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9/10/2023 | 성령강림후 제 15주
문들이 곧 닫히더라 The gates were closed soon
사도행전 21:27-40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은 20장부터 계속 예고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한주간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실제적으로 바울에게 찾아온 죽음에 가까운 고난을 다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바울은 소망에 대한 이유를 항상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올 때 소망에 관한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은 소망의 이유가 되시는 분께서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두려운 상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의 이유는 성도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됩니다.
바울을 붙잡고 끌고 나간 후에 성전 문이 닫혀졌습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라고 번역합니다. 굳게 닫혀진 문은 바울을 향한 유대인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 간 바울을 죽이려고 사람들이 달려 들었고 죽을 만큼 맞게 된 상황입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좌절하고, 불안에 짓눌려 떨고,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불안에 짓눌려,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는 묵상하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그렇게 보여집니다. 내 몸이 아프면 비로소 아픈 사람들이 보여집니다. 바울의 눈에는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이들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문이 닫힌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관계속에서 굳게 닫혀진 마음의 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아픔과 슬픔, 이런 환경이 직면하게 되면 인생의 문이 닫혀져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 문은 바울을 향해 열려진 문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한주도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내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경쟁사회에서 겸손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중심성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회속에서 예수님의 겸손함으로 다리 놓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바울의 모습을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하며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2천년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본문의 상황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의 오해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1주일간 결례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결례가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전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바울이 으레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온 줄로 알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단지 추측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성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성전 밖에서 죽을 만큼 맞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 로마의 천부장이 수하의 백부장과 군인들을 인솔하여 달려와서는 때리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에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묻습니다. 이미 현장은 소동으로 인해 바울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사태 파악이 안되니까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사실 천부장의 체포가 없었다면 아마도 바울은 그 현장에서 스데반처럼 순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상황 앞에서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시선은 두려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견된 일이었기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부장에 의해서 체포되어 죽음을 모면하게 됩니다. 당시 바울의 생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구절이 40절에 나타나는데요.
“저 사람들에게 제가 잠시 한마디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군중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했다. 무리가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죽도록 맞고도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간증입니다. 다메섹 도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열심을 내던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부르신 상급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속에는 온통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어 보입니다. 그는 주리고 목마르며 추위와 헐벗음을 당하며 견디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 동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전도자였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을 보면,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동족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다해 복음을 증거합니다. 도대체 바울 안에 있던 예수의 생명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에게 생명은 예수께서 주신 생[生]을 살라는 명령[命] 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 6: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다는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요. 죽고 사는 시간적 차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지금 이곳에서 누려집니다.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해서 이제 자신의 자랑거리는 자랑할 것이 아님을 깨닫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의 신분과 정체성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고귀했으면 지금으로 보면 바울의 출신은 대통령 집안의 출신 배경이었고, 유대교 3대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며, 학벌도 최고 자랑거리인데, 좋은 학벌과 집안 배경들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처럼 여겨졌을까요?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인생의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구원 받는데 어떤 효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뜻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임이구요. 세상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성도들의 컨디션에 따라 우리가 지닌 자랑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다해서 전하는 마지막 외침의 그 말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1933년 1월 15일 독일의 한 교회 저녁예배에서 본훼퍼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하는 자는 이미 그 속에 빠져 든 것입니다. 두려움은 악의 그물입니다. 악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혼란에 빠뜨리고, 그 다음에는 두려움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어떻게 원수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 보다 크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강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죄는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두려움은 그 당시 독일 땅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에도 지금 예배 드리는 이곳에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땅끝까지 복음의 전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버리지 않으신 것처럼 바울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바울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1.4m 높이의 돌로 된 벽을 만들어 쌓았습니다. 그곳에는 헬라어, 라틴어로 외국인은 성전과 둘러싼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 문구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 체제에 갇혀 살던 이들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이 되셔서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로빈 마이어가 쓴 Saving Jesus from the church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를 교회에서 구출하라입니다. 마이어는 입술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이제는 멈추고 예수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수고와 헌신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입술로만 경배 하는 신앙은 복음을 교회의 틀 안에만 가두는 것이고 복음의 껍데기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아는 것을 넘어 행동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에 좀더 사랑하며 살걸 그랬나, 좀더 베풀며 살아야 했나 후회하는 삶이 되면 안됩니다. 