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6/25/2023 | 성령강림후 제 4주
성령의 3번째 사건, 고넬료 Cornelius, The third event of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10:1-4, 9-17
냉전시대 세계사에서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호 솔제니친은 인생의 목적은 번영이 아니라 영혼의 성숙함에 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썼다가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감옥소 생활을 쓴 글로 노벨상을 받고 결국 구소련에서는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20년동안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줄 알았는데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섬기는 나라라며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러시아 혁명으로 비극적인 피의 전쟁이 일어난 이유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C.S Louise는 역사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되는 분기점이 ‘계몽주의 운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 했는데,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상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지성으로, 과학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다 보니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 세상이 시작된 것이라고 했지요. 어쩌면 우리도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우리는 오순절 이후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령의 능력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 올리며 자기의 명예를 이루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힘은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해치는 위험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제를 주인이라 부르던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침착하고 품위 있는 행동,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태도, 고문을 앞에 두고도 냉정을 잃지 않는 용기를 통해 불신자들에게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느꼈던 성도들의 좋은 인상은 삶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만남을 갈망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찾아가십니다. 지금도 누가 진심으로 자신을 찾는지, 누가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2천년 전에도 알고 계셨고 지금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의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목마를 자에게 생수가 필요하지요. 타는 목마름으로 예배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시지 않을까요? 누가 나를 필요로 하나 알고 계십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란 말을 듣지요. 기독교의 구원의 속성도 배타적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0: 11-13절을 보면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기독교의 구원은 의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하는 차별이 없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죽은자’로부터 살리신 인류의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힘을 믿는 이들은 성령을 의지하면서 전생애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3대 변화 사건을 보면, 야외예배때 살펴 본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의 성령강림사건입니다. 두번째는 지난주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고넬료의 이야기인데, 이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최초의 성령세례 사건’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전부라면 신앙생활에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찾아올 때에 주안에서 기뻐하라, 평안하라고 하는 말씀이 이해가 될까요?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베풀며 살아가라는 메세지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뒷모습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어렵게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무명한자 같으나 성경은 유명한 자라고 하시고, 가난한 자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내 능력과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은 현실은 암담하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환경에서도 말씀으로 잘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기다려주시고 품에 안아 주시는 경험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나의 욕망이 십자가에 날마다 못박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만남이 이뤄집니다.
성경은 2천년전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이방인이 성령세례를 받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데 이방인 고넬료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착하게 살아간다고 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고넬료의 회심사건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한 길이 있다는 것과 구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갈망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귀를 막고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은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를 낯선 사람인냥 바라봅니다. 경계심을 품고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경계심은 하나님의 사랑 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경계선이 많을수록 생명력은 약화됩니다. 마음의 한자락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존귀한 자녀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모두가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편견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벌레나 부정한 짐승처럼 불결하다고 여겼습니다. 당연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매우 높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 11장 3절이 전해줍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함께 유숙하며 음식을 먹었던 일에 대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교회에 보고를 하자,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지요?” 하고 따졌다.(행11:3)
성령이 오셔서 하는 사역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을 찾아가 제자 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세상속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미전도 지역에도 있고, 무심히 지나치는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에게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는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성장학이 관심을 끌던 시기에 많은 교회마다 부흥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홍보했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을 결신시키고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면 그 전도 프로그램을 많은 교회들이 배우고 와서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적용하는 목적이 대부분이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새로운 율법주의 요소들입니다. 교회는 성숙한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와 경영 논리에 젖어 버리게 되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숫자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인원수를 채우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영성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얕은 만족과 인스턴트 훈련 프로그램으로 심리적 명분을 세우기에 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마십시요. 기대감을 갖고 듣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이방인으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기념하여 지은 지명이며, 이곳에는 당시 로마 점령군의 본부가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로마 군대의 부사관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부대의 지휘관이고 지배계층임에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가난과 욕망의 한계를 뛰어 넘게 하시고, 어려움을 견디게 합니다. 인간의 성품을 넘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도를 하게 하시지요.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만 계시다고 생각하던 유대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최초의 이방인에게 어떻게 임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2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첫번째 환상은 고넬료가 기도를 하는데 제 구시쯤이니 오후 3시이지요, 그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기도하던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이 되었으니,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합니다. 욥바는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해변 도시입니다. 성령께서는 해안가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가 유숙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고넬료가 집안의 하인 두명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욥바로 보내게 됩니다.
