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5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 The Christian Way To Live

베드로전서 2:13-17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계속해서 저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비난 받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좋다고 칭찬을 받는데, 세상에 나가서는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이 그런 사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교회 돈을 잘못 사용하고,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문제에 연루되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서도 교회에 돌아와서는 사탄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고,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고 있다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한 사람들은 ‘표절 (plagiarism)’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 잘 압니다. 자신의 학위 논문을 자신이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썼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이고, 수치스러운 일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를 보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지도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비행이 일간 신문에 게재될 때마다 얼마나 교회가 비난을 받겠습니까? 저는 목사들이 모이는 한 모임에 갔다가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들이 모여서 한다는 말이 지금 한국에서 정부와 언론이 작심하고 개신교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천주교나 불교가 잘못한 기사는 신문에 싣지 않고 교회가 잘못한 일만 집중적으로 보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가 잘못했으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목사들이 더욱 조심을 해야 하는데,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들은 낯선 나라, 낯선 문화권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삶을 사는지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을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 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 하고 다른 습관과 행동들을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읽었던 베드로전서 2:12 말씀이 바로 그런 상황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선한 행동’이라는 말은 ‘good deeds (착한 행동, NIV, NASB, NKJV)’ 혹은 ‘honorable behavior (칭찬 받을만한 행동, NLT)’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 속에서도 ‘good deeds’를 계속하고, ‘honorable behavior’를 계속하면 결국 비난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비난을 하지 않게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New Living Trnanslation으로 성경을 읽다가 에베소서 2:10 말씀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아, 이 말씀이 그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 ‘masterpiece’라고 합니다. ‘masterpiece’는 한 작가의 대표작을 말합니다. 헨델의 masterpiece는 오라토리오 ‘메시야 (Messiah)’입니다. 르네상스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masterpiece는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입니다. 미켈란젤로의 masterpiece는 시스티나 성당 (Aedicula Sixtina)의 천정에 그린 ‘최후의 심판’입니다. 1508-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게 한 ‘다윗 상’ 등입니다. ‘다윗 상’는 3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masterpiece’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공들여 창조하셨으니까 ‘masterpiece’라는 말을 썼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에베소서 말씀을 잘 보면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masterpiece’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는,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이 선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쓴 두 번째 편지에 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죄에 물든 옛 생활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But those who fail to develop in this way are shortsighted or blind, forgetting that they have been cleansed from their old sins).” (베드로후서 1:5-9)

저는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크리스천의 선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크리스천의 삶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삶입니다. 17절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하십시오 (Respect everyone, and love you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Fear God, and respect the king).” 또 13-14절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께 복종하십시오. 또한 왕이 보낸 관리에게도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잘못된 사람을 벌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게 크리스천의 삶 맞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불의에 항거하고, 복종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말씀에 그런 구절이 한 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행간(行間)을 잘 읽어 보면 아무 조건 없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잘 사용할 때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14절).

성경 어디에도 폭력을 정당화 한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이 하게도 이 사람은 ‘열심당 (the zealot)’ 출신입니다 (누가복음 6:15). 우리 개념으로 하면 과격한 애국 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은 폭력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인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열심당 출신의 시몬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행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열 두 제자의 명단에 이름만 나올 뿐, 별 다른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동행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 가져왔던 자신의 신념이 옳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성경에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Mahatma)’로 칭송을 받는 간디 (Manilal Gandhi, 1869-1948)가 성경에서 배운 것은 ‘비폭력 무저항’이었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즈 (1999년 4월 18일 자)는 지난 1천 년 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하였습니다. 간디에게서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은 결국 흑인들이 차별 받고 있는 사회를 개선하고,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 시키는데 공헌했습니다.

