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31/2018 | 송구영신예배 메시지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Overwhelming Victory Is Ours
로마서 8:28-37
오늘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로마서 8:28-37에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생활을 좀 하고, 믿음이 좀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오늘 말씀이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설교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이고, 의미가 있는 말씀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로,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에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견딜 힘이 없습니다.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알고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아들을 본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9절). 그 아들을 본받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서 그의 아들과 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결코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님과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일입니다.
둘째로,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1절) “If God is for us, who can ever be against us?” 성경에는 이와 같은 뜻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33:12) 또 시편 118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가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돕는 분이십니다......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고관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6-9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곧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신다면 아무도 우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겁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한자 말에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진리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개입된 사람이 하나님께 피한다고 하고,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아전인수격으로 성경 말씀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만들어 비텐베르크 (Wittenberg) 대학의 교회 게시판에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황의 지위와 권력에 도전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루터가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자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국회에 소환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루터는 화형(火刑)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루터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God help me. Amen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가 진리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루터 편에 서 계셨고, 루터를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도움으로 삼고 인생을 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언제나 진리 편에 서 계십시오.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말고 늘 옳은 편에 서 계십시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이익이 없어도 진리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속에, 나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성경적인 ‘패러다임 (paradigm)’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시스템, 혹은 틀 (frame)을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paradigm’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도 인간의 불행을 해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그 속에 요셉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환하게 들여다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고난을 해석하는 해석의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우리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쁜 일도 일어나고, 슬픈 일도 일어나고, 불행한 일도 일어납니다. 기쁜 일은 일어나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당황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 역시 절망할 것입니다. 이 때 자신의 불행을 해석할 ‘패러다임’이 없다면, 우리는 불행을 이길 수 없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나에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지 해석하고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면, 어쩌면 자기 삶을 포기하게 되고, 자기 삶을 송두리째 망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저 어쩌다가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 의미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십니다. 다시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유명한 예레미야 29:11-13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너희를 위해 세운 나의 계획은 너희에게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삶에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하고 위로합니다. 오늘 말씀은 결코 그런 값싼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수를 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가지 색실들을 이용하여 수를 놓습니다. 다양한 색실들을 이용하면 더 멋진 수를 놓을 수 있습니다. 광부들이 사는 마을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갱이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광부들이 죽은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불행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도 불행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그 마을에 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여러분,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 아름답게 수를 놓은 북마크입니다. 여러분 여기를 보십시오” 하면서 북마크 뒷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저리 색실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다시피 색실들이 얽혀 있어서 뒷면에 무엇이 수놓아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이 바로 이렇습니다. 왜 나에게, 우리 가정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뒷면을 보십시오” 하면서 북마크의 뒷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수놓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목사님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오래 전에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오늘 마침 생각이 나서 여러분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성공이나 실패나 궂은 일이나 좋은 일이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한 올의 실이 되어 색색가지의 아름다운 수를 놓습니다. 수를 놓는데 여러 가지 색실이 필요합니다. 빨강, 노랑, 파랑, 이런 색실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검은 색실도 필요하고, 어둡고 칙칙한 색실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실을 가지고 그분이 원하는 수를 놓습니다. 뒷면을 볼 때는 색실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어서 앞면에 무슨 수가 놓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거기에 아름다운 수가 놓여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간,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나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성경적인 해석의 ‘패러다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은 그 일들을 사용하셔서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한 해를 살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다 함께 31절 말씀을 읽어 볼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No, despite all these things, overwhelming victory is ours through Christ, who loved us).” (37절)
12/30/2018 | 송년예배 메시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누가복음 13:1-9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본문 말씀을 문맥(文脈)의 상황(context)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세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는 섬찟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실로암 타워가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무화과 나무 한 그루를 포도원에 옮겨 심었는데, 삼 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않아 주인이 실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개의 이야기가 각각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3, 5절)
예수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선동적 (煽動的)인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갈릴리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본보기로 갈릴리 사람 몇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면 그 때 희생된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실로암의 타워가 갑자기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도 엄청난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진과 쓰나미 (tsunami)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에 파키스탄과 인도의 접경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 엄청난 사상자가 났습니다. 그보다 더 엄청난 재난이 2004년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일어났습니다. 수마트라 앞 바다에서 쓰나미 (tsunami)가 일어나 인도양 연안의 여러 나라에 밀어닥쳐서 무려 십 육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 때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크리스마스를 경건하게 지내지 않고, 휴양지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쾌락을 좇던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이렇게 이런 말을 했다가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아니다!” (2, 4절) “No, and I tell you again that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too (그렇지 않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렇게 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엄청난 재난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과연 지금 식으로 이렇게 살아가면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자신의 삶을 반성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반면교사 (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행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compassion을 가짐과 동시에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Then Jesus told this story.” (5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이야기 역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이 사람은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을까요? 몇 년 전에 유행하던 “당연하지!” 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은 “당연하지!”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를 심어야지.” “당연하지!” “그러면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당연하지!” “이 사람은 무화과 열매를 기대했을 텐데?” “당연하지!”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삼 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그 사람이 화가 났겠네?” “당연하지!” “이 이야기가 한 해를 보내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지 않을까?” “당연하지!”