두번째 환상은 베드로에게 임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 고넬료가 보낸 세사람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때 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시간이 제 육시였습니다. 오늘날 시간으로 낮 12시 입니다. 배도 고프고 식사할 시간이지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전날 오후 3시쯤 출발해서 다음날 12시쯤 도착했으니 하룻길을 걸어서 온 것입니다. 이들이 도착할때 쯤 베드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데,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섞여 있었으며,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이 섞여 있었습니다.(레 11, 신 14:7-20)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관례에 근거하여 부정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구원의 믿음은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소리가 나는데 “어느 것이든, 더럽다고 하지 말아라. 모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이다.” 이런 일이 환상 중에 세번이나 반복되더니 그릇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행 10:19, 20절을 보면 “19 때에 베드로는 방금 본 환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지금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는 중이다. 20 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지체 없이 그들을 만나,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달랐기에 혼란 속에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 도착 합니다(17절) 베드로는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라고 묻지만(21절) 베드로는 이미 성령의 지시를 받았기에, 자신을 찾아 온 이유를 물음으로써 확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그들을 불러 들여 집에서 유숙하게합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욥바에 있던 형제들과 함께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고넬료를 보러 가이사랴로 갑니다(23절) 베드로의 동행자들은 베드로 자신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 3명과 욥바의 형제들 6명 총 모두 10명이었습니다. 10명의 사람들이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이 걸려 도착합니다(9절). 그곳에 도착하니 고넬료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24절)
고넬료는 베드로를 보자마자 로마군대 지휘관임에도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알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찌할줄 몰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그를 일으킵니다. 고넬료는 이미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의 집에 들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부어지는 성령으로 인해 놀라게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35절에 나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신다” (35절)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죄사함 없이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줄 압니다. 사도행전의 곳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윤리적인 사람들, 즉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들 조차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오순절에 유대인들은 “경건한 사람”(2:5)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경건한 유대인들도 회개하고 죄 사함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침으로써 그의 설교를 끝맺었습니다(2:38)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짐”은 단지 속되지 않거나 부정하지 않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때에는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오순절 성령충만한 삶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체험되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목자없이 방황하며 죽어가는 백성들이 우리의 눈에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구원받기 위해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10장 43절에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너희가 복음을 듣고 그를 믿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함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그가 삶에서 진리를 더듬어 찾는 것을 받으셨고 하늘에 상달되게 하셨습니다. 고넬로는 인생의 궁극적인 답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해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지요. 우리를 만나 주신 주님은 그들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고, 모든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예수님을 홀로 두지 않고 매일 십자가 은혜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10:4 고넬료는 두려움 속에서 천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여, 무슨 일이십니까?” 천사가 말했다. “너의 기도와 가난한 이들을 향해 베푼 네 구제의 손길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크고 놀랍습니다.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십시요. 주님의 힘이 우주를 가득 채웠습니다. 주가 지으신 세상을 바라 보십시요. 지저귀는 새들도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존귀한 자녀 삼으시려고 외아들을 아낌없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모든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귀한 자녀는 환경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리를 떠나십시오.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사람의 말과 인정 받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겸손히 주님을 찬양하십시요. 성령의 사람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보다 한분의 평가와 인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분이 알아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시 또 목마르고 공허해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존귀하다’ ‘사랑한다‘ 하십니다. 한주도 허락하신 삶의 자리가 예수님이 거하시는 푸른 초장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6/18/2023 | 성령강림후 제 3주
사울에게 임한 성령님 Holy Spirit who came to Saul
사도행전 9:8-11,18, 고후 12:9
성령강림후 세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사울에게 임하신 성령’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스데반 순교 사건에서 잠시 등장한 사울은 그 이후에도 흩어진 기독교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역의 다메섹까지 가기 위한 법적 효력이 있는 공문까지 청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200km이상 떨어진 지역인데도, 바울은 다메섹까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사울이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율법과 전통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으며, 기독교 신앙이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의 율법에 도전한다고 느껴 강하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파하였을때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이 경계대상이었고,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서둘러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태어난 곳은 길리기아 다소지역입니다. 다소지역은 교통과 상업, 교육이 발달한 도시로 로마 제국 지방 행정수도였습니다. 바울은 태어나면서 부터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행22:39) 그의 아버지는 텐트를 만드는 직업이었으니, 과거에 1세대가 미국에 와서 힘든 일들을 하면서 2세대를 키웠던 것처럼 바울은 다소지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유대 히브리 문화와 로마식 헬라 문화인 이중 문화를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는데요.