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2/5/2023 | 기도 시리즈3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누가복음11:9-13
누가복음 11장은 기도의 장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에게 먼저 주기도문을 알려주신 후 기도의 핵심인 ‘간청’을 설명하시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간청’은 무엇입니까? 떼를 쓰는 것일까요? 소원이 이뤄질 때까지 기도의 양을 채우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이지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기도를 드리며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낙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더디 응답될 때 낙심되기도 하고 조급해 지기도 합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안될 때 낙심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낙심되는 마음을 이겨내고 인내하도록 해줍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방인이었던 누가가 볼 때 기도하는 것이 익숙치 않았을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의 시선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이 기도의 가르침은 새롭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누가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며 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기록했습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인데요.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이 사람은 다른 친구집을 찾아가 떡 세덩이를 꾸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한밤중에 피곤하고 힘들었을텐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 다른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이기적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절실한 필요를 안 친구는 그 밤에 찾아온 친구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이것이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아온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직무를 수행하며 수천만명의 장애인을 대변한 강영우 박사입니다. 그의 삶에는 예수님의 기도의 간청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중학교 3학년 때, 축구를 하다 친구가 찬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8시간 만에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납니다. 믿고 따랐던 누나마저 공장에서 일하던 중 과로로 숨져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워 보였던 그 시절 눈을 고쳐 달라고 기도 했을때 하나님은 ‘No’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그는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 중학교 시절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끝임 없는 노력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972년에 장애가 유학의 결격조항으로 있던 시절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미국 유학을 못 가는 불평등한 조항을 없애 달라는 청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여, 당시 민관식 장관으로 부터 승인 받아 한국 장애인 최초로 유학생으로 도미 유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각 장애인으로 유학을 가서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UN 세계 장애위원회 부의장,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로 강영우 박사는 세상의 장애인들이 함께 어우러진 세상을 만드는데 밀알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가 유학을 왔을 때 LA공항 그를 맞아준 사람은 미국 양부모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기여가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눈을 뜨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놓으신 사람들의 만남은 불가능 했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그의 인생에 닫힌 문을 열어 주었고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도구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11:9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다
멕시코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여자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친아버지에게 학대 받던 아이였는데, 하나님이 그 아이를 입양하라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이제 너는 내 딸이야,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말해’라고 했지만 아이는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울지 않고, 뭘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고 버림 받을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아이가 선교사님에게 다가와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신발 끈이 하나 필요해요. 선교사님이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합니다. 아이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데 감사하더랍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는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를 원문으로 보면 ‘아이테이테’, ‘제테이테’, ‘크루에테’라고 되어 있는데, 모두 ‘현재 명령형 동사’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영어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의미가 더 자세히 보여집니다.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기도는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녀들에게 숨겨진 하나님 나라를 밝히 드러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 오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갖는 것은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이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prophetes인데, 이는 예언자의 기본 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다른 이를 위하여 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중심 개념은 신적(神的) 교제를 나타냅니다. 기도란 단순히 듣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자기 일을 전부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을 뜻합니다. 온몸을 바쳐 기도 드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부분의 삶을 마칠 때까지 자기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황폐해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욕망의 벌판위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수 없습니다.
기도가 단순히 내 소원을 구하는 간구가 되어 ‘내 뜻이 무조건 이뤄지이다’라고 요구하는 도구쯤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해가 될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간청의 입을 닫아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드린 기도의 간청을 드릴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즉 그의 수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고 야고보서를 결론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기도와 행동을 사용하시는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작과 끝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움직이신다면 인간의 행위는 의지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도의 소리도 듣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기도의 힘이 강력하게 영향력이 있고 일정부분 기도의 힘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기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바라는 일 한가지 일을 구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기도의 바른 출발을 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게 되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다음으로 다윗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하십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혈통에 관계되는 족보에 아브라함과 다윗이 언급됩니다. 구약의 역사속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매일 옷장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 것처럼 새로운 마음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어제의 기도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일평생 고아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했던 죠지뮬러가 있습니다. 평생 고아들을 돕는 일을 위해 그가 드린 기도는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였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1938년 11월 28일. 오늘 아침 기도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상황이 암담하였지만 주님께서 도와 주시려는 확신이 들었다. 평상시와 같이 형제들과 기도모임을 가졌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때 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편지 한통이 눈에 띄었다. 그 편지는 기도중에 배달된 것이었다. 그 안에 고아들을 위해 쓰라고 10파운드가 들어 있었다”
이 일기는 죠지물러의 기도의 응답의 일부분입니다. 죠지물러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해 주셨둣이 고아들을 돕는 일에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11 너희 가운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을 주지 않고 뱀을 주겠느냐? 12 또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하더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려고 한다.
어떤 부모가 자녀들에게 뱀과 전갈을 그 손에 들려 주겠습니까? 성경에 뱀과 전갈은 악한 세력이고 자녀를 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죄를 짓는 악의 씨가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런 까닭에 악에 빠져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내 손에 들린 것이 나를 해치는 것인지 내게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일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더듬더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보면 동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 시대는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향할 때입니다. 마음을 돌이켜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 고통으로 인해 기도를 잃어버린 성도들입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얼마나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기다렸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아들이 용기 내어 아버지께 다시 돌아왔을때 아버지는 어떻게 맞아주십니까? 멀리서 부터 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아 입을 맞춰주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으로 내어 다가 입혀 주셨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발에는 신발을 신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아버지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기도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매일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요. 하루의 시간을 들여 진실한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천년의 사랑과 애정을 부어 주실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바다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망가진 몸보다 크고,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가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으로 나아갈때에 십자가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은 보화를 찾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 집에 돌아가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했으면 원래의 밭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윤리적인가? 도덕적인가, 근면한가에 관해서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가 간청함으로 역동적으로 누리는 나라임을 설명합니다.
