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6/2020 | 대강절 둘째 주일/In Times Of Trouble 35
새 날이 온다 New Days Are Coming
이사야 9:1-7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촛불 2개를 켰습니다. 전주에는 희망의 촛불을 켰고, 오늘은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희망이 생겼고,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구약성경은 말라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약속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런데요. 구약 마지막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약 400년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을 ‘신구약 중간시대(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합니다. 두 약속의 중간 시대라는 뜻입니다. 이 중간 시대는 영적인 암흑기(暗黑期)였습니다. 이 때에는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모스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이 땅을 주리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빵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배고플 것이다. 그 날에 아름다운 여자들 젊은 남자들이 목이 말라 지칠 것이다.” (아모스 8:11, 13) 물론 이 말씀은 아모스가 북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한 말이니까 중간기하고는 약 350년의 시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하신 이 말씀은 신구약 중간기에 살던 사람들의 영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는 흔한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늘 남편이 잘해 주면 아내는 고마움을 모릅니다.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는 상황을 만나보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잘 모릅니다.
신구약중간 시대가 그랬습니다. 예언자의 소리가 그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영적으로 고갈되었습니다. 지금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 영혼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 절대로 소홀하게 여기면 안 되고요. 개인 기도에 힘써야 하고요. 성경읽기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적인 침체(a spiritual depression)’가 찾아오면 우리 삶에 어떤 힘든 일들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희랍어에 시간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χρόνος, cronos)’라는 말인데요. 특별한 의미가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라는 말입니다. ‘카이로스’는 어떤 결정적인 기회의 타이밍 (the right, critical or opportune timing)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때가 차매 (4:4)’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when the fulness of the time came(꽉 찬 시간이 되었을 때)’ 이런 뜻이거든요? 바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지쳐 있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의 ‘카이로스’였습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달래 주었고, 채워주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Amazement gripped the audience, and they began to discuss what had happened. ‘What sort of new teaching is this? It has such authority! Even evil spirits obey his orders!’” (마가복음 1:27)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옮기시고, 거기서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목, 요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이 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마태복음 4:13-16)마태는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사역의 본부로 삼으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marginal people(주변 인간들)’이 큰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전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고통의 땅에 그늘이 걷힐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지역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 살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짙은 그늘의 땅에 살던 백성에게 환한 빛이 비췰 것이다.” (이사야 9:1-2)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이 ‘한 아기(a child)’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기원전 745-695년까지 약 50년간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All right then,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the sign. Look! The virgin① will conceive a child!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이사야 7:14)/①Or young woman 이 말씀을 잘 보면, ‘virgin(동정녀)’이란 단어에 ‘young woman(젊은 여자)’이라는 주(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알마(almah)’로 되어 있는 것을 70인 역에서 희랍어로 번역할 때 ‘파르테노스(Parthenos, 동정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virgin’이라는 말에 ‘young woman’이라는 주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동정녀 탄생이라니? 말도 안 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동정녀’라는 말을 꼭 ‘virgin’으로 번역하지 않고 ‘young woman’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젊은 여자의 몸에서 내어 나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런 잘못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인카네이션(incarnation)’의 교리,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한복음 1:14)”는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대속(代贖)의 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는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이 교리를 지켜오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읽어보면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는 말씀인데요. “The children of God are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이는 혈통으로도 아니고, 인간의 결정으로도 아니고, 남편의 의지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3)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태어나듯이 예수님의 탄생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다윗의 가문을 선택하신 것뿐입니다. 인간의 결정에 따라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사도신경의 의미입니다.
