세상을 향해서 믿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웃이라는 개념의 한계선을 넘어서 주님은 친구가 되어 주시지만, 자신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경계선들을 뛰어 넘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형제 관계속으로 이끌려 졌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웃관계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한주도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4/28/2024 | (부활절 다섯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1 새로운 의식 New paradigm
마태복음 9:14-17
금식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신앙훈련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참회를 위해 금식을 합니다. 그들에게 금식은 종교적 규례와 전통으로 확고한 신앙의 행위였기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차례 월요일과 목요일날 금식날로 정해 놓고 지켰습니다. 무슬림들도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며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금식의 전통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새롭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육체를 주님 아래 계속 놓기 위해, 그리고 금식이 가져다 주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실천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일로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우리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금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배경을 보면 마태가 세리들과 죄인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예수님과 식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마태는 반민족주의자로 동족들에게 경멸과 미움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마태는 제자 삼아 주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리의 직업을 내려놓고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마태는 잔치를 열어서 동료 세리들과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마태는 동료 세리들에게도 주님을 소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고 살았던 세리 마태가 해결되지 못한 삶의 문제를 이겨 내도록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잔치가 벌어진 마태의 집 밖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금식하는 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9:12-13)
예수께서는 죄많고 실수 많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태는 세리 마태에서 위대한 사도로 인생이 변화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세례 요한의 생애를 통해 그들의 신앙 정체성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기득권층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광야에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외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외침을 듣고 따랐던 제자들은 당연히 수도원적 삶을 살았겠지요. 게다가 스승인 요한이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오.' 라고 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심리도 있을 것이고, 예수의 제자들이 못마땅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3가지 비유를 통해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결혼식 신랑의 비유입니다.
9:15 예수께서 되물으셨다. “결혼식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어찌 슬퍼할 수 있겠소?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가 되면 그들도 금식할 것이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금식과 결혼식은 그 의미가 대조적입니다.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슬픔의 표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태의 삶에 찾아오신 주님은 이전의 동족들에게 받던 설움과 상처를 씻겨 주시고 인생의 스승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실때 마태의 마음에 예수님과의 실제적 교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배는 이 기쁨을 경험하는 혼인식 잔치와 같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한 이 비유는 금식의 때가 아직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에 따라 변하고 금방 사라지는 일시적 기쁨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늘의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예배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종교적 행위와 지식만 앞설 때 예배의 자리에 계시는 주님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종교적 전통과 규례가 주님 보다 앞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가 되면 그들도 금식할 것이오.
주님은 예수의 제자들이 앞으로 금식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슬픔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주님을 잃고 큰 충격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정신없이 도망갔고, 좌절감에 사로 잡혀서 두려워 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죽은 예수만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한 순간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디다케 사도집의 교훈을 보면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금식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전통인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는 새로운 전통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떠날 것을 말씀하셨던 이 비유의 말씀을 근거로 금식을 시행하게 됩니다. 금식의 동기가 달라진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빗대어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에 금식하며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비유는 낡은 옷과 새 천 조각의 비유입니다.
16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하면, 새 천조각이 낡은 옷을 당겨서, 그 옷은 더욱 심하게 찢어지게 될 것이오.
지금이야 옷의 질이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옷이 헤어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옷감은 베였는데 헤어진 베옷을 새 베옷감으로 꼬매게 되면 헤어진 베옷이 당겨져서 옷이 더 망가졌습니다.
이 비유는 형식적인 금식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형식적인 금식은 헛옷에 새천 조각을 붙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새옷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계하실때에도 유대인들의 금식 전통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비유는 기존의 모든 질서와 규범의 토대가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단순히 새천 조각을 꼬매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새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이전에 입던 옷을 완전히 벗고 새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옷을 꿰매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새옷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난 이들의 삶에는 완전한 변화가 찾아 옵니다.
이어령씨가 쓴 '젊음의 탄생'의 책에 보면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갱이라는 화가가 3가지 질문을 그림을 통해 던졌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는 서구 문명의 깊은 회의를 느끼고 절망 끝에 삶의 해답을 얻기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 섬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답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질병과 가난 뿐 낙원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를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가족도 그를 외면하고 그의 그림도 팔리지 않습니다. 다시 타히티 섬으로 돌아온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유서로 남기려고 했던 그림이 바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림이라고 합니다. 고갱은 삶의 물음표를 그림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수많은 질문들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죽음 권세보다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면 불확실한 바다라고 해도 믿음으로 뛰어들 때 삶의 물음표가 느낌표가 될 것입니다.
셋째는 낡은 가죽 부대와 새포도주의 비유입니다.
17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하면, 그 낡은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지게 되고, 그 부대도 버리게 되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오. 그래야 둘 다 보존될 수 있소.”
낡은 가죽 부대는 우리의 고정관념입니다. 고정된 관념이 있으면 생각이 유연하지 않고 경직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유연하게 해 주시고, 종교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로 부터 받는 사랑의 힘으로 높은 차원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새포도주는 발효가 되면서 팽창하게 되는데 이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 버리게 됩니다. 낡은 사고 방식으로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새 포도주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 믿음의 성도들은 살아 있기에 세속적 물결에 대항하여 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혀 주신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회개하여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생명이 있기에 죄와 대항하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나 리더가 바뀌면 변화를 향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새부대 새 포도주는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지속적인 변화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며 우리 안에 쌓아 두고 있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진정한 변화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을 믿을 때 누구에게나 새로운 시대가 열려집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의식입니다. 절망적인 사회속에서 그분은 우리의 희망이 되십니다. 슬픔 가운데 주님은 영원한 기쁨이 되어 주십니다.
미국의 조지 바나 연구소에서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면,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나님께 하겠습니까?”라는 주제로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세상에는 왜 아픔과 고난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모든 사람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보려면 먼저 소낙비가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아름다움이 오기 전에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가 걸으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적당한 무게를 안고 살아갈 때 보다 잘 믿으려 할때, 잘 살아내려 할때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보는 꽃들은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땅에 떨어진 풀씨중에서도 일부만이 살아 남아 싹을 틔운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 까지의 과정을 알고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추운 겨울을 이겨낸 꽃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순간이 열매를 맺기 위한 생명의 과정이 됩니다. 어떤 슬픔도 아픔도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인도하심 속에서 누리는 이 기쁨이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는 율법의 정신을 새롭게 완성하셨고, 옛 시스템을 완전히 폐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는 생존 경쟁이 치열한 사회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식에 대해서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나 믿음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셨고, 단순히 죄인들과 세리들을 제자로 삼았다기 보다는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이제 슬픔도 기쁨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오랜시간 금식의 전통이 참회가 목적이었다면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기독교가 종교적 의식이라 보일테지만 복음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단순한 종교생활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행위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아볼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임에도 요한의 세례를 알 따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부활의 도를 가르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따랐습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행 18:24-19:3)
어쩌면 오늘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는 있지만 여전히 요한에게 배운 가르침만을 이방 세계에까지 전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낡은 옷과 가죽 부대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12명의 요한의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이후 바울에게 예수의 가르침과 안수를 통해서 확실한 믿음과 성령의 확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새 부대에 새포도주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시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변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질문이 닿아야 합니다. 참된 제자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수용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교제 가운데 그리스도가 동행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