소비주의 사회는 기도가 세상의 기준에서 필요한 걸 마땅히 조달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애통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게 중요합니다. 삶의 문제를 만나서 비관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애통하며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 우리는 애통해도 됩니다. 일어설 용기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기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위선적인 신앙으로 갈 경향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할 때에 인생의 상실감, 고통과 상처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 주십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간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눈을 뜨지 않는 이들에게는 스스로 눈을 감고 있으니 보이는 것은 사방이 어두움 뿐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편 40:1-3
칼빈은 성령께서 인간의 정욕을 바라 잡아 주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정욕은 우리를 웅덩이와 수렁으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며 우리의 정욕을 통제해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 안에 죄를 죽이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넘치게 하고, 육체의 열매에 반하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게 함으로 죄를 이기게 해 주십니다.
이번 주간에 팔복에 대한 새벽 설교를 준비하며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 1926 –2015) 의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책을 읽다가 제 마음에 다가 온 간증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1820년 생후 6주밖에 되지 않은 한 여자 아이의 눈에 염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뜨거운 찜질약을 바르는 바람에 각막이 타버렸고, 아기는 그만 영영 앞을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 아홉살이 되었을때 그 아이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비록 볼수 없으나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요. 만족하며 살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복을 누리고 있어요. 눈이 멀어서 눈물을 흘릴수도 한숨을 쉴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이 소녀는 나중에 찬송가 615장 그 큰일을 행하신, 찬송가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찬송가 275장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를 비롯해 8천 편에 달하는 찬송가를 썼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입니다. 9살된 소녀가 어린 나이에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령께서 그 소녀의 애통함을 복으로 바꿔주신 결과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고통이 복이 되는 위대한 교환이 이뤄지는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밝은 면만 있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도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삶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부인하는 것은 스스로 진실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은 척하고 살게 되면 반드시 누려야 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실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주시는 힘을 통해 마지막 숨을 내시게 될 그 날을 향해 용기 내어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생명줄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찾아 가십시요. 어려운 시기를 걷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친구가 되어 주십시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주님의 길로 돌봄의 사람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환대의 문을 활짝 열고 쉴 수 있도록 안식처가 되는 기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문을 열고 접촉할때에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한주도 사람들의 닫힌 마음에 기쁨을 실어 나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29/2023 | 새해 메시지3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 God's Mysterious Plan Revealed to Us
에베소서 1:7-11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에베소서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A.D. 62년경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에서 대 화재가 일어난 것이 A.D. 64년이니까요. 크리스천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2년 전에 쓴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두 5절인데요.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7절),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8절), 셋째로, 그 비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9절), 넷째로, 그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10절), 다섯째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오래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11절)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우리(we)’라는 말은 바울과 동시대를 살던 크리스천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히브리서 4장 말씀을 읽다가 놀라운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와, 이런 말씀이라니!”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Since those who first heard this good news failed to enter because they disobeyed God, God's rest is there for people to enter.......God's promise of entering his rest still stands, so we ought to tremble with fear that some of you might fail to experience it(구원의 소식을 처음 들었던 그 사람들은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처에 들어가 안식을 누릴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그러므로 모두 조심하여 우리 중에서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4:6, 1)
처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이 아닙니까? 만일 처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순종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갔더라면 오늘 우리에게 안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오늘 읽은 에베소서 말씀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은 2,000년 전에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신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위해 그들을 도구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구원받은 사실에만 집중했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제가 2주 전에 소개했던 톰 라이트(N.T. Wright)의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참여하지 못한 덕분에 오늘 우리에게 그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이 어려울 수도 있고,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God’s mysterious plan)’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로마서 11:13-27 말씀을 읽어 보시면 저의 오늘 설교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000년 전에 자기와 동시대 크리스천들에게 이 말을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 우리에게 이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때에 살고 있습니다. 위기감을 느껴야 합니다. 시대적이 사명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바울은 “At the right time he will bring everything together under the authority of Christ(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모이게 할 것입니다, 10절)”라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때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the right time’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대적인 사명’을 느끼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로마서 12:2 말씀을 보십시오.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말은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라는 말입니다. ‘새 사람(a new person)’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꾼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꼭 새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새 사람’의 상대적인 말은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사는 방식은 ‘세상의 일(earthly things, NIV, 빌립보서 3:19NIV)’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는 ‘하늘의 일(heavenly things)’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옛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땅의 일’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라는 유대의 랍비에게 하신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So don't be surprised when I say, `You must be born again.” (요한복음 3:7) ‘거듭나다(born again)’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 ‘γεννηθῆναι ἄνωθεν (gennēthēnai anōthe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γεννηθῆναι’이란 말은 ‘to be born(태어나다)’이라는 뜻이고, ‘ἄνωθεν’이란 말은 ‘again(다시)’ ‘from above(위로부터)’ 혹은 ‘from God’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라는 말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ἄνωθεν’을 ‘다시’라는 뜻으로만 알았던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반문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18, 현대어 성경)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if anyone is in Christ)’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새 사람’은 ‘패러다임(paradigm)’이 바뀐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고린도후서 5:16) 이 말씀에서 ‘a human point of view(인간적인 관점)’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엔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παράδειγμα(paradeigma)’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토마스 새뮤얼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이라는 과학자가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과학 혁명의 구조, 1962)’라는 책을 썼는데, 그가 그 책에서 처음으로 ‘paradigm shift’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책을 쓸 당시 쿤은 UC Berkeley의 교수로 있었습니다. 쿤은 그 전에 하버드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톤에서 가르쳤고, 마지막으로 MIT에서 가르쳤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자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는 ‘과학 혁명의 구조’에 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장 많이 읽혔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영문 철학서라고 평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임(TIME)’에서는 이 책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100권의 도서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그만큼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이 20세기 후반 지성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습니다.
