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1/1/2020 | In Times Of Trouble 3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2) Don't Be Afraid. Just Have Faith
마가복음 5:22-24, 35-42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부모를 주셨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점에서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있는 어촌입니다. 어촌이지만, 가버나움에 'Via Maris (바닷길)'이라는 무역로가 지나갑니다. 대상들이 여기서 쉬어가기도 하고, 가지고 온 물건들을 사고 팔기도 합니다. 가버나움은 단순한 시골 어촌이 아니라 세계가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썼는데, 그 글의 요지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시골 어부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 12살된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병에 걸렸는지 그 딸의 생명이 위독합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 말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he saw Jesus, he fell at his feet, pleading fervently with him. ‘My little daughter is dying,’ he said. ‘Please come and lay your hands on her; heal her so she can live.’” (22-23절) 어떻습니까 딸에 대한 아버지 야이로의 사랑에서 죽어가는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까지 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라왔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12년 동안 ‘혈루증’에 걸려 고생하던 한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율법에는 사람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경우 부정하다 (unclean)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건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되도록 율법에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만지는 물건들이 부정(不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병이 나았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돌아서서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5:30) 이 여자는 두려워 떨며 자기가 한 일을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라.” (5:34)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누군가 그 딸이 죽었으니까 집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자기 딸이 죽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자기 집으로 가는 야이로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무시하시고 (overheard),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여라 (Don't be afraid. Just have faith).” (36절)
여러분, 지난 주 설교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의 자녀들을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실까요? 바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사로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금방 가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장례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Didn't I tell you that you would see God's glory if you believe)?” (요한복음 11:40) 바로 이 말씀을 하시려고 그랬습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홍해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출애굽 행렬을 돌이켜서 홍해 바다 앞에 진(陣, camp)을 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두려워하지 마시오! 굳게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베푸실 구원을 보시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시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워 주실 것이오 (Don't be afraid. Just stand still and watch the LORD rescue you today. The LORD himself will fight for you. Just stay calm) (출애굽기 14:13-14)”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설정 (set up)을 하신 것입니다.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짜서 음모를 꾸미는 것을 설정(設定)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God’s conspiracy (하나님의 음모)’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달라스 윌라드 (Dallas Willard)는 ‘하나님의 모략 (The Divine Conspiracy)’라는 책을 써서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쉬운 말씀같이 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기만 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병에 걸렸지만 나을 줄로 믿습니다” 이런 뜻으로 이해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믿기만 하라는 말은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로,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 (God is in control)을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나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통제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omnipotent God)’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계신가요?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네게 은혜를 베푸신다. 네가 아이를 임신하게 될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저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지 못하실 일이 없다 (For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 (누가복음 1:37)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신다는 것 아닙니까? 나의 삶에 간섭하신다는 것 아닙니까? 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인도하신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전지하신 하나님 (omniscient God)’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갔을 때 열 일곱 살 어린 나이였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 어린 요셉이 어떻게 이집트에서 그렇게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너는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이 없다. 하나님은 너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잊지 마라!” 아버지 야곱의 교육이 요셉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 덕분에 요셉의 삶은 형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께 배운 믿음을 가지고 유혹의 시간을 이겨내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The LORD was with him and caused everything he did to succeed.” (창세기 39:2, 3, 23) 요셉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의 생에 개입해 들어오셔서 그를 형통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omnipresent God’입니다. 