무화과나무는 보통은 그냥 길 가에 심겨 있는 나무입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기에 된 것은 그 포도원 농장 주인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와 여러분이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같은 목사님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라고 찬송시를 썼습니다. 한 때는 노예선의 선원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존 뉴톤 목사님이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 목사님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존 뉴톤 목사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라는 영국의 정치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영국 국회에서 노예제도법을 철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윌버포스가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던 사람이 바로 존 뉴톤 목사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존 뉴톤 목사님은 이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데 공헌했습니다.
그냥 길거리 아무 데서나 자라야 할 그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으로 옮겨 심긴 것처럼, 오늘 우리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5:2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주인은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기대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A man planted a fig tree in his garden and came again and again to see if there was any fruit on it, but he was always disappointed (자기 정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은 이 사람은 열매가 열렸는지 보려고 여러 번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실망했습니다).” (6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열매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0-21)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8)
열매를 맺고 안 맺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 책임(責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맡겨진 임무나 의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esponsibility’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응답할 수 있는 (respond) 능력 (ability)’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올바로 응답하는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16편에 ‘구원받은 자의 감사의 찬송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How can I repay the LORD for all his goodness to me)?” (12절) 하나님의 은혜를 이만큼 받았으면 그 은혜에 respond (응답)하고, 그 은혜에 repay (보답)하는 사람, 이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한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올바로 respond하지 못하고, 올바로 repay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5:5 말씀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다 (Master, we'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n't caught anything.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어떻게 시몬 (베드로)이라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응답했는지 그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오랜 그의 경험에서 나온 어부의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이라는 사람은 그날 아침에 자기의 경험을 송두리 채 뒤엎어 버렸습니다.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말씀하시는 그 분 앞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경험과 지식을 송두리 채 부정(否定)해 버린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발명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착상에서 나오는데, 이런 아이디어는 기존의 발상을 깨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상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창의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해왔던 대로, 늘 자기가 믿음생활 해 왔던 방식대로, 그렇게 믿음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한 단계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만일 베드로가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경험이나 자기 상식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but (그러나, 하지만)’ 이 한마디로 자기를 부정했을 때, 베드로는 자기 앞에 서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기 방식을 내려 놓지 않는 사람은 결코 창의적인 믿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믿어왔던 방식대로 믿음생활 고집한다면, 또 다시 우리는 열매 없는 믿음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창의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실망한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베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7절) 우리 말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단순히 무용지물이 아닙니다. 그냥 쓸모가 없는 나무가 아니라 자리만 차지하고, 땅만 버리는 해를 끼치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나무입니다. 한번은 윌리엄 버클리(William Barclay)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The most searching question we can be asked is, ‘Of what use were you in this world?')." ‘searching question’이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묻는 중요한 질문을 말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자신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 “나는 교회에 얼마나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빚을 갚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두 바다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고, 하나는 사해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이 맑습니다. 그 바다에 많은 고기가 삽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아무 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두 바다의 차이점은 한가지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끊임없이 물을 받아 아래로 흘려 보냅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지형상 물이 흘러 나갈 수 없는 바다입니다. 그 결과 하나는 생명의 바다가 되고, 하나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책임 있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열매가 맺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런 사람들은 죽음의 바다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놔 두십시오. 제가 나무 주위에 고랑을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만일 내년에 열매를 맺으면 놔 두시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 버리십시오.” (8-9절) 이 과원지기 덕분에 이 무화과 나무는 다시 일년 동안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중보 하시는 (intercede) 분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울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Reiner Maria Rilke, 1875-1926, 오스트리아)의 시 ‘엄숙한 시간 (Ernste Stunde)’이 바로 그런 시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걷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오늘 한 해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시간,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한 해 동안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기도 덕분에 또 한 해를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식으로 계속 살지 않겠다는,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며 책임 있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
12/23/2018 | 성탄절 메시지 2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Who Was Born In Bethlehem, The House Of Bread
누가복음 2:1-14
세계 각 나라의 재미 있는 크리스마스 인사입니다.
