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5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영성 (II) The Lessons Learned from The Spirituality of Jesus

히브리서 5:6-10

예수님의 ‘영성’에 대한 두 번째 설교 시간입니다. 영어 단어에 ‘solitud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잠깐 하던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에 ‘solitude’ 영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35-38 같은 말씀이 대표적인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자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의 특징은 ‘솔리튜드’가 주는 benefit에 머물지 않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인가가 없는 사막이나 동굴을 많이 찾았습니다.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솔리튜드’가 주는 benefit를 즐기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솔리튜드 영성’을 즐깁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 순례하면서 요르단에 있는 수도원도 방문했습니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데저트 (사막)입니다. 사방에 모래와 돌들이 널려 있습니다. 석회암들이 많아서 동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주의해서 보면 그 동굴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그런 동굴에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솔리튜드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솔리튜드 영성’이 주는 이점(利點)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까 읽어 드린 마가복음 1:35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fore daybreak the next morning, Jesus got up and went out to an isolated place to pray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an isolated place’로 가셨습니다.” NIV, NKJV 성경에는 ‘a solitary place’라고 나와 있고, 'a lonely place (NASB)’ ‘a deserted place (Phillips)’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소통(疏通)하기 위해서, 그런 장소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솔리튜드’는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사역의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있은 후에 난리가 났습니다.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왕 (king)으로 만들려고 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큰 문제였던 시대에,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로 만든 떡 다섯 개를 가지고 5,000명이 실컷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서 몰래 제자들도 떼 놓고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복음 6:15) “He departed again to the mountain by Himself alone.” (NKJV) 예수님은 산에서 혼자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방향을 확정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은, 사역의 방향을 확정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사역의 힘을 얻고,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은 영적으로 새롭게 재창조 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 다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 오십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마가복음 1:38)”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영성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삶의 유혹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혹’은 temptation을 말합니다. 우리 말로 ‘시험’이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을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요,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이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12:2). 예수님께서 언제 유혹을 받으셨는지,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어떤 것이었는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혹을 이기셨는지,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유혹을 받으셨습니까? 영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입니다. 요단강에 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 (마태복음 3:17) 이 일이 있은 후에 사탄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성경 많이 읽으면, 봉사 열심히 하면 뭔가 일이 잘 되고, 뭔가 나에게 큰 힘이 생긴 것 같 같은 착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혹은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영적으로 뭔가 전과는 다른 수준에 도달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찾아 옵니다. 예수님도 그랬다니까요.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곧 유혹을 받는 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대처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고, 사탄에게 경배하라는 세 가지 유혹 아니었습니까? 이 세 가지 유혹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원하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사역을 하라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에게 찾아 오는 유혹도 그런 것입니다. 인생을 쉽게, 즐기면서 살라는 것 아닙니까? 너 혼자 바르게 살겠다고 요란을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 혼자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칙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넓은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좁은 길로 가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8:3)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6:16)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6:13) 여러분, 이 말씀 읽으면서 무슨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까? 성경을 조금만 주의해서 읽는 사람이라면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에 대처했던 말씀이 모두 신명이 6장, 신명기 8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쉐마 (Shema)’라고 말하는 말씀입니다. ‘쉐마’라는 말은 ‘들으라’라는 뜻입니다. ‘쉐마 이스라엘’ 그러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런 뜻입니다. 신명기 6:5에 ‘쉐마 이스라엘’이란 말이 나옵니다. 신명기 6장, 7장, 8장은 이스라엘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교육의 핵심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 내용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렸을 때부터 쉐마 교육을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외에 이 세상 어떤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통해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적인 순간에 유혹을 이기는 힘이 되었습니다. 시편 107: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He sent His word and healed them, And delivered them from their destructions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파멸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해서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혹을 이길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집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제시하는 가치관이 나의 가치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후서 3:15-17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그대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이 성경은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혹을 받는 것은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유혹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영성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는 영성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8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ven though Jesus was God's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예수님은 그가 받으신 고난의 일들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가장 빛나는 예수님의 영성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계실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6절) “While Jesus was here on earth, he offered prayers and pleadings.”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저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계실 때 (while Jesus was here on earth)’ 이 말씀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In the days of His flesh (NASB, 그가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 이렇게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오늘 우리와 똑 같은 삶을 사셨을 때’ 이런 뜻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이 어떻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니까 ‘기도’ ‘도움’ ‘죽음’ ‘부르짖으며’ ‘눈물’ ‘응답’ ‘고난’ 이런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실존(實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문제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들입니다. 아무도 이런 문제들로부터 면제된 사람이 없습니다. 이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결단하고,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럴 때 잘 아프지요? 목이 뻣뻣하는 증상도 많이 나타나고요. 소화도 잘 안 되고 그러지요? 잠은 많이 오고요. 예수님도 우리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랬을까요?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태복음 26:38) 예수님도 우리처럼 마음이 괴롭고, 제자들의 support가 필요했습니다. 힘들 때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면 힘이 되잖아요?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우리처럼 예수님께도 힘든 일이 많았을까요? 많았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예수님에게 적대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모두 예수님께 감정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그 사회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관계가 좋지 않으니, 예수님께서 부담이 많이 되셨겠습니까? 어디를 가든지 이런 사람들로부터 감시를 받고, 질시도 받고, 모함도 받고, 오해도 받았습니다.