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 하나님께 묻다’라는 뜻이며이고,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 으로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의 회심사건과 성령의 통한 신비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신비는 유대교를 뛰어넘어서 기독교 복음이 온 세상을 향해 가게 되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추구하던 유대교 신학을 어떻게 내려 놓게 하셨고,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바울의 마음 중심에 어떻게 자리 잡게 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내가 끝난 자리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4 사울은 그만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때 한 음성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5 사울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7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소리만 들렸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지냈다.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본 후에 사울은 시력을 잃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사울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다메섹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의지해서 걸어야만 했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조차 없는 지경이 된 것이지요. 평생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두려움과 불안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을것입니다. 바울은 그 시간 동안에 지난 날들을 회고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듣지 마시고, 바울이 처한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느날 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평생토록 시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로마 시민권, 가말리엘의 학식,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도 철저하게 낮아졌을 것입니다. 그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인생이 망가진 것입니다. 이 일이 바로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경험한 바울의 상황이었습니다. 주의 빛으로 나아가게 되면 새 힘이 임하고 회복이 되어야 할텐데 바울은 오히려 어떤 것도 할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가 믿었던 모든 기반이 흔들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통계를 보니까 ‘실패, 거절, 고독,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기피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공 신화에만 마음을 기웃거리며 동경한다면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지요. 복음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오심으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이제껏 믿고 의지하던 능력이 나의 능력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희망적인 것들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때때로 삶의 의욕이 없는 날도 있고, 절망적인 상황속에 놓여질 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걷게 될때도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인생길 위에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부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바울을 위해 이미 다메섹에 제자 아나니아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10 한편,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한 제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주님께서 환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셨다. “아나니아야!” 그가 대답했다. “예, 주님!” 11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 거기서 다소 사람 사울을 만나라. 그는 지금 거기서 기도하고 있다.
며칠전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사울이 유다 사람의 집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뜨인 사람과 뜨이지 않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평생 본인의 눈으로 보는 세계만이 전부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과 기도로 영적인 눈을 뜬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눈을 뜬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면 우리를 통해 세상속에 아나니아가 늘어 날것입니다. 다른 세계를 본 사람들에게는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아나니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이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려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참된 길을 알려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16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 내가 그 사람에게 보여 줄 것이다. 17 “사울 형제여, 당신이 이리로 오는 도중 당신에게 나타나셨던 주 예수께서 당신을 다시 보게 하고 또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저를 여기 보내셨습니다.” 18 바로 그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떨어지더니,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세례를 받았다.
바울에게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는 큰 장애물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해 지자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게 되는 고난은 말할수 없는 축복이 됩니다. 내 안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증해 가는 것입니다.
15 그러나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가거라!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그들의 왕들에게,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내가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내가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주님은 사울을 쓰시기 위해서 다메섹에서 그의 이름을 2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어려서 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많이 들고 자랐겠습니까?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는 그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이 불려진 것입니다. 사울이 그날 들은 소리는 그 동안 사울이 박해하는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그릇은 인생이라는 나를 위한 욕망을 담는 일에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말씀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지금 기도하는 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사람이고, 믿는 자들을 결박할 권한을 가지고 온 사람이 아니냐는 대답에 재차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의 빛을 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전하고 고난이 오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이 오면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길을 걷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며 유대인로 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모함을 당하고 무고한 재판을 받는 시간들을 경험합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행 22:30) 이후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됩니다.(행 24:23) 세번째 재판은 로마 신임 총독이 된 베스도 앞에서의 재판입니다.(행 25:1-12)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됩니다.(행 26:1-32) 산헤드린 공의회,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간증하고, 결국 로마를 향하는 배에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예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려 죽을뻔한 경험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을 피해가며 사역을 했다면 과연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말씀이 이뤄졌을까요? 바울이 지낸 감옥에서의 시간들은 돌이켜 보면 바울의 신변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 주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며 바울의 서신들을 남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영에 이끌린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방인과 임금들을 만나게 됩니다.
