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0/9/2022 | 창립 44주년 기념예배 메시지/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5
팬데믹 이후의 우리 교회 Our Church for the Post-Pandemic Era
에베소서 3:7-10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4주년 되는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버드 스퀘어 근처 11 Garden Street에 있었던,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새벽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회 문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교회 들어가는 입구의 있는 철책을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눈에 한국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김장호라는 사람인데, 이곳에 있는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를 세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2003년 6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해 10월이 되어 창립 25주년 기념 예배를 준비하면서 그 분께 이번 창립기념주일에 초대하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감사하지만 참석은 못할 것 같다고 하면서 대신 교인들에게 인사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25년 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케임브리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쓰신 여러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70년 전에 미국교회는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였고 그 선교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미국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미국 사회에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미국에 온 한인 학생, 직업인, 관리, 그리고 지역사회의 한인교포를 섬기며 서로 의지하고 돕고 살아가는 선교적인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5-6명의 신자가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최기일 교수, 하버드 대학 학생이었던 김용옥(도올) 박사, 강희천 박사(전 연세대학교 신학 대학장) 등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의 케임브리지한인교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리를 좇는데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따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다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며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2003년 10월 13일, 그리스도의 종, 김요나단 (장호)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그리고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안부를 전해주십시오(Greet also the church that meets at Priscilla and Aquila’s house).” (로마서 16:5, NIV)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the church that meets at their house)’라고 했잖아요? 이 말씀을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τὴν κατ’ οἶκον αὐτῶν ἐκκλησίαν’ 그들의 집(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이 예배하는 장소였고, ‘그 집에서 모이는 사람들’이 교회였음이 확실합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는 말은 ‘to call out, summon(불러내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교회입니다. 요즘에 자주 말하는 “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You are the Messiah, the Son of the living God).” (마태복음 16:16)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름을 부으신 분(the anointed one)입니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는 곳이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약 50km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분봉왕 빌립이 그 지역의 통치권을 준 로마 황제를 찬양하기 위해 세운 신전이 있었거든요?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다(You are Peter (which means `rock'),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마태복음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위(rock)’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교회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셋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23). 이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몸은 ‘유기체(organism)’입니다. 몸의 각 부분들은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존되어 있습니다. 한 부분이 기능을 상실하면 금방 몸에 이상이 생깁니다. 몸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기관이 없습니다. 몸 속에 보이지 않는 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만 기능을 잘못해도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몸의 각 기관들은 서로 도와서 제 기능을 발휘해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팬데믹은 이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 서서히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 개인이나 한 국가가 아니라 세계를 한 공동체로 보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보는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의 결정 과정에 있어서 민주적인 의사 결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행위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으로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지금 러시아는 서방 세계로 가는 전기와 가스 공급을 끊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로 세계의 지탄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는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공동의 운명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무기 삼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팬데믹 이후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 교회는 더욱 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the Lord)’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또 이 고백이 얼마나 위험한 고백이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편안하게 ‘주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주님’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퀴리오스(κυριος)’는, 교회가 박해받던 시대에 로마 황제 ‘네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네로는 자기가 ‘퀴리오스’로 불려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주님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그 시대를 향해 선언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한 사람들로 몰려 박해를 받은 이유입니다.
‘주님(Lord)’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권위(authority), ‘절제(control), ‘힘(power)’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합니까? 인정한다면 왜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의 삶을 절제하고 있습니까?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이름(a wonderful name)’이 되고 있고, ‘능력있는 이름(a powerful name)’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에서 크리스천의 냄새가 나야 비로소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됩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예언자적 공동체(prophetic community)’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곧 하나님 안에 숨겨진 진리에 관한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임무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I was chosen to explain to everyone this mysterious plan that God, the Creator of all things, had kept secret from the beginning. God's purpose in all this was to use the church to display his wisdom in its rich variety to all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
엄청난 말씀 아닌가요? 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있듯이 교회에도 내려 놓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합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 놓아 삶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예민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지극히 본질적인 것들만 남기고,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설교자는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처럼 소명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정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설교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에 대하여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요한복음 13:34-35). 중요한 것은 교회는 우리끼리 모였다가 흩어지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메시지는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팬데믹 이후에 우리가 기대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넷째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서로 ‘연대(solidarity)’해야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듯이, 교회는 정보를 독점하지 말고 다른 교회와 공유해야 합니다. 팬데믹 이후의 교회는 각자 알아서 생존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얻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교회 간에 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교파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함께 팬데믹 이후의 교회의 사명과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 연구 전문가인 해롤드 퍼시(Harold Perc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People who move toward the church do so for two major reasons: to learn about God and to find some guidance and direction for living(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 주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삶의 지침과 방향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다른 교회들과 연대하여 팬데믹 이후 교회의 길을 찾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는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good influence)’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influencer(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교회는 세상에서 ‘good influencer’ 역할을 감당했었습니다. 