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1/13/2022 |
오병이어의 세가지 교훈 Three Lessons from the Five Loaves and Two Fish
마태복음14:13~21
벌써 성령강림절기 스물 세번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만 지나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기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개의 위대한 시간’이 있습니다.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성탄절은 주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죽으심과 다시사심으로 죄된 성품과 옛 기질들을 거부하고 철저한 신뢰와 순종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새로운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에서 주님의 빛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듯 했지만,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에는 그 빛이 가장 강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을 따르며, 세상에 그 빛을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그 빛은 우리 안에 있는 빛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게 될때에 세상을 향해 비춰집니다. 의존한다는 것은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약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린 생명은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나사렛이라는 숨겨진 동네에서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나사렛은 이름 없는 동네였으며,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무명의 시간으로 30년을 사셨습니다. 예수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셨더라면 고생하지 않고 먹고 사는 문제로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은 그를 목수로 살게 하셨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의 빛을 인성 안에 감추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본문의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건입니다. 야외에서 일어난 단체식사 사건이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대략 여자와 아이들까지 2만명으로 추정하는데, 수련회를 인도해본 경험으로 보면 이 인원이면 배급을 위해 적어도 훈련된 100명은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름도 모르는 한아이의 5개의 떡과 2개의 물고기로 모인 모든 사람을 풍성하게 먹이십니다. 언뜻 상상해 보아도 이 사건은 물위를 걷는 기적 같은 사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요한복음을 비롯해서 마태 마가 누가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행적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대에 이 말씀을 해석하기에는 이해할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기록한 기적에 대한 부분을 도려내고 성경을 보게 되면 현실에 눈에 가려져 그리스도의 신비가 감춰집니다.
2022년 한해가 조금씩 저물어 가는 이 시간에 보스턴 케임브리지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1. 오병이어의 표적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라고 시작합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의 순교 소식을 듣고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언하며 그 길을 예비했던 사람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예수께 세례도 주었습니다. 그런 요한을 예수께서는 많이 아끼셨습니다. 그런 그가 순교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예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모든 사람은 깨어진 세상에서 저마다 힘겨운 씨름을 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경쟁 사회속에서 패배감에 짓눌려 주눅들기도 하고, 인생의 어둡고 슬픈 터널을 지나가기도 합니다. 홀로 빈들에 나가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하기도 하고 풍요속에서 빈곤의 마음을 마주해야 할때도 있지요.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주님 앞에 갖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는 내 삶의 문제보다 더 크신 주님의 선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퓨리서치(Pew Research Center)가 경제 선진국 14개 국민들을 대상으로 코로나19가 종교와 가족 관계 등에 미친 영향을 조사했습니다.그 결과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국가가 종교적 신앙이 ‘강해졌다'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코로나19가 인류에게 삶과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날이 저물고 어둠이 깊어지는 시간에 일어납니다. 빈들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이고 허무함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주님이 계셨고 머무르셨습니다. 텅 비어 있는 곳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채워질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절대 한계상황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어둠의 시간이 주안에서는 밝아집니다. 하나님의 영이 가득해 지면 흑암이 가득하던 그곳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이 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일어난 신비는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확증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예수가 유월절 생명의 떡이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말씀합니다.
마가는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기 전에 모든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했다고 기록합니다.(막6:39) 이스라엘의 기후를 보면 우기와 건기로 나눠지는데, 건기는 4월 부터 10월까지였습니다. 이때는 잔디가 다 마르기 때문에 푸른 잔디 위에 무리를 앉히셨다는 것은 4월초인 유대인의 유월절 명절 직전에 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게 새로운 삶의 문이 열려지는 예표인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무리들의 삶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배고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인간의 삶의 허전함이 다 채워질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목자 없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죽음에 처하게 되는 매우 절망적이고 희망이 끊어진 상황을 뜻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불쌍히 여기다.’ 애끓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예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기적은 항상 영혼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로 오셨음을 오병이어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지요. 참된 신앙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예수가 복된 소식임을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뜨거운 사랑에 눈을 뜨고, 우리가 서로 나누어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긍휼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2. 오병이어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15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이 곳은 외딴 곳이고, 시간도 너무 늦었습니다. 사람들을 이제 보내어,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각자 사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필립얀시는 크리스챤 투데이(Christian today)에 기고한 논설에서 우리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 돈을 어떻게 쓰는가? 돈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는가?