영어로는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브라질어로는 펠리쓰 나딸 (Feliz Natal)
헝가리어로는 볼록 카락소니 (Boldog Karacsony)
이탈리아어로는 부옹 바딸리 (Buon Batale)
스페인어로는 펠리쓰 나비닷 (Feliz Navidad)
독일어로는 프뢸리히 베인아크텐 (Frohliche Weinachten)
스웨덴어로는 글래드 율 (Glad Yul)
프랑스어로는 즈와이유 노엘 (Joyeux Noel)
희랍어로는 칼라 크리스토게나 (Kala Christougena)
중국어로는 솅탄 쿠와일러 (Sheng Tan Kuailoh)
일본어로는 메리 구리수마수
러시아어로는 스로체스토봄 크리스토빔 (Srozhestvom Khristovym)
필리핀 따갈어로는 말리가양 빠스코 (Maligayang Pasko)
멕시코어로는 펠리츠 나비대드 (Feliz Navidad)
베트남어로는 니언지엡 노엘 쭉 지앙신 부이베에 (nhan dip noel chuc giangsinh vuive)
태국어로는 쓱 싹완 크릿쓰마아쓰 (ssuk ssan oan Christmas)
체코어로는 베셀레 바노체 (Vesele Vanoce!)
미얀마어로는 뾰쉰 차미엣바세 (Pyawshwen chanmyeitbazay)
한국어로는 메리 크리스마스 혹은 기쁜 성탄절 되세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Augustus)였습니다. 그는 BC 27-AD 14년까지 무려 41년 동안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였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통치 시대를 ‘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고 부를 만큼 로마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세금제도를 개선했고, 넓은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망을 구축하여 ‘모든 길을 로마로!’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인구 조사를 하도록 칙령 (decree)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시리아 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총독 구레뇨 (Quirinius)의 지시를 받아 자기들의 고향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아라는 여자와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는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기록한 완벽한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드라마가 재미 있으려면 구성이 치밀해야 합니다. 구성이 치밀하지 않고 엉성하면 보는 사람들이 “에이,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면서 재미없어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얼마나 구성이 치밀합니까? 만일 그 때 아우구스투스가 인구 조사를 하라는 칙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기를 낳았을 것입니다. 또 칙령이 조금만 일찍 내렸거나 늦게 내렸다라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기를 낳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타이밍에 인구 조사를 하라는 칙령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예수님께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이토록 강조하고 있을까요? 제가 베들레헴 마을에 가 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직선 거리로는 약 17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중간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다니지 않았던 그 당시의 관습을 감안한다면 약 230km 정도 거리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걸어서 간다면 약 10일은 가야 하는 거리에 있습니다.
보스턴 다운 타운에 있는 존 행콕 타워 (John Hancock Tower) 옆에 ‘삼위일체교회 (Trinity Church)’가 있습니다. 1877년에 지은 에피스코팔 쳐치 (Episcopal Church)입니다. 지은 지 오래 되었지만, 매우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교회로, 보스턴의 명소입니다. 이 교회는 특히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합니다. 화려하고, 정교하고, 아름답고, 예술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이 교회에 교구 목사 (the rector)로 있었던 필립스 브룩스 (Philips Brooks, 1835-1893)라는 목사님 때문입니다. 필립스 브룩스 목사님은 교육자로서도 유명해서 앤도버에 있는 명문 ‘Books School’을 세우신 분입니다. 필립스 브룩스 목사님은 탁월한 설교자로서 보스턴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브룩스 목사님이 한 달 간의 휴가를 얻어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여기 저기 성지를 돌아보다가 12월 24일 저녁에,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교회 (Church of The Nativity)’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브룩스 목사님은 이 예배를 통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1865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러 성탄절을 맞이한 브룩스 목사님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부를 찬송가를 하나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교회에’서 받았던 감동을 가사로 옮겼습니다. 이 가사를 그 교회 올갠 반주자 레드너 (L. H. Redner)에게 주면서 어린이들이 부를 찬송이니까 쉽게 곡을 붙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부탁을 받은 레드너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곡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꿈 속에서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이 곡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오 베들레헴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브룩스 목사님은 3년 전에 있었던 베들레헴의 감동을 기억하면서 미가 5:2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마을이지만 네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가 나를 위해 나올 것이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you, O Bethlehem Ephrathah, are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 Yet a ruler of Israel will come from you.”