저는 이 ‘good influencer’라는 말을 교회들이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 이 말을 유튜버들이나 연예인들, 정치인들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튜버 팔로우어가 100만이 되면 그 유튜버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집니다. BTS의 팬 클럽인 ‘아미(the A.R.M.Y)’도 사회적인 ‘influencer’들입니다. 도대체 ARMY가 전 세계에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의 팔로우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순히 BTS의 팬이 아니라 ‘fandom’ 현상을 일으키는 influencer들입니다. ARMY가 몇 명이냐 하는 질문에 “The ARMY is everywhere(이 세상 어디나 아미들이 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good influencer’들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Facebook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198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People influence people. Nothing influ-ences people more than a recommendation from a trusted friend. A trusted referral influences people more than the best broadcast message. (사람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의 추천만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추천은 최고의 방송 메시지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저커버그는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영향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의 말이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회복하는 일들을 시작해야 합니다. 한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이 방법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10/2/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A New Commandments I Give to You
요한복음 13:34-35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Woman is weak, but mother is strong)”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세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햄릿(Hamlet)’에 나오는 “Frailty, thy name is woman(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이 말에서 연유된 말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두로(Tyre)’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지중해를 끼고 있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페니시아(Phoenicia)’지역에 있는 도시 국가입니다. ‘두로’는 그 위에 있는 ‘시돈(Sidon)’과 함께 페니시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무슨 이유로 그곳까지 가셨는지 그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로’에 가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느 집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지역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제 딸 아이에게 ‘더러운 나쁜 영(an unclean evil spirit)’이 들어갔습니다. 제발 불쌍한 제 어린 딸아이를 고쳐주십시오.” 그 여자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자녀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여자는 이런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주여! 하지만 개들도 식탁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는 주워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7:28)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떠났다(Good answer! Now go home, for the demon has left your daughter)”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이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여자다!” “이 여자는 어떤 창피와 굴욕을 당해도 자기 딸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서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두로’에 가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중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희생된 어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과 건물이 무너진 현장에서 구조대가 한 여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여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여자가 마치 절을 하듯 굽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구조대장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여자가 몸을 굽혀서 만든 공간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순간 그 안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다! 아이가 있다!” 모든 구조대원들이 달려들어 무너진 집의 잔해를 치우고 아이를 구조했습니다. 아이는 담요에 싸여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구조대가 아이를 덮고 있던 담요를 벗기자 그 안에서 어머니의 휴대폰이 나왔습니다. 휴대폰을 켜자 화면에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가 찍혀 있었습니다. “만약 살아 남는다면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렴!” 그 메시지를 본 구조대원들은 모두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2004년에 영국 문화협회가 세계 102개 비영어권 국가를 상대로 4만 명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 70개를 묻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장 아름다운 단어 1위에 선정된 단어가 Mother(어머니)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선정되었는지 궁금하시지요? 2위는 Passion(정열), 3위는 Smile(웃음), 4위는 Love(사랑), 5위는 Eternity (영원)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Father(아버지)라는 단어는 선정되지 않았습니다. 69위가 Gum (껌)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라는 단어는 70위 안에 선정되지 않았습니다. 레바논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자 작가인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other is the most beautiful word on the lips of mankind(어머니라는 말은 인간이 입술로 말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어머니에게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Never! Can a mother forget her nursing child? Can she feel no love for the child she has borne? But even if that were possible, I would not forget you(절대로 내가 너희를 잊는 일은 없다!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어머니가 자신의 몸으로 난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비록 그런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9:15) 여러분, 이 말씀이 이사야 49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 힘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이 포로생활의 의미를 잘 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포로생활이 하나님이 너희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너희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너희를 회복시켜 다시 고국 땅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은 참 험하고 고된 생활이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광야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지도 보았다(You have seen what I did to the Egyptians. You know how I carried you on eagles' wings and brought you to myself).” (출애굽기 19:4)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한 말씀 더 볼까요? “야곱 백성아, 내가 너희를 창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너희를 만들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이름을 불렀으니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너희가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며, 불 사이로 지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며 너희를 구원할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3:1-3)
우리는 아무리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읽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그렇게 깊이 와 닿지 않습니다. 맞습니까? 네가 힘들어할 때 하나님께서 너를 업어서 날랐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네가 깊은 물속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별로 마음에 큰 감동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이처럼 관심을 갖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마음에 큰 감동이 없습니다. 맞습니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새 계명’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as I have loved you)’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보다 이 질문을 먼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이 말은 요한이 제자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의 감화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요한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좁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보아너게(son of thunder, 마가복음 3:17)’였을까요? 우리 말로 하면 ‘천둥의 아들’이 잖아요? 목소리를 컸고, 성격은 급했으며,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옆에서 보고, 직접 경험함으로써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요한일서 1:1에 아주 감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We saw him with our own eyes and touched him with our own hands(우리는 그를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손으로 직접 만져보았습니다).”