영화 ‘Amazing Grace’로 유명한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영국에서 노예무역법을 폐지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드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 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정치인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21살의 나이에 하원 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1787년에 처음으로 의회에 노예무역폐지법을 제출합니다. 그 때는 18세기 영국은 수입의 1/3을 노예 무역으로 벌어 들였다고 합니다. 의회는 그가 제출한 법안을 보기 좋게 부결시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만나 설득해 갑니다. 그리고 지지자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1807년에 영국에서 노예무역법이 폐지 됩니다. 무려 20년만에 그가 의회에 제출한 법안이 통과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디를 가든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폭력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성경에 나와 있는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한번도 폭력으로 세상을 바꾼 역사는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은 사랑으로 악을 이긴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6: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Do everything in love.” (NIV) “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 (NASB) “Do everything with love.” (NLT) 크리스천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시작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진행해야 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2:20-21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인데, 여러분들은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에 숯불을 쌓은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악으로 악을 이긴 경험이 더 많습니까?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던 기독교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국교로 공인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 이전까지 그렇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로마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가 되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콘스탄틴 황제 바로 직전의 황제가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us, 284-305) 황제였습니다. 이 때가 가장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을 때입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아예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합니다. 이 때는 로마가 내부에서부터 분열되어 통치 기반이 제일 허약했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306-337) 황제는 분열된 로마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기독교를 공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때는 로마의 궁중에까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극심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결국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선한 행동으로 험담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15절), 선으로 악을 이기며,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악을 행하는 구실로 삼지는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생활하십시오 (For you are free, yet you are God's slaves, so don't use your freedom as an excuse to do evil).” 크리스천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지만, 하나님께 얽매인 ‘God’s slaves’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악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 배경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로마서 12:19).

오늘 말씀에 비추어 지금의 우리의 삶을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말고 꾸준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2,000년 전에,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제시했던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그곳에 살아가면서 이 삶의 방식대로 살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결국 이 삶의 방식이 옳고, 결국 이 삶의 방식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명심해야 할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으로 이기고,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10/29/2017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 설교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로마서 1:13-17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가 95개 조항 (theses)을 제시하면서 당시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토론을 제의했던 것이 1517년입니다. 올해로 꼭 5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얼마나 바뀌었는가 하고 질문해 보면 교회는 다시 한번 개혁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 보면,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586년에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서기 70년에 다시 한번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번에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합니다. 신기하게도 두 번 모두 미리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586년의 성전 파괴는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언이 되었고, 서기 70년의 성전 파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은 유대나라를 떠나 전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유럽이 기독교화 되고, 교황은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카톨릭의 수도사였던 루터의 눈에 가장 “이건 말도 안 돼!” 이렇게 보였던 95개 조항의 토의 제목 중에 ‘면죄부 (indulgence)’에 대한 조항이 있습니다. 돈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죄를 면제 받을 수 있는 증서를 돈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면죄부에도 종류 별로 싼 것이 있고, 비싼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황들이 자기의 이름을 걸고 경쟁적으로 교회를 건축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지난 주에 한국의 어느 일간 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버터와 종교개혁’이라는 매우 흥미 있는 기사였습니다. 15세기와 16세기의 유럽인들은 버터 맛에 흠뻑 빠졌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버터의 부드럽과 풍성한 맛은, 당시 유럽인들의 입 맛을 사로 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에서는 버터를 먹는 것을 제한했다고 합니다. 버터는 동물성 지방에서 뺀 것기 때문에, 동물성 기름이 인간의 성욕을 부추긴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카톨릭 교회에서는 사순절 때 육식을 피하고 생선 종류만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라면 참을 수도 있겠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사순절을 비롯해 매주 금요일은 고기를 먹을 수 없었고, 각종 성인축일에도 고기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카톨릭교회 교인들은 동물성 지방을 섭취할 수 없는 날이 일년의 절반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하게도 남부의 유럽 사람들은 평소 버터 대신 올리브 오일이나 생선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버터를 먹지 말라는 제재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유럽에는 버터가 나병을 발병시킨다는 속설이 돌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프랑스나 루터가 살던 독일 등 버터를 많이 먹던 지역이었습니다. 금식 기간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버터에 길들여져 있던 부자들이나 귀족들은 특혜를 누렸습니다. 돈을 주고 버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산 것입니다. 돈 많은 귀족들은 막대한 돈을 교회에 기부하고 대신 ‘버터섭취권’을 얻얼 수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돈을 주고 버터를 먹을 권리를 살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 때를 틈 타 악덕상인들 중에는 남유럽에서 저질 식물성 오일을 수입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싸게 파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16세기초 루터가 독일 지역의 귀족들에게 쓴 공개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엉터리 금식을 하면서 우리들에게는 싸구려 기름을 먹이고 있다. 그들이 저지르는 신성모독이나 거짓말보다 더 큰 죄는 바로 버터를 먹는 것에 대한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이다.”