영화 The Passion of Christ의 감독이며, 배우인 멜 깁슨은 이 작품에 배우로 출연하지 않지만 딱 한번 영화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등장을 합니다. 얼굴을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을 땅에 눕히고 대못을 손에 들고 못박은 로마 군병의 손이 바로 멜 깁슨의 손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이 예수를 못박아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영화속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화사에서는 ‘예수의 수난 12시간 이야기’ 만으로 흥행할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나에게 임하셨고 주님은 나에게 복음 전파의 도구로 이 영화를 만들기를 명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개봉 첫날부터 극장마다 부흥회가 시작되고, 강도와 살인범이 영화를 보고 회개하고 자수했고, 낙심자들이 다시 회개하며, 주께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멜깁슨은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 유대 단체들의 거친 질문들 앞에서 “여러분 내가 그분을 죽였습니다. 저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고, 저의 죄 때문에 수난을 받으셨다”고 인터뷰 합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나로 살아가는 삶의 죄앞에 놓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로 그 사랑을 확증하신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고난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랑의 줄에 매인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나의 약함은 주님의 능력이 되십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육체의 가시가 간질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육체의 가시가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점이 오히려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해 지는 도구가 됨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힘의 위험성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동안에 자신의 힘을 내려놓는 일에 마음을 쏟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힘으로 저항하지 않고 무능한 자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힘으로 보면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위대한 실패’가 되었습니다. 저는 실패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공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과 실패로 복음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복음의 결과일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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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 11:10-12)
우리가 가지고 있는것중에 영원한것이 있을까요? 물질도 시간도 명예도 기억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만 영원합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처럼 우리 삶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세번이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문제를 없애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의사 누가라는 동역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약함을 고백할 때에 담겨집니다. 우리의 약함은 믿음의 양약이 되어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여러분은 언제 더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삶의 고통이 찾아오고 힘들 때 절실하게 기도하게 되지 않습니까? 내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 힘을 의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동서남북이 가로막혀 길이 보이지 않고, 벼랑끝에 서게 될 때에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삶의 가시들이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요.
약함의 자리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늘도 빚어지고 다듬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삶이라는 대본을 받았습니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선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내 삶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우리안에 아픈 가시의 상처도 아물게 됩니다. 내가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하는 분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힘든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에도 언제나 그러하셨듯 우리의 손 잡아 주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인도하심이 망망한 바다의 끝, 외로운 광야의 자리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11/2023 | 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 환경선교주일
스데반 안에 계신 성령 The Holy Spirit in Stephen
사도행전 7:55-60
오늘은 성령강림후 두번째 주일이며 환경선교주일입니다.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게 될텐데, 스톨의 녹색은 믿음의 성장을 표시하는 색깔입니다. 이 스톨을 보실 때 마다 믿음을 성장시키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감싸주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가 담긴 매우 긴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순교 사건이 소개되지요. 스데반의 순교는 구원사에 있어서 ‘적색순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환경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인한 수많은 북극곰들의 죽음과 발생하는 화재들, 폐수로 인해 죽어가는 바다 물고기, 환경오염으로 인한 수많은 자연재해 등은 ‘녹색순교’가 아닐까요? 우리는 녹색이 은총인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지으시고 난 뒤에, 사람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피조세계를 잘 관리하라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창조된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삶의 일터와 땅을 밟고 살아가는 현장에서 성령께서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터로 나가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매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늘날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적색순교’의 박해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보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탐욕에 물든 마음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매일 순교의 삶을 연습하는 것이지요.
