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6/4/2023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7
우리 안에 시작된 선한 일 A Good Works That God Began Within Us
빌립보서 1:3-8
약 한 달 반 동안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서울 남연회에서 주관하는 은퇴식에도 참가했습니다. 제가 저의 은퇴식을 따로 알리지 않았습니다만, 우리 교회를 거쳐간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평생 가보지 못했던 남해 여행을 했고, 후배 목사들과 함께 동해 여행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조국의 산천과 또 눈부시게 발전한 조국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모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져 우리 교회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 지난 37년 간의 저의 목회생활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회 있는 대로 설교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은 빌립보서 1:3-8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곳곳에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끈끈한 사랑의 관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3절) “나는 늘 기쁨으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4절) “여러분은 제가 복음을 전할 때 도움을 주었습니다.” (4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해 왔습니다.” (5절) “여러분은 늘 제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7절)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여러분은 그 모든 시간에 나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7절)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8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8절)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라는 사람을 통해 바울의 선교사역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습니다(빌립보서 4:18).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빌립보 교회를 대표해서 바울을 섬겼습니다(빌립보서 2:25).
이런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God began the good work within you, 6절)”라고 합니다. 자연히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 ‘착한 일’ ‘a good work’가 무슨 일일까 하는데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번역성경들이 있지만 NKJV이 이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od has begun a good work within us.”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시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은 어떤 일일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결코 우리 안에서 시작될 수 없는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혹은 하나님의 뜻, 삶의 목표, 사명, 하나님의 은혜, 이런 말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이것들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 되었습니다. 맞습니까? 이런 가치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을 믿을 때 형성되는 가치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 중심의 삶(Christ-centered life)’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4:4에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My con-science is clear, but that doesn't prove I'm right. It is the Lord himself who will examine me and decide).”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내가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혹은 하나님이 내 삶의 가치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세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old self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So I live in this earthly body by trusting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맞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by trusting in the Son of God(하나님의 아들을 신뢰함으로)'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은 매일 매일의 삶을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면서,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쪽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시는 사람의 삶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꼭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시고 우리가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0)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의 죄성(罪性, sinfulness)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삶이 변화되어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계 속에서 하고 계시는 일을 말합니다. 서기 1세기는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으로 펴져 나가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언젠가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1934)’라는 저서로 유명한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 영국)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역사의 연구’는 토인비가 1934년에 집필을 시작해서 1961년에 마친 12권의 방대한 분량의 책입니다. 토인비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When a wooden boat carried the Apostle Paul from Troas of Asia Minor to Macedonia, it moved the center of the world from the birthplace of civilization to Medi-terranean and to the European Continent (소아시아의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사도 바울을 태우고 간 (작은) 목선은 세계의 중심을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지중해와 유럽 대륙으로 옮겨 놓았다).”
토인비가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중요한 시기에 바울이라는 사람을 선택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겼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사도행전 9:15-16) 왜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바울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바울에게 선교비와 선교에 필요한 물자를 전달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교 교회에 대하여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고마운 마음을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복음을 전할 때, 늘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음을 들은 그 날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5절) 또 빌립보서 4:18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 준 선물 때문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선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그 시대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빌립보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바울을 도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 중에 마지막까지 바울의 선교를 도왔던 교회는 빌립보 교회가 유일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 속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바로 빌립보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이제 눈을 우리 자신들에게 돌리고, 우리 교회에게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는 분은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십시오.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게 주신 시대적인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나무를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큰 그림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에 동참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시작하시는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성장하도록 할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선한 일’이 시작된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내 안에 시작되고, 자라고 있는 하나님의 ‘선한 일’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것,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은 어떤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어렵거나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그 사람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주께서 지시하시는 길로 가며 주님의 명령을 지켜 주님을 가까이하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주님을 따르고 섬기시오(Love the LORD your God, walk in all his ways, obey his commands, hold firmly to him, and serve him with all your heart and all your soul).” (여호수아 22:5)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라니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Draw near to God and He will draw near to you. Cleanse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 (야고보서 4:8)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 때 어떻게 합니까?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하고 연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니까 죄된 일에서 손을 씻고 손을 떼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싫어하시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끊어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죄된 일에서 손을 씻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들과 연결되어 있는 끈을 끊기 시작한다면, 그 시간부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친근하게 생각되고,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관계는 차츰차츰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장하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는 말씀을 가슴으로 깨닫게 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일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이 일을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것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일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5/28/2023 | (성령강림절, 웨슬리 회심주일)
주님의 성령, 지금 이곳에 The Holy Spirit of the Lord, Now Here
사도행전 2:1-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며,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함께 예배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야외예배를 준비하며 섬겨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자연속에서 느껴지는 바람결에도 성령님의 어루만지심과 쉼의 시간이 되시길 바라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격려해 주시며 마음껏 누리는 날이 되십시요.
