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2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We Are Not Alone

요한복음 16:28-33

여러분,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말은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2002)이 쓴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1950)’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책의 부제(subtitle)가 ‘A Study of the Changing American Character(변화하는 미국인의 성격에 대한 연구)’입니다. 리스먼은 이 책에서 미국인의 성격이 ‘전통지향형(tradition directed type)’에서 ‘내부지향형(inner directed type)’으로, 그리고 ‘외부지향형(other directed type)’으로 발전되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외부지향적 성격은 또래집단이나 친구집단의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성격입니다. 이런 성격이 형성되는데 매스 미디어가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내면적인 고립감 때문에 힘들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외부지향형’ 성격 유형을 ‘고독한 군중’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이 1950년입니다. 그 때는 미국인의 성격이 ‘전통지향적’인 성격에서 ‘내부지향적’인 성격으로 옮겨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장차 미국인들의 성격이 ‘외부지향적’인 성격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한 것입니다. 

리스먼의 이 책이 얼마나 유명한지, 뉴욕 타임즈에서 문학,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분야를 총망라해서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0권’을 선정했는데, 이 100권 중에 ‘고독한 군중’이 선정되었습니다. 정말 시대를 초월한 명저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회퍼의 ‘The Cost of Discipleship(제자직의 대가, 1937), 또 몇 주 전에 소개한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1965)’ 같은 책들은 시대를 앞서 발간된 명저들입니다. 리스먼의 책도 그렇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리스먼의 책이 나온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인들의 삶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보스턴에 새로운 학생들이 모여오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만은 못하지만, 보스턴 시내에 나가보면 거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모두들 꿈을 가지고 보스턴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1986년에 캘리포니아 클레아몬트에서 석사를 마치고 보스턴 대학 박사과정에 들어왔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차를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대륙횡단을 해서 왔습니다. 오면서 그랜드 캐년도 구경하고, 나이아가라 폭포도 구경을 했지만, 보스턴 생활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95번에서 90번 매스 파이크를 타고 보스턴으로 들어오는데, 어찌나 마음이 불안했던지요. 보스턴에 거의 다와 갈 무렵에 맥도날드 휴게소에 들러 보스턴 쪽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저의 경우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어서 그나마 보스턴 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보스턴에 공부하기 위해서 혼자 오는 학생들을 보면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기도 합니다. 기숙사에 가도 반겨주는 가족이 없으니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그러다가 학교 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몸이 아프거나 하면 얼마나 집 생각이 많이 나고, 부모님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니, 혼자 지내는 보스턴 생활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 외로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 눈에 띄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I am not alone)!”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때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곧 위험한 상황이 닥쳐오고 자기 제자들이 자기를 혼자 남겨 놓고 모두 떠날 것을 알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Because my Father is with me).” (32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다윗이 쓴 시편 23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었습니다. ‘나의 원수들(my enemies)’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는 적으로부터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for you are with me)(시편 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가 (나를) 믿느냐(Do you believe in Me, 31절)?”라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떠나고, 그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그 때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시는 분,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 상황을 견뎌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복음 14:16), 그 약속이 대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독특한 존재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과 나누는 ‘교제의 삶(the life of fellowship)’을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과 충분한 교제를 나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풍성한 열매(the abundant fruits)’를 맺습니다. 이 말은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이 그의 곁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되는 극한의 외로움과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의 교제의 삶을 통하여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리스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외부(타인) 지향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또 그들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흥미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바닷물을 마심으로써 목마름을 해소하려는 것보다 더 심한 동료 집단 속에서의 고독을 해소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그들 자신의 감정이나 열망에 집중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If the other–directed people should discover how much needless work they do, discover that their own thoughts, and their own lives are quite as interesting as other people’s, that, indeed, they no more assuage their loneliness in a crowd of peers than one can assuage one’s thirst by drinking sea water, then we might expect them to become more attentive to their own feelings and aspirations).” 리스먼은 대중의 언어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면 ‘군중 속의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고, 고독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다시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그리스어로 ‘κόσμος(kosmos)’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세상’도 ‘κόσμος’입니다. ‘κόσμος’라는 말은 ‘order(질서)’ ‘an orderly harmonious systematic universe’를 의미합니다. 우주나 자연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조화로운 질서’를 말합니다. 이 조화로운 세상에서 왜 우리는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질서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깨진 세상을 회복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21:4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더 이상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1980년 1월 22일 아침, 저는 제 아내와 함께 결혼 앨범을 꺼내 사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제가 졸업한 감리교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계시는 윤성범 학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였습니다. 제 결혼 주례를 서 주신 분이어서 방금 전에 결혼 사진을 보면서 그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한참 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분의 제자이신 교수님 한 분이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1-52, 55-58)