태초에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이 있던 곳에 에덴동산을 창조하셨습니다. 지상의 파라다이스입니다. 에덴을 만드시고 인간을 초대했을때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 그림 한장이 있습니다. 후안 후아네스(Juan de Juanes, 1510-1579)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인데요. 그는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났고 16세기 후반에 ‘스페인의 라파엘로’로 불렸을 정도로 유명한 발렌시아 화가로 성장합니다. 500백년 전 그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안에는 그의 생각과 시대적 배경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미술에 조회가 깊어 질수록 더 많이 발견될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된 인간 안에는 ‘신적갈망’이 있고 분명히 보여져 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는데 있습니다.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 인해 창조자의 숨결을 모른다고 핑계되고 변명하는 것이지요. 죄로 인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바벨탑을 쌓으며 엄청난 발전을 이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던 인간 생명의 신비에도 도전합니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마음만 먹으면 복제인간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문명과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 20, 21절에서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지구의 파괴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중심의 발전을 이룬 어두운 그림자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의 신앙 안에는 성령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Στέφανος)은 ‘면류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그의 짧은 삶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 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첫째로, 스데반의 삶속에는 성령의 영이 가득했습니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사도행전 6장 5절에 집사로 선택된 일곱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에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헬라파 유대 과부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7명의 집사를 택하기로 결정했고, 그 선택 조건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뽑힌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라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설교에 언급된 인물들을 보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삭, 야곱, 그의 열두 아들들, 모세, 여호수아, 다윗과 솔로몬까지 구속사를 꿰뚫고 열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는 너희들이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제 눈에 띄인 것은 스데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유대인들은 직면하기 싫은 죄가 드러나자 죽일듯이 달려듭니다. 감정의 노예된 것처럼 분노하며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맞으면서도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보면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언급하는데, 사도행전 6장 8절은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소개합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합니다. (막 15:1) 스데반도 백성, 장로, 서기관에게 잡혔습니다(행 6:12)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를 죽일 거짓 증거를 찾았고(마26:59) 스데반이 설교할때에도 그들은 처벌하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행 6:13) 성경은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라고 하면서, 스데반 집사의 얼굴도 ‘천사와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도록 기도했고’, 스데반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보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기도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일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전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삶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삶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보여진다면 그건 믿음으로 인내한 시간들이 빚어 낸 결과일 것입니다.
둘째로, 스데반은 ‘재창조된 세계’를 보았습니다.
56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신뢰가 쌓이고 믿음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말씀 안에서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을 매일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는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밖의 세계가 두렵다고 해서 뱃속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버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이지 보여 주십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이 자라간다면 순종하는 일에 어떻게 머뭇거릴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성령의 임재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지고, 예수께서 함께 하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내적 친밀감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을 본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생의 표적들’(The Mark of the New Birth)이란 설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표적이 나타나는데, 첫번째 표적은 그리스도를 확신할 때 부어지는 ‘살아있는 믿음’과 두번째 표적은 ‘산 소망’입니다. 죽은 소망은 모든 악한 말과 나쁜 행실의 근원이며,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산 소망’은 세상에서 막연히 잘 될거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양심의 증거’이고, 어떤 상황에도 절망 가운데 보호하시는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셋째로,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58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58절에서 사울이라는 청년이 처음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청년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많은 이들의 숭고한 피가 새시대의 문을 열기 위한 희생이었듯 ‘적색은총’은 생명의 강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매일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걸어 간다면, 주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스데반의 피값이 바울의 생애에 이어짐을 보게 되는데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빛을 본 후에 바울의 삶의 가치와 방향, 삶의 이유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신생의 표적’입니다. 이후 바울은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가서 전도를 하지요. 또한 동족 유대인들 설득하다가 핍박과 박해 속에서 고소를 당하고 결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스데반의 일을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행 22:20절을 보면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스데반에게 바울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던 바울은 그 복음을 경험하고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던 AD 30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기독교는 엄청난 박해로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할수도 있구나 겁도 났을 것입니다. 죽음이 현실 앞에 다가오니까 결국 마음이 흔들리고 뿔뿔히 흩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흩어진 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8:4)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의 흩어짐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면은 세계 선교로 퍼져가게 되는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이것의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을 X,Y,Z라고 했을때, Z라고 하는 부분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물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Z라는 높이가 없다는 것은 사물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Z를 성령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어머니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때때로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도 성령의 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성령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신앙의 깊은 세계로 초대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계와 멀어지고 계신가요? 아니면 가까이 들어가고 계신가요?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모두 다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제한없이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을 뿐입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다시 깨어날 테니까요.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얼 얻으려고 열심히 달려가십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어두운 세상에 새벽을 깨우며 빛을 밝히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4/2023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7
우리 안에 시작된 선한 일 A Good Works That God Began Within Us
빌립보서 1:3-8