회심(回心)은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을 주께로 돌리고, 죄로 부터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문이 열리면 새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의 시대가 활짝 열려진 사건입니다. 교회사적으로도 보면 성령강림은 교회의 태동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세기후반 케임브리지 지역은 공장들이 지어지면서 노동자 계층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후 20세기 후반부터는 도시가 탈바꿈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계 나라에서 지식인들과 유학생들이 모여드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들은 더 강하게 성장하는 민족들에게 교회를 넘겨줌으로 새롭게 이어지는 복음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책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사진과 글로만 보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집니다.
당시 필그림 교회의 목사였던 벤드로스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우리는 경주를 뛰었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우리의 빛에 믿음으로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겸손하게 필그림 교회의 커튼을 내릴때가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1992년을 맞이하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기도가 쌓여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지켜온 누군가의 눈물이 남아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3년에도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며 예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의 특권이지요.
인간의 일생은 탄생과 성장을 거쳐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회도 역사도 무한한 발전이 아니라 쇠퇴되거나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수천년간 이어온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변화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의학이 발달되어 100세 시대가 오고 사람들은 천수 (天壽)를 누린다고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함’ 앞에 서면 모든 인간의 수명은 ‘Zero’에 가깝기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되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때에 한국 교회는 어린이 여름성경학교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새벽기도회도 있었구요. 정말 많은 어린이들이 새벽기도에 나와 은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너무 많은 이유들로 하나님의 일을 제한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귀한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내 삶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로 한걸음 물러서 있다면 성령강림절기를 맞이하며 다시금 주님 안에서 내영이 기쁨으로 회복되길 원한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일만 바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기쁨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팬대믹 기간을 거쳐오며 우리는 수많은 변화들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온라인 공간에 모여서 삶을 나누고 기도회를 갖었지요. 마치 오순절날에 성령을 기다리며 한곳에 모였던 이들처럼 말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한곳에 모였더니’라는 구절을 묵상하며 너무도 설레였습니다. 2천년전에도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여 믿는 자들이 ‘한곳에 모여’ 기도할때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처럼 인터넷이나 유투브가 없어서 한곳에 모이기가 쉽지 않던 시대인데 성령의 권능이 임하니까 세상을 뒤흔드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곳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릴때 일어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 ‘한곳에 모여’ 예배하는 곳에 지금도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약속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교회 공동체들 마다 믿음의 감격과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드리는 공예배, 새벽기도회, 가족모임, GT모임, 부서별 모임 안에서 성령을 사모하십시요. 하나님의 힘이 내면에 채워지도록 말입니다.
한가지 살펴볼 것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모든 사람이 일평생 단 한번 받는 구원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때에도 모든 민족이 모여 있을때 성령을 통해 장벽이 무너지고 진실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태동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동시에 일어났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세례 이후에도 성령충만함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열망해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베푸는 물세례는 예수님을 진실로 믿지 않고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의 마음을 정확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때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은 웨슬리 회심 주일입니다. 285년 전 하나님은 웨슬리의 마음을 붙드셨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중세시대 카톨릭의 부패 가운데 믿음의 기치를 들고 종교 개혁을 한 인물이라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종교개혁 있은 후, 200여년이 지난 18세기에 종교개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신학적 대안을 제시한 목회자입니다. 이를 통해서 웨슬리 신학은 19, 20세기 ‘미국 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무엇보다 ‘성결운동’과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인생에 있어서 운명은 날은 1738년 5월 24일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런던 올더스케이트(Aldersgate, London)거리에 있는 한 기도 모임에 참여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을 낭독하고 있는데, 밤 9시 15분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데 웨슬리는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바로 내 죄까지도 씻어주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 안에서 생겼다.” 그 날 이후 웨슬리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거슬러 올라가면, 1709년 2월 9일 웨슬리가 5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사택에 화재가 났습니다. 웨슬리는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1737년 3월 7일자 일기, 1750년 2월 9일 송구영신 예배 중, 1753년 11월 26일 자신의 묘비명 epitaph등) 밤 11시쯤 모두가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사택에 불길이 번졌고, 가족들은 빠져 나왔지만, 어린 웨슬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무너졌기에 위층 옷장을 딛고 올라가 창문에 기대어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웨슬리 아버지가 그를 구하려고 들어 가려다가 불이 거세어 들어 갈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하며 체념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어깨에 다른 사람을 올려 위층에 닿을 만큼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 어린 웨슬리를 잡아 내리는 순간 안쪽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날의 기억은 웨슬리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불속에서 살아남은 기억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30대 이전에는 박식한 부모 아래에서 교육을 받으며, 가난한 생활 환경에서도 십대때에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마스터 했으며, 경건생활, 성경을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삶을 유지했습니다. 젊은날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가 되고, 믿음과 삶에 있어서 그 어느 하나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웨슬리에게 한가지 없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웨슬리가 30대가 되었을 때, 그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고, 식민지 개척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미국 조지아의 사바나(Savannah)로 선교사로 지원합니다. 당시는 선교지를 가다가 배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735년 10월 25일 일기에 보면, “바다의 파도가 얼마나 세고 무서운지, 마치 하늘에 닿았다가 다시 지옥으로 뗠어지는 것 같았고…배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려…무엇을 붙들지 않으면 잠시라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맹렬한 파도는 10분마다 배를 사방으로 때려 산산조각 낼 것만 같았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상황속에서 이상하게도 배안에서 찬앙하고 기도를 드리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독일의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웨슬리는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겁나지도 않나요?” “감사하게도, 우리는 겁나지 않아요”라고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합니다. “그러면 당신네 아이들과 아내들도 겁나지 않나요?”라고 웨슬리가 되묻자, 아주 온유한 모습으로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합니다. “우리는 아이들도 아내들도 죽음을 겁내지 않아요.”