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9/24/2023 | 성령강림후 제 17주
목적은 하나입니다! The purpose is one!
사도행전 22:22-30
바울이 자신의 간증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말을 이어가는 순간,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끊어 버렸습니다. 바울의 연설이 특별히 자극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친듯이 고함을 질러 대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흙을 움켜 쥐고서 공중에 던졌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는데, 개역개정은 ‘이 말하는 것까지 듣다가’, 쉬운말 성경은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는’이라고 기록합니다. 이후 일제히 소리를 질러 대며 바울을 살려 두지 말고 죽어야 마땅 하다고 소리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더러운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경건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들을때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는 바울의 말은 너무도 불쾌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을 끊고 종교적 경건을 빙자하여 바울을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째로 외우고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보면 613개로 분류됩니다. 248개의 계명은 “~하라”이고, "하지 말라"의 계명이 365개입니다. 그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만 지키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형식은 있는데 율법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그러하지요. 서로를 향한 마음과 사랑이 없이 원칙만 세워놓고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 관계는 늘 엄격하고 불편할 것입니다. 22절에 하반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 두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완고한 마음에 어떻게 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종교적 행위만 있었지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허상뿐인 하나님이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복음은 죽어가는 마땅한 죄인까지 되살려 새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기독교 믿음은 실제적 관계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겸손함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지만 다시 일으켜 주시는 십자가 아래에서 영원한 생명이 경험되는데, 주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인간의 어떤 행위도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음에서 있음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은 완전히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따르는 옛질서를 붕괴시키고,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심으로써 다시는 사망의 세력이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의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달라지게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테켈 형무소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썼습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는 불행한 나날을 보낼 때에도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당당했다고. 정말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새장속의 새처럼 불안해 하고, 그리움에 지쳐서 병들고, 목을 졸린 것처럼 숨을 쉬려 발버둥 치고…사소한 모욕에 분노를 떨고…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저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 시는 히틀러에 저항하며 옥중에서 자신을 깊이 바라보며 고백한 시입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를 통찰하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니까 마음 중심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로 읽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문자를 뛰어 넘어 주께서 실제적으로 함께하시는 믿음의 관계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후 찢어지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 찬 고기를 보며 욕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옛모습을 자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의인되게 하려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은 어떤 죄인이라도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았어도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10)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며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멈춰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듣기도 전에 귀를 막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성도는 매사에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경주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그날에 잘했다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믿어 보다가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여긴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인 것입니다. 평생 말씀을 묵상한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긴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필요가 없어집니다. 지속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기 위해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여인을 돌로 쳐라"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정면적으로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고소거리가 되고, “돌로 치지 말라”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십니다. 이후 예수를 고발하던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찔려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스스로를 책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결정적인 죄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줄 모르고 남의 눈에 작은 티를 탓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누군가를 돌로 치라고 외치는 세상입니다. 정치 사회의 현상만 봐도 이러한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교회 안이라고 이런 일이 없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제대로 통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경건의 모양만 따르게 되면 예수를 고발하려고 찾아 온 유대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으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경건의 모양은 하고 있는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의인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예수께서는 돌로 치러 온 사람들에게 자신을 성찰하며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 용서 받은 여인은 매순간 선택과 곤경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돌에 맞게 된 여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자신의 생명과 교환해 주셨습니다.
24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빨리 데리고 들어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를 채찍으로 심문하여,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동을 벌이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유대인의 일상 언어는 히브리 언어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전통 유대인들이 하는 히브리 말로 전했습니다. 당연히 로마의 천부장은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이 다시 난폭한 군중들로 변하니까 바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입니다. 천부장은 죄를 정하지도 않고 채찍부터 들도록 명령을 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어들였고 바울을 채찍질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인 나를 재판도 하지 않고 채찍질을 할 수 있느냐고 말했고, 바울 곁에 서 있는 백부장은 얼른 가서 천부장에게 보고합니다.
