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2/3/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5
말씀의 정도(正道)를 걷자 The Right Way We Should Walk
여호수아 1:1-9
1/27/2019 | 새해엔 이렇게 믿자 4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 2 Live Our Lives In Favor With God
로마서 12:1-2
하나님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예배자, ‘the true worshiper’에게 호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고 하는 성경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the true wor-shiper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 (the true worship)’인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인지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말씀에 ‘영적예배 (a spiritual worship)’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나오는 이 말은 바울이 독창적으로 만든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말입니다. 그 말씀이 요한복음 4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4: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time is coming - indeed it's here now - when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The Father is looking for those who will worship him that way. For God is Spirit, so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그 때가 오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참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게 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과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과연 ‘영적 예배’란 어떤 예배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영적예배 (a spiritual worship)’를 ‘the true worship (참된 예배)’라고도 할 수 있고, ‘a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란 어떤 예배일까요? 저는 ‘영적예배’에 없어서는 안 될 4가지 중요한 점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영적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4장 말씀이 ‘영적예배’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놓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인 당신네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나, 우리 유대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예배합니다. 그것은 구원이 유대인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22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들이 ‘아버지 (the Father)’께 예배드릴 때가 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the Father)’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모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Abba, Father, 마가복음 14:36)’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바 (Abba)’는 아람어로 ‘아빠 (dad)’라는 뜻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을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때 가지는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갖고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의 감정, 그리고 의존(依存)의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는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은 ‘영적인 예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예배를 잘 드려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요한복음 10:15)”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 (Charles H. Spurgeon, 1834-1892, 영국)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True Christian worship addresses God, not merely as Creator and Preserver, or as the great Lord of the Universe, but as one who is very near of kin to us, our Father, beloved of our souls (참된 크리스천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단순히 창조주, 보호자 혹은 우주의 주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매우 가까운 분, 우리의 영혼의 사랑을 받는 아버지라고 부를 때 사용합니다).”
둘째로, ‘영적인 예배’는 예배 드리는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곧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하나님은 ‘영 (Spirit)’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엄청난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in spirit and in truth’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을 모아서 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금 송아지를 경배하면서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모세는 들고 있던 십계명 돌 판을 던져서 금송아지를 깨뜨려버립니다. 이 사건으로 3,000이 광야에서 죽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하신 것은 그들이 아론이 만든 송아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35)”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3,000명이 죽은 것도 큰 일이지만, 이보다 더 큰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 이상 동행(同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을 테니, 너희끼리 가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잘못 알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영적인 예배’의 핵심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영과 진리 (in spirit and in truth)’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쉬운 말로 ‘진정으로’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진정으로’ 혹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Charles Spurgeon은 ‘영으로’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To worship God spiritually, a man must give up his sins, must overcome his pride and lust, and his evil concupiscence must be cast out of him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포기해야 하고 교만과 욕망을 이겨야만 하고, 성에 대한 욕망을 내쫓아야만 합니다).” “True worship lies in your heart paying reverence to him, your soul obeying him, and your inner nature coming into conformity to his own nature, by the work of his Spirit in your soul (참된 예배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존경을 드리고,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당신의 내면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가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진실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23-24)”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영적인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기서 ‘몸’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Expanded Bible에서는 이 말씀을 “I beg you to offer your lives as a living sacrifice to him (내가 권합니다. 당신의 삶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유대교의 제사 방식은 짐승을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대속물(代贖物, ransom)’로 드리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그 짐승의 목숨이 어떻게 나의 죄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예배가 형식적으로 되었을 때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천 마리 양을 기뻐하실까? 강줄기 만 개를 채울 만한 기름을 기뻐하실까?” (미가 6:7) “이 사람아,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미가 6:8)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이제는 짐승이 아니라 예배자 자신이 제물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의지, 나의 생각까지 모두 하나님께 드리라는 (굴복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배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living sacrifice (산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예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Let all that I am praise the Lord; with my whole heart, I will praise his holy name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1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aise the LORD, O my soul; all my inmost being, praise his holy name (오, 나의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나의 모든 속에 있는 것들아,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라).” 이 말씀을 읽을 때 “네 모든 마음과 (with all your heart)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마태복음 22:37)”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예배’는 예배와 삶이 일치(一致)되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2) 저는 이 말씀을 예배자의 삶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들어가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자의 삶입니다.