라고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무서운 풍랑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그들의 평온함에 웨슬리는 무서운 풍랑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조지아 주에서 웨슬리는 2년 4개월 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가 1738년 2월 1일이었습니다. 영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신앙의 고민 가운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장래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성령세례’입니다. 웨슬리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웨슬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다가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맞이 한 날이 바로 1738년 5월 24일이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1)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2) 마음과 삶의 질적 변화이며 (3)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 체험이었습니다. 웨슬리가 깨달은 것은 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어려운 일을 만날때에 하나님이 마음을 붙들어주시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며 그 일을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웨슬리의 마음안에 하나님은 영국 국교회의 갱신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는 영국 국교회가 금지한 옥외 설교에서 “온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선언합니다. “내게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 열명만 달라. 그러면 세상을 뒤집어 엎어 보이겠다”라고 외칩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일은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십삼만오천명의 미디안 군사 앞에 하나님이 선택한 300명의 용사들은 절대 초라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세 앞에 성령의 권능을 경험한 이들은 미디안 대군 앞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주시는 힘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 안에 미워하는 감정, 부딪히려는 육신의 본성. 불신, 두려움이 사리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까? 아무리 잘 믿는다 해도 우리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듣고, 하고 싶은 대로 할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는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 권능을 받기 위해 늘 현재 진행형의 태도로 ‘한곳에 모여’ 성령의 권능을 받고 세상의 빛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도 이야기하고 ‘기도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을 간절히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체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시대’를 살아갑니다.
교회와 목회자, 성도가 한마음으로 한몸 된 지체들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함께 써내려가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눅1:8)
여러분의 땅끝은 바로 이 자리 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지금 이곳에’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며,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주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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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2023 | 부활후 마지막 주일, 승천 주일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We will be the hands and feet of Jesus
누가복음 24:46-53, 사도행전 1:11
오늘은 부활절 이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벌써, 사순절기를 지나 부활절 이후 7주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7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복되게 하심으로 우주의 질서를 세우셨지요.(창2:2-3) 교회력으로는 승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강림의 전주곡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음주일부터는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며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치게 되는데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슬픈 십자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기쁨이고 능력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승천하심은 끝이 아니라 교회의 탄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승천주일 말씀안에서 주가 주시는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쓴 이후에 후속편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로 마치는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오심 이후에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완전히 돌변하게 됩니다. 그들은 환란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죽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갑니다. 도대체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도 했고,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두려워 모두가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본능입니다. 죽음은 실제로 두려운 것이며,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의 영에 눌려 있던 것도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지배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길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후 10일이 지난 후 오순절 날이 이르며, 한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하심으로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자들의 변화만큼이나 예수의 부활의 객관적인 증거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2천년이 지난 우리들에게 주시는 증인 된 삶은 무엇일까요?
첫째, 증인은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1:11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셨는 것은 예수께서 모든 임무를 다 마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다시 복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들에 계신 위엄 있는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히 8:1)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 16:9)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시는 주님께서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자 하늘만 자세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이제 하늘을 그만 쳐다 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쳐다본 하늘은 ‘빈하늘’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 뿐 아니라 이제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빈하늘’은 욕망으로 인한 내적 공허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빈하늘’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채 소비 사회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아상이며, 물질 만능주의에 종속되어 부활의 기쁨을 상실해 버린 ‘허전함 마음’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빈하늘’만 쳐다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마지막 부탁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의 길 끝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 자들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주께서 40일 동안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은 이 땅에서 이기적인 것만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쫓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땅에 하찮은 사람, 보잘것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박한 이들 가운데도 생명의 가치는 위대한 것이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우주 저 너머 한구석에 천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은 장소의 차원도 아닙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차원’의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것은 세상과 다른 차원의 영역입니다. 1차원 공간을 사는 개미와 지렁이는 3차원 공간인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뱃속 아이가 바깥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의미를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우리가 지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차원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이 열리면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의 주님께서는 동행했지만 이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식사하러 앉으셨을 때에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주를 알아보게 됩니다. 두 제자는 그제서야 부활의 주님과 연합이 된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진 것이지요.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한 성도들의 영적 변화입니다.