겨울이어서 강당 안이 싸늘했습니다. 그 때 저는 강당에 울려 퍼지는 성경 말씀이 생생하게 귀에 들어오는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제 가슴에 들어와서 콕콕 박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조롱하고,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그 말씀이, 그렇게 잘 이해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But thank God! He gives us victory over sin and death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New Living Translation)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밖의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이기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죽음을 해결하신 분이 더 이상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그를 믿는 사람들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victory’가 아니라 ‘overcome’입니다. ‘극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너희가 많은 환난을 당할 것이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33절)

예수님을 믿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아무 문제가 없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을 ‘극복하도록(to overcome)’ 도와주십니다. 로버트 로저스(Robert Rogers)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y faith didn't remove the pain, but it got me through the pain. Trusting God did not diminish the anguish, but it enabled me to endure and overcome it(나의 믿음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게 하고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보스턴에 꿈을 가지고 찾아오신 분들, 순탄하게 보스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학교 교수님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공부하는 과정을 따라가기가 힘에 버거울 수도 있고,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나 건강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때로는 혼자 지내는 생활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다윗은 우리 모두가 모델로 삼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문제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에게도 우리처럼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 문제들을 해결했을까요? 그가 쓴 시편 16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로다(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will not be shaken).” (8절) 여러분, 다윗이 항상 그의 앞에 모셨던 분! 다윗이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신다고 했던 분, 그래서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고백했던 그분이 누구일까요?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8/28/2022 |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Is The Living Stones

베드로 전서 2:1-6

한주간도 잘 지내셨지요?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밤낮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성령 강림절기를 보내고 있는 케임브리지 교우들 삶에 성령의 바람이 감싸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9월이면 새학기도 시작되고 새로운 낯선 환경을 마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반복되는 일들 속에 무심히 9월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겠지요. 이처럼 같은 시간을 살아도 서로의 마음의 온도는 저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마음의 온도차에 주목하며 실망하기도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접속되는 순간 마음의 밭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누군가의 마음 밭은 싹을 내지도 못하는 땅이 드러나고, 혹은 싹은 내는데 곧 말라죽는 땅이 드러나고, 어느 정도 자라지만 곧 결실을 맺지 못하는 땅도 드러납니다. 케임브리지 교우들은 말씀에 반응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가 떠난 자리에 주님만이 드러날 수 있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현실속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 주의 이름이 높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난 가운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래 우리는 죄가 가득한 연약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악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악한 감정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악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순수해 보여도 죄를 지닌 채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3:10) 라고 하십니다. 본문에도 보면 죄를 먼저 열거 하는데 첫째는 악과 거짓이요, 둘째는 위선과 시기이며, 마지막으로는 험담을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2:1)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서 없애라고 하십니다. 외식과 시기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죄이며, 험담하는 말은 언행에 관련된 것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경계하고 있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입니다.

왜 순전한 말씀을 사모하기 전에 이러한 내적인 죄를 자각하라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어떤 불의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악과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한다를 원어 성경에 보면아포떼메노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1.‘관계를 끊다’ 2. ‘벗어 버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위선과 시기, 험담하는 자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사랑의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시기와 험담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증폭이 됩니다하지만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자기확신에 열광하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번째는벗어 버리다입니다. 우리는 죄의 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옷은 단지 걸치고 있는 것일 뿐 몸의 일부는 아니지요. 악과 거짓, 위선과 시기, 험담하는 말은 옷일 뿐입니다. 이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거룩이 없는 사랑은 죄로 인해 반드시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과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도 없고 제한도 없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바울이 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하고 있지요. 우리는 순수한 사랑에 가까이 나아갈수록 마음이 거룩해지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시 죄의 옷은 자연스레 벗게 됩니다.

