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7/9/2023 | 성령강림후 제 6주
꼭 한번은 걸어야 할 길 A path you must take…at least once
사도행전 18:1-11
2000년 일본 혼다사에서는 인간처럼 걷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약 2000억원을 투입해서 인간형 로봇인 ‘아시모‘를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두발로 걷는 로봇이었습니다. 그런데 움직임이 인간에 비하면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이후 2017년도에 보스턴 다이내믹스에서 ‘아틀라스’라는 이족보행 로봇을 만들었는데, 두발로 걷는 움직임이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한 평을 받고 있습니다. 2023년 개발된 ‘아틀라스’를 영상으로 보니까 그 움직임이 정말 인간과 흡사해 보입니다.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일생은 참 신비롭습니다. 인생을 걸어가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성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생의 길을 잘 걷도록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나사렛에서 부터 갈릴리 바다 부근 팔레스타인 지역을 수차례 오고 가시며 보여 주셨고, 마지막 여정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그 길은 생명의 길, 치유의 길, 낮아지심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며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리는 약 11만 마일입니다. 당시 교통수단도 없던 때였는데 바울을 이토록 걷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보이지 않는 힘이 어디서 부터 왔을까요? 그리스도에게서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을 따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며 주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믿음의 길을 생각해 보시며 오늘 말씀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경로들을 보면 그 안에 신약성경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걸은 길은 우리로 하여금 훨씬 더 근원적인 세계를 향해 자유롭게 나가도록 도와줍니다. 마가 다락방에 사람들은 한곳에 모였었지만 성령강림 이후에 성령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넓게 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는 말씀 그대로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1 그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라는 지역은 당시 상업과 무역의 요충지로 물질적으로는 번영 했지만 도덕적 타락이 심각하여 음란한 도시로 유명하였습니다. 실제로 이곳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여명의 여사제들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매춘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고린도인이 되다’라는 헬라어 ‘코린티아조마이 (κορίντιαζομαι)라는 동사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질 정도였으며, ‘코린티아스테스 ‘(κορίντιαςτες)는 ‘매춘부와 어울리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 후에’라는 단어 안에는 바울이 걸어온 길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길은 걸어야 할 길 그리고 걸어 온 길입니다. 고린도 지역에 오기 전까지 바울의 길을 역으로 따라 가보면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많은 매질을 당하고 깊은 옥에 갇혔었습니다. 한밤 중에 기도하는데 옥문이 열렸고, 간수의 가정을 구원하여 주시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바울과 실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100마일이 넘은 지역인 암비볼리, 아볼로니가를 지나서 데살로니가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몇 주간에 걸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는데 지역의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소동을 피웠습니다. 바울이 잠시 머물던 야손의 집까지 침입하여 소란을 피웠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그들을 피해서 한밤 중에 베뢰아로 피신하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너그러워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가 했는데,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던 불량배들이 다시 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동을 벌였습니다. 결국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머물고 바울만 배를 타고 4일 거리인 아테네로 홀로 가게 됩니다.
아테네는 헬라 철학의 본상지로 모든 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제단이 가득했던 지역입니다. 우상이 가득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어려서 부터 헬라 철학으로 정통한 유명한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였던 학자의 제자로 훈련도 받았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학문과 지성인들의 고장 아테네에 도착해서 보니 옛날에 꾸웠던 꿈이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올라 왔을까요? 자신이 이제껏 배웠던 헬라 철학으로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을 꺼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열매도 몇사람 외에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보고 말쟁이라고 조롱을 하였습니다.(17:18) 철학적 논쟁만 하다가 복음사역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바울이 십자가 신학을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묻은 사랑으로 전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바울이 아테네에서는 세례를 주거나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성과 쾌락을 중시하던 철학에 빠져 있었던 이들은 바울이 전한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았고 배척했음을 볼수 있습니다. 아테네는 신들의 고향이라 알려져 있어서 그곳 사람들이 종교성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에’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그 거리는 대략 50마일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꿈꿨던 철학의 도시에서 복음 사역이 실패하고 난 후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좁고 협착한 땅을 밟으며 고린도까지 오는 그 걸음이 무겁지 않않겠습니까? 홀로 쓸쓸하게 고린도로 들어가는 바울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만남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귀한 만남이 성사(成事)됩니다.
당시 고린도에 들어 갔을때 바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인데요. “3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실로 연약하고 두려웠으며 몹시 떨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들어갔을때 느꼈던 마음의 상태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강팍한 마음 밭의 사람들과 논쟁하다가 지쳤습니다. 지성에 갇힌 이들과 논쟁하며 두려웠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선물을 준비해 두셨는데 바로 아굴라과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2 거기서 본도 출신의 ‘아굴라’라는 유대인을 알게 되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리자, 그는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얼마 전 이탈리아를 떠나 그곳 고린도에 와 있던 참이었다.