이런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7절)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나를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다” 이렇게 믿고 기도하셨습니다. 8절에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다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받고 있는 고난, suffering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로 기도하신 것은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다시 8절 말씀을 읽어 보세요. “Even though Jesus was God's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을 배웠습니다).”

어떻습니까?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장 빛나는 영성이고,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하는 영성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는 유치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배고프면 배부르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어려움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고, 아프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고난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성을 배운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성이 주님의 영성의 수준까지 올라 오기를 원하십니다. 


1/22/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4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영성 (I) The Lessons Learned from The Spirituality of Jesus

요한복음 4:30-34, 6:38-40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상생활은 매우 분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5-6시경)에 갈릴리 바닷가로 가심, 거기서 그물을 깁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을 제자로 삼음, 오전 10시 경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으로 가셔서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치심.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를 고치심. 오후 2시경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치심.  오후 5시경 병 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 온 동네가 예수님께 나온 것 같았음.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심. (예수님은 그날 저녁 11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드심) 새벽 4시경 자리에서 일어나신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심. 아침 6시경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가심.

예수님의 이런 일과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30-33살) 기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바쁜 일과를 모두 소화하셨을까?” “이렇게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주어졌을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영성 (spirituality)은 어떤 영성이었을까?” 이런 흥미 있는 질문들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는 예수님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요즘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영성’이란 말은 예수님의 ‘영적인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pirituality’라고 합니다. 이 말은 ‘spiritual’이라는 말에 ‘-ity’라는 접미사가 붙었습니다. 그러므로, ‘spirituality’라고 하면, 그 사람의 영적인 성품의 수준, 영적인 성품의 질이라고 할까요?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생각, 삶 전체에 미치는 영적인 성품의 정도를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의 영성이 그 정도인 것을 알겠다!” “이 사람이 이렇게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영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영성’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지배할 때, 그 사람의 ‘영성’이 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영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example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영성을 계발하셨구나!” “예수님의 영성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이런 것이구나!” “예수님의 영성을 이렇게 내 삶에 적용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영성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성’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영성’은 예수님의 가정을 통해서 성장했고, 꽃을 피웠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가정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남자 아이를 낳으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그 아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요셉은 비둘기 두 마리를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2:24).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린양을 드렸을 텐데, 요셉은 가난했기 때문에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비록 요셉과 마리아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지만, 이 부부는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가문에 속한 ‘의로운 사람 (a righteous man, 마태복음 1:19)’이었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면 ‘a man of integr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레위 가문의 품행이 바르고, 매우 순종적인 여자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전형적인 유대인 가정으로, 유대교의 율법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 때는 마침 유월절이라는 큰 명절이었습니다. 성경에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에도 유월절 관습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누가복음 2:41-42)”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유대교의 관습을 충실하게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살 때라고 한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아마도 ‘바 미쯔바 (Bar mitzvah)’라는 일종의 성인식을 받게 했던 것 같습니다. ‘바 미쯔바’는 보통 13살에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2살에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토라 (Torah)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면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축하해 주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고 있는 ‘innate spirituality (본래부터 타고난 영성)’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성은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통해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영성’에 있어서 가정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무엘의 ‘영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기도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온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디모데의 ‘영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물론 그의 멘토였던 바울을 만나면서부터 ‘영성’이 급성장한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을 잘 읽어 보면 디모데에게도 ‘innate spirituality’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의 타고난 ‘영성’은 경건한 어머니 유니게 (Eunice)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5).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공부 잘 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인가요?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자라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있습니까? 크리스천 부모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영성’이 뛰어난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가정이 신앙적으로 바른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성경 해석은 틀에 박힌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한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창의적인 해석 (creative interpretation)’이라고 할까요?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특별했습니다. “이것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교훈이다.” (마가복음 1:27)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32, 마태복음 7:29)

