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0/29/2023 | 성령강림후 제 22주
영적 예배자 True Worshiper
로마서 12:1-3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시간을 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인간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까닭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하심으로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때 안에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허랑방탕한 인간의 시간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 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초대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마음에 반응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적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1. 영적 예배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예배입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예배자의 삶을 권합니다. 은사들을 통해 교회의 모든 섬김이 가능해집니다. 로마서 1-8장까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이신칭의를 말씀합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유대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를 논하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나려 해도 남은 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인까지 구원받는 영광의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1-11장까지 율법으로 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죄가 율법으로 드러날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간에게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하는 말씀은 아들을 보내 구원을 이루신 십자가의 절대적 사랑 이야기입니다.
12장에서부터는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현실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첫 번째가 예배의 중요성입니다.“그러므로 형제들아”부름으로 주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됨을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 신앙 고백의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 말씀합니다. 권한다는 메시지는 가벼운 부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전 생애를 걸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 것을 권한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명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한 인생의 영혼 정신 삶의 경험을 담은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산 제물’은 쪼개서 드린 죽은 제물로 드린 구약의 제사와 구별된 제사입니다. 산 제물로 드림은 성도의 살아있는 삶 전체를 제물로 드림입니다. 살아있는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거룩하게 구별된 영적예배인 것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 후 산 제물이 된 성도의 삶은 영적 예배 자리입니다. 영적 예배란 합리적 예배란 뜻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한 사도 바울 삶은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물의 삶이었습니다. 구약의 제물은 짐승을 잡아 쪼개서 드리는 예배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우리의 예배는 전인적 삶과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세상과 구별된 인생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예배는 일상에서 삶을 성공시키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의 충성 자리는 예배 자리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 더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가 돌아보는 영적 예배자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2. 영적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적 예배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말씀합니다. 첫째‘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세대는 세상 가치와 세상 풍조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명령함은 성도들의 삶의 목표가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신앙의 본질 안에서 바른 복음을 따라 살라는 명령입니다. 둘째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하십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은 구원을 선물로 받은 은혜입니다. 변화를 받으라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본질인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여 지키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죄인 된 우리를 받아주신 것 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지속적인 신앙 훈련을 통하여 바른 복음을 지켜야합니다.
예배는 일상으로 파송된 선교 자리이고 전도 자리입니다. 바울은“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학교 생활은 예배 자리여야 하고 직장생활 가정생활 모두가 예배자리이고 전도와 선교자리입니다. 신약시대 교회는 매주일 드리는 파송 예배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로 시작하는 영적 예배자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의 현장이 교회입니다. 성도는 교회입니다. 성도는 형식적으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다면 삶의 자리에서 분명하게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부르심의 자리를 잘 알아차려야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부어주신 능력과 자질을 은사로 발견해야 합니다. 모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머리와 몸은 하나이기에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전도할 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돕는 자가 아니라 제자들의 주가 되셔서 함께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생명이 오고 가는 사랑의 관계로 돌봄이어야 합니다. 많이 섬기는 사람이 행복한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지혜를 가지고 영적 예배자로 성장합니다.
3. 영적 예배자는 예수 안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충성해야 합니다.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0-11) 고백합니다. 성도의 삶의 터는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사는 자와 자신의 힘으로 사는 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반석위에 짓는 집과 모래위에 짓는 집으로 인생의 기초가 다름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이미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명하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내 인생 길의 행복을 따라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는 교만에 속았습니다. 인류는 은혜로 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와 같이 하나님께 속하도록 만들어 놓은 길을 배워 걷는 순종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명령을 알아차리는 것이 영분별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자신의 의의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믿는 성도의 모임입니다. 사도 바울은‘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습니다. 머리이신 예수께 붙은 지체는 그 가치가 존귀합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에 대하여“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하였습니다.
교회시대인 오늘날에도 우리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은사를 쏟아 부으십니다. 성경은“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밝힙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성도들의 생활을 이끄시며 양육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이룹니다. 선에 속한 사랑의 결과가 교회에 나타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예수님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울 때에 교회 성도들은 영광의 주로 즐거워합니다.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이 모든 말씀은 이웃 사랑이 이루어지는 영적 예배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일상의 예배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영적예배자로 서길 축원합니다.