아굴라의 고향은 본도 (Puntus)입니다. 본도는 비두니아 지역의 북동쪽에 있는 도시로 아굴라가 본토 유대인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목격한 유대인들이 본도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이때 아굴라가 복음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을거라 추측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부부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굴라는 로마에서 상당히 큰 사업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사업을 했는데 제국의 수도 로마에 천막제조업자로 잘 정착했던 아굴라가 로마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대략 2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을 일삼게 됩니다. 지역에서 발생하는 폭동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니까 로마 황제였던 글라우디오가 로마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로마에서 나가라는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내외도 고린도 지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추방령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면 바울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기 위한 위대한 섭리였습니다.
황제의 추방령으로 인해 고린도 지역에 바울 보다 먼저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먼저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사업장에서 천막 노동자로 일하게 됩니다. 그들을 찾아 간 것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취직한 곳에서 일을 하다가 바울은 어떻게 예수를 만나게 되었는지 간증을 나누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의 이야기는 복음의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비춰 보았을 것이고, 내외의 마음이 풍요로워졌을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이들 부부를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자기를 위해 생명의 위험도 무릅썼다고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이 에베소로 갈때에 함께 갑니다. 3차 전도여행중에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 보면 ,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사역의 결실이 사람이라면 사람은 지나가도 함께했던 사랑은 남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길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 온 부부를 통해서 새힘을 얻었고, 만남은 그에게 행복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꼭 필요한 사람을 곁에 두심을 알아야 합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의 글을 소개합니다. “성실(誠實)에는 마침표가 없다. 나이도, 황혼기도 없다. 매사 성실히 임하되 즐길 줄도 아는 사람, 자기 일에 몰두하되 옆과 뒤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그가 곧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이며,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머물러 살면서 힘을 내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핍박은 그곳에서도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심하게 대들면서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예수를 모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항의의 표시로 자기 옷의 먼지를 털면서 “여러분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당신들의 책임이지,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떠나고자 합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매우 큰 곤경에 처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고린도를 떠나서 이방인에게 복음 증거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내외는 박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울 옆에서 도와 주었습니다.
사람이 감정이 상하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감정에 휘둘려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힘들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라는 생각을 부추깁니다. 받은 은혜가 줄어들게 되니 은근히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믿음 생활해도 의미가 없다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끝이 아닙니다. 그 길 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생각이 바뀝니다. 믿음의 길에서 좋은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십시요. 믿음의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위에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두셨습니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될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9 어느 날 밤,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 될 사람이 많다.”11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러 있던 ‘어느 날’ 밤에 신비로운 환상을 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 될 사람이 많다.”
여러분 보스턴은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도시입니다. 보스턴 지역에도 주님은 ‘나의 백성이 될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참된 진리는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두려워 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다시 붙들었습니다. 겉으로 볼때는 보이지 않아도 사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고린도 성안에 구원 할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후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진술합니다. 이때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 삶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랑할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끝에 머물고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지닌 사람만이 갈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땅끝은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치유가 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당장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은 먼저 기도하며 한곳에 머무르십시요. 여러분의 교회가 기도의 등불을 켜고 준비된 동역자로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스스로 홀로 설수 없는 교회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 가야할 방향이 보이고 함께 걷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길에 왜 고난을 만나게 될까 질문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걷는 길에는 꼭 평탄한 길만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걷다 보면 믿음의 근육이 붙고 가야할길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찾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만남은 서로의 믿음의 이야기가 만나게 되는 놀라운 복음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꼭 한 번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보다 앞서 가시며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설교를 마치며 이사야 43장 말씀이 생각나서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1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의 것이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에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때로 두려운 길 일지라도 우리가 꼭 한번은 걸어야 할 소망을 향한 길이며, 때로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함께 걷기를 소망합니다.
