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021 | 새해예배/In Times Of Trouble 40

여기에도 계시는 하나님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

창세기 28:10-19

성경에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이 둘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경쟁적으로 야곱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서과 야곱은 성장하면서도 많은 일화들을 남깁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마침 야곱은 부엌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사냥으로 배가 고팠던 에서는 야곱에게 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야곱이 이상한 말을 합니다. “형이 가지고 있는 장자권(the birthright)을 나에게 주면 팥죽을 줄께요.” 보통 가정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두 형제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 때부터 두 사람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했던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에서로 위장을 시켜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삭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장자 에서에게 줄 축복을 모두 야곱에게 줘 버립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에서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만 아버지 이삭은 너에게 줄 축복이 없다고 합니다. 화가 날 대로 난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사실을 알고 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런 일이 형제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요? 그것도 이삭과 리브가 같은 경건한 믿음의 집에서 말입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말씀을 드립니다만, 야곱이 형의 분노를 피해서 삼촌의 집으로 도망가던 때부터 에서는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시선은 야곱에게 맞춰집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 나라가 네 몸 안에 있다. 두 백성이 네 몸에서 나누어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Your older son will serve your younger son).” (창세기 25:23) 또 말라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제가 아니냐? 나는 야곱을 사랑했으나, 에서는 미워했다. 내가 에서의 산악지방을 폐허로 만들고, 그의 땅을 광야의 여우들에게 넘겨주었다.” (말라기 1:2-3) 왜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을까요?

이런 말씀을 바울이 그냥 지나갈 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에 대해 말하면서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야곱을 선택하고 에서를 버린 것이 아니라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선택하시는 주권이 완전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악마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야. 누구도 너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없어.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니까!”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네 인생의 주인은 네가 아니야. 너의 삶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어. 너의 삶에 대하여 결정권을 가지고 계시는 그분의 뜻에 맞춰 살아야 해!”

오늘 읽은 창세기 28:10-19 말씀은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 가던 중 ‘루스(Luz)’라는 곳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꾼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루스’는 인가(人家)가 없는 황량한 광야였을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밤이 되었습니다. 지친 야곱은 돌 하나를 주워 그 돌을 베고 잠을 청했습니다. 야곱은 지금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초지종을 몰랐을 것입니다. “왜 그날 나는 형 에서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나는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챘을까?” “왜 나는 지금 형을 피해서 도망을 가고 있을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곱은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 아침에 도망자 되고 말았습니다.

2020년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지금의 상황을 예측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친구들을 만나 서로 반갑게 껴안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주일을 보내는 것이 일상(日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대신 온라인으로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예배 드려도 괜찮은 것인가?” 왠지 시간이 흐를수록 집중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예배 드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희 가정이 속해 있는 가족모임에서도 예배에 대한 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어서 교회에 가서 예배 드렸으면 좋겠어요.” “예배 드리는 것 같지 않고요. 집중도 안 돼요.” “예배에서 은혜를 못 받으니까 한 주일 내내 힘들어요.” 지금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루스’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자던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사다리 하나를 보았는데, 그 사다리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사다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네가 지금 자고 있는 땅을 줄 것이다. 네 자손은 땅의 티끌처럼 많아져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지며,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너와 네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올 것이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주기 전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13-15절)