끝으로, 예배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마다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9-407)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크리소스톰이 자기 교구 내에 있는 동 떨어진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워낙 외진 곳인 데다가 오랫동안 예배를 인도할 사제가 없어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한 농부를 최선을 다해 교육시킨 다음 사제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뒤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내가 자격도 없는 사람을 잘못 사제의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다시 그곳에 가서 몰래 예배 시간에 참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기둥 뒤에 숨어 이 농부 사제가 어떻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짧은 설교를 하는 동안 그의 얼굴은 열광적으로 빛났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성 크리소스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을 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농부 사제는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교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 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주교가 말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뜨거운 불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 드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 무식한 농부 사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주교님,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1/20/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3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 1 Live Our Lives In Favor With God
마가복음 7:31-37
1/13/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2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자 Kowing God's Point Of View
마가복음 8:31-33
오늘 말씀의 요절(要節)은 33절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et away from me, Satan!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사람의 관점에서만 보는구나).”
‘인간적인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이란 보통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 베드로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했더라면 그 같은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갖게 되는 관점으로, '성경의 관점 (a point of the Bible)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배웠습니다.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도 제자들은 딴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매우 긴장된 얼굴로 아무 말씀도 없이 제자들보다 앞서서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9:51)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 뒤따라 가던 제자들은 놀랍고 두려울 정도였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 10:32). 이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he talked about this openly with his disciples,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primand him for saying such things①.” / ①Or began to correct him ‘reprimand’라는 말은 우리 말로 ‘견책하다’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사전에는 이 말에 ‘to reprove or rebuke severely, especially in a formal way (공식적으로 심하게 꾸짖다)’라는 뜻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압니다. 이럴 때 사랑하는 제자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야, 베드로, 역시 너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고맙다, 네가 그런 말을 해 줘서..... 그렇지? 꼭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는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제자의 만류를 사탄의 유혹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고린도후서 5:16)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울 (바울)의 행동에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 그럴듯한 스펙 (specification)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또 그 집안 (부모)은 어떤 집안입니까? 그가 남긴 업적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책 한 권도 제대로 쓰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지 30-40년이 흐른 후에 그의 제자들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변두리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갈릴리 부랑배들을 끌고 다니면서 율법의 규정에 어긋난 말과 행동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닙니다. 사울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총대를 메기를 자청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도행전 8:3)
이런 사람이, 관점이 바뀌니까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사실 육체적으로 보면 나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여, 나는 율법을 가장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4-8) “I was so zealous that I harshly persecuted the church. And as for righteousness, I obeyed the law without fault. 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관점이 바뀌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박해자 (persecutor)였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사람 (apologist)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사울의 변화를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가서 핍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대에 사울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쓸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드라마틱하게도 사울 같은 사람을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 (instrument)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15). 여러분이 좋아하는 시편 중에 42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절) 시편은 시(時)이면서 동시에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고라의 자손들 (the descendants of Korah)입니다. 고라는 광야생활 중에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땅이 갈라져 빠져 죽은 사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을 살려 놓으셨습니다 (민수기 26:11). 드라마틱하게도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Brooks Atkinson 이란 사람이 관점이 바뀌는 일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ost fatal illusion is the settled point of view. Since life is growth and motion, a fixed point of view kills anybody who has one (가장 치명적인 환상은 고정된 관점이다. 우리의 삶은 유동적이며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점은 누구든 그것을 가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또, Toba Beta라는 사람은 “We begin to learn wisely when we're willing to see world from other people's perspective (우리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세상을 보려고 할 때 비로소 지혜롭게 배울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Understanding is not absolutely final. What's now right could be wrong later (이해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옳은 것이라도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자기 말을 많이 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더니 전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은 노력을 통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는 일을 성경에서는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conversion’입니다. 사전에는 ‘conversion’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change of attitude, emotion, or viewpoint from one of indifference, disbelief, or antagonism to one of acceptance, faith, or enthusiastic support,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 (무관심, 불신, 반대로부터 수용, 믿음, 열성적인 후원으로 태도, 감정, 혹은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특별히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의 종교에서 일어난다).”