구약 요나서의 메시지는 그 당시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교에게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켜버렸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은 유대나라에만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나서를 읽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온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클레아몬트 신학교에 다닐 때 일입니다. 1984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왔지만 들을 수 있는 수업이 많지 않았습니다. Advanced class가 많았고요. 처음 입학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수업은 설교학과 희랍어, 그 외 한 과목이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희랍어 클래스는 희랍어 원문을 놓고 영어로 번역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희랍어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클레아몬트에 와서 영어로 희랍어를 공부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클래스에서 열심히 하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학기말이 되었는데, 저의 선배 한 사람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공항에 라이드를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라이드 줘야 할 시간이 딱 희랍어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 시간이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전날 그 선배가 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희랍어 시험 문제를 알려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제가 별 반응을 안 보이니까 재미가 없었는지 희랍어 교수 책상 위에 시험 문제지가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때 교수실 청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 열쇠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저녁 시간에 그 교수실에 청소를 하러 들어갔는데, 정말 책상 위에 시험 문제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시험 문제가 보이지 않도록 엎어 놓았더라고요. 시험지를 보는 순간 제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아십니까? 제 속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쾅쾅쾅’하고 들리더라고요. 제가 얼마나 유혹을 받았는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희랍어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래도 유혹을 이기기가 어렵더라고요. 저는 지금도 어떻게 그 교수실을 뛰쳐나왔는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저를 지켜주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보고 계신다는 제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말은 장차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 혹은 ‘정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는 이미 하나님께 내 삶을 바쳤고, 이제는 이 땅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주님이 바로 정의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그 날에 주님은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6-8)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평생 바울을 지켜 주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살지 않습니다.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서 삽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삶을 판단하시는 그분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 있는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과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영어로 “I believe in God”이라고 말하잖아요? 사전에서 이 말을 찾아봤더니 이렇게 설명하더라고요. “Believe in means to have faith that something exists. You believe in something because you have faith that it exists, even though you may never have seen or experienced it.” 이 설명이 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비록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10/25/2020 | In Times Of Trouble 29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1) Don't Be Afraid. Just Have Faith
마가복음 5:22-24, 35-42
오늘 본문 말씀은 2,000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가버나움의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예수님께서 살려 내신 사건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지식과 과학과 의학이 발달했습니다. 과거에 고치지 못했던 질병들을 이제는 쉽게 고칩니다. 지금도 결핵으로 고생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선진국에서는 결핵으로 죽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치료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병 (leprocy)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그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서운 병도 치료약이 나와서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병은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바이러스인데, 정말 예상치 않았던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인간에게 감염이 되었습니다. 치료약이 나오기 전에 급속도로 퍼지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코로나바이러스도 결국 멀지 않아 치료약이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인류에게 죽음의 문제는 여전히 손도 대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세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주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 Everyone who lives in me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ever die) (요한복음 11:25-26)”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정작 이 말씀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 내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인이었습니다. 미리 보여주는 ‘전조(前兆, foretoken)’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해결하신 분이니,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무슨 문제든지 다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극단적인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것은 제가 성경에서 발견한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놀라운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게 하셨을까요? 성경 속에 답이 있습니다. “Remember how the LORD your God led you through the wilderness for these forty years, humbling you and testing you to prove your character, and to find out whether or not you would obey his commands.” (신명기 8:2) 왜 하나님은 광야에서 굶주림에 지쳐 절망에 빠진 자기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을까요? 성경 속에 답이 있습니다. “He did it to teach you that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rather, we live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the LORD.” (신명기 8:3) 어떻게 보면 이 간단한 사실 하나를 깨닫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나는 날마다 하늘에서 내렸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날마다 먹을 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아,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구나! 