오늘날 이 시대는 돈 때문에 언제든지 주님을 버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초조해지지만 주님이 계시지 않는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은 더 벌고, 더 누리기 위한 삶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삶의 자리를 쌓아두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의 소유는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자신에게 주신 소명 만큼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창조의 순간에 돈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돈으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복의 개념을 성공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결정해 버렸고, 믿음의 개념도 물질의 척도로 생각하게 되는 유혹이 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소리 없이 대신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는데 인간은 세상을 돈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의 신앙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기적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수님 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표적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표적이 보여주는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크신 주님의 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내것을 나누고 베풀때 우리의 삶에도 2만명여 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는 오병이어의 풍성한 신비가 경험될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때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무엇을 얻을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고독한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마을로 가서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갈 필요가 없다. 내게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음식이 있는 세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처가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좀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되고, 처한 상황들이 어려울 때에도 현재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있어서 하나님의 품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을 마음에 넣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 주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빈들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취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채워줄 안식처가 세상에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안감을 잊기 위해서 더 화려한 세상속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안할수록 주님께 좀더 머무르십시요.
16 “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하여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찾아오고 마음의 변화가 찾아올때에 더 많은 것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은 그들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피를 공유한 온전한 나눔이었습니다. 빈들에 모인 모든 무리는 주안에서 한 가족이 된것입니다. 케임브리지 공동체 안에도 오병이어를 통한 예수님의 마음이 삶에 담아지는 풍성한 나눔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케 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세상은 불과 30초도 안되는 광고를 통해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입합니다. 소비자들의 결핍을 찾아내 이를 채우기 위한 수많은 광고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쏟아집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지 않으면 평생을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흔들리며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더 깊어지는 결핍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절망적일때 일수록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나면 평소보다 더 절박하게 기도하게 되고 마음을 쏟으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보면 비슷한 고뇌의 상황들 속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어린 아이 음성으로 ‘집어 들어 읽으라. 집어 들어 읽으라’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르며 하나님의 명령이라 생각하고 책을 펴 들고 읽었던 것이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2만여명이 모인 그곳은 날이 저물어가는 밤에 모두가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는 한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캄캄하고 암흑같던 그곳에 하나님의 전등이 켜지고, 온갖 음란과 더러운 것과 속된 것과 가증한 것들이 판치던 일들도 주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릴때 떡과 물고기는 이제 어두운 밤이 밝히는 주님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 모든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주님의 기적을 본 것입니다.
빈들에 모여 있던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며 선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던 하늘의 만나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루에 먹을양 만큼만 공급 받았습니다. 쌓아 놓은 양식이 나를 살리고 풍성하게 해줄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썩을 양식일 뿐입니다.
19 사람들을 풀밭에 앉게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다음에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떼어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20 모든 사람들이 먹고 배가 불렀습니다. 먹고 남은 조각들을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21 먹은 사람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3. 오병이어의 표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때가 찬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함께 있었고, 그 속에 하나님의 비밀과 놀라운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벳새다의 날이 기울어져도 그곳은 결코 캄캄한 빈 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공간, 시간 속에 구원의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백성들의 공동체는 예배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이야기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셨고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독사’라는 단어는 내가 생각한다는 뜻의 ‘도케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영어의 도그마(dogma)인데, 성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영광은 성육신 사건입니다. 예수는 고난 받으심으로 그분의 영광을 성취하십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성육신 하신 예수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영광이 드러납니다. (요 1:14) 성육신 하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시는게 사역 전체의 목적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6)
우리는 말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31)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 가운데 물고기와 보리떡이 끝없이 계속 생겨나는 풍요로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을 때 손에 들린 물고기와 보리떡은 끝없이 계속 생겨났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쌓아 둠’에서가 아니라 ‘나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눔을 통해 내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으나 하나님 나라로 보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입니다. 작은 헌신이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사용될 지 우리의 시선으로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때에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이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식어진 마음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하고 매일 반복되는 삶속에서 은혜와 실망의 경계선에서 고민하기도 합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빈들 같아서 멈추어야 할지 더 가야 할지 모를때도 있겠지요. 평범함의 자리를 두려워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 삶에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 밖에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온전히 순종하며 드려 보십시오. 그 작은 순종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더 큰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놀라기만 하는 신앙 생활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표정으로 반응하고 끄덕이면 안됩니다. 내가 그 기적의 현장을 이해하고 살아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줄지라도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 있던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만난 은혜의 현장이 우리의 삶에 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 멀리에서 누군가 받은 은혜를 구경만 하고 있던 잠자던 나의 마음을 깨우십시오. 하나님 내 손에 있는 것이 비록 작을지라도 혹은 너무 커서 주님께 전부를 드리기 어렵지만 이 모든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 쓰임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병이어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갈망하며 자들에게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저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시겠습니까?