그 요한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See how very much our Father loves us, for he calls us his children, and that is what we are! But the people who belong to this world don't recognize that we are God's children because they don't know him(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는 우리를 그의 자녀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1)
여러분,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데에는 요한이 미처 다 얘기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읽었던 풀턴 아워슬러(Fulton Oursler, 1893-1952, 미국)가 쓴 ‘The Greatest Story Ever Told(가장 위대한 이야기, 1948)’라는 소설 제목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데에는 한 위대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화목제물(an atoning sacrifice, 요한일서 4:10)’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라고 합니다. 죄 때문에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사랑을 머리로 이해해야 하고, 가슴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크리스천의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지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이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Dear friends, since God loved us this much, we must love each other).” (요한일서 4:11,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만큼(this much)’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가슴에 사랑이 식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생길 때, 우리는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가서 사랑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A New Commandment)’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구약 레위기 말씀을 보세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레위기 19:18) “외국인들을 너희 동포처럼 여기고, 너희 몸을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하여라.” (레위기 19:34)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새삼스럽게 ‘새 계명’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는 법이기 때문에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했습니다. 속으로 내키지 않지만 법이니까 사랑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For Christ's love compels us, 고린도후서 5:1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속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새 계명’인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하신 말은 ‘ἐντολὴν καινὴν (entolén kainēn)’이라는 말입니다. ‘ἐντολὴ’이라는 말은 율법, 계명 혹은 명령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ἐντολὴ(계명, 율법)’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모든 사람들이 다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제 설교를 듣고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는지 깨닫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든, 깨달아지지 않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 페이스북(Facebook)에 올라온 말씀 카드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Love is not an option for a church(사랑은 교회에게 선택 사항(옵션)이 아닙니다.” 교회는 무조건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by this)’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나, 성경공부하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지키는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9/25/2022 |
물문 앞 광장에서 The place in front of the Water Gate
느헤미야 8:1-12
설교 본문을 묵상하며 제 마음이 머문 곳은 총독 느헤미야도 학사 에스라도 아닙니다. 물문 앞 광장에 나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복받쳐 울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곳 보스턴에 와서 매주일 제단에 올라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제 마음 한켠에 울컥한 마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익숙한 지역과 환경을 떠나 낯선 곳에 있어서도 아니고,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도 아닙니다. 현재의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마음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스 1:1) 여호와의 손길을 증거하며 성전을 재건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때에도 느헤미야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방나라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성벽을 재건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의 말씀 안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 안에서 살아가지만 역사속에서 세상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우리를 도우심을 믿음으로 볼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가 다르고 사람마다 각자의 처한 상황에 맞는 은혜가 다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늘 최고의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끝까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문을 통과한 사람들을 동문이라고 합니다. 같은 학교를 졸업 한 사람들, 한 스승에게서 배운 사람을 이르는 말이죠. 우리는 선생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통과한 문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주님의 DNA를 닮아가며, 주의 바른 교훈을 듣고 실천하며, 주님이 걸어가신 문을 함께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이 인생의 문을 여시지 않으면 내 앞에 닫혀진 문은 벽에 불과한 것이지요.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구원의 문으로 들어 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주일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는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한 갈망이 솟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황금문으로 불리는 동쪽문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황금문에는 두 개의 문이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자비의 문’ 또 다른 하나는 ‘회개의 문’으로 불리는 문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동쪽 문(황금문)으로 들어간 뒤 문이 닫혀 다시는 열리지 않으며, 메시아가 올 때 에야 문이 열린다고 생각했습니다.(에스겔, 44:1-3). 그래서 문제는 유대인과 무슬림은 지금도 메시아가 예루살렘 성전 동문을 통해 온다고 믿고 있기에 에루살렘을 점령한 무슬림은 801년 이후 예루살렘 성 동문을 폐쇄했습니다. 그러다가 1102년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의 승리로 다시 이 문을 열었지만 무슬림에 의해 다시 폐쇄되었지요. 현재는 무슬림들이 예루살렘 성 동문 앞을 공동묘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부른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히브리서 10장 19. 20절을 보면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히 10:19-20) 하나님은 그 곳을 떠나 다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사도행전 17:24).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놓으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문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문은 닫을 자가 없고, 그 길은 막히지도 않는 길입니다. 그 문은 누군가를 짓밟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 헤매는 목자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부르심을 받는 청지기들이 사명을 완수하고 들어가는 문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문은 10개가 있었습니다. 10개의 문들 가운데 ‘물문’은 예루살렘 성문 가운데 하나로 물을 실어 나르던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느 3:26) 이 문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고, 이 광장은 성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는 10개의 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물문’을 7번째 소개하고 있습니다. 7번째 언급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1 일곱째 달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자기 마을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물 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경외감이 사라지면 가던 길에서 방향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경외감은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친밀감이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성밖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느헤미야를 통하여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자기 마을에 자리잡고 살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선지자들 처럼 제사장의 가문도 아니었고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와 개인적인 경건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던 인물입니다. 느헤미야 1장부터 7장에 보면 그는 기도로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8장부터는 영적 회복의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2 그래서 제사장 에스라가 무리를 위해 율법책을 가져왔습니다. 그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루였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듣고 깨달을 만한 사람은 다 모여들었습니다. 3 에스라는 ‘물 문’ 앞 광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한낮까지 율법책을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에스라는 듣고 깨달을 만한 모든 사람에게 율법책을 읽어 주었고, 그들은 율법책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깨달을 만한 모든 사람이 모였습니다. 말씀은 삶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한계상황에서도 말씀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살아납니다. 말씀은 information(지식전달)이 아니라 formation(변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태양계에 점에 불과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면 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spiritual formation’(주의 성품으로 닮아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살아납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도 말씀을 연구하다 보면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 이해 할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말씀을 갈망하다 보면 말씀의 신비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른 아침부터 한낮까지 읽었으니 대략 잡아도 한 6시간 이상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깨달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말씀을 향한 목마름과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게 되면 새역사가 시작되지요. 목마른 예배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갈망하는 예배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 지는 것이고, 찬양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이며, 기도는 생수의 강이 입술을 통해 넘쳐나는 것이지요.