우리가 힘들게 일해서 그 대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있구나!”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나사로에 대한 말씀도 그렇습니다. 나사로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도 예수님은 즉시 나사로에게 가지 않고 이틀이나 지체하셨습니다. 막상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나 되어 사람들은 장례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으로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오늘 회당장의 딸에 대한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라가는 바람에 빨리 가시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24절). 공교롭게도 길 가다가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가 뒤에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일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12년 동안이나 몸에서 피가 흘러 나가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 다니다가 가진 돈을 다 써버린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떠는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라 (34절)” 이 여자의 일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고 그 사이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말씀을 읽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일도 예수님께서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지체하시는 바람에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23절)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입니다. 이 딸은 12살 된 회당장의 외동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8:42).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회당장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집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는 사람들을 진정시키시면서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The crowd laughed at him) (40절).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어떻습니까?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사업을 했던 둘째 아들이 사업이 잘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이 둘째 아들은 돈 벌고 사는 재미에 빠져 영영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큰 흉년 (a great famine)이 든 것입니다. 흉년으로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비지니스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사업은 망하고, 돈은 떨어지고, 친구들은 모두 그를 떠나고, 생계 유지가 막막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때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용기를 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도 둘째 아들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도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성경 말씀을 여러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출애굽기 11:2 말씀입니다. “Order the Israelites to turn back and camp by Pi-hahiroth between Migdol and the sea. Camp there along the shore, across from Baal-zephon (이스라엘 백성에게 뒤로 돌아서 비하히롯 앞에서 진을 치라고 말하여라. 그 곳은 믹돌과 홍해 사이이며, 바알스본 맞은편의 바닷가이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루트를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하히롯에 진을 쳤습니다. 비하히롯 앞에는 홍해 바다가 있었고, 홍해 바다 건너편에는 바알스본이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진을 치자 마자 이집트의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로 끌어 내어 죽이려는 것이요?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소?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훨씬 낫소.” (출애굽기 14:11-12)
제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똑 같은 일을 하고 계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희망적인 일들도 많이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희망적인 일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 힘과 능력으로 그런 일이 생기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일들이 일어날 때는 다릅니다. 그 절망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어 (Søren Kierkegaard, 1813-1855)를 아시지요? 이 사람은 시인이며, 동시에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현대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대표작 중에 ‘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Unto Death, 1849)’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Either/Or, 1843)’ ‘두려움과 떨림 (Fear And Trembling, 1843)’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When there’s no hope or future, and no logical reason to keep going at all… It’s precisely then that you experience faith (희망도 미래도, 또 계속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을 때, 바로 그 때가 정확하게 믿음을 경험할 수 있는 때이다).” “There are times that the only available transportation is leap of faith (오직 이용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이 믿음의 도약 밖에 없을 때가 있다).” “Leap of faith- yes, but only after reflection (믿음의 도약은 오직 반성이 있은 후에야 가능하다).”
병원에 가면 채플이 있습니다. MGH 같은 세계적인 병원에도 채플린이 있고, 기도실이 있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는 사람은 잘 채플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 희망이 적은 절망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금방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지체하셨습니다. 금방 가서 병을 고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절망하도록 하시는 이유는, 키에르케고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믿음의 도약 (leap of faith)’을 위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삶에 절망이 있고, 실망할 일이 있고, 걱정이 있고, 근심할 일이 있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36절)” 이 말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0/18/2020 | In Times Of Trouble 28
목적이 이끄는 믿음 The Purpose Driven Faith
베드로전서 1:3-9