26 이 말을 듣고, 백부장이 얼른 천부장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천부장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 27 그러자 천부장이 놀라워하며 바울에게 와서 물었다. “그대가 정말 로마 시민이오?” 바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28 천부장이 말했다.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데,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바울이 대답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로마 시민권자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의식 안에 주님을 전하는 일로 온통 가득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자신의 시민권을 잊고 전도를 했는지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시민권이 바울의 삶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사역을 마칠때 쯤이니 노년의 나이었을 것이고, 채찍에 맞는다면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 순간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채찍은 여섯개의 가죽끈으로 되어 있었는데, 끈 하나마다 납덩이가 달려 있어서 채찍에 맞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 채찍으로 맞을 경우 바울은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생각나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때에 로마 시민들은 재판도 하지 않는 상태에 매질을 하지 못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안전하게 로마까지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행정구역이던 다소에서 바울이 태어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도, 한평생을 살다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로마의 시민권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소중한 도구로 사용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는 영주권. 시민권이 주는 힘과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부장은 큰 돈을 주고서라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소유와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할 것입니다. 천부장이 획득한 로마 시민권은 로마 황제의 사람일 뿐이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속에서 살아 가지만 실제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분명하게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소유는 사람을 해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쓰이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천국 시민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들의 권세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삶의 목적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백년 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삶을 드릴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세상속으로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후 승리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시민권을 그 자리에서 발급한다고 증거합니다(요 1:12) 성경은 천국 시민된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증거합니다(살전 2:9)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할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천국 시민 된 성도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28:19.20)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로 사는 인생은 매일 매일 가르침 받고 배워가는 삶입니다. 나를 증명하며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삶의 주관자가 하나님 되어 주시기에 그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때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이며 분명하고 선명합니다. 목적을 알고 걷는 길은 흔들릴수는 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심을 믿고 주님의 손에 내 삶을 맡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는 삶속에서 더 깊어져 갈 것입니다. 한주도 삶의 이유가 되시고, 삶의 목적이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9/17/2023 | (성령강림후 제 16주)
바울의 간증 Paul's Testimony
사도행전 21:27-40
사도행전은 AD 30-63년 사이의 기록입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누가는 주요 사건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지만 어떤 사건들은 사도행전에서 과감히 생략합니다. 예를 들어 3년여 기간의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시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임에도 21장에서 체포되는 과정부터 유대 군중들을 향한 바울의 간증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무려 43절에 걸쳐 기록했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된 13장에서 28장까지가 대략 17년간인데 이를 날수로 따지면 대략 6,205일입니다. 그런데 13장부터 28장까지가 총 569절입니다. 따라서 43절에 해당하는 분량은 대략 7.5%가 됩니다. 수치적으로 볼때 누가는 바울의 간증을 평균치의 몇백배 이상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에 있어서 바울이 받는 소명과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건에 대한 43절의 기록은 바울의 위대한 간증이기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실제적 경험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몇년 전에 받은 은혜의 기억으로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몇달전에 몇년전에 먹는 밥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의 양식을 통해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새부대에 매일의 말씀을 담는 것이지요. 어느날 수없이 읽던 구절이 내 마음에 다가오고 마음이 뜨거워 집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말씀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시니 반짝이는 별빛처럼 마음 속에 쏟아져 내려 오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시도록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 자녀가 진짜 부모가 맞는지 매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거짓이 없는 하나님 사랑을 경험할때 인생에는 간증이 시작이 됩니다.
바울은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1절에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들에게 바울은 ‘형제 여러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기전에 자신을 심문하는 최후 진술의 자리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용했던 호칭입니다. 영어성경은 brothers and fathers라고 번역했고, 유대인들을 향한 존경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단어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행동에 비하면 참 온유한 언어입니다. 헬라어로 아델포스(αδελφός) ‘형제’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연합된 형제인데, 바울은 핍박하는 너희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배척당하면서도 ‘사랑하는 내 형제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의심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임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놓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때에 주님의 빛과 음성이 보이고 들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윤복희씨가 부른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아실겁니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윤항기 목사는 1978년 폐결핵 말기 판정으로 6개월 선고를 받았는데, 동생 윤복희가 이혼의 아픔을 겪고 힘들어 할때 절망속에서 희망을 놓지 말자는 취지로 동생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를 만듭니다. 한 방송에 나온 윤복희씨의 인터뷰를 들었는데요. 노래 가사의 위로, 등불, 벗, 형제, 노래, 기쁨이 되어 주겠다는 고백은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임을 약속하는 내용들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이 노래가 위로가 되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네가 만약 외로울때면 내가 친구가 될께, 네가 만약 기쁠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기쁨이 이런것 아니겠습니까?
