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2022 | 대강절 넷째 주일 메시지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요한복음 3:14-18

오늘은 사랑의 촛불을 켰습니다. ‘사랑의 촛불을 켠다’는 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행위(metaphorical action)’입니다. 깜깜한 곳에 촛불을 켜면 주변이 밝아지듯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들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Christina Georgina Rossetti(1830-1894)라는 영국의 시인이 ‘Love Came Down at Christmas(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캐럴로 부르고 있습니다.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
Love all lovely, Love divine; 모두가 사랑스러운 사랑, 신성한 사랑 
Love was bor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네
star and angels gave the sign. 별과 천사들이 그 표적을 보였네

Worship we the Godhead, 우리는 삼위(三位)의 하나님을 예배하네
Love incarnate, Love divine; 사람의 몸을 입은 사랑, 신성한 사랑
worship we our Jesus,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하네 
but wherewith for sacred sign? 하지만 무엇으로 성스러운 표적을 (예배할까?)

Love shall be our token, 사랑은 우리의 징표이며
Love shall be yours and love be mine, 사랑은 당신의 것이며 나의 것
Love to God and to all men, 사랑을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 간청과 선물과 표적을 위한 사랑을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멀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광야는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는 곳입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자라는 식물은 키가 작고 가시가 난 엉겅퀴 같은 것들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합니다. 인간이 가진 기술과 지식과 경험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인간성의 바닥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오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이었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否定)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신속하게 감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with thanksgiving)’라는 말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에 대한 꺾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때에도 감사의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 그 때 내 삶의 주인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빌립보서 4:6 말씀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때 갑자기 어디서 ‘불뱀들(poisonous snakes)’이 나타났습니다. ‘불뱀들’은 불평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물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다급한 모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9)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모두 치유된 것입니다. ‘구리뱀’에서 무슨 치유의 능력이 나온 것이 아니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산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행했던 믿음이 이 사람들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4절) ‘The Son of Man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높이 들린다(lifted up)’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린다(lifted up on the Cross)’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Good News)’, 그리스 말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아주 쉬운 ‘구원의 길’이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학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누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말씀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코스모스(κόσμος)’라는 말입니다. ‘우주(universe)’라는 뜻도 있고, ‘질서’라는 뜻도 있고, ‘the whole of creation(모든 피조물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 속에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을 때 세상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Live clean, innocent lives as children of God, shining like bright lights in a world full of crooked and perverse people(구부러지고 삐뚤어진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빛들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빌립보서 2:15) 2,000년 전에 이 말씀을 쓴 바울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에는 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perverse people’은 단순히 ‘삐뚤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들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사람들(로마서 1:26-27)’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 이런 사람들과 소통을 끊고 침묵하셨겠습니까? 누가 이 400년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기간’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끝에 죄로 물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면 독생자가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들을 미워하면 안 되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사도행전 10:15)”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속되다고 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사랑이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별처럼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라(로마서 12:2)”고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가끔 기도할 때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본심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음 세대’ 걱정하기 전에 ‘지금 세대’인 여러분 자신들을 먼저 걱정하십시오. ‘지금 세대’가 잘하면 ‘다음 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은 ‘지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pass on)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가상(假想)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universe)를 의미하는 ‘버스(verse)’의 합성어입니다. ‘확장 가상 세계’ 혹은 ‘가상 우주’라고 번역합니다. 현실 세계를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해 가상 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메타버스’가 우리의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 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도 있고, 우리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피하지 말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막중(莫重)해졌습니다. 지금의 목회 형식과 교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는 변화된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지난 ‘리뉴(ReNEW)’에 좋은 세미나가 많이 열렸습니다. 저는 김연준 목사님의 세미나에 들어갔습니다. 세미나의 내용은 새로운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전할 메시지는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메시지의 선포가 아니라 메시지에 대한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세미나에서 제시한 것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었습니다. 새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스토리텔러들(storytellers)’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내가 복음의 능력으로 고난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각자의 ‘스토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시대는 일방적인 교회의 메시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쓴 ‘스토리(삶의 메시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사랑(concrete love)’입니다. 하나님은 ‘His only begotten Son (독생자, NASB)’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신적인 특권들(divine privileges)’을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 혹은 ‘humiliation of Jesus(예수님의 굴욕)’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빌립보서 2:5-8).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이야기 배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비하’와 ‘창피’와 ‘굴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에 방이 없었다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누가복음 2:7). 여관에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잠을 자게 된 마리아의 요셉은 그날 밤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manger)에 뉘었습니다. 똑 같은 사실을 요한은 “그분이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11)”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탄생 이야기에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그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 것을 보여 주는 ‘징조(sign)’였습니다. 이 ‘징조’를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그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영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누구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요한복음 1:12)