정말 우연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16세기에 버터를 많이 먹던 국가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해 해서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버터와 종교개혁이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올리브 기름을 많이 먹었던 이탈리아나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유럽은 가톨릭 교세가 강하고,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버터를 많이 먹는 지역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강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마틴 루터를 통해서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또 한번의 개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두 번의 성전 파괴,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판을 짜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또 한번 하나님께서 새로운 판을 계획하고 계시는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상황이 그런 예측을 하게 합니다. 인구의 감소, 교회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 축소, 기독교 인구의 급감, 청년들의 교회에 대한 무관심 등 현재의 상황을 주시해 보면 하나님은 지금의 교회가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의 교회를 계획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우리교회의 청년들이 정말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청년들은 이사야가 생각했던 ‘거룩한 씨앗들 (Holy Seeds, 이사야 6:13)’이고 ‘남은 자들 (The Remnants, 이사야 1:9, 열왕기상 19:18, 로마서 9:27-29, 11:4-5)’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프로젝트에 동원될 사람들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교회의 사명은 이들을 잘 양육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은 ‘Three Solas’라는 말로 잘 표현됩니다. ‘Sola Fide (Faith Alone 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 (Grace Alone, 오직 은혜로)’ 'Sola Scriptura (Scripture Alone, 오직 성경으로)', 이 세가지가 종교개혁의 정신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종교개혁의 정신이라고 말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루터 자신이 이 세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믿음생활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세 가지 관점을 가지고 그 당시의 카톨릭 교회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잘못된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95 Theses (95개 조항)’에 담았던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세계적인 위조 지폐 (counterfeit) 감별사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심지어 기계가 놓치는 것도 잡아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이 재미 있습니다. 위조 지폐를 감별하기 위해서 자신은 진짜 지폐에 대한 소리와 느낌, 감각을 집중적으로 훈련한다고 합니다. 진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면 위조 지폐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정말 그 사람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이 세 가지에 집중하는 것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진짜 지폐가 어떻개 생겼는지 배우는 훈련과 같습니다. 이 세 가지를 잘 알면, 이 사람은 바른 믿음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생활에서 오는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루터가 생각했고, 루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이미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루터가 성경에서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면, 루터가 제시한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첫째로,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가 복음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믿음으로 인하여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is Good News tells us how God makes us right in his sight. This is accomplished from start to finish by faith. As the Scriptures say, "It is through faith that a righteous person has life."① / ①Or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Hab 2.4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우리 말 성경에서 잘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 (righteousness)’라는 개념입니다. 이 말이 일반적으로 쓰는 개념과 성경에서 쓰는 개념이 아주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의’라는 개념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단순히 착한 사람, 올바르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올바르게 만드셨는지 보여 줍니다. 이것은 처음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믿음을 통하여 되는 일입니다. 구약 하박국 2:4에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 받는 길은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루터가 살던 당시 카톨릭 교회는 이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루터의 눈에 보였습니다. 이것이 루터의 다음 주장 ‘Sola Gratia’가 나오게 된 이유입니다.