야곱은 잠에서 깼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똑 같은 황량한 들판, 돌과 모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꿈 속에서 들은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지금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는 중입니다. 손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꿈 속에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꿈 속에서 느꼈던 하나님의 숨결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고 느낀 야곱은 이렇게 외칩니다. “난 잘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도 계셨구나. 이곳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로구나(What an awesome place this is! It is none other than the house of God, the very gateway to heaven)!” 야곱은 베개로 베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처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이라는 뜻으로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없었습니다. 성전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온 세상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세웠습니다. 꿈에서 깬 야곱에게 들었던 생각이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셨는데, 난 그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 묵상하다가 왜 하나님은 야곱을 도망자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바로 야곱에게 이런 깨우침을 주시려고,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 말씀을 읽게 하시려고 야곱을 도망자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야곱이 꾼 꿈은 누가 만들어낼 수 있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꿈이었습니다.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을 때만 해도 야곱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더 힘들고 더 외로웠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야곱의 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그런 곳에 계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황량한 광야에 하나님께서 계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솔로몬 때에 성전을 짓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성전에 대하여 특별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하나님이 계시는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걸어 나오면서부터 뭔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허전합니다. 비즈니스 현장으로 돌아가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공부하는 학교, 도서관, 강의실에 하나님께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일주일 내내 나 혼자 치열하게 살다가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영적인 굶주림을 채우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이란 하나님이 없는 곳이고, 외롭고 힘든 곳이고,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소일 뿐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Destroy this temple, and in three days I will raise it up).” (요한복음 2:19)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이없어 했습니다.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이 걸렸는데, 당신이 무슨 재주로 삼 일만에 짓겠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 놓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그분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 2:21-22)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말씀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 되는 그런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이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서 신령과 진정의 마음으로 예배하는 때가 오고 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요한복음 4:21, 23) 예수님의 부활이 예배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될 것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예배의 장소를 교회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불과 한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지금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오피스가, 일터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학교가, 강의실이, 연구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예배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어디서 드리느냐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예배하는 장소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하는 장소가 어디가 맞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예배 장소가 문제가 되지 않는 때가 오고 있다 (The time is coming when it will no longer matter whether you worship the Father on this mountain or in Jerusalem) (요한복음 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영(The Spirit)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온 세상이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루스’의 황량한 광야, 그리고 나와 같은 도망자가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이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통해서 “난 몰랐는데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루스’가 ‘벧엘’이 되고, ‘루스’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성경 구절 하나 인용할 텐데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지 맞춰보십시오. “In all my traveling with the people of Israel I never asked any of the leaders that I appointed why they had not built me a temple made of cedar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난 한번도 왜 나를 위해서 백향목으로 만든 집을 짓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없다).” (사무엘하 7:7) 이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은 어느 한 곳에 계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광야에 있으면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기쁘고, 내 백성이 힘든 고난의 현장에 있으면 나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기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배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온라인 예배 방식이 예배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과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도록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2021년 새해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과 과감하게 결별(訣別)하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을 과감하게 실행하는 한 해가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12/31/2020 | 송구영신예배/In Times Of Trouble 39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I Am About To Do Something New