11/6/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6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본 An Example Jesus Has Set For Us
요한복음 13:4-5, 12-17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란 말이 있습니다. 환자에게 급격한 충격을 줌으로써 치료 효과를 얻는 방법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는 말씀을 읽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충격요법’을 쓰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이 그냥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공관복음(共觀福音, the Synoptic Gospel)’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실 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이 말씀이 나옵니다.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예수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것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한 종(servant)의 모습이었습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닦아주실 때까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발을 씻기도록 내 맡겼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주님, (어찌)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려고 하십니까?.....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6, 8절)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7, 8절) 이 말씀을 NIV 성경에서는 “Unless I wash you, you have no part with me”라고 번역했습니다. NLT 성경에는 “Unless I wash you, you won't belong to me”라고 번역했습니다. 둘 다 훌륭한 번역입니다.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f I don't wash you, you don't really belong to me(내가 너의 말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정말 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Good News Translation은 이 말씀을 “If I do not wash your feet, you will no longer be my disciple(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저는 더 이상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이 일이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an example of service)’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의 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주신 본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섬김’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그만큼 중요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10:45 말씀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기 위하여 왔다(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섬김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김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성 대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이 본성을 이기고 ‘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의 삶에는 5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섬김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의 삶은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섬기는 사람과 식탁에 앉은 사람 중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이냐? 당연히 식탁에 앉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사람으로 있다).” (누가복음 22:27) 식당의 종업원이 손님들에게 응대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바로 이 모습이 우리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은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Robert K. Greenleaf, 1904-1990)가 처음으로 주장한 리더십 스타일입니다. 그가 1977년에 ‘Servant Leadership’(종의 리더십)’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 ‘A Journey Into the Nature of Legitimate Power and Greatness(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의 본질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servant-leader is servant first, it begins with a natural feeling that one wants to serve, to serve first, as opposed to, wanting power, influence, fame, or wealth(섬기는 리더십은 섬기는 사람(servant)이 먼저인 리더십이다. 섬기는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자연스러운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힘과 영향력, 명성과 부를 원하는 리더십과는 정 반대이다).” 그린리프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게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견하고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 속에 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의 길이 들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리더십을 닮고 싶은 사람은 먼저 섬기는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꾸준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섬김에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말로만, 입으로만 말하는 섬김이 아니라 자신의 귀한 생명을 내 놓을 만큼 진정성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기 위하여 왔다(마가복음 10:45)”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주신 것은 섬김의 삶의 연장선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섬김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섬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4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선생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발을 씻겨줘야 해!” “나는 너희의 주님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발을 닦아줘야 해!” 예수님은 당연히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했면 어떻게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He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used to his own advantage,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그는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지 않고 종의 본성을 가지셨고 인간과 같이 되어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 (NIV, 빌립보서 2:6-7) 이 구절을 신학자들은 ‘The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겸손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43-44)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진정으로 높아지는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맞다는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오히려 반대로 그렇게 출세하려고 애쓰더니 마침내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리더십은 ‘self-seeking(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이기적인)’, ‘self-serving(자신을 섬기는)’, and ‘domineering(지배하는)’ 스타일의 리더십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깐 동안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참 인간의 길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길과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힘으로,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길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 길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Elisabeth Johanna Shepping(1880-1934, 독일계 미국인)을 아시지요? 우리 말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입니다. 미혼모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9살이 되어서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옵니다. 어머니로부터 냉대를 받은 쉐핑은 가까스로 간호학교에 들어가 간호사가 됩니다. 그리고 간호사로 일하는 틈틈이 뉴욕에 있는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1912년 32살의 나이에 간호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됩니다. 외국인이면서도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치마,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검정 고무신을 신으며, 쉐핑은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조선에서 쉐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조금 알려진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쉐핑에 대하여 이런 글을 썼습니다. “쉐핑은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사람들을 유익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쉐핑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한국에게 주었습니다. 그녀의 침대 머리 맡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 1930년경에 미국 장로교회는 전 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쉐핑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쉐핑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성공(SUCCESS)’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섬김(SETVICE)’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쉐핑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참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섯째로, 섬김의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17절) 이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축복입니다. 섬김의 삶은 누가 알아주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충격 요법’은 효과가 있었을까요? 여러분, 베드로가 쓴 편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기쁨으로 그들을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며, 돈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며, 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십시오(but being examples to the flock).” (베드로전서 5:2-3) 예수님 말씀 그대로 아닙니까?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절대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지도자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때마다 베드로를 바로잡아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충격요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의 ‘본(an example)’을 보여 주시면서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는데, 주님의 종인 우리가 당연히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섬김의 삶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면 여러분은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니까!”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지?” “왜 나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하지?”
10/30/2022 |
너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라 Let People See The Kingdom of God Through Your Life
마태복음 4:18-22
보스턴에 와서 아름다운 가을을 만났습니다. 지금 한국의 가을도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님의 기쁨이 이곳에 임하심을 기뻐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는 영광된 예배가 되길 소망합니다.