지난 주간에 C. S. Lewis(1989-1963, 영국)의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루이스는 그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the Savior)’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둑에 서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손을 내 밀어주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그의 손을 잡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한 발은 땅에 딛고 있으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루이스의 이 말이 참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발이 모두 물에 빠져 있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한 분만이 물에 빠진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아기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7:14). 또 이사야 9:6에는 그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천사가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의 아내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태복음 1:21-23)
모든 말씀들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은 영원히 평화가 이어지는 세상이라고요. 그는 절망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요.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런 꿈을 가지고 메시아가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 때, 그녀가 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She talked about the child to everyone who had been waiting expectantly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누가복음 2:38)
2,000년 전에 살았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신구약 중간기의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도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와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어둠의 땅이 희망의 땅으로 바뀌고, 절망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 날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우리 나라가 그런 나라입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 항구에 첫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 미국)의 기도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십시오(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또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 선교사는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어떻습니까? 주변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꿈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믿음생활은 오로지 자기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에 대한 꿈과 열정을 잃어버리면서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대강절에 희망과 평화의 촛불이 켜진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기대를 지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꿈과 열정의 회복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시간들까지 이기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1/29/2020 | In Times Of Trouble 34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에베소서 5:15-20
오늘 다시 한번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년에 한번 추수감사주일을 지내고 그 후에는 감사를 잊어버리고 사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자는 취지로 한번 더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오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감사는 항상 해야 하는 것입니다.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황이 좋을 때나 상황이 나쁠 때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계획한대로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있다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그 이유를 잘 모를 수 있지만,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나의 삶을 보고 해석하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Be joyful always; pray continually;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카전서 5:16-18) 욥 같은 사람은 어떤가요? 그는 왜 자기에게 이런 고난이 주어지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자기는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고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욥이 깨달은 것은 비록 지금은 내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욥기가 42장까지 있는데요. 욥은 욥기가 끝나가는 40장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오늘 여러분 중에도 욥과 같이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겪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시간부터 나의 삶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속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바울은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갈라디아서 2:20)”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십니까?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의 길은 너희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이다).” (이사야 55:8)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후 왜 나의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의 삶 속에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에베소서 5장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바울은 여기서 크리스천의 삶에서 중요한 여섯 가지 가치 (values)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삶을 잘 살펴서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합니다 (15절). 둘째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16절). 셋째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합니다 (17절). 넷째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18절). 다섯째로,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라고 (Make music to the Lord in your heart) (19절)합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일에 감사하라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to God)”고 합니다 (20절).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크리스천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니까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 (the aroma of Christ)’가 나지 않고 ‘세상적인 냄새 (the aroma of the world)’가 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된 후에 크리스천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배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그 자리를 세상적인 가치들이 들어와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말하는 여섯 가지 가치 중에서 어느 것이 “아, 그렇구나!” 하고 마음에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모두 중요하지만요. 저는 세 번째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말씀과 여섯 번째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약 성경 27권 중에 바울이 쓴 편지가 13권입니다. 이 13권은 한 개인이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에 성경으로 인정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생의 말년에 쓴 편지들은 로마의 감옥에서 쓴 것들입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렇게 네 권의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 네 권의 성경을 ‘옥중서신 (The Prison Epistles)’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때 바울이 무슨 이유로 감옥에 갇혔는지 아십니까?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를 유대인들이 고소했습니다. 고소의 이유는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a ringleader of the sect of the Nazarenes)’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는 곳마다 이단 사상을 퍼뜨리고 유대인 사회에 분란을 조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5). 바울은 자기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니까 총독이나 왕에게 재판을 받지 않고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마칠 때까지 로마의 감옥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한번 바울이 당한 것과 같은 일을 여러분이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전파하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허무한 생각이 들겠습니까? 과연 그가 쓴 네 권의 옥중서신에 무슨 내용이 씌어 있을까요?