예수님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안식일 법’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규정에 얽매여 철저하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최고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2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지동설(heliocentrism)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 (Copernican Revolution)'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율법에 대한 이런 해석이 가능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어떻게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해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었었던 것은,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다는 성경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안식일이라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6:9). 이것이 예수님의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하고 생각해 질문하는 것이 그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영성’은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씀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영성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 말씀에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4:30-34)”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 (the will of God)’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Mission Impossible (불가능한 사명)’이었습니다.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말씀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8절) 그러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길래 자기 목숨까지 바쳐서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요한복음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 보면 그 ‘하나님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생을 얻는 것 (요한복음 6:40)”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영성’ ‘spirituality’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흘러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그것이 느껴집니다. 반대로, ‘영성’이 얕은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한가지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해석 능력이 탁월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판에 박히지 않고, 틀에 얽매이지 말씀을 전하셨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기도생활을 통해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交際, fellowship)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에 전념하셨던 이유와 목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기도만 한다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영성’은 어떤 것입니까? 그 사람들의 ‘영성’이 말과 행동으로, 그들의 삶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있는 그의 ‘영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nourishment comes from doing the will of God, who sent me, and from finishing his work.”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my nourishment’라고 했으니까요. ‘nourishment’는 음식도 될 수 있고, 나에게 힘을 공급(供給)해 주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생명을 유지 시켜 주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 뜻을 완수하는 것이 나에게는 음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공급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영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런 ‘영성’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사야 58:6-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바라는 금식은 너희가 부당하게 가두어 놓은 사람을 풀어 주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며, 억눌림 당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고, 그들이 하는 고된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이다. 너희 음식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을 너희 집에 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에게 너희 옷을 주고, 기꺼이 너희 친척을 돕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금식(禁食, fasting)은 ‘영성’을 드러내는 전통적인 한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영성’은 단순히 밥을 먹지 않는 극기훈련이 아닙니다. 금식을 통해서 길러진 ‘영성’은 세상으로,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The Word became human and made his home among us (요한복음 1:14)”라고 고백했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몸 속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spirituality of incarnation (인카네이션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기도로 끝나지 않고, 설교로 끝나지 않고, 금식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읽기 역시 ‘영성’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성경읽기를 통해서 길러진 ‘영성’은 밖으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성’이고, 오늘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영성’입니다.


1/15/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3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It Is Not What We Learned About Jesus.

에베소서 4:17-24

오늘은 “새해에는 이렇게 산다” 설교 시리즈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제일 눈에 들어 오는 말씀은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It is no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Jesus).”

예수님에 관해 배운 것 하고 행동하는 것 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배웠으면 당연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마태복음 7:20)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s, just as you can identify a tree by its fruit, so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actions.” “맞습니다. 그 나무가 맺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런 뜻이지요?

