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2/2018 | 대강절 첫째 주일 메시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Until Our Lord Jesus Christ Comes Again
데살로니카전서 5:14-24
마지막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자신을 지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3절). 우리의 영과 혼과 몸, 모두를 깨끗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몸과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 것처럼,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온 몸, 곧 영 (the spirit)과 혼 (the soul)과 육신 (body)’을 잘 지켜야 합니다. 금욕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 (spirit)’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몸 (body)’는 학대하거나, 막 굴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상에서는 영과 몸을 구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 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 이 말씀에서 ‘몸’은 단순히 ‘body’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전체를,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11/18/2018 | 추수감사절 메시지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For Those Who Forget God
시편 50:22-23
감사절 때마다 생각나는 네 컷 만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간 신문마다 네 컷 만화를 실었습니다. 동아일보에는 ‘고바우 영감’이라는 김성환 화백의 네 컷 만화를 실었고요. 중앙일보에는 ‘왈순 아지매’라는 정운경 화백의 네 컷 만화를 실었습니다. 서울신문에는 ‘코주부’, 경향신문에는 ‘장도리’, 또 여기 저기 신문을 옮겨 다녔던 안의섭 화백의 ‘두꺼비’도 유명한 네 컷 만화입니다. 어느 신문에서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추석이 되어서 과일 가게에 들려 선물로 포장된 감을 사서 들고 부모님을 방문합니다. 부모님께 사 온 선물 꾸러미를 전해 드리고, 밖으로 나와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감사드렸어!”
네 컷 만화가 그랬습니다. 그 당시의 정치나 문화, 사회 상을 고발하는 내용을 네 컷으로 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받으면 먼저 만화를 봤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부모님께 대한 정성과 효도의 마음이 사라지고 핵가족 중심의 삶으로 옮겨 간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추석이 되면 선물 꾸러미 하나 사 들고 가서 부모님께 드리면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 당시의 시대 상을 그런 식으로 비판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한 해 동안 거두어 드린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조상들과 부모님에 대한 감사도 중요하지만, 성경에서 배우는 감사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잠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1:7). 감사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모든 감사의 근본입니다. 근본이라는 말은 시작 (beginning)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감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써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지식을 시작도 못한 사람이니까 지식이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똑 같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의 삶을 시작하지 못한,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50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아삽 (Asaph)’이라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을 ‘다윗’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만, 의외로 ‘다윗’이 쓴 시편은 전체 150개 중에 73개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윗’ 외에 다른 사람이 쓴 것이 77개나 됩니다. ‘고라의 자손’이 쓴 것이 10개, ‘솔로몬’이 쓴 것이 2개, ‘헤만’이 쓴 것이 1개, ‘에단’이 쓴 것이 1개, 모세가 쓴 것이 1개, 저자를 알 수 없는 것이 50개, 그리고, ‘아삽’이 쓴 것은 12개입니다. 시편 50편, 73편부터 83편까지 모두 12개의 시편을 ‘아삽’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삽’이라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쓴 시편을 읽어보면서 ‘아삽’이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겠다 하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삽’이 쓴 시편들을 보면 그 내용이 매우 예리하고 비판적입니다. 이런 것으로 봐서 ‘아삽’이라는 사람은 한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의 특징은 시대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고민을 안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인의 특징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이런 특징을 잃어버리면 지식인의 자격을 상실한다고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배웠으면, 이 시대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이 시대가 흘러가는 대로 따라 사는 사람은 지식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떠맡아 짊어지고, 고민하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특권(特權)입니다.