옥중서신을 읽어보면 바울이 자신을 ‘Paul, a prisoner of Jesus Christ (바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갇힌 사람)’라고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1, 에베소서 3:1, 또 골로새서 4:3이나 빌립보서 1:13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한 번도 자신을 ‘죄수 (a prisoner)’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항상 자신을 ‘a prisoner of Jesus Christ’라고 생각했습니다. 직접 그가 쓴 편지 구절을 읽어 보시겠습니까? “나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For this reason I, Paul, am the prisoner of Christ Jesus for you Gentiles.” (에베소서 3:1)
유명한 주석가 (commentator) 중에 매튜 헨리 (Matthew Henry, 1662-1714, 영국)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Even though Paul is in Roman captivity he refuses to think as a captive of men but applies it as a prisoner of Jesus Christ. Whence our grace comes- from our being apprehended of Christ Jesus. It is not our laying hold of Christ first, but his laying hold of us, which is our happiness and salvation. Paul literally states he is a captive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Paul, being a Christian saved by God has entered one into being captive. This captivity is comprised of and has led to grace, happiness, and salvation. Paul shows that even in the midst of a dark situation, through faith in the grace of God, it is possible to attain victory.”
어떻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는지 이 말씀에서 영감 (inspiration)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승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는 감옥 안에 있든지, 감옥 밖에 있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옥중서신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굉장합니다. 보세요. “Pray for us, too, that God will give us many opportunities to speak about his mysterious plan concerning Christ. That is why I am here in chains. Pray that I will proclaim this message as clearly as I should.” (골로새서 4:3-4)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God the Father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십시오).” (골로새서 5:20) 왜 그는 이렇게 감사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을까요? 그의 옥중서신을 읽어보면 왜 그가 감사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는지 세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데살로니카전서 5:17-18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면 모두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Be joyful always (항상 기뻐하라)!” “Pray continually (쉬지 말고 기도하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라)!” 바울은 분명하게 세 가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올바른 삶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명령은 옵션이 아닙니다. 명령은 반드시 해야 하는 requirement (필수사항)입니다. 학생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압니다. 학생들이 수업을 들을 때 선택과목이 있습니다. 선택과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서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이 있습니다. 그런 과목들을 ‘requirements’라고 합니다. 반드시 이 과목의 수업들을 듣고 학점을 따야 졸업을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감사는 다른 두 가지, 기쁨과 기도와 함께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과목입니다.
둘째로, 감사는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6-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모든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라. 그리고 그가 해 주신 모든 일을 생각하고 감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 하나님의 평화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이다).”
이 말씀 속에 ‘능력 있는 기도’와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for you (그가 너를 위해서 하신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 말씀이 기도생활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일에는 좋은 일도 있지만 궂은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궂은 일도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그렇고, 찬양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고 찬양이 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치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 낼 줄도 알고, 부유함을 누릴 줄도 압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궁핍할 때나, 어떤 형편에 처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빌립보서 4:11-12) ‘감사하는 법’이라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만족하는 법 (how to be content with whatever I have)’이라는 말로 나와있습니다. 만족한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Meister Eckhart (1260-1328, 독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자이며, 철학자이며, 신비주의자 (mystic)로 불리는 다양한 필드에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f the only prayer you ever say in your entire life is thank you, it will be enough (당신의 전 생애에 드린 유일한 기도가 ‘감사합니다’라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의 기도가 충분한 이유는 이 기도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humble’한 사람입니다. 물이 낮은 곳을 찾아 그곳에 고이듯이, 이런 사람은 항상 자기를 낮은 위치에 갔다 놓습니다.
이제 감사절은 지났습니다. 하지만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3:15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볼까요? “그러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우리의 입술의 열매입니다."