Christina Georgina Rossetti의 시 구절 중에 ‘사랑은 우리가 가진 징표(Love shall be our token)’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의 ‘징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토큰(token)’이라는 말에 ‘징표’라는 뜻이 있지만, 우리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같은 것들을 ‘토큰’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우리는 주머니 속에 ‘토큰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Rossetti는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간청과 선물과 사인을 위한 사랑)’ 이렇게 그의 시를 마칩니다. 우리 주변에 사랑을 호소하고 간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을 나누어 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사랑의 선물을 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들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토큰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는 사인들입니다. 이 모든 일은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2/11/2022 |

크리스마스의 빛 The Light of Christmas

히브리서1:1~7

 

 

 

1930년에 로버트 (RobertKing) 작곡한 곡으로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가 콜로라도 강을 비추는 달빛 아래 향수에 젖어 그리운 마음을 담은 노래말입니다.1937 박영호 선생이 번안해서 이미자 씨가 부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세상의 곳곳에 정착하며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주간 성탄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베들레헴 말구유를 비친 그 빛이 세상 곳곳에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분의 교회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배경을 보면 저자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2세기 동방 교부 오리겐은 저자에 대해서는 ‘하나님만 아신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걷는 길을 아시고, 마음 깊은 곳까지  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밀실에도 주님의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꺼진다 해도 주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십니다.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인공적인 불빛을 모두 제거하고 세상에 어둠이 내린다면 지상에서 가장 밝은 빛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빛은 하늘에 있을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1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여러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2 이 마지막 시대에 이르러서는, 자기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시대 구약의 역사를 보면 여러시기와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모습을 담은 스케치만 그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구원의 그림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마지막 시대는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까지 모든 날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살아가는 시간은 이미 시작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감춰져 있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고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은 주의 시간으로 볼때에 그때는 속히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의 시간안에 우리의 고난도 속히 지나갈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으니 우리의 잠깐의 고난은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시대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빛이라 자처하며 살아갑니다. 빛을 받아야  존재임에도 이성으로만 빛을 찾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계몽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그리스도가 구원의 빛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머리와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어둠만 짙어  뿐입니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빛이 되려는 믿음은 결국 어둠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  구원의 빛을 과학으로도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과학을 숭배하는 것이니 과학도 완전한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 과학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1 독자들은 팔레스타인을 떠나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고 개종을 했는데 시대적으로 과격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당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유대교는 로마 정부가 허가된 종교였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64 폭군 네로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의 대박해가 시작되었으니 유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강렬한 요구를 받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유대교의 울타리 속으로 다시 들어가가만 하면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배교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에서 ‘자기의 섬기는지 아닌지 구별도 안됩니다. 그러니 상처 받았다고 해서 ‘내뜻데로  된다 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 저버리면 안됩니다. 믿음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심을 굳게 붙들고 최후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셋째주일입니다. 성탄예배로 드리며 그리스도로부터  빛이 우리의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깨트리고 우리의 지성을 파고 들어와 마음속에 크리스마스의 불꽃이 식어진 마음을 사랑으로 지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전에 혼돈과 공허함, 분쟁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 9:2) 말씀합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한 길을 떠난 동방의 박사들이 그리스도께 오던 때에도 세상에 폭력과 불의, 헤롯왕의 압제와 두살 미만의 유대인 아이의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시대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젊은이들은 공허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희망의 주로 오신 분을 모르고 깊은 절망과 흑암속에 있지요. 할로윈 축제를 즐기러 나간 젊은이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갔지만 한순간에 주검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은 공포, 두려움, 혼돈과 깊은 어둠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한 실제적 고백을 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운 길을 열고 나가게  이들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생명의 빛이라 말씀합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은 공허함과 깊은 절망뿐입니다.

 

찬양 중에 하늘 소망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영혼  하늘을 디디며 사네  주님 계신 눈물 없는   하늘에 숨겨둔  소망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아버지 너른   맞으시는

 하늘에 쌓아둔  소망있네 주님  나라에 이를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길에

 

제레미 워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라는 그의 책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 생을 시작하지 않는다. 타고난 혈통이나 유산이 하나님 나라에서 당신의 자리를 확보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사도요한도 혈통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지위를 보장할  없다고 말했습니다.(1:13) 하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름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한줄기 빛의 은총입니다.