아삽은 무엇보다도 그 당시 유대교의 형식적인 예배에 대하여 고민했습니다. 시편 50편은 참된 예배를 갈구했던 ‘아삽’의 고민의 결과로 쓰여진 것입니다. ‘아삽’이 고발하고 있는 그 당시의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배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4절, 23절). 여러분, 예배자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아삽’은 이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번 ‘아삽’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네가 드리는 제사를 탓하지 않는다. 네가 언제나 내게 태워 바치는 번제를 꾸짖지 않는다. 나는 네 외양간의 소나 네 우리 속에 있는 염소를 바라지 않는다.” (8-9절)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꾸짖지 않고,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배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자들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예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찬양예배 때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시편 100:4-5 말씀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의 성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찬양을 드리면서 그분의 뜰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분에게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분의 성실하심은 대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이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For the LORD is good and his love endures forever; his faithfulness continues through all generations.” 직역하면, “하나님의 궁전의 대문을 감사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의 궁전 뜰에 찬송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 감으로써 시작됩니다. 시편 100편에는 “그 문으로 들어간다 (Enter his gates)”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집의 문을 통과한 사람은 더 깊숙한 곳으로,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갑니다 (Enter his courts).” 어떤 사람이 그 문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말씀을 잘 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with thanksgiving)’ ‘찬양으로 (with praise)’ 성경에는 오직 ‘감사와 찬양’ 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른 어떤 조건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집의 문을 통과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목사라고, 장로라고, 집사라고, 교회 임원이라고, 성가대 지휘자라고, 반주자라고, 솔로이스트라고, 오케스트라 단원이라고 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의 대문에서부터 제지(制止)를 받습니다.
‘아삽’은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제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으냐 준비되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예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2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time is coming when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The Father is looking for those who will worship him that way. For God is Spirit, so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이 말씀에 ‘true worshipers (참된 예배자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시는데, ‘true worshipers’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삽이 말한 참된 예배자는 ‘with thanksgiving’,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아삽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참된 예배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을 내다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아삽이 말한 ‘with thanksgiving’은 예수님 버전으로 하면 ‘in spirit and in truth’이다.”
그러면,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아삽’은 왜 그렇게 예배자가 갖춰야 하는 감사의 마음을 그렇게 강조했을까요? 왜냐하면,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예배 의식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찬양이 준비되어 있고, 아무리 탁월한 설교자가 있어도, 예배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 예배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배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예배 안내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성가대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설교자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추수감사 헌금이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헌금은 예배자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드린 헌금이 아닙니다.
여러분,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지 않은 헌금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헌금에 대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옆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과부가 ‘두 렙돈 (two lepta)’을 헌금한 것을 보았습니다. 렙돈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제일 단위가 적은 코인입니다. 달러로 하면 센트라고 하기는 그렇고요, 가치로 따지면 한 20센트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1:1-4) 재미 있는 것은 그 때 당시에 성전 입구에 놓여 있던 헌금함의 모양이 나팔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나팔을 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 부자들은 헌금을 하면서 난 이만큼 헌금했다고 하면서 자랑했던 것과 헌금함의 모양이 꼭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부자들의 헌금에는 감사의 마음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넣었던 과부의 헌금에는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우리 마음에서 감사의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남편과 아내가 화를 냅니다. 아빠의 마음에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아서 야단을 칩니다. 예배 안내자들은 왜 얼굴 표정이 그렇지요? 뭔가 잔뜩 화가 난 얼굴들입니다. 성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중요한 날인데, 오늘따라 대원들이 시간을 지키지 않습니다. 지휘자의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가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어제 아침 간사 성경공부 때 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설교자가 무슨 이유로 감사의 마음을 상실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의 전략은 완전히 성공합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 ‘아삽’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22절 말씀 보십시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들아 (You who forget God)!” 예배자들이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예배자들에게 감사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 몸을 찢을 것이니, 아무도 너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22절) ‘이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그 뒤에 나오는 23절 말씀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23절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드리는 예배가 너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23절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나를 높이고 길을 예비하는 자이니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줄 것이다.” 이 말씀이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who offers a sacrifice of thanksgiving honors Me; And to him who orders [his] way [aright] I shall show the salvation of God.” 시편 50편 말씀의 요절(要節)입니다. ‘a sacrifice of thanksgiving’ ‘감사의 제사’ 혹은 ‘감사의 예배’를 말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준비해 가지고 나를 예배하는 사람이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합니다. 다른 것 없이, 감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What is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하는 질문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 대답에 모두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 살았던 ‘아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생의 ‘올바른 길 (his way aright)’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인생의 여정을 들여 다 보십시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8:20, 12:7, 8, 13:4, 13:18, 22:9). 1620년에 우리가 사는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Plymouth)에 도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지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플리머스 플랜테이션 (Plymouth Plantation)’을 한번 방문해 보십시오. 그 때 그 사람들이 살았던 집은 예전 한국의 어느 시골 가난한 집의 구조와 비슷합니다. 작은 뜰과 작은 부엌, 그리고 작은 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이들이 지은 교회에 이런 현판을 붙였다고 합니다. “Think and Thank (생각하고 감사하라)!” 이제는 이 전통을 이어 우리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예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자들이 되십시오.