11/22/2020 | 추수감사주일 /In Times Of Trouble 33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Troubles
시편 116:1-14
오늘은 추수감사절 주일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go into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시편 100:4)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감사와 찬송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와 찬송’을 예수님의 버전으로 말한다면 ‘신령과 진정 (in spirit and in truth, 요한복음 4:24)’이라는 말입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이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같이 나눌 말씀은 시편 116편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나도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사미스트 (psalmist)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세요. “나는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1절) “주께서 도와 달라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1절) “주께서 나에게 귀를 기울이셨으므로 (Because he bends down to listen)” (2절) 상대방의 말이 잘 들리지 않으면 상대방 쪽으로 몸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우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들으신다는 표현입니다. “주는 내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 내셨고, 나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셨으며, 나의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8절) 참 이 사미스트가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낯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내가 부르짖고 하소연하면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정말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견고한 삶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알고 있으면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 금방 도와 달라는 기도가 입에서 나옵니다. 며칠 전에 한국에 있는 어느 청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OOO입니다. 평상시 연락 잘 안 하다가 필요할 때만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 청년이 보스턴에 있을 때 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메일을 쓰지 않고 보다 친숙한 말로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an intimate relationship)’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일이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가 어색하고 힘이 듭니다. 이 ‘친밀한 관계’를 우리는 ‘인격적인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라고 하기도 하고 ‘친밀한 교제 (a close fellowship)’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노아 (Noah)’에 대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is is the account of Noah and his family.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창세기 6:9) 그 때 땅 위에 사는 사람 중에 노아 한 사람만이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노아는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2016년 5월 26일, 영화 감독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1946-현재)가 하바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저는 그의 연설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은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무찌를 악당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이 세계엔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민족 간의 증오, 계급 간의 증오, 정치적 증오, 종교적 증오가 있습니다 (Love, support, courage, intuition. All of these things are in your hero’s quiver, but still, a hero needs one more thing: A hero needs a villain to vanquish. And you’re all in luck. This world is full of monsters. And there’s racism, homophobia, ethnic hatred, class hatred, there’s political hatred, and there’s religious hatred).” 그는 졸업생들을 이 시대를 살아갈 영웅들이라고 했습니다. 영웅의 화살통에는 사랑과 지원, 용기와 직관이라는 화살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영웅에게는 당연히 무찌를 악당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스필버그의 연설을 특별한 연설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무찌를 악당들이 많기 때문에 스필버그는 졸업생들에게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악당이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힘든 일이 없고,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잘 되는 세상을 원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고, 풍랑이 일어나지 않는 편안한 세상을 원합니다. 그런데, 스필버그의 연설은 다르지 않습니까? 악당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운이 좋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는데, 스필버그의 연설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누가복음 8:23-25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잠깐 배 안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 사이에 갑자기 광풍이 불어 호수를 내리쳤습니다. 물이 배안으로 들어오면서 금방이라도 배가 침몰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잠든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성난 파도를 꾸짖었습니다. 거짓말처럼 즉시 바람이 멈추고 호수는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Where is your faith)?”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우리는 바람이 없고 잔잔한 호수 같은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한번 발상을 전환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미친 바람이 불고 거센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볼 기회입니다. 광풍과 풍랑은 우리의 믿음이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예배입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면서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 추수 감사 예배입니다. 예전 교인들은 추수 감사 헌금을 추수한 곡식으로 드렸습니다. 추수 감사절이 되면 부자들은 교회에 올 때 소달구지에 쌀을 가마니로 싣고 와서 감사 헌금을 드렸습니다. 올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답답하고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활동이 제한되어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다 보니 마음이 울적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팬데믹 (pandemic)’ 현상으로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추수감사절 예배라니...... 우리에게 무슨 감사할 것이 있을까요? 우리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과 실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고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립니다.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지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의 믿음생활의 초점이 교회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든 일주일을 버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이 패턴이 깨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생활의 초점이 교회가 아니라 가정으로, 직장으로, 실험실로, 비지니스 현장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교회가 되어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설교해도 안 되던 일들이,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 개개인의 삶의 현장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 (Puritans)이 ‘플리머스 (Plymouth)’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는 ‘케이프 코드 (Cape Cod)’에 정박을 하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아서 그곳에 내리지 못하고 ‘플리머스’ 쪽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영국에서 출발했던 항구 이름이 Plymouth였다) 지금 ‘플리머스’에 가면 그들이 내렸던 장소에 ‘1620’이라고 새겨진 ‘플리머스 락 (Plymouth Rock)’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타고 왔던 ‘Mayflower’는 고장 난 곳을 수리하고 며칠 후에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선장이 이곳은 살 곳이 못되니 같이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영국 국교인 ‘앵글리칸 처치 (Anglican Church or Episcopal Church)’의 폐단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형식과 권위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 대로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102명 중 41명이 ‘청교도 분리주의자들 (the Puritan Separatists)’이었고, 나머지 61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strangers)’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을 보내면서 이들 중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행여나 이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을 알게 되면 호전적인 인디언들이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모든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 하는 감사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이 드리는 감사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드리는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드리는 감사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드린 감사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로 약속의 땅 ‘세겜’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12:7). 하지만, 그 땅에는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다시 식구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야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하박국의 감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고,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드렸던 감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습니다 (사도행전 16:25).