인류역사에 있어서 물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인류의 기원에 있어서 물은 생존이며 생명입니다. 물에 담긴 성서적, 신학적 의미는 정화(Wash)시키는데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가 됩니다. 주의 보혈이 흐르는 곳에는 항상 깨끗함이 있지요. 그래서 세례수에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홍해의 사건인 ‘구원’과 노아의 방주때 40주야 비를 내리시며 물로 의인과 악인들을 가려 내시는 ‘심판’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정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으로 접속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물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기가 넘치고 (Refreshment) 생명의 물을 마시는 자는 성령 안에서 새 삶을 발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비싸도 더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과거에 물을 사 먹게 될꺼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은 웃었지요. 그러나 요즘은 좋은 물을 사서 마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누릴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없습니다. 더 편리함을 찾는 세상이지요. 채우고 가져도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라보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채울수록 결핍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영적으로는 주님을 더 사랑하고 갈망하지만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4 에스라는 높은 나무 단 위에 섰습니다. 그 나무 단은 이번 일을 위해 따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제사장 에스라는 임시로 만든 높은 단 위에서 말씀을 낭독합니다. 말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은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게 되고, 매일의 양식을 통하여 영적 굶주림과 배고픔이 채워집니다.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중에 ‘프리츠 크라이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기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 악기 상에서 자기가 정말 원하는 악기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악기상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악기를 팔지 말라고 내가 돈을 모아 오겠다고, 그런데 그 금액이 너무 커서 수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돈을 다 모아서 악기 상에 왔더니 그 악기가 바이올린 수집가에 팔리고 없는 겁니다. 수소문 하여 그 사람 집에 찾아가 악기를 자기에게 팔라고 하니 거절합니다. 그래서 한 번만 연주를 할 수 있겠느냐, 청을 하고 연주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부자의 얼굴이 점점 변하더니 마침내 눈물을 글썽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바로 이 바이올린의 주인이셨군요. 제가 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 주인에게 이 악기를 돌려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완벽한 연주자이십니다. 내 삶을 연주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신앙을 조율하십시요. 하나님은 인생을 통해 놀라운 음악을 연주하실 것입니다. 저는 매주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 때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의 전부를 드려 노력하고 공부한 것을 드리는 자리이기에, 믿음을 표현하는 자리이기에 기쁨과 은혜가 차오릅니다. 우리의 교회도 그렇게 걸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배경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이 같아서 그 마음으로 서로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나의 소리가 커지는 것을 줄이고 함께하는 동행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며 걸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말하면서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아멘은 하나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되면 경배의 모습, 예배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은 영적으로 나를 변화시키도록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초대하며,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삶입니다.