약 한 달 반 동안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서울 남연회에서 주관하는 은퇴식에도 참가했습니다. 제가 저의 은퇴식을 따로 알리지 않았습니다만, 우리 교회를 거쳐간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평생 가보지 못했던 남해 여행을 했고, 후배 목사들과 함께 동해 여행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조국의 산천과 또 눈부시게 발전한 조국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모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져 우리 교회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 지난 37년 간의 저의 목회생활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회 있는 대로 설교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은 빌립보서 1:3-8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곳곳에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끈끈한 사랑의 관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3절) “나는 늘 기쁨으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4절) “여러분은 제가 복음을 전할 때 도움을 주었습니다.” (4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해 왔습니다.” (5절) “여러분은 늘 제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7절)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여러분은 그 모든 시간에 나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7절)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8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8절)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라는 사람을 통해 바울의 선교사역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습니다(빌립보서 4:18).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빌립보 교회를 대표해서 바울을 섬겼습니다(빌립보서 2:25).
이런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God began the good work within you, 6절)”라고 합니다. 자연히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 ‘착한 일’ ‘a good work’가 무슨 일일까 하는데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번역성경들이 있지만 NKJV이 이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od has begun a good work within us.”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시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은 어떤 일일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결코 우리 안에서 시작될 수 없는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혹은 하나님의 뜻, 삶의 목표, 사명, 하나님의 은혜, 이런 말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이것들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 되었습니다. 맞습니까? 이런 가치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을 믿을 때 형성되는 가치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 중심의 삶(Christ-centered life)’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4:4에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My con-science is clear, but that doesn't prove I'm right. It is the Lord himself who will examine me and decide).”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내가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혹은 하나님이 내 삶의 가치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세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old self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So I live in this earthly body by trusting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맞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by trusting in the Son of God(하나님의 아들을 신뢰함으로)'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은 매일 매일의 삶을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면서,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쪽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시는 사람의 삶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꼭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시고 우리가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0)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의 죄성(罪性, sinfulness)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삶이 변화되어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계 속에서 하고 계시는 일을 말합니다. 서기 1세기는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으로 펴져 나가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언젠가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1934)’라는 저서로 유명한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 영국)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역사의 연구’는 토인비가 1934년에 집필을 시작해서 1961년에 마친 12권의 방대한 분량의 책입니다. 토인비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When a wooden boat carried the Apostle Paul from Troas of Asia Minor to Macedonia, it moved the center of the world from the birthplace of civilization to Medi-terranean and to the European Continent (소아시아의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사도 바울을 태우고 간 (작은) 목선은 세계의 중심을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지중해와 유럽 대륙으로 옮겨 놓았다).”
토인비가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중요한 시기에 바울이라는 사람을 선택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겼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사도행전 9:15-16) 왜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바울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바울에게 선교비와 선교에 필요한 물자를 전달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교 교회에 대하여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고마운 마음을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복음을 전할 때, 늘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음을 들은 그 날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5절) 또 빌립보서 4:18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 준 선물 때문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선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그 시대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빌립보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바울을 도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 중에 마지막까지 바울의 선교를 도왔던 교회는 빌립보 교회가 유일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 속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바로 빌립보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이제 눈을 우리 자신들에게 돌리고, 우리 교회에게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는 분은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십시오.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게 주신 시대적인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나무를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큰 그림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에 동참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시작하시는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성장하도록 할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선한 일’이 시작된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내 안에 시작되고, 자라고 있는 하나님의 ‘선한 일’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것,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은 어떤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어렵거나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그 사람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주께서 지시하시는 길로 가며 주님의 명령을 지켜 주님을 가까이하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주님을 따르고 섬기시오(Love the LORD your God, walk in all his ways, obey his commands, hold firmly to him, and serve him with all your heart and all your soul).” (여호수아 22:5)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라니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Draw near to God and He will draw near to you. Cleanse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 (야고보서 4:8)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 때 어떻게 합니까?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하고 연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니까 죄된 일에서 손을 씻고 손을 떼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싫어하시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끊어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죄된 일에서 손을 씻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들과 연결되어 있는 끈을 끊기 시작한다면, 그 시간부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친근하게 생각되고,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관계는 차츰차츰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장하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는 말씀을 가슴으로 깨닫게 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일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이 일을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것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일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5/28/2023 | (성령강림절, 웨슬리 회심주일)
주님의 성령, 지금 이곳에 The Holy Spirit of the Lord, Now Here
사도행전 2:1-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며,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함께 예배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야외예배를 준비하며 섬겨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자연속에서 느껴지는 바람결에도 성령님의 어루만지심과 쉼의 시간이 되시길 바라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격려해 주시며 마음껏 누리는 날이 되십시요.