7/2/2023 | 성령강림후 제 5주
예수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 A person led by the Spirit of Jesus
사도행전 16:16-25, 요한복음 3:17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사람들도 이기적인 방법으로 미래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교도의 마술사들을 보면 자연현상이나 사람의 꿈을 통해서도 미래를 예측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 후보들 가운데는 무속인들을 찾아가 제물을 차려 놓고 정성을 다해 치성(致誠)을 드립니다. 대한민국에 무속인의 수가 최소 100만명에 이르는 것을 보면 점을 통해 미래를 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겠죠. 공허함과 미래의 대한 불확실함이 커져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관심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시작과 끝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세상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2천년 전에 때가 되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질 때에 그 끝이 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을 보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성경은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요. 사람들이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주권은 땅끝까지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 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몇세기를 보게 되면 세계부흥의 역사는 성령의 체험과 회개운동으로 일어났습니다. 17세기에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부흥운동이 1735년 웨일즈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1714-1773)와 다니엘 로랜드(Daniel Rowland, 1713-1790)에 의해 일어납니다. 이 운동은 미국의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 ∼1770) 의해서1차 대각성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성령의 충만이 한꺼번에 쏟아졌던 시대입니다. 술집이 문을 닫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교회로 모으셨습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부흥의 운동은 2차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퍼지게 됩니다. D.L 무디 목사(Dwight Lyman Moody, 1837 ~ 1899)를 통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깊은 잠에서 깨웠습니다. 그는 시카고에 무디 신학교를 세워 복음사역을 위한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자신의 고향인 메사추세츠 주의 노스필드에서 선교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대규모 선교운동을 통해서는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설립되었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학생들에게 선교적 도전을 주어 당시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에도 아펜젤러 (Appenzeller, 1858~ 1902), 언더우드 Underwood, 1859 ~ 1916), 스크랜튼 (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 1909),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등의 선교사가 오게 됩니다.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1906년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 1908년 만주 중국 부흥운동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모든 부흥 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뤄진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회개하는 곳에서 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속화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믿음대로 살아가는 일은 어리석고 미련해 보입니다. 방주를 만들던 노아를 주목하지 않을 뿐 더러 조롱하고 비웃었던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를 외면하고 알아 차리지 못했습니다. 경제만을 기반으로 쌓아 올리는 사회적 악이 사소한 것이라 느끼십니까? 어린 아이들이 자라면서 짓게 되는 죄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좋지 않은 소식과 뉴스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죄로 인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욕망의 결과들 아닙니까? 세속화된 세상속에서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이 영향력을 발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의 영에 이끌리십시요
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 바울은 약 3년간 아라비아 광야에서 하나님과 깊은 독대를 합니다. 사막에 있는 시간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잊지 않았을테니까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빈곤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도 않고 예수를 이방에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러 광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 그 발걸음을 멈추니 그제서야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차원에만 몰두하게 되면 노아의 시대처럼 방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먹고 마시면서 마지막 때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물질주의적으로 돌아가는 체제속에서 심적 공허함이 시대를 절망케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야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광야를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마주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지금도 마지막을 향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시대를 분별하고 시대적 사명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적 사회속에서 성도들은 거룩한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세상속의 빛과 소금으로 살기위해 행동하는 신앙, 공감하는 신앙이 성도들의 삶을 아름답게 해 줍니다. 주어진 삶이 미완성이기에 현재의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현재라는 기회를 예수의 영에 이끌려 열심히 살아내는 것뿐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내가 세웠던 계획이 차질이 생기고 인생의 문이 닫히게 되면 두렵기도 하고 불안해 지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계획이 막힐 때마다 그 뒤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시작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 여행 때에 심었던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돌아보기 위해서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아시아 지역의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전도의 문이 막히자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의 북쪽 지역인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16:7)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려고 애를 쓰는데 기도를 하던 중에 환상을 봅니다. 16:9절을 보면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인생의 계획을 바꾸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인간이 거스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며 예수님이 알고 계셨던 때였습니다.
이 시대는 농경사회였던 과거에 비해서 인생의 길이 다양해 졌습니다. 이로 인해 인생의 길이 열린 길 같을 때에는 즐겁게 걷다 가도, 막힌 길 앞에서는 울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길 위에서 낙심이 찾아 올때 영혼을 일으키는 비결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의 영에 이끌리는 믿음을 통해 인생의 남은 이야기를 써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지라” 말씀합니다. 예수의 영이 바울과 실라가 소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고 유럽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믿음의 발걸음을 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지요. 성령에 이끌려 빌립보 지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도착해서 그들은 기도할 장소를 찾아 갑니다. 첫번째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경건한 여인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됩니다. 이후 온 집안 사람들이 다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이방인을 위한 빌립보 교회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도하러 간 곳에서 만난 여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주인들에게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인생이 참 비참해 보입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수 없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인생입니까? 주인들에게 돈을 벌어 주기 위해서 점을 치는 인생이 참 고단했을 것입니다. 점을 치는 여인의 운명은 참 씁쓸한 여운마저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일까요? 예수님은 억눌린자, 갇힌자들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들을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귀신이 들린 여종은 바울을 보자 오히려 전도를 합니다. “이분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로,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바울이 이 일로 여러 날 괴로워합니다.