누가복음 24:16 “그들의 눈은 가려져서 주를 알아보지 못하더라”
누가복음 24:30,31 “그가 그들과 함께 식사하러 앉으셨을때에 빵을 가지고 축복하신 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때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주를 알아보자 주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시더라”
인간은 누구나가 자신이 경험한 높이와 깊이만큼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부활 이후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일상의 세계를 뚫고 부활의 세계를 받아 들이며 사도행전의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의 삶속에 나타난 예루살렘에서의 증거, 사마리아에서의 증거, 땅끝까지 이르러 증거한 일을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의 1,2,3차 전도 여행과 하나님의 주권으로 로마까지 복음을 들고 간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바울과 함께 하셨던 성령의 역사였으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사도행전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살아 있는 한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릴리 하늘만 쳐다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으로 인해 완성될 나라를 기다리며 절망의 현실을 주님과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회개의 삶을 통해 전파 됩니다.
4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고 3일째 되는 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며
47 또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이다.
회개는 주님과 끊겨있던 마음이 다시 연결되어,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거짓된 삶에서 돌이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명예와 물질, 안정감과 풍요를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믿는 우리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때때로 미음이 무너져도 일어날 힘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사함으로 통한 회개의 삶을 통해 일어납니다.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가운데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재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삶은 과거의 나의 흠을 지우려고 애쓰는 삶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아래에서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십시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는 고통과 수욕(受辱) 받는 자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당연히 고난 당하시고 멸시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받는 예수님은 손과 발이 잘려진 듯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외치셨던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예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은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것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그 운명이 십자가 처형과 다를 게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있었을때에 유럽의 한 교회 마당에 있던 예수상이 폭격을 맞았습니다. 전쟁 후 교인들이 교회에 와보니 예수님의 손과 발이 다 잘려 나간 것입니다. 교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고, 결국 본질은 잃어버리고, 서로의 의견을 주장하다 싸움이 나게 생겼습니다. 그 때 한 장로님이 “여러분 우리가 바로 교회인데, 이렇게 싸우고 분열하면 폭격 맞은 예수상보다 더 비참한 것입니다. 예수상은 그대로 두고 전쟁의 아픔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순종하며 주님의 나라를 세워갑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감사하게도 교회는 자신들의 생각과 분쟁을 멈추고, 폭격 맞은 동상 옆에 팻말 하나를 세웠습니다. “예수님!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지혜와 사랑을 담은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문제로 다루는 사람입니까?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사람입니까? 이것이 교회와 공동체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처럼 세팅하고 세상의 방법으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성도들은 죽음의 권세를 깨고 승리하신 주님을 뚫어 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뜬 성도들은 부활의 안경을 끼고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작고 초라한 일에도 삶의 의미가 있고, 낮은 자의 모습에서도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보는 것이죠. 우리가 고통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에 주님은 그곳에 계시며, 배고픈 자들과 목마른 자들에게 빵과 물을 주는 그곳에도 계시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대접하는 그곳에 주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도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열어 줄 것입니다. 이웃은 하나님이 함께 살라고 주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는 모든 민족에게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책임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벌써 2023년의 절반이 다가와 있습니다. 한해의 절반이 다가오는데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며 살기에 너무도 분주한 삶을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돌이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전파됩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매주일 예배를 드리지만, 보스턴을 떠나는 이들에게 오늘의 예배는 특별한 예배일 것입니다. 교회 곳곳에 함께한 흔적들이 남겨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힘들때 예배 했기에 그렇습니다. 이번주에도 많은 지체들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내는 그들의 삶이 저에게 도전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믿는 우리들의 만남이 공동체 안에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험담하면 우리의 영혼은 메말라 가고 불평의 뿌리가 깊어져 가지만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다보면 묶인 감정이 풀어지고 회복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실때에 불평하고 원망하셨다면 십자가는 사랑으로 남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서있는 자리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보십시오.