회심(回心)은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을 주께로 돌리고, 죄로 부터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문이 열리면 새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의 시대가 활짝 열려진 사건입니다. 교회사적으로도 보면 성령강림은 교회의 태동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세기후반 케임브리지 지역은 공장들이 지어지면서 노동자 계층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후 20세기 후반부터는 도시가 탈바꿈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계 나라에서 지식인들과 유학생들이 모여드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들은 더 강하게 성장하는 민족들에게 교회를 넘겨줌으로 새롭게 이어지는 복음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책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사진과 글로만 보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집니다.
당시 필그림 교회의 목사였던 벤드로스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우리는 경주를 뛰었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우리의 빛에 믿음으로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겸손하게 필그림 교회의 커튼을 내릴때가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1992년을 맞이하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기도가 쌓여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지켜온 누군가의 눈물이 남아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3년에도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며 예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의 특권이지요.
인간의 일생은 탄생과 성장을 거쳐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회도 역사도 무한한 발전이 아니라 쇠퇴되거나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수천년간 이어온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변화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의학이 발달되어 100세 시대가 오고 사람들은 천수 (天壽)를 누린다고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함’ 앞에 서면 모든 인간의 수명은 ‘Zero’에 가깝기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되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때에 한국 교회는 어린이 여름성경학교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새벽기도회도 있었구요. 정말 많은 어린이들이 새벽기도에 나와 은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너무 많은 이유들로 하나님의 일을 제한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귀한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내 삶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로 한걸음 물러서 있다면 성령강림절기를 맞이하며 다시금 주님 안에서 내영이 기쁨으로 회복되길 원한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일만 바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기쁨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팬대믹 기간을 거쳐오며 우리는 수많은 변화들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온라인 공간에 모여서 삶을 나누고 기도회를 갖었지요. 마치 오순절날에 성령을 기다리며 한곳에 모였던 이들처럼 말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한곳에 모였더니’라는 구절을 묵상하며 너무도 설레였습니다. 2천년전에도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여 믿는 자들이 ‘한곳에 모여’ 기도할때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처럼 인터넷이나 유투브가 없어서 한곳에 모이기가 쉽지 않던 시대인데 성령의 권능이 임하니까 세상을 뒤흔드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곳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릴때 일어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 ‘한곳에 모여’ 예배하는 곳에 지금도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약속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교회 공동체들 마다 믿음의 감격과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드리는 공예배, 새벽기도회, 가족모임, GT모임, 부서별 모임 안에서 성령을 사모하십시요. 하나님의 힘이 내면에 채워지도록 말입니다.