9 그런 뒤에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학자인 에스라, 그리고 백성들을 가르치던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오. 울거나 슬퍼하지 마시오.” 그들이 이 말을 한 것은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회복시키시니 백성들의 마음에 감정의 반응이 일어납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눈물 속에서 그 동안의 아픔도 상처도 흘러 나갑니다. 눈물을 통해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 눈물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눈물이었습니다. 크리스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요. 주일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받아 누리는 기쁜날 인것입니다. 기쁜날 사랑의 교제를 하실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더없는 기쁨의 자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슬픈 감정들은 내려놓고 기쁨으로 살아가라고 그 눈물을 자제 시킵니다. 말씀에 기초해 은혜를 받으면 감정의 변화가 찾아오고,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순종함으로 삶의 자리로 나아가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10 느헤미야가 말했습니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음료수를 드십시오. 그리고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오늘은 주의 거룩한 날이오. 슬퍼하지 마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곧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이오.” 11 레위 사람들이 백성을 달래며 말했습니다. “조용히 하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마시오.” 12 그러자 모든 백성이 가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었고,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들은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 ‘힘’이란 단어의 원어는 ‘마우제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뜻이 ‘방파제’라는 뜻입니다.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면 아름답지요. 하지만 숲속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곤충, 벌레들, 부러진 가지들, 버려진 쓰레기도 눈에 들어옵니다. 꽃들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땅속 밑은 거칠고 어둡습니다. 그런데 태풍과 비바람으로 부터 지켜주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땅속에 심긴 뿌리들입니다. 캐나다 산림 생태학 교수 수잔 시마드(Suzanne Simard)는 20년 이상 연구해온 결과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뿌리들이 어둡고 거친 땅 깊은 곳에서 균을 통해 서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양지에서 자란 큰 나무들의 뿌리들이 음지에 있는 작은 나무들에게 뿌리를 통해 탄소를 나눠주며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땅속 밑에서 뿌리를 통해 물과 영양분을 교환하며 서로 소통하는 것이죠. 이 힘이 해충으로 부터 지켜내며, 숲을 보존해 주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땅을 디딛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이길 진정한 방파제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며, 서로가 돕고 베풀며 연약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생존에 밀려 낙오된 이들이 다시 일어 설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에 깊이 뿌리 내리며 거친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하나님의 신비속에서 서로 공생하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비드가 시작되고 락다운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을 마주했습니다. 늘 가던 곳이 닫혀 있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마음도 서로를 향한 관심도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지요. 저도 그 시간에 늘 토론토에서 걷던 길이 있었습니다 매일 그 길을 걸으며 자연속에서 주시는 은혜를 구했습니다. 추운 겨울 성탄절이 다가오던 즈음에 언제나 걷던 그 길가의 큰 나무에 누군가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기뻐합니다. 어제는 그냥 걷던 산책길이었는데 누군가의 사랑과 섬김으로 따뜻한 산책길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곳곳에 그런 사랑의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환경과 역경들 가운데 진정한 교제 가운데로 나와서 아픈 삶을 드러내시며 말씀으로 위로 받고 깊이 뿌리 내리십시요. 하나님의 집은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연결되어 유지되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영혼이 기쁨을 누리시기 축복합니다. 서로를 바라보시며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케임브리지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 기사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채교수는 시카고 노스웨스턴대 종양내과 의사입니다. 그는 말기암 희귀암 전문의인데, 실제 병실에서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될까요?(Can I pray for you?)’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이 말이 책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환자의 손을 잡고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랑이 없는 마음에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셔서 아프고 피곤한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진료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매달린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겸손, 이 가난한 마음이 없이는 나에게 소망이 없었다. 주님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나는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어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우쭐해 하고 잘난 사람을 보고는 우울해 했다. 배후에는 엘리트들이 놓 지 못하는 자기사랑, 자기연민이 있었다. 자아가 없어진 공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고, 비로소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 옆에서 끝까지 옆에서 마라톤을 함께 뛰는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완주할 것을 다짐했다.”
나의 자아가 깨어진 곳에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사랑이 필요한곳에 나를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될까요? 우리가 만나는 지체들에게 많은 말보다 이 한마디로 마음을 전할수 있는 귀한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9/18/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3
주님이 내 삶에 들어오시면 If The Lord Comes Into My Life
요한복음 2:1-11
여러분, ‘The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사인들)’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구글에서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을 찾아보면 이에 대한 많은 글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만큼 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지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인’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σημείων(세메이온)’입니다. 이 말은 ‘a sign (typically miraculous), given especially to confirm, corroborate or authenticate(확인, 확증 혹은 인증을 위해 주어진 기적적인 사인)’라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기적’ 혹은 ‘이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기적’이라는 말 대신 ‘세메이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이 말을 ‘표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즉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인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일곱개의 사인 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인’이 첫 번째 사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첫 번째 사인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첫 번째 사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사인(표적)이 나타난 것은 갈릴리 ‘가나(Cana)’에서 열렸던 한 결혼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가나까지 직선거리로는 약 8Km 떨어져 있지만 구불구불한 로컬 길로 가면 약 10Km 떨어져 있습니다. 걸어서 약 2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지방 사람들에게 결혼식은 특별한 것입니다. 그들은 잦은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결혼식만큼은 크고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성경에 결혼식에 대한 말씀이 여러 번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혼 잔치에는 지나가는 나그네도 갈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지역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두 번 결혼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테이블 중앙으로 안내되어 귀빈 대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결혼잔치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남편 요셉은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혼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손님들의 상에 무슨 음식이 더 필요한 지 살피는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잔치 전체를 관장하는 ‘연회장(the master of the banquet)’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잔치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단순히 곤란한 일이 아니라 때로 예상치 않았던 절망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존 플라벨(John Flavel)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 지방에서 당한 환난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해, 삶의 소망조차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서운 죽음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앞으로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8-10)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절망을 우리 삶에 불필요한 것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들이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선명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얘야,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겠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편 118:8-9이 오버랩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유사시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낫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힘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더 낫다고 믿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닙니까? 