10/22/2023 | 성령강림후 제 21주
모든 사람은 구원의 기회를 갖습니다 Everyone Has a Chance for Salvation
사도행전 24:1-9, 24-27
작가이며 철학가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뉴욕 특파원 자격으로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1906-1962)의 재판을 취재했고, 재판을 참관한 후에 한편의 기사를 썼습니다. 수백만명의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한 인간의 폭력과 잔인함으로 꼽는 사건이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의 모습에서 ‘악의 특별함’이 아닌 ‘악의 평범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라서 그가 지은 죄가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입니다. 겉으로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악이 세련돼 보이기도 하고 고상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류가 직면한 보편적인 ‘악의 평범성’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뛰어난 변호사 ‘더둘로’가 나옵니다. 그는 로마의 법과 유대의 법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더둘로는 Tertullus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유대문화를 잘 이해하는 헬라계 유대인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본문은 닷새 후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가이사랴로 옵니다. 이유는 로마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닷새동안 치밀한 준비과정에서 적임자로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선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악의 치밀함과 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40여명의 암살단을 조직해서 은밀히 살해하려고도 했는데 실패로 돌아가니까 로마법 전문가를 동원해서 가이사랴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더둘로는 본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지 않도록 사건을 파악했을 것이고 법정에서 바울에게 최고의 형량이 내려지도록 고소장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무법천지 세상입니다. 그래서 법이 필요는 하지만 법대로 하자고 외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가장하고, 생명을 죽음의 방법으로 가리웁니다. 거짓으로 진실을 덮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에 있는 600개가 넘는 율법을 두가지 강령으로 축약해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법’입니다. 종교가 율법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를 주목했다면, 하나님은 율법으로 인해 소외된 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아래 누구도 ‘양심의 법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스스로 피고인이 되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사형선고를 받으셨기에 우리의 양심이 치유가 되고, 옛사람이 변화가 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만일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이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의 거울 앞에 서게 되면 보이지 않던 죄가 보이게 되구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인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안경을 끼고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피고인일 뿐입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만이 더럽혀진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더둘로의 송사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2…존경하는 벨릭스 각하, 우리 유대인들은 각하 덕분에 오랜 동안 평화로운 세월을 누려 왔습니다. 각하의 선견지명 덕분에, 이 나라의 많은 것들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3 우리는 모든 면에서 탁월하신 총독 각하께 대해 항상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4 이제 각하를 오래 괴롭히지 않고자, 이 사람에 대한 고소의 줄거리만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잠시 제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로마법과 유대법에 능통한 당대 뛰어난 더둘로는 바울을 고소해서 재판에 승소하기 위하여 총독 벨릭스를 칭송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시 벨릭스는 역사가 타기투스에 의하면 “그는 포악하고 음흉하며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누린 자였다”고 합니다. 2년후에 벨릭스가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 사람들은 환호하였다고 합니다. 6년의 재임기간에도 사람들의 원성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더둘로는 벨릭스의 명예심을 자극하여 재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고 좋은말로 아첨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더둘로는 3가지 죄목으로 바울을 고소합니다. 첫째는 바울이 말썽쟁이 같은 존재라는 것이고, 개역개정은 ‘전염병 같은 존재’라고 번역했습니다. 두번째는 나사렛 도당의 두목이며, 이단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이후 세번째 죄로 바울이 유대인 성전을 더럽혔다고하는 죄목도 슬쩍 끼어 넣었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내용을 보면 첫번째 두번째는 로마사회의 소요죄와 반란죄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만일 사실이 입증이 된다면 로마법에 저촉(抵觸: violate)한 것이기에 사형에 해당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고소문들이 종교적인 문제 같아 보이지만 더둘로는 로마의 반란죄와 소란죄로 바울을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 로마 정부는 종교에 있어서는 모든 이에게 자유를 허락하였기에 유대인의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은 로마법에 의하면 심각한 범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회에 전염병 같은 존재라고 묘사한 것은 바울을 정치적 선동가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보여집니다. 오늘날도 전염병이 얼마나 위협적입니까? 바울이 이런 존재라는 것은 로마 제국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는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명망있는 변호사 더둘로가 터무니 없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를 비꼬는 말이지요. 이렇다 보니 같은 죄를 지어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서 다른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에서도 종종 발생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더둘로의 고소장을 듣고 바울 너가 어떤 말을 하나 보려고 무시하는 듯 머리로 표시하며 반론의 기회를 줍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소한 죄들로 인해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 밖에 안되었고 그 중 5일은 옥중에 있었습니다. 이 짧은 기간에 내가 어떻게 소요케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능성도 없는 일이며, 내가 사람을 선동하는 것을 본 목격자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두번째 이단의 괴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구약의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부활의 소망까지 믿는다고 총독 앞에서 오히려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는 로마 황제의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소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때 총독은 복음의 도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바울의 처결을 연기합니다.
