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3/28/2021 | 고난주간 메시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Following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25
팬데믹으로 모두가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일년이 넘도록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지내오다 보니, 어느 새 고난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되네요.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어서 그런지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가 더 새롭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한 때를 서기 64-68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네로가 로마에 화재를 일으키고 그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려 크리스천들을 박해했던 때가 서기 64년 7월이었거든요? 크리스천들은 고난과 박해 속에 있었습니다. 언제 로마의 군인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써서 위로하고 희망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몇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욕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덟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길을 읽어버린 양들을 보살피는 영혼의 목자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죄가 없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을까?”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온 것이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을 살리는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마가복음 10:45) 이 말씀에 나오는 ‘대속물’이라는 말은 ‘램섬(ransom)’이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몸값’이라는 뜻입니다. 인질범들이 아이를 납치하고 ‘몸값’을 요구합니다. 아이의 ‘몸값’이 얼마인데, 그 돈을 가져오면 아이를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성경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 대신 목숨 값을 치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한 사람의 생명으로 모든 사람의 죄값을 치룰 수 있는가?” 예수님의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거든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죄의 값을 충분히 치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거든요?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치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9)” “And the ransom he paid was not mere gold or silver. It was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New Living Translation)
여러분, 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모두 하나님 스스로 계획하고 행동으로 옮긴 자작극(自作劇)입니다. 하나님께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속성(屬性, attributions) 중에 사랑과 용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와 심판이 있습니다. 이 두 속성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로 말미암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시에 불의를 미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정의의 하나님이시거든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어도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4). 여기서 바울은 왜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 없는 자기 아들을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함으로써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도 충족되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도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딜레마가 십자가 위에서 모두 해결된 것입니다. 보세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는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이 말의 그리스어 원문은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t is finished.” 혹은 “Paid in full(값을 모두 지불했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랜섬’ ‘대속물’ ‘몸값’으로 모두 지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고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모두 실현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딜레마가 단번에 해결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읽어 보세요. 성경에 이런 딱딱한 교리적인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로마서 5:8)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로마서 5:5)”고도 했습니다. 또한 제자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요한일서 3:16)” 라고 썼습니다.
‘찬송가의 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작곡가 아이작 와츠(Isaac Watts, 1674-1748, 영국)는 십자가에 대한 이런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 찬송시로 만든 찬송가가 151장입니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주 십자가 못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그의 찬송시 한 구절 한 구절에 십자가에 대한 그의 믿음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큰 빚을 졌습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자고 한 것입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여행을 하면서 갈릴리 해변을 혼자서 많이 걸었습니다.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많이 걸으셨을 텐데, 어딘가 예수님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여러분이 듣기에는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때 저는 매우 진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발자취(steps)’를 이 땅에 남겼을까요?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고난 받는 삶의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영어에 ‘on behalf of’라는 말이 있고 ‘vicarious’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누구를 대신하여’ 또 ‘누구를 대신하여 받는’이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때로부터 500여년 전에 벌써 이런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4-6) 신학자들은 이 사람에 대하여 ‘고난 받는 종(the suffering servant)’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이 사람은 고난 받는 자기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고난 받는 종’이 우리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난 받는 종’에 대하여 이미 500여전 전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은 덕분에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By his wounds we are healed).”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남기신 이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어느 중풍병자 한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마가복음 2:5) 아주 특별한 말씀입니다. 보통은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치료를 해 주시는데, 이 경우는 병자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Jesus seeing their faith)’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중풍병에 걸려 고생하는 병자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친구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 사람들입니다. 친구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이 친구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문제, 누구의 고통을 대신 짊어질 때,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높게 평가하십니다.