조금 전문적인 말씀입니다만, 설교학에서 중요한 것은 ‘the point of contact (접촉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말씀과 이 설교를 듣는 우리 사이에 무슨 ‘접촉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relevancy (연관성)’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접촉점’이 있어야 성경 말씀이 마음에 와 닿고, ‘접촉점’이 있어야 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한 시기를 대략 AD 64-68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의 대 화재가 AD 62년에 일어났습니다. 네로 (Nero, AD 54-68년 재위) 황제는 그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려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박해가 한창이던 AD 68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베드로전서의 기록 연대를 도미티안 (Domitian, AD 81-96년 재위) 황제 때나 트라얀 (Trajan, AD 98-117년 재위) 황제 때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두 황제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했습니다. 학자들이 이렇게 베드로전서 연대를 뒤로 보는 이유는 베드로전서가 고급 희랍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도행전 4:13) 베드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전서가 그 당시 크리스천들이 받았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국을 떠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로마로부터의 박해를 견디며 믿음을 지켜야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들은 몰래 ‘카타콤 (catacombs)’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카타콤’은 지하 공동묘지 (an underground cemetery)입니다. 그 때 크리스천들이 느꼈을 불안과 공포, 두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마 인류 역사에 이런 때가 있었는가 싶습니다. 벌써 정상적인 활동이 제한된 지 8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단순히 집에 있어서 답답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상적인 비지니스가 안 되니까 문을 닫는 가게들이 속출하고,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속출하고, 살 길이 막막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이런 시간이 끝이 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를 우울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과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만나는 점 (the point of contact)’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난 속에 있었던 크리스천들을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했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맞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 나가야 하는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가던 1세기의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는 먼저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는 ‘산 소망 (a living hope)’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헛된 소망이나 죽은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산 소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려고 준비해 두신 축복을 소망합니다. 이 축복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으며, 결코 썩거나, 그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든든히 지켜 주셔서, 구원의 날이 이를 때까지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4-5절)
우리가 이 세상 무엇에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그 소망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킬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소망한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산 소망’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소망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썪거나 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산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실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산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든든히 지켜 주시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눈앞에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겠지만 기뻐하십시오.” (6절) 당장에 눈 앞에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있고, 눈 앞에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산 소망’을 붙드는 사람은 이 어렵고 힘든 일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살 때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힘들고 괴로웠는데,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면 나의 삶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Man’s Search For Meaning’이라는 책을 보셨습니까?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 텐데, 우리 말로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런 제목으로 번역했습니다. 빅터 프랭클 (Victor E. Frankl, 1905-1997, 오스트리아)이라는 신경 정신의학과 교수 (professor of neurology and psychiatry at the University of Vienna Medical School)가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세계 제 2차 대전 중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포로들의 태도와 그리고 날마다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는 사형수들을 보면서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후에 ‘로고테라피 (logotherapy)’라는 이론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 말로 ‘의미 요법’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네요. “한 개인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힘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로고테라피’의 중요한 컨셉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For the meaning of life differs from man to man, from day to day, from hour to hour. What matters, therefore, is not the meaning of life in general but rather the specific meaning of a person's life at a given moment (삶의 의미란 사람마다, 날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서의 삶의 특별한 의미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In some ways suffering ceases to be suffering at the moment it finds a meaning such as the meaning of a sacrifice (고난이 의미 있는 고난으로 다가올 때, 예를 들면 고난이 희생의 의미 같은 것으로 다가올 때는, 고난이 멈추는 때도 있습니다).”
플랭클의 이 말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눈앞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겠지만, 이 시험들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수한지 알아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금보다도 훨씬 귀합니다. 금은 불에 의해 단련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순수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6-7절) 베드로는 지금 크리스천들이 당하는 고난은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 세상을 향해서 선포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where I am going. And when he tests me, I will come out as pure as gold).” (욥기 23:10) 금과 은을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녹이면 순금과 순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테스트하신 후에 나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욥의 당당한 선언입니다.