 

2.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3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의 본체 그대로의 모습이십니다. 또한 그 아들은 자신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굳게 붙들어 보존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후에, 하늘에 오르셔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주는 분이십니다. 형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라크테르’는 ‘각인이라는 뜻인데, '같은 모양의 복제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대로 반영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그대로 드러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실로암 연못에서 날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있도록  주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대부분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곳으로 끌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시다”(10:38)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람어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아빠’입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아빠라는 호칭에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 계신데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10:30) 말씀하셨고, “나를  사람은  아버지를  것이다”(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장례식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장례식 앞에서 손님으로  있지 마십시요. 무늬만 그리스도인들로 살면 안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시고 주의 말씀과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걷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그분의 장례식장에서 서로 헐뜯고 분쟁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상처도 아픔도 주님이 죽으심으로 함께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벗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인격의 품이 넓어졌는가입니다. 몸된 교회를 위해 내가 구경꾼이 아니라 ‘부르심 받는 자로 헌신하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질  없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는 것입니다.( 8:34)

 

 그러나 사단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도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부터 멀어지도록 위장해서 다가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이성이 진리임을 믿게했고,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과학과 의학은 창조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돈은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가운데 허덕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고 싶고, 자신의 것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문명은 발달은 편리하게 해줄 뿐이지 하나님의 창조를 대신할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의 결과는 죽음이고 파멸일 뿐입니다.

 

가룟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그의 마음은 부패해 있었습니다.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것을 보고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옳다고 분을 내었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에 주인은 주님이 아니라 물질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 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그의 말은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훔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그곳에 있던 제자들도 메시아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위세를 높여줄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게만 들릴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람이 되십시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결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깊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뤄가시기를 바랍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으니  이상 죄와 상관이 없으며, 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3.      시대가 잃어버린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4 ○ 그리하여 그 아들은 모든 천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 되셨으니, 곧 천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빼어난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5 사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천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또는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이름 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구약성서에 하나님을 가르키는 명칭은 많습니다. 그리스어로는 Theos, 히브리어로는 (EL)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엘욘, 엘샤다이, 엘올람, 엘로힘  많은 이름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고대 히브리 사람이 하나님에게 붙인 명칭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이름을 밝힌 구절은 한구절도 없습니다. 그분은 존재 위에 존재이시고, 이름으로 규정할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이름이 없어야 맞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뿐입니다. 하나님을 이름으로 규정하면 이름 안에 가두는 존재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드러내는 분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시에는 천사숭배사상이 있었습니다. 천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반응하는 일꾼일 뿐입니다. 천사는 성도들의 기도를 수종하는 영입니다. 갯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실때에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셨을때 (마태복음 26:38).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천사를 보내셔서 힘을 더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43). 천사들이 예수의 기도를 도왔습니다. 천사는 경배와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날  시대는 성탄절이 기독교의 기쁨의 축제가 아니라 전세계인들의 축제이다 보니 기독교인의 성탄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특별한 경배의 의미인 메리 크리스마스 보다 해피홀리데이인 세속명절로 여겨집니다. 성탄절은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보내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열으신 문을 헤롯왕은 막을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탄생하시며 마지막 시대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사람에게는 열린 새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지만 만민의 깃발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영화  이야기인데요. 어느날  기자가 런닝머신에서 운동하다 사망한 사건을 보도하면서 다이어트에 집착하다가 비극적 사건을 초래한 여인의 사망이라 제목으로 기사를 쓰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사를 보며 오늘날 사람들의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며 죽음을 당한 외모 집찹증에 중독된 여인들 비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인은  여인은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가 아파서 장기를 이식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죠.  여인은 장기기증을 하기 위해 자신의 체중을 감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런닝머신 위에서 목숨을 걸고 뛰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자신의 장기를 주기 위해서 달리고  달리다가 결국 죽게  것이었음이 밝혀지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죄와 고통의 자리에 오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크리스마스 불꽃으로 삼으셨습니다. 어두운 실내에서 물건을 찾으려면 불부터 켜야 합니다. 세상에 참빛이  사람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이목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기사와 사건들에 현혹되지 마십시요. 믿음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사실적 경험을 통해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흠뻑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말씀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의견을 지지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마시고 예수의 이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7 또 천사들을 두고는 성경에 기록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천사들을 바람처럼 부리시고, 자기 일꾼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일꾼들을 불꽃으로 삼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꽃을 드러내는 전시품일 뿐입니다. 보통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소멸 시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 가운데 임한 불꽃은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불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모세의 인생 120 중에 성경은 떨기나무 앞에서 부르심을 받는 80 이후의 삶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르시기 위해 80 세월을 보내게 하십니다. 자기를 죽여야 하는 세월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성도들도 자기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경찰이 외부인이 집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출동해서는 집에 있는 보석에 눈이 멀고, 귀중품에 눈이 멀어 탐욕으로 자신의 것을 채우고 있다면 부르심을 잃어버린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흰색 촛불이 켜지는 날을 맞이하게  것입니다. 망망대해 같은 세상을 살아가며 전쟁과 경제의 불안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불안하고 공허해 합니다. 성탄의 주인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 평화, 기쁨, 사랑, 그리고 세상을 밝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빛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빛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촛불에 세번째 불이 켜졌습니다. 성탄의 빛이 화해와 사랑, 회복과 나눔의 빛이 될수있도록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빛의 삶을 잘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12/4/2022 | 대강절 메시지