14절로 16절은 바울이 전하는 신앙고백입니다.
“14 그러나 저는 각하 앞에서 이것만은 분명히 인정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예수의 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도에 따라, 저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저는 유대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부 믿습니다.15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올바른 사람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16 이런 까닭에, 저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고백을 보면 올바른 사람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25절에도 보면 “예수의 도를 말하면서 바울이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 설교하자, 벨릭스는 두려워하면서 말했다. “자, 그만하면 되었소. 이제 가 보시오. 기회를 봐서, 당신을 다시 부르도록 하겠소”
바울의 강론을 듣고 뵐릭스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잔인함과 탐욕으로 불의한 사람이었고, 여러번 결혼하며 절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강론을 들으며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삶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죄는 숨기고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우리는 매주일 사도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다른 이가 아닌 ‘내가 믿는 것’이 실제적 믿음입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상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복된 말씀이지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후 본서 어디에서도 벨릭스가 회개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26절을 보면 바울이 가진 돈을 탐내어 자주 불렀다는 사실만을 전해줍니다. 벨릭스 총독은 뉘우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26 그러면서도 총독은 바울이 자신에게 뇌물 바치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그를 자주 불러내어 대화를 나누었다.
바울이 몇 해 동안 고국을 떠나 있다가, 민족을 위한 구호금과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가지고 왔다고 했을때에 바울이 돈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회개하는 커녕 탐욕의 미각만 자극됩니다. 벨릭스는 하나님께 회개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어질 기회를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육망의 허망함을 쫓는 것이 아니라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삶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의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쌓고 있을지라도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찬양하리 여호와 하나님 내 주를 찬양하리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내 영혼 주안에서 참 기쁘리” 이 곡은 Donya Brockway쓴 찬양인데 1948년 창설된 중앙대학교 최초의 기독 학생 동아리에 의해서 번역된 곡입니다. 75년 전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했을 때 이 찬양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도도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으나 선하신 뜻을 위하여 몸으로 날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겸손도 내안에서 수없이 부서지고 무너져야 나오는 감정이구요. 온유함도 하나님 안에서 철저히 다스림 받아야 나올 수 있습니다. 수많은 아첨과 거짓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성도들에게 있는 선한 영향력은 우리가 모인 자리에 미움이 멈춰지며, 부패해져 가는 것이 멈추고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양쪽에 동일하게 다 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돈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 돈의 종이 되고 탐욕의 종이 되어 버리지만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 삼으면 한번 뿐인 인생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끌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말로 감옥에도 갇혔었지만 성경은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형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형통한 자에게 하나님은 이길 힘도 주시고, 견디고 버틸 힘도 주십니다.
21세기에 우리는 마른 뼈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어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마른 뼈와 같은 것입니다. 물이 없어 마시지 못하고 양식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빈곤한 삶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다른 것을 믿는 것은 죄를 미화(美化)시키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소와 그에 대한 바울의 변론을 들은 밸릭스 총독은 유대인과 바울의 대립이 단순히 그들의 종교적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바울에게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하지만 밸릭스는 바울을 즉각 석방하지 아니하고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판결하겠다는 핑계로 재관을 연기하였습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더둘로나 벨릭스는 오늘날 세상의 유익만 쫓아가는 현실주의, 물질만능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이후 바울은2년간 가이사랴에서 구금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년의 구금생활이 바울에게는 10여년에 걸친 전도여행 가운데 지친 몸을 회복하시기 위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지역마다 교회가 세워진 것도 당시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서 로마에서의 전도계획을 세우며 충전하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럽지역에 복음이 전해졌기에 청교들에 의해서 이땅에도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도 뜻하지 않는 환경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반응할 때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반응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하나님께로 기울어지게 되지요. 그러면 오늘날 모든 직업이 성직이 되고, 모든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바르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한주도 상황과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교우들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10/15/2023 | 성령강림후 제 20주
당신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나요? Where do you belong?