이 선지자의 예언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들어 있는 유다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이 ‘베들레헴’에 밝은 빛이 비추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이 감동의 순간을 브룩스 목사님은 그렇게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영토에 속한 모든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하라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이 있었고, 다윗 가문의 사람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갔고, 거기서 아들을 낳은 것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700년 전의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국의 인구를 조사해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여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통치자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의 계획을 성취할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Bethlehem)’은 유대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탄생하셨습니다. 메시아는 예루살렘이나 로마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큰 도시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명성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메시아가 전혀 주목 받지 않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에서 탄생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beth (house)’라는 말과 ‘lehem (bread)’이라는 말이 합해져서 ‘The House of Bread’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떡집’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2,000년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두개골을 연구해서 얻은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공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진에 이런 설명이 붙었습니다.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얼굴이어서 누구나 쉽게 말을 걸 수 있고, 친해질 수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이다.”
예수님께서 특별할 것이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오히려 반갑지 않습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자기 자신을 보통 사람들과 동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귀신들렸어.’ 내가 와서 먹고 마시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을 봐! 탐욕이 많은 사람이야. 저 사람은 술꾼이야. 세리와 죄인의 친구야.’” (마태복음 11:18-19)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다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its results).” (마태복음 11:19) 내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준 것이 잘 한 일이냐, 잘 못한 일이냐 하는 것은 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빵을 먹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귀족도, 가난한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지위가 낮은 사람도 ‘빵’과 ‘떡’과 ‘밥’은 먹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영어 단어에 ‘availabl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ready for use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at hand (옆에 있어서 손 쉽게 이용할 수 있는)’ ‘accessible (쉽게 다가 갈 수 있는)’ ‘of use (도움이 되는)’ 이런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나 ‘available’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은 다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단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However, those the Father has given me will come to me, and I will never reject them).” (요한복음 6:37)
한 가지 더 ‘베들레헴’ ‘떡집’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단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죽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주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복음 6:35, 48-51) 조금만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빵을 먹고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빵을 먹고 밥을 먹으면 그것이 소화되면서 나에게 힘을 공급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것이 내 삶에서 실천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이 ‘인카네이션’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값싼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먹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만족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be hungry again.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요한복음 6:35)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내게 와서 귀를 기울여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며, 다윗에게 약속한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 (Why spend your money on food that does not give you strength? Why pay for food that does you no good? Listen to me, and you will eat what is good. You will enjoy the finest food. Come to me with your ears wide open. Listen, and you will find life. I will make an everlasting covenant with you. I will give you all the unfailing love I promised to David).” (이사야 55:2-3)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에 이사야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자기 백성들에게 전했던 말씀입니다.
이미 우리는 잘못된 음식을 많이 먹었고, 잘못된 음식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이것이 건강에 좋은 ‘natural food (자연산 식품)’라고, 이것이 ‘organic food (유기농 식품)’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목사의 심정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의 귀가 열려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가 주는 빵을 먹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12/16/2018 | 성탄절 메시지 1
인카네이션 Incarnation
요한복음 1:9-14
설교 시작 전에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는 복음서는 어느 복음서일까요?” 보기를 드립니다. (1) 요한복음 (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3)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4)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한번 정답을 맞춰 보십시오.