침착하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해결책을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마리아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머니,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Dear woman, that's not our problem. My time has not yet come, 4절)” 이렇게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여자’에 해당하는 그리어는 ‘γύναι(gynai)’입니다. 성경 번역 전문가인 빌 마운스(Bill Mounce)는 ‘γύναι’라는 말은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 불가능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이 말을 ‘dear woman’이라고 번역한 New Living Translation이 제일 낫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여자(woman)’라는 말로 번역해서 마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경멸하는 것 같은(pejorative)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번역성경 중에 Weymouth New Testament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제일 잘 된 번역 같습니다. “(Dear Woman) Leave the matter in my hands, the time for me to act has not yet come(어머니, 이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제가 행동할 때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결혼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자신이 행동할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 해석이 맞다는 것은 마리아의 다음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그분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대로 하여라’ 하고 말해 두었습니다.” (5절)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매우 의도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말씀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훈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문제입니다. 보세요. “그 집에는 돌로 만든 물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각각 물 두세 동이를 담을 수 있는 항아리였습니다.” (6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정결예식(Jewish ceremonial washing)’에 대한 말씀입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는 반드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식사 전에 손도 반드시 씻어야 했습니다. 이런 용도로 물 항아리가 집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생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몸을 정결하게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밖에서 ‘부정한(unclean)’것과 접촉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물로 씻어서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먹는 ‘코셔(kosher)’ 음식도 자신을 ‘부정한’ 음식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이 ‘정결한(clean)’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unclean)’ 것인지 모두 율법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잔칫집에 정결예식에 쓸 물 항아리가 모두 여섯 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숫자를 사용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섯’이라는 수는 불완전한 수입니다. ‘셋’ ‘일곱’ ‘아홉’ ‘열 둘’은 완전한 숫자입니다.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따라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몸을 씻어서 깨끗하게 하고, ‘정결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율법적인 노력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좀더 확장해서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절망할 일도 많고, 실망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법으로 정해 놓고 그 법을 지키려는 율법적인 노력을 해도, 우리가 그 법을 모두 지킬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법을 지켰다고 해서 우리의 속 사람(양심)까지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Don't misunderstand why I have come. I did not come to abolish the law of Moses or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No, I came to accomplish their purpose, 마태복음 5:17)”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하게 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것도 연회장이 이 포도주 맛을 보고 칭찬할 정도로 최상급의 포도주로 바꿔 주셨습니다. 물이 최상급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면 평범하고, 가치 없는 것이 변하여 특별한 것이 되고, 무의미한 것이 의미있는 것으로, 무익한 것이 유익한 것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 오스트리아)이라는 사람이 ‘죽음의 수용소에서(1946)’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의미를 찾는 인간)’입니다. 빅터 플랭클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주어진 상황 속에서 끝까지 삶의 의미를 붙들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Life is never made unbearable by circumstances, but only by lack of meaning and purpose(삶은 상황에 의해서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미와 목적의 결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지난 설교에서 저는 보스턴에 꿈을 안고 찾아온 청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의 보스턴 생활이 순탄하기를 바라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빅터 프랭클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요.
그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can discover this meaning in life in three different ways: (1) by creating a work or doing a deed; (2) by experiencing something or encountering someone; and (3) by the attitude we take toward unavoidable suffering (우리는 이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무엇을 창조하거나 행동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대처하는 태도를 결정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물로 최상급 포도주를 만드신 분,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무의미한 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는 사인을 보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가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I have come in order that you might have life—life in all its fullness).” (요한복음 10:10, Good News Translation) 여기 사용된 ‘생명’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ζωὴ(zōē)’라는 말인데요. ‘both physical and spiritual life’를 모두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온전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실 때, 나의 삶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온전해지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가 일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혁진이라는 분이 가사를 썼는데, 참 가사를 잘 썼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 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내. 힘으로 안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이 찬양 가사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여러분의 인생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9/11/2022 |
하나님 백성의 품격 The dignity of God's people
스가랴 4:1~7
이번주는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책상에 앉아 설교를 준비하는데 마음안에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이 하나님 나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하나님 나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누려야 하는 나라’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을 위한 하나님의 꿈을 보여주시는 서신입니다. 절망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 포로기 이후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을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환상은 하나님이 스가랴에서 주시는 5번째 환상이지요. 순금으로 된 등잔대, 등대 곁에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 나무를 받치는 기름 그릇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되고 다시 세워짐을 상징하고 있는 환상입니다. 올리브 나무 좌우의 기름 그릇은 성전 예배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였으며, 이스라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인데, 학개서는 무너진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현실적인 부분을 다르고 있는 반면에, 스가랴서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전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1 <다섯 번째 환상: 등잔대>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가 내게로 돌아와서 나를 깨웠는데, 나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2 천사가 내게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내가 대답했다. “순금으로 된 등잔대가 보입니다. 그 꼭대기에는 그릇이 있고 등잔이 일곱 개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 받침도 일곱 개 있습니다.