이사야 43:18-21

지난 주일 예배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2020년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시작해서 코로나바이러스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기는 커녕 많은 나라들이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루나 이틀, 혹은 한 달이나 두 달이 아니라 무려 11개월째 인간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 이런 일이 과거에 있었던가 싶을 만큼 우리 모두는 특이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유명한 말입니다. 라틴어로는 “hoc quoque transibit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라고 하고, 영어로는 “This, too, shall pass away!” 혹은 “This too shall pass!” “This also pass away!” 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경전인 미드라쉬에 ‘다윗왕의 반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다윗왕이 궁중 세공인(細工人)에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내가 낄 반지를 만들어라. 그리고 그 반지에 내가 큰 전쟁에서 이겨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도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이 명령을 들은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반지에 무슨 글을 새겨 넣어야 할 지 몰라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현명하기로 소문난 왕자 솔로몬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그때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글귀가 바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였다고 합니다. 세공인은 이 글귀를 반지에 새겨 왕에게 바쳤는데 다윗 왕은 매우 흡족해하면서 세공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꼭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성공했을 때 너무너무 기쁘지만 그 시간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내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내가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다고 해도 그 상황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내가 언제까지 슬퍼하고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공했을 때 교만하지 말고, 낙심될 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교훈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팬데믹 같은 엄청난 재난도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또한 지나 갈 것입니다. 팬데믹 후의 인류의 역사는 한 단계 발전하고 진화(進化)할 것입니다. 물론 인류의 역사는 좋은 쪽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나쁜 것, 좋지 않은 것과는 과감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내가 그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쪽으로 나의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합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벌써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다 지나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활동하는 사람처럼 단정히 행동합시다. 난잡한 유흥을 즐기지 말고, 술 취하지 마십시오.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퇴폐적인 생활을 버리십시오. 다투지 말고 질투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죄의 본성이 바라는 정욕을 만족시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11-14) 크리스천으로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뒤로 미루지 말고 실천할 때가 되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같은 사람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는 그동안 이루지 못한 개혁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심란한 상황 속에서 2021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새해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한편 우리 마음 속에 ‘불확실성(uncertainty)’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는 먼저 이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내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불안이 있다는 것은 곧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불안을 떨쳐내는 성경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내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차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이 썼다는 시편 42편 말씀을 보세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내 속에 있는 불안을 의인화(擬人化, personification)해서 불안과 대화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still praise him, my salvation and my God) (5, 11절).” 찬송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는 좋은 도구입니다. 우리 마음이 무겁고 힘들고 불안할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읽은 이사야 43장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합니다. “아, 지난 나쁜 기억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새 일을 생각하라는 말씀이구나!”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서 이 말씀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But forget all that-it is nothing compared to what I am going to do. For I am about to do something new. See, I have already begun (이 모든 일들을 잊도록 하라. 이 일들은 내가 앞으로 할 일들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새로운 일들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시작한 일들을 보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만 발견하려고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몇 천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오는, 성경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께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그 일들이 놀랍기는 하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고 계시는 일들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새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시는 일들은 ‘some¬thing old’가 아니라 ‘something new’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요한복음 1:16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이더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그리스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 직역하면 ‘grace upon grace’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충만한지 은혜 위에 또 은혜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런 경우 영어에서는 ‘grace after grace’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만큼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또 하나님의 은혜가 줄줄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구나! 굉장하다!” 하면서 그 일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늘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새로운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중에 존 파이퍼(John Piper)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熱情)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은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이 막히면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이런 식으로 길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여기에다 한국식으로 고가도로(overpass)를 만들면 트래픽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텐데......”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까?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는 다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강을 건너시기를 원하신다.” 생각해 보니 정말 성경에는 다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다리가 되셨으니까 따로 다리라는 말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앱이나 성경 프로그램을 가지고 계시면 한번 찾아보세요. 한국말로 ‘다리’를 찾지 말고 영어로 ‘bridge’를 찾아야 합니다. 한국말로 ‘다리’를 찾으면 ‘기다리다’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사다리’라는 말도 나오고요. ‘허벅다리’ ‘넓적다리’ 이런 말들이 옵니다. 성경에는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다리를 건너서 쉽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대신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더 경험하게 되고, 그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이겨 나가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야곱 백성아, 내가 너희를 창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너희를 만들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이름을 불렀으니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너희가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며, 불 사이로 지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며 너희를 구원할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삼아 너희를 구했고,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몸값으로 넘겨주어 너희를 내 것으로 삼았다. 너희가 내게는 소중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 너희를 바꾸어 그들로 너희 대신 죽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므로, 너희가 또한 영화롭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사야 43:1-5) 

매우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이 말씀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Do not be afraid, for I have ransomed you. 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When you go through deep waters, I will be with you. When you go through rivers of difficulty, you will not drown. When you walk through the fire of oppression, you will not be burned up; the flames will not consume you. For I am the Lord, your God, the Holy One of Israel, your Savior. I gave Egypt as a ransom for your freedom; I gave Ethiopia and Seba in your place. Others were given in exchange for you. I traded their lives for yours because you are precious to me. You are honored, and I love you. Do not be afraid, for I am with you(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이름을 불렀다. 너희는 내 것이다. (여기서 구원의 뜻으로 사용된 ‘ransom’이란 단어는 몸값을 치르고 너희를 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나의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깊은 물을 지날 때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너희가 고난의 강을 건널 때 너희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고난의 불 속을 통과할 때 너희는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불꽃이 너희를 삼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자유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집트를 대가로 지불했다. 나는 너희 대신 이디오피아와 스바를 내주었다. 너희 대신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너희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바꾸었다. 너희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영광을 받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 두려워마라).”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이 말씀이 2021년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중에 ‘ransom’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반적인 의미는 보석금, 혹은 몸값입니다. 성경에서는 ‘대속물’ 혹은 ‘속죄 제물’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마가복음 10:45에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이집트, 이디오피아, 스바 이런 나라들이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머리로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말씀이지만, 요점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다른 나라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렇게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까지 희생시켜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Others were given in exchange for you. I traded their lives for yours because you are precious to me. You are honored, and I love you (너희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나는 그들의 생명과 너희를 바꾸었다. 너희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4절) 이런 성경의 말씀을 머리로만 읽지 말고 마음으로 읽고 가슴으로 읽어 보세요. 이 말씀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말씀으로, 이 말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말씀으로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2021년 새해는 이 하나님과 함께 시작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새 일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 다리를 만드는 대신 우리와 함께 어려운 시간들을 헤쳐나가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때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과 함께 2021년 새해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Do not be afraid, for I am with you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까)” 그러니 겁낼 필요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불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우리를 위해서 새 일을 계획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힘차게 한 해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12/27/2020 | 송년예배/In Times Of Trouble 38