행 16:18 “이같이 여러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바울도 여인의 삶을 보며 괴로워 했을까요? 돈에 사로잡힌 주인들이 여종을 욕망의 도구로 쓰고 있음에 괴로웠을까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여종 안에서 있는 귀신을 예수이름으로 나오라고 명령하니 즉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종의 반응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인들은 자신들이 벌던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이익의 수단이 사라지자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를 공적인 문제로 포장해 버립니다. 보십시요. 유대인들이 들어와 로마 시민들의 풍속을 전함으로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16:21)
이 일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당시 매질은 맨살이 떨어져 나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명령을 받은 간수들은 그들을 깊숙한 감방에 집어넣고 발목을 차꼬로 채워 단단히 묶었습니다. (24절) 바울과 실라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는 길에 한 사람을 만나서는 복음을 전하고 유럽 지역에 첫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서는 복음을 전했지만 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는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옥중에 매임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몸은 매질을 당해 고통스럽고 몸은 옥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도하며 찬양합니다. 바울을 묵상하는데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옥에 갇혔던 주기철 목사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목사님이 못이 무수히 박힌 길 위를 걸어가는데 영화속에서 성도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불렀던 찬양이 기억났습니다. “1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따라서 죽도록 충성 하겠네 2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 하겠네”
바울과 실라는 자신의 고통만 해결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매질의 고통이 그들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마음까지 묶을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깊은 옥고를 치르고 있는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부른 찬양과 기도를 그곳에 있던 죄수들이 다 듣고 기도할 때에 지진이 나고 옥터가 흔들렸습니다. 그들을 채웠던 수갑과 차꼬가 저절로 풀렸습니다. 이 일로 두려움에 떨던 간수는 죄수들이 탈출한 줄 알고 자살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간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에게 내릴 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의 행동을 만류합니다. 간수는 그들이 무서워 떨면서 사도들의 발 아래 엎드려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행16:30) 물어보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간수에게 감옥은 온 집안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영에 의해 인도함 받는 삶은 아름다운 축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을 대충 대충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영이 2023년 7월 2일 여러분을 다시 부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운명을 건 사람들이 아닙니까? 세상속에서 살며 속하지 않으려면 보냄 받는 자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한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찾아 오셨듯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를 듣는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사랑에 날마다 응답하시며 보냄받는 자의 사명으로 살아 가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영에 이끌리면 꽃을 피우는 삶도, 피었던 꽃이 떨어지는 삶도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안에서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켜 나가기 어려운 때일수록, 선한 마음이 꺾여질 때 일수록, 성령의 불꽃이 마음 안에서 가물가물 꺼져 갈 때 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죄를 속죄해 주신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서지 않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이전의 십자가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아납니다. 관계의 문제, 건강의 문제, 가족과 진로의 문제 자녀의 문제 인생의 모든 문제로부터 살아납니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고 보내셨소”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자기한계를 깨닫고 삶의 균형감각을 찾으십시요. 때로는 흔들릴 때도 있고, 낙심 될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잠시 걷던 길에서 멈추고 성령이 이끌어 주시는 힘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리움이 우리를 이끌도록 맡겨 보십시요. 한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삶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6/25/2023 | 성령강림후 제 4주
성령의 3번째 사건, 고넬료 Cornelius, The third event of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10:1-4, 9-17
냉전시대 세계사에서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호 솔제니친은 인생의 목적은 번영이 아니라 영혼의 성숙함에 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썼다가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감옥소 생활을 쓴 글로 노벨상을 받고 결국 구소련에서는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20년동안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줄 알았는데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섬기는 나라라며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러시아 혁명으로 비극적인 피의 전쟁이 일어난 이유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C.S Louise는 역사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되는 분기점이 ‘계몽주의 운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 했는데,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상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지성으로, 과학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다 보니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 세상이 시작된 것이라고 했지요. 어쩌면 우리도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우리는 오순절 이후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령의 능력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 올리며 자기의 명예를 이루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힘은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해치는 위험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제를 주인이라 부르던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침착하고 품위 있는 행동,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태도, 고문을 앞에 두고도 냉정을 잃지 않는 용기를 통해 불신자들에게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느꼈던 성도들의 좋은 인상은 삶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만남을 갈망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찾아가십니다. 지금도 누가 진심으로 자신을 찾는지, 누가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2천년 전에도 알고 계셨고 지금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의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목마를 자에게 생수가 필요하지요. 타는 목마름으로 예배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시지 않을까요? 누가 나를 필요로 하나 알고 계십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란 말을 듣지요. 기독교의 구원의 속성도 배타적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0: 11-13절을 보면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기독교의 구원은 의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하는 차별이 없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죽은자’로부터 살리신 인류의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힘을 믿는 이들은 성령을 의지하면서 전생애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3대 변화 사건을 보면, 야외예배때 살펴 본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의 성령강림사건입니다. 두번째는 지난주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고넬료의 이야기인데, 이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최초의 성령세례 사건’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전부라면 신앙생활에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찾아올 때에 주안에서 기뻐하라, 평안하라고 하는 말씀이 이해가 될까요?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베풀며 살아가라는 메세지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뒷모습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어렵게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무명한자 같으나 성경은 유명한 자라고 하시고, 가난한 자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내 능력과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은 현실은 암담하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환경에서도 말씀으로 잘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기다려주시고 품에 안아 주시는 경험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나의 욕망이 십자가에 날마다 못박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만남이 이뤄집니다.