쿤은 탁월한 학문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버드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을 때, 당시 하버드대 총장이던 제임스 코넌트(James Conant)는 인문계 학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학부에 과학사(The History of Science) 과목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는 촉망받는 인재로 주목받고 있던 쿤에게 과학사 강의를 맡겼습니다. 그 때가 1948년, 그의 나이 26살 때였습니다. 이후 쿤은 1956년까지 8년 동안 하버드에서 조교수 자격으로 과학사를 강의합니다. 그 때의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과학 혁명의 구조)’를 썼습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를 ‘과학혁명’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쿤 덕분에 ‘패러다임’ 혹은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말이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패러다임’은 사물을 보는 방식, 관점, 혹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해석과 판단의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러다임 쉬프트’는 이 관점과 틀이 바뀐 것입니다. 다시 이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병아리가 막 알을 깨고 나온 그림입니다. 껍질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사방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껍질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세상은 캄캄하고 답답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자기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또 이 사진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어항에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먹이가 생기면 서로 먹으려고 싸워야 하고,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금붕어 한 마리가 자기가 살고 있던 어항을 박차고 뛰어올랐습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큰 어항에 들어가 살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서 뛰어오른 것입니다. 큰 어항에 무사히 뛰어들 수 있다면 이 금붕어는 자유로운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따르는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더 이상 그 어떤 사람도 ‘세상적인 관점(a human point of view)’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고했습니다. 그에게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통적인 용어로는 ‘회심(conversion)’입니다. 청년들에게는 ‘회심’이라는 말보다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패러다임 쉬프트’ 이후 바울의 삶이 어떠했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는 회심 후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갈라디아 1:18). 그리고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했습니다(사도행전 9:30). 그 기간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외면당했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사도행전 9:23). 제자들에게 외면당했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사도행전 9:26). 금붕어가 죽을 각오를 하고 앞에 보이는 어항으로 뛰어오른 것처럼 ‘패러다임 쉬프트’를 원하는 사람은 이런 고통의 시간들을 무릅쓸 각오를 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패러다임 쉬프트’을 경험하지 못하고 예전에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여리고의 삭개오가 자기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절반도 누구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생각나면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19:8). 삭개오에게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의 돈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그의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의 것을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Matthew Fox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system is not working. That is how a paradigm shift begins: the established way of seeing the world no longer functions(기존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이 패러다임 쉬프트가 시작되는 방식이다. 곧 기존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 사람’에게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대사입니다(And God has given us this task of reconciling people to him. So we are Christ’s ambassadors).” (고린도후서 5:17, 20) 실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나와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읽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시대적인 사명’을 느껴야 합니다.
“너희의 직분은 세상에 나가 화목의 메시지를 너희들의 삶을 통해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주어진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이 ‘시대적인 사명’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까? 이 사명의 말씀을 외면하고 실천하지 않았던 사람들 덕분에 이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이 변화되어 ‘새 사람(a new person)’이 되어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대사로 세상에 내보내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마이크를 입에 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큰 소리로 외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고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화해의 메시지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1/22/2023 | 기도 시리즈2
“네가 낫고자 하느냐?” "Do You Want To Be Made Well?"
요한복음 5: 1-9
‘감정은 어떻게 전염되는가?’(Strange Contagion)라는 책은 사회 전염 현상을 과학적으로 흥미롭게 풀어 쓴 책입니다. 이 책의 작가 리 대니얼 크라비츠(Lee Daniel Kravetz)는 2009년 실리콘 밸리의 부유하고 재능도 많던 고등학생들의 연쇄 자살 사건을 추적합니다. 여러가지 원인을 찾아 내었을 것입니다. 대중 매체의 영향. 집단을 따라가려는 영향. 실리콘 밸리에 이미 퍼져 있는 성공주의로 인한 탐욕. 히스테리.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 수많은 원인과 배경이 뒤따르겠지요. 저자는 감정이 집단적으로 빠르게 전염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감정 전염’은 눈에 보이는 전염병이 아니기에 더욱 위험하고 제어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증명해 낼 것들을 찾습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적 영향을 받습니다. 이 감정이 분명 나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정 전염’으로 인해 다른 이들의 경험과 스트레스. 분노를 원래 나의 감정이었던 것처럼 빠르게 흡수하기도 합니다. 이 비극적 사고 앞에서 책은 건강한 공동체를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회도 환경도 공동체도 이상적인 모델을 찾으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 안에서 내가 올바른 나로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성경은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죽게 됨을 고민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전 뜰 앞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보면서는 분노하셨습니다. 70인의 제자들이 전도하고 돌아 왔을 때는 크게 기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감정은 자극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도 자극에 따라 웃고 울며 감정이 반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감정은 지금 어떠십니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대답은 늘 정해져 있을 때가 많지요. 솔직하게 대답하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불안한 감정을 부정적이고 나쁜것이라고 생각하면, 오래 신앙생활을 할수록 때로는 아닌척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평안한 감정만을 강요 받기도 하지요.