열심히 성경공부합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배웁니다. 그런데, 왜 배운 대로 ‘생각하고’ 배운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삶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습니까? 왜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마치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과 행동이 다른 이 심각한 문제가 어제 오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도 있었던 문제가 지금도 똑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보 겉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Be who God wants you to be, not what others want to see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라. 결코 사람들이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라).”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선자 (hypocrites)’라고 하셨습니다. 속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척하는 것입니다. 원래 ‘히포크리트’라는 말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참 재미 있습니다.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나 탤런트들이 드라마를 찍는 중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와 현실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야, 저 사람 멋지다!” “와, 저렇게 마음이 예쁘구나!” 이렇게 드라마 상의 인물과 실제 인물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드라마에 나왔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을 알고 상대방에게 실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바리새파 사람들은 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지 모의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14)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 헤롯 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가복음 3:6)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형편 없다는 문제였고, 나중에 제기한 문제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굉장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아서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나, 나중에 제기했던 문제가 문제의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관해 배운 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배운 살지 않으면서 교회 생활을 계속하다가 보면 위선자들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17절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크리스천과 넌크리스천은 그 ‘생각’과 ‘행동’이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 (the life God gives)’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8절). 다른 성경에는 ‘the life of God (NIV)’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을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냥 간단하고 분명하게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말씀을 읽고 받아 들이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But to all who believed him and accepted him,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요한복음 1:12)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이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핵심을 붙잡지 않고 다른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붙잡고 있습니까?

영어 단어에 ‘religious’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종교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핵심을 붙잡지 않고 다른 것들을 붙잡으면 ‘종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겉모습이나 형식을 좇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ey will act religious, but they will reject the power that could make them godly (그들은 종교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들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을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디모데후서 3:5)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장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새롭게 ‘renew’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Throw off your old sinful nature and your former way of life (22절)”이라고 나와 있네요. 또, “Put on your new nature, created to be like God (24절)”이라고 나와 있네요. 그리고,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23절)”라고 나와 있네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위선자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에 대하여 배운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으면 됩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목사의 아이들이라도 애들과 놀다가 싸울 수도 있는데, 교회의 어른들이 “넌 목사의 아들이, 그러면 되니?” “넌 목사의 딸이 그러면 되니?” 하고 야단을 칩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말들을 들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회 전도사님 딸이 저와 같은 반이었습니다. 이 아이 집 가출했습니다. 가출해서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번 Re-NEW에서, 주일학교를 인도하는 전도사님이 “너희들 중에 아빠가 목사인 아이들 있으면 나와라’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몇 몇 아이들이 나왔답니다. 전도사님이 아이들을 붙잡고 “나도 목사 아들이야!” 하면서 같이 펑펑 울었답니다. 한 목사님이 우연히 아이들 ReNEW에 갔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목사님 아들이 달려 와서 자기가 상처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막 울더랍니다. 난감해진 목사님이 이 아이를 강사실에 데리고 와서 컵라면을 하나 먹이면서 “봐라, 네가 목사의 아들이니까 이런 방에도 들어 올 수 있고, 컵라면도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랬더니, 이 아이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습니다.

목사의 아들이 갖는 베네핏은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아이들 수준에서는 컵라면 하나 먹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아무 베네핏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야단 맞고 상처만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베네핏이 얼마나 큰 지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엄청 나서 일일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권세’라는 말이 ‘privilege’이 잖아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하게 누리는 권리’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을 ‘mortal man’이라고 하잖아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이 보다 더 큰 특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방탕한 생활에 빠져 살아야 합니까 (19절)? 욕망에 빠져 타락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22절)? 예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합니까 (22절)? 아니면, 그 생각과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까 (17절)?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생각과 행동 (thoughts and attitudes)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23-24절)” 라고 권면했습니다.

헨리 나누엔 (Henri Nouwen, 1932- 1996)이 1977년에 『The Living Reminder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 ‘Service and Prayer in Memory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출판한 봉사와 기도)’ 라는 부제 (subtitle)를 붙였습니다. 이 책은 사역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입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 책의 내용을 소개한다면, 첫째로, 사역자들은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질병들도 고쳐 주시고, 마음의 상처들도 고쳐 주셨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상처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9). 십 팔 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던 한 불행한 여자를 향하여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16).

이렇게, 모든 사역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한답시고, 교회 일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역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낫게 해 주는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역자들은 ‘Sustain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같이 사람들을 세워주고, 사람들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 금방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해 왔다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누가복음 22:32)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그를 세워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역자들은 ‘Guid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말씀해 주시고, 천국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심으로,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그 길을 인도해 줘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생의 목적을 세우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생의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Guiding Reminder’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모두 ‘The Living Reminder of Jesu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의 말은 단순히 사역자들을 위한 말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living reminder’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로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마태복음 19:26) 이 모든 일의 첫 걸음은, 내가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크리스천의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1/8/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2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 것을 증명하라 Prove Yourselves to be Christ’s True Disciples.