이 말씀은 동시에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믿음생활의 최대의 적은 ‘이기주의’입니다. 생각하는 것들이 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너도 나도 다 그렇습니다. 나만 잘되면 되고, 우리 집만 잘되면 되고,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If any of you wants to be my follower,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가복음 9:23) 누구든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돌아서야 내 제자가 될 수 있고 나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의를 위한 삶의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베드로전서 2:24).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면 우리는 의를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3) 여러분, 이 말씀을 형식적인 말씀으로 듣지 말고,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겨 놓으신 발자취를 따라 우리의 삶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간혹이라도 올바로 살아야 하겠다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까? 뉴스에 나오는 흉악한 사고나 비인간적인 기사들을 보면서 “나는 올바로 살아야지!” 이런 반성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 본문 말씀 21절을 보십시오.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비록 고난을 받을지라도 선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나의 삶이 죄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고, 의를 행하는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결심만으로는 결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세상을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때마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우리 앞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3/21/2021 |
사순절 새벽기도의 의미(5) The Meaning of the Lenten Prayer
누가복음 12:16-21
여러분, 지금 사순절을 잘 지내고 계신가요? 새벽기도에서 매일 듣는 은혜로운 찬양이 있습니다. ‘눈을 주님께 돌려(Turn Your Eyes Onto Jesus)’라는 제목의 찬양입니다. 사순절에 아주 적합한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순절을 기도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사순절을 맞이해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예수님께 집중하고, 지금 내가 올바로 살고 있는지 나의 삶을 반성해 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주님보다는 나의 일에 관심을 더 갖게 하고, 영적인 일보다는 물질적인 일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비단 지금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문제입니다. 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 But you know how Timothy has proved himself).” (빌립보서 2:21)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1차 전도여행 때 소아시아의 루스드라(Lystra)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의 내력이 있는 경건한 분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디모데는 바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아들이기도 했고, 제자이기도 했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이기도 했습니다. 디모데의 성격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잘 이해해 주는 성격이어서 목회자의 성품을 타고 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외롭고 힘들 때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이 책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저도 날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자연히 그 책을 정성껏 읽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그 책을 통해 오스왈드 목사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자신을 드린 것을 보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나는 오스왈드 목사님처럼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
크리스천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영적인 가치입니다. 이 영적인 가치들이 지금 이 시대에 와서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더욱 더 많은 나라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경제 체제를 말할 때 ‘계획경제’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를 자기들 처지에 맞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인간의 이기심과 열심히 능력껏 일해서 벌어들이면 모두 사유재산이 된다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잘 맞아 떨어진 결과입니다.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의 많고 적음이 가치의 기준이 됩니다. 미국을 보세요. 능력이 많은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능력이 적은 사람은 돈을 적게 법니다. 아무도 여기에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영적인 것들의 가치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줄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줄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줄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마저도 모두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크리스천은 이 시대의 패턴(유행)을 따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로마서 12:2에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물질적인 가치보다 영적인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하는 것(to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가치가 팽배한 이 시대의 풍조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조금 무책임한 말같이 들릴 수 있겠지만요. 달리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가치가 물질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정한다면, 영적인 가치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알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세요. “형제 여러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참되고, 고상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나에게 배운 것과 받은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8-9) “맞아! 인간이 인간 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추구해야 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가치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자기 스스로 믿고 옳다고 믿는 가치를 따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과거와는 많이 다릅니다. 과거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목사님들이 성도들을 앞에서 이끌었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누가복음 12장 본문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이 부자가 부럽지 않습니까? 성경 시대에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때였으니까요. 이 부자는 아주 비옥한 땅과 농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추수 때마다 많은 수확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수확이 너무 많아서 저장할 창고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이 부자는 더 큰 창고를 건축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설계사가 그려준 설계도를 보면서 꿈에 부풀었습니다. “이제는 아무 걱정이 편하게 쉬고 먹고 마시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겠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오늘 밤 네 영혼을 가져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가 모아 놓은 재산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놓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이 될 것이다.” (21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이야기의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좀 힌트를 드릴까요? 오늘 본문 말씀 앞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갖 욕심을 경계하고 주의하여라.