주안에서 우리는 형제를 품어 안으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번 학기 금찬을 시작하고 많은 청년들에게 도전이 되는 메세지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간사님들의 모습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지체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과 기대하는 마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합니다. 바울과 스데반에게서 영혼을 바라보는 애통함이 묻어납니다. 복음을 향한 열린마음을 갖으십시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에게서 자유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는 죄수의 몸으로 체포되었고, 몸은 상처로 가득했는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유와 담대함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경험했기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에 더 큰 세계가 열려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알아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뜻을 깨닫게 될 수록 삶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유대인들은 편협한 확신과 종교적 열심으로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죄가 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경험은 자신의 이성과 종교적 열심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믿는 확신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살면서 빛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망각한 채 살았던 바울에게 참빛이 되시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오자 자신 안에 빛이 있는 것처럼 여기며 예수를 거부하던 어리석음을 본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주의는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옵니다. 물질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 현대사회는 과다한 자원의 개발로 인해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물질주의로 인한 과도한 소비주의는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안에 물질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저마다 물질만을 빛으로 여기고 참 빛이신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동물과는 다르게 예수를 아는 빛을 알도록 남겨 두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은 예수의 빛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만약 인간의 양심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가능성이 없다면 피조물인 인간과 동물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고,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확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려고 했지 바울의 고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만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깨닫는 것은 역사적으로 예수를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연구해도 이 신앙적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있는 인격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십니다. 바울에게 성경은 이전에 읽던 관점과 완전히 달려져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열어 준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만들어진 예수가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고 순교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하던 바울이 자신의 생명조차 아까워하지 않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경험하고 구약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언약이 발견되고, 옛언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바울은 새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바울은 이사야 66장 20절을 새언약의 계시로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종류의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이 나타나는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바울은 이사야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로 바쳐진 양이나 소는 제단에 바쳐진 순간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경험은 바울에게 생애 전 존재의 변화요, 세상과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예수를 믿고 이사야 66장 1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음을 보게 됩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행7:47-49) 예수님을 경험하고 난 스데반의 마음에도 주님이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스데반 집사의 마음의 성전에 거하시며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바울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인격적 간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성전에 계시면 간증이 시작됩니다. 아나니아와 같은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게 되고, 예수께서 함께하는 간증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복의 간증들이 넘쳐나는 것은 주님을 통해 성경과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없이도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오랜 시간 연구하다 보면 성경적 지식이 쌓여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3인칭 시점일 것입니다. 오늘날 뿐만 아니라 바울의 시대에도 지성이 없어서 문제가 일어난 게 아닙니다. 지성은 차고 넘칩니다. 문제는 근본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간증은 언제나 1인칭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받아들임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먼저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선택 받았다는 확신속에서 다른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아들이는데 그들의 확신은 걸림돌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분명한 경험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지닌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십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아져야 비로소 땅을 보며 살던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탐욕, 불의, 합당치 못한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감격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신앙적 경험이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지요. 그래서 기독교는 경험의 종교인 것입니다. 바울의 간증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선량한 유대인입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교육 받았고, 랍비 가말리엘의 엄격한 지도 아래 우리 종교의 전통을 철저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처럼 나도 항상 열정적으로 하나님 편에 있었습니다. 나도 이 예수의 도와 관련된 사람은 누구나 맹렬히 공격해서, 하나님을 위해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그들을 잡아 들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최고의회의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추적하고 체포하려고 우리 형제들이 있는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데려와서 형을 받게 하는 권한이 부여된 공문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오쯤 다메섹 외곽에 이르렀을때,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강하게 비쳤습니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고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해치려고 하느냐?