혹시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을 통해서 나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계신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의 의미 중에 분명히 이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너는 나를 여전히 신뢰하며 나를 예배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시험을 잘 이겨내고 순수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고난 받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여러분의 믿음에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우리의 믿음의 목적이 무엇인지, 내가 왜 하나님을 믿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설교 제목을 ‘The Purpose Driven Faith (목적이 이끄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릭 워렌 (Rick Warren)이 쓴 책 ‘The Purpose Driven Life (목적이 이끄는 삶)’와 비슷합니다. 5개의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이 목적을 따라 살아야 올바로 살 수 있다는 것이 그 책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미 2,000년 전에 베드로는 고난 받는 크리스천들에게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고 있고, 여러분의 마음은 설명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 바로 여러분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기쁨이 이미 여러분에게는 주어졌습니다 (You love him, although you have not seen him, and you believe in him, although you do not now see him. So you rejoice with a great and glorious joy which words cannot express, because you are receiving the salvation of your souls, which is the purpose of your faith in him).” (8-9절)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 있는 일은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이 크면 클수록, 그 목적이 귀하면 귀할수록, 우리는 더 큰 어려움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없는 일은 금방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 믿음생활의 목적은 ‘영혼의 구원 (the salvation of the soul)’입니다 (9절). 우리 영혼이 즐거워하면 몸은 좀 힘들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힘들면 삶이 힘들어집니다. 삶이 힘들고, 믿음생활이 힘들수록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을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베드로가 2,000년 전에 고난 받는 크리스천들에게 했던 충고입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베리아의 한 형무소에 수녀들이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복을 벗고 죄수복으로 갈아 입으라는 명령을 수녀들이 듣지 않는 것입니다. 형무소 당국은 수녀들이 목욕을 하는 동안 옷을 죄수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수녀들은 죄수복으로 갈아 입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형무소 측에서는 수녀들을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 속에 떨게 했습니다. 그러면 죄수복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수녀들은 추위를 겁내지 않고 알몸으로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의사가 와서 당신들 그러다가 모두 얼어 죽는다고 충고했지만, 수녀들은 듣지 않고 계속 기도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수녀들의 몸은 파랗게 얼기 시작했습니다. 형무소 당국은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 싶어 그들을 감방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수녀들은 눈길을 걸어 감방으로 들어가면서 오래된 그레고리안 멜로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노래했습니다. 감방에 들어온 수녀들은 다른 죄수들이 건네 주는 담요를 몸에 걸쳤습니다. 수녀들이 맨몸으로 추위 속에 떤 시간은 모두 6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도 앓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형무소의 의사들이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의학적인 소견으로 볼 때, 이들 중 한 사람도 병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노래 부르지 않았습니까?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 마라.” (마태복음 10:28)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돌보시고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시베리아의 수녀들은 이 말씀을 믿고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했기에 모진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믿음의 목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영혼의 닻 (an anchor of the soul, 히브리서 6:19)’을 내리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마십시오.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10/11/2020 | In Times Of Trouble 27
내가 너의 갈 길을 보여 줄 것이다 I Will Guide You Along The Best Pathway For your Life
시편 32편
오늘은 모처럼 다윗이 쓴 시편을 읽었습니다. 다윗이 평생 몇 편의 시편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성경에는 다윗이 쓴 시편이 약 74편 정도 들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만 잘 쓴 것이 아니라 수금 (harp) 연주에도 달인(達人)이었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 (healing)할 정도로 탁월한 수준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다윗이 사울 왕의 궁중 악사(樂士)가 된 것은 목동으로 지내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궁중 악사가 된 소년 다윗은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만조백관이 모인 연회 자리에서 다윗이 사울 왕 곁에 놓여 있는 하프를 연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왕이 “이 하프는 쓸모 없는 하프다. 저것을 나에게 만들어 준 자가 나를 속였어. 아무도 저 하프를 연주할 수가 없다. 엉뚱한 소리를 내거든!”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그 하프를 연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하프는 다윗의 손에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괴어 있었습니다. 왕이 다윗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연주할 수 없는 하프인데, 너는 어떻게 연주할 수 있었느냐?” 다윗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노래를 하프로 연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프가 연주를 거부한 것입니다. 저는 하프로 하여금 자기 노래를 연주하도록 했습니다. 하프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왕께서도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 하프가 아직 젊은 나무였을 때 가지에 작은 새들이 노래하고 따뜻한 햇살을 즐기던 때를 회상시켜주었습니다. 또 저는 어느날, 사람들이 톱으로 그를 벨 때 얼마나 슬펐는지를 회상시켜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하프가 되었으니 너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하프가 저의 말을 알아듣고 기뻐서 자기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극심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악신(惡神, an evil spirit)’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미워했던 다윗이 연주하는 하프 소리를 들으면 그를 괴롭히던 악신이 물러가고 마음이 진정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23). 참 아이러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내셨소.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을 자기 백성의 통치자로 임명하셨소.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사무엘상 13:14)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한 말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중 비시이다 안디옥에서 설교할 때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윗 이야기를 했습니다.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나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았다. 그가 내 뜻을 이룰 것이다).” (사도행전 13:22) 그리고, 이 예언대로 다윗의 가문에서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나셨다고 설교했습니다.