성경은 2천년전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이방인이 성령세례를 받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데 이방인 고넬료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착하게 살아간다고 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고넬료의 회심사건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한 길이 있다는 것과 구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갈망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귀를 막고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은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를 낯선 사람인냥 바라봅니다. 경계심을 품고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경계심은 하나님의 사랑 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경계선이 많을수록 생명력은 약화됩니다. 마음의 한자락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존귀한 자녀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모두가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편견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벌레나 부정한 짐승처럼 불결하다고 여겼습니다. 당연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매우 높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 11장 3절이 전해줍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함께 유숙하며 음식을 먹었던 일에 대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교회에 보고를 하자,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지요?” 하고 따졌다.(행11:3)
성령이 오셔서 하는 사역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을 찾아가 제자 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세상속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미전도 지역에도 있고, 무심히 지나치는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에게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는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성장학이 관심을 끌던 시기에 많은 교회마다 부흥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홍보했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을 결신시키고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면 그 전도 프로그램을 많은 교회들이 배우고 와서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적용하는 목적이 대부분이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새로운 율법주의 요소들입니다. 교회는 성숙한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와 경영 논리에 젖어 버리게 되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숫자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인원수를 채우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영성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얕은 만족과 인스턴트 훈련 프로그램으로 심리적 명분을 세우기에 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마십시요. 기대감을 갖고 듣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이방인으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기념하여 지은 지명이며, 이곳에는 당시 로마 점령군의 본부가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로마 군대의 부사관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부대의 지휘관이고 지배계층임에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가난과 욕망의 한계를 뛰어 넘게 하시고, 어려움을 견디게 합니다. 인간의 성품을 넘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도를 하게 하시지요.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만 계시다고 생각하던 유대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최초의 이방인에게 어떻게 임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2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첫번째 환상은 고넬료가 기도를 하는데 제 구시쯤이니 오후 3시이지요, 그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기도하던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이 되었으니,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합니다. 욥바는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해변 도시입니다. 성령께서는 해안가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가 유숙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고넬료가 집안의 하인 두명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욥바로 보내게 됩니다.
두번째 환상은 베드로에게 임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 고넬료가 보낸 세사람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때 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시간이 제 육시였습니다. 오늘날 시간으로 낮 12시 입니다. 배도 고프고 식사할 시간이지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전날 오후 3시쯤 출발해서 다음날 12시쯤 도착했으니 하룻길을 걸어서 온 것입니다. 이들이 도착할때 쯤 베드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데,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섞여 있었으며,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이 섞여 있었습니다.(레 11, 신 14:7-20)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관례에 근거하여 부정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구원의 믿음은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소리가 나는데 “어느 것이든, 더럽다고 하지 말아라. 모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이다.” 이런 일이 환상 중에 세번이나 반복되더니 그릇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행 10:19, 20절을 보면 “19 때에 베드로는 방금 본 환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지금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는 중이다. 20 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지체 없이 그들을 만나,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달랐기에 혼란 속에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 도착 합니다(17절) 베드로는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라고 묻지만(21절) 베드로는 이미 성령의 지시를 받았기에, 자신을 찾아 온 이유를 물음으로써 확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그들을 불러 들여 집에서 유숙하게합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욥바에 있던 형제들과 함께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고넬료를 보러 가이사랴로 갑니다(23절) 베드로의 동행자들은 베드로 자신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 3명과 욥바의 형제들 6명 총 모두 10명이었습니다. 10명의 사람들이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이 걸려 도착합니다(9절). 그곳에 도착하니 고넬료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24절)
고넬료는 베드로를 보자마자 로마군대 지휘관임에도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알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찌할줄 몰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그를 일으킵니다. 고넬료는 이미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의 집에 들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부어지는 성령으로 인해 놀라게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35절에 나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신다” (35절)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죄사함 없이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줄 압니다. 사도행전의 곳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윤리적인 사람들, 즉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들 조차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오순절에 유대인들은 “경건한 사람”(2:5)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경건한 유대인들도 회개하고 죄 사함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침으로써 그의 설교를 끝맺었습니다(2:38)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짐”은 단지 속되지 않거나 부정하지 않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때에는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오순절 성령충만한 삶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체험되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목자없이 방황하며 죽어가는 백성들이 우리의 눈에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구원받기 위해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10장 43절에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너희가 복음을 듣고 그를 믿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함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그가 삶에서 진리를 더듬어 찾는 것을 받으셨고 하늘에 상달되게 하셨습니다. 