생명의 탄생은 참 신비롭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과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충만은 컵에 물이 채워지듯이 일시적으로 채우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의 성품과 인격,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게 될때에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전인격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은 일시적인 감정의 확신이 아니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일입니다.(벧전 2:2) 갓난아이에게는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서 어미의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최고의 양식인 영적 예배는 필수적이어야 합니다. 영적예배를 통해 순전한 말씀을 사모하며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해집니다. 바울은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두렵고 떨림을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2:12)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교만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그리스도만이 가장 공평하시고, 가장 위대하시며, 모든 것에 으뜸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그러면 우리의 작은 그릇에, 자기애로 가득한 옹졸한 그릇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끊임없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벧전 2:3)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은 이전에 알지 못하던 것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그분의 성품으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말하는 것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은 그분의 성품과 행동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되고 주안에서 형제를 대하는 작은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AD 30년 경에 육신으로는 단 한번 활동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신 일을 지속하고 계시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게됩니다. 그러니 거룩함은 외적인 분리됨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 내면의 변화, 마음의 변화인 것입니다. 식당에 가보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친절한 직원을 만나면 우리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피곤에 찌들고 일의 불평이 있는 직원은 당연히 불친절 할 수 밖에 없지요. 우리는 어떠한 얼굴과 모습으로 교회의 지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을 생각할 때에 죄로 물든 마음에 일평생 수만가지의 감사가 솟아 오르고, 세상의 근심과 복잡한 현실속에 있는 우리에게 성령께서는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퍼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 가득 지속적으로 채워지도록 나의 손과 발이 나의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를 대하듯 형제를 사랑 하십시요.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사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상속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하시 않으시고 너희는 소금이라 빛이라 하셨습니다.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돌을 버렸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머릿돌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귀한 존재로 그분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로 오십시오. (벧전 2:4)

길가에 버려진 돌들은 참 투박하고 평범합니다. 그러나 수석가들은 돌에 담겨진 자연을 본다고 합니다. 돌 속에 담긴 자연의 생명을 보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산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하나님께서는 구원 역사의 반석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아무리 투박한 돌이라 해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게 되면 그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면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존귀한 인생이 되어지고, 욕망을 따라 살던 옷을 벗어 버리게 되니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형을 속이고 나서 불안과 두려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 기나긴 나그네 길에 오릅니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고향집을 뒤로 하고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286마일의 머나먼 여정길에 오르게 되지요. 얼마간을 걸어서 칠흑 같은 밤이 되었을 때 한 장소에 도착합니다. 이때 야곱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하지만 그곳은 야곱의 일생에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였습니다. 아무도 반겨주는 이가 없고 노숙을 하며 인간의 불안감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베고 자던 투박한 돌 베개에 하늘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기둥으로 세운 그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바로 벧엘이라는 장소입니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는 세계 최대의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제1호 보물은 그리스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는로제타 스톤이라는 돌이라고 합니다. 로제타 스톤에는 세 종류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문자는 인류의 숙제인 고대 이집트 문자를 풀게 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세상에 가장 값진 보물이 되었습니다. 1799년 나폴레옹 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발견하였을때는 누구도 그 돌이 큰 보물인 줄 몰랐다가 새겨진 문자에 의해서 값비싼 보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돌 같이 단단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아도 그것은 구원을 이뤄가는 삶이 아닙니다. 굳은 마음, 미워하는 마음, 시기와 험담하고 싶은 마음을 제거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마음을 갖어 보십시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그래서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의 권위가 그분에게만 있으니, 우리는 포도나무요, 사랑이신 주께 붙어 있을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지닌 산돌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보살피라고 권면하지 않습니까? ( 20 17)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부족해 지면 영적 빈혈이 생기고 본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집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세상에 증언 되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먼저 그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에 있지요. ‘결국엔 하나님의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엔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이며, 근원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에 목말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즉 사랑과 사람이 삶의 본질임을 말해줍니다. 주님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인생의 중심에 사랑이 중요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참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져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퍼 주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말씀이 되어 마음에 새겨지니 새 생명이 잉태되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말고 다른 기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삶의 반석이 되지 않으면, 모든 삶은 결국 허물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와 명예를 얻을지라도 인생의 마지막은 허망함입니다. 예수님이 앞 서 가신 길을 알지 못하니 스스로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베드로도 처음에는 그 길을 알지도 못했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참 사랑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돌이 되시는 예수를 체험하고 만나고 나서는 고난 속에서도 낮아지신 길, 섬기신 길, 자기 희생의 길로 나가셔서 하늘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주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되시오니, 지도에 없는 길을 걷는다 해도 주께서 걸으신 발자욱만 보고 따라가다 보면 주의 은총이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벧전 2:6)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는 불안정한 로마시대에 고난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반석이 되시며 산돌이 되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있는 사람들, 선한 목자가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포도나무에 끝까지 붙어 있는 가지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고는 교회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이는 교회를 남기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건물을 더 중요시 하는 어리석음을 보였기에 예수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세울 것이라 하시고, 당신의 몸이 성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주님은 목마른 자들의 생수가 되어 주시고, 낮은 곳 모퉁이에 세워진 사방을 연결하는 머릿돌이 되십니다.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산돌들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로 함께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개인적인지만, 구원받는 사람은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회중들 속에서 부르신 사명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아는 태도로 공동체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길이 닦여지고 많은 이들의 살아나면 좋겠습니다. 소금은 맛을 잃어 버리면 한낱 모래알에 불과해 길가에 버려 집니다. 내 손에 쥔 말씀의 등이 빛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집니다. 빛이 드러날때에 마음의 불편함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것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욕망은 모래 위에 성과 같아서 결국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사람의 감정은 어디로 불지 모르는 바람과 같습니다. 무엇을 기초로 하여 인생의 돌을 쌓아 올리시겠습니까? 산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기본과 기초로 삼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함께 지어져 갈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나는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이들에게, 애썼다고, 고맙다고 토닥여 주며 격려해 주십시요. 그리고 스스로 격려하시고 서로를 격려해 주십시요. 나의 말투, 작은 습관, 행동과 눈빛, 태도 아주 작은것까지도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주시는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선한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도 이 확신을 붙들고 나아가려합니다. 이 여정속에 함께 하는 여러분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 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걷는 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기쁨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8/21/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1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Go Into All The World