사도행전 23:23-35
지구 건너편 전쟁의 바람이 불고 있어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일은 이 시대의 큰 슬픔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의 생명의 가치가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될 때에 인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국가 간의 갈등과 분쟁은 부정적 감정들로 인해 인간의 영혼을 빈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외에도 로마 총독과 천부장, 로마의 군사들이 등장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로마사를 다시 펼쳐보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로마제국이 세계를 제패한 기원전 29년은 로마사에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 때입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공공연히 독재를 행했고, 황제에게는 주인을 뜻하는 도미누스(dominus)라는 칭호가 성행했습니다. ‘위대한 자’에서 제국을 지배하는 ‘주’ 또는 주인’이라는 칭호로 격상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이 된 것이지요. 그의 권력은 카이사르 조차 소유해 본 적이 없는 로마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막강한 군대의 지휘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황제의 조각상이 세워지고, 그를 위한 각종 경기들이 열렸으며 법정에 계류중인 재판의 사면권과 각종 귀족들의 지위를 하사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1세기 로마 제국에는 제국을 지탱하는 ‘후원자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상위 계층의 사람이 ‘후원자’가 되어 하위계층의 ‘피후원자’를 돌보는 것인데, 얼핏 보면 약자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하층민은 후원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가 로마제국을 떠받치는 핵심 구조였습니다. 피라미드의 계급의 질서에 가두어 로마 질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로마제국의 질서안에서 사람들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부속품인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최상의 가치로 숭배 받던 것이 로마의 힘이었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것을 내어 줌으로써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이땅에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제도나 정치도 참된 평화를 제공할 수 없기에 세상에 참된 평안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23 ○ 천부장은 즉시 백부장 두 사람을 불러 명령했다. “너희는 오늘 밤 아홉 시에 가이사랴로 출발할 수 있도록 보병 200명과 마병 70명, 그리고 창을 쓰는 병사 200명을 대기시켜라. 24 또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무사히 호송할 수 있도록 그를 태울 말도 준비하라.”
31 ○ 천부장에게서 명령을 받은 대로, 군인들은 그날 밤에 바울을 안디바드리까지 호송했다. 32 이튿날, 군인들은 바울을 호송하는 일을 마병들에게 맡기고 병영으로 되돌아갔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470명의 군사들의 보호속에서 야간 행군으로 62km 떨어진 ‘안디바드리’까지 가게 됩니다. 32절에 보면 이튿날 도착했으니까 그날밤에 400명의 병사들이 62km를 걸어 간 것입니다. 70명의 마병과 400명의 보병이 바울을 밀집 대형의 중간에 두고 보호하며 걸었을 것입니다. 초기 로마군대의 보병은 여덟줄 내지 열두줄까지 밀집 대형을 이루고 진군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병사 개개인은 긴 창을 들었고, 병사는 왼팔에 바짝 밀착시킨 방패와 투구, 몸통 갑옷과 온통 쇠로 된 정강이 받이로 자기 몸을 보호했습니다. 아마도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라면 하룻밤 만에 중무장 한 상태로 이 거리를 행군하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말을 타지 않은 채 밤새도록 진군하는 일도 고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튿날 ‘안디바드리’에 도착했을 때 400명의 보병들은 온 길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후 말을 탄 병사 70명과 계속해서 32km 떨어진 예루살렘의 북서쪽 해안도시인 가이사랴로 가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된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법정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내면에는 두려움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섭리를 알고 있었을테니까요. 그 밤에 들렸을 마병의 말발굽 소리는 구원역사를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심장소리처럼 들렸을 것이고, 무장한 병사들이 행군하며 나는 소리는 바울을 보호해 주시는 불말과 불병거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제국의 질서와 지휘체제 안에서 명령에 복종하는 길이지만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로마에도 복음을 증거하시려는 주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가이사랴에 도착한 이들은 로마의 총독 벨릭스에게 그를 인계했습니다. 당시 52년에서 59년 사이에 유대지역 로마의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노예의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총독의 지위에 오르게 된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당시 태생이 비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신분상승을 위해 정치적 야망으로 살았던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벨릭스의 생애를 보면, 그는 공주의 신분이던 여인들과 3번이나 결혼을 했으며,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던 야심찬 인물로 소개가 됩니다. 교활하고 속임수가 가득한 인물입니다. 당시 총독의 자리는 정치, 군사, 사법의 모든 통치권으로 관할하는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 지역의 총독들을 황제가 직접 임명했으니 로마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충성을 바친 대상이 누구였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천부장의 이름도 언급됩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인데 앞의 글라우디오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는 큰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사고 나서, 본래 이름 루시아 앞에 로마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천부장이 총독에게 쓴 서면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해줍니다.