고넬로는 인생의 궁극적인 답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해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지요. 우리를 만나 주신 주님은 그들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고, 모든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예수님을 홀로 두지 않고 매일 십자가 은혜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10:4 고넬료는 두려움 속에서 천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여, 무슨 일이십니까?” 천사가 말했다. “너의 기도와 가난한 이들을 향해 베푼 네 구제의 손길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크고 놀랍습니다.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십시요. 주님의 힘이 우주를 가득 채웠습니다. 주가 지으신 세상을 바라 보십시요. 지저귀는 새들도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존귀한 자녀 삼으시려고 외아들을 아낌없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모든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귀한 자녀는 환경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리를 떠나십시오.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사람의 말과 인정 받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겸손히 주님을 찬양하십시요. 성령의 사람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보다 한분의 평가와 인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분이 알아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시 또 목마르고 공허해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존귀하다’ ‘사랑한다‘ 하십니다. 한주도 허락하신 삶의 자리가 예수님이 거하시는 푸른 초장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6/18/2023 | 성령강림후 제 3주
사울에게 임한 성령님 Holy Spirit who came to Saul
사도행전 9:8-11,18, 고후 12:9
성령강림후 세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사울에게 임하신 성령’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스데반 순교 사건에서 잠시 등장한 사울은 그 이후에도 흩어진 기독교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역의 다메섹까지 가기 위한 법적 효력이 있는 공문까지 청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200km이상 떨어진 지역인데도, 바울은 다메섹까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사울이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율법과 전통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으며, 기독교 신앙이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의 율법에 도전한다고 느껴 강하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파하였을때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이 경계대상이었고,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서둘러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태어난 곳은 길리기아 다소지역입니다. 다소지역은 교통과 상업, 교육이 발달한 도시로 로마 제국 지방 행정수도였습니다. 바울은 태어나면서 부터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행22:39) 그의 아버지는 텐트를 만드는 직업이었으니, 과거에 1세대가 미국에 와서 힘든 일들을 하면서 2세대를 키웠던 것처럼 바울은 다소지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유대 히브리 문화와 로마식 헬라 문화인 이중 문화를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는데요.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 하나님께 묻다’라는 뜻이며이고,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 으로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의 회심사건과 성령의 통한 신비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신비는 유대교를 뛰어넘어서 기독교 복음이 온 세상을 향해 가게 되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추구하던 유대교 신학을 어떻게 내려 놓게 하셨고,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바울의 마음 중심에 어떻게 자리 잡게 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내가 끝난 자리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4 사울은 그만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때 한 음성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5 사울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7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소리만 들렸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지냈다.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본 후에 사울은 시력을 잃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사울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다메섹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의지해서 걸어야만 했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조차 없는 지경이 된 것이지요. 평생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두려움과 불안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을것입니다. 바울은 그 시간 동안에 지난 날들을 회고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듣지 마시고, 바울이 처한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느날 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평생토록 시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로마 시민권, 가말리엘의 학식,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도 철저하게 낮아졌을 것입니다. 그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인생이 망가진 것입니다. 이 일이 바로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경험한 바울의 상황이었습니다. 주의 빛으로 나아가게 되면 새 힘이 임하고 회복이 되어야 할텐데 바울은 오히려 어떤 것도 할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가 믿었던 모든 기반이 흔들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통계를 보니까 ‘실패, 거절, 고독,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기피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공 신화에만 마음을 기웃거리며 동경한다면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지요. 복음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오심으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이제껏 믿고 의지하던 능력이 나의 능력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희망적인 것들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때때로 삶의 의욕이 없는 날도 있고, 절망적인 상황속에 놓여질 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걷게 될때도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인생길 위에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부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바울을 위해 이미 다메섹에 제자 아나니아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10 한편,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한 제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주님께서 환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셨다. “아나니아야!” 그가 대답했다. “예, 주님!” 11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 거기서 다소 사람 사울을 만나라. 그는 지금 거기서 기도하고 있다.
며칠전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사울이 유다 사람의 집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뜨인 사람과 뜨이지 않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평생 본인의 눈으로 보는 세계만이 전부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과 기도로 영적인 눈을 뜬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눈을 뜬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면 우리를 통해 세상속에 아나니아가 늘어 날것입니다. 다른 세계를 본 사람들에게는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아나니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이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려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참된 길을 알려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16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 내가 그 사람에게 보여 줄 것이다. 17 “사울 형제여, 당신이 이리로 오는 도중 당신에게 나타나셨던 주 예수께서 당신을 다시 보게 하고 또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저를 여기 보내셨습니다.” 18 바로 그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떨어지더니,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세례를 받았다.
바울에게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는 큰 장애물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해 지자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게 되는 고난은 말할수 없는 축복이 됩니다. 내 안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증해 가는 것입니다.