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Beware! Guard against every kind of greed. Life is not measured by how much you own).” (15절) 우리의 인생은 재산이 많고 적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뒤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중요하다.” (22-23절)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명이 옷이나 음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평생 자기 소설의 모티브로 삼은 것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가 제일 좋아했던 성경 구절이 마태복음 16:26에 있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을 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아시지요?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요한복음 10:10) 이 말씀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말씀은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풍성한생명’이라는 말을대부분의 영어 성경에는 ‘abundant lif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풍성한 생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에 대한 다양한 번역들이 있습니다. ‘satisfying life(만족한 삶, NLT)’ ‘life to the full or till it overflows(차고 넘치는 생명, Amplified Bible, NIV)’ ‘life with all its advantages(모든 이점을 가진 생명 혹은 삶, Mace New Testament)’ ‘life in all its fullness(충만한 삶, Berean Study Bible, Good News Translation)’ 이 모든 번역성경들을 종합해 보면 ‘풍성한 생명’이라는 말은 생명의 본래 의미가 완전히 드러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이 생명을 가르치고, 이 생명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었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뜻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마태복음 4: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신명기 8:3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어령 씨가 예수를 믿고 나서 쓴 책 중에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은 완성된 문장처럼 보이지만 그 뒤가 비어 있습니다. 빵만으로 살 수 없다면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 빈칸을 채워줘야만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성경 속에 답이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생명이 풍성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보다 더 가치 있고,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이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더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더 좋은 빵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런 사람을 성공의 모델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빵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생명을 위해서는 인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면, 비록 빵이 부족하고, 삶의 환경이 열악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서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3/14/2021 |
사순절 새벽기도의 의미(4) The Meaning of the Lenten Prayer
누가복음 11:1-4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면서 몇 주에 걸쳐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기도에 대한 말씀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씀은 로마서 8:26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 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여기에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원래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기심을 가지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모두 자기 좋을대로, 자기에게 유리할대로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필연적으로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안 나오는 것보다는 교회에 와서 졸더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거든요?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면서 예배 중에 졸아요. 그래도 하나님께 괜찮을까요? 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괜찮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어떻습니까? 비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도, 비록 좀 이기적으로 기도하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했지만, 사실은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우리 선생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고 자랑을 한 것 같습니다. 샘이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해라”하고 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입니다. 이 기도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생각할 때 이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 ‘주기도문’ 속에 제자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주기도문’ 속에 자기 제자들이 하나님 앞에 견고한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시던 기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셨을 때나 혹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셨을 때나, 심지어 그의 생애 마지막 날 저녁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 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고 있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면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예수님의 입에서 기도가 줄줄 나왔습니다. 평상시에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기도할 때마다 그냥 ‘주기도문’을 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으니까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Pray in this way(이같이 기도하라)” “Pray like this(이렇게 기도하라)” “In this manner, pray(이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라)” “After this manner, pray(이같은 방식을 따라서 기도하라)”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올바른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이것과 똑같이 따라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르쳐 주는 형식과 내용을 잘 보고 너희도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궁금하시지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주기도문’ 속에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들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따라서 기도하면,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들을 빼놓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잘 보고 기도를 배우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은 기도의 ‘본(example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Father, hallowed be your name).” (2절) ‘주기도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아이들이 아빠에게 “아빠,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예요!” 이런 말을 하면 아빠는 기분이 좋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기도를 하는데, 어른들은 어떤 식으로 기도를 해야 하나요? 성경에서 한번 찾아 볼까요? “하나님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사무엘상 2:2, 시편 113:5, 예레미야 10:6, 미가 7:18)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편 35:10, 71:19, 이사야 40:18, 46:5) 여러분, 이런 찬양 가사를 아시지요? “당신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처럼 내 마음을 만져줄 수 없어요/ 나는 오랜 시간 영원한 것을 찾아다녔죠/ 그리고 찾아냈어요. 당신과 같은 분은 없다는 것을요(And I can search for all eternity long. And find, there is none like You).” 하나님께서 이 찬양을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기도할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2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도는 우리가 잘 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선지자들이 꿈꾸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꿈을 같이 꾸는 것입니다. 