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하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동료들은 그 빛은 보았으나 그 대화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주님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줄 사람이 거기에 있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내가 처음 계획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나는 눈이 멀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내 손을 잡고 데리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다메섹 유대인공동체가 다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그가 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들어 보시오하고 말했고, 내가 눈을 들었는데, 어느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대를 택하셔서 그분의 활동계획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대는 의롭고 죄가 없으신 분을 실제로 뵈었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대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핵심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일어나 세례를 받으십시오. 죄를 깨끗이 씻어내고, 하나님과 직접 사귀십시오. 정말로 아나니아가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에 어느날 나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잠겨 기도하다가 그분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죄 없으신 분을 뵈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유를 묻지 말고 거거라. 내가 너를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노년에 쓴 디모데서를 보면 그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백합니다.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지성을 압도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날마다 덮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을때 비로소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아나니아를 만났던 경험들 말입니다. 믿음생활 안에 있는 수많은 간증들은 실제로 가슴 떨리는 고백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쉽게 생각하면 얕은 감격만 누리게 됩니다. 인간은 한시라도 주님의 은혜를 떠나면 서로를 비방하고 비판하며 평가하는 흉악한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겸손해 지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가 설수 있는 은혜의 감격을 실제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에 실패하지 말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실패했을때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 그 지혜를 가르치시겠습니까?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며 자라가십시오. 존재의 변화없이 우리가 어떻게 증인으로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받은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며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 받을 때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고후 6:2) 변화된 성도들에게 은혜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바울의 간증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의 새로운 눈이 떠지고 ,그 빛이 인도하시는대로 하나님께 은혜 받는 일,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행길에 만나게 되는 일들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생명을 전하는 간증을 채워가는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9/10/2023 | 성령강림후 제 15주
문들이 곧 닫히더라 The gates were closed soon
사도행전 21:27-40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은 20장부터 계속 예고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한주간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실제적으로 바울에게 찾아온 죽음에 가까운 고난을 다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바울은 소망에 대한 이유를 항상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올 때 소망에 관한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은 소망의 이유가 되시는 분께서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두려운 상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의 이유는 성도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됩니다.
바울을 붙잡고 끌고 나간 후에 성전 문이 닫혀졌습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라고 번역합니다. 굳게 닫혀진 문은 바울을 향한 유대인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 간 바울을 죽이려고 사람들이 달려 들었고 죽을 만큼 맞게 된 상황입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좌절하고, 불안에 짓눌려 떨고,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불안에 짓눌려,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는 묵상하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그렇게 보여집니다. 내 몸이 아프면 비로소 아픈 사람들이 보여집니다. 바울의 눈에는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이들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문이 닫힌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관계속에서 굳게 닫혀진 마음의 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아픔과 슬픔, 이런 환경이 직면하게 되면 인생의 문이 닫혀져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 문은 바울을 향해 열려진 문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한주도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내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경쟁사회에서 겸손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중심성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회속에서 예수님의 겸손함으로 다리 놓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바울의 모습을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하며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2천년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본문의 상황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의 오해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1주일간 결례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결례가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전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바울이 으레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온 줄로 알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단지 추측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성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성전 밖에서 죽을 만큼 맞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 로마의 천부장이 수하의 백부장과 군인들을 인솔하여 달려와서는 때리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에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묻습니다. 이미 현장은 소동으로 인해 바울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사태 파악이 안되니까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사실 천부장의 체포가 없었다면 아마도 바울은 그 현장에서 스데반처럼 순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상황 앞에서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시선은 두려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견된 일이었기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부장에 의해서 체포되어 죽음을 모면하게 됩니다. 당시 바울의 생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구절이 40절에 나타나는데요.