사울이 회심해서 관점이 바뀌는 말씀이 사도행전 9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의 관점은 자신의 노력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심으로 일어났습니다. 2018년 1월 4일 밤에 눈보라가 치고 강풍이 부는 날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 뾰족탑 (steeple, 종탑)이 강풍에 흔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안전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관계자들이 뾰족탑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Local TV에서는 이 뉴스를 ‘Divine Intervention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위험한 상황을 아시고 미리 큰 사고를 막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Divine Intervention’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게 해 주신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Divine Intervention’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관점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 같은 예수님의 제자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만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인간적인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적인 관점’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묻습니다. “빌립,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그 때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그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0데나리온은 약 20,000불 정도 되는 큰 돈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빌립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의견을 따랐다면 5,000명을 먹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19년 한 해를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계속 읽어가면 금방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빌립을 떠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을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6:6)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그렇게 물으신 것은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인간적인 관점’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는 (overcome)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믿는 사람들은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마태복음 19:26)”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때 케임브리지에 있는 Museum of Science의 마케팅 슬로건 “Museum of Science, where your horizons broaden (뮤지엄 오브 사이언스, 당신의 시야(視野)가 넓어집니다)”였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1/6/2019 | 새해엔 이렇게 믿자 1
생각과 태도를 바꾸자 Renewing Your Thoughts And Attitudes
에베소서 4:20-24
오늘은 2019년 새해 첫 주일 예배입니다. 여러분, 고사 성어 중에 ‘일신일신우일신 (日新日新又日新)’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직역하면,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다는 뜻입니다. 서경(書經)의 상서(商書)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 은 (殷)나라의 탕 (湯)이라는 덕망이 높은 왕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숫대야에 이 말을 새겨 놓고 날마다 세수할 때마다 새로워지려고 다짐함으로써 현실에 만족하려고 하는 자신을 경계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각오를 새롭게 함으로써 과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누구나 새로워지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해 결심한 것 (resolution)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목표를 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마음이 해이해져서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상 (status quo)에 만족하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결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하고 경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은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일과 새로워지는 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읽은 에베소서 4: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at isn'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베소 (Ephesus)는 지금의 터키 남서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큰 도시입니다. 지금은 ‘셀주크 (Selcuk)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에베소’라는 이름 자체가 ‘욕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항구 도시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는 유명한 풍요의 여신 ‘아데미 (Artemis) 신전’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에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에베소에 무려 2년을 머물면서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들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세 달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토론도 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믿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 앞에서 ‘도’를 욕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떠나 신자들을 데리고 두란노 학원으로 가서 날마다 사람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그 일은 2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 지방의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8-10)
바울의 에베소 선교에 대한 애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역자인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러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1:3). 에베소에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교사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에베소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성경 (편지)가 적어도 3권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사도행전까지 하면 모두 4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삶이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진정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또 진리 되신 그분 안에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21절)
오늘 우리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화의 삶에 대한 문제를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변화의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데도 그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생각과 태도를 바꾸자 (Renewing Your Thoughts And Attitudes)”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변화(變化)’는 형식적인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태도가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 (a radical transformation)’입니다. 생각하는 법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paradigm shift’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변화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예제(例題, example)와도 같습니다. 예제를 잘 이해해야 예제를 응용해서 더 어려운 문제들을 풀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 이야기’가 바로 예제와 같은 말씀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를 잘 이해하면 변화의 삶에 대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삭개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고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더라면 삭개오의 삶은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 (chief tax collector)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원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고 했다는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의 삶을 원해야 합니다. 그 다음, 변화의 삶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변화되기 전 우리의 ‘자아’를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old sinful nature (예전의 죄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 (It is corrupted by lust and deception)’고 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 ‘옛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성령께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십시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도록 하려면 먼저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는 지, 어떤 일을 좋아하시는 지, 알아서 그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서 성령께서 활발하게 (actively)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John Piper 목사님이 로마서 12:2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새로워지려면 다음의 4가지를 소원해야 한다. 첫째로, 세상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고, 둘째로, 당신의 속에서부터 변화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하고, 넷째로, 당신의 삶 전부가 영적 예배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보다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 속에 있는 ‘옛 사람’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자극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그것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은 우리의 욕망 (lust)을 자극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것을 기뻐하는 ‘옛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새 사람이 되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동양의 성현 중에 노자 (Lao Tzu)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Warring States period, 770-221 B.C.) 사람으로 도가(道家)를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When I let go of what I am, I become what I might be (내구 누구인지를 놓아 버릴 때 내가 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Joseph Campbell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We must be willing to get rid of the life we’ve planned, so as to have the life that is waiting for us. The old skin has to be shed before the new one can come (새 피부가 생기려면 늙은 피부가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계획한 삶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Put on your new nature (성령께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고, 새로운 본성을 입으라)”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디이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라는 목사를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을 입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 넣고,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살았던 독일 고백교회 (The Confessing Church)의 목사였습니다. 그 때 독일의 교회들은 히틀러의 그런 만행을 보고 침묵하거나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고백교회의 목사들은 히틀러의 독재와 만행에 항거했습니다. 그 때 본회퍼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21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 (Communion of Saints)’는 당시 신학계의 거장이었던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로부터 신학계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재능을 아깝게 여긴 미국의 신학자들이 그를 미국으로 빼돌렸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만찬이 열린 자리에서 본회퍼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나중에 조국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당신은 그 때 어디 있었느냐는 질문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나기 4개월 전입니다.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이 대부분 알려져 책으로 나왔지만, 후에 본회퍼가 자기 애인에게 보냈던 시 한 편이 알려져, 그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선한 능력으로 (Von Guten Mächten)’입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에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죽은 지 74년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선한 능력으로>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 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옛 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아, 주님! 내 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당신께서 준비해 놓으신 구원을 주십시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