한가지 살펴볼 것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모든 사람이 일평생 단 한번 받는 구원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때에도 모든 민족이 모여 있을때 성령을 통해 장벽이 무너지고 진실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태동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동시에 일어났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세례 이후에도 성령충만함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열망해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베푸는 물세례는 예수님을 진실로 믿지 않고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의 마음을 정확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때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은 웨슬리 회심 주일입니다. 285년 전 하나님은 웨슬리의 마음을 붙드셨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중세시대 카톨릭의 부패 가운데 믿음의 기치를 들고 종교 개혁을 한 인물이라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종교개혁 있은 후, 200여년이 지난 18세기에 종교개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신학적 대안을 제시한 목회자입니다. 이를 통해서 웨슬리 신학은 19, 20세기 ‘미국 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무엇보다 ‘성결운동’과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인생에 있어서 운명은 날은 1738년 5월 24일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런던 올더스케이트(Aldersgate, London)거리에 있는 한 기도 모임에 참여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을 낭독하고 있는데, 밤 9시 15분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데 웨슬리는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바로 내 죄까지도 씻어주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 안에서 생겼다.” 그 날 이후 웨슬리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거슬러 올라가면, 1709년 2월 9일 웨슬리가 5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사택에 화재가 났습니다. 웨슬리는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1737년 3월 7일자 일기, 1750년 2월 9일 송구영신 예배 중, 1753년 11월 26일 자신의 묘비명 epitaph등) 밤 11시쯤 모두가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사택에 불길이 번졌고, 가족들은 빠져 나왔지만, 어린 웨슬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무너졌기에 위층 옷장을 딛고 올라가 창문에 기대어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웨슬리 아버지가 그를 구하려고 들어 가려다가 불이 거세어 들어 갈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하며 체념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어깨에 다른 사람을 올려 위층에 닿을 만큼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 어린 웨슬리를 잡아 내리는 순간 안쪽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날의 기억은 웨슬리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불속에서 살아남은 기억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30대 이전에는 박식한 부모 아래에서 교육을 받으며, 가난한 생활 환경에서도 십대때에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마스터 했으며, 경건생활, 성경을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삶을 유지했습니다. 젊은날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가 되고, 믿음과 삶에 있어서 그 어느 하나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웨슬리에게 한가지 없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웨슬리가 30대가 되었을 때, 그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고, 식민지 개척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미국 조지아의 사바나(Savannah)로 선교사로 지원합니다. 당시는 선교지를 가다가 배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735년 10월 25일 일기에 보면, “바다의 파도가 얼마나 세고 무서운지, 마치 하늘에 닿았다가 다시 지옥으로 뗠어지는 것 같았고…배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려…무엇을 붙들지 않으면 잠시라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맹렬한 파도는 10분마다 배를 사방으로 때려 산산조각 낼 것만 같았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상황속에서 이상하게도 배안에서 찬앙하고 기도를 드리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독일의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웨슬리는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겁나지도 않나요?” “감사하게도, 우리는 겁나지 않아요”라고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합니다. “그러면 당신네 아이들과 아내들도 겁나지 않나요?”라고 웨슬리가 되묻자, 아주 온유한 모습으로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합니다. “우리는 아이들도 아내들도 죽음을 겁내지 않아요.”라고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무서운 풍랑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그들의 평온함에 웨슬리는 무서운 풍랑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조지아 주에서 웨슬리는 2년 4개월 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가 1738년 2월 1일이었습니다. 영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신앙의 고민 가운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장래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성령세례’입니다. 웨슬리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웨슬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다가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맞이 한 날이 바로 1738년 5월 24일이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1)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2) 마음과 삶의 질적 변화이며 (3)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 체험이었습니다. 웨슬리가 깨달은 것은 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어려운 일을 만날때에 하나님이 마음을 붙들어주시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며 그 일을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웨슬리의 마음안에 하나님은 영국 국교회의 갱신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는 영국 국교회가 금지한 옥외 설교에서 “온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선언합니다. “내게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 열명만 달라. 그러면 세상을 뒤집어 엎어 보이겠다”라고 외칩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일은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십삼만오천명의 미디안 군사 앞에 하나님이 선택한 300명의 용사들은 절대 초라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세 앞에 성령의 권능을 경험한 이들은 미디안 대군 앞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주시는 힘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 안에 미워하는 감정, 부딪히려는 육신의 본성. 불신, 두려움이 사리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까? 아무리 잘 믿는다 해도 우리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듣고, 하고 싶은 대로 할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는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 권능을 받기 위해 늘 현재 진행형의 태도로 ‘한곳에 모여’ 성령의 권능을 받고 세상의 빛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도 이야기하고 ‘기도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을 간절히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체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시대’를 살아갑니다.
교회와 목회자, 성도가 한마음으로 한몸 된 지체들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함께 써내려가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눅1:8)
여러분의 땅끝은 바로 이 자리 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지금 이곳에’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며,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주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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