길을 내는 삶 A Life Preparing The Way For The Lord

마가복음 1:1-8

오늘 대강절 둘째 주일에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400년 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희망의 촛불을 켜 주시고, 평화의 촛불을 켜 주심으로 자기 백성들과 소통(疏通)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밤, 하늘에서 들려온 천사들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쁨을 받으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또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이 말씀이 “Praise God in heaven! Peace on earth to everyone who pleases God(하늘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땅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에 시므온(Sime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때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5) 또 같은 시기에 살았던 안나(Anna)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6-37).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those who were looking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누가복음 2:38)’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good news for all the people, 누가복음 2:10)’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라오스(λαος)’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태복음 28:19)”고 명령하신 말씀에 나오는 ‘민족(ἔθνη)’과 같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같은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옵니다. 이 의는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We are made right with God by placing ou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is is true for everyone who believes, no matter who we are).” (로마서 3:22) 복음은 그가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조슈아 리브만(Joshua L. Liebman, 1907-1948)이라는 유대인 랍비가 쓴 ‘Peace of Mind(마음의 평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어느 날 한 현자(賢者)를 만났습니다. 그 현자는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청년은 “첫째는 건강, 둘째는 사랑, 셋째는 재물, 넷째는 아름다움, 다섯째는 재능, 여섯째는 권력, 일곱째는 명예라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나열했습니다. 그 청년이 나열한 목록을 본 현자는 “아주 훌륭한 목록이구만! 중요한 것부터 잘 나열을 했어! 하지만 자네는 아주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라고 하면서 그 청년이 만든 목록을 펜으로 벅 긁어버리고 거기다 ‘마음의 평화(peace of mind)’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This is the gift that God reserves for his special protégés, talent and health he gives to many. Wealth is commonplace, fame not rare. But peace of mind he bestows charily(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능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네. 재물을 주신 사람들도 많이 있고, 명예를 주신 사람들도 적지 않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으로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청년이 조수아 리브만이었습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가지고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의 내면 세계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수아 리브만은 그 책에서 이런 유대인들의 기도 하나를 소개합니다. “O God, Lord of the universe, heap worldly gifts at the feet of foolish people. Give me the gift of the untroubled mind(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 세상적인 선물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발 아래 쌓아 주시고, 저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십시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구약성경 이사야 9:6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는 기원전 8세기경 유다 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계산하면 2,8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 메시아 탄생에 대한 말씀과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시대에 대한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는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가 ‘한 아기(a child)’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에게 다섯개의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 중에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사르 샬롬(Shar Shalom)’입니다. 그 뜻은 ‘the one who removes all peace-disturbing factors and secures the peace(평화를 방해하는 모든 원인들을 제거하고 평화를 지켜주는 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예언한 ‘한 아기’의 탄생이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오래 전에 한 예언자가 가지고 있던 꿈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가사를 보세요. “(1절)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2절)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여러분,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하나의 주제(theme)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과 신약은 두 권이 아니라 한 권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일정한 패턴으로 주어집니다. 오래 전에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사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했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한 예언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땅을 사고 매매증서를 항아리에 넣어서 보관하라고 했습니다.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땅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비록 지금은 조국이 멸망하고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돌아와 무너진 조국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다의 역사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사르 샬롬’ ‘평화의 왕’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주시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샬롬’을 주실 분은 ‘사르 샬롬’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말의 표현이 참 좋지 않습니까? 예수님 ‘밖에서’는 하나님의 ‘샬롬’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샬롬’은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네가 오늘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하지만 너무 늦었다. 평화의 길이 네 눈에 보이지 않는구나 (How I wish today that you of all people would understand the way to peace. But now it is too late, and peace is hidden from your eyes)” (누가복음 19:42)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안타깝게 말씀하신 ‘평화의 길(the way to peace)’은 ‘사르 샬롬’이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의 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남긴다. 곧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하나님의 ‘샬롬’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의 성경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평안을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강절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이 ‘사순절에 드리는 기도’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기도하며 금식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그리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시간입니다(It is a time to be with you, Lord, in a special way, a time to pray, to fast, and thus to follow you on your way to Jerusalem).” 나우웬은 사순절이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을 따르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대강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반성하면서 ‘특별한 방식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강절에 생각해야 하는 ‘특별한 방식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 뒤에 나보다 훨씬 강한 분이 오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돌리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샬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기는커녕 하루 하루 살기에 급급합니다. 웬 일인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했던 말 그대로입니다. “For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21) 우리가 때때로 교회에서 필요한 일에 봉사하고 헌신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좀 생소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속적인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Martin Luther King, Jr.(1929-1968) 목사님을 잘 아시지요? 그는 조지아 아틀란타에서 태어나서 1968년, 39살의 젊은 나이에 테네시 멤피스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제시 잭슨(Jesse L. Jackson)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저격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로서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1955년 3월에 평범했던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알라바마의 몽고메리에서 15살 된 클로뎃 코빈(Claudette Colvin)이라는 당시 임신 중이었던 흑인 여학생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위원회가 고민하는 동안에 몽고메리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로자 팍스(Rosa Parks)라는 42살 된 흑인 여자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그 유명한 Montgomery Bus Boycott 운동으로 번지게 됩니다.