11/11/2018 | 열매 맺는 계절 5
수고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You Will Eat The Fruit Of Your Labor.
시편 128:1-4
오늘로 열매 시리즈 설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열매는 식물들이 철을 따라 일년에 한 번씩 맺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수액(水液, sap)을 빨아 올리고, 양분을 공급받고, 햇볕을 받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비유적으로 보면, 사람도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물이 풍부한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시냇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은 우리의 삶에 영양분을 공급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햇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받아야 할 햇볕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양분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누구나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마치 식물들이 제 철이 되면 열매를 맺듯이, 사람도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Yet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전도서 3:11)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때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 때를 우리는 준비하면서,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아간다.” 그런데, 사람들의 물레방아는 빨리 돌아갑니다. 조급합니다. 참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부지런히 수액을 빨아 올리고, 영양분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열매에 대한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1:6-11에 있는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진 것과 같이, 이제 여러분에게 전해졌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서 참되게 깨달은 그날로부터, 여러분 가운데서와 같이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와 함께 종이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이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골로새 (Colosse)는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직접 골로새에 가지 않고 에바브라 (Epaphras)라는 자기의 동역자를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니까 그 결과가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결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기도했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이것이 바울의 기도 내용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복음이 자라서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6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is same Good News that came to you is going out all over the world. It is bearing fruit everywhere by changing lives, just as it changed your lives from the day you first heard and understood the truth about God's wonderful grace.” 복음이 전파된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는 말씀은 수사학적인 표현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 복음이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8편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예배 드리러 가면서 불렀던 노래라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하면 고된 마음과 몸을 달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까지 예배를 드리러 갔던 유대인들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우리 조상들이 일하면서 노래를 불렀던 것과, 예배 드리러 가던 유대인들이 노래를 불렀던 마음이 같진 않겠지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그것도 맨 몸이 아니라 제물로 드릴 양을 데리고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길을 가다 보면 예배 드리러 가는 사람들을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같이 시편 128편을 불렀을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예배 드리러 가는 마음들을 서로 공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먼 길을 지루하지 않게 갔을 것입니다.
그 때 불렀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How joyful are those who fear the Lord - all who follow his ways)!” (1절) 성경에 ‘fear’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가장 유명한 말씀이 잠언 1: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다.” 또 9:10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명철의 시작이다.” 영어의 ‘fear’라는 말이 우리 말 성경에 ‘경외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fear’라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무서워하다’입니다. 하지만, ‘fear’라는 말에는 ‘무서워하다’라는 뜻 외에 ‘to have reverential awe of (~에 대한 존경하는 두려움을 갖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fear’에는 단순히 ‘무섭다’는 뜻이 있고, 동시에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 드리러 가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이렇게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8: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How joyful are those who fear the Lord - all who follow his ways”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동일한 사람들로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다.” 맞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는 일은 지속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는 일은 오랫동안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재미가 있으니까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일이 좋아서 스스로 합니다. 지난 주에도 시편 1편 말씀에서 그런 말씀을 읽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They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어떤 신사가 길을 가다가 아이를 등에 업고 가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아이가 아이를 업었으니까 뒤뚱뒤뚱하는 것이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서 그 신사가 그 아이에게 그랬습니다. “얘, 힘들겠다. 그만 내려 놓지 그러니?” 그랬더니 이 아이가 그 신사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힘들지 않아요! 이 애는 내 동생이예요!” 이 신사는 그 때 어떤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등에 업으면 힘들지 않는 것처럼, 기뻐서 하는 일, 즐거움으로 하는 일도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입니다. 비록 그 길이 멀고 힘들지만,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기쁨으로 그 길을 갑니다.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말씀대로 사는 일이 힘들지 않습니다.