마가복음 16:15-16, 19

한자 사자성어에 ‘신신당부(申申當付)’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듭하여 간곡히 당부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에 ‘entreat’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를 영어로 ‘Deuteronomy’라고 합니다. ‘deutero-‘라는 말은 ‘두 번째(second)’라는 뜻입니다. ‘-nomy’라는 말은 ‘법(law)’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고 그들의 자녀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출애굽 2세대들에게 그들의 부모들에게 했던 출애굽기와 민수기 말씀을 다시 한번 가르친 것이 ‘신명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명기’를 한자로 쓸 때 ‘申命記’라고 쓰거든요? ‘申’자는 ‘신신당부’할 때의 ‘신’자와 같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제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땅의 풍요로운 삶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꼭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All authority has been given to me in Heaven and in the earth; in the manner in which my Father has sent me, I am sending you(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마태복음 28:18, Aramaic Bible in Plain English)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말씀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all authority(모든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 출애굽 2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농경문화의 풍요로움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신신당부’해도 부모님의 당부를 깜빡 잊어버리고 지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말을 꼭 지켜 달라고 ‘신신당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권위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우리는 ‘The Great Commission(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우리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반드시 수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의미를 잘 알았기에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2) 이 말씀을 Amplified Bible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Preach the word [as an official messenger]; be ready when the time is right and even when it is not [keep your sense of urgency, whether the opportunity seems favorable or unfavorable, whether convenient or inconvenient, whether welcome or unwelcome] 말씀을 전하기에 좋은 때든지 아니든지, 항상 말씀을 전해야 하는 긴급함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우리에 좋게 돌아갈 때가 있고, 좋지 않게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편리한 상황이 있고 불편한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영받을 때가 있고 환영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핑계대지 말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전파의 긴급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상명령’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내가 감옥에 있으나,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고, 나를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기뻐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14-15, 18)

여러분,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라는 탐 크루즈(Tom Cruise)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셨지요? 지금 6편까지 나왔고요. 8편까지 이미 예고가 된 영화입니다. 1편은 1996년 5월에 상영되었습니다. 탐 크루즈가 CIA 본부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해킹해서 동유럽에서 활동하는 첩보원들(NOC)의 명단을 빼낸다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이단 헌트(Ethan Hunt)는 이 명단을 가지고 무기 밀매상 맥스(Max)와 연계되어 있는 CIA 내의 내부 첩자 코드명 ‘욥’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주인공 이단은 그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CIA 비밀 정보를 다루는 방으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CIA에 들어가서 정보를 빼낸다는 것은 말 그대로 ‘Mission impossible(불가능한 임무)’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이단 헌트는 이 불가능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1편의 드라마틱한 장면을 몇 개 보여 드리겠습니다. 