African-American Community의 문제를 다루는 한 작은 위원회의 멤버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클로뎃 코빈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 운동을 이끄는 주요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간디(Mahatma Gandhi)에게서 배운 비폭력 저항 운동을 그의 투쟁 방식으로 채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줄 곳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성경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40:4-5 말씀이었습니다. “골짜기들을 메우고, 산과 언덕들을 낮춰라. 굽은 길들을 곧게 펴고, 험한 땅들을 평야로 만들라.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고 모든 사람이 함께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Fill in the valleys, and level the mountains and hills. Straighten the curves, and smooth out the rough places. Then the glory of the Lord will be revealed, and all people will see it together).”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예수님을 위해 ‘특별한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이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그렇게 ‘길을 내는 삶’을 살았기에 흑인들의 인권이 향상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지속적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특별한 방식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하나님은 때가 되어 그를 부르셨고,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르 샬롬’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God blesses those who work for peace, for they wi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마태복음 5:9)


11/27/2022 |

그리스도의 날이 다가옵니다 The Day of Christ Is Coming

로마서 13:11~14

 

 여러분 어제 리뉴 집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고 제한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은혜 받은 처음 자리를 기억하실 겁니다. 제가 개척을 하고 담임 목회를 시작했을 당시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공감과 이해의 영역에서 조금 먼 듯한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청년 컨퍼런스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 하는데 화려한 무대수백명의 청년들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빛이 구석에 있는 작은 자들의 자리를 비춰 주는 것 같은 따스함을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에 날서있던 감정들을 하나님께서 정리해 주시는 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 힘으로 하면 못하는 이지만 하나님과 함께하기 주시는 힘입니다. 주방에서 묵묵히 음식을 만드신 그 섬김, 밤잠을 설치며 가장 어려운 자리에서 미디어 사역과 전체 집회를 컨트롤 했던 스텝들. 기도의 자리에서 매주 간절함으로 함께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들,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을 섬겨준 찬양팀. 다음날의 집회를 준비하며 교회의 구석 구석을 치우고 정리한 우리 집사님들. 다 표현할수 없는 섬김이 리뉴 안에 가득했지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면 손해보는 일을 누가 자처해서 할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남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아낌없이 순종함으로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서 회복이 됩니다.

 

달력을 보며 벌써 한해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제가 8월의 여름에 보스턴에 왔는데 어느새 겨울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현재의 믿음이 더 깊어졌는지를 돌아보게 되는데요. 우리는 예배 드리러 나왔다고 해서 주님 안에 있다고 전제해서는 안됩니다. 헌신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건인데,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세속의 물결과 자기중심적 욕망에 휩쓸려 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시간들이 무한하지 않기에 선택하는 모든 일 주님의 재림으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오는 때는 있지만 가는 때와 시기는 순서가 없습니다. 도적같이 온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부할 능력을 주시며 죽기를 각오하셨지요. 십자가에서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시며 사랑의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날이 다가옵니다. 주께서 오신다고 하신 시간표가 이미 2천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만큼 주께서 오실날이 가까워진 것이지요. 어둠이 깊어 질수록 낮이 가까워지는 것을 매주 마주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면,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주님은 약속대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오심하늘로 올라가심의 시간표는 이미 성취되었고, 우리는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으로 살아가고 있느냐이지요. 그래서 자기욕망에 흠뻑 취해 사는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Κρόνος)에 따라 가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선물로 주어진 ‘선사된 시간’(Καιρός) 속에서 불확실한 세상을 한걸음 한걸음 믿음의 균형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의 명예를 지켜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대강절은 대강 대강 보내는 절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라는 뜻에서 보라색 스톨을 하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까지는 녹색 스톨을 하고 있었지요. 초록색은 생명을 더하고 성장 소망을 표시하는 색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구요. 색깔이 달라지니까 굉장히 스타일리쉬한 줄 알았다구요. 런건 아니구요. 절기별로 바꾸게 되는데 이번주부터 4주 동안은 보라색을 보시게 됩니다. 색은 오시는 왕의 위엄과 존엄을 의미합니다. 제가 다른 색으로 바뀔때 또 그 의미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대강절기를 보내며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잠에서 깨지 않으면, 깨지 못할 때가 옵니다.