인생의 종착지에서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은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이 올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지키는 일에는 힘쓰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들의 화려한 성전에서 이미 떠났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죄와 시기심, 미움과 정죄하는 마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희생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어서, 실수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의 자리에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사명은 울면서라도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정결법으로 인해 부정한 자로 여겼던 이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심으로 그 사람의 부정함을 자신의 몸으로 옮겨 오셨습니다. 그리고 살려 내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살아갈수록 우리 앞에 문이 닫힌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성밖으로 내쳐진 듯 우리를 외롭고 고독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십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 가운데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생명에 이끌려 지속적으로 깨달으려고 달려간다고 절절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계속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에 고난이 오고 삶이 힘들어 지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다(마 5:10)하십니다. 진정한 제자는 고난 가운데서 넘어질 수 있고,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명은 다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경쟁에서 이기고 빨리 달리는 경기가 아닙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이기려는 자기욕심과 욕망의 도구도 아닙니다. 고난이 올 때에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지극히 크고 영광의 중한 영생을 얻게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 장미빛 같이 붉게 물든 십자가와 푸른 하늘처럼 높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눈물겨운 수고가 없다면 어떻게 영혼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일을 가르켜 해산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지켜야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말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남겨진 과업은 저와 여러분이 이뤄야 할 사명입니다. 한주도 사명자들이 걷는 걸음 걸음마다 주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9/3/2023 | 성령강림후 제 14주
예수의 오래된 제자 The early disciple of Jesus
사도행전 21:15-26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묵고 바울과 그 일행들은 예루살렘에 도착을 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대략 62마일(100km) 정도 됩니다. 당시에 62마일의 거리는 건강한 성인이 짐없이 걸어도 쉬운 길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0:4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를 떠날 때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까지 총 7명이 동행했습니다. 이후 마게도냐에서 누가가 합류했으니 8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이사랴 있던 제자들까지 합류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바울을 포함해서 십여명이 넘는 일행들이 모두 나손의 집으로 갑니다. 개역개정은 나손이 함께 동행한 것으로 번역했는데, 쉬운성경은 나손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당시 나손의 나이를 70세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가 한평생 예수의 길을 따른 사람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일찍부터 제자가 된 나손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가 되었거나, 구브로(키프로스) 출신인 것으로 볼 때에 AD 33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키프로스, 안디옥, 페니키아 지역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을 때 (11:20) 그 무렵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자신을 것을 손해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이 침해 받지 않는 범위를 정해 놓고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는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옛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사도 바울을 반박하기 위한 무리들이 도사리고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10여명이 넘는 바울과 일행들을 머물도록 한 것을 보면 바울의 사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손은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예수께로 온다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듣기만 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결단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것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과 계획을 깨닫고 평생을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구도자입니다. 나손이 아마도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바울과 그 일행들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 이것을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믿음생활에 정성을 들이면 들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 사랑은 섬김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지요.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는 믿음입니다. 당시 유대적 경향은 헬라파 교인들의 접대를 꺼리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손은 주위에 시선보다는 바울과 일행들에게 섬기는 일을 통해서 주님의 따뜻한 품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손은 예수의 오래된 제자로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9월이면 많은 청년들이 배움의 길을 걷기 위해 보스턴으로 오게 됩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곳에 오겠지만 익숙했던 지역을 떠나서 새로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학업이라는 큰 산을 넘는 일도 생각해 보면 만만치가 않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도 만나게 되겠지요. 낯선 땅에서 새로움을 직면하는 일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 중에 한가지는 조국과 세계를 섬길 인재를 배출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속해 온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내는 일에 오랜시간 집중해 왔습니다. 일년이라는 짧은 시간속에서도 교회와 목사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보냅니다. 누군가는 눈물의 기도로, 누군가는 기쁨과 성취로, 누군가는 묵묵히 주는 사랑으로 이땅에서 보내게 되는 여정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껏 이 땅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학업의 길에서 겪게 되는 두려움과 좌절감을 딪고 일어 날 수 있도록 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게 되면 모든 소유가 주님으로 부터 온 것을 깨닫습니다. 섬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빚지고 있음을 자각할때 비로소 시작이 됩니다. 섬김은 우리가 할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할수 있습니다. 형제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미소짓고,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도 섬김입니다. 섬김은 성도들이 행할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18 다음날, 바울은 우리를 데리고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19 서로 문안인사가 끝나자,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이루신 크고 놀라운 많은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바울은 그동안의 전도 여행의 경과를 보고합니다. 2년여 동안의 에베소 지역에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제자 양육한 사역, 에베소 지역에 일어났던 엄청난 회개운동, 아데미 신상으로 인한 소동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서의 사역들, 드로아에서의 유두고 사건, 밀레도 항구에서의 장로들과 뜨거운 눈물의 시간들, 두로 지역에서 만났던 아가보의 예언과 만류하는 이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등을 보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보고한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바울의 서신에 보면 바울의 보고 속에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로 부터 모금해온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습니다.