다윗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할 말씀 하나가 더 있습니다. 열왕기상 15:5 말씀인데요. “For David had done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and had not failed to keep any of the LORD'S commands all the days of his life--except in the case of Uriah the Hittite (다윗은 주님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했다. 그는 헷 사람 우리아에 대한 일 외에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모두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악한 사람에게도 주님이 필요하지만, 다윗같이 의로운 사람에게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완전히 의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32편 말씀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그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갈등과 번민과 괴로움,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을 때의 행복과 자유함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더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찾으시는구나!” 다윗도 그렇지만 욥도 그렇습니다. 욥을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욥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욥은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정당성을 따지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욥을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욥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그의 인생은 망가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타이밍에 욥을 찾으십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욥기 38:1) 이 말씀이 욥기에서 큰 전화점 (a turning point)을 이룹니다. 이 말씀 이후에 욥은 자신의 의를 주장했던 무지(無知)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다윗의 삶에도 전화점이 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사무엘하 12:1에 나오는데요. 이 말씀이 다윗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전까지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완벽하게 은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양심은 괴로웠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시편 32편에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뼛속 깊이 사무치는 아픔을 느끼고 온종일 괴로워 신음하였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주께서 손으로 나를 짓누르시니 무더운 여름날 과일의 진액이 빠지듯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3-4절)
이 때 하나님은 다윗이 더 망가지지 않도록 정확한 타이밍에 선지자 나단을 보냅니다. 나단은 다윗과 동시대를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다윗은 선지가 나단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소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 (사무엘하 12:13)” 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나단이 이렇게 말합니다. “Yes, but the LORD has forgiven you, and you won't die for this sin (주님이 당신를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이 이 죄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때의 감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용서받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 사람과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1-2절)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씀 아닙니까? 예, 로마서 4:6-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되는 것이다”하는 것 아닙니까? 바울은 이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윗의 케이스를 예로 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죄를 값없이 은혜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다윗이 그 때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기려고 했더라면,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다만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을 갈라 놓은 것이며, 너희 죄 때문에 주께서 너희에게 등을 돌리셨고, 너희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 것이다 (But your iniquities have made a separation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den [His] face from you, so that He does not hear., NASB).” (이사야 59:2)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자칫 깨질뻔 했던 관계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주가 찾으실 때에 그분께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이 홍수처럼 밀려올지라도 그들을 덮치지 못할 것입니다.” (6절) 이 말씀에서 ‘경건한 사람들 (the godly)’은 누구일까요? 저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왜 내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 합니다. 이제 그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관계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어느날 그 사람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러분에게 가까이 닥아와서 말을 붙이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거든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회개와 죄의 고백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가르치고, 너희들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이끌어 주며, 어디로 가든지 지켜 줄 것이다.’” (8절) 이 말씀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나 당나귀처럼 어리석게 굴지 마라.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다루지 않으면 너희 곁에 오지 않을 것이다 (Do not be like the horse or the mule, which have no understanding but must be controlled by bit and bridle or they will not come to you).” (9절) 고집 센 말이나 당나귀에게는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면 되겠지만, 고집이 센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의 경우에는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멀쩡하던 사람이 눈이 안 보여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너를 이방인을 위한 나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한다. 