 

11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벌써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주어진 삶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저는 2010년 그 해를 잊지 못합니다. 외국에 나와 사랑하는 아버님을 갑작스럽게 떠나 보내 드리고 찬바람이 불던 그해 겨울 외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운 사명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무렵 성경대로 살아보자 외치시던 한국교회의 존경하던 목회자들이 한분 한분 별세하시는 소식을 들으며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를 제게 더 분명하게 주셨습니다. 주님의 시간표로 보니 이 땅에서는 슬픔이지만 하늘에서는 기쁜 날이었고, 주님의 품에 안기시는 믿음의 선배들을 잘했다 칭찬하시는 주의 음성이 제 안에 가득 찼습니다. 수고로운 삶을 살며 애썼다고 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그 시선을 분명히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때보다 더 가까워졌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는 죄와 어둠의 행실들을 볼때에 주님의 때가 더 가까이 있음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표를 알지 못하면,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가 준비없이 깊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신부는 한 명도 없을겁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너무도 태연하게 살아갑니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의 과실을 맺기 위해 사명으로 타오르는 신실한 예배자들을 찾으십니다. 사명감은 영적으로 어두워져 가는 시대속에서 빛이 투영되게 하는 것이죠.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은총의 빛이 비춥니다. 그 은총의 빛은 우리의 눈에 주님의 눈물이 차오르게 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삶의 옥합을 깨트리고 여인처럼 주님 발앞에 머무르십시요. 신실한 예배지들은 그날을 꿈꾸며 완전한 평화가 임하게 되는 그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무감각해져 있다면 이제 깨어나십시요. 깊은 밤이 오기 전에 깨어 나십시요

시편 108편에서 다윗은 전쟁을 앞두고 승리를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전쟁을 앞두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울까요? 마음이 오그라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불안한 상황과 시간속에서 하나님만 섬기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선을 주께 두는 것이지요. 다윗은 그의 시선을 보좌에 계신 어린양께 두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12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우리는 매일 살아가며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갑옷은 언제 입지요. 전쟁을 할 때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적군의 공격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갑옷을 입습니다.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 성도들은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지요(5:9) 예배자들은 이 갑옷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빛은 죽음이 가져오는 상처와 어그러진 관계, 어둠의 행실들을 폭로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는 일은 사실 무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거스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손해를 보게 되는 일도 경험하고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빛의 갑옷은 세상을 향해 저항하게 합니다.

 

 처녀가 등대지기에게 시집왔습니다총각의 이름은 제이콥 워커(Jacob Walker)였습니다  젊은이는 등대하나만 있는 외딴  로빈스 리프(Robins Reef) 살아야만 했습니다신부는 이런 데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1개월간이나 짐을 풀지 않았으나 혼자 떠날 수도 없어 정착했습니다그러나 3 뒤에 남편 제이콥은 폐렴이 되어 스태튼 아이랜드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임종하기 전에 제이콥이 남긴 마지막 말은 등대에 마음을 써달라.(Mind the light) 것이었습니다남편의 시체를 등대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 묻고 20대인 워커 부인은 등대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수백  섬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북바쳐 오르는 고생과 고독의 연속이었지만  70세까지 41년간을  여성은 혼자서 등대를 지켰던 것입니다마음이 변하려는 때마다 언덕 위에서 등대에 마음을 쓰라는 남편의 음성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이 시대가 어떻습니까? 미디어 안에 음란과 죄악의 열매들이 얼마나 가득합니다.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에 중독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음란으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수많은 아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인터넷의 발전으로 음란물은 더 은밀하게 찾아오고 너무도 가까이 와 있습니다. 과거에는 접하기 위해 여러 단계를 넘어서야 했다면 이제는 생각지도 못하는 순간에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인터넷 기사만 보아도 도처에 음란물 광고가 뜹니다. 스스로 구하지 않아도 찾아오는데, 찾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광활한 어둠의 세계가 열려지겠습니까? 그래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질 때 즉시 회개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살전 5:22) 회개를 통해 순결한 옷을 세탁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옷은 더러워 지고 그리스도의 음성은 희미해 질것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세상속에서 견뎌 낼 수 있습니다. 원수의 위협에도 신실함으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고백하면서 세상의 어둠을 택하지 마십시요.