성서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때를 대략 서기 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후에 기록될수록 문장도 세련되고, 등장하는 용어들도 다양합니다. 그 때 세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고, 문화와 사상적으로는 그리스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가 사용했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기를 원했던 복음서의 저자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도 이미 기원전 300년경에 그리스어로 번역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을 ‘70인역 (Septuagint)’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벌써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의 2세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100년에 걸쳐 번역 작업을 완성합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72명의 권위있는 유대학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지파에서 6명씩 대표 학자들을 파견했기 때문에 모두 72명의 학자들이 번역에 참여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과감하게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빼고, 이렇게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1-4) 여기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 (λόγος, logos)’입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로고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계속해서 ‘로고스’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로고스’ 사상을 잠시 빌려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지만, 정작 요한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14절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the Word became human① and made his home among us.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②. And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Father's one and only Son. / ①Greek became flesh ②Or grace and truth 직역하면,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로스’ 사상에는 이런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번역합니다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거 재미있는데?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그들은 생소하게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이 말씀을 읽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이 로고스가 인간이 되셔서 우리들 가운데 사셨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incarnare’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in’은 ‘into’를 말하고, 뒤에 나오는 ‘caro’는 ‘육체 (flesh)’를 가리킵니다. ‘육체로 태어나셨다 (to make flesh)’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집을 지으신 (made his home among us)’ 것입니다. 이 말씀이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The Word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with us (말씀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재미있는 번역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그가 번역한 The Message에서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 Word became flesh and blood, and moved into the neighborhood (말씀이 몸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아마도 이 말씀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곱개의 사인 (sings)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가나 (Cana)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1) 이 말씀에 나오는 ‘그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영광을 이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가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인 (sign)’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인을 보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사셨다 (And Christ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on earth among us, Living Bible)”는 ‘인카네이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예수님의 ‘인카네이션’이 주는 교훈은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겸손 (humility)입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도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나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대우, 더 좋은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전 아닙니다. 전 성공적인 삶을 원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에서도 어떻게 하면 정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성경적인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아, 예, 그럼요.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하면서 굽실거리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South Africa)가 말한 것처럼 바닥에 쏟아진 물이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것처럼, 그러다가 제일 낮은 곳을 발견하면 그곳에 고이는 것처럼, 겸손이란 제일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Just as water ever seeks and fills the lowest place, so the moment God finds you abased and empty, His glory and power flow in.” 성공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내 속에 영광을 채우고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공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람인데요. 헨리 나우엔 (Henri Nouwen, 1932-1996, Netherlands)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바드 신학대학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정말 잘 나가는 교수였습니다. 아무 일 없이 보장된 삶을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게 되는 날이 왔습니다. 그 질문은 “지금의 내 삶이 내가 살아야 하는 최선의 삶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삶이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곧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L’Arche Daybreak)’라는 장애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는 하바드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바드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던 것들을 장애인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죽은 후에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여기서 경험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을 이용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By giving words to these intimate experiences I can make my life available to others.” ‘Nouwen Society’에 속한 사람들은 나우엔이 보여준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자신들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한마디로 ‘downward mobility (하향 이동성)’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로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성)’의 삶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사회적인 지위나 조건을 더 높은 레벨로 끌어 올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downward mobility’의 삶은 어떻게 하면 나의 현재의 사회적인 레벨을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갈까 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 놓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그랬습니다. ‘upward mobility’의 삶을 내려 놓고,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선택했더니, 그가 죽고 나서 ‘Henri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의 삶을 흠모하고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우엔이 ‘L’Arche Daybreak’에서 경험했고 발견했던 것들을 책으로 펴 냈는데, 그가 쓴 책마다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모두 39권의 책을 썼는데요. 모두 800만권의 책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책이 28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인카네이션’의 삶은 겸손과 내려 놓음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성공을 지향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어느 삶이 더 가치 있는지, 어느 삶을 내가 선택할 것인지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번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후회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1-12절) 이 말씀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qualification)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o believe and to accept Him (그를 믿고 받아들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무심코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말들의 의미를 밝혀서 책으로 내는 일입니다. 이 일은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생활이 형식적인 생활이 되고, 믿음생활에 변화가 없고, 믿음생활에 능력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全人的)인 결단입니다. 우리의 지적인, 감정적인, 의지적인 결단을 말합니다. ‘holistic commitment’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전인적인 commitment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구원받는다는 값싼 구원을 선포했고, 또 그런 설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는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기독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망가질 것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아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교회가 출현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holistic commitment’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이 곧 나의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같은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카네이션’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식)’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downward mobility (하향이동식)’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크리스천 (Christian)’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2/9/2018 |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마가복음 1:1-11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아니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으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 와서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의 말을 사람들이 들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은 차림새도 이상하지만,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마태복음 3:2)” 하고 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