본문 베데스다 연못에는 전설처럼 떠도는 미신 같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서 몸을 씻는 사람의 질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믿음을 지닌 채 찾아온 많은 병자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였음에도 물이 끓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의 간절한 믿음은 폭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먼저 들어가기 위한 경쟁으로 무자비한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베데스다(Bethesda)는 ‘집’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트’ 와 ‘자비,인자,긍휼’등을 가리키는 ‘헤쎄드’ 의 합성어입니다. ‘자비의 집’은 서로를 향한 책임과 긍휼의 마음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그곳은 인간됨을 잃어버린 채 절망의 자리가 될 뿐입니다. 천사의 기적을 바라는 소문에 전염된 많은 병자들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고, 물이 끓게 될 때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만 낫게 된다는 전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께 한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물이 움직일 때 저 연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제가 연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으면, 늘 다른 사람이 앞질러 들어가 버립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성경은 어떤 병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38년동안 병을 앓아 온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어떤이에게 38년이라는 시간은 평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긴 세월동안 베데스다 연못에 서서히 퍼져가는 사회현상을 보면, 남들에게 뒤쳐지게 되면 안되고. 1등으로 들어가야만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점차적으로 연못에는 패배감과 절망감이 퍼져가고 희망에 대한 무감각함이 전염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38년 된 병자는 주님이 오셔서 물으실 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물어보실때 자신의 상한 감정을 보여드리기가 쉽지 않았을 꺼예요. 누워 있으면서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상한 감정들은 우리를 자신만의 동굴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38년 된 이 사람의 원망과 탄식의 소리는 기도일까요? 기도가 아닐까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모든 고백은 기도입니다. 부모를 잃고 슬퍼하는 가족들의 울음도 기도이고, 새생명이 태어나 미소 짓는 엄마의 기쁨도 기도입니다. 산책길에 주님을 생각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그러면,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는건가요? 묻는 분들도 계실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을 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탄식의 소리를 듣는 영적 감수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성령의 탄식이 마음 안에 느껴지게 되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조율됩니다.
1세기 요한이 기록한 베데스다 연못의 이야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이 시대 신앙공동체들에게 전하는 메세지가 무엇일까요?
베데스다의 연못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도 경쟁의 원리가 스며 들어 있습니다. 세상과 사회는 1등을 해야만 살 수 있고, 1등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그 자리에 치유가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여전히 공허할 뿐입니다. 육신의 만족을 위한 그곳에는 허상만 있는 믿음일 뿐입니다. 그곳은 인간 내면의 실존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소였습니다. 모두가 아프지 않은 척 하며 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일뿐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그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도 묻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회복되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변화되어지기를 원하느냐? 우리 안에 있는 교만함과 습관적으로 짓는 죄, 값없이 주시는 구원에 대한 무감각함이 이미 견고한 진이 되어 하나님을 등지며 살고 있지는 않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이는 엄마가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정신없이 엄마를 찾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목놓아 웁니다. 엄마가 보일때까지 울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엄마가 간절히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성도는 하나님이 보일때까지 간절히 찾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목마름으로 찾으십시요. 그 주님의 사랑은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라 온 몸과 영혼을 구원해 주십니다.
1.기도는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력을 확보하라’ 혹은 ‘실적을 내야한다’는 메세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리에 익숙해져 저항없이 무뎌진 마음은 기도를 통해 회복이 됩니다. 주님은 갈망을 잃어버린 이들의 마음을 기도할때에 깨우시기 때문입니다. 안일해진 마음안에 성령의 생각을 넣어 주시므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정말 원하는지를 물으십니다. 진정한 변화는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깨달음이 홀연히 임합니다. 그때 밀려오는 감동은 마음에 참 깊게 남습니다. 물감이 번져 나가듯이 마음을 하나님의 나라의 색깔로 물들이게 됩니다.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가 극도로 쇠약해지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작은 침상 위 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대에는 중국 지도가 걸려 있었습니다. 1875년이 밝아 왔을 때 이제 그는 병상에서 연필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했고 중국 선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의 기사를 신문에 의뢰했습니다. “이 글을 읽은 기독교인에게 호소합니다. 귀하께서 지금 바로 1분만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그가 병상에서 기다리는 동안 놀랍게도 18명의 선교사가 찾아왔습니다. 기도의 역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건강해서 선교사를 구하려고 다녔다면 아마 제 힘으로 이들을 보내서 선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병상에 있었기에 완전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랜 세월 병을 앓아 온 병자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비록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느꼈을 끝없는 아픔과 좌절과 절망의 무게는 희망을 포기해도 될 세월일텐데, 끝없이 희망을 품고 있던 그를 주님께서는 찾아와 주셨습니다. 임계점(臨界點, the Critical Point)’이란 물질이 액체에서 기체로 변화하는 지점이지요. 쉽게 말해서 98도, 99도도 아닌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는데, 물에 있어서 100도가 ‘임계점’입니다. 기도에도 ‘임계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통을 기도로 이기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하여 떨어지도록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으시고, 기도의 시간에 십자가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 내셨습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임계점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셨습니다. 이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진액을 쏟아낼 정도로 하신 후에 자신의 뜻이 하나님 앞에서 꺾여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2.기도는 고통받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6 예수께서는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그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병을 앓아 온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물으셨다. “당신은 낫기를 원하시오?” 7 그 병자가 대답했다. “물이 움직일 때 저 연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제가 연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으면, 늘 다른 사람이 앞질러 들어가 버립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지날때 왜 나에게 이런 시간이 찾아오는것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끝이 없는 터널을 지나는것만 같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서있는것만 같습니다.