팬데믹을 지나며 삼 년 만에 미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한국교회에 어려움이 들어와 더 많이 기도하며 성도들과 하루 세 시간 세 번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였더니 기도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미국에서 한국 입국도 어렵고 한국에서 미국 입국도 어려운 시간을 지나며 입국을 거부당하는 사례들도 생겼습니다. 이번에 미국을 오면서 입국 심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면서 천국 입성을 위한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한가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 이후 교회는 계속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며 확장시켜 왔습니다. 교회는 소망을 오직 예수께 두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심령에서 확장시켜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선물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심령 안에서 확장시켜 가야 합니다. 이는 예수로 충만한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이끌어 가시도록 사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받들지 않으면 자기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고 선교 사명을 망각할 때 성도들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찾아 땅의 것에 물질적인 것에 몰두하고 맙니다.
주님은 땅의 것만 구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먼저 인식하고 성도들이 주님의 소명을 잘 감당할 때 하늘의 영적 법칙을 누리며 복음으로 쓰임 받는 영광도 누리게 됩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머리 되시고 우리는 지체입니다. 몸의 모든 지체는 머리의 지시를 받고 움직입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1.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집중할 때 교회는 어려워집니다. 교회 머리 되신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길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성도들은 교회 일을 생각할 때 비로소 교회 활동 속에 참여하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맡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을 맡겨 주시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게으르고 악하여 전혀 일하지 않았습니다. 일하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교회 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삶 하나하나가 하나님 나라와 연관되어 있다는 영적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교회 중심적인 사람들은 항상 교회 일이 우선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신분은 천국 백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자신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케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성령의 감동으로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성도는 주의 몸 된 교회가 부흥되도록 힘씁니다.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 데려올까 생각합니다. 그는 전도할 생각이 충만하고 선교할 생각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충성할 일거리를 찾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하고 자유롭게 일하는 자리를 지킵니다. 이는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크심을 믿고 승리합니다. 세상의 어둠과 악한 세력과 정사가 교회를 헤치지 못하도록 늘 깨어 기도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먼저 생각하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착한 행실을 집안사람들에게 보여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했습니다. 성도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기 위해 성도들을 훈련합니다. 기도훈련, 말씀 훈련, 전도 훈련, 섬김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초대교회의 헌신적 사랑과 관심은 다른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흩어진 디아스포라 성도들은 자신이 거하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을 위해 사업체를 옮겨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고 주의 종을 도왔습니다. 초대교회는 구제와 전도를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기도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기에 힘썼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는 마음을 추진시킬 때 이루어집니다. 섬기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섬기는 사람이 많아질 때 교회는 부흥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속의 모습은 성육신의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 제사장, 왕의 모델이셨고 신약에서는 섬김으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메신저로서의 역할만 감당하셨습니다. 오직 사랑, 성실, 진실, 겸손으로 사셨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으로 행하시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일깨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믿고 영생 얻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영생 얻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내게도 효험이 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효험이 될 때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라는 명령을 이룹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를 기르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까지는 죄 사함에 대한 기대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불과 성령의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전도를 위함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 되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전도하는 세계를 열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에 속한 이웃이 죄 사함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게 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만군의 주 여호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회개가 터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잘 낚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사람을 낚는 어부,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으로 용서, 치유, 사탄으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 해방, 그리고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직임에는 선지자의 직임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백성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말씀을 주어 그들로 하나님을 따르도록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예수님을 드러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가 절정일 때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메시아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나는 아니라며 나는 그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께로 가니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최고로 높이고 주의 길을 예비하고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겸손해야 높아지고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신비한 나라입니다. 새로운 언약을 주신 메시야 시대는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들이 예수를 만나 천국 가면 땅에 있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되는 축복을 누립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 어떤 조건 속에서도 예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예수 안에 거하기 위해 육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신령한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내 한 몸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 소망하십시오. 영혼의 때의 기업을 위해 진군하길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사장의 직임을 가지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눈이 열리면 예수님이 부르셨던 제자들처럼 그물을 버려 두고 아버지와 배도 버려 두고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 넘어져도 그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밤에도 대제사장 적인 기도를 완수하셨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양을 끌고 제사장에게 가져갔습니다. 제사장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중보를 받으시고 백성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예수 피 없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셨는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왕이셨습니다. 예수 탄생에서 왕의 탄생을 드러내시고 혼인 잔치 비유에서, 양과 염소 비유에서,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에서 나귀를 타심으로 왕의 신분을 드러내셨습니다. 주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시길 바랍니다. “왕이신 하나님 내가 주를 영원히 높이고”하는 찬양이 삶이 되길 원합니다. 주의 말씀은 왕의 말씀이니 순종해야 합니다. 주의 종이 전하는 말씀은 왕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즐거이 순종하여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을 때 “네 말이 옳도다” 하심으로 완벽한 답을 나타낸 것입니다. 빌라도도 유대인들도 이 영적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십자가에 죽음으로 만 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속죄의 왕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왕이십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살리시고 고치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져야 할 섬김의 마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걷는 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역 현장인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주의 종의 마음을 알아 순종할 때 주의 종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은 땅의 것을 우선하고 높아지려는 제자들에게 섬김으로 교훈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걷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민족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소명을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받들어야 할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새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공로는 허물과 죄를 사하는 새로운 물결이 되어 흘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보혈 안에 들어갈 때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령 시대를 열어서 생수의 강물을 흐르게 하였습니다. 마치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만물을 소성시키듯이 예수 피 성령의 생수가 우리를 소성시킵니다.