2절 말씀을 볼까요? “그는 수고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복과 번영이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You will enjoy the fruit of your labor. How joyful and prosperous you will be).” 이 말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수고의 열매를 먹는다’는 말씀입니다. 애써서 하는 일에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는데, 그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순탄하게 학위를 마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렵게 학위를 받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연구과정으로 들어가서도 어떤 사람들은 순탄하게 그 과정을 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구에 성과가 있어서 무슨 저널에 논문이 실렸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의 열매’를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힘들게 연구 과정을 밟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가 4개월을 죽자고 했던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절망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의 열매’를 먹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큰 횡재는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하면, 이것처럼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You will enjoy (eat) the fruit of your labor!” 이런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복과 번영이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How joyful and prosperous you will be)!”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나 기쁘고 복된 사람이 될런지요!”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에 나와 믿음을 기르고 있는 청년들이 수고의 열매를 먹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의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담임 목사로서 저절로 그런 기도가 입에서 나오고, 여러분들의 얼굴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학생 시절을 여기서 보내고, 대학원, 박사 후 과정을 여기서 보내면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공부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젊음도, 여러분의 열정도, 힘도, 여러분의 꿈과 희망도 전부 여기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고의 열매’를 먹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문제는 어떻게 하면 ‘수고의 열매’룰 먹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가지 ‘수고의 열매’를 먹을 수있는 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수고의 열매’를 먹을 수 없습니다. ‘수고의 열매’를 먹는 것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 127편 역시 유대인들이 예배 드리러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됩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경비병들의 보초가 헛됩니다. 먹고 살고자 애쓰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리에 눕는 일이 무슨 소용 있을까요?” (1-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t is vain for you to rise up early, to retire late, to eat the bread of painful labors.” (NASB) 개역성경에는 ‘to eat the bread of painful labors’를 ‘수고의 떡을 먹는다’라고 멋지게 번역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리 고생하고, 하루 종일 일해도 결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수고한 모든 일에 열매를 보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처럼 복 있는 사람입니다 (That is the Lord’s blessing for those who fear him).” (4절)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고의 열매’를 먹습니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우리가 애쓴 만큼 ‘수고의 열매’를 먹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요한복음 15: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대로, 열매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열매 없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수고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수고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열매 시리즈 설교를 마치면서 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이 말을 가시적(可視的, visible)인 실적이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열매 시리즈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반드시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열매’도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받는 고난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열매’를 주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열매’는 없어도 하나님과 여전히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는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의인들이 핍박을 받는 현실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하박국 (Habakkuk)이 불렀던 노래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 내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해 주셔서 가파른 산 위에서도 다닐 수 있게 하십니다.” (하박국 3:17-19)
11/4/2018 | 열매 맺는 계절 4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Like Trees Planted By Streams Of Water
시편 1편
요즘엔 사방 어디를 보든지 가을이 완연합니다. 나뭇잎들이 예쁘게 물들었습니다. 하도 색깔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 제 facebook에 올렸더니,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목사님 가을을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꿈과 같은 사진들입니다.” 우리는 사방 어디를 보나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고 있는데, 캘리포니아만 해도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날이 좋으면 MIT 다리에서 다운타운 쪽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좀 찍어야 하겠습니다. 학생들은 날마다 책 읽어야 하고, 과제를 해야 하고, 시험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아름다운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번은 아침 일찍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몹시 시장하셨습니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열매를 하나 딱 먹으려고 가 봤더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다시는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할 것이다!” (마가복음 11:14) 그러자 즉시 이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작다면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고,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무화과나무 사건 바로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너희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같은 말씀에 이런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세우겠다.” (요한복음 2:19)
별 것 아닌 것 같은 무화과나무 사건이 성전 구실을 못하는 성전을 허물어 버리고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되어 엄청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나무나, 성전이나, 사람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사느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인생을 사느냐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편 1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다윗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성서학자들은 이 시편 1편을 다윗이 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서 그렇게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1편을 누가 썼는지 모르니까 그냥 저자를 ‘psalmist (사미스트)’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 1편의 사미스트는 두가지 길을 시의 형식을 빌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들이 가는 길 (the path of the wicked, 1, 2절)’이고, 다른 하나는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 (the path of the godly, 6절)’입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면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생명과 복, 죽음과 멸망의 길을 내 놓았습니다. 부디 여호와를 사랑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살고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따르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섬기면,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은 망할 것입니다.” (신명기 30:15-20) 참 이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신 일을 모두 목격(目擊)했습니다. 그 모세가 마지막 고별 인사를 하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백성들 앞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과 복의 길을 외면하고 죽음과 멸망의 길을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태복음 7:13-14)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문은 큰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거절하고,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을 선택합니다.