팬데믹에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 God’ Word In The Midst Of A Pandemic

마태복음 10:29-31, 누가복음 13:1-5, 로마서 8:28

오늘은 일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주일입니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시작해서 코로나바이러스로 마치는 해가 되었습니다. 몇 몇 회사에서 백신이 나왔고 접종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리는 가운데 미국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한국도 감염자들이 폭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변이(變異)가 나왔다고 해서 걱정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변이된 코로나바이러스는 원래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전파력이 훨씬 강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이 1,800,000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때도 전세계적으로 감염자가 나왔습니다. 감기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이다가 폐렴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환자의 피부에서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검은 빛으로 변해 죽어가는 병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사망자 수가 50,000,000명이었습니다. 사망자 수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1918년과 2020년은 전혀 다른 세상이니까요. 지금은 의학적인 지식의 수준이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도 발달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코로나바이러스로 1,800,000명이 죽었습니다. 이 숫자는 병원에서 확인된 사망자만 카운트한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검사도 받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을 감안하면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봐야 합니다. 

팬데믹 초기에는 조심스럽게 성찰의 말들이 나오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팬데믹 기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더 이상 성찰의 말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꼭 들어야 세 개의 성경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 10:29-31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을 때 제자들은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관계하신다. 그런데, 너희들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들인데, 너희들이 받고 있는 박해를 하나님께서 모르시겠느냐?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여기서 참새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생명을 말합니다.