20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바울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21 그런데 그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을 우리가 듣기로는, 당신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이며, 우리 유대 사람의 관습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합니다. 22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 유대인 형제들은 당신이 여기 왔다는 것도 틀림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오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파송하고 이제 20여년의 세월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는 성도의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20절을 보면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탄생한 교회에 성령의 열매보다 율법과 할례에 진심인 사람들이 수만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했지만 교회 내부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려는 열성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보니 교회의 사정은 신앙의 문제로 갈등이 생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부지런히 달려와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하는데 교회 내부에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비방하는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배척하고 할례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할례를 받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할례나 율법의 준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20년 전에 유대로 부터 온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이 이방인에게도 율법준수와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쳐서 당시에 바울과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 일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고,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했던 사항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롬 2:25-29)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풍속인 율법도 할례도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과 할례로 인해 의견이 갈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던 야고보는 사도 바울에게 방법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서원한 네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자비를 들여 서원예식을 구약의 율법대로 시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제안을 순순히 허락합니다. 바울은 오히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굽힙니다. 바울은 이전에 율법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는 복음의 능력을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율법 너머의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때 자신을 비방하고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도 있었지만 비난하는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야고보의 제안에 자신을 기꺼이 양보합니다. 복음은 진리 안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논쟁하기 보다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습이 믿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를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의 편을 들기 전에 먼저 자기자신을 내려놓고 주께서 먼저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도들의 충고를 들었고,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온유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사명은 담대하고 강하면서도 때로는 겸손과 온유함을 잃지 않도록 해줍니다. 때때로 신앙생활속에서 의견이 불일치 될때가 있지요. 분쟁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떤 사람들의 편이기 전에 주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시고 십자가의 피 흘리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셔서 고통을 참으신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 안에 있을 때 교회가 하나가 됨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원리를 붙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복음을 받아 들이도록 할수 있다면 이 정도는 양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구원받은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십시요. 바울처럼 옳은 방향으로 가면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비결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랑해 주신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내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장 좋은 길, 옳다고 믿는 길을 찾아서 보스턴에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를 직면하는 것이 이 경험의 토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당시에 모든 이들은 십자가 처형을 피하고 싶고,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까지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는 교우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참된 쉼을 얻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공동체를 통해서 경험하시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배움의 가치를 제자됨에 두었습니다. 교회안의 여러 은혜의 모임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풍성해 지도록 믿음의 기초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세상보다 크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수고를 아시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두면 하나님의 나라가 삶에서 자라납니다. 사도 바울이 걷고 있는 길에서 우리는 나손을 통해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오해를 넘어 주의 사랑을 전해지는 곳에는 예수님의 빛이 밝히 비춰집니다. 취약한 이들에게 내 소유를 내어 주는 믿음의 모험에 참여해 보십시요. 주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한주도 여러분이 걷는 그 길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8/27/2023 | 성령강림후 제 13주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God’s Will and God’s Guidance
사도행전 21:1-14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려 할 자리에 서게 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네이게이션 안내에 비유하기도 하는데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가도 언제든 안내해 주실꺼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가면서 업데이트가 되어 있지 않은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은 마치 어제의 은혜로 살아가려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매일의 은혜가 없다면 낭떠러지로 인도하는 과거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목회현장은 우리 때 보다 더 어려울꺼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지나온 목회를 돌아보시며 해주시는 짧은 말씀 안에 이제는 설교자의 삶이 중요한 시대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복음의 전달자는 떨림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지요.