요한복음 15:1-8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행기 안에서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책을 한권 가져갔었습니다.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 목사가 쓴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는 애틀랜타에 있는 제일침례교회의 목사로 오랫동안 재직했습니다. 간결하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한 설교자입니다.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 “인 터치 (In Touch)”에 출연하는 방송 설교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한번 읽기 시작했다가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모두 읽었습니다. 한번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그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은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기초로 해서 크리스천의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하여 설명한 책인데, 그 책의 내용이 아주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도서부에도 이 책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만,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복잡하다 싶은 말씀은, 그 말씀을 읽고 나서 몇 가지로 요점을 정리해 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本文, text)도 그렇습니다. 별로 어려운 말은 없는 것 같지만, 이런 말씀은 요점을 정리해 보면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열매를 조금 맺는 것이 아니라, 많이 맺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You bear much fruit and prove to be my disciples (8절,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인 것을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많이 맺느냐 하는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는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점들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지 이것도 참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하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삶의 원리(原理, principle)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꼭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고 할까요? 크리스천의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가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골프 코치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감리교 안의 같은 뉴잉글랜드지방에 속한 목사님이신데요. 프로 골퍼들을 코치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골프를 조금해 보다가 “나는 운동 신경이 둔해서 골프를 잘 못 친다고 하면서 포기해 버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골프는 운동 신경으로 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공을 치는 폼 (form)을 잘 배워서 그대로만 치면 그 쪽으로 공이 가게 되어 있는 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 맺는 삶의 원리는, 먼저 쓸모 없는 가지들을 쳐 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1-3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정원사들은 잘 압니다. 이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떤 가지를 쳐 줘야 하는지 잘 압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전지(剪枝)’ 혹은 ‘가지치기’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prune’이라고 합니다. 가지치기를 귀찮아 하거나, 게을러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자잘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이런 열매들은 상품 가치가 없습니다.

나무는 쓸모 없는 가지를 쳐 주면 되는데,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Already you are clean because of the word that I have spoken to you).” (1-3절) 참 감동적인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어떤 말씀들은 길 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말씀들은 돌짝 밭에 떨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들은 제자들의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잘 몰랐을 수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제자들의 삶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말에 ‘백약이무효’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절대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그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지 작업(剪枝作業)을 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입에 얼마나 단지요. 나의 입에 꿀보다 더 답니다. 나는 주의 말씀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악한 길을 미워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며, 내 길의 빛입니다.” (시편 119:103-105)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악한 길인지, 잘못된 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lamp’와 같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길을 비쳐 보면서 내가 가는 길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깨달음 (understand-ing)’을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이해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기 때문에 늘 현명한 판단을 합니다.

열매를 맺는 두 번째 원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견고하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절) 또,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삶의 비결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말씀해 주셨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일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0-11) 예수님의 능력의 비결은 “I abide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abides in me”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의 비결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누구든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사람 안에 거하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크리스천의 삶의 비결은 내가 열매를 생산하는 (produce)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열매를 맺는 (bear) 것입니다. ‘produce’라는 말은 ‘생산한다’ ‘만들어 낸다’는 그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bear’는 ‘to produce by natural growth’입니다. 자연적인 성장에 의하여 맺히는 것입니다. 나무가 꽃을 피울 때,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 ‘bear’라는 단어를 씁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가 애쓰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잘 성장하면 꽃을 피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경우 ‘produce’라는 말을 쓰지 않고, ‘bear’라는 단어를 씁니다. 예수님은 ‘produce’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bear’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중국 선교의 문을 연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 영국)를 아시지요? 허드슨 테일러는 ‘Inland mission (내륙선교, 內陸宣敎)’라는 새로운 선교 방식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 때까지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면 주로 도시 중심의 선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도시가 아니라 내륙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똑 같은 머리를 하고, 옷을 입고, 젓가락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으면서, 현지인들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선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한 지방에 이르렀을 때, 성문 위에 금빛으로 ‘내륙은인(內陸恩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그를 환영했다고 합니다.