진정한 회개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 1,2)
셋째,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49 보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의 최선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죄와 사망으로 묶여 있는 육체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성령의 능력은 초인적인 기적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처럼 변화합니다. 영적인 눈을 열러 보면, 인생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악한 자들과의 싸움이기에 성령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찬송과 기도로 기쁨 일에 참여한 것은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성화의 삶은 내가 거룩해 지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일주일은 말씀을 준비하고 성도들을 심방하고 항상 기도하는 자리, 준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일이 되면 어렵습니다. 기쁨을 놓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삶에 초대되어 기도하는 삶도 저에게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됩니다. 성도들의 삶속 깊이 들어가 그들의 삶을 들으며 소통을 할 때마다 문자적 해석으로 제한되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간절한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성경속에서 실감하고 삶을 통해 더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계시다면, 겉으로는 그럴듯 해 보여도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말라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삶의 이유입니다. 젊은날 외국에 나와 이민자로 살아 보니까 고국을 향한 마음이 더 간절해 질때가 많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증거자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마음이 더 깊어 지지 않을까요? 성령의 일하심을 더 추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십시요. 그리고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십시요.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는 교회가 주는 만족함 보다 세상과 사회를 걱정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챤 인재들을 키우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모든 부서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관계할 때에도 경험이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먹어봐야 소개 할 수 있고 가보아야 표현 할 수 있습니다. 해보고 느껴 봤기에 전해지는 힘이 큰 것입니다. 경험해 보기 전에는 사랑도 이해도 용서도 인간의 한계 안에서 인정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면 함께 걷는 은혜가 너무 커서 은혜만으로도 감격하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여러 사람들을 고치고 회복시키시고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셨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표현해 주셨습니다.
승천주일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겠다고 결단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한주도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5/14/2023 | (어버이 주일, 졸업예배)
사랑의 하모니 Harmony of Love
요한 1서 2:7-17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 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배움이라는 목표를 위해 달려온 시간들을 인정 받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졸업생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표를 바로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에 만나게 된 어떤 분의 눈물이 한주간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하시는 친정 엄마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진심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노력없이 흘려지는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 담긴 눈물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보스턴을 찾는 이민자들과 청년들에게 부모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교회, 즐거워 하는 자들과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시때때로 감정에 의해 변하는 사랑이 아니라 고향집 같은 든든한 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합니다. 결혼식은 두사람이 언약을 맺고 한몸이 되어 삶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겠다고 하는 출발선이지요. 이후에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 믿음이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맞이한 ‘6351일과 282일’이라는 숫자는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숫자이긴 한데요. 첫번째 숫자는 아내와 결혼식 이후 지금까지 사귐을 갖고 있는 날이며, 두번째 숫자는 케임브리지교회 교우들과 사귐을 갖으며 걸어온 날짜입니다. 사랑으로 동행하는 한날 한날은 너무도 귀합니다. 아이를 키울때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기어다니게 되고 걸음마를 하다가 걷게 되는 성장의 모든 과정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아이는 특별히 더 잘 키우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를 낳은 기쁨. 키우는 보람. 장성하여 떠나 보내는 그 허전함까지도 모든 과정이 켜켜이 쌓여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토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토대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사귐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감정의 무거움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뿌리를 내리며 열매 맺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로 끌려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온 인물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부모, 아내, 두 자식 그리고 그의 친구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도 주어진 삶에 무엇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이 무엇을 기대하는 지 삶 너머의 하나님께 희망에 두었습니다. “석방이 된 며칠 후의 어느 날 나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지나 시골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가까운 장이 서는 읍을 향해 몇 마일을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기뻐서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땅과 드높게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종달새가 즐겁게 부르는 노랫소리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나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이나 이 세상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 마음속에 울려 나오는 한마디 뿐이었다. 저는 저의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유로운 공간속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나는 그날 그 시간부터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걸음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극한 상황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작은 기쁨과 자유는 세상의 전부이며 존재의 변화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의 자녀인데,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 것은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 새삶은 사랑의 근원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새계명은 새롭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던 계명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 13:34) 이 뜻은 예수님이 우리의 본성을 잘 알고 계시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살아가다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반응하는 것이 더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서로 사랑하라’ 할때에 마음에 부담이 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미움의 감정이 아예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의심이 속삭이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시험이 찾아옵니다.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도 안될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될때가 있고, 뜻대로 되지 않을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며 산다고 늘 꽃길만 걷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의 근거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사랑입니다. 거듭난 자녀들의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길에서 자책하지 말고 뿌리를 더 깊이 내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상처를 통해서 더 많은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됩니다. 고되고 힘든 과정을 거치며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되고 훌륭한 논문이 세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도 외롭고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삶의 아픔과 고통속에서 십자가에서 흘러 나오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는 것은 십자가 은혜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십시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긍휼의 눈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요즘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흔합니까? 그러나 믿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말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성과를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만큼 더 어려운 것입니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중에도 일하십니다. 문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미움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 올때마다 영혼에 심각한 해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미워하는 마음은 정말로 무서운 것입니다. 만일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마음이 주님을 보는 시력을 잃게 만들고, 손과 팔을 못쓰는 장애를 얻게 되는 것이라면 이는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영혼이 사망을 향해 가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통을 이기시며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새계명’은 위로부터 임하는 선물입니다. 창조적인 힘이며, 영적인 힘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때 생각지 못하게 임하는 ‘새힘’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구원의 표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시간이지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서 삶을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을 내는 성도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의 빛이 어둔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것입니다.