26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을 드립니다. 27 제가 보내는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제가 군인들을 보내어 구출해 냈습니다.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알고서 구했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21장을 보면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바울이 이전에도 소요를 일으켜 자객 4천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 사람인 줄 착각 했습니다.(21:38) 그래서 천부장은 쇠사슬로 바울을 결박해서 끌고 가서 채찍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유대인들의 소요를 그치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바울은 스스로 로마 사람임을 밝힘으로써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게 했습니다. 따라서 천부장이 로마 사람인 줄 알고 구출해 내었다고 쓴 편지의 내용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흠은 은폐하고 로마인을 보호했다는 공로만을 인정받기 위한 거짓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의 두번째 내용을 보면,
28 “저는 유대인들이 왜 이 사람을 고발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그를 유대인의 공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결박한 것은 소란이 벌어진 연유를 알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의 소요로 인해서 자신에게 초래될 불이익을 염려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벨릭스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마치 온 마음을 다 쏟아서 사태의 진실을 철저히 파악하려고 공정한 노력을 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은 로마제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의인인 채 가장해서 출세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었던 사람입니다.
편지의 세번째 내용을 보면,
29 그 결과, 저는 그가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로 고발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를 감옥에 가두거나 혹은 사형을 시킬 만한 죄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30 그런데도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어, 곧바로 그를 각하께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한 자들에게도 앞으로는 그에 대한 사건을 각하 앞에 제소하도록 일러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로 고발 당했지만 바울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쓴 내용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천부장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바울을 석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일어날 유대인들의 소요를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를 로마 총독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470명의 군인을 동원해서 가이사랴에 바울을 보낸 것입니다. 결국 천부장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일로 사용하십니다. 이로 인해 바울을 죽음의 위협에서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천부장이 쓴 29절의 상소문의 기록으로 인해 바울은 이후에 받게 될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에 서게 되는 3차례의 재판에서 무죄를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때론 악인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거짓과 헛된 욕망으로 쌓아올린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한 나라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결수 신분으로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판단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대로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의 일생은 들풀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구원을 노래하는 인생이 얼마나 존귀한 삶인가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에 다른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있고, 부족해도 인생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세상의 끝이 올때에는 사람들이 돈과 쾌락을 사랑하고 난폭하고 무정하고 절제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마음안에 있는 인간의 죄성, 절제하지 못하는 자기욕망, 쉬고 있어도 알수 없는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은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주는 평안은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최후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1세기 로마가 제국의 힘을 의지했다면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지시며 부활하셨습니다. 2천년 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펼치셨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고, 힘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셨고, 확장 시켜 나가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우리는 소비사회를 살아가며 여전히 선택의 문제 앞에서 생각이 충돌합니다. 소비사회속에서 마음의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물질을 숭배하는 순간 문질의 노예로 전락되어 인간의 삶은 하나의 상품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존재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슬로우패션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이 해시태그는 저가로 만들어 얼마 안 입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 의류산업에 대항하여 나온 새로운 운동입니다. 패스트 패션에서는 옷이 점포에 들어오자마자 곧 유행이 지나가 버려 어떤 브랜드들은 매년 엄청난 양의 상품을 그대로 폐기합니다. 슬로우 패션 운동은 사람들이 천천히,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을 권합니다. 항상 최신 유행을 따라가려는 강박감에 이끌리는 대신, 몇 벌을 사더라도 오래 입을 수 있는 질 좋고 윤리적으로 근거가 있는 품목들을 사라고 권장합니다.” 신앙은 ‘패스트 패션’ 사고 방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서서히 변화시키시고, 점진적으로 이루어 지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믿음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해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그분의 뜻을 지속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앞에 서는 일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눈을 피해 살아 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천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린 결과 놀라운 결실을 삼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아픔과 고통,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있느냐고 질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6:9,10)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마음을 깨닫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어느 소속의 사람인지 묻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대답하지만 그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편지하기를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던 삶에서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도록 지음 받는 존재라고 편지합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묻는다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골 3:12)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고, 둘째는 거룩한 사람이며, 셋째는 사랑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됩니다. 소속이 변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녀됨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고 거룩한자로 사랑받은 자는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과 믿음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정진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한주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은혜가 삶을 감싸주시기를 소망합니다.