시편 116편을 쓴 사미스트는 죽음의 밧줄이 그를 옭아맸고, 무덤의 고통이 그를 덮쳤다고 합니다 (3절).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을 믿는 일이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I believed in you, so I said, ‘I am deeply troubled, Lord (나는 주님을 신뢰했기에 ‘주님 저는 지금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I believed in you”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I believed in you”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크리스천이 받는 고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이런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 감사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크리스천에게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미국 생활에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왜 이렇게 말 끝마다 “Thank you”가 많습니까? 심지어 벌금을 내면서도 “Thank you”라고 합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감사절이 시작한 나라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어디를 급히 가다가 무심코 뒤를 봤더니 경찰 차가 정지 신호를 보내면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차를 세웠더니 까만 선글래스를 쓴 키가 큰 무섭게 생긴 경찰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창문을 내리고 그 날 따라 왜 그랬는지 “Thank you!”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경찰이 “Thank you? For What?” 하면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Thank you for giving me a ticket”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경찰이 저를 잠시 바라보더니 “Ok, you go. Be careful next time” 하면서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 그 경찰에게 “Thank you” 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보스턴은 감사의 도시입니다. 여기서 추수 감사절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의 피 속에 믿음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이 DNA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여호와께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12절) 우리에게 단 한 순간도 감사의 이유가 없는 순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1/15/2020 | In Times Of Trouble 32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요한복음 15:13-17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 본문 말씀에서 우리 마음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방금 전에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Now you are my friends)”라는 15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자기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예수님에게서 ‘권위의식’이라든지, 또 제자들과의 ‘차별의식’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2:2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받으셨으며,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는 성경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 일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불러 주신 일이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인데요.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약속을 지키겠다.” (창세기 18:17-19) 이 말씀을 읽을 때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나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렇게 읽으면 이 말씀의 뜻이 더 잘 들어옵니다.