앨버트 헤이 말로테(Albert Hay Malotte, 1895-1964, 미국)가 작곡한 ‘주기도문’이라는 찬양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이다(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향해 이 기도를 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음에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서 속히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도 그렇고, 하박국 선지자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하박국 2:14) 어떻게 두 선지자가 똑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요? 이사야는 하박국 선지자보다 100년 정도 앞선 선지자니까 하박국 선지자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품고, 또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서 이 기도를 빼놓치 말고 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제일 먼저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기도 순서에서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이 ‘주기도문’ 속에 이기적인 욕심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장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날마다(everyday)’ 혹은 ‘일용할(daily)’이라는 말입니다. 구약 잠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거머리에게 두 딸이 있는데, 그들은 만족을 모르고 ‘더 주세요, 더 주세요’ 한다.”(잠언 30:15) 이 말씀은 매우 풍자적인 말씀입니다. 결코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daily bread)’으로 만족하라는 교육을 40년 간이나 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자기 식구들이 먹을 만큼만 ‘만나’를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더 많이 모아도 쓸모 없을 테니 꼭 그날 필요한 만큼만 모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모았습니다. 내일에 대한 불안감에서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모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아들인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썩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여전히 ‘일용할 양식’에 불안을 느끼면서 돈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용서에 대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4절)”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은 먼저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용서해야 용서를 구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적용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를 용서하십시오.”(에베소서 4:32)
하나님의 용서가 값싼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 프랑스)는 “용서는 하나님의 버릇이다”라는 말로 그 당시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신다는 그 당시의 풍조와 교회의 설교를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를 용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용서의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당장에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라(And pray lead us not into temptation)”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Pray that you will not give in to temptation, 누가복음 22:40) 예수님께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 시험의 문제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잘못 시험에 빠지면 크리스천으로서 큰 상처를 입을 뿐만 아니라 자칫 우리 인생이 파멸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또 다른 이유는 우리에게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시험받는 자들도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고난당하고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18) 이 말씀이 Christian Standar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since he himself has suffered when he was tempted, he is able to help those who are tempted.” 예수님은 시험 받는 사람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히브리서 4:15), 시험 받는 사람들을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신다(고린도전서 10:13)”고 하셨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처럼 위로가 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 ‘피할 길(the way of escape)’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 ‘피할 길’이 보입니다. 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믿음생활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Prayer is the vital breath of the Christian; not the thing that makes him alive, but the evidence that he is alive(기도는 크리스천의 생명의 호흡입니다. 크리스천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의 말입니다.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가 올바른 기도에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7/2021 |
사순절 새벽기도의 의미(3) - The Meaning of the Lenten Prayer
누가복음 6:12-16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팬데믹을 이유로 새벽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새벽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니까, 이 시간이 너무나 귀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분들의 이름이 컴퓨터에 올라올 때,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의 ‘사순절의 기도’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주님, 사순절입니다. 지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요, 금식하는 시간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골고다로, 죽음을 이긴 최후 승리의 자리로, 주님을 따라 주님의 길로 가는 시간입니다.
저는 아직도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고 싶으면서도 저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명성과 성공과 인간의 존경과 쾌락과 위세와 권력을 속삭이는 음성들에 귀를 내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주님, 이런 음성들에 귀머거리가 되고, 주님의 음성에 더 귀 기울이게 하소서. 생명의 좁은 길을 택하도록 저를 부르시는 그 음성에 말입니다.
사순절이 저에게 아주 힘든 시간임을 압니다. 주님의 길을 선택하는 일은 삶의 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생각도 주님의 생각을 선택하고, 말도 주님의 말을 선택하고, 행동도 주님의 행동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이 필요 없는 시간이나 장소는 없습니다. 주님을 선택할 때면 제 속에 얼마나 힘든 저항이 있는지 잘 압니다.
주님, 가는 곳마다 순간마다 저와 함께 하소서. 사순절을 신실하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하여 부활절이 올 때, 주님이 예비하신 새 생명을 기쁨으로 맛볼 수 있게 하소서.
사순절의 의미와 사순절을 보내는 마음이 잘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은 기도와 금식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It is a time to be with you, Lord, in a special way, a time to pray, to fast)” 이 구절입니다. 사순절은 몸과 마음을 온통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때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금식을 했습니다.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This kind can be cast out only by prayer①).” ① Some manuscripts read by prayer and fasting.” (마가복음 9:29) 어떤 사람에게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더러운 귀신(unclean or evil spirit)’이 들어가 말을 못하게 했습니다. 증상이 심할 때는 이 아이의 몸이 뻣뻣해지기도 하고, 입에 거품을 물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이에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쳐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어째서 우리는 내쫓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런 악한 영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쫓아낼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 무슨 이유인지 이 말씀에서 금식이라는 말이 빠졌습니다.