주님은 고통 받는 이들에게 먼저 가셨습니다.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교제이며, 나와 너의 관계를 이뤄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의 영이 깃든 곳에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사귐이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고 새벽 기도의 제단을 지키고 예배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각자의 기도 제목을 품고 살아가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 땅을 중보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일곱 가지 표적 (Seven Signs) 중에 세번째 표적(The Third Sign)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이유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고통이 가득한 베데스다 연못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이 되신 것은 위대함 힘이 있습니다. 나아이가라 폭포는 분당 17만톤의 물이 떨어진다고합니다. 이를 수력 발전에 사용하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땅으로 내려 오신 것은 이보다 더 큰 힘입니다. 성도들은 이 힘을 기도를 통해 얻게 됩니다. ‘표적’은 사건 자체보다는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의미가 중요하지요.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신비한 경험들은 그 표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곳곳에 세워진 영적 표지판을 보며 주님의 보여주신 섬김과 긍휼한 마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신 2: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38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합니까? 가데스바네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12명의 정탐꾼이 돌아와 한 보고를 받고 이스라엘이 겁에 질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들어갔어야 했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38년이나 더 방황하여 광야 생활 40년을 채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군대를 의지한 결과입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속에서 모세와 아론를 탓한 대가입니다. 이 시대는 기도의 이기성과 하나님이 뜻이 충돌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자들이 긍휼한 마음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라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손으로 누구를 돕고 계신가요? 교회를 섬기는 모든 이들의 삶의 자리를 기도로 도우십시오. 우리의 기도와 섬김을 끝까지 이끄실 분이 오직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은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시오! 일어나서, 당신의 자리를 챙겨들고, 걸어가시오!” 9 바로 그 순간, 그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리를 챙겨들고 걸어갔다…”
주님은 38년된 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38년의 소원을 주님께서는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존재를 인정해 드리고, 그분의 뜻을 묻기 위해서 우리의 시간을 떼어 바쳐야 합니다. 주님은 하루 24시간 한주의 7일 일년 365일을 함께하고 계십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은 영적생활을 더 깊이, 더 넓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을 주목하는데 , 기도의 전제가 되는 구절이 바로 삶의 주인을 바꾸라는 것이지요.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일어나는 변화가 기도인 것입니다. 왜 기독교 책들 중에 기도와 관련된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됩니까? 기도가 영적생활의 풍성함을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신이 맑은 시간에 기도의 성소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분명해 질 때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도를 통해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피조물은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분은 오직 창조자 뿐입니다. 본문에서 ‘일어나라’라는 단어는 부활을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혼이라는 단어는 ‘네페쉬’인데 생명을 의미하합니다. 원래 이 단어는 ‘목구멍’을 뜻했는데, ‘호흡’과 ‘생명’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호흡이 끊기면 부활의 생명력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호흡은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을 다 드린다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주어진 일들이 힘들고,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직장 생활하며 지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무거운 짐이 마음을 짓누를때마다 주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한 삶을 위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전쟁이 없는 땅, 부유한 재산, 안정적인 직장과 안전한 환경을 위해 살아가지만 주의 뜻이 이뤄지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쉼과 평안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 부터 샘솟게 되지요. 말씀을 맺으며 그렇게 살아가리 라는 찬양의 가사를 소개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분주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며 지쳤다고 습관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지칠만큼 주님을 위하여 일 하였나 생각해 봅니다. 이 땅에 사는 내 소망 주 위해 사는것. 이 한줄 가사만으로도 나의 삶의 분명한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이 가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리
나의 일생 사는 동안 주 예수만 따라가리
주님이 보여주신 삶 나 그렇게만 살으리 / 환란이 닥쳐와도 내 목숨을 빼앗으려 해도
내 주님 바라보며 그렇게 살아가리 / 내게 주신 사명 모두 마치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으리 쉬지도 않으리 내 생명도 아끼지 않으리
이 땅에 사는 내 소망 주 위해 사는것 / 오직 예수만 오직 예수만 내 삶에 드러나길
하늘의 크신 능력이 나를 이끄시네 / 그 이름만 그 이름만 외치며 살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에 오직 예수만 내 삶에 드러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15/2023 | 새해 메시지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마태복음 6:31-33
존스(Jones)라는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천국의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면서 한 거대한 창고(warehouse)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창고 안에는 수많은 상자들이 있었는데, 상자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존스는 자기 이름이 쓰여 있는 상자가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하기도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구해보지 않았던 수많은 복들이 가득 차 있는 것들 보게 되었습니다. 그 복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구하기만 했더라면 모두 받을 수 있는 복들이었는데,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이라는 사람이 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 2,000)’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축복받은 삶으로 나가기)’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3개월만에 410만부가 팔릴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USA Today, New York Times 등에서 베스트셀러 1위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은 Dallas Theological Seminary와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역대상 4:10에 나오는 ‘야베스’라는 사람의 짧은 기도입니다. “하나님 내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지경에 지경을 넓히시사 모든 환난 걱정 근심 염려에서 벗어나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주의 손으로 도우시사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야베스의 기도’ 앞에 유다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 아들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가 엉망입니다. 