친구 간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하시려고 하는 모든 계획을 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두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말 엄청난 일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읽는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느냐 하는 것이지요. 어느 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 (Ur)’를 떠나 ‘하란 (Haran)’으로 이사를 갑니다. 여기서부터가 의문투성이입니다. ‘우르’는 그 당시 문명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왜 데라는 ‘우르’를 버리고 식구들을 데리고 ‘하란’으로 이사를 갔을까요? 그런데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죽습니다.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이곳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이 창세기 12장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궁금했던 것이 창세기 18장에 가서 모두 풀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가정의 자녀들이 얼마나 축복을 받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데라가 식구들을 데리고 우르를 떠난 것은 사실은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친구’라는 말은 아주 ‘친밀한 관계 (an intimate relationship)’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게 됩니다. 나에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정말 엄청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모든 것이 분명한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마치 시야(視野)가 뿌옇던 것이 눈에 맞는 안경을 쓰니까 시야가 밝아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아, 결국 하나님과 친구가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소수의 사람들만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오늘 말씀 14-15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이제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Now you are my friends, since I have told you everything the Father told me).”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이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에는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간 따라다니면서도 끝까지 예수님과 다른 꿈을 꾸었던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한 번도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할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하는 것을 너희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You don't understand now what I am doing, but someday you will).” (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후 (someday)’는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날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게 모두 예수님께서 일방적(一方的)으로 하신 일이었지 제자들이 원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버지께 들은 말씀을 모두 너희에게 들려주었으니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조셉 스크리븐 (Joseph M. Scriven, 1819-1886, 영국)이라는 아일런드 (Ireland)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습니다. 그는 더블린에 있는 Trinity College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루 앞 둔 날 저녁, 약혼녀와 강 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강둑을 따라 말을 타고 오던 약혼녀가 갑자기 말이 놀라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급류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약혼녀가 죽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스크리븐은 그 후 아일런드를 떠나 캐나다로 갑니다. 충격을 잊고 새로운 환경에서 삶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캐나다에 정착한 스크리븐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캐나다에 이민 온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 그들의 일손을 거들어 주기도 하고, 땔감을 마련하는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됩니다. 그 때의 기록을 찾아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Scriven was remembered locally as a pious and charitable preacher, almost saintly, whose innumerable good works and charities were carried out despite his own poverty and despondency, and generally performed in secrecy.” 그러다가 엘리자(Eliza)라는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혼을 몇 주 앞두고 엘리자가 폐렴에 걸려 죽습니다. 스크리븐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미처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아일런드에 있는 어머니가 아파 사경을 헤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때 스크리븐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시를 씁니다.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to bear! what a privilege to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O what peace we often forfeit O what needless pain we bare! All because we do not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Have we trials and temptations? Is there trouble anywhere? We should never be discouraged, Take it to the Lord in prayer. Can we find a friend so faithful Who will all our sorrows share? Jesus knows our every weakness, Take it to the Lord in prayer.” 이 시는 스크리븐이 그 동안 많은 상처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를 친구로 받아 주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던 그의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시에 Charles Crozat Converse (1892-1918, 미국)라는 작곡자가 곡을 붙여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스크리븐은 그가 어머니를 위해 썼던 이 시가 유명한 찬송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게 될지 몰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찬송가에 대해서 이런 평을 했습니다. “We are living in crazy times, but no matter what may be happening in your life, know that there is someone that is madly in love with you and is always ready to meet with you and bring comfort. Matter of fact, Jesus is so in love with you that he proved it by dying for you…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ohn 15:13 (우리는 지금 미쳐 돌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당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고, 당신을 위해 위로를 준비하고 계시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그는 그의 죽음으로 이것을 증명했다. 성경에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다).”
저는 오늘 요한복음 본문 말씀과 스크리븐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과연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다섯가지 그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 간에는 비밀이 없는 법인데,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모두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니까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절). 말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은혜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undeserved God’s favor (받을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호의)’ 아닙니까? 은혜는 우리의 이성과 논리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말이 안 되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 (privilege)’입니다. 스크리븐은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스크리븐이 말한 것처럼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구가 된 사람들은 다릅니다. 스크리븐의 찬송가 가사를 다시 한번 보세요. “O what peace we often forfeit O what needless pain we bare! All because we do not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셋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목적과 삶의 스타일이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스크리븐에 대한 다른 기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He was deeply respected locally for his charity, piety, lack of concern for his own needs, and adherence to truth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선과 경건과 그리고 자신의 필요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이다 (1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이나 율법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내 계명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복음 1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그의 말씀을 실천합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생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자기 생에 대한, 자기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면 우리 역시 우리의 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전과 다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됩니다.