철통 같은 보안시설이 되어 있는 CIA 본부에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가능한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다가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지상명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상명령’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정보 하나를 빼내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Go and make disciples of all the nations①/①Or all peoples (마태복음 28:19)”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πάντα τα ἔθνη’라고 되어 있습니다. ‘ἔθνη’라는 말은 영어의 ‘ethnicity’입니다. ‘ethnic group’이라고 하면 같은 문화와 언어, 역사, 종교를 공유하는 그룹을 말합니다. 2022년 현재 세계에는 193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안에 수천개의 ‘ethnic group’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나의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교회를 세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서 이 사람들은 나의 제자로 만들라고, 나의 말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의 기독교 선교 단체들이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7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 장로교 선교사)나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 미국 감리교 선교사) 같은 선교사들이 들어온 덕분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 노방 전도를 하고,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고, 병원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다가 1900년대 후반에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라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고 합니다.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낼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개념이 나오면서부터 선교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는 단순히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우리를 내보내시는 모든 삶의 현장이 선교의 현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면서부터 ‘섬김(service)’이라는 개념이 선교의 핵심 개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선교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선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섬김’의 삶을 통하여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너희는 세상으로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마가복음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대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Go into all the world)”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10여년 전에 이 말씀을 보스턴 다운 타운에 있는 구세군 본부에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보스턴에 한국 구세군 사관이 한 분 발령을 받아서 오셨습니다. 그 분을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1층 로비에서 그분을 기다리면서 여기 저기를 둘러보다가 한 쪽 벽에 영어로 쓰여 있는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지상명령’이라고 하면 주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데, 마가복음으로 읽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한 말씀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go into’라는 말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안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간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단순히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학교 강의실이 될 수도 있고, 그곳이 일터가 될 수도 있고, 손님을 맞이하고, 손님과 인사하고 대화하는 비즈니스 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자리가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서로 대화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자리가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서 만나 수다를 떠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 속에 나오는 “Go into all the world(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크리스천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선한 영향력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듯이 열심히 일하십시오(Work willingly at whatever you do, as though you were working for the Lord rather than for people).” (골로새서 3:23) 얼핏 보면 이 말씀이 소극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최근 들어 크리스천의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누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참 시대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우리 시대에 가장 적절한 선교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영향력’이라는 말을 직접 쓰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제자들의 ‘선한 영향력’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4, 16)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2,000년 전에, 지금의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에서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들끼리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신자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1세기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은 ‘pestilent fellows (사도행전 24:5, KJV)’라고 욕을 먹었습니다. 전도자들을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를 퍼뜨리는 놈들’이라고 욕을 한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새들백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가 쓴 ‘Becoming a Contagious Christian(1996, Mark Mittelberg와 공저)’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1세기의 전도자들은 ‘Contagious Christians’였습니다. 이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전염병에 감염되듯이 모두 복음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 1세기의 전도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님의 향기(the aroma of Christ, 고린도후서 2:15)’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에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Travis Scott의 말이 생각납니다. “You will never influence the world by trying to be like it(세상을 닮으려고 함으로써 결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는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 자기 정체성(identity)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침투해 들어가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섬김의 삶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Contagious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크리스천다운(Christian-like)’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에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8/14/2022 |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The Gospel is Jesus Christ