사순절에 듣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속에도 ‘악한 영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악한 영들’은 오직 기도와 금식에 의해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너무 많은 불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컴퓨터에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으면 속도가 느려지고,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간혹 컴퓨터를 깨끗하게 청소해 줘야 합니다. 제 컴퓨터도 너무 느려져서 지난 주에 ‘clean install’을 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도 한 번씩 깨끗하게 청소를 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순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누가복음 6장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누가복음을 특별한 복음서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누가복음을 ‘여성들을 위한 복음서’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에 여성들이 많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자는 누가복음을 ‘이방인들 위한 복음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방인들이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누가복음을 ‘기도의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누가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들을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를 선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제자가 똑똑해야 힘이 덜 듭니다. 교수 밑에 똑똑한 학생들이나 또 똑똑한 연구원들이 있으면 연구의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연구비가 없으면 똑똑한 연구원들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도 당연히 똑똑한 제자들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말씀에서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주의해서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기 전 날 밤에 밤을 새워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제자들을 선정하는 일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선정하기 전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여러분, 성경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을 읽지만 마시고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제자를 선정해야 한 시간입니다. 저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이 기도에 적용해 본다면, 예수님은 기도 끝에 이렇게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제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원하는 사람들이 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 선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큰 그림’ 속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정하시는 일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십니다. 이것을 ‘divine intervention(신적인 개입)’이라고 합니다.
아니, 그렇게 기도하면서 제자들을 선정했는데, 왜 예수님을 팔아 넘길 ‘가룟 유다’같은 사람이 선정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고 계시는 ‘큰 그림’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잖아요?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Christ on the cross is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고린도전서 1:18, 24)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가룟 유다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룟 유다가 포함된 것은, 전혀 잘못된 선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완벽한 선정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은 ‘기도의 복음서’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더욱더 멀리 퍼져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홀로 광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15-16) 그 때는, 예수님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였습니다. 사람에게 ‘명성’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학자들에게도 명성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명성을 얻어서 어느 정도 유명해지면 반드시 교만해집니다. 말과 행동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제가 유명한 사람이 아닌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도 만약 명성을 얻어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더라면, 틀림없이 교만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성을 얻었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교만한 사람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생의 목적과 사명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더 읽어내려 가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토론을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누가복음 5:17-26). 예수님께서 대적자들과 토론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늘 지혜롭게 말씀하시고 지혜롭게 대처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자는 요점은, 예수님은 늘 큰 일을 앞에 놓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세요. 예수님은 일 다 벌어진 다음에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큰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백신과 같은 일종의 예방의 의미가 있습니다. 독감(flu)이 유행할 조짐을 보이면, 예방 주사를 맞습니다. 그러면 예방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플루가 일단 유행하고 나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맞고 있잖아요?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잡힌 후에도 플루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해마다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맞아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We tend to use prayer as a last resort, but God wants it to be our first line of defense. We pray when there’s nothing else we can do, but God wants us to pray before we do anything at all (우리는 기도를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가 우리의 최전방 방어선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기도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도가 우리들의 ‘first line of defense(최전방 방어선)’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미리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실은 신기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지만) 그 기도의 결과가 늘 좋았습니다. 삶의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예수님은 기도하셨고, 예수님은 그 때마다 지혜롭게 말씀하시고 지혜롭게 대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말문이 막히는 장면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는 장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 선택이 그렇게 잘 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에서 보면, 이보다 더 완벽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완벽한 선택이었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Prayer is not a way of making use of God; prayer is a way of offering ourselves to God in order that He should be able to make use of us(기도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윌리엄 버클리(William Barclay, 1907-1978, 영국)의 한 말입니다. 우리 중에 자기 생각을 관철하기 위하여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시도록 나를 드리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이 벌어진 후에 기도하게 되면 꼭 하나님을 이용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2/28/2021 |
사순절 새벽기도의 의미(2) The Meaning of the Lenten Prayer
누가복음 22:39-46
지난 주 설교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통은 ‘쌍방의 소통(two way communication)’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듯이 말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니까 친구와 이야기를 하듯이 쉽게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는 하나님과 대화를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모세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회막 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마치 사람이 친구에게 말하듯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Inside the Tent of Meeting, the LORD would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one speaks to a friend).” (출애굽기 33:11)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친구에게 말하듯이 말씀하시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명기 저자는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그 뒤로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 34:10) 신명기 저자에게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아주 인상 깊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기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로 여러분의 기도생활에 적용을 하려고 하면 당장에는 어색하고 잘 안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쉽게 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서툴고 잘 안 되는 일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욕심을 내지 말고, 조금씩 시도를 하면 점점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들어야 하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그만큼 더 민감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다가도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 있으면,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마치 지도 교수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보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도의 응답에 대하여 가장 신뢰하는 말씀이 로마서 8:16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언해 주시는데,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해 주신다고 합니다. “His Spirit joins with our spirit to affirm that we are God's children.” (NLT) “The Spirit himself testifie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NIV) “God's Spirit joins himself to our spirits to declare that we are God's children.” (Good News Translation) “The Spirit himself bears witness to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NET Bible) 쉽게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 영(마음)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 보세요. 이것을 ‘성령의 내적 음성(the inner voice of the Spirit)’이라고 합니다.