10/8/2023 | 성령강림후 제 19주, 창립 45주년 기념주일
우리가 교회입니다 We are the church
사도행전 23:12-24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45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시작의 걸음은 제각기 다르지만 지금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앞으로도 우리교회와 우리의 가정과 모든 교우들의 삶의 걸음마다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창립기념 주일설교를 준비하며 본문말씀을 따로 선정할까 고민도 하였는데 사도행전에서 이어지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마흔 다섯살쯤 되면 살아 온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만들어 집니다. 감동으로 가슴 뭉클했던 이야기들, 수많은 의심과 망설임 속에서도 하나님께 매달렸던 이야기들, 때로는 갈등과 아픔의 시간들을 마주하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걸어왔던 이야기들, 초신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다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삶의 많은 것들이 변화되어지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복음을 전했던 시간들, 주저 앉고 싶었던 신앙의 길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이야기들, 광야의 자리에서도 십자가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셨던 그 눈물의 예배의 현장이 바로 이 자리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의 교회의 탄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피보다 진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대인들의 소동이후에 하루 하루 단위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로 인해 정말 긴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라는 것은 그 전날 산헤드린 의회에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논쟁으로 인하여 바울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무산이 되었고, 주께서 주시는 음성을 듣고 난 아침입니다. 주님은 “바울아 힘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네가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바울에게 펼쳐진 일들은 자신을 죽이려는 극단적 유대인들이 한명이 아니라 40명이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한 40명의 비밀 결사대가 조직이 된 것입니다. 모의에 참여한 40명의 사람들은 바울을 영내에서 끌어내어 좀 더 공격이 쉬운 상태로 몰아넣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살면서 마음을 어렵게 하는 한사람만 있어도 마음 깊이 근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데 40명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 모의에 참여했으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제어하지 못하는 열심은 결국 자신들만 선하고 의롭다는 위험한 함정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알지 못한 유대인들은 율법의 틀만 지키려는 잘못된 열심만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방법은 성육신의 영성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증거해야 합니다.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실제적 삶을 통하여 전해야 합니다. 마음은 주님께로 늘 향해 있다고 하지만 눈 앞에 이익과 내 마음의 평안만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살인적인 경쟁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교회가 답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가이자 수많은 책을 통해 기독교 문화에 크게 이바지한 프랜시스 쉐퍼 Francis A. Schaeffer:1912-1984)라는 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참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프랭크 쉐퍼(Frank Schaeffer, 1952 ~ 현재)는 ‘크레이즈 포 갓’이라는 책에서 명문대학 출신들을 선호하던 자신의 부모의 태도를 냉소적으로 묘사합니다. 아버지 프랜시스 쉐퍼와 그의 어머니는 세명의 사위 모두를 최고의 명문 출신들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최고’를 말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들에게는 그리 감동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쉐퍼의 아들은 부모님의 그런 모순을 조용히 지켜보며 기독교 신앙을 떠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성품과 마음은 닮아가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성육신의 길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평범한 삶 보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지요. 바울의 이야기는 기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인생의 구주로 삼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가는 소망과 영광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전심전력하며 율법의 교훈을 지키며 살아온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남들보다 뛰어난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그의 열심을 따라갈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뤄간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구원은 인생을 편하게 살기 위한 초대장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 속에 믿음의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다면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상의 시간에 가장 많은 생각하고 바라보고 즐겨 하는 일들이 바로 우리의 삶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교회가 전심전력하며 써 나가야 할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를 대접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는 이야기, 새로운 지역에 와서 재정적 어려움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시키는 이야기, 함께 지어져 가는 이야기 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의 중심이 주님을 향한 교회가 되어 질 때에 우리는 마음의 벽과 기준을 낮추는 비결을 깨닫게 되고 주안에서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매일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는 인간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삶은 어두운 여행이 아니라 은혜를 발견하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교회 밖으로 나가는 순간에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한없이 작아 지셨는데 우리의 믿음의 태도는 하나님은 작게 만들어 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 크게 부풀려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십시오. 