모세도, 예수님도, 시편 1편을 쓴 사미스트도 우리 앞에 두 길을 보여줍니다. 어느 길을 갈 것인지 결정하라고 합니다. “생명과 복의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멸망의 길을 갈 것이냐?” “좁은 문으로 들어 갈 것이냐?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냐?” “경건한 사람들이 걷는 길을 걸을 것이냐? 죄인들이 걷는 길을 걸을 것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미스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꼬임을 따르고 (following the advice of the wicked, 1절)’ ‘죄인들이 다니는 길에 서 있고 (standing around with sinners, 1절)’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는 (joining in with mockers, 1절)’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은 진짜 같습니다. 그들의 말은 진짜처럼 위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늘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사자성어입니다. 참된 것은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것은 빛이 납니다. 화려합니다. 그 화려한 빛에 모두 속아 넘어갑니다. 죄인들은 밝은 곳으로 다니지 않고 어둠 속으로 다닙니다. 죄인들이 다니는 길에 서 있다는 말은 죄인들이 하는 일에 관계하고 끼어든다는 말입니다. ‘빈정댄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다른 사람의 흉을 보고 험담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죄성(罪性, sinful nature)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멸망의 길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죄인의 길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사미스트는 죄인의 길을 걷는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They are like worthless chaff, scattered by the wind).” ‘chaff’는 곡식의 껍질을 말합니다. 우리 말로 ‘겨’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 ‘키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곡식을 키 (winnow) 넣고 키질을 하면 무거운 곡식은 남고 가벼운 겨는 날아갑니다.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죄인의 길을 따르는 결과는 허무합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겨처럼 다 날아가 버립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계속 읽어 보십시오. 이제 사미스트는 경건한 사람들이 걷는 길을 따라 사는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사미스트는 이런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대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But they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meditating on it day and nigh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설교자인 제 눈에는 ‘delight’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 장로교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교파를 많이 따졌었는데, 요즘 청년들은 교파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참 잘된 일 같습니다. 장로교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교리를 문답식으로 만들어 놓은 책입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질문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입니다.
시편 1편에서 사미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미스트는 “Those who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meditating on it day and night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깊이 묵상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우니까 밤낮으로 묵상을 해도 싫지 않습니다. 지겹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라는 말씀을 본 적이 있습니까? 구약 느헤미야 8:10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을 해도 즐거운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은 인생의 행복을 어떤 환경이나 물질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행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 뜻을 생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목적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미스트는 다시 경건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3절) “They are like trees planted by streams of water, bearing fruit each season. Their leaves never wither, and they prosper in all they do.”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니, 이 나무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마셔도 마셔도 물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냥 ‘water’라고 하지 않고 ‘streams of water’라고 했잖아요? 우리 말로 번역하면 ‘물줄기’입니다. 그냥 물 옆에 심긴 것이 아니라 물줄기가 흐르는 마르지 않는 강 옆에 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물이 부족합니다. 강이라고 해야 요단강 하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마르지 않는 강가에 심긴 것입니다. 강가에 심긴 나무가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지금 사미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이 ‘강가에 심긴 나무’에 대한 말씀같이 보이지만, 정말 사미스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 강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미스트는 죄인의 길을 따르지 않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사람들이 바로 강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37-38 말씀입니다. “축제가 절정에 달한 명절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Whoever believes in me, as the Scripture has said, stream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him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장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성전 뜰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28). 성전 뜰에서 초막절을 지키려고 온 사람들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데도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내버려 두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성전은 유대교의 심장부입니다. 그 심장부에서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 성전은 전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수명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교의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참 성경 말씀이 오묘하지 않습니까? 사미스트가 말하고자 했던 ‘물가에 심긴 나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They prosper in all they do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하는 일들이 잘 될 것입니다).” (3절) “For the LORD watches over the path of the godly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의 길을 지켜 주십니다).” (6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미스트는 ‘의인들만 들어가는 모임 (the assembly of the righteous, 5절, NIV)’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 모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죄인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 모임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개역개정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Sinners will have no place among the godly).” 이 말씀을 읽다가 안타까운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의인들이 모이는 곳에 와서 어디 앉을 자리가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이 사람이 앉을 자리는 없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작은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차이가 별로 심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형통한 인생을 살게 되고, 의인들의 회중에 들어가게 되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결국은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