등잔대(메노라:Menorah)는 가지가 일곱 등대인 성막시대부터 유대인들의 상징입니다. 히브리어로 촛대라는 뜻인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타지 않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회당안에 들어가면 제단 위에 일곱 등대의 모습을 한 메노라가 있습니다. 아치를 이루는 모습은 두 천사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지성소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보고 계시는 메노라는 1956년 영국 통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회가 이스라엘국가에 기증한 작품입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성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순금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상징하지요. 순금은 고난을 이겨낸 믿음입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깊은 고난을 이겨내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엡 2:20-21) “너희는 사도들과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계시록에 사도 요한의 환상을 보면 일곱촛대가 일곱교회를 상징하는데 (계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스가랴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스가랴서에 나오는 8개의 환상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 찾아보시며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묵상하는데 큰 흥미가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우리 교회 곳곳을 둘러보며 교회의 역사를 느끼고 기도의 자리를 가슴 깊이 느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졌을 당시 보스턴 지역은 영적 부흥이 물결치던 시기였습니다. 부흥의 물결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지게 했고,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던 많은 이들은 뜨거움을 주체 못해 거리로 나와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지역 케임브리지 지역만 해도 메인 교단의 교회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부흥의 물결 가운데 함께했던 성령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의 교회들을 보십시요. 많은 교회들은 관광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이름의 교회들도 화려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관광지가 되어버린 교회를 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팬데믹 이후 교회가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가 더 어려워지고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지요. 현실에 보이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을 보면 더 절망하게 되고 답답해 집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염려와 근심이지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다시 회복하고 세워 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꿔야 합니다. 팬대믹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많은 것이 변한 것을 바라보고 있지만 어찌보면 이 변화의 물결속에 나의 마음이 가장 많이 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보기 전에 실패를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회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보고 절망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가랴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고 하나님의 꿈을 다시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4: 7 어떤 산도 스룹바벨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모든 산이 낮아질 것이다. 그러면 그가 꼭대기 돌을 가져올 것이며, ‘은혜, 은혜!’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다시 살게 하고, 절망 가운데서 있는 자들을 일으키십니다. 내 사랑이 너희를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낮아져도 내가 너를 포기치 않고 사랑하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 가운데 내버려 두셨습니다.
제 생각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정돈 되지 않을때 기도하며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큰 꿈은 없습니다. 눈물로 뿌린 씨앗들 세상을 뒤덮지 않아도 여전히 충분합니다
큰 꿈은 없습니다 맡겨주신 영혼들 그들을 사랑하며 섬기면 그것만으로 난 충분합니다
그래도 한꿈은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안고 푸른 들판을 사는 이들 그 안에 꿈을 봅니다
하늘 보좌 버리고 낮아져 이땅에 오신 주님 주님만이 나의 꿈이십니다. 주님 만이 내 사랑입니다
세상을 내려놓고 엎드리오니 그런 나를 사용하시는 주님만이 나의 꿈이십니다”
이 찬양을 부를때마다 분주한 생각들이 멈추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나의 열심인가,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나의 만족을 위함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가. 내가 하려는 말이 하나님의 뜻인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참 많은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찬양의 가사를 들을때 마다 하나님께 온전히 내 마음을 드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우리의 예배 안에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꿈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4:3 그 곁에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하나는 그릇 오른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릇 왼쪽에 있습니다.” 4 내가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에게 물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5 천사가 말했다. “이것들이 무엇인지 모르느냐?” 내가 대답했다. “내 주여, 모릅니다.” 6 그러자 천사가 내게 말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네 능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영으로만 된다’고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4:14 천사가 말했다. “그것들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섬기도록, 주께서 기름 부어 거룩히 구별하신 두 사람을 나타낸다.”
올리브 두 그루의 나무가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스가랴에게 천사가 알려줍니다. 주께서 기름 부어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다. 성전을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지어가는 거룩한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올리브는 지중해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지중해 사람들의 필수 음식입니다. 하나님께는 거룩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품격을 갖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품격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등잔을 비추려면 기름이 필요한데요. 이 기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공급되는 성령의 영입니다. 히브리어로 ‘루아흐’는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성전의 완공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고전 3:6) 농부는 거름을 주고 병충해로 부터 곡식을 보호하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 인격이 성품이 마음의 성전이 하나님의 품격으로 갖춰지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맺는 성령의 열매가 우리 마음과 성품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함 앞에 서는 일이고, 성령의 존재를 계속적으로 기도를 통해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숨을 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지요. 물고기는 헤엄을 치기 위해 물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기도의 호흡이 필요한 것이지요. 촛대를 통해 나타나는 권능의 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마음의 성전을 회복시키시고, 주저 앉아 있는 자들을 일으켜 주시는 분입니다. 절망의 입술을 희망의 입술로, 분쟁과 시기의 입술을 사랑의 입술로, 거짓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포로 생활하고 마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포로로 학습된 습관으로 인해 당당함을 잃어 버리고 낙심과 절망의 마음이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스가랴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복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길 원하십니다. 세상은 교회가 문제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합니다. 죄가 있다고 회개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은혜를 주셔야 회개가 됩니다.