FKCC 교우 여러분, 우리는 천국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친구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신 우리의 친구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을 모두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스크리븐이 말한 대로 주님께 말씀드리지 않아서 주님이 약속하신 평화를 잃어버리고, 쓸데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11/8/2020 | In Times Of Trouble 31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We Never Give Up
고린도후서 4:15-18
1941년 10월 29일,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모교인 해로우학교(Harrow School)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처칠은 가까스로 연설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습니다. 단상에 올라 간 처칠은 모자를 벗고 한참이나 학생들을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학생들은 처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처칠은 조산아로 태어나 말을 더듬었습니다. 공부에 뛰어나지 못했던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했습니다. 그 후 정계에 진출하여 하원의원이 되어 통상장관, 재무장관, 해군장관을 거친 후 영국의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처칠이 모교를 방문하여 연설을 하게 되었으니 모두들 감동적인 연설을 기대했습니다. 처칠이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주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시 마세요.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간에 좋은 뜻으로나 영예로운 확신을 가지고 포기하는 것 말고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강압적인 힘이나 또는 적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절대로 굴복하지 마세요 (This is the lesson: Never give in, never give in, never, never, never, never-in nothing, great or small, large or petty-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ur and good sense. Never yield to force; never yield to the apparently overwhelming might of the enemy).” 이 말을 하고 처칠은 벗었던 모자를 집어 쓰고 퇴장했습니다. 졸업생들의 박수 갈채가 한참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처칠은 1940-1945년까지, 그리고 1951-1955년까지 두 차례 영국 수상을 지냅니다. 제 2차세계대전이 1939년에 일어났잖아요? 1940년 처칠은 영국 의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내가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호된 시련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I have nothing to offer but blood, toil, tears, and sweat. We have before us an ordeal of the most grievous kind. We have before us many, many long months of struggle and of suffering).” 이 연설은 지금까지 명 연설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처칠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처칠의 연설에 “Never give in (포기하지 마세요)”이라는 말이 나오고,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4장 본문 말씀에도 “That is why we never give up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16절)”이라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처칠이 무슨 생각으로 “Never give in”이라는 말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한번 뜻을 세웠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포기하지 말고 뜻을 이루어 나가라는 뜻으로 그 말을 했을까요? 아니면, 지금 전쟁 중인데, 연합군이 세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합심해서 싸우고 있으니, 너희들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불의한 세력에 지지 말고 싸워야 한다고 역설한 것일까요? 아마도 처칠은 그런 뜻으로 연설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슨 뜻으로 “바로 이것이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썼을까요? 바울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먼저 15절에 나오는 “이 모든 일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All of this is for your benefit)”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모든 일’이 무슨 일인지 알려면 오늘 본문 말씀 앞에 나오는 말씀을 읽어봐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이 받는 고난의 삶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압박을 받아도 눌리지 않으며, 난처한 일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매를 맞아 넘어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8-9절)
여러분,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잘 읽어야 합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고난의 삶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전도자들이 이런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서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자신이 받고 있는 고난의 삶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 설교에서 빅터 프랭클 (Victor E. Frankl, 1905-1997, 오스트리아)이 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빅터 프랭클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In some ways suffering ceases to be suffering at the moment it finds a meaning such as the meaning of a sacrifice (고난이 의미 있는 고난으로 다가올 때, 예를 들면 고난이 희생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발견될 때는, 고난이 멈추는 때가 있습니다).” 프랭클의 이 말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영국의 프로 축구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Tottenham)’에 손흥민이라는 한국 선수가 있습니다. 지금 손흥민이 하도 잘하니까 언론들이 “손흥민은 가장 저 평가된 선수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잘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흥민은 감독 말을 잘 듣습니다. 그리고 성실합니다. 사고를 치지 않고, 스캔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히려 손흥민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저 평가된 두 그룹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청년부 간사들입니다. 청년 시절에 주일학교 교사로 성실하게 봉사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교사들이 수고 많이 하는 줄은 알지만 그렇다고 교사들을 주목하지는 않습니다. 교사들처럼 청년부 간사들도 교회 안에서 저 평가된 사람들입니다. 간사직이 얼마나 중요하고 간사들이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느냐고 하고 말하면 다들 그렇다고 수긍합니다. 하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간사들의 수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청년부 간사로 섬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청년들에게 성경 말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담도 해야 하고, 때로 팀원들 중에 연주회가 있거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챙겨줘야 하고, 팀원들에게 마음을 써야 하고 시간을 내야 합니다.