교회 시대 성도들의 섬김의 본질은 순종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함으로 순종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고로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류 구원을 위해 죄 없으신 독생자가 십자가를 져야 함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 지심은 이사야 52장 13절에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기쁘게 섬기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 사역을 순종으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무릎을 예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는 말씀의 권세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에 사단이 떠나고 질병이 떠나고 저주가 떠납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충성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3. 성도의 마지막 소명은 전도입니다.
복음 전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기본적인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예배와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 안에 성령 충만을 허락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에게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8) 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 전도자의 기도 방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자는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은 그들을 향해 저들의 눈을 열어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저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소서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따라 저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고 바울처럼 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죄 사함을 받아 믿음을 갖게 하며 거룩함을 입은 자들 가운데 기업을 누리게 하옵소서 하는 축복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누리는 영광의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존중하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으로 성도들은 교회 생활을 승리로 살아내야 합니다. 사랑과 우정과 존중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셨으니 오늘 이곳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도 ‘너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라’는 영광된 인생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으니 새 시대를 새 노래로 살아 땅끝에 선 복음 전도자의 소명을 감당하길 축원합니다.
10/23/2022 |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 The perfect law that sets you free
야고보서 1:22-27
C.S 루이스(1898-1963)가 쓴 ‘헤아려 본 슬픔’ 은 그가 59세에 결혼하고 4년 뒤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후 마주한 슬픔을 글로 풀어낸 책입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나서 개인의 실제적인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 이성적인 신앙은 가벼운 이론적인 혼란이 아니라 완전히 산산 조각이 나는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무게는 헤아릴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절망과 고통의 시간에 슬픈 마음의 틈 사이로 영원한 세계의 빛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구원의 의미를 더 자세히 깨닫게 됩니다. 고통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새로운 존재로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신비’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 ‘신비‘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이전에는 본질상 죄로 가득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떨어져 살다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한 실천적 변화의 첫 단계는 언어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세대 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MZ세대들은 줄임말을 사용합니다. ‘꾸안꾸’가 무슨말인지 아시나요? ‘꾸민듯 안 꾸민듯’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꾸꾸꾸’는 어떤 뜻일까요? ‘꾸며도 꾸질 꾸질’이랍니다. 한 단어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알잘딱깔센’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의 줄임말입니다. 이것 말고도 Z세대들이 쓰는 신조어가 많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감정을 전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 시대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신앙적 언어로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을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전공을 언어를 통해서 엿볼수 있게 됩니다. 공대생들과 대화할때 느껴지는 공학적 대화들이 있구요, 음대생들과 대화할때 느껴지는 예술적 감성적 언어의 표현이 있습니다. 언어는 그의 마음과 살아온 배경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프랑스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쟈크엘를(1912-1994)은 ‘뒤틀려진 기독교’란 책에서 실천이 빠진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것이 믿음생활인데, 우리에게 말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믿음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쓰여졌다고 추정합니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가 지상에 계실 때 그의 말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5절에 보면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야고보가 예수라는 형과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냈겠습니까? 그러나 야고보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난 이후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고 나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야 1:1)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자랑하지 않고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 더 영광됨을 알게 된것이지요. 이것이 믿음의 변화이고, 입술의 변화입니다.
야고보서는 부활하신 주님이 2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쓰여졌습니다. 당시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로 인해 유대 기독교인들은 흩어져 있었지요. 야고보는 당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가 주는 매력에 빠져 믿음의 실천이 상실되고 재물의 축적에만 관심을 쏟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이 있었기에 살아있는 믿음은 삶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상할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0년에 비해 더 빠른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사는 것은 물질과도 연결됩니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인생을 무한 질주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뚫고 오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22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행하십시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앉아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듣는 것은 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있어서 묵상이 중요합니다. 묵상의 원어적 의미는 ‘곱씹는 것’인데, 묵상을 통해 일상을 살아내고,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 갈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설교의 홍수 시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지요. 그러나 홍수가 나면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마실물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말씀의 지식은 풍부해지나 깊은 성찰이 없으면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많이 듣고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니까 성경적 지식은 많아졌습니다. 듣는 귀도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의 지식을 높이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씀이 내 삶으로 들어와 변화되는 삶을 만나야 합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지식은 아무리 쌓아도 내 마음에 온전한 기쁨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게 됩니다.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도록 말이지요.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너희의 마음이 썩고 부패해서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남의 얼굴은 잘보는데 자신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에 빠져 말씀이신 주님을 알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3-5)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의 히브리어 어근은 “파르쉬”인데, “갈린 사람, 분리주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마음에 있는 죄를 먼저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묵상이 없으면 겉 사람과 속 사람이 멀어지는 이중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의 본성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나의 마음을 지켜낼 실력을 믿는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주께 올려드리고 주님의 마음을 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만을 절대 의존하는 존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3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고도, 일어나면 금방 자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잊어 버립니다.