아버지 이름이 나오고 아들들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입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부모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역대상 4장에 나오는 유다의 아들들의 족보는 이방인으로서 유다 지파에 들어온 사람들의 족보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이방인으로 유다 지파에 편입된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는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기도가 짧기 때문에 내용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를 축복하셔서 내가 사는 땅을 넓혀 주시고, 모든 환난이나 걱정 근심, 염려에 벗어나게 해 주시고 제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윌킨슨은 이런 기도를 해도 된다고 합니다. 윌킨슨은 독자들에게 더 많은 꿈을 꾸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업을 확장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 야베스가 월 스트리트에서 일을 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하나님 제가 투자한 주식의 가치를 올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해석하면서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향력’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문제는 윌킨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독자들은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물질적인 축복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사업의 확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야베스의 기도’가 사람들의 ‘욕망’과 딱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노래로 만들어지고, 액자로 만들어져 벽에 걸렸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워십 댄스로 만들어지고,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심지어 이 ‘야베스의 기도’를 아침 저녁으로 외우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윌킨슨은 독자들에게 처음 한 달 동안 ‘야베스의 기도’를 반복하도록 권장하면서 이것을 평생 서약으로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태복음 6:31-33,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야베스의 기도’와는 아주 다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ASB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for you(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오늘 생각해야 할 중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궁극적인 관심(the ultimate concern)’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마실 물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한 동네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우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옆 마을과 전쟁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제자들도 먹을 것이 필요하고, 입을 옷이 필요하고, 마실 물이 필요합니다.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연히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gentiles)’이 구하는 것이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방식대로 성경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삶에 필요한 것들이 그냥 주어지는 것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져야 합니까? 그렇다면 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 일을 해야 합니까? 그냥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글을 한번 보세요. “저도 승리의 간증을 하고 싶어요. 귀하의 책을 11월에 구입한 이후 지금 네 번째 읽고 있습니다. 나는 야베스의 기도를 부지런히 했고, 온 종일 그 기도만 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실직 상태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정말로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임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정말 부탁드립니다.” 윌킨슨의 책을 읽고 어느 독자가 윌킨슨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도 그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이시 페니(JC Penney, 1875-1971)라는 사람을 아시지요?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James Cash Penney였습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정육점을 운영하다가 호텔 주방장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가게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호텔에 고기를 납품하기 위해서 뇌물을 주는 것이 관례였던 때였습니다. 가까스로 사업 실패의 아픔에서 깨어난 페니는 조그만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가게 앞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말씀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크게 써 붙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이 가게를 와 본 사람들은 페니의 친절함과 정직함에 감동해서 계속 가게를 이용했고, 가게가 잘 되었습니다. 이 가게가 미국 전국에 1,600여개 점포를 가진 ‘JC Penney’ 백화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습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과 필요를 먼저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합니다. 나의 생각과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펼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둘째로,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의(His righteousness)’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구해야 합니까? ‘구한다’라는 말은 그리스어 ‘ζητέω(zéteó)’라는 말인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이 말을 ‘seek’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열심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진주 장사가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값진 진주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값진 진주를 찾으면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마태복음 13:45-46).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ζητέω(zéteó)’입니다. 영어로 ‘seek’입니다. 단순히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to search out by any method(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일들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들을 열심히, 끝까지, 모든 힘을 기울여서, 비록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라(aim at or strive after)’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열심히 찾고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세상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열심히 찾고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보다 이 일을 먼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톰 라이트(N.T. Wright)라는 영국의 성서학자가 있습니다. 요즘 그의 책들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경향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은 앞뒤가 막힌 폐쇄적인 신학이 아닙니다. “No Compromise(타협은 없다)!”를 외치면서 자기들끼리만 안으로 움츠러드는 폐쇄적인 신학은 우리 앞에 놓은 새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타협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시대의 변화와 이슈들에 대하여 책임 있게 응답(應答)하는 열린 신학이 아니면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톰 라이트의 신학은 보수적인 신학이긴 하지만 그의 신학은 열린 신학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한국어로는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로 번역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문제는 성경을 구속사적으로만 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반복적으로 외칠 뿐이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구원에만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자신의 삶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당신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구원을 주신 ‘목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삶이다.”