 

거룩한 신부가 되기 위해 빛의 갑옷을 입고 기다립시다. 오늘은 예배를 드린 후에 주님의 마음으로 인사와 교제를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이 다가올 때에 케임브리지 공동체가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때를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도 인정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각자 다르게 지어 주셨습니다. 당신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칭찬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육신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죄의 본성이 바라는 정욕을 만족시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사단이 40일간 예수님을 유혹한 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인 욕망들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 지배하고 싶은 욕망, 매직 같은 인생을 꿈꾸는 욕망들입니다. 이러한 욕망을 버리는 것은 광야의 훈련입니다우리의 옛 생활, 어둠의 습관, 나의 고집과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절개 수술하는 것처럼 도려 낼 때에 아픔과 통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잘렸던 부위에 새살이 돋아나게 하시고 이전보다 더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두려워 말고 이전에 해 오던 습관의 옷을 버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기로 결정하실 때 죽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주시고 죽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깨어진 세상을 선택하고 죄를 선택하고 돈을 선택하고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만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스스로 죽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주님이 날마다 입혀 주시는 옷으로 마음의 옷장을 채우십시요. 부패하고 썩어질 것들을 옷장에서 꺼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고독한 기도는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끌어 안으시기 위해 자신을 아들을 죽게 내버려 주시면서 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세상속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영광에서 멀어진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질것입니다.

로마서 1313절 말씀은 성어거스틴을 변화시킨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의 뒤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날마다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수년동안의 눈물의 기도에도 어거스틴은 여전히 방탕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답답했던 어머니는 교회의 감독을 찾아갑니다. 어거스틴을 만나서 타이르고 혼내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을 한 것이지요. 감독은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스스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끈질기게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감독은 말합니다.“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이렇게 눈물을 뿌리는 기도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이 방황하며 죄의 열매를 맺고 지내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입었던 빛의 갑옷은 어두움에 거하던 아들을 돌아오게 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유언입니다 내 몸은 어디에 묻어도 좋다그 일로 인하여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단 한 가지만 너희에게 부탁한다너희들이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

하나님에게는 먼 곳이란 아무것도 없다하나님이 세상 끝 날에 나를 부활시킬 장소가 어디인 줄 모를까 두려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저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겨줄것이 이것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자녀들에게 우리의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제단앞에서 우리를 기억할수있는 그런 삶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11/20/2022 | 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를 아는 사람들 Those Who Know Being Grateful

누가복음 17:11-19

우리는 ‘감사의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보스턴에서 남쪽으로 약 40분 내려가면 ‘플리머스(Plimoth)’라는 도시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이 ‘추수감사절’이 시작된 ‘감사의 도시’입니다.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Puritans)’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타고 왔던 배 ‘Mayflower’는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한 후 그들을 낯선 땅에 남겨 둔 채 떠났습니다.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Wampanoag(왐파노액)’이라는 착한 인디언 부족을 만나 이들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플리머스’에 가면 이들이 도착했을 때 ‘1620’이라고 새겨 놓은 ‘플리머스 락(Plimoth Rock)’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그림들의 은인 ‘왐파노액’ 추장 ‘마사소이트(Massasoit)’가 이들이 건너온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동상 밑에는 ‘Massasoit, Great Sachem of the Wampanoags Protector and Preserver of the Pilgrims(위대한 왐파노액 추장 마사소이트, 필그림들의 보호자이며 보존자)’라고 새긴 동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착한 인디언들을 만난 덕분에 필그림들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옥수수 재배법을 배우고, 낯선 기후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어 그들을 맞이해 준 왐파노액 인디언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들에 나간 사람들은 야생 칠면조를 잡아오고, 크랜베리 열매를 따와 소스를 만들고, 바다에 나간 사람들은 대구(cods)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옥수수 빵을 구워 식탁을 차렸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영국 국교로부터 탄압을 받던 ‘청교도들(Puritans)’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낯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이들의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고, 이들을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디언들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청교도들의 삶의 모토는 예배(worship)와 규율(discipline), 그리고, 근면(diligence)과 청빈(frugality)입니다. 청교도들의 예배는 보통 5시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찬송이나 다른 것으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5시간 동안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은 은혜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2시간 정도 되었고, 설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3시간 정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5시간 후에도 그들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사회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토의했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던 것입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읽은 누가복음 17장 본문 말씀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열 사람은 당시의 관습대로 집에서 쫓겨나고, 공동체로부터 쫓겨나서 사마리아 땅과 갈릴리 경계를 맴돌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이곳을 방문하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면서 결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고 병이 나았다는 증서를 받아야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마을로 돌아가는 도중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기쁨이라는 말로 이들의 심정을 모두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한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누가는 이스라엘 사람 아홉 명과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을 선명하게 대조하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This man was a Samaritan).” (16절)