성찰이 없는 세상은 무질서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자기를 속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내면에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은 더 깊어 질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심도 커지지만 불안감도 더 커져만 갈 것입니다. 더 큰 기대감이 주어질수록 더 큰 불안감이 찾아오는 것이죠. 사람들의 기대심리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인간의 연약함 아닙니까? 말씀의 거울 앞에 날마다 자신을 비춰보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실수하게 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데 자신을 고치고 일은 어렵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힐끗 비추기만 한다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 비난과 비판에는 능숙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비난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나의 마음이 고립되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5 그러나 사람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살피는 사람은 들은 것을 잊어 버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은 첫째가,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예수의 복음’입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1세기 유대 기독교인들이었기에 그들에게 익숙한 단어로 복음을 소개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흩어져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잊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환란과 핍박을 인간의 노력으로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천도 하나님의 구원에 의하여 감동을 주셔야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은 철저하게 죄악뿐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철저하게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행하고 인도해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완전한 법이신 그리스도만이 옛사람의 껍질을 벗고 속사람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해 보일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열심입니다. 선행과 공로로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은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이신 주님께서 그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26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개역개정으로 보면 1장 26절 “누구든지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재갈을 물린 말을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야생말들을 길들이게 되면 주인이 당기는 줄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아무리 빠르게 달리는 말이라 해도 재갈을 물린 말은 양손으로 줄을 당기면 멈추게 되고, 주인이 당기는 방향으로 뛰게 됩니다. 사진을 한번 보시지요. 말의 입에 2개의 금속막대를 연결해서 입속에 물리고 말을 컨트롤 하게 됩니다. 기수는 이렇게 잘 길들여진 말들과 교감을 이루며 말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몇해전 어느 선교사님이 자신의 책을 선물해주시면서 메세지 한줄을 써주셨는데, 그 글귀가 제 마음에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기쁨으로 안고 가는 부담’이라는 글귀입니다.
참 어렵지요 기쁨은 가능한데 부담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함이 있었습니다. 보통 슬픔이라는 감정 뒤에 부담이라고 표현되어지는데, 기쁨과 부담이 어떻게 함께 갈수 있을까? 이 한줄이 저는 경건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기쁨으로 안고 가는 부담’ 그 부담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내가 지켜야할 중요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는것은 주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람들의 삶의 무게, 외로움의 무게 아픔의 무게를 생각하며 기쁨을 나눠야 합니다.
이제 현대 기독교는 금욕주의의 위험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영향으로 구원을 위해 몸부림쳤지요. 웨슬리는 규칙주의자였습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며 열심을 다해 고행을 했지요. 이러한 모든 것은 종교적 열심인데, 열심으로 구원에 이를수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는 세속주의, 편리주의, 물질 만능주의로 인해 교회 안에도 편리주의 복음, 번영복음, 세속화 복음이 넘쳐납니다. 이러한 때에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경건의 원천이 누구신지?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7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안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돌보고 외면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태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믿음은 이 시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온유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 부터 떨어진 고아된 미성숙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릴 위해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시고 자녀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깨어진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져야 합니다.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안에 들어오면 이전에 느낄수 없었던 설레임과 기쁨이 나를 가득 채우는것입니다. 어떤 일을 만났을때 머리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삶은 때론 이론적으로 뚜렷하게 설명되지 않더라도 그 사랑 안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로마 제국의 가혹한 핍박으로 인하여 이미 참된 사랑과 교제를 상실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믿음을 실천하라고 교훈합니다. 개혁이 아니라 로마 사회의 폭력적 대항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랑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당시 어리석어 보였지만 이 사람들에 의해서 300년이 지난후 로마 제국이 기독교 복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지금도 복음을 듣고 삶의 변화된 자리에서 살아내는 삶은 작고 초라해 보일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속에서 느리고 답답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이 비록 작아 보이고 없어지는 것 같았지만 로마 제국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세속적인 것들은 중독성이 강합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에 중독이 되면 믿음이 파산하고 구원으로 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 잃어버린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래 사회는 보여지는 것들 가운데 자신을 속이는 일들이 더 빈번해 질것입니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구분도 어려워 질터이고,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하는 일도 더 어려워 질 것입니다. 이런 때 일수록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 눈이 열리는 복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깨달아지는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의 자아 그리고 나의 마음속 깊이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통제하지 못하는 생각과 마음은 언제든 위험이 따릅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인생의 주인으로 주님을 받아들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면 넘어져도 일어날 힘 회복할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한구절이라도 나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한주도 그 말씀 붙들고 살아 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전과 나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말씀의 나의 삶에 찾아 올 때에 분명 나의 마음이 이전과 다를것입니다. 삶의 실천과 함께 갈때 느끼는 그 온전한 기쁨이 우리의 삶속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10/16/2022 |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GOD Makes the seed grow
고린도전서 3:1~13
예일대학교 기독교 역사학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1923~2006) 교수는 세계 역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나라의 안정과 행복이 달려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는 ‘역사, 예수와 만나다’라는 책에서 예수라는 인물이 역사속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시대마다 예수가 어떻게 조명되었는지를 역사적 식견을 가지고 고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강한 빛과 예수의 음성을 듣고 이방인을 향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이방인을 향한 ‘환대의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사용하여 복음이 유대교에서 벗어나 모든 민족으로 뻗어 나가도록 하셨지요.