지난 수요일 새벽기도 설교를 준비하는데 애통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4장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증인이 어떤 사람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차별을 두신 이유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납득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십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후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게 너는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지만 아벨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는 삶이었습니다. 아벨의 삶이 참 덧없이 보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동생을 미워하여 죽이고 난 후에도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만 호소합니다. 공평하지 않는 세상을 하나님의 탓으로 여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의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단절되고 영적인 생명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의 기자가 초점을 두는 것이 아벨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더 나은 제사는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성경의 기자는 믿음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11: 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는 자신이 충분히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은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벨의 제사만 받는 하나님이 공평해 보이지 않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일들이 세상에 참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정말 공평하지 않으신 분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의 기준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가는 대로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이들을 통해서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기에 인도함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살아가고, 세상의 즐거움과 사회속에서 성공과 명예,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부터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과 그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부지런히 돌아갑니다. 그 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희생과 고난도 통과해야 할 문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어려움도 없고 평탄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의 영에 매여 인도함을 받았지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하는데 장애가 되어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했지만 주님은 너의 약함이 나의 자랑이라, 오히려 너의 실패가 나의 간증이니 너의 모습 그대로 사용하시겠다고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바울이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수천년 동안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믿고 살았는데 그들도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복음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당시 이방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이방인들 위한 서신서들을 전도여행 중에 썼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 여겼던 유대인들은 예수로 인해서 거듭나지 않으면 죄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복음이 유대인들의 감정을 거슬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서 체포되고, 감금되며, 다양한 재판을 받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보내질 상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눈물 어린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배를 타고 다소간 남쪽인 고스(Cos) 섬으로 가서, 하루 후에 로도(Rhodes)라는 이름을 가진 섬의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시점까지 그들은 소아시아의 남서쪽 끝을 돌아서 남쪽 해안을 따라 바다라(Patara)까지 동쪽으로 항해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바울은 두로까지 가기 위한 또 다른 배로 갈아 탔습니다. 약 400마일(644km)의 여행을 위해, 직접 가로질러 항해할 무역선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두로는 페니키아 지역으로 해양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조선업으로 유명하여 큰 선박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무역선을 타고 와서 두로에서 짐을 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역사 속에서 페니키아 지역의 해상 무역과 교통을 정비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 배는 구브로 끼고 직진하여 화물을 내리게 될 두로에 도착하였습니다. 두로에서 7일을 머물게 됩니다. 학자들은 바울인 탄 배가 곡물이나 과일 같은 짐들을 내리는 큰 배였을꺼라 추정합니다. 바울은 닷새동안 무역선을 타고 와서 도착한 뒤에 사도행전 15장 3절에 보면 2차 전도여행시에 페니키아(베니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 교제하였습니다. 피곤했을텐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로에서 만난 제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과 두로에 살던 제자들이 깨달은 성령의 뜻이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뜻을 해석하는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어디에 무게를 놓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7일 동안 성령에 뜻에 매여 가는 이유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내딪습니다. 바울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 이곳에서도 형제들에게 안부하고 하루를 그들과 있다가 다음날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게 됩니다.