이 16절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면 나머지 아홉 명은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늘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면서 그들이 사는 땅을 밟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랑하던 아홉 명 중에는 병을 낫게 해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감사가 쉬운 것 같지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전(反轉)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당연히 감사를 모를 것 같은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동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 감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무슨 의미가 있길래 성경에서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감사는 인간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합니다. 우리는 감사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자기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잊고 살고 있을 때, 이사야는 이렇게 그 시대를 한탄했습니다. “나귀나 소 같은 짐승도 제 주인을 알아보고, 자기를 보살피는 주인에게 고마워하는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는구나!” (이사야 1:3) 

자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올바로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But giving thanks is a sacrifice that truly honors me. If you keep to my path, I will reveal to you the salvation of God." (시편 50:23) 무슨 말씀인가요? 감사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배입니다. 어떤 화려한 예배보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의 말 한마디가 최고로 가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나가는 ‘path(길)’이고,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감사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n ordinary life, we hardly realize that we receive a great deal more than we give, and that it is only with gratitude that life becomes rich(보통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베푸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는다는 사실과, 감사할 때만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Your faith has saved you).” (19절) 감사를 모르고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왜 나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모르니까 다음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할 지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랐기 때문에 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어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를 두고 “감사는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 배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감사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빌립보서 4:6)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말은 ‘감사함으로’라는 말입니다. NIV 성경은 이 말을 ‘with thanksgiv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말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When you pray) thank God for all he has done(너를 위해서 해 주신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렇게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이 있는 강력한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 삶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과 돌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있고 믿음생활이 풍성해집니다. 

셋째로, 감사는 고통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Kōnosuke Matsushita, 1894-1989)’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기업가입니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파산하면서 한순간에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어린 마쓰시타도 다니던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어려운 살림을 돕기 위해 고향을 떠나 오사카에 있는 자전거 점포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어린 마쓰시타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스물 세 살이 되던 해에 마쓰시타는 100엔을 투자해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가 훗날 내셔널(National), 파나소닉(Panasonic)으로 알려진, 연 매출 5조 엔을 달성했던 ‘마쓰시타 전기(Matsushita Electronics)’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세계적인 기업가가 된 마쓰시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회장님, 큰 성공을 하게 되었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마쓰시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은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은혜, 둘째는 몸이 허약한 은혜, 셋째는 못 배운 은혜입니다. 저는 그 은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기자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네? 이것들이 하나님이 준 은혜라고요? 그건 모두 불행한 일이 아닌가요?" 마쓰시타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가난 덕분에 일찍부터 성실과 근면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몸이 허약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몸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마쓰시타는 직원들에게 사람들이 ‘마쓰시타 전기’는 무엇을 만드는 회사입니까?”라고 물으면 “마쓰시타 전기는 인간을 만드는 회사이지만, 전기제품도 만듭니다” 이렇게 말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시로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가 있다면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를 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라며 직원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것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가난과 허약함과 못 배운 것은 불행과 절망과 실패의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도 감사를 아는 사람들은 가난을 성실함으로, 허약함을 건강함으로, 매순간마다 못 배운 것을 배움의 시간으로 바꿉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을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 들어오는 축복의 통로로 삼습니다.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말씀(율례)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말씀은,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words. Your words are more valuable to me than millions in gold and silver).” (시편 119:71-72) 

끝으로,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라는 시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에게는 외로움도 눈물도 아픔도, 절망도, 가시도, 슬픔도, 연약함도, 가난도,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8).

 

<날 구원하신 주 감사>

(1절)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론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절)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절) 길가의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사랑의 가정 일용할 양식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4절) 내게 건강 주심 감사 또한 연약함 감사

햇빛을 주심도 감사 구름 또한 감사해

땀 흘리는 수고 감사 저녁의 안식 감사

부요도 가난도 감사 모든 것 다 감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