“저 사람들에게 제가 잠시 한마디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군중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했다. 무리가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죽도록 맞고도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간증입니다. 다메섹 도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열심을 내던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부르신 상급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속에는 온통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어 보입니다. 그는 주리고 목마르며 추위와 헐벗음을 당하며 견디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 동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전도자였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을 보면,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동족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다해 복음을 증거합니다. 도대체 바울 안에 있던 예수의 생명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에게 생명은 예수께서 주신 생[生]을 살라는 명령[命] 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 6: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다는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요. 죽고 사는 시간적 차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지금 이곳에서 누려집니다.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해서 이제 자신의 자랑거리는 자랑할 것이 아님을 깨닫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의 신분과 정체성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고귀했으면 지금으로 보면 바울의 출신은 대통령 집안의 출신 배경이었고, 유대교 3대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며, 학벌도 최고 자랑거리인데, 좋은 학벌과 집안 배경들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처럼 여겨졌을까요?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인생의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구원 받는데 어떤 효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뜻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임이구요. 세상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성도들의 컨디션에 따라 우리가 지닌 자랑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다해서 전하는 마지막 외침의 그 말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1933년 1월 15일 독일의 한 교회 저녁예배에서 본훼퍼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하는 자는 이미 그 속에 빠져 든 것입니다. 두려움은 악의 그물입니다. 악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혼란에 빠뜨리고, 그 다음에는 두려움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어떻게 원수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 보다 크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강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죄는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두려움은 그 당시 독일 땅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에도 지금 예배 드리는 이곳에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땅끝까지 복음의 전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버리지 않으신 것처럼 바울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바울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1.4m 높이의 돌로 된 벽을 만들어 쌓았습니다. 그곳에는 헬라어, 라틴어로 외국인은 성전과 둘러싼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 문구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 체제에 갇혀 살던 이들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이 되셔서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로빈 마이어가 쓴 Saving Jesus from the church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를 교회에서 구출하라입니다. 마이어는 입술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이제는 멈추고 예수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수고와 헌신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입술로만 경배 하는 신앙은 복음을 교회의 틀 안에만 가두는 것이고 복음의 껍데기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아는 것을 넘어 행동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에 좀더 사랑하며 살걸 그랬나, 좀더 베풀며 살아야 했나 후회하는 삶이 되면 안됩니다. 인생의 종착지에서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은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이 올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지키는 일에는 힘쓰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들의 화려한 성전에서 이미 떠났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죄와 시기심, 미움과 정죄하는 마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희생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어서, 실수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의 자리에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사명은 울면서라도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정결법으로 인해 부정한 자로 여겼던 이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심으로 그 사람의 부정함을 자신의 몸으로 옮겨 오셨습니다. 그리고 살려 내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살아갈수록 우리 앞에 문이 닫힌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성밖으로 내쳐진 듯 우리를 외롭고 고독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십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 가운데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생명에 이끌려 지속적으로 깨달으려고 달려간다고 절절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계속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에 고난이 오고 삶이 힘들어 지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다(마 5:10)하십니다. 진정한 제자는 고난 가운데서 넘어질 수 있고,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명은 다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경쟁에서 이기고 빨리 달리는 경기가 아닙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이기려는 자기욕심과 욕망의 도구도 아닙니다. 고난이 올 때에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지극히 크고 영광의 중한 영생을 얻게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 장미빛 같이 붉게 물든 십자가와 푸른 하늘처럼 높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눈물겨운 수고가 없다면 어떻게 영혼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일을 가르켜 해산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지켜야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말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남겨진 과업은 저와 여러분이 이뤄야 할 사명입니다. 한주도 사명자들이 걷는 걸음 걸음마다 주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9/3/2023 | 성령강림후 제 14주
예수의 오래된 제자 The early disciple of Jesus
사도행전 21:15-26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묵고 바울과 그 일행들은 예루살렘에 도착을 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대략 62마일(100km) 정도 됩니다. 당시에 62마일의 거리는 건강한 성인이 짐없이 걸어도 쉬운 길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0:4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를 떠날 때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까지 총 7명이 동행했습니다. 이후 마게도냐에서 누가가 합류했으니 8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이사랴 있던 제자들까지 합류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바울을 포함해서 십여명이 넘는 일행들이 모두 나손의 집으로 갑니다. 