‘오직 은혜로’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구원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가 볼 때, 당시의 카톨릭 교회 가장 잘못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카톨릭 교회가 ‘선행 (good works)’을 강조하면서 선행을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이런 카톨릭의 주장이,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 시킨다고 보았습니다. 루터가 볼 때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헌금을 많이 거두고, ‘면죄부 (Indulgence)’를 많이 팔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과 선행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많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도 교회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을 많이 듣다 보니까 ‘선행’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틴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Luther’s Commentary on Romans)을 읽어 보았습니다. 서문 (preface)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Faith is a work of God in us, which changes us and brings us to birth anew from God (cf. John 1). It kills the old Adam, makes us completely different people in heart, mind, senses, and all our powers, and brings the Holy Spirit with it. What a living, creative, active powerful thing is faith! It is impossible that faith ever stop doing good. Faith doesn’t ask whether good works are to be done, but, before it is asked, it has done them. It is always active. Whoever doesn’t do such works is without faith; he gropes and searches about him for faith and good works but doesn’t know what faith or good works are (믿음이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곧 우리를 변화 시키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마음과 생각과 감각과 능력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게 한다. 그리고 믿음과 함께 성령이 온다. 믿음이란 얼마나 생동감 있고, 창의적이고, 활동적이고 강력한 일인가? 믿음이 선행을 중단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선행을 하라는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선행을 실천한다. 믿음은 항상 활동적인 것이다.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믿음과 선행을 위해 하나님을 찾겠지만 정말 믿음이 무엇이고 선행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은 ‘active’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선행이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선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6). 루터의 글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선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이 말은 우리 믿음생활의 최종 권위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Bible alone is the ultimate authority and standard (성경만이 우리의 최종 권위와 기준이 된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믿음생활의 기준이 됩니다.

루터는 교황의 ‘무오설 (inerrancy)’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95 Theses에 포함 시켰습니다. 그 때는 그 누구도 교황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교황이 정치까지 관여했습니다. 국왕도 교황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교황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루터가 국회에 소환되었을 때도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교황도 잘못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성경은 여전히 우리의 삶의 ‘기준 (standard)’가 되고 있습니까?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500년 전과 지금의 세상을 비교해 보면,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성경은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많은 이슈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이슈들에 대하여 교회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매우 혼동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을 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한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유일단 기준이다!” 그러나, 이렇게 믿고 주장만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일에 교회들이 힘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서, 공동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10/22/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4

에클레시아 Ecclesia, God’s Chosen People

베드로전서 2:1-12

베드로전서 1장이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이제 여러분은 과거의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시 태어난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들의 권력도 들에 핀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전해진 말씀이 바로 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2장으로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과 거짓을 버리십시오. 위선자가 되지 말고, 시기하며 험담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없애십시오.” (1절) 여러분, 이 말씀에서 동사로 된 말씀들을 찾아 보십시오. “위선자가 되지 마라.” “시기하지 마라.” “험담하지 마라.”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것들을 제거하라.” ‘위선’ ‘시기’ ‘험담’ 이런 것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들입니다. 이제 이런 것들과 관계를 끊고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제가 말씀 드렸던 기억이 압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후에는 내가 건너온 다리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요. 왜냐하면, 이 다리가 남아 있으면 언제라도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빌립보서 3장에 나와 있는 바울의 결단이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과거의 삶을 ‘쓰레기 (rubbish)’ ‘잡동사니 (garbage)’ ‘배설물 (dung, KJV)’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일을 보고 나서 미련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flush해 버리지 않습니까? 과거의 삶은 아무 가치 없는 rubbish와 같고, garbage와 같고, dung과 같습니다. 미련 갖지 말고 flush해 버려야 합니다. 내가 건너온 다리를 불태워야 합니다.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차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편지에 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방 (지금의 터키 영역)으로 피신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지역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게다가 항구 도시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는 ‘위선’ ‘시기’ ‘험담’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렇게 세속 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착하게 사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12절)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나요? 세속문화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세속문화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지켜 나가겠습니까? 무조건 하지 마라고, 단절하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New Age 음악이나 책들은 좋지 않으니까 듣지 말고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한계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더 우수하고, 크리스천의 문화가 더 탁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한 세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계속 예수님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갓난 아기가 젖을 찾듯이 순결한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지 않습니까?” “Like newborn babies, you must crave pure spiritual milk so that you will grow into a full experience of salvation. Cry out for this nourishment, now that you have had a taste of the Lord's kindness.”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은 뒤에서부터 해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선하심’을 ‘goodness’라고 번역한 곳도 있고, ‘grace’라고 번역한 곳도 있고, ‘kindness’라고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찬송가 405장 1절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마음이 평안 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님의 팔이 친절한 팔이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누구나 받아 주시잖아요?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도 팔에 안아 주시고 기도해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국적을 따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온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피곤한 영혼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상처 받은 영혼도, 예수님의 친절한 팔에 안기면 모두 고침을 받습니다.  그 예수님의 마음이 ‘Lord’s kindness’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여러분들은 ‘주님의 선하심’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기서 머물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갓난 아기가 어머니 젖을 언제까지 먹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우유를 먹어야 더 잘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경험하기 위하여 ‘spiritual milk’를 사모해야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Cry out for this nourishment (이 음식을 간절히 사모하라, 구하라)”라고 합니다.