2천년 교회사를 보아도 많은 사람들의 피흘림을 통해서 교회가 성장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스스로 고난을 겪으며 교회를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론의 핵심은 ‘고난’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 중에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세상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 시키려다가 우리가 먼저 세속화되고 변질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초대 기독교는 핍박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며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공인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 교회는 가슴 아픈 분열의 역사를 담고 있지요.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분열을 거듭합니다.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 분열,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 분열, 451년 칼케돈 공의회 분열, 11세기 필로오케 논쟁으로 인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인한 분열, 그 이후에도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이면에는 여러 논쟁과 개혁, 다름과 불신으로 인한 갈라짐인데 그 역사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흘림이 있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론은 Ecclesiology라고 하는데, 이는 Ecclesia 와 Logos 의 합성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Ecclesia는 "시민들의 모임 혹은 총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사귐을 얻고, 로고스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을 에클레시아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교회론의 핵심은 유대교의 ‘예식’과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는 부활후 승천하시기 전에 유대교에서 벗어나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령의 오심은 모든 민족이 한소망을 바라보며, 그들의 다름이 분열의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헬라어로 민족을 의미하는 단어는 ‘에토스’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구성하는 세가지 요소에 있어서 첫째는 좋은 성품이요, 둘째는 실천적 지혜이며, 셋째는 사심없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열과 불신이 넘쳐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수많은 거짓 뉴스와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서로를 두려움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거룩한 에토스’를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격과 영성과 성품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뭐든지 자기 좋을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분열의 담장을 높이 쌓아 올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분리의 담은 절대로 허물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담을 허무는 사람은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낮은자의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 자신을 몸을 던졌습니다. 예수의 몸이 찢기며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욕망으로 돌아가던 역사의 수레바퀴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기독의 신앙의 신비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로마시대 4대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상업도시로 성장하며 각종 문화가 혼재해 있었고, 물질 문명이 발달했으며, 세속 문화가 도시의 발전과 함께 왕성해져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그리스와 로마신들을 숭배하며 성도덕이 문란했고, 지식층들은 철학적 종교들을 신봉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도시 슬로건(Slogan)이 “하나의 도시, 하나의 시민” (Cosmopolitan) 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추구하는 “하나의 공동체”와는 목적이 다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oneness) 안에서 모든 민족을 ‘받아들임’(openness) 으로 세상에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각종 우상숭배를 다 받아들이는 혼합주의와 우상숭배와는 그 결이 다릅니다.
본문 1절로 3절에서 바울은 ‘성령에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을 대조하며 말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시기와 다툼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성령에 속해서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결혼한 두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마 19:6) 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가정 뿐 아니라 교회인 공동체에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Augustinus,354~430)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알기에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른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는 곳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그 사랑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속에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 심기면 구원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육으로 사는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예수께서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속한 사람은 새로운 자아가 자라나고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혈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이고 은혜가 넘치도록 하는 것이지요.
바울이 고린도 지역의 타락을 보고 절망하고 떠났다면,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이 지역에 머물다가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고 난 후에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라는 사람이 교회를 맡아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은 개척한 목사이고, 아볼로는 2대 후임목사입니다. 목회자들도 어떤 분은 심방의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찬양의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행정의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제자훈련을 잘하는 분도 계십니다. 한사람이 다 잘 할 수는 없지요.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이로 인해 여러 파가 생기고 분열이 생겼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4 어떤 사람이 “나는 바울파다”라고 말하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파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13에 보면 “도대체 그리스도가 나뉘었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여러분 누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지요? 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끼?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편지하는 것입니다..