“God is in control”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통제(統制)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만든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I form the light and create darkness, I bring prosperity and create disaster; I, the LORD, do all these things).”(이사야 45:7) 우리가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믿고 고난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찾는 이유는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의 통제 속에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는 팬데믹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 팬데믹을 보는 크리스천의 시각은 어떤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에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실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서로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팬데믹에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사망자들이 나오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팬데믹으로 사망한 사람이 몇 명이라고 객관적으로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자 속에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고, 나의 친구가 있을 때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미 사망자 수가 1,800,000명에 육박하는 이 엄청난 일에 하나님께서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관계하시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엄청난 일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어서 답답할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깊은 뜻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은 참으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마치 깊고 깊은 심해(深海)와 같아서 얼마나 깊은지 바닥을 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말씀은 누가복음 13:1-5입니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18명이 깔려 죽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마치 이번 팬데믹으로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선하게 살지 않았던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조심성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불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거든요? 여러분은 누구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내 삶을 반성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좀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죽음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성경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기 위해서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들이 죽게도 하셨습니다. 바로의 특수 군대가 모두 홍해 바다에 빠져 죽게도 하셨습니다. 모압, 에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열세했던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서의 삶을 이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로마서 9:11-13). 하나님은 첫째 아들 에서를 버리고 둘째 아들 야곱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 전부터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하지 않습니까?(창세기 25:23, 로마서 9:12).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걸 아세요?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다. 에돔 땅 위에 내가 신발을 던질 것이며, 블레셋에 대해 내가 큰 소리로 승리를 외친다.” (시편 60:8, 108:9)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Moab, my washbasin, will become my servant, and I will wipe my feet on Edom and shout in triumph over Philistia.” 여러분, 모압 에돔, 블레셋은 엄연히 주권을 가진 나라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 나라들을 목욕통으로, 신발장으로, 늘 전쟁에서 지는 역을 맡은 나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번 팬데믹으로 죽은 1,800,000명에 이르는 사망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 친구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죽음이 전혀 가치 없는 죽음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벌써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엄숙한 교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셨고, 삶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누가복음 13:34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그 때 예수님께서 우신 이유는 이제 조금 있으면 멸망할 예루살렘이 그것을 모르고 회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은 교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 저는 그 예수님의 눈물 속에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희생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안타까워하셨던 마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2,000년 전에 예수님의 흘리셨던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 주신 분입니다. 성경은 그 아들을 ‘begotten Son’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외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희생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자기 외아들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픔과 눈물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말씀에서 자기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께서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서 8:31)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큼 소중한 존재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희생하시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더 이상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로마서 8:28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계하고 계십니다. 빛도, 어둠도, 재앙도 모두 하나님께서 관계하시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분입니다. 저는 이것이 팬데믹을 보는 성경적인 시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이 설교를 하고 있는 저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팬데믹이 이 세상을 나쁜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서 팬데믹이 끝나서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 제1차 대전을 겪고,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류는 엄청난 가치와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도 우리의 삶을 그렇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팬데믹과 같은 엄청난 재난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Fran Bunn이라는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God can bring blessings out of COVID-19 pandemic(하나님은 코비드19 팬데믹을 통해서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다)”입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COVID-19 is a bad thing, but there are good gifts that God can bring even from this. As I think about my own life, and maybe this is true for you, through COVID-19, I have been reminded that I do not control my life. COVID-19 has shown me that I am utterly and completely dependent on the living God. If I think I am in control of things, that is merely a pleasant illusion.” 어떻습니까? 나의 삶을 내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제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교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C. S. Lewis가 많은 책을 썼습니다만, 제일 힘들게 쓴 책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1942)’라고 합니다. 그만큼 그 책을 공을 들여 썼다는 말입니다. 그 책은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Wormwood)’를 교육한 책입니다. 어떻게 교회를 파멸시키고 크리스천들의 믿음을 파멸시킬 수 있는지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내용의 책입니다. ‘웜우드’가 관리하던 한 사람이 최근에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크루테이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다. 현재 교회는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니까.” 루이스가 보고 있던 교회는 교회 안에 진실한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없고, 참된 회개가 없고,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겸손을 가장한 위선자들이 넘쳐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큰 건물, 많은 교인 수, 엄청난 교회 예산, 이런 것들에 마음을 쓰고 있는 한 교회는 이미 악마의 협력자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팬데믹을 겪고 있으서도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는 목사나 교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a pleasant illusion’이 될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을 자랑하던 때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교회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교회에 대한 설교는 2021년 1월 3일 새해 주일 설교로 이어집니다.) 

 


12/20/2020 | 크리스마스예배/In Times Of Trouble 37

목자들의 이야기 The Story Of The Shepherds

누가복음 2:8-19

오늘은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팬데믹 상황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벌써 우리의 의식구조와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new normal’이 되고 있는 때에,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탄예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말씀이 신명기 8장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사십 년 동안, 여러분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시오. 주께서 그리 하신 까닭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드시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가, 여호와의 명령은 지키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소.” (2절) 광야생활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이 광야생활을 통해서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너희가 겸손하게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에 있었던 출애굽 때의 상황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지금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은 누구보다도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라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팬데믹을 핑계 대면서 나에 대해 감사할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있는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성탄의 은혜와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이 어느 찬송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이 찬송을 들으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이 찬송은 181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오스트리아의 ‘오벤도르프 (Obendorf)’라는, ‘잘스부르크(Salzburg)’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의 한 성당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습니다. 그 성당의 신부였던 ‘조셉 모르 (Joseph Mohr)’가 가사를 쓰고, 그 교회 성가대 지휘자였던 ‘프란츠 그루버 (Franz Gruber)’가 곡을 썼습니다. 교회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도록 심플한 멜로디로 작곡한 노래입니다. 이 찬송은 현재 300개 이상의 언어로 불려지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되었습니다. ‘오벤도르프’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고 합니다. 24일 전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거나 부르는 일도 없는, 인구 3,000명의 작은 마을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여행객들과 마을 주민들이 ‘Silent Night Chapel’에 모여 예배 드리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며칠 전에 한 기사를 읽었는데요.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라는 시리즈 기사였습니다. ‘레오폴트 코어(Leopold Kohr, 1909-1994, 오스트리아)’라는 사람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레오폴트 코어’는 경제학자이며, 법률가 (Jurist)이며, 정치학자이며, 철학자입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1937년에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면서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의 친구가 되었고, 2차 대전 중에는 뉴욕 저널에 반 히틀러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 파시즘과 싸웠습니다. 그가 쓴 대표작은 ‘국가의 붕괴(The Breakdown of Nations)’라는 책입니다. 그의 주장은 중앙집권적인 거대한 정부는 필요 없고 소규모의 사회조직을 구성하여 공동체적인 기능만 유지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구 10만명 정도의 대학 도시인 잘스부르크나 인스부르크(Innsbruck) 정도의 소도시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규모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서 인간의 삶과 자연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고향 잘스부르크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레오폴트 코어는 1983년에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킨 사람들에게 주는 Alternative Nobel Prize를 받았습니다.