제가 어디서 성인들이 하루에 우유를 한 컵씩 꾸준하게 먹으면 각종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우유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읽고 난 후에 우유를 한 컵씩 꾸준하게 마시고 있습니다. 아직 크게 달라진 것은 못느끼고 있습니다만, 우유가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지금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권면하는 ‘spiritual milk’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nourishment (음식, 영양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우리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예수님께 나오라고 초청하면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the living corner¬stone of God's temple (하나님의 성전의 모퉁이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 (God’s spiritual temple)’을 짓는 일에 귀하게 사용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를 믿고, 신뢰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사람, 예수님이 자기 삶의 중심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에 ‘산 돌 (living stone)’같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산 돌’은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돌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막은 이동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곳에 머물 때는 성막을 설치하고 그 안에 법궤를 놓습니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신속하게 성막을 접어서 레위인들이 운반했습니다. 모세는 성막을 지으면서 필요한 것들을 백성들이 자원해서 내도록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자기들이 낼 수 있는 만큼 내도록 했고,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자기들이 낼 수 있는 만큼 내도록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있는 천 (cloth)을 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있는 색실 (colorful thread)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색실이 장막 입구에 화려한 수를 놓는데도 사용되고, 제사장들이 입는 옷에 수를 놓을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내가 낸 것들이 장막을 짓는 일에 귀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 1:2)”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삶이 그렇게 덧없고 헛된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이 잊어 버립니다. 나중에는 이름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메싸추세츠 서쪽에 Northhampton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유명한 Smith College가 있고,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목회했던 교회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미국의 영적 부흥을 이끌었던 탁월한 설교자이고 학자입니다. 제가 Northhampton에 가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목회했던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주소를 찾아 갔는데도 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봤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 봤는데도 아무도 모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이름도 모릅니다. 나중에 그 교회를 찾았습니다만, 심지어 그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마저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이렇게 덧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가치 있고, 보람있는 삶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에 필요한 ‘living stone (산 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의 모퉁이 돌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 성전을 짓는 일에 필요한 돌들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친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그들에게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격려합니다. 그 말씀이 9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나는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 9절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나를 통해서 보여 주시려고 나를 크리스천으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오고, 내가 선택해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계획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셔서, 나를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called you out”이란 말입니다. “너를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희랍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원 (origin)’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생활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이 ‘origin’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입니다. 케임브리지교회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에 속한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케임브리지교회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서, 믿음으로 새롭게 무장하여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여러분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곧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가 이 일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에클레시아’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올바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교회가 어려움에 빠진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번 2017 ReNEW Conference의 주제가 ‘에클레시아’입니다. ReNEW는 ‘복음과 개인’ ‘교회와 공동체’ ‘선교와 세상’이라는 주제를 돌아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두 번째 주제를 다루는 해입니다. 하나님의 불러냄을 받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명은 확인하고, 이 시대가 요청하는 크리스천의 삶은 어떤 것인지 말씀을 듣고 결단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위켄드를 맞이해서 한국과 미국의 훌륭한 목사님들이 강사로 오십니다.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보스턴에 있는 청년들이 한 곳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자고 결단하는, 이 모임이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2017 ReNEW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에 ‘living stone’처럼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10/15/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3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The Eternal God's Word