성경은 “너희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청년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행2:17)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로 부터 청년들 노인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회를 다닌 년수에 있지 않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꿈을 꾸는 모든 세대는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회복의 공동체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성전을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요 2:19) 이때 예수가 말씀하신 성전은 그리스도로 인해 세워지는 마음의 성전을 가르켜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돈과 힘이 있으면 수월하게 할 수 있고 잘 해 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네 능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영으로만 된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배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참된 예배를 드릴수 있던가요? 마음의 성전을 짓는 일이 우리의 힘으로 능력로 되던가요? 주님의 겸손함을 닮아가고 싶다고 생각데로 닮아지던가요?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고 싶다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꿈을 보며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꿈의 사람하면 요셉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며 살았던 요셉은 절망과 죽음에 직면해서도 꿈을 간직하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꿈을 지닌 이에게 모든 만남은 축복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꿈을 품고 있는 자에게는 삶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 사이에서 계속되는 만남 가운데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지닌 사람들은 일상의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욕망의 한복판에서 그분의 뜻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우리는 어둔 세상에서 주의 뜻을 선택하며 갈라진 마음 틈새에서 그리스도의 꽃을 피워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스찬들은 세계의 여러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며, 시간을 거슬러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믿음의 사람들과 영적인 관계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무엇보다 믿음이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꿈을 잃어버리고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에게 그 품이 사라지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꿈이 사라지는 것은 정말로 두려운 일입니다.
지난 주일 청년 수련회 말씀을 인도하며 청년들이 흘리는 기도의 눈물을 보며 꿈을 향해 도전하는 저들의 삶을 중보했습니다. 낯선땅에 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들의 마음에 익숙한 것들로 부터의 단절, 고독, 외로움이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외로움과 삶의 문제들까지도 하나님의 값진 선물로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의 깊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고 있는 두려움, 상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모두가 다른 환경과 처지에 살아가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이 예배안에 있을 때에 우리가 품었던 마음의 온도가 동일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믿음을 끝까지 붙드는 이들을 통해 유지되고 존재합니다. 스가랴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기억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린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부흥을 허락하실까? 내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약속하셨고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인생의 농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흩어 뿌리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품격이 다른것이지요. 우리가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걸음도 나아갈수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면 마음 안에 늘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내 삶에 안전한 둥지를 마련하고 싶은 욕망, 나만을 위해 편하게 살고 싶은 안일함,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욕망과 하나님의 꿈을 선택하는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욕망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서 하나님의 위한 삶을 선택 보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 꿈을 보여주며 이 시간 우리에게도 무너진 마음을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대 하나님이 성전을 다시 세우라는 것은 여러분의 일상생활과 몸과 마음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변에 보면 부유하지만 가난한 이들도 있고, 가난하지만 부유한 이들도 있습니다. 누구나 부유하기를 바라지만, 결핍의 마음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의 인생에는 불행이 시작됩니다. 결핍에 눈길을 주며 사느라 이미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욕망과 결핍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을 끊임없이 무너뜨려 갈 것입니다. 무너진 성벽 틈으로 끊임없는 유혹과 욕망은 채우고 채워도 마음의 공허함과 우울감만 계속 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꿈을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찮은 일을 통해 큰일을 행하시고 지극히 작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이 넘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용히 묵상해보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보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빈센트 반고흐의 불꺼진 예배당 그림입니다. 그의 동료가 그에게 삶의 신조를 물었을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불꽃처럼 일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하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을 건네 주는 것이라네.” 합니다. 신앙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나의 욕심과 자아가 주님 앞에서도 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요.
여러분 우리의 간절한 예배의 자리에서 아직도 흔들리는 나의 영적인 갈급함을 마주하고 계시다면 혹은 너무 많이 알고 들어서 영적인 배부름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한다면 이 시간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채워 달라고 결단하며 기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주를 살아내야 할 우리의 삶의 일터와 현장에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어지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나우엔의 ‘꼭 필요한 것 한가지 기도의 삶’의 기도문을 함께 나눕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소원도 많고 욕심도 많고 기대도 많습니다.
이루어 질수 있는 것도 있지만 이루어 질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 모든 만족과 실망의 한복판에서 저는 주님을 소망합니다.
주님이 결코 저를 혼자 두지 않으실 것과 주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루실것을 저는 압니다.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 같을 때에도
실은 주님 뜻대로 풀리고 있음과 결국 주님 뜻이 제게 최선의 길임을 압니다.
오 주님 제 소망을 굳게 하소서.
특히 제 많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때 그리하소서.
주님의 이름이 사랑임을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