이 글을 쓴 박홍규씨의 주장은, 이 레오폴트 코어의 고향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고 조용한 마을 ‘오벤도르프’라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 ‘오벤도르프’에서 불후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나왔고, 이 작은 마을에서 레오폴트 코어 같은 사상가가 나왔고, 바로 옆 마을 잘스부르크에서 모짜르트가 나왔고, 그리고 레오폴트 코어에게서 영감을 받은 프리드리히 슈마허 (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 영국) 같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슈마허가 1973년에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라는 책은 그가 레오폴트 코어의 집에 머물면서 썼다고 할 정도로 슈마허는 레오폴트 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큰 건물이나 호텔도 없고, 번쩍번쩍한 쇼핑 센터도 없는 작은 마을, 자동차 보다는 자전거가 어울리고, 걷는 것이 어울리는 작은 계곡의 마을 ‘오벤도르프’에서 처음 불려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지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밤에 구세주를 찬양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시끄럽고 화려한 파티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파티 없는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목자들의 이야기’는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무대는 베들레헴 근교의 들판입니다. 한 밤중에도 목자들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목자들이 지키고 있는 양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부자들의 소유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양들일 것입니다.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이 목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 무서워했습니다. 천사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10-12절) 천사들이 말을 마치자 하늘 군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4절) 사방이 조용해졌을 때 목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합시다.” (15절) 목자들은 서둘러 그 밤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목자들이 이 아기에 대하여 들은 것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 목자들의 이야기 속에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는 성탄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예수님 당시에 목자의 사회적인 지위는 어떠했는지 잘 모릅니다. 한마디로 목자는 매우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작년 ReNEW에 세미나 강사로 왔던 김동문 선교사의 글에 의하면 그 당시에 목자는 ‘극한 직업 (extreme job)’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는 아주 천한 직업이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 독일)의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Jerusalem in the Times of Jesus)>에 의하면, 당시 목자는 낙타몰이꾼, 당나귀몰이꾼, 마부, 뱃사공, 의사, 푸줏간 주인 등과 함께 천직으로 취급받았다. 베들레헴 지역의 양떼들은, 대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 부자들의 것이었다. 양떼의 주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양떼를 지켜야 하는 목자들의 삶은 다분히 독립적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 거친 직업이었다. 광야의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켜야 하고, 양을 훔치는 도둑들로부터 양을 지켜야 하는 목자의 직업은 낮과 밤, 뜬 눈으로 지내야 하는 험한 직업이었다. 이런 평판 때문에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들이었고, 목자의 사회적 신분은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들었던 증인으로 목자들을 내세운 것은 하나님의 충격적인 인물 캐스팅이었다.”

재미있는 글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목자라는 직업이 나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목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미디언 광야로 보내 40년간 목자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가업(家業)으로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목자를 고용해서 양을 치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자는 남을 속인다, 남의 것을 훔친다, 거짓말을 잘한다는 식의 사회적인 편견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목자의 사회적인 신분은 ‘죄인’이었습니다.  재판장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을 만큼 신용이 없는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자들에게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목자들이 들은 성탄 메시지는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준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1969-현재)가 부른 ‘Jesus Born On This Day(오늘 예수께서 나셨네)’가 생각납니다. 이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가 어린이 합창단과 같이 부른 아름다운 성탄 노래입니다. 