베드로전서 1:13-25

오늘부터 다시 베드로전서 강해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A.D. 62-64년 경에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두 통의 편지를 썼는데, 앞에 쓴 것을 ‘베드로전서’라고 하고, 뒤에 쓴 것을 ‘베드로후서’라고 합니다. 그 때 ‘크리스천들’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피신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신앙의 박해는 같은 동족들인 유대인들로부터 받는 박해였습니다. 네로 황제가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책임을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에 묻기 전까지 적어도 로마로부터의 박해는 없었습니다. 그 화재가 A.D. 64년에 일어났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베드로전서와 후서가 기록된 연대와 맞물리는 시기입니다. 베드로후서는 A.D. 66-67년에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초대교회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뭔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는 영감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박해가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곳을 찾아가는 ‘디아스포라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이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성의 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디아스포라들’을 통해서 다른 일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씨앗들 (seeds)’로 사용하셨습니다. ‘디아스포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크리스천들이 예루살렘 한곳에 모여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God makes everything work out according to his plan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하신다).” (에베소서 1:11) 솔로몬이 쓴 잠언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Many are the plans in a man's heart, but it is the LORD'S purpose that prevails (사람의 마음에 여러가지 계획들이 있지만 결국에는 주님이 뜻하시는대로 된다).” (잠언 19:21)

그러므로, 나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나의 계획대로 풀려나가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 없고,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이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크고 더 좋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삶이 내가 생각하는대로 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하신대로 되는 것이 좋습니까? 하나님이 뜻하시는대로 되는 편이 훨씬 더 좋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아주 좁은 시야(視野)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우리의 삶 전체를 보십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좋은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큰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나에게 최선(最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는 베드로가 그 지중해 연안 이방 세계이 흩어져 살고 있는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에게 보낸 편지에 무슨 내용을 담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이 있어도 잘 견뎌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로 끝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방 세계의 문화나 가치관에 물들지 말고 크리스천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감사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지 않겠습니까?

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설교자인 제 눈에 가장 띄는 말씀은 15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성경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이방 세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 살다 보면 마음이 해이해지기 쉽습니다. 여행자들의 복장을 보면 아주 자유로은 복장입니다. 펑상시 같으면 입지 않을 옷인데, 여행 중이니까 그런 옷을 입습니다. 평상시에는 주변이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식당에 가거나 어디를 가도 조심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는 이발을 하려고 미장원에 갔는데, 데스크에 앉아 있는 자꾸 나를 보는 거예요. 그러더니 “혹시 케임브리지교회 목사님 아니세요?” 하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저 케임브리지교회에 나가요” 그러는 거예요.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음식점에서도 그래요. “저 케임브리지교회 목사님 아니세요?” 이렇게 인사들을 합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말이나 행동을 조심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거나, 멍하니 있거나,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투정을 하거나, 팁을 조금 주거나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여행 중에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말이나, 행동이나, 복장이 평상시 하고 다르기 쉽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와서 산다고 해서 이 사람들에게 물이 들거나 예전에 살던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맨 먼저 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6절) “For the Scriptures say, ‘You must be holy because I am holy.’” 구약 레위기 11:44-45, 19:2, 20: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까 하나님을 믿는 그의 자녀들의 삶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청년들이 많이 부르는 찬양 중에 “There is none like you. No one else can touch my heart like You do. I could search for all eternity long, And find, there is none like You (주님 같은 분은 없어요. 주님 같이 나의 마음을 만져 주는 분은 어디에도 없어요. 전 오랫동안 영원한 것들을 찾아 헤맸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 같은 분은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구약 성경 예레미야 10:6에 똑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No one is like you, O LORD; you are great, and your name is mighty in power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은 크고 놀랍습니다).