어떻게 할 것이냐? 나에게 항복할 것이냐?” 이렇게 하나님은 바울에게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워 그의 고집을 꺾으시고 그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open mind (열린 마음)’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8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가르치고, 너희들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이끌어 주며, 어디로 가든지 지켜 줄 것이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앞길을 보여 주시는데, 또 그 때 그때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갈 길을 보여 주시는데,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길을 따르겠습니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길을 신뢰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길을 고집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그 길이 자기가 생각했던 길이라면 그 길을 따르겠지만, 그 길이 자기가 생각했던 길과 다른 길이라면 그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껏 기도해서 하나님의 응답이 있어도 그 길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르지 않습니다. 맞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 그 길이 나에게 최선의 길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 앞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길을 내려 놓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번역 성경들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을 ‘way’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은 ‘pathway’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 말로 ‘소로길(小路)’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길까지 세밀하게 가르쳐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참 좋은 말씀이다” 이런 느낌으로 끝난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유명한 강연가인 Steve Maraboli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God’s word is not to be heard and repeated; it is to be breathed, lived, and emulated with each action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들리고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행동으로 숨쉬고, 살아 있고, 실천되어야 한다).” 시편 32편 말씀은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앞 길을 세심하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이 여러분에게 최상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0/4/2020 | In Times Of Trouble 26
주님, 저는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 Lord, I Am Deeply Troubled
시편 116:1-14
오늘 설교 말씀은 제목부터 우리 눈길을 끌지요? “주님, 저는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억압을 받기도 하고, 무시를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인생은 끝이 났구나!” 하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시편 116편을 쓴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 혹은 사미스트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 116편을 쓴 사미스트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죽음의 밧줄이 나를 옭아맸으며, 무덤의 고통이 나를 덮쳤습니다. 나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억눌려 있었습니다.” (3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eath wrapped its ropes around me; the terrors of the grave① overtook me. I saw only trouble and sorrow. /①Hebrew of Sheol “죽음의 밧줄이 나를 칭칭 감고 있었고, 무덤의 공포가 나를 엄습했습니다. 나는 완전히 고통과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주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미스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Then I called on the name of the Lord. Please, Lord, save me!”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한 밤 중에 괴한이 집에 침입했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일어나 급히 911에 전화를 거는 순간 괴한이 전화기를 확 나꿔챕니다. 전화기에서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call on’이라는 말이 ‘부르다’라는 뜻이 있지만 동시에 누구에게 ‘전화를 걸다’라는 뜻도 있잖아요? 이 사미스트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대부분의 시편들은 인간의 아픔과 절망을 주제로 씌어졌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귀족에게 고용되어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이라는 명화를 남겼습니다. 이 그림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성당 (Santa Maria delle Grazie)’에 부속 수도원이 있는데, 이 수도원의 식당 입구에 그린 그림입니다. 다빈치는 작품 의뢰를 받아 그 그림을 벽에 그린 것입니다. 가로 9.1m, 세로 4.2m의 큰 그림입니다. 작곡자 헨델 역시 완전히 폐인이 되어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지내던 때에 ‘메시아’를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헨델은 다시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만종(晩種, The Evening Prayer)’이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얼마나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했습니까? 밀레는 그 때 물감을 살 돈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가난과 역경이 명화를 만들었고, 인류가 길이 보존해야 할 유산(遺産)이 되었습니다. 시편116편도 사미스트가 처했던 고난과 역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도서에 있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전부 (the whole scope of life)를 알 수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전도서 3:11).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시편 저자들이 만났던 고난과 역경들이 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아니요.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겪는 고난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창조의 힘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삶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8). 이런 말씀을 붙잡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사람들은 크리스천들 밖에 없습니다.