로마서 1:1-5

거룩한 주일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시는 교우분들을 이 시간 축복하고 싶습니다. 또한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는 분들의 예배의 현장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해 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무너진 나의 마음이 회복되어지는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귀한 은혜를 경험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일어나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함으로 고백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이들이 로마서 복음을 통해 변화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로마서 복음을 통해서 삶의 근본을 바꾸었습니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150 A.D.- 215 A.D), 이그나티우스(Saint Ignatius of Antioch; 70 A.D – 107 A.D), 저스틴(Justin Martyr 100 A.D - 165 A.D), 폴리캅(Polycarp 69 A.D - 155 A.D) 등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입니다. 교회의 아버지이지요. 그들의 생애에 대한 자료들은 부족하지만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로마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완전한 진리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임을 강조하며 기독교 역사속에서 순교자의 반열과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도 로마서의 복음을 사랑했습니다. 신학의 아버지 성 어거스틴(St. Augustinus, 354-430)은 로마서 13장 말씀을 통해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회심하였으며, 감리교 창설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 - 1791)는 1738년 런던의 어느 집회에서 로마서 서두를 읽고 설교하는 것을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서는 성경 전체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새 언약(즉 복음)의 가장 완벽한 개요’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로마서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배들의 생애에 영향을 미친 로마서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계시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쓰여질 당시 로마는 도적적으로 매우 부패했고 죄가 가득했지요. 옳고 그른 것이 혼돈되어 버렸고, 수없이 많은 부정이 횡행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에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십니다. 역사적 보면 이 하나님의 계획은 놀라운 섭리입니다. 당시 로마가 제국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복음이 온세계에 증거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현실의 눈으로 볼때에는 하나님 나라의 순교자들이 죽어진 것 같지만 결국 로마제국은 역사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말씀이 더욱 흥왕해  졌습니다. 

오늘날도 거대한 세속의 물결이 기독교 복음을 위협합니다. 이 시대는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라 말합니다. 상대적 진리가 편만해진 시대이지요. 절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진리로 삼는 것이 오늘날 시대 이념에 맞지 않고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절대’ 라는 말을 외치기 참 어려운 시대이지요. 우리 사회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누룩처럼 퍼진 자유주의 사상이 미국 땅에 이미 오랜 전부터 상륙했습니다. 신앙인들 조차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재들을 보는 눈을 잃어 버렸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출발점이 전적인 인간의 무능함에 있다는 생각들도 깨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 복잡해 진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림을 찾아 보았는데, 첫번째 그림을 보십시요. 마치 저마다 옳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갖지 않습니까? 두번째 그림은 낭만주의 러시아 화가 카를 브룔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라는 그림입니다.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인데요. 저는 아마도 소모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그 성 안에 의인이 한사람도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 안에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도 성적인 가치관에 있어서 다수의 생각이 시대적 흐름이 되고 풍조가 되어지게 되면 진리를 말하기가 어려워 지는 것처럼 당시도 도덕적 타락이 편만해 져 있었을 테니 옳은 것이 그른 것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것도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상대적 진리입니다. 상대적 진리가 편만해지면 예수님의 진리도 인간의 이념 안에 갇혀 버리게 되지요. 이것이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 다양한 복음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번영신학으로 시작된 탐욕과 욕망의 복음, 수많은 이단 사상들이 전하는 거짓 복음, 상대적 진리의 이념으로 인간과 신을 동등하게 여기는 이념적 복음, 진리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는 다원주의 복음 등 세속화 되어가는 물결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학을 무너뜨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대중적 복음일까요? 아니면 순수적 복음일까요?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수많은 군중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르심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 13 – 14) 좁은 길로 가는 이가 적은 이유는 분명 버려 할 것들이 많고, 낮은 자의 모습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예수의 종이라 소개 합니다.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주인과 종의 관계가 있어서, 종들은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무시당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종들은 스스로 신분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천한 노예의 신분이 세습이 되어지니 평생 살아가며 희망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종이라 하면 이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사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붙드십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스스로 하나님의 종 된 나 바울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의 은혜와 복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와 복을 경험한 바울은 당시 주인이던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대해 주라고 편지합니다.(빌레몬서 1:16) 이것이 빌레몬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종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형제 된 관계가 되었으니 너의 종 오네시모를 기독교인으로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종의 제도가 통용되던 사회였을 텐데 그 당시 바울은 주안에서 형제됨이 무엇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복음으로 변화 된 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도 보이지 않는 계층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공평한 사회를 외치는 것도 현실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더 깊어질수록 낮은 자의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 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리 예수님을 마음으로 닮아가는 장소이지요. 예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신격화 시키려는 내 마음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며,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려는 내 마음의 깨뜨림입니다. 