이후 10절부터 누가는 아가보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의 손발을 묶고 성령께서 이 허리띠의 주인을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묶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절) 바울 일행 앞에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띠는 짧은 가죽 허리띠가 아니라 당시 허리띠로 사용되던 긴 천 조각이었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무당이 살풀이라도 하듯이 생생하게 몸으로 표현하면서 예언의 내용을 보여 줍니다. 바울과 함께했던 일행들은 아가보의 예언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니까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깨닫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더 강권적으로 권유합니다. ‘권하다’라고 하는 ‘파레칼루멘’은 몇번이고 거듭하여 만류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일행은 밀레도에서 바울이 말한 예루살렘에서 당할 결박과 환난을 이야기하였을 때 (20:23), 이 말을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듣고 보게 되니까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되어 로마인들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예루살렘행을 더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족이 하나님의 뜻으로 선교지에 들어 가야만 하는데 그 지역에 지진으로 피해가 있다면 선뜻 가라고 하겠습니까? 계속되는 여진이 그 지역에 예상 된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류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일행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좋은 길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길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고난이 없는 길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분별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다면 어려움이 없는 길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소망에 비교 할 수 없기에 이방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땅끝까지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1세기 동안 충분하게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후대에 와서 그의 사역과 바울의 신학이 우리들에게는 온전한 복음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구원 사역과 연결된 예언적 말씀들은 대부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철저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지를 인식하게 될 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어린 나귀 같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주님을 생각하며 그 부르심 따라 걸었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에 품었을 만한 바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겁니까? 이후 바울의 일행들은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노라”(14절)
바울은 아가보의 예언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가는 성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성도들이 하는 예언을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결박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좋은 은사이지만 교회를 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이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 깊은 기도하는 자리에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현실을 넘어 뜻을 이루는 삶도,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들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명감으로 묵묵히 걷게 될때에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결국 결박 당한 채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의 황제 앞에 서는 것은 죄수의 신분이어야만 가능했습니다. 바울이 입게 될 옷은 죄수의 옷이 아니라 바울을 보호하시는 은혜의 옷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고난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로 인도함 받는 것에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즐거움과 사람의 말을 앞세우는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고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와 같으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눈물과 쓰러짐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되고, 눈물의 자리를 통하여 외로움과 씨름했던 시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않았습니까? 가난의 자리를 통하여 이 세상의 전부를 통해서 ‘주(主)되심’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길을 가야할지 판단하기 힘들다면 성령님께 어떤 길이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이번주 제 마음에 은혜를 주었던 찬양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1절만 함께 들어보고 싶습니다.
참 고마운 친구 나의 예수님 / 나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때론 낙심해도 포기치 않음은 /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내 삶의 동행자 나의 예수님 / 나는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 같으나
늘 쓰러지나 다시 일어남도 /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 나의 실패는 나의 간증이요
나의 아픔은 나의 영광이니 /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나 가난함은 나의 상급이요 / 나 미련함은 나의 자랑이요
나 쓰러짐이 나의 고백이니 /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한주도 허락해 주신 그 부르심 따라 믿음의 여정 걸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8/20/2023 | 성령강림후 제 12주
바울의 고별설교 2 Paul's Last Sermon 2
사도행전 20:24, 32-38
바울의 고별설교 가운데 내 목숨보다 귀하다고 고백했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한주 동안 제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설교도 했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이 죽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며 담아 내고자 했던 그 깊은 고백을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24절에 보면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완수 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24절)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깁니다.’(32절) 바울 인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에 이끌려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에게 ‘은혜와 사랑의 길’은 자신의 생명 보다 더 귀한 어떠한 힘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현대교회에는 사라진 것일까요?
32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고 번역 합니다. 바울은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에 말씀의 큰 가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바르트 (K. Barth :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선포된 말씀은 매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지는 말씀이고,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묵상하는 성경을 가르키며, 계시된 말씀은 말씀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배에 나와서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는 뿌리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젊은 세대는 권위와 전통의 뿌리를 거부합니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 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미래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교훈이 됩니다.