이 말씀이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세상의 어떤 신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의 생명을 내 준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까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2,000년에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 말씀을 편지에 담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 속에 들어 있는 말씀이 마치 오늘 우리들에게 쓴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이 세상에 나가서 나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하신 분입니다.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구별된 분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잘 정리해 보면, 적어도 우리는 다섯 가지 점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첫째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3절). 이 희망은 구원에 대한 희망입니다. ‘look forward to the gra¬cious salvation (NLT)’ ‘hope fully on the grace to be given you (NIV, NKJV, NASV)’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쉬운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받게 될 은혜의 선물에 대한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삶의 방식이 많이 다릅니다.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재의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삶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은 항상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지금 그들은 언제 로마의 군인들에게 잡혀갈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들이 받을 ‘은혜의 선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을까요?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희망은 이런 것입니다. 희망은 현재의 고난을 이길 힘과 용기를 줍니다. 같은 뜻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Yet what we suffer now is nothing compared to the glory he will reveal to us later).” (로마서 8:18)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값싼 위로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천의 삶에 주어지는 ‘inheritance’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두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1:17-18) 저는 여러분이 그 ‘inheritance’가 무엇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you must live in reverent fear of him during your time as foreigners in the land." ‘reverent fear’라는 말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Martin Luther는 ‘코람 데오 (Coram Deo)’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reverent fear’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reverent fear’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2,000년 전에 크리스천들이 말하고 있는 ‘reverent fear’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직하고, 성실하게 어디서든지 크리스천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흔들리지 않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8-21절). 넷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2절). 다섯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영원한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23-25절).

여러분, 지금 우리는 베드로의 편지 속에 나타난 말씀들을 읽으면서 “아,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구나!” 하는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보여 주고 있는 크리스천의 ‘정체성 (identity)’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들의 권력도 들에 핀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전해진 말씀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4절) “And that word is the Good News that was preached to you.”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고, 함께 들은 말씀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 세대 (the next generation)’에게 전해 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아, 이것만 있으면 내가 행복하겠구나!” “이것만 내가 소유한다면 부족한 것이 없겠구나!” “내가 성공하려면 이것을 가져야 하겠구나!” 이런 것들을 베드로가 인용한 이사야 40:6-8에서는 ‘풀 (grass)’과 ‘꽃 (flower)’에 비유합니다. 아무리 큰 권력을 잡은 사람도 ‘풀’에 지나지 않고, 부귀와 영화도 ‘꽃’에 지나지 않습니다. ‘풀’도 ‘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고도 ‘풀’과 같은 것에 인생을 걸고, ‘꽃’과 같은 것에 여러분의 인생을 건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하찮은 것이 되고 맙니다.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나도, 아니 그 이전부터라면 4,000년, 5,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인생의 희망을 발견하고, 이 말씀 안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하고, 이 말씀 안에서 인생의 목적과 사명과 기쁨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귀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10/8/2017 | 창립 39주년 기념주일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 A Church Entrusted With The Mystery Of The Gospel

에베소서 3:3-11

오늘 성경 말씀에 ‘비밀 (3, 5, 6절)’ ‘신비 (4절)’ ‘숨겨진 (9절)’ ‘지혜 (10절)’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바울이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무슨 의도가 있지 않을까요? 성서학자들은 에베소서가 기록된 것을 A.D. 62년경 로마에 수감되어 있을 때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는 ‘영지주의 (Gnosti¬cism)’이 최고의 학문으로 각광을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이분법 (Dualism)’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철학사상입니다. ‘지혜 (wisdom)’를 찾고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고,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오픈됩니다. ‘영지주의’를 ‘밀의종교 (mystery religion)’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쓰면서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비밀’ ‘신비’ ‘숨겨진’ ‘지혜’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 부분만 읽는 사람들은 에베소서가 ‘영지주의자’들이 남긴 문서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편지에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비밀스런 진리를 아무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통해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이 신비로운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5절) 오늘 말씀을 자세하게 읽어 보면 알게 되겠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숨겨졌던 하나님의 비밀스로운 진리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7절). 또, 자신은 그동안 숨겨져 왔던 진리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9절). 그가 이렇게 기쁜 소식,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갖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알게된 ‘부요함 (richiness)’ 때문이라고 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ough I am the least deserving of all God's people, he graciously gave me the privilege of telling the Gentiles about the endless treasures available to them in Christ.” (8절) “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가장 자격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로 나에게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보물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명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하지만 무작정 아무 계획 없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도시에 교회를 세웁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끊임없는 소통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전략적인 도시에 교회를 세웁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라는 도시에 갔을 때 유난히 박해가 많았습니다. 그 도시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도시인만큼 사탄에게도 그 도시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조용히 있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그러므로 아무도 너를 공격하거나 해치지 못할 것이다.” (사도행전 18:9-10) 바울은 여기서 신실한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 둘이 직업기 같기 때문에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부부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례적으로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이나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 10-11절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나에게 교회를 세우도록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태초부터 이루려고 계획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 ‘하늘의 천사들에게’라는 말은 ‘to all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라는 말이 정확한 해석입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보이지 않는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이란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을 대적해서 세상을 통치하려고 하는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게 하시는 목적은 이런 사탄의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다는 것을 선포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God's purpose in all this was to use the church to display his wisdom in its rich variety to all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 (10절) (New Living Translation)