저의 기도생활을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조금이라도 여러분의 기도생활에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도 시간이 좋은 기회입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포기하지 말고요. 한걸음 한걸음 걸음을 떼 보세요.
오늘 누가복음 말씀에서도 기도에 대한 많은 유익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눈에 띄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습관을 좇아’라는 말은 ‘늘 하던대로(as usual, NLT, NlV)’ ‘according to to the custom(BLB)’ ‘as He was accustomed(NKJV)’ ‘as was his custom(NASB)’ ‘as was his custom(ESV)’ ‘as was His habit(Amplified Bible)'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신 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시던 때였습니다. 참으로 감동스러운 것은, 그 마지막 밤에도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감람산(올리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누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지요?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밤에도 늘 하시던 대로 식사 후에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새벽에는 성전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밤에는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 계실 때는 새벽에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 기도는 영적인 습관이었다는 것입니다. 밥을 왜 하루에 세 번을 먹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에 세 번 밥을 먹는 것이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습관’이라는 말은 그것이 몸에 배고 익숙해서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는 기도가 습관이었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이라는 말을 할 때는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습관적’이라는 말이 ‘형식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본래 의미나 정신을 잃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되풀이 하는 것을 ‘습관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기도가 습관이었다고 말할 때는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좋은 의미로 습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이 몸에 배서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려면, 상당히 오랫동안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크리스천의 훈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사역에 대한 열심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속성에서 나오는 열정으로는, 주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냄새 나는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하나님, 세상, 그리고 죄와 사탄을 향한 관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목사님도 크리스천의 훈련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중에 리처드 포스터(Richrard Foster, 1942-) 같은 사람도 훈련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그가 쓴 ‘Celebration of Discipline: The Path to Spiritual Growth(영적 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지금 교회들이 훈련 없는 크리스천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40절).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절)”고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은 ‘유혹(temptation)’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Simon, Simon, Satan has asked to sift you as wheat.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누가복음 22:31-32) 사탄은 베드로의 믿음을 시험해 보겠다고 허락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탄이 욥을 시험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베드로는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해 보이는 사람도 자기의 힘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은 내 믿음을 떨어뜨리고, 나를 주님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 나를 유혹합니다. 이 때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사탄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얻고, 힘을 얻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기도의 내용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기도생활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기도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 때 그 때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언부언하지 마라(마태복음 6:7).” “길게 기도하려고 하지 마라(마태복음 6:7).”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마태복음 6:5), 은밀하게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라(마태복음 6:6).”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누가복음 22:42)”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애써 더욱 간절히(more fervently, NLT, NASB)’ ‘more earnestly(NIV)’ ‘more intently(Amplified Bible)’ 기도하셨다고 썼습니다. 예수님께는 기도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더욱 열심히, 더욱 열렬하게.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나의 주장,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의지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관철(貫徹)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결론을 내 놓고, 하나님께 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자기 목적을 위해 기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후에는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다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가 어떤 식으로 해결되면 좋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결되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아름다웠습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는 상, 하 두편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왕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습니다. 다윗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5:5) 다윗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리면, 우리의 기도생활에 능력이 생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에 능력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harmony)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연주하기 전에 음을 잘 맞춰야 합니다. ‘튜닝(tuning)’을 잘 해야 악기가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운 소리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옳게 분별하고, 그 뜻에 맞추어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가 그런 새벽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고, 그 뜻에 맞게 기도하고, 그 뜻을 실천해 나가면, 우리의 삶의 아름다워진다는 한 가지 사실만이라도 오랫동안 우리 마음에 남는, 그래서 점점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는 하나님의 주시는 축복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