바울은 말씀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의인화 하듯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마음 안에 담겨 질수록 한개인의 인격은 아름답게 빚어지게 됩니다.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향을 맡게 되듯이. 바울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 안에 가득 찬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로 가득 찬 바울에게서 흘러 나온 것이 바로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관계에 목말라 하거나 관계를 떠나 홀로 있는 것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랑에 대한 목마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누군가를 진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인간은 은혜가 없으면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경쟁사회속에서 뒤쳐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원래 율법적인 사람이었는데 율법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마음 안에 죄가 가득하다고 곤고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지요. 바울이 말씀 안에서 인격적 관계 안으로 초대되어 보니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뛰어난 성과를 이루고 높을 성적을 받게 해주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속상한 일, 참기 힘든 사람을 만날때에도 그래서 마음이 어렵다가도 주께서 오래 참아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맡길 때에 신앙이 바로 세워 질 것이고,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상속 받는 유산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세상에서 경험한 것들로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믿음도 학습된 생각 경험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적 교만에 갇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칸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성경을 묵상해도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연약함이 보이지 않으니까 말씀을 알아도 거룩한 종교성만 유지하게 되는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결국 십자가에서 찌르는 창과 못을 다시 빼서 사랑으로 그 피를 손수 닦아 주시며 자신을 찌르냐고 얼마나 힘들었니? 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심방을 가면 은혜와 사랑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해 주시곤 합니다. 이 큰 사랑을 받아도 될까하는 마음이 들지만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하늘가족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을 건네지 않아도 하늘 가족으로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를 이해하는 다른 조건들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입술의 말은 한없이 가벼워 지고, 작은 시련과 핍박에도 믿음이 요동치듯 흔들립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가야할 길 조차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자녀를 낳고 실제적으로 키우다 보면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느끼는 때를 경험합니다. 삶을 통해서 부모의 헌신을 실제로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리더십들에게 사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5-31절에서 (1) 자신을 먼저 살피기 전에 양떼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라고 합니다. (3) 교회 내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눈물과 겸손으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울때에 3년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들이 들어 올 텐데, 그들을 흉악한 이리떼에 비유합니다. 이리떼는 흉악하고 잔인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와 대조되는데, 양떼를 늑탈하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팀 켈러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라고 했습니다. 1989년 뉴욕의 리디머 교회를 설립한 팀켈러 목사(1950-2023)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몇주 전에 녹화한 영상 메시지를 교회 리더십들에게 공유를 했는데요. 그는 3가지 메세지를 남겼습니다. 첫째는, 사명자는 칼날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참여하되 동화되면 안되고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소비만 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뉴욕에 와서 이력서도 넣고, 행복한 교회 경험도 하고 싶고, 좋은 음식점도 가고 싶겠지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일에 시간과 돈과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자신과 교회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림으로 죄의 값을 치른 예수님을 전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남긴 세번째 조언은 자신의 이름을 위한 명성과 자격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과 명성을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으로 삼을 경우에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교회도 세상과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합니다. 세상만큼 성과를 내야하고 세상보다 더 그럴듯 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교회가 세상의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고 경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세워가려는 순간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리더들이라면 교회를 세우는데 나의 생각과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한마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야기 해야 합니다. 자신의 태도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점검하고, 다른 이에게 향하는 마음은 관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 보는데 이러한 관점은 은혜의 인격성을 파괴하는 뿌리가 되지요.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연약한 지체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하는 은혜의 말 한마디가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작은 것에서 부터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는 삶이 복인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주님의 거룩함을 세상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푯대를 향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명자에게 꺾이지 않는 마음은 예수님의 겸손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여길때 하나님이 누구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을 현실로 받아 들이는 것은 어쩌면 믿음의 경주자가 되어 부상을 당할 위험한 순간에 놓이기도 하고,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흔적이 사명자의 영성을 더 깊어지게 합니다.