몇 년 전에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는 목적, 그리고 교회가 맡은 사명이 바로 이 말씀 속에 들어 있구나!” 에베소서 말씀을 읽다가 이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요점을 정리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기관입니다. ‘교회’라는 말이 그리이스말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올해 ReNEW 주제가 ‘에클레시아’입니다. 부제를 ‘God’s Calling for This Generation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정했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기관’이라고 한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의 관점에서 보면 ‘에클레시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기기 위해서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에클레시아’이고, 이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상을 통치하려고 하는 사탄의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비밀, 그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세우신 계획입니다 (11절).

이 말씀 속에 교회의 존재 목적, 교회의 존재 이유, 그리고 교회의 사명,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로 창립 39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교회가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구원의 복된 소식’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시의 적절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간혹 선한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로마서 5:6-10)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And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the blood of Christ, he will certainly save us from God's condemnation. For since our friendship with God was restored by the death of his Son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we will certainly be saved through the life of his Son.” (8-10절, New Living Translation)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과 friendship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의 주도권 (initiative)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initiative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에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은 복음의 비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나요? 복음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이 뒤따르지 않으면 ‘값싼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는데, 그 대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는데,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것입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는 이미 70년 전에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고를 했습니다. “Cheap grace is the grace we bestow on ourselves.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without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Cheap grace is grace without discipleship, grace without the cross, grace without Jesus Christ.” “값싼 은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은혜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와 세례와 교회 훈련이 없는 용서의 설교이고, 고백이 없는 성만찬입니다....... 값싼 은혜는 제자직과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입니다.” 이미 70년 전에 본회퍼는 지금의 교회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만이 이 시대에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복음을 아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교회가 정말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많이 듭니다. 교회의 겉 모습은 나무랄 데가 없고 좋은데, 교인들의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Give yourselves com¬pletely to God, for you were dead, but now you have new life. So use your whole body as an instrument to do what is right for the glory of God).” (로마서 6:13)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 안에서 이런 믿음의 결단들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Religious People (종교적인 사람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followers (제자들)’를 원하십니다.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 (discipline)’ 해야 합니다.

셋째로,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는 다른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고 싶은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결과 아닌가요?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은,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그것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내릴 것입니다 (Yet preaching the Good News is not something I can boast about. I am compelled by God to do it. How terrible for me if I didn't preach the Good News).” (고린도전서 9:16) 구약 예레미야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야 20:9) ‘his word burns in my heart like a fire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 속에서 불처럼 타오릅니다)’ 예레미야의 마음 속에 타고 있었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복음에 대한 열정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는 이렇게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오늘 주보 겉면에 있는 그림을 보십시오. C.S. Lewis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There are only two kinds of people in the world. Those who bend their knee to God and say to Him, ‘Your will be done;’ or those who refuse to bend their knee to God and God says to them, ‘Your will be done.’”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과 또 하나는 하나님께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이 세상에는 자기가 전자라고 착각하는 크리스천으로 꽉 차 있습니다. 비록 전자라고 할지라도 후자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그 사람이 요나 같은 사람 아닙니까? 요나가 누구인가요? 하나님께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 아닌가요?

우리교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기초를 쌓는 일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우리교회의 규모가, 사이즈가 얼마나 커지느냐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복음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우리를 크리스천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복음의 비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모두 같은 자리에서 그 말씀을 읽었습니다. C.S. 루이스의 말을 조금 패러디 (parody) 해서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중에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만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는, 오늘 말씀을 듣고 복음의 비밀을 맡은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사람들과, 또 하나는, 오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따라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나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 대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