이 외에도 교회 안에 수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가대원들도 그렇고, 오케스트라 대원들도 그렇고요. 목회부, 미디어부원들도 수고를 많이 합니다. 힘들게 일을 하다 보면 당장 하는 일을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지금 자기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해석을 해 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 사도 바울과 전도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지? 다른 사람들처럼 가정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하지?” 실제로 성경에 보면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 집어치우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힘든 상황만 보면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해석을 할 때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이 가치관에 의해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성경적인 가치관 (the biblical values)’ 혹은 ‘크리스천 가치관 (the Christian values)’이 마음 중심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누가 ‘크리스천의 가치관’ 리스트를 만든 것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1. Show love (사랑을 보여라) 2. Find joy in the chaos (혼란 속에서 기쁨을 찾으라) 3. Seek peace (평화를 추구하라) 4. Be patient (인내하라) 5. Be kind (친절하라) 6. Be good (사람들을 선하게 대하라) 7. Be faithful (성실하라) 8. Be gentle (온유하라) 9. Have self-control (절제하라) 10. Be thankful (감사하라) 11. Be humble (겸손하라) 12. Serve others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 이 리스트가 새롭게 보이나요? 제 눈에는 전혀 새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1번-9번까지는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고요. 10번-12번은 여기에 제가 3개를 더 추가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이런 가치들이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이 가치관을 가지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해석해야 합니다.
청년 시절은 ‘formation period (형성기)’입니다. 원래 이 말은 피아제 (Jean Piaget, 1896-1980)의 ‘인지 발달의 4단계 (Four Stages Of Cognitive Development)’에 나오는 말입니다. 피아제는 ‘Formal Operational Stage (형식적 조작기)’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계는 11살부터 청년 시기까지를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가설을 세우고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고, 체계적인 사고가 가능한 시기입니다. 저는 이 시기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간사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교사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간사들은 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에 있는 사람들을 간사들이 옆에서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 아닙니까? 비록 우리가 하는 일이 저 평가될 수 있지만, 이 일이 어렵고 힘들 때는 스스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지, 크리스천의 가치관을 가지고 해석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절대로 이 일을 그만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지금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는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해석하면서 고난을 이기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 말씀이 15-16절 말씀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받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다” 이런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17-18절 말씀입니다. “For our present troubles are small and won’t last very long. Yet they produce for us a glory that vastly outweighs them and will last forever! So we don’t look at the troubles we can see now; rather, we fix our gaze on things that cannot be seen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 작은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문제들이 영광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영광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스러운 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도자들이 받는 고난의 현장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받고 있는 고난을 크리스천의 관점을 가지고 해석해 보면 그 고난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보세요. 지금 내가 당하는 환난이 장차 우리가 받을 ‘영원한 영광’과 비교하면 ‘가벼운 환난 (small troubles)’이라고 하고, ‘잠깐 당하는 고난’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영원한 영광’이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Never give in!” 이 한마디 연설로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그가 즐겨 사용하던 V자 승리 사인 하나로 2차 대전 때 위축된 국민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중에도 우리는 이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스스로 용기를 내고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그의 이 말은 단순히 편지를 받아 읽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이 고난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받는 고난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답답하고 어려운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과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 대로, 이곳에서 생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또 그들 대로 걱정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문제에 시선을 두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크리스천의 가치관을 가지고 해석해 보십시오. 그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찾도록 하십시오. 그 의미가 크면 클수록 여러분이 가진 문제들이 ‘별 것 아닌’ ‘가벼운’ ‘잠깐 겪는’ ‘넉넉히 참고 이겨 나갈 수 있는’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