이제 바울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죽음은 언젠가 모든 사람이 홀로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죽음과 헤어짐의 두려움이 바울이라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믿음이 있을까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열심과 어떤 사명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믿음은 그리스도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을 통과 할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대신 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죄로 인해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만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풍랑, 경제적 풍랑, 인생의 문제의 풍랑이 몰려올때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알고, 잠잠히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풍랑은 멈추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에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합니다. 이 구절만으로도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다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항구에서의 뜨거운 눈물 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울고 에베소 장로들도 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달려갈 길을 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있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이신 길은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기도하는 그 장면이 너무 진하게 그려집니다. 바울은 가야할 길이었기에 함께 했던 장로들을 뒤로하고 밀레도 항구로 갑니다. 다시 오지 못할 그 길이지만 그의 영혼은 성령에 이끌려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의지를 사로잡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뜨거운 역사는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에게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마친 후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교회가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며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복음과 은혜, 사랑과 눈물의 현장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길은 우리가 계속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항해하며 바라 본 그 바다는 주가 주신 은혜와 사랑의 강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탄 배는 방향 없이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항구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키를 잡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돛에 바람을 불게하여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항해였을 것입니다. 한주도 인생의 바다속에서 주와 동행하시며 승리하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13/2023 | 성령강림후 제 11주
바울의 고별 설교1 Paul's Last Sermon 1
사도행전 20:17-24
유명한 배우 톰 행크스를 아시지요? 지난 5월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 연설자로 선정되어 왔는데요. 하버드 총장 로렌스 바카우는 톰행크스가 타고난 공감능력과 깊은 이해심을 보여준 인물이기에 선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연설을 시작하며 자신을 "하버드 졸업생, 교수진 또는 저명한 동문들과 관련이 있기 위해 일한 적도 없고, 수업에 시간을 보낸 적도 없고, 도서관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채로, 나는 그런 일을 한 사람으로 연기하며 잘 살고 있다”고 소개하며 웃음을 자아냅니다. 그는 새로운 사명감으로 사회속에서 새출발하는데 있어서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시대는 진실이 점점 더 위협받고 있고 앞으로 참여하게 될 사회의 전투는 끝이 없는 싸움이라고 강조하며 졸업생들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삶의 모든 날들에 있기를 축복하며 연설을 마쳤습니다.
톰 행크스의 연설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원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상이 잃어버린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사회는 19세기에 비해 ‘생산성’이 천배 이상 높아졌다고 합니다. 과거와는 달리 개인이 직접 휴대전화로 컨텐츠들을 송출합니다. 개인이 기자(記者)도 되고 사장(社長)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방송으로도 세상과 소통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시대에 ‘앎의 대한 욕구’는 채우기가 매우 쉬워 졌지만 ‘진실한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상실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경의 가치를 ‘앎에서 삶으로’, 삶속에서 ‘주의 말씀의 가르침’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어떤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지 바울의 삶에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자에게는 믿음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사명(使命)의 사전적인 의미는 맡겨진 의무입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종하며 나아가는것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운명을 미리 예측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구원을 믿음으로 갈망하며 입술로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안에 성령님을 확신할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용하는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혼인 잔치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심부름 하는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특별한 일을 보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했을 때에 물이 변해서 포도주로 된 사건을 유일하게 본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는 한층 더 깊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밋밋한 인생이 말씀대로 순종할때 포도주로 변하는 향기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교만은 십자가에 부딪일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산산조각이 납니다. 하나님의 확증된 사랑이 부어질때에 사명자에게는 필요한 것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의 과정을 이뤄갈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왜 힘든 것일까요? 타락한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봄이 와야 얼음이 녹게 되듯이 진심으로 믿고 죄를 회개할때 은혜로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 옆에 달린 강도는 십자가에서 그를 믿고 진실로 고백하여 죽음 직전에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는 위장된 주인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아무리 선한행위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할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맡길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20장은 3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머물 수 없게 되자 2차 전도여행에서 개척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기로 결정합니다.(1-3절) 누가는 구체적인 도시 이름을 사도행전에서 거론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바울이 그만큼 분주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던 마게도냐의 지역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의 공동체를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굳게 설수 있도록 권면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가는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야 이르러”라는 말씀으로 마게도냐에서의 3차 전도 여행의 사역을 짧게 요약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항구 도시인 겐그리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가려던 2차 전도여행과 비슷한 일정을 계획했지만 유대인들이 자객을 보내서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자이며 신학자인 윌리엄 램지(William M. Ramsay :1851-1939)의 주석을 보면, 당시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절기를 맞아 수리아로 가는 배를 많이 이용하게 되었는데 바울이 이 배를 타게 탈 때에 바다에 던져 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를 해치려는 음모는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여 다시 육로를 통해 마게도냐 지역으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바울은 드로아에서 7일간의 사역을 마치고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육로를 택하게 됩니다. 