개역개정은 나손이 함께 동행한 것으로 번역했는데, 쉬운성경은 나손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당시 나손의 나이를 70세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가 한평생 예수의 길을 따른 사람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일찍부터 제자가 된 나손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가 되었거나, 구브로(키프로스) 출신인 것으로 볼 때에 AD 33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키프로스, 안디옥, 페니키아 지역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을 때 (11:20) 그 무렵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자신을 것을 손해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이 침해 받지 않는 범위를 정해 놓고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는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옛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사도 바울을 반박하기 위한 무리들이 도사리고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10여명이 넘는 바울과 일행들을 머물도록 한 것을 보면 바울의 사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손은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예수께로 온다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듣기만 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결단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것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과 계획을 깨닫고 평생을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구도자입니다. 나손이 아마도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바울과 그 일행들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 이것을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믿음생활에 정성을 들이면 들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 사랑은 섬김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지요.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는 믿음입니다. 당시 유대적 경향은 헬라파 교인들의 접대를 꺼리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손은 주위에 시선보다는 바울과 일행들에게 섬기는 일을 통해서 주님의 따뜻한 품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손은 예수의 오래된 제자로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9월이면 많은 청년들이 배움의 길을 걷기 위해 보스턴으로 오게 됩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곳에 오겠지만 익숙했던 지역을 떠나서 새로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학업이라는 큰 산을 넘는 일도 생각해 보면 만만치가 않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도 만나게 되겠지요. 낯선 땅에서 새로움을 직면하는 일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 중에 한가지는 조국과 세계를 섬길 인재를 배출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속해 온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내는 일에 오랜시간 집중해 왔습니다. 일년이라는 짧은 시간속에서도 교회와 목사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보냅니다. 누군가는 눈물의 기도로, 누군가는 기쁨과 성취로, 누군가는 묵묵히 주는 사랑으로 이땅에서 보내게 되는 여정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껏 이 땅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학업의 길에서 겪게 되는 두려움과 좌절감을 딪고 일어 날 수 있도록 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게 되면 모든 소유가 주님으로 부터 온 것을 깨닫습니다. 섬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빚지고 있음을 자각할때 비로소 시작이 됩니다. 섬김은 우리가 할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할수 있습니다. 형제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미소짓고,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도 섬김입니다. 섬김은 성도들이 행할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18 다음날, 바울은 우리를 데리고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19 서로 문안인사가 끝나자,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이루신 크고 놀라운 많은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바울은 그동안의 전도 여행의 경과를 보고합니다. 2년여 동안의 에베소 지역에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제자 양육한 사역, 에베소 지역에 일어났던 엄청난 회개운동, 아데미 신상으로 인한 소동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서의 사역들, 드로아에서의 유두고 사건, 밀레도 항구에서의 장로들과 뜨거운 눈물의 시간들, 두로 지역에서 만났던 아가보의 예언과 만류하는 이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등을 보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보고한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바울의 서신에 보면 바울의 보고 속에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로 부터 모금해온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습니다.
20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바울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21 그런데 그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을 우리가 듣기로는, 당신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이며, 우리 유대 사람의 관습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합니다. 22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 유대인 형제들은 당신이 여기 왔다는 것도 틀림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오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파송하고 이제 20여년의 세월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는 성도의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20절을 보면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탄생한 교회에 성령의 열매보다 율법과 할례에 진심인 사람들이 수만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했지만 교회 내부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려는 열성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보니 교회의 사정은 신앙의 문제로 갈등이 생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부지런히 달려와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하는데 교회 내부에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비방하는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배척하고 할례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할례를 받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할례나 율법의 준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20년 전에 유대로 부터 온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이 이방인에게도 율법준수와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쳐서 당시에 바울과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 일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고,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했던 사항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롬 2:25-29)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풍속인 율법도 할례도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과 할례로 인해 의견이 갈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던 야고보는 사도 바울에게 방법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서원한 네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자비를 들여 서원예식을 구약의 율법대로 시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제안을 순순히 허락합니다. 바울은 오히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굽힙니다. 바울은 이전에 율법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는 복음의 능력을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율법 너머의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때 자신을 비방하고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도 있었지만 비난하는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야고보의 제안에 자신을 기꺼이 양보합니다. 복음은 진리 안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논쟁하기 보다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습이 믿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를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의 편을 들기 전에 먼저 자기자신을 내려놓고 주께서 먼저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도들의 충고를 들었고,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온유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사명은 담대하고 강하면서도 때로는 겸손과 온유함을 잃지 않도록 해줍니다. 때때로 신앙생활속에서 의견이 불일치 될때가 있지요. 분쟁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떤 사람들의 편이기 전에 주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시고 십자가의 피 흘리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셔서 고통을 참으신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 안에 있을 때 교회가 하나가 됨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원리를 붙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복음을 받아 들이도록 할수 있다면 이 정도는 양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구원받은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십시요. 