(1절) 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Today the glory of God shines everywhere/For all the world (오늘 세상에 한 아기가 나셨어요/오늘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비쳐요./온 세상을 위해)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ight and salvation/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오, 예수님이 오늘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이예요/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예요)

(2절) 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Behold the Savior is born/Sing of His love to everyone (보세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셨어요/보세요. 구세주가 나셨어요/모든 사람을 위한 그의 사랑을 노래해요)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avenly child in a manger/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ord and Savior (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구유에 누인 하늘의 아기/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예요)

(3절) 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Today the light of His birth/Fills us with hope/And brings peace on Earth (오늘 그를 기뻐해요/오늘 그의 탄생의 빛이/희망으로 우리를 채워요/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주네요)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ight and salvation/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빛이고 구원이예요/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예요)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입니다. 이 성탄 소식은 누구나 다 듣고 기뻐해야 하는 소식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탄절을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Let the Christmas catch you in a good mood!” 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May the magic of Christmas fill your heart all year long!”이란 말도 있고, “As for me, I like to take my Christmas a little at a time, all through the year.” “With joy-filled hearts, let’s continue the Christmas celebration all season long.” 어느 누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팬데믹으로 고생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크리스마스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들의 우울한 마음을 단번에 날려 줄 기쁜 소식입니다.

셋째로, 천사들의 메시지에 이어 하늘의 군대 (the armies of heaven)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14절) 이 말씀에서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실까요?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FKCC 교우들이, 그리고 지금 팬데믹으로 고생하는 온 세상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평화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성탄의 소식을 들은 목자들이 그 시간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다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목자는 사회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재판장에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목자들이 자기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그런 것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현장을 떠나면 양들은 누가 지킬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목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서 베들레헴 마을에 가서 천사들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목자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All who heard the shepherds' story were astonished).” (18절) 'astonished'라는 말은 단순히 놀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번개를 맞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놀랐다는 뜻입니다.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 앞에서 목자들에 대한 어떤 불신도, 편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자들에게서 나는 양 냄새에 코를 막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이 성탄의 메시지를 듣는 우리에게도 모든 편견과 불신들이 해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12/13/2020 | 대강절 셋째 주일/In Times Of Trouble 36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라 Go, Tell The People What You Have Heard And Seen