한주간도 세상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다가 주님의 날 예배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믿음 앞에 온전히 바로 섰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문제 앞에서도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성숙함으로 기도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들을 외면하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포장과 자기과시의 가면을 쓰고 살며, 신비와 거룩함이 가려진 우리의 모습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깨달은 한 사람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 보면 에티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고 있는 여왕의 내시가 예루살렘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는데 복음의 눈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큰소리로 읽어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오늘날이야 성경이 저렴하고 누구나 구입할 수 있다고 하지만 당시는 큰 파피루스나 양피지 재질에 기록된 성경이기에 값비싼 것이었지요. 왕실의 재무부 장관 정도의 직책이니까, 오늘날로 보면 몇 천만원 가치의 주석 성경을 구매해서 읽고 또 읽고 있지만 깨달음이 없고 없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돈으로 깨닫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성령님께서 빌립에게 나타나 ‘너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이 거리는 대략 44마일 정도의 거리인데, 빌립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 길에서 에티오피아 내시와 만남을 갖게 됩니다. 시간과 방향이 완벽한 타이밍이었기에 이 둘은 만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오차가 없는 것이지요.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치면 마음이 불안한 것처럼 평안함으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붙드는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현장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완전한 진리이신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에티오피아 내시가 복음을 깨닫고 길을 가다가 세례를 받게 되지요. 그리고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게 됩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아마도 자신의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겠습니까? 

행 8:29-31 _29 성령이 빌립에게 “저 마차로 가까이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31 그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마차에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부탁했습니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성경 구절로부터 시작해서 그 사람에게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쉬운성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복음에 대한  진리로 꽉 차 있기에, 온세상을 압도하는 진리는 역사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흘러갑니다. 순종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작은 순종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시는 분입니다. 루터에게 순종은 수도원을 떠나 종교개혁의 깃발을 드는 것이었고, 헨리 나우웬에게 순종은 하버드 대학 교수의 자리를 떠나서 토론토 장애인 공동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고 나니 이전에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자신이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었습니다. 

우리도 불완전한 세상이라는 도성과 천국의 도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죄와 시험을 이기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눈이 떠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의 마음은 외적으로, 내적으로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가지요. 하나님의 존재를 닮은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서 오염된 물을 마시는 것을 그치고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될 때에 비로소 새로운 여정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칭의’는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인생의 주인이 달리지는 변화의 사건입니다. 로마서를 쓴 바울은 이것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 말합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교우 여러분, 복음을 만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분열과 분쟁이 그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교우들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의 ‘복’은 히브리어로 ‘아쉬레’인데 이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인해 이미 복된 존재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소유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계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인식한 것이 삶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르심 받은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선택 받아 세워진 자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삶에 어떤 위기가 찾아오고 고난이 와도 흔들림 가운데에 종의 손을 잡아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새로운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푯대를 향해,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이 한 사람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미국 부흥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던 믿음의 거장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Jonathan Edwards 1703~1758) 그는 성령 체험이후 미국 교회의 회심의 불을 붙인 청교도 목사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회의를 품다가 확신을 갖게 된 말씀이 있는데, 바로 디모데 전서 1장 17절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 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확신을 품은 에드워즈는 스물 살 때 “나는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갖게 된 사람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위험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평탄할 길을 걷고 있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춰야 합니다. 하지만 순탄치 않는 길을 걷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우리는 갈급함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의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이지요.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미지근해진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시작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8/7/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0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If You Believe, You Will See God’s Glory