톰 라이트의 말이 맞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에만 초점을 맞췄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듣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이 성취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것을 찾아서 나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대화하고, 각자가 발견한 것을 서로 공유(共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의 화두(話頭)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구하고 있는지,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지고 밤샘 토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크리스천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왜 ‘야베스의 기도’에 사람들은 열광할까요? 왜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를 자신의 욕망을 성취할 도구로 삼고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야망에 불을 붙였을까요? 왜 윌킨슨과 그의 책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들은 ‘야베스의 기도’를 무리하게 해석해서 성숙한 기도로 포장하고 있을까요? ‘야베스의 기도’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를 날마다 외울 필요가 없고, ‘야베스의 기도’를 평생 서약으로 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매우 서툴고, 투박하고, 성숙하지 못한 기도입니다. 신학자들은 ‘야베스’가 ‘겐 족속(the Kenites)’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겐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족속인데 ‘미디안’에 속한 작은 부족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겐 족속’이었습니다(사사기 1:16). 사사 시대에 겐 족속은 유다 남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야베스’는 어쩌다가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밝혀진 그의 족보도 없습니다. 그의 배경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올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의 기도가 이기적이고 잘못된 기도였다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기도가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했고, 나의 평안함을 위해 기도했고, 나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고, 경제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기도의 수준은 ‘야베스의 기도’의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성숙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또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1/8/2023 | 기도 시리즈1
끈질긴 기도 A consistent pray
누가복음 18:1-8
2023년의 한해를 건너기 위한 열두개의 징검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열두개의 징검돌을 밟으며 우리는 한해의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창 49:28) 엘렘의 12개의 샘물(출 15:27) 대제사장 흉배에 붙인 12개의 보석(출 28:21)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을 건너며 기념비로 세운 12개의 돌(수 4:8) 예수님의 열두제자(마 10:2) 만물을 회복하기 위한 일년 열두달 새롭게 맺히는 새로운 열매(계 22:2) 등 이외에도 ‘열둘’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1절로 2절을 보면, 1 그 천사는 또 내게 생명수가 흐르는 강을 보여 주었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 2 ‘그 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일년에 열두번,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또 그 잎은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교회 모든 교우들에게 펼쳐질 2023년 열두달이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를 통해서 믿음의 기갈(飢渴)을 해결받고, 기도의 호흡을 되살리게 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이들이 아픔과 슬픔, 정신적 우울함과 미래의 대한 불안함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보좌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그분의 통치아래 있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해주실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또한 생명나무에 있는 잎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약재료로 사용될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해서 하늘의 뜻을 사람들에게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의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은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악해진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고아와 과부, 소외된 자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는 대조가 됩니다. 1차적으로는 당시 유대인을 군림하는 다신론적 신관을 가졌던 불의한 관리들을 지칭하신 것으로 보여지는데, AD 1세기는 인본주의, 혼합주의, 다신론이 성행했었습니다. 두번째 인물은 끈질기에 요청하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고대사회에서 보호 받을 수 없는 신분인데, 이 과부가 자신이 권리를 침해 당해서 보호해 달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해를 살아가면서 기도하고 싶지 않을때도 있을 것입니다. 삶에서 힘든일을 만날때도 있겠지요. 그때마다 과부의 끈질긴 간정처럼 끈질긴 기도로 하나님을 찾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진피터슨은 메세지 성경에서 본문의 1절을 “예수께서 그들에게 끈질기게 기도하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려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라고 썼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불의한 시대에 맞서는 끈질긴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은 힘겹고 어렵습니다. 손해를 보게 되는 일도 있을테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한 환경에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비유는 2천년 전의 말씀이지만 오늘날 이 시대를 꿰뚫은 깊은 통찰(洞察, Insight)을 담고 있습니다. 다신론 신관으로 로마의 힘을 의지하던 2천년 전이나 탈기독교, 탈교회의 오늘날 시대나 비슷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서방국가를 중심으로 부흥의 시기였다면, 이제 기독교는 공적영역에서 밀려나 주변화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믿음도 개인적 영역으로 제한되는 시대이며. 기독교의 본질인 믿음은 다윈주의 사회속에서 믿음의 배타성으로 인해 복음전파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을 하는 것조차 공적영역에서는 어려운 형국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평가하는 것이 다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껏 기독교의 선교방식이나 전도의 태도가 부족했던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누가는 19장에서도 기도자의 태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대조하고 있는데, 세리의 기도나 바라새인의 기도는 둘다 거룩한 기도처럼 보여집니다. 세리도 바리새인도 둘다 거룩함을 상징하는 성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세리는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식하는 반면에 바리새인의 관심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분별해야 하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거룩함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겸손함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다원주의 시대속에서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의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성도들은 끈질긴 기도를 통해서 믿음의 태도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1. 기도는 진실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감정에 정직하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 속에는 원한이 들끓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일 뿐 아니라 해로운 일입니다. 억울한 일로 인해 과부는 반복적으로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과부에게 억울한 일인데, 오히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때 하나님께서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분명하게 계시 되었는데, 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깊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속감정을 숨겨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분노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것은 가장 확실한 치유이며 회복인 것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으로 보면 ‘원한을 풀어 달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진실한 기도를 하다 보면, 원수를 향해 타오르던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긴 기도를 통해서 그녀에게 있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는 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거대한 계획 속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자녀들의 억울한 기도를 들으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한해를 살면서 억울한 일을 겪게 될때에 자기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 마음의 치유하심을 주실 것입니다.
2. 기도는 무감각해진 우리의 마음을 깨웁니다.