둘째, 참된 자녀는 삶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두 아이 이름으로 넣어서 읽으니 말씀의 해석이 더 깊어집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의 이름을 넣어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부르고 난 뒤에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입었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고 있으며, 악한 자를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씻겨 주시고 태초부터 계시고, 악한 자를 이기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 된 우리의 공통분모는 한몸 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 자녀의 세가지 기준는 신학적으로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는 ‘불의를 행치 않고 빛 가운데서 의를 행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형제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 세가지 기준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요한이 기록한 시대 만큼이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인데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분쟁으로 치닫고, 낮아짐을 상실한 교회는 이생의 자랑거리들로만 넘쳐납니다.
우리는 예수께 속한 인생입니다. 당시 요한 시대의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자들로 인해 영이 육신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삶과 분리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대로 살아갈 실력은 없지만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며 하나됨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어진 그대로의 삶을 예수께 속하여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헌신의 자리에서 지칠 때가 있다면 헌신의 자리에 세워 주신 은혜를 바라보십시요. 우리가 서 있는 것이 은혜 아니면 그 어떤 말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그때 거기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동행하시는 예수로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마음은 커가는데 교회로 들어오는 것은 내 것을 많이 포기하게 될까봐 염려됩니다. 은혜는 채우고 싶은데 우리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분주한 모습입니다.
코비드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때에 한국 방역 모델로 3T 로드맵을 제시했었습니다. 검사(Test), 추적(Trace) 치료(Treat) 입니다. 시험(試驗)이란 말은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ϛ) Test입니다. 우리는 시험(Test)을 치러야 비로서 실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시험을 통해 믿음의 진위가 드러나게 됩니다. 마더 테레사는 시험을 통과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제 영혼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공포에 떨고 있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듯하면서도 제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하느님을 열망한다는 사실입니다” 냉혹한 삶속에서 나의 자녀가 간교한 꾀에 빠져서 친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일이 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믿음의 눈을 분명히 뜨고 하나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추적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여러분의 삶도 함께 하십니다. 다윗은 인생의 모든 날들을 하나님이 추적하며 그 삶을 지켜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마음안에 이 확신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영혼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 인생의 아픔을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도 이땅에서 겪으셔야 했던 삶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은 입술로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을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사람은 예수께 속한 성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생활은 현재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가신 방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 되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 성가대의 찬양으로 은혜 받고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실력도 좋지만 저는 그 안에 있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나의 소리를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함께 서로의 소리를 듣고 맞추어 주는 ‘ 하모니’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여정도 이러한 ‘사랑의 하모니’가 필요합니다.
셋째, 우리는 세상속에 있으나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은 잠시뿐이며 그림자입니다. 참된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은 하루와 같은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는 하나님의 시간표로 보면 세상의 것은 너무도 짧은 것입니다. 물질주의 가치에 비유하면 세상의 것들은 1불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께 속한 자들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음의 풍요로움과 하늘의 평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게 되니, 세상살이가 아무리 분주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셔야 합니다. 성경 66권, 1,189장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의 편지가 매일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계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밤이나 낮이나 낙망하고 넘어질 때에도 성경의 초대로 들어가면 죽어 있던 영혼의 심장이 다시 뛰며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 언어를 배우고 ‘아빠 엄마’를 부르는 순간 모든 부모들은 행복을 누립니다. 하나님도 입술에서 사랑의 언어가 믿음으로 고백되어 지고 삶을 통해 실천하게 될 때에 기뻐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 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새힘’을 주십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예배 드리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서 아쉽고 눈물 나시는 분이 계신가요? 언젠가 아이들이 주일학교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할 때 아이는 교회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데 부모는 빨리 가자고 합니다. 교회에 머물고 싶다고 아이들이 울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처럼 우리도 교회가 즐거워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교회가 머물 곳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서둘러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조금만 멈추어 보시면서 교회의 구석 구석을 돌며 기도도 해보시고 머물러 보십시오. 주시는 은혜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믿음의 어른들이 계시다는 것은 공동체에 힘이며 위로입니다. 인생의 순리가 있는데, 우리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프랑스어 ‘encore’ 는 연주에서 출연자의 훌륭한 솜씨를 박수로 재연을 청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입니다. 경기에서도 후반전이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걸으며 하나님앞에서 ‘encore’ 를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그렇게 격려해 주십시오. 늙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이들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과 구속함을 입은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갑니다. 인간의 육체 안에 정욕이라는 DNA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생의 자랑은 이생에서만 통하는 것일 뿐입니다. 물속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구명조끼와 보화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할 때에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이생의 자랑은 잠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람선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선을 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즐기며 유람할지 몰라도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들은 한 영혼이라도 더 건져내는 일에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 하시면서 누군가가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는것입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다보면 안아주게 됩니다. 우리는 수백 가지의 소리를 가지고 있고 생각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하모니를 기대해야합니다.