디모데와 일행들은 배를 타고 가지만 바울은 홀로 25마일 정도를 걸어서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요? (13절) 바울은 이제 3차 전도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밀레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3년 동안 사역했던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라고 청했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바울의 설교가 대부분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였다면 밀레도에서의 설교는 서로 함께 주의 길을 걷는 사명자들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사명자에게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설교에서 사명자의 간절한 겸손과 눈물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은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사명자들에게 눈물이 언제 납니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때 눈물이 납니다. 성령께서 울게 하시니 울고, 부족한 죄인을 살려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울지 않습니까? 눈물은 주님과 우리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사명자는 아픔과 상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몇주전 예배 마지막 찬양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찬양을 부르는데 찬양의 가사에 우리의 삶이 있더라구요. 부르는 내내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빈궁한 삶이 부해지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갑니다. 슬픈자를 위로하게 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그 구원의 기쁨이 우리의 삶에 찾아와야 합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겸손으로 세워집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보혈만큼 뜨거운 섬김은 없습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함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쓰임 받았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몽당연필이라 여겼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은 창조의 손으로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닳고 싶지 않아합니다. 섬김에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이 쓰인다고 해서 몽당 연필이 색을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진한 색을 내게 됩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만년필이라 해도 사람의 손에 들려지지 않으면 가장 초라한 도구가 되어질 뿐입니다. 때론 약하고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게 되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각성마다 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3절)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습니다. 사명자의 길은 매순간 중단될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성령에 매여 걷도록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의 의지는 성령에 매여 있습니까? 도대체 성령에 매여 가고자 한 바울의 사명감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온 이유를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릴레이 경주는 일정 구간을 나누어 달리는 경기입니다. 먼저 뛴 사람은 배턴을 넘겨주고 같은 마음으로 다음 주자가 달려가는 길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자신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전 주자가 전달하는 배턴을 꼭 받아서 뛰어야 합니다. 혼자 뛸수가 없는 경기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함께 뛰는 러닝 메이트입니다. 이제 가을과 겨울이 오면 여름의 뜨거움도 그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주님의 사명은 그날에 약속의 소망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고 나니까 눈이 열려집니다. 예수가 오셔서 역사의 중심, 인생의 중심에 있음을 깨닫는 눈이 열려진 것입니다. 구원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꿈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할때에 그 가치가 올라가지만 바울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영광은 순식간에 빛을 잃는 것들이며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배설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자’로 살던 그가 사명에 눈을 뜬 것입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제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무슨 험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23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가는 도시마다 투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에 초대되는 것 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계절이 찾아오고, 매일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모든 세대가 그리스도의 꿈을 꾸는 일에 참여하는 일 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곁에 찾아 오셨음에도 저 멀리에서 지켜 보려고 했던 마음을 내려 놓고 결단합시다. 예수께 받은 사명은 고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매인 바 되어 보호하시는 은혜에 이끌려 가는 일입니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 가운데 생명의 빛이 그의 영혼을 강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성령께서는 바울을 성령으로 인쳐 주시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능력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스코틀랜드인으로 192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중국 선교사로 사역했던 에릭 리델(Eric Liddell 1902-1945)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렸던 사람입니다.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많은 영국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 종목인 100미터 경기 예선전이 주일로 확정되자 과감히 경기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의 결정은 달리는 목적이 자신의 우승과 야망이 아닌,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릭의 불참 소식이 영국 전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그를 두고,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의 명예를 버린 자’, ‘광신주의자’라며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세자까지 나서 리델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주님의 법 안에서, 주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갖은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리델은 기적적으로 400m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됐고, 금메달을 따고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리델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자는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가상과 현실이 같아 보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된 사명과 위장된 사명이 모호하고, 참된 겸손과 위장된 겸손도 온전히 구별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홍수가 나서 집에 엄청난 물이들이닥쳤는데 살기 위한 길을 위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경험한 사람은 진실로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즐겁게 노래하고 찬송했습니다.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거운 짐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고난의 길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눈물과 참된 겸손으로 맡겨주신 사명자로 부르실 뿐입니다. 성령은 그 길을 걷는 자를 보호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생명의 영이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주도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기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