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6/11/2017 | 성령강림절 메시지 2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리라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People
사도행전 2:14-18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세례, 혹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오늘은 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성령의 사역과 결부 시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성령은 ‘진리의 영 (the spirit of truth)’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 14:17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진리로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 중에 인생을 올바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 뿐인 내 인생을 올바로 살고 싶고, 보람 있게 살고 싶고, 또 가치 있게 살고 싶고, 아름답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이곳 시간으로 어저께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한국에 계시는 형님으로부터 듣고 나니까 새삼스럽게 어머니께서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목회 열심히 해라. 너는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니까 목회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전번에 한국 가셨을 때 한가지 더 부탁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목사가 되라!”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는 큰 소리쳤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어머니 말씀처럼 목회 열심히 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임종은 지켜 보지 못했습니다만, 임종하기 몇 시간 전에 어머니를 바꿔 주셔서 간신히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숨이 차고 목이 막혀서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어머니, 제가 어머니 말씀처럼 잘 하고 있으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랬더니, “알아. 네 걱정은 안 한다” 그러셨습니다. 그 말씀은 똑똑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또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마음 평안히 가지시고요.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세요.”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전화상으로 똑똑히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기도야 늘 하지!”
저야 어머니 말씀처럼 다른 일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목회하고 싶지요. 그리고 어머니 말씀처럼 의로운 목사가 되고 싶지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그런 목사가 되겠습니까? 제가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겠습니까? 나의 마음대로, 나의 생각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 드린다면, 제가 보기에 정말 아니다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자기 자신은 올바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행하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성령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거든요? 성령께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고, 진리를 따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 속에서 내주(內住)해 계십니다. 우리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가 바른 길을 가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여러분, 로마서 말씀 읽다가 이런 말씀을 보셨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 2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groanings’라는 말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놓고 기도할 때, 우리가 바른 길을 따라 살지 않을 때, 우리가 불의한 일에 개입할 때, 성령께서 ‘with groanings’ 성령의 탄식 소리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보통 ‘groan’이라고 하면 ‘a deep inarticulate sound in response to pain or despair’를 말합니다. 고통이나 실망 때문에 내는 깊은 소리인데, 분명하지는 않은 소리입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은 내 안에서 신음하는 성령의 탄식 소리, 성령의 신음 소리를 듣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성령의 탄식소리가 내 속에서 들리기 때문에, 나의 길이 잘못되었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성령세례를 받도록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잘 몰라서 지금까지 성령세례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성령세례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제가 간절히 사모합니다. 내 안에 들어 오십시오.”
둘째로, 성경에 보면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은 ‘보호하고, 은혜를 주시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원어에는 ‘파라클레이토스 (παράκλητο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보혜사’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Helper’ ‘Counselor’ ‘Advocate’ ‘Comforter’ ‘Encourager’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4: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에 AI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말합니다. ‘인공지능’을 선보인 것이 꽤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에 휴대폰에 모두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아이폰에는 ‘시리 (Siri)’라는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어서 물어 보면 대답을 합니다. 음악을 들려 주고 이게 누가 작곡한 무슨 노래냐고 물으면 말해 줍니다. 운전하다가 차를 세우고 내비게이션을 입력하고 할 수 없을 때는 ‘시리’에게 물으면 바로 내비게이션으로 연결됩니다.
지금은 ‘시리’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구글의 ‘어시스턴트’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타나’ 아마존의 ‘알렉사’ 등이 각각 스마트 스피커를 달아서 출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만 해도 21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스마트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젠 개인 비서가 필요 없을 전망입니다. 웬만큼 유능하지 않으면 개인 비서를 두는 것보다 스마트 스피커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고 경제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알 수 없지만, ‘인공지능’의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실망하고 낙심했을 때 과연 ‘인공지능’이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고 나에게 맞는 카운셀링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입니다. 또 하나 이것은 늘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집에 놓고 오거나 했을 때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 없이 어떻게 일기 예보를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배터리가 없거나 전원이 없을 때는 또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은 ‘인공지능’의 약점들을 모두 보완하고도 남습니다. 나에게 최적화된 카운셀링을 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내주(內住)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만 없어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공지능’과 달리, 보혜사 성령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기능을 발휘합니다. 또 하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스마트 스피커’는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께서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이렇게 우리 크리스천의 삶을 유익하게 합니다.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즐겁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 성령은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을 때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낙심될 때 내 속에서 나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연약할 때 옆에서 나를 도와 줍니다. 나에게 최적화된 카운셀링을 줍니다.