15 그러나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가거라!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그들의 왕들에게,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내가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내가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주님은 사울을 쓰시기 위해서 다메섹에서 그의 이름을 2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어려서 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많이 들고 자랐겠습니까?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는 그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이 불려진 것입니다. 사울이 그날 들은 소리는 그 동안 사울이 박해하는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그릇은 인생이라는 나를 위한 욕망을 담는 일에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말씀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지금 기도하는 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사람이고, 믿는 자들을 결박할 권한을 가지고 온 사람이 아니냐는 대답에 재차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의 빛을 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전하고 고난이 오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이 오면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길을 걷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며 유대인로 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모함을 당하고 무고한 재판을 받는 시간들을 경험합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행 22:30) 이후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됩니다.(행 24:23) 세번째 재판은 로마 신임 총독이 된 베스도 앞에서의 재판입니다.(행 25:1-12)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됩니다.(행 26:1-32) 산헤드린 공의회,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간증하고, 결국 로마를 향하는 배에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예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려 죽을뻔한 경험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을 피해가며 사역을 했다면 과연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말씀이 이뤄졌을까요? 바울이 지낸 감옥에서의 시간들은 돌이켜 보면 바울의 신변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 주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며 바울의 서신들을 남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영에 이끌린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방인과 임금들을 만나게 됩니다.
영화 The Passion of Christ의 감독이며, 배우인 멜 깁슨은 이 작품에 배우로 출연하지 않지만 딱 한번 영화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등장을 합니다. 얼굴을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을 땅에 눕히고 대못을 손에 들고 못박은 로마 군병의 손이 바로 멜 깁슨의 손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이 예수를 못박아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영화속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화사에서는 ‘예수의 수난 12시간 이야기’ 만으로 흥행할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나에게 임하셨고 주님은 나에게 복음 전파의 도구로 이 영화를 만들기를 명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개봉 첫날부터 극장마다 부흥회가 시작되고, 강도와 살인범이 영화를 보고 회개하고 자수했고, 낙심자들이 다시 회개하며, 주께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멜깁슨은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 유대 단체들의 거친 질문들 앞에서 “여러분 내가 그분을 죽였습니다. 저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고, 저의 죄 때문에 수난을 받으셨다”고 인터뷰 합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나로 살아가는 삶의 죄앞에 놓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로 그 사랑을 확증하신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고난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랑의 줄에 매인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나의 약함은 주님의 능력이 되십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육체의 가시가 간질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육체의 가시가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점이 오히려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해 지는 도구가 됨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힘의 위험성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동안에 자신의 힘을 내려놓는 일에 마음을 쏟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힘으로 저항하지 않고 무능한 자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힘으로 보면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위대한 실패’가 되었습니다. 저는 실패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공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과 실패로 복음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복음의 결과일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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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 11:10-12)
우리가 가지고 있는것중에 영원한것이 있을까요? 물질도 시간도 명예도 기억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만 영원합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처럼 우리 삶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세번이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문제를 없애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의사 누가라는 동역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약함을 고백할 때에 담겨집니다. 우리의 약함은 믿음의 양약이 되어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여러분은 언제 더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삶의 고통이 찾아오고 힘들 때 절실하게 기도하게 되지 않습니까? 내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 힘을 의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동서남북이 가로막혀 길이 보이지 않고, 벼랑끝에 서게 될 때에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삶의 가시들이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요.
약함의 자리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늘도 빚어지고 다듬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삶이라는 대본을 받았습니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선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내 삶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우리안에 아픈 가시의 상처도 아물게 됩니다. 내가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하는 분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힘든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에도 언제나 그러하셨듯 우리의 손 잡아 주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인도하심이 망망한 바다의 끝, 외로운 광야의 자리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11/2023 | 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 환경선교주일
스데반 안에 계신 성령 The Holy Spirit in Stephen
사도행전 7:55-60
오늘은 성령강림후 두번째 주일이며 환경선교주일입니다.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게 될텐데, 스톨의 녹색은 믿음의 성장을 표시하는 색깔입니다. 이 스톨을 보실 때 마다 믿음을 성장시키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감싸주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가 담긴 매우 긴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순교 사건이 소개되지요. 스데반의 순교는 구원사에 있어서 ‘적색순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환경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인한 수많은 북극곰들의 죽음과 발생하는 화재들, 폐수로 인해 죽어가는 바다 물고기, 환경오염으로 인한 수많은 자연재해 등은 ‘녹색순교’가 아닐까요? 우리는 녹색이 은총인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지으시고 난 뒤에, 사람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피조세계를 잘 관리하라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창조된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삶의 일터와 땅을 밟고 살아가는 현장에서 성령께서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터로 나가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매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늘날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적색순교’의 박해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보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탐욕에 물든 마음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매일 순교의 삶을 연습하는 것이지요.