요한복음 11:33-43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날은 시원한 환경 속에서 예배를 드리면 좋은데, 지난 주에 에어컨 작동 안 하는 것이 있어서 고쳤습니다. 오늘은 본당이 비교적 시원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 열 번째 시간으로 ‘믿음’에 대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많이 들어서 잘 아는 말 같은데, 무엇을 믿는 것인지,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지, 믿음의 결과는 무엇인지, 믿음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히브리서 11:6 말씀인데요.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without faith. Anyone who wants to come to him must believe that God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 이 말씀 속에 믿음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할 것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할 수 있으면,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제가 믿습니다! 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마가복음 9:22-24) 이 아버지에게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악한 영이 들어가서 시도 때도 없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저러다가 내 아들이 물 속에 빠지고 불 속에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한 나머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Anything is possible if a person believes).” 여기서 ‘믿는 사람’이란 무엇을 믿는 사람을 말할까요? 한번 답을 찾아보세요. ①자기 아들의 병이 나을 줄로 믿는 사람 ②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다. ③이 아버지에게 아들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부족한 것을 지적한 말이다. ④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언젠가 제가 ‘believe in’이라는 말의 의미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어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I believe in God”이라고 하거든요? Merriam-Webster 사전에 보면 ‘believe in’에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1) To have faith or confidence in the existence of God (하나님이 계시다고 확신하는 것) (2) To have trust in the goodness or value of God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것) (3) To have trust in the ability of God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11:6에 나오는 말씀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미국 화폐에 “In God we trust”라고 작은 글씨로 씌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재물’이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μαμμωνας (맘모나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맘몬’입니다. 영어는 ‘mammon(매먼)’이고요. 예수님은 이 ‘맘모나스’를 의인화시켜서(to personalize) 돈이 사람을 지배하면 그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미국을 세운 믿음의 선조들은 돈에 경고문을 써넣은 것입니다. 돈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요.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에 그런 경고문을 써넣은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둘째로, 히브리서 11:6 말씀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실하게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자기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서부터 하나님께서 해 오신 약속입니다. 보세요.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And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arch for Me with all your heart).” (예레미야 29:13)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But from there you will seek the LORD your God, and you will find [Him] if you search for Him with all your heart and all your soul).” (신명기 4:29) 두 말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속한 모든 교우들이, 그리고 특별히 청년들이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youthful lusts)’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디모데후서 2:22). 여러분, 다윗이 쓴 시편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시편 144:15)

이런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특별한 소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주었던 사람이라는 바로 마리아였다고 합니다. 마르다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던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셔 대접을 했습니다(누가복음 10:38-42). 그리고, 나사로에 대해서는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Lord’s dear friend, 요한복음 11:3)’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은 이 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매우 위독하다는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 두고 베다니로 달려가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5-6) 요한이 이렇게 기록한 것을 보면 그 때 제자들도 왜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달려가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지난 후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에 가 보니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된 때였습니다. 오빠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슬픔에 싸여 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격한 감정이 들어 몹시 마음 아파하셨고(요한복음 11:33)”,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Jesus wept)(요한복음 11:35)”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was deeply moved in spirit [to the point of anger at the sorrow caused by death] and was troubled(그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 대해 분노할 만큼] 심령이 깊이 감동되어 근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왜 슬퍼하셨고, 왜 분노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슬퍼하셨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 중에서 가장 큰 연약함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인용합니다. 인용할 때는 꼭 그 사람이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 년도를 찾아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몇 주 전에 소개했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같은 천재 화가는 1853에 나서 1890년 죽었습니다. 37살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그림을 그렸던 기간은 10년에 불과합니다. 참 아깝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연약함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면서 슬퍼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인간의 무지(無知)를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요한복음 11:25)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죽은 후에도 살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은 말씀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Didn't I tell you that you would see God's glory if you believe)?” (요한복음 11:40) 

마르다는 예수님이 언젠가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퀴즈를 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If you believe(네가 믿으면)”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요? ①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로 믿으라는 말이다. ②무엇을 믿으라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③하나님의 영광을 불신하지 말라는 말이다. ④ “나를 믿으면(if you believe in me)”이라는 말이다. 이 중 몇 번이 정답인가요?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id I not say to you that if you believe [in Me], you will see the glory of God [the expression of His excellence]?” ‘glory of God’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탁월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시는 최선의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Faith is to believe what you do not see; The reward of this faith is to see what you believe(믿음은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주어지는 보상은 당신이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해 주신 일 중에 가장 탁월하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But to all who did receive him,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요한복음 1:12, English Standard Version)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신 것입니다. ‘right’라는 말 대신 ‘privilege(특권)’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이 얼마나 놀랍고 흥분된 일이길래 요한은 이런 ‘특권’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의 상속자들(co-heirs with Christ)’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8:17) 예수님을 믿기 전 ‘죄인’이었던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상속자’로 신분이 격상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즘에 ‘최애(最愛, bias)’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최애 영화’ ‘최애 책’ ‘최애 노래’ ‘최애 음식’ ‘최애 친구’라는 말을 씁니다. 요한복음 11:40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여러분의 ‘최애 말씀’으로 한번 삼아 보시겠습니까?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안될 때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시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금방 베다니로 달려가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수님의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기 위하여(so that they will believe you sent me)” (요한복음 11:42) 그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씀을 증명하시려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도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도록,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은 그냥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