좋은 교회는 생명이 넘치고 화목한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주의 자녀들을 무균상태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면역인 진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주어진 생명의 열매로서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보스턴에 와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은혜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아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모님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고, 우리 교회에 있는 어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혼자 걷겠습니까? 혼자 가면 외로운 길이지만 함께 가면 즐거운 길이 됩니다. 세상에서 누리고자 하는 마음도 하나님 안에서 다루어지면 진정한 사랑의 하모니를 통해 삶의 의미와 참된 행복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귀한 믿음의 여정을 걸을 수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든든한 주일입니다.
5/7/2023 | (부활메시지 5)
요한이 전하는 복음 The Gospel of John
요한복음 1:1, 14:1-14
1:1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오심>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절 안에는 3개의 문장이 있는데, (1) 태초에 말씀이 존재했다. (2) 그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가 인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사건을 밝히며 요한복음을 시작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성경속으로 시간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요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우레(Thunder)의 아들’이라 불리우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는가?입니다. 인간은 ‘그 말씀’ 앞에 설때에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그 말씀’은 이기심을 깨트리고 완악한 심령을 찢어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듣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내면에는 태초의 ‘그 말씀’을 향한 근원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요한도 ‘그 말씀’을 향한 갈망이 사랑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씀(logos)’이신 예수가 누구인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소개하며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했다면,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즉 구속사에 있어서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사건은 절정인 것입니다. 예수가 행한 수많은 표적들도 이를 위한 표지판인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믿음을 종종 오해하는데, 신을 의지하려는 열심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인생의 길과 진리를 깨닫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길은 오직 인류 역사속에서 예수님만이 홀로 가셨던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는 길을 직접 내려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전하고자 합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은 동물의 언어가 아니라 태초의 ‘그 말씀’과 연결되어 지는 것입니다. 화려한 미사어구나 논리로 무장한다고 해도 태초의 말씀과 연결되지 않으면 말은 소음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이 없이 읽게 되는 성경은 이해 할 수 없는 글자일 뿐입니다.
“사랑하면 천 개의 눈이 생긴다”는 영국 속담처럼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듣고, 보고, 만진바가 되는 것입니다.
14: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조선시대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사자소학(四字小學)이라는 기초 한문 교과서가 있습니다. 생활규범과 행실과 마음가짐에 대해서 일러주는 책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관계속에서 살아갑니다. 부모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세상은 끝없는 경쟁으로 관계 안에서 지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근심에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을 때에도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으면 되고 길이 되시는 주님을 믿으면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살아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곧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니까 하늘의 이야기를 땅에서 써 나갔던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5 도마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저희가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7 너희가 진정 나를 안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그분을 알았고 또 그분을 보았다.” 8 빌립이 말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떻게 네가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느냐?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내 안에 계시면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본문에는 제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도마와 빌립입니다. 3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인데 예수님이 가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단지 도마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에 빌립이 또 질문을 합니다.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부터 10절 안에 있는 동사를 보면 ‘안다’와 ‘본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읽고 묵상하며 관찰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안다’는 동사가 참 많이 나오는데 ‘사랑하다. 믿다.’로 바꿔 볼 수 있습니다.’ 알다’라는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나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경험을 통해 친밀하게 사귀는 것입니다. 끊임 없은 관계속에서 생겨나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시대마다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성경 안에서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가고자 할 때에 성령님께서는 깨닫게 해주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생명의 싹을 틔워 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지요. 지혜의 기초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rotation)과 공전(revolution)을 하는 지구는 우주의 질서과 법칙안에서 하루, 한해를 일정한 사이클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크신 하나님의 손을 깨닫게 될때에 매일 땅을 밟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들보다 앞서 가려고 살아도 우리는 2023년 5월의 첫주일 맞이했습니디. 주어지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하지만 주어지는 시간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될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씀을 기록하던 당시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면서 자신들은 특별한 영지를 가지고 있어서 영생하는 자처럼 처신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의 것은 다 하찮은 것이고 그림자일 뿐이며, 하나님께 이르는 깨달음은 오직 영적 지식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높이 계신 신이 타락한 물질세계로 가까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특정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는 "더 높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이웃과 더불어 친밀한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진리의 힘이 실천적 삶으로 입증되지 않는 믿음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가신 길은 ‘아버지의 집’을 예비하기 위함입니다.