태초에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이 있던 곳에 에덴동산을 창조하셨습니다. 지상의 파라다이스입니다. 에덴을 만드시고 인간을 초대했을때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 그림 한장이 있습니다. 후안 후아네스(Juan de Juanes, 1510-1579)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인데요. 그는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났고 16세기 후반에 ‘스페인의 라파엘로’로 불렸을 정도로 유명한 발렌시아 화가로 성장합니다. 500백년 전 그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안에는 그의 생각과 시대적 배경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미술에 조회가 깊어 질수록 더 많이 발견될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된 인간 안에는 ‘신적갈망’이 있고 분명히 보여져 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는데 있습니다.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 인해 창조자의 숨결을 모른다고 핑계되고 변명하는 것이지요. 죄로 인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바벨탑을 쌓으며 엄청난 발전을 이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던 인간 생명의 신비에도 도전합니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마음만 먹으면 복제인간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문명과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 20, 21절에서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지구의 파괴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중심의 발전을 이룬 어두운 그림자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의 신앙 안에는 성령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Στέφανος)은 ‘면류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그의 짧은 삶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 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첫째로, 스데반의 삶속에는 성령의 영이 가득했습니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사도행전 6장 5절에 집사로 선택된 일곱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에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헬라파 유대 과부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7명의 집사를 택하기로 결정했고, 그 선택 조건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뽑힌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라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설교에 언급된 인물들을 보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삭, 야곱, 그의 열두 아들들, 모세, 여호수아, 다윗과 솔로몬까지 구속사를 꿰뚫고 열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는 너희들이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제 눈에 띄인 것은 스데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유대인들은 직면하기 싫은 죄가 드러나자 죽일듯이 달려듭니다. 감정의 노예된 것처럼 분노하며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맞으면서도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보면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언급하는데, 사도행전 6장 8절은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소개합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합니다. (막 15:1) 스데반도 백성, 장로, 서기관에게 잡혔습니다(행 6:12)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를 죽일 거짓 증거를 찾았고(마26:59) 스데반이 설교할때에도 그들은 처벌하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행 6:13) 성경은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라고 하면서, 스데반 집사의 얼굴도 ‘천사와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도록 기도했고’, 스데반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보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기도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일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전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삶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삶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보여진다면 그건 믿음으로 인내한 시간들이 빚어 낸 결과일 것입니다.
둘째로, 스데반은 ‘재창조된 세계’를 보았습니다.
56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신뢰가 쌓이고 믿음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말씀 안에서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을 매일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는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밖의 세계가 두렵다고 해서 뱃속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버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이지 보여 주십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이 자라간다면 순종하는 일에 어떻게 머뭇거릴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성령의 임재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지고, 예수께서 함께 하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내적 친밀감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을 본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생의 표적들’(The Mark of the New Birth)이란 설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표적이 나타나는데, 첫번째 표적은 그리스도를 확신할 때 부어지는 ‘살아있는 믿음’과 두번째 표적은 ‘산 소망’입니다. 죽은 소망은 모든 악한 말과 나쁜 행실의 근원이며,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산 소망’은 세상에서 막연히 잘 될거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양심의 증거’이고, 어떤 상황에도 절망 가운데 보호하시는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셋째로,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58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58절에서 사울이라는 청년이 처음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청년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많은 이들의 숭고한 피가 새시대의 문을 열기 위한 희생이었듯 ‘적색은총’은 생명의 강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매일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걸어 간다면, 주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스데반의 피값이 바울의 생애에 이어짐을 보게 되는데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빛을 본 후에 바울의 삶의 가치와 방향, 삶의 이유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신생의 표적’입니다. 이후 바울은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가서 전도를 하지요. 또한 동족 유대인들 설득하다가 핍박과 박해 속에서 고소를 당하고 결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스데반의 일을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행 22:20절을 보면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스데반에게 바울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던 바울은 그 복음을 경험하고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던 AD 30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기독교는 엄청난 박해로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할수도 있구나 겁도 났을 것입니다. 죽음이 현실 앞에 다가오니까 결국 마음이 흔들리고 뿔뿔히 흩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흩어진 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8:4)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의 흩어짐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면은 세계 선교로 퍼져가게 되는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이것의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을 X,Y,Z라고 했을때, Z라고 하는 부분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물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Z라는 높이가 없다는 것은 사물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Z를 성령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어머니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때때로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도 성령의 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성령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신앙의 깊은 세계로 초대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계와 멀어지고 계신가요? 아니면 가까이 들어가고 계신가요?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모두 다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제한없이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을 뿐입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다시 깨어날 테니까요.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얼 얻으려고 열심히 달려가십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어두운 세상에 새벽을 깨우며 빛을 밝히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