셋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줍니다. ‘freedom (자유)’는 어디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기저기 매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인 것이 많이 있고요. 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도 우리가 매여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함’이 없습니다. 늘 무엇에 쫓기는 것 같은 삶을 삽니다. 늘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삽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매여 있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기분 좋은 말씀을 발견합니다. “바람은 제 맘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요한복음 3:8) 이 말씀은 사람이 성령으로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 그 과정을 모두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갈 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일일이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바람에 비유한 것은 아주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그리스 말로 ‘프뉴마 (πνεύμα)’라고 하는데요. ‘프뉴마’에는 ‘바람’ ‘숨’ ‘호흡’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은,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제멋대로 분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말고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면, 우리의 삶에 ‘자유함’을 줍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3:17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성령세례는 이처럼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세상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매이게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는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 믿음생활에 꿈과 비전을 줍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prophecy (예언)’ ‘vision (환상)’ ‘dream (꿈)’이라는 단어들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이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지 않으면 예언도 하지 못하고, 환상도 보지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예언과 환상과 꿈이 있습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꿈이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꿈이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두 사람이 얼마나 다릅니까? 꿈이 없는 믿음생활은 재미 없습니다. 지루합니다. 늘 똑 같습니다. 흥분될 것도, 기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있고, 꿈이 있고, 환상이 있는 믿음생활은 늘 흥분되고 기대됩니다.
몇 년 전에 ‘노아’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실망했습니다. 실망한 이유는 이 영화가 성경 내용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 개의 팔을 지닌 타락한 천사가 등장하고, 상상 속의 동물들이 등장하고, 폭력이 등장하는 것을 크리스천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영화를 감독한 아로노프스키 (Darren Aronofsk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노아에 대한 성경 말씀을 미드라쉬 (Midrash)의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이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구약을 읽으면서 이런 식의 토론을 해 왔다.” ‘미드라쉬’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성경 이야기를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가 아니라, 여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아로노프스키 자신이 유대인입니다. 그는 노아에 대한 성경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식으로 듣고 성장했습니다. 밋밋하고 건조한, 몇 줄 안 되는 노아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유대인들의 성경해석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이 없고, 환상이 없이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은 ‘노아’를 보고, 성경과 다르다고 분노하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밋밋한 믿음생활, 흥분되는 일도 없고, 기대되는 일도 없는 믿음생활에 꿈을 주고, 환상을 보게 합니다. 습관적인 믿음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줍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지금 하는 대로가 아니라 좀 더 창의적(創意的)인 믿음생활을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시면, 우리의 믿음생활에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 오시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성령이 나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6/4/2017 | 성령강림절 메시지
성령충만한 제자들 The Disciple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2:1-13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영어로는 ‘Pentecost (펜테코스트)’라고 합니다. 라틴어 ‘pentēcostē’에서 왔는데요. ‘50번째 (50th)’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50번째 되는 날 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때를 ‘오순절’이라고 불렀는데요. 일종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입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바로 이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갑자기 어느 날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미리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요엘 2:28-32에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라.” (누가복음 24:49) 바로 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제자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모두 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 그만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한 기대와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통하여 내 마음을 만져 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것을 기대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이해서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 성령께서 나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시기를, 그래서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체험을 주시도록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새벽기도 때도 말씀을 들렸습니다만,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령에 대한 오해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나 혹은 주변에서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의 부적절한 말과 행동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무슨 신들린 사람처럼 쉰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리고, 행동하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가정을 소홀하게 여기고 밖으로 나돕니다. “저는 밥은 아주 조금만 먹고요. 하루 온 종일 기도만 합니다” 이런 가식적인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아주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성령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 여러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성령체험’이라고도 나와 있고, ‘성령 세례’라고도 나와 있습니다. “도대체 성령을 받으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을 받으면 한마디로 ‘우리의 인간성(人間性, humanity)이 변화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다”는 고린도전서 15:50 말씀 이었습니다. 여기서 ‘혈과 육’이라는 말은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인간성을 말합니다.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인간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말이 ‘self-ishness (이기심)’라는 말입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다 그랬습니다. 그나마 예수 믿고 나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좀 나아졌습니다. 좀 나아진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의식적으로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처음으로 성령이 임했던 그 현장으로 가 볼까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약 120명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모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명단 (사도행전 1:13-14)을 잘 보면, 그 자리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3년 꼬박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인간성은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나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연약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또 주목해서 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요한의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7:5). 이런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나더니, 사람들이 앉아 있던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혀처럼 생긴 불꽃이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불꽃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그 곳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다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성령 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자기들의 언어와 다른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4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uddenly, there was a sound from heaven like the roaring of a mighty windstorm, and it filled th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from heaven)’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사건은 ‘하늘 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런 현상을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이런 일어난 일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일으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시몬이라는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나도 그런 능력을 갖고 싶다고 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당신은 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니,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 하시오.” (사도행전 8:20-23) 성령을 받는 일이 세상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라면 돈 많은 사람이 성령을 소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베드로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물 (the gift of God)’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이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충만한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제자들은 모두 밖으로 뛰어 나가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 을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겁과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이 ‘겁과 두려움’ 역시 나약한 우리 인간성 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속에도 이 ‘겁과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 에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를 전도하려고 할 때 내 속에 ‘겁과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있는 이 ‘겁과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유대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이 일을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사도행전 2:14) 이같이 성령충만한 제자들은 두려움 없이 지금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습니다.