5 도대체 아볼로가 무엇이고 바울이 무엇입니까? 나나 아볼로나 여러분을 믿도록 하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6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에 부름 받은 목회자는 받은 은사대로 충성하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들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들이 다 다릅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목회자는 오직 심고 물을 주기 위한 섬기는 자이며,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는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목회자도 임원도 직분자도 교사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꾼들일 뿐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낮아짐의 자리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인 하나님은 중요합니다. 8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의 목적 때문에 일을 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가 한 수고만큼 보수를 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일인 구원은 오직 주께만 있습니다. 구원만큼 더 크고 위대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쓰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와 보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면 되는 것이지요. 찬양과 존귀와 영광은 하나님만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신실한 예배자가 되어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상은 현재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이 있겠습니까? 실제적 삶의 능력을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현실에서 보게 되는 것만큼 큰상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이 받아드려지는 것은 인생의 큰 기쁨이고 축제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곳에서 누리는 상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날을 어떻게 소망하며 살아간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대로 유능한 건축가처럼 기초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 건물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이 기초 위에 어떻게 건물을 세워야 할지 주의해야 합니다.11 아무도 이미 놓여 있는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한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건물의 기초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년수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예수 얻으면 다 얻은 것이고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예수 잃어 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예수가 없는 곳이라면 내가 서있는 어디라도 선교지임을 기억하십시요.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안에서 각 지체들에게 주신 은사를 인정하며 함께 예수의 몸을 이루며 성숙한 신앙을 향해 걸어갑시다.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주의 이름만을 높이며 그 안에 거하시기를 훈련합시다..
여기에 모인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주목한다면 하나됨은 가능하지 않을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됨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교회와 지체들을 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길때에 내 마음에 진실한 눈물도 주시고 뜨거운 마음도 주셔서 세상의 기쁨보다 주안에서 함께하는 기쁨을 느끼게 되는것입니다.
이사야는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의 전에 모여들 그 날이 장차 있을 것을 바라봅니다(사 2:2).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사 56:7)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 이니라”(사 60:1) 외칠 때, 이어지는 비전은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것에 대한 한 장 전체의 비전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반석이며 요새가 되시는 구원자가 누구입니까? 교회의 방패가 되시고 힘과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주님께서는 슬픔 중에 부르게 될 노래가 되시고,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이 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고 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12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또는 나무나 풀이나 짚 등을 이용하여 건물을 세울 것인데 13 각 사람이 일한 성과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에 일한 것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한 일을 검증할 것입니다.
케임브리지 교회에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 좋겠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고난의 불이 임하면 금방 무너지고 타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어떤 시험과 환란 가운데서도 버티고 지켜낼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런것입니다 . 나의 마음을 지켜낼 실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기 위해 진실하게 살아내야합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워도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의 역사를 써가는 일에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케임브리지 교회에 오직 주인이신 주님만이 존귀와 영광 받으시고, 우리는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어려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 무너진 그 자리에 그저 묵묵히 함께 걸어감으로 힘이 되어줄수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세속의 물결이 틈타지 못하는 교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지체들을 찾아가 안부할수있는 교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지만 묵묵히 걷는 그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신자들을 위한 메세지 the way only way 를 소개합니다.
인생은 세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때 갈등하고 방황하고 고민하는것 같습니다
첫째는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싶었는데 막상 가 보니까 그길이 아니었거나 또는 그 길에서 계속 방향을 찾지 못하고 맴맴 돌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이 아닌길을 가려하고 길이 없는 길을 뚫어보려고 애쓰는것입니다.
두번째는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거짓이었고 사랑인줄 알았는데 배신이었고 진실인 줄 알았는데 허위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가짜를 붙들고 진짜처럼 목말라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잃어버린 생명입니다. 모양은 있는데 생명은 없고 형태는 있는데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 붙들고 꽃이 피기를 바라는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날때 잃어버린 길에서 등대를 발견하는 것이고
거짓과 허위속에서 맴돌고 살았떤 자기 자신에게서 진실한 진리와 빛을 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저희 희망도 없고 도저히 갈 길도 없었던 죽음 앞에서 생명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는 거짓말과 위선속에 살다가 진실한 사람 하나를 만나면 눈물이 나는것이지요. 우리는 수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억압 되어 있습니다. 소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눔이 중요합니다
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새가 알을 까고 나오듯이 우리의 영혼은 모든 죄와 허물과 죽음의 세계를 깨고 생명으로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꽁꽁 얼어 붙었던 대지에 꽃이 피듯이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돗듯이 당신의 인생에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마음에 모셔보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불러보십시오. 당신의 영혼은 그 순간 변하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가 이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은 교제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