다시 오늘 시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사미스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God is our refuge)’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 보통 사람들 입에서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입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도대체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길래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불렀을까요?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올바른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여호와는 순진한 자들을 보호하시며 내가 큰 위험에 빠졌을 때,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How kind the Lord is! How good he is! So merciful, this God of ours! The Lord protects those of childlike faith; I was facing death, and he saved me).” (5-6절)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전교인이 야외예배를 갔는데,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요.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해서 쉘터 (shelter)를 예약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미 예약을 하는 바람에 예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도 야외예배 장소가 ‘합킨톤 팍 (Hopkinton Park)’이었는데, 우리가 늘 모이는 곳이 아니라 사방이 막혀 있는 아늑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pavilion 형태의 shelter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미국 교회가 그 shelter를 예약을 했는지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비가 막 쏟아집니다. 우리 교인들은 비를 피해야 하는데 갈 곳이 없으니까 shelter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shelter는 이미 미국교회 교인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 shelter가 두 교회 교인들이 비를 피해 점심을 먹기에는 비좁았습니다. 게다가 우리 교회는 예약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 교회 교인들이 우리를 위해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점심을 다 먹었다고 하면서 자리를 양보하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How kind the Lord is! How good he is”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쉘터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급하고 위태할 때 그리로 달려가면 언제나 문을 열어 주시고 환영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하여 사미스트는 “우리 주님은 얼마나 친절하고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친절하고, 선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compassion’을 가진 분, 순진한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이란 말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the simple’ ‘the simplehearted’ ‘the helpless (힘 없는 사람들)’ ‘the ordinary people (보통 사람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hose of childlike faith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때 항상 자기를 도와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다시 그로하여금 위태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크고 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경험들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을 찾게 하고 있습니까? 한번은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 갔었는데, 그 집에 키가 큰 낯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저 아이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아이입니다” 하면서 지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제가 “그런데, 집사님, 저 아들을 교회에서 못 본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예, 지금은 교회 안 갑니다” 이 말을 듣고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던 경험을 가진 사람 중에도 지금은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생활에서 경험이 중요하지만, 그 경험이 반드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발전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굳게 믿고 말했습니다. ‘나는 큰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또 나는 실망 가운데서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10-11절) “I believed in you, so I said, ‘I am deeply troubled, Lord.’ In my anxiety I cried out to you, ‘These people are all liars!’” 이 말씀은 아주 독특합니다. 아마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말씀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이 사미스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 말씀에 “내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좀 달라요. “‘주님, 저는 지금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제가 이렇게 부르짖을 때는 ‘I believed in you, so I said (내가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 중에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고통 중에 있지만, 이번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을 믿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뒤에 “이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장이입니다” 이런 말이 나오지요? 자기 주변에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이 사람들의 말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중에도 (in my anxiety)’ 이 사미스트는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찬양 가사가 생각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나의 소망이 저에게서 나는도다/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이시니/오직 주만이 나의을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시편 62편 다윗이 쓴 시편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 찬양 좋아하고 많이들 불렀는데요. 부르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He alone is my rock and my salvation, my fortress where I will not be shaken (하나님만이 그 안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을 나의 바위, 나의 구원, 나의 산성입니다).”
윌리엄 커싱 (William Orcutt Cushing, 1823-1902, 미국)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설교를 잘해서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대가 나빠지게 되고, 급기야 목소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가 앓고 있던 병은 ‘creeping paralysis’라는 병이었는데, 이 병은 목소리를 잃게 되는 병이었습니다. 설교자에게 성대는 생명과 같기 때문에, 그 목사님은 목회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이 목사님은 눈물과 절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찬양 시로 쓰게 됩니다. 그 찬송이 바로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입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밤 깊고 비바람 몰아쳐도/아버지께서 날 지켜 주시니/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주 날개 밑 평안하다/그 사랑 끊을 자 뉘뇨/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영원히 거기서 살리” 비록 이 목사님의 목소리는 다시 소생되지 않았지만, 그는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마음에 치유를 받았고, 남은 인생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찬양 시에 Ira D. Sankey (1840-1908, 미국)라는 유명한 작곡자가 곡을 붙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찬송가가 되었습니다. 커싱 목사님은 평생 300개의 찬양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 중에 우리가 많이 부르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545장)’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중한 보배 (564장)’ 이런 찬송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지막으로 사미스트가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는 내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 내셨고, 나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셨으며, 나의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8절)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