죄는 아주 작고 은밀한 것입니다. 작은 죄가 온 마음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 작은 죄를 소홀히 하고 방치하다 보면 문제가 엄청나게 커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986년 1월 28일 오전 11시 38분 전 세계인들은 미국의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우주 왕복선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켓이 점화되고 우주선이 하늘로 날아 올라갑니다. 그런데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73초만에 공중에서 폭발을 하게 됩니다. 이 사고로 7명의 비행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후 폭발의 원인을 조사했는데 첼린저 호에 들어가는 작은 오링의 불량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추운 날씨에 고무링이 탄력성의 기능을 잃어버렸고, 우주선 공중폭발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에서 ‘이것쯤이야’하며 죄의 모양을 더 키워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마음안에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본문에는 바울의 조카가 등장합니다. 바울의 조카는 성경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한 신약학자는 이 조카가 바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누이의 아들이라고 추정합니다.
렌스키라는 신약학자는 바울의 집안이 대대로 바리새파였으므로, 누이가 당시 바리새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서 살았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후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할 때 누이의 집에서 기거했을 것이라는 것이죠. 어쨋튼 바울의 조카가 결정적인 순간에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암살계획을 듣게 되고, 바울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면 어떻게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을 그것도 바울의 조카가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당시에 권력자였던 로마의 천부장이 이름없는 청년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바울을 보호하고 나섰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름없는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보실 때 작은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세상이 다른점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이제껏 해왔던 일들을 앞으로 40년이 지난 후에도 지속하고 있다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뜻이 이뤄짐을 기다리며 지속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이 일을 맡기셨다 생각하시며 주어진 일을 감당해 보시기 바랍니다.
23절 24절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천부장은 제 삼시 곧 우리 시간을 밤 9시인데도 바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가이사랴로 갈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는 조용히 백부장 둘을 불러서 40명의 암살단 보다 무려 10배 이상의 군인으로 바울을 보호합니다. 보병이 200명, 마병이 70명, 창군이 200명이었습니다. 천부장 수하에 천명의 군사가 있었으니까 470명의 군사는 자신의 수하에 절반이 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일찍부터 로마에 가기를 소망했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바울의 로마행이 드디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일이 진행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극한 환란 같아 보이지만 바울은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보호속에서 로마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상황이 좋아 보이고 즐겁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라 착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편안한 삶만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깊이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기도와 찬양, 구제와 용서 화해의 도구를 통해서 지금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을 빼고 교회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던 시대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건재했고, 교회가 세상속에서 힘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대에도 믿음의 모험에 동참하는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고, 고난 가운데서도 이기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의 경험으로 제한한다면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이야기는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한방울의 은혜만 마음에 담겨져도 삶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창립 45주년을 맞이하여 고백만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세상을 깨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주의 부름 받은 성도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가 예배가 되고 가정이 교회가 되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0/1/2023 | 성령강림후 제 18주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I have always lived before God with a clear conscience!