둘째로,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목적 (purpose)’이 없다는 말은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삶의 목적’이란 말을 별로 해 보지 않았습니다. 맞습니까? 학교 가야 하니까 학교 가고, 공부해야 하니까 공부 하고, 직장에 나가서 일해야 하니까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을 벌고, 결혼해야 하니까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 하니까 애를 낳고, 그냥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제자들에게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삶의 목적’이 주어졌습니다. 제자들은 그 목적을 위해서 자기 삶 전체를 헌신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삶의 목적’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미련 없이 내려 놓았습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어 볼까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 ‘이 모든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 모든 것들’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연약한 그의 인간성 때문에 또 언제 주님을 배반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의 인간성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모두 내려 놓고, 한 가지 목적에 끝까지 충실했습니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말을 못할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삶의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나의 삶 속에 들어 오면, ‘삶의 목적’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모두 내려 놓게 됩니다. 억지로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이것을 드러내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땅끝’이 어디인지 묻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은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밖으로 나가서 외국어를 말하지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오순절이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러 왔습니다. 이 유대인들 중에는 1세들도 있었고, 2세들도 있었습니다. 아예 그 나라 사람인데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나라와 지역 이름이 9-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놀랍게도 이 지역의 언어 (their native languages)로 말을 했습니다.
누가 그렸는지 그 지역들을 모두 찾아서 지도에 그려 보았더니, 이런 모양의 지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든 모양새입니다. 이 지도를 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지역들이 바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지역들이라는 것입니다. 지도에는 화살표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지만, 이제 예루살렘에서 세계 각국으로 복음이 전파되도록 화살표가 그려져야 합니다. “너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지역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해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문자적인 의미에서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 하는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파 해야 할 ‘땅끝’이 어디인지, 또 나를 통해서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왜 진작 교회는 성령충만한 삶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왜 나의 삶을 변화 시킨 복음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지금이라도, 비록 더디고 시간이 많이 걸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복음을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5/28/2017 | 야외예배
하나님의 케어 속에 있는 삶 The Life Under God’s Care
시편 95:1-7
오늘 모처럼 이렇게 야외로 나오니까 참 상쾌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가끔 일상생활을 떠나서 제자들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가복음 6:31 말씀이지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잠시 쉬도록 하자.”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Let's go off by ourselves to a quiet place and rest awhil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13에는 예수님께서 혼자 있기 위해서 사람들을 떠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a remote area)’ 가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죽고 나서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예수님에게 쏠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떠나서 혼자 있을 장소를 찾으셨습니다.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공부하고, 페이퍼 쓰는 일, 회사에서 일하던 일, 비지니스에 대한 생각, 자녀들에 대한 생각, 이런 생각들을 잠시 내려 놓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불고기에 삼겹살을 준비했다고 하는데요. 서로 서로 둘러 앉아서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짬짬이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 보세요. 저 쪽 뚝 위로 올라가면 호수가 있습니다. 호수 가로도 한번 걸어 보세요.
오늘 제가 잠시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95편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누가 썼는지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꼭 다윗이 썼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만, 학자들은 다윗이 쓴 것으로 보지 않고 다른 익명(匿名, anonymous)의 저자가 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편 95편을 한 절 한 절 읽어 보면 그 안에 많은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목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장 안에서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양 떼들입니다.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가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편 23:1-6)”라고 고백했습니다.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자기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차고 넘친다는 고백입니다.
시편 95편을 쓴 저자 역시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He is our God. We are the people he watches over, the flock under his care.” (7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 (care)’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안심 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돌보신다고요. 요즘에 ‘오바마 케어 (Obamacare)’라는 말도 하고, ‘프럼프 케어 (Trumpcare)’라는 말도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케어 (God’s care)’를 받고 있습니다. ‘오바마케어’가 우리를 완전히 케어해 주지 않습니다. ‘트럼프케어’가 우리를 완전히 케어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케어’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케어’는 당장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케어’가 구체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케어’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그렇게 좋은 것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케어’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recognize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돌보고 계시구나! 나는 하나님의 케어를 받고 있구나!” 어떻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새를 보아라.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 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새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들에 피는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6:26-30)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나무, 풀, 새, 이런 것들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야외예배는 일종의 현장학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나무들과 핀 꽃들, 그리고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기르시는 ‘하나님의 케어’를 현장에서 느껴보는 것입니다. 저 혼자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자연 속에 들어 오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케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95편 저자는 ‘하나님의 케어’를 recognize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하나님께 기쁜 노래를 부르자 (1절). (2)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 (2절). (3)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자 (6절). (4)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자 (Let us kneel before the Lord our maker., 6절). (5)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Listen to his voice today., 7절).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찬양과 감사와 예배와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케어’를 확인할 수 있는 채널들입니다.
오늘 야외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는 단순히 “아, 다시 지겨운 집으로 가는구나! 지겨운 학교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요. 내가 ‘하나님의 케어’ 속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 제가 ‘하나님의 케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주 안에서 새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에너지로 충만한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