2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들이 있을 곳이 많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한 장소를 마련하러 간다.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한 장소를 마련한 뒤에,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
2009년에 방영된 ‘아버지의 집’이라는 드라마에서 10살 된 아들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냅니다. 극중에 나오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아들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이 미국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이별을 하지만 10년이 지나 돌아온 아들은 갱이 되어 한국으로 도망 오게 됩니다. 그런 아들을 위해 사고를 해결하려다 아버지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이 머리카락이 생길 때부터 이 손가락이 생길 때까지 넌 내 아들이다. 나이가 들면 아빠는 자식을 통해 꿈을 꾸는 거다. 살다가 포기하고 싶어도 너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슴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마지막 순간에도 아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남깁니다.
성경의 탕자 이야기를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고 다른 도시로 가서 자기 멋대로 생활하다가 완전히 망합니다. 나라에 흉년이 들자 그나마 돼지치는 일로도 먹고 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 가겠다고 작정합니다. 방황하면서도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으로, 저 멀리서 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 갑니다.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더러워진 그의 몸은 아버지의 사랑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을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너희를 위해 한 장소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을 마련하러 간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입니다.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감당하신 십자가 구속 사역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성전 뜰에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집’과 오늘 본문의 ‘내 아버지의 집’이 같은 단어인 오이코스(οἶκος)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르키며 '내 아버지의 집'이라 지칭하신 후 계속하여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전 된 자신의 몸’을 가리키신 것이지요. 당시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지만, 오순절날이 되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문을 열어 준 열쇠가 ‘성령’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의“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7:17)
구원받은 백성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성전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육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있듯, 주님께 속하게 될 때에 우리는 참된 쉼을 얻는 것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난 후에 집에 돌아 오면 집이 주는 안정감이 있는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쫒겨 난 후 인간의 삶은 하나님께 돌아 올 때에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주 동안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 순간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만 ‘내 아버지의 집’을 향해 올 곧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길 위에사 상실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성도들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어라.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행한 표적 그것만이라도 믿어라.12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그 사람도 행할 것이다. 심지어 이보다 더 큰 일들도 행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은 기도의 자리에 매일 찾아 오십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만 찾아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주의 7일 168시간 중에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에 찾아 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매일 구하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새로운 삶의 문이며, 절망의 현장을 빠져 나오는 출구입니다.
1982년 미국의 범죄심리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캘링이 발표한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습니다. 건물 주인이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지 않고 방치해 둔다면, 그로 인해 절도나 건물 파괴 등 강력범죄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뉴욕의 어느 주택가에 주인이 이사간 집에 한아이가 장난으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머지않아 그 집의 유리창들이 모두 파손 되었습니다. 그렇게 깨진 유리 조각들이 거리에 흩어졌으나 누구도 치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마을이 점차 지저분해 지고 음산해 지자 주민들은 이런 곳에서 살수 없다며 이사를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연히 주인 없는 빈집은 늘어났고 아이들은 빈집마다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쉈습니다. 이 같은 악순환이 되풀이 되면서 결국 마을은 사람들의 따스함이 사라진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면 곳곳이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 파괴와 훼손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 분리된 삶을 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과 환경으로도 이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결 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기도의 깊은 골짜기에서 피어나는 백합화가 절망 속에 있는 이들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더 깊은 기도의 길은 아버지가 내안에 거하고,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심을 통해서 온전한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 삶이 바뀌고 내 가정이 바뀌는 것을 넘어 상실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홀로 있는 자리에서도 나의 감정이 주님께 올려진다고 생각하시며 살아보십시오. 내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상의 분노. 거절감. 풀어져 있던 악한 본성을 거스르고 삶의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아이들이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성전인 ‘아버지의 집’에서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뭉클하면서도 감사합니다. 귀한 아이들에게 믿음의 부모들이 되어 주십시오.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태초의 ‘그 말씀’ 앞에 서서 믿음의 본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뒷 모습으로도 아이들이 평안함을 느낄수 있도록 살아가 주십시오. 누구도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속에서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켜내는 그 자리에 바람도 불고 비도 오겠지요. 그러나 모든 열매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보 앞면에 보시면 그 안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따뜻한 말은 지금까지 없었다.’ 여러분 우리 삶의 어떤 모습도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변화 없이는 제대로 믿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아무리 필요한 조언과 훈계도 내 방법과 생각에 제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주도 그리스도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 살아 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십시오.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루의 첫시간을 기도로 열어가시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오늘 본문 11절 말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삶에 온전히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애쓰지 않아도 믿음으로 통해 저절로 이뤄지는 예배의 기쁨입니다. 한주도 우리의 삶의 낮은 자리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