바울처럼 옳은 방향으로 가면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비결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랑해 주신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내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장 좋은 길, 옳다고 믿는 길을 찾아서 보스턴에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를 직면하는 것이 이 경험의 토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당시에 모든 이들은 십자가 처형을 피하고 싶고,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까지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는 교우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참된 쉼을 얻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공동체를 통해서 경험하시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배움의 가치를 제자됨에 두었습니다. 교회안의 여러 은혜의 모임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풍성해 지도록 믿음의 기초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세상보다 크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수고를 아시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두면 하나님의 나라가 삶에서 자라납니다. 사도 바울이 걷고 있는 길에서 우리는 나손을 통해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오해를 넘어 주의 사랑을 전해지는 곳에는 예수님의 빛이 밝히 비춰집니다. 취약한 이들에게 내 소유를 내어 주는 믿음의 모험에 참여해 보십시요. 주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한주도 여러분이 걷는 그 길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8/27/2023 | 성령강림후 제 13주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God’s Will and God’s Guidance
사도행전 21:1-14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려 할 자리에 서게 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네이게이션 안내에 비유하기도 하는데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가도 언제든 안내해 주실꺼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가면서 업데이트가 되어 있지 않은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은 마치 어제의 은혜로 살아가려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매일의 은혜가 없다면 낭떠러지로 인도하는 과거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목회현장은 우리 때 보다 더 어려울꺼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지나온 목회를 돌아보시며 해주시는 짧은 말씀 안에 이제는 설교자의 삶이 중요한 시대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복음의 전달자는 떨림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지요.
지난 수요일 새벽기도 설교를 준비하는데 애통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4장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증인이 어떤 사람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차별을 두신 이유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납득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십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후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게 너는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지만 아벨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는 삶이었습니다. 아벨의 삶이 참 덧없이 보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동생을 미워하여 죽이고 난 후에도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만 호소합니다. 공평하지 않는 세상을 하나님의 탓으로 여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의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단절되고 영적인 생명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의 기자가 초점을 두는 것이 아벨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더 나은 제사는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성경의 기자는 믿음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11: 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는 자신이 충분히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은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벨의 제사만 받는 하나님이 공평해 보이지 않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일들이 세상에 참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정말 공평하지 않으신 분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의 기준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가는 대로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이들을 통해서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기에 인도함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살아가고, 세상의 즐거움과 사회속에서 성공과 명예,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부터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과 그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부지런히 돌아갑니다. 그 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희생과 고난도 통과해야 할 문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어려움도 없고 평탄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의 영에 매여 인도함을 받았지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하는데 장애가 되어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했지만 주님은 너의 약함이 나의 자랑이라, 오히려 너의 실패가 나의 간증이니 너의 모습 그대로 사용하시겠다고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바울이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수천년 동안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믿고 살았는데 그들도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복음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당시 이방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이방인들 위한 서신서들을 전도여행 중에 썼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 여겼던 유대인들은 예수로 인해서 거듭나지 않으면 죄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복음이 유대인들의 감정을 거슬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서 체포되고, 감금되며, 다양한 재판을 받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보내질 상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눈물 어린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배를 타고 다소간 남쪽인 고스(Cos) 섬으로 가서, 하루 후에 로도(Rhodes)라는 이름을 가진 섬의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시점까지 그들은 소아시아의 남서쪽 끝을 돌아서 남쪽 해안을 따라 바다라(Patara)까지 동쪽으로 항해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바울은 두로까지 가기 위한 또 다른 배로 갈아 탔습니다. 약 400마일(644km)의 여행을 위해, 직접 가로질러 항해할 무역선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두로는 페니키아 지역으로 해양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조선업으로 유명하여 큰 선박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무역선을 타고 와서 두로에서 짐을 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역사 속에서 페니키아 지역의 해상 무역과 교통을 정비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 배는 구브로 끼고 직진하여 화물을 내리게 될 두로에 도착하였습니다. 두로에서 7일을 머물게 됩니다. 학자들은 바울인 탄 배가 곡물이나 과일 같은 짐들을 내리는 큰 배였을꺼라 추정합니다. 바울은 닷새동안 무역선을 타고 와서 도착한 뒤에 사도행전 15장 3절에 보면 2차 전도여행시에 페니키아(베니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 교제하였습니다. 피곤했을텐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로에서 만난 제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과 두로에 살던 제자들이 깨달은 성령의 뜻이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뜻을 해석하는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어디에 무게를 놓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7일 동안 성령에 뜻에 매여 가는 이유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내딪습니다. 바울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 이곳에서도 형제들에게 안부하고 하루를 그들과 있다가 다음날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게 됩니다.