기도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에 마음을 바꾸시기도 합니다. 불임으로 애통하던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는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았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물질주의와 다원주의의 거센 파도는 우리의 믿음을 위협합니다. 물질은 믿음을 사용하는 것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물질을 의지하게 되면 기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는 돈이 많은 사람도,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도, 세상에서 힘이 있는 사람도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이 깨어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해 집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한해를 보내기를 원합니다.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밤낮 기도하는 제목들이 응답되는 한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밧모섬에서 요한이 바라본 새하늘과 새땅의 모습은 에덴동산의 회복이자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인생을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기도는 자동차 핸들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 핸들에서 손을 놓고 졸게 되면 사고가 납니다. 목적지를 향해 도착할때까지 핸들을 잡고, 이리 저리 조정하며 방향을 잡아 가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한 믿음의 여정에서 두려운 일을 만나고, 생각지 못한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해도 그때마다 기도의 핸들을 놓치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여정에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이 함께 계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이 과부가 나를 귀찮게 하니 그의 간청을 들어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간청을 듣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미루시겠느냐?
오스왈트 챔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기도의 반복은 하나님과 흥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기쁨에 찬 고집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기도를 반복하다 보면 믿음의 근육이 붙습니다. 기도는 당장의 일시적 문제를 해결하는 아니라 시대의 불확실성을 받아 들이는 훈련입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명확한 해답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결과들로 자신의 인생을 보장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반복하다 보면,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의 말씀과 다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무감각한 마음에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24-25절에 보면 야곱은 홀로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 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야곱은 끈질긴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소돔성의 심판을 위해 찾아온 천사에게 끈질긴 간청을 했지요. 아브라함은 소돔성 멸망 직전에 영혼의 구원을 위해 끈질기게 기도하였습니다. 소돔성 심판을 들은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서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창 18:22). 아브라함은 6번이나 거듭 요청하며, 의인 10명만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도 아브라함의 끈기 있는 기도의 열매였습니다(창 19:29) 야곱은 끈질긴 기도를 통해 자기중심적 죄를 끊어내고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홀로 남아 씨름하며 지난 세월들을 회상하며 했을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출생했습니다. 배고픈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쟁취했고, 눈이 잘 안보이는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에서인 척을 했으며,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서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안에서 살았지요.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자기중심적인 기질을 훈련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가 이제 고향 땅에 돌아오는데 에서가 400인들을 거느리고 만나러 온다는 소식에 자신의 인간적인 수단을 총동원해서 두 떼로 나누고 한 떼를 치면 한 떼는 피하려고 했습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 기질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가족마저 먼저 보내고 이제 야곱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며 그가 의지하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쳐내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환도뼈가 부서지는 고통속에서 천사와 씨름했던 곳을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 하였습니다. 그가 밤새워 씨름한 그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얻게 됩니다.
케임브리지 교회가 오랜시간 기도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이곳에 함께 있지 않는다고 해도 함께 드린 기도는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지속적인 기도가 교회를 유지하고 세워가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지나가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드린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됩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개인의 인생의 미래를 설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 올수록 성령님을 믿고 그분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현재에 기도의 답을 얻지 못할 때에도 그분께 맡기며 쉬지 않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끈질긴 기도는 기도할 힘이 나지 않을때, 기도대로 살지 못할때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부족한 모습을 붙들고 날마다 씨름하는 것입니다.
외국에 와서 살면서 저에게는 통장잔고나 좋은 집이 저를 만족시켜 준것이 아니라 작은 방안의 기도의 자리가 저를 변화시켜주고 만족시켜주었습니다. 삶의 기도제목을 안고 작은방 한켠 에서 기도하던 그 시간들은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골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온전히 하나님만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응답의 여부와 관계없이 가장 겸손 할 수 밖에 없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일, 보잘것 없는일이라도 그분에게는 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하나님과 함께 사도들 보다 더 큰일을 행하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 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의 두 기둥은 ‘믿음’과 ‘겸손’입니다.
기도는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하는 일이 지치고 기도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믿음의 경주를 할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6) 믿음이 사라지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도 위로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들에게는 그 안에 땀과 눈물이 있습니다. 때로는 경기 안에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 부상을 당할 위험한 순간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직접 경기를 뛰면서 얻게 되는 경험들 속에서 믿음의 흔적들이 남는 것입니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속히 그의 백성들에게 정의를 베푸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이 세상에서 이 믿음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몇 차례나 제자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22). 본문에도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이 세상에서 이 믿음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예측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종살이를 통해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하나님의 전적인 손으로 애굽에서 구원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시기에서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보스턴 지역에 하나님은 케임브리지 교회를 세우시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시대적 도전 앞에서 기도하는 백성들을 세심하게 돌보시며 길을 내시며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겸손함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도를 그분의 큰 계획 안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어떤 기도는 간구한 그대로 응답해 주시고, 어떤 기도는 간구한 것을 거절하심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거절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서는 그것도 응답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 있으면 거절된 기도일지라도 축복이 됩니다. 겸손한 기도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고 주님을 닮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올때’ 라는 기도의 안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안경은 인지하지 못할때에도 쓰고 있으면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음과 겸손의 안경을 쓰고 살아가면, 낙심되고 두려운 상황속에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믿음과 겸손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안경을 끼면, 성령께서는 두려움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성령의 감동과 감화는 예수께서 승천하실때 믿는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전염병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들, 지지과 기근, 예측할수 없는 기후의 변화들, 총성없는 아우성 소리가 가득 넘쳐나는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들 속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쉬지말고 기도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여러분의 삶의 길에 기도와 말씀의 등불을 켜고 함께 걷겠습니다. 믿음의 여정을 함께하는 이 자리에서 한해도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찬송가 369장 가사를 함께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이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 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