사도행전 23:1, 6-11
오늘은 세계성찬 주일로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찬의 빵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지요. 포도주는 인류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오늘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는 교우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에 연합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서로가 자기의 의로움만 주장하는 세상속으로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찬식이며 세례식,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기도회 등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우리는 어떤 열매들을 맺어가야 할까요? 믿음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변화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고 나서 천부장은 다음날 결박을 풀고, 산헤드린 공회로 바울을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 섰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의장인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구성원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등 의장을 포함하여 총 71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마음에 담을 준비가 안된 사람들입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 1642)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이 일로 당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합니다. 갈릴레이는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 했지만,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서 창조와 구속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의 발견은 피조물인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세상 너머의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어서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발견하려고 말씀을 해석하고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믿음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니까 믿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우리의 양심을 깨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양심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보든 안보든, 상황이 좋은 안좋든 하나님을 내 옆에 모시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헬라어는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입니다. ‘쉰’(συν)이라는 함께’라는 뜻과 ‘알다’라는 ‘에이데시스’(εἰδησις)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바울의 고백속에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인격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을 경험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매여 있지 않고 자신과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공회원들 앞에 죄수의 옷을 입고 서 있었지만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고 거룩한 직분을 받았어도 양심이 죽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사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외형만 그럴듯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긍휼의 눈으로 회원들을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인류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그의 살은 십자가에서 찢겼고,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성찬은 이것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매주마다 성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두려운 현실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유대교의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공격에서도 복음은 예루살렘 반경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는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과정입니다. 지속적으로 믿을때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어려워 하고 두려워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 안전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조용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 그저 눈만 감고 있어도 기도하는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서로 다른 방식, 서로 다양한 모습을 인정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 깊은 영성의 세계를 알아가게 됩니다. 어릴 적 모태에서 부터 신앙을 배우고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모태 신앙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 뜨겁지 않아서 ‘못해 신앙인’이라고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뜨겁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슬비에 옷 젖듯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도 하시고, 뜨거운 경험을 통해 회심 시키기도 하십니다. 혹은 말씀을 연구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지체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크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개인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 만나는 방법이 다양한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모든 만남 중에 놓쳐서는 안될 만남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 그 자리, 뜨겁지 않은 그 자리를 자라게 하시고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산헤드린은 크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6절 7절입니다.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하니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인데 반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고, 사두개인은 세속적인 사람들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은 자의 소망을 전하는 바울의 말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눠집니다. 이는 서로가 신학적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일로 인해 매우 심각하게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부대에 담으려면 우리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한 구원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물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이들은 쟁기를 손에 들고 밭에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을 얻게 되고, 사랑함으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역설적인 표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가 돈에 대한 역설입니다.
잠언 11장 24-25절을 보면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4-25)
구제를 한다는 것은 주머니의 돈을 사용하는 것인데 더욱 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복을 흘려 보내면 오히려 복은 들어 오게 되는 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현실일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복은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성만찬 주일에 장학헌금을 통해 실제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식을 쌓아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신앙과 하나가 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지식을 참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일에 우리가 동참함으로 어려운 가운데 공부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가난한 자들이 부요케 되기를 원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주신 은혜를 되새기며 베품의 즐거움에 참여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고 심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에게 그날 밤은 위기의 밤이고, 고난의 밤이었습니다. 고난 받으신 주님은 그날 밤에 바울을 찾아 오셨습니다. 바울 곁에 늘 가까이 계셨던 주님은 그날 밤에 ‘담대하라 네가 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적극적으로 위로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고난의 밤일수록 주님의 음성은 또렷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주님을 만난 경험들, 서로가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에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무딘 쟁기로 밭을 갈아야 하니 힘만 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의 밤은 찾아 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만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1996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양심 냉장고’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적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 한국은 정지선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지키는 사람도 거의 희박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개그맨 이경규씨는 지금도 잊지 못했던 촬영 기억을 언급했습니다. 그날은 새벽 4시까지 양심 운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포기하려던 순간 한 차량이 나타나 정지선을 지켰는데 이경규씨는 PD가 방송을 위해 사람을 보냈구나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4시에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옆 자리에 있던 아내도 장애인이었는데 “왜 정지선을 지키냐고 하니까 지켜야 하는거 아니에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신문에도 기사가 크게 났었다고 회상합니다. 실제 해당 방송은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이경규씨는 지금도 정지선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사람들의 운전 양심을 높였다고 회상합니다. 그 당시 그 프로그램은 위기 상황이었고 다른 방송사에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변화가 없이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때였다고 합니다. 야심한 밤에 도로에 잠복하여 안전선과 속도를 지키는 사람을 찾는 방송 프로가 모두의 우려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공중도덕과 질서를 깨치는 계기가 되었고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을 느끼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일상의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선한 양심을 지니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을 헐뜯고, 고난이 온다고 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억압받는 일은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과 피를 묵상하며 주님의 피가 여러분의 삶에서 흘러 나오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 주님께서 여러분의 굳건한 마음에 믿음의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