마태복음 11:1-11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희망의 촛불과 평화의 촛불에 이어 오늘은 기쁨의 촛불을 켰습니다. 희망이 없고, 평화가 없고, 기쁨을 없던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으로 말미암아 희망과 평화와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사랑의 촛불을 켭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 줌이 마땅합니다 (We know what real love is because Jesus gave up his life for us. So we also ought to give up our lives for our brothers and sisters).” (요한일서 3:16)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참 사랑을 안 사람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지시하기를 마치시고,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그 곳을 떠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1절)”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생생하게 그 때 상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지시(指示)’라는 말씀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번역성경들을 보면 ‘지시’ ‘명령’ ‘분부’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두 위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무슨 일을 시키는 강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들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Jesus had finished giving these instructions to his twelve disciples”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할 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이런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제자들을 교육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선생님은 오직 한 분이고,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인데, 하늘에 계시다. 너희는 ‘지도자’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뿐인 그리스도시다.” (마태복음 23:8-10) 세상 사람들은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지도자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지만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선생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불릴 사람도 없고, 지도자라고 불릴 사람들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같은 동일선상(同一線上)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must have the same attitude that Christ Jesus had.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Instead, he gave up his divine privileges;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제가 처음으로 NLT 성경을 읽고 놀랐던 것이 ‘as something to cling to (뭔가 거기에 집착할 것으로)’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난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는 교만한 말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시를 받고, 모욕을 받을 때도 “난 하나님의 아들인데, 감히 나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예수님에게서 이런 ‘겸손’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신 그 시간에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인지 알아 오라고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오신다고 했던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가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6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심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그렇게 물어보라고 한 것은 확인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에게 확인이 필요했던 이유는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그려왔던 메시아 상과 너무 달랐습니다. 요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용사의 모습으로 오실 메시아를 꿈꿔왔는데, 막상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겠는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 시대가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여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고,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귀로 들었습니다)” 라고 너희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회복(restoration’입니다. 원래 자리로 돌려 놓는 것입니다. ‘희년(禧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년’은 50년째 되는 해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제도입니다. 종은 자유인으로 돌아가고, 땅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그래서 이 ‘희년’을 ‘Jubilee (기쁨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4:19에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NIV)”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에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가 곧 ‘희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희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21)”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설교들 듣고 나사렛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의 권위에 한 번 놀랐고, 그의 설교의 내용에 두 번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게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었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잘못된 삶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삶이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참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는데,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보지 못하는 사람을 소경, 맹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봉사라고도 불렀습니다. 심청이의 아버지 이름이 심봉사 아닙니까? 판소리 심청전의 클라이맥스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심황후 거동 보아라. 이 말이 지듯 말 듯 산호주렴을 거들 처 버리고 버선 발로 우루루루루 부친의 목을 안고 아이고 아버지, 심봉사 깜짝 놀라 아버지라니 누구요. 아이고, 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 무남독녀 외딸 하나 물에 빠져 죽은 지가 우금 삼년인디, 이것이 웬 말이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인당수 풍낭 중에 빠져 죽던 청이가, 살아서 여기 왔소. 어서 어서 눈을 떠서 소녀를 보옵소서. 심봉사가 이 말을 듣더니 어쩔 줄을 모르난디, 에이 내 딸이라니. 아니 내 딸이라니. 내가 죽어 수궁천지를 들어 왔는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이것 참말이냐.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 인고.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아이고,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제. 아이고 갑갑하여라. 어디 내 딸이면 좀 보자. 눈을 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허더니 만은, 그저 두 눈을 번쩍 딱 떴던가 보더라. 옳지 인제 알것구나. 내가 분명 알것구나. 내가 눈이 어두워서 내 딸을 보지 못했으나 갑자사월 초파일날 꿈속에 보던 얼굴 분명헌 내 딸이라. 죽은 딸을 다시 보니 인도 환생을 허여는가?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꿈과 생시 분별을 못허것네. 어제까지만 해도 맹인이 되여 지팽이를 집고 다니면 어데로 갈 줄 아느랴. 올 줄을 아느랴. 오늘부터는 새 세상이 되었으니, 지팽이 너도 고생 많이 허였구나. 너갈데로 잘 가거라. 피루루루 내던지고, 얼시구나, 절시구나, 좋구나, 지화자 자자자 좋을시고.”

심봉사가 눈을 떠서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본 것이 이렇게 기쁜데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전에는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하여 알았습니까?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았습니까?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를 알았습니까? 사명을 알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비로소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회복의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삶에 희망이 생기고,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예수님 때문에 기쁨을 알게 되고,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기쁨과 감사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데비 분 (Debby Boone, 1956-현재)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데비 분은 ‘You Light Up My Life (내 삶을 밝혀 준 당신)’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입니다. 이 노래로 빌보드 차트에 10주 동안 #1 자리를 지켰습니다. 400만 장이 넘는 앨범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8년에 Grammy Awards ‘The Best New Artist’ 상을 받았습니다.

So many nights I'd sit by my window (수많은 밤을 창가에서 기다렸어요)

Waiting for someone to sing me his song (그의 노래를 불러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So many dreams I kept deep inside me (내 안 깊은 곳에 두었던 수많은 꿈이 있었죠)

Alone in the dark but now you've come along (홀로 어둠 속이었지만 이제 당신이 내게 왔어요) 

And you light up my life (그리고 내 삶을 밝혀주었어요)

You give me hope to carry on (나에게 간직할 희망을 주었죠)

You light up my days and fill my nights with song (당신은 나의 낮을 밝혀주고, 나의 밤을 노래로 채워주었어요)

매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가사입니다. 데비 분은 지금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데, 지금도 현역 가수로 활발하게 공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Episcopal Church의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데비 분의 삶에 불을 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불을 밝혀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요한의 삶을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요한을 그렇게 칭찬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요한이 철저하게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따라 돌 듯이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하고요. 그 때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He came right out and said, ‘I am not the Messiah.’” (요한복음 1:20, 3:28)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을 많이 소유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앉게 되어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아름다워지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분인지, 그를 알고 난 후에 내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우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희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대강절 촛불이 환하게 켜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