이후 10절부터 누가는 아가보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의 손발을 묶고 성령께서 이 허리띠의 주인을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묶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절) 바울 일행 앞에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띠는 짧은 가죽 허리띠가 아니라 당시 허리띠로 사용되던 긴 천 조각이었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무당이 살풀이라도 하듯이 생생하게 몸으로 표현하면서 예언의 내용을 보여 줍니다. 바울과 함께했던 일행들은 아가보의 예언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니까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깨닫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더 강권적으로 권유합니다. ‘권하다’라고 하는 ‘파레칼루멘’은 몇번이고 거듭하여 만류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일행은 밀레도에서 바울이 말한 예루살렘에서 당할 결박과 환난을 이야기하였을 때 (20:23), 이 말을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듣고 보게 되니까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되어 로마인들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예루살렘행을 더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족이 하나님의 뜻으로 선교지에 들어 가야만 하는데 그 지역에 지진으로 피해가 있다면 선뜻 가라고 하겠습니까? 계속되는 여진이 그 지역에 예상 된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류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일행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좋은 길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길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고난이 없는 길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분별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다면 어려움이 없는 길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소망에 비교 할 수 없기에 이방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땅끝까지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1세기 동안 충분하게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후대에 와서 그의 사역과 바울의 신학이 우리들에게는 온전한 복음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구원 사역과 연결된 예언적 말씀들은 대부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철저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지를 인식하게 될 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어린 나귀 같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주님을 생각하며 그 부르심 따라 걸었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에 품었을 만한 바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겁니까? 이후 바울의 일행들은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노라”(14절)
바울은 아가보의 예언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가는 성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성도들이 하는 예언을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결박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좋은 은사이지만 교회를 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이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 깊은 기도하는 자리에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현실을 넘어 뜻을 이루는 삶도,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들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명감으로 묵묵히 걷게 될때에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결국 결박 당한 채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의 황제 앞에 서는 것은 죄수의 신분이어야만 가능했습니다. 바울이 입게 될 옷은 죄수의 옷이 아니라 바울을 보호하시는 은혜의 옷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고난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로 인도함 받는 것에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즐거움과 사람의 말을 앞세우는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고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와 같으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눈물과 쓰러짐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되고, 눈물의 자리를 통하여 외로움과 씨름했던 시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않았습니까? 가난의 자리를 통하여 이 세상의 전부를 통해서 ‘주(主)되심’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길을 가야할지 판단하기 힘들다면 성령님께 어떤 길이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이번주 제 마음에 은혜를 주었던 찬양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1절만 함께 들어보고 싶습니다.
참 고마운 친구 나의 예수님 / 나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때론 낙심해도 포기치 않음은 /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내 삶의 동행자 나의 예수님 / 나는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 같으나
늘 쓰러지나 다시 일어남도 /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 나의 실패는 나의 간증이요
나의 아픔은 나의 영광이니 /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나 가난함은 나의 상급이요 / 나 미련함은 나의 자랑이요
나 쓰러짐이 나의 고백이니 /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한주도 허락해 주신 그 부르심 따라 믿음의 여정 걸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