이런 허드슨 테일러였지만, 한 때 그는 중국 선교의 성과가 없다고 크게 낙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얻은 그는 두문불출했습니다. 그 때, 존 매카시 (John McCarthy)라는 선교사가 허드슨 테일러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햇빛과 공기를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결과도 아니고, 생명의 기운을 얻으려고 노력한 결과도 아닙니다. 단순히 포도나무 본체에 순종해서 본체와 온전히 하나가 하나가 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허드슨 씨,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대가 없이 주어지는 열매를 노력과 투쟁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 시켜야 합니다. 주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항복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존 매카시가 보낸 이 한 장의 편지는 주님께서 허드슨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의 성과를 내려는 욕심을 내려 놓고, 주님과의 교제에 더욱 치중했다고 합니다.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by itself, unless it abides in the vine, nei-ther can you, unless you abide in me.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If anyone does not abide in me he is thrown away like a [broken off] branch and withers away.” (English Standard Version) 이 말씀 속에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비밀과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열매 맺는 삶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순종해서 이 원칙대로 하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가지는 자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온전하게 붙어 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원리를 “Abide in me and I abide in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abide’라는 말 속에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remain (머무르다)’ ‘stay’ ‘dwell (살다)’ ‘reside (거주하다)’ 또 ‘to accept’ “submit to (......에 복종하다)’ ‘suffer (감수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안에 abide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뜻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나는 주님 안에 ‘abide’할 수 있고, 주님은 내 안에 ‘abide’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 불협화음(不協和音)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다’는 말은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루는 삶을 말합니다.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로 연합된 삶을 말합니다. 나에게 붙어 있지 않는 사람은 시들어 버린 가지와 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이 맺는 열매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의 열매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You bear much fruit and prove to be my disciples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임을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열매가 있습니까? 그 열매로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명할 열매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두개 열매가 아니라, “You bear much fruit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열매 맺는 삶의 원리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원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원리와 반대로 살았습니다. 애쓰고, 힘쓰고, 열심히 하면 뭔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원리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원리였습니다. 두 원리의 차이는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은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2017년 한 해가 벌써 밝았습니다. 올 한 해는 그동안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세상적인 원리를 버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 맺는 원리를 따라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1/1/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1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고린도후서 5:1-10

2017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교우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한 해를 시작하기를 원하십니까? 중국의 어떤 왕은 세수 대야에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라는 글을 새겨 놓고, 세수할 때마다 오늘도 새로워 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새해를 맞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은, 새해에는 늘 하던 대로가 아니라, 믿음생활의 핵심을 붙잡는 믿음생활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송 하나를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지 말고 가사의 뜻을 생각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을 읽어도 생각 없이 읽지 말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가고, 기도를 해도 형식적인 말을 늘어 놓지 말고, 기도의 말 하나 하나에 우리의 진심을 담아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그런 믿음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 번연 (John Buyan, 1628-1688)이 쓴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이라는 소설을 읽어 보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00여전 전에 나온 책이니까 지금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청교도 혁명이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고 하니까 그만큼 크리스천의 삶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1599-1658)이 밀려나면서 청교도들에게 설교가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열렬한 청교도 신자였던 존 번연은, 계속해서 설교하다가 체포되어 12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존 번연은 감옥생활 중에도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던 중에 ‘천로 역정’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의 내용을 조금 소개 드린다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책을 읽고 있다가 “아,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크게 절망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에게 실망한 ‘크리스천’은 등에 무거운 짐을 진 채 홀로 벌판을 거닐면서, 어제 읽고 있던 책을 계속 읽습니다. 그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었습니다. 그 때 맞은 편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도자’였습니다. ‘전도자’가 말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매우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저는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있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았습니다. 이 책에 씌어 있는 대로 어서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 등에 매달려 있는 이 무거운 짐때문에 걱정입니다. 전 이 짐을 없애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에 '전도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왜 이곳에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그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멸망을 피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전도자'가 멀리 보이는 넓은 벌판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저 쪽에 있는 좁은 문이 보입니까?" "어디요? 아니, 보이지 않는데요?" "그럼 저 찬란한 빛은 보이십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예, 보입니다. 아주 밝은 빛이 보입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빛이 보이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세요. 그 빛에 가까이 가면 작은 문이 보일 것입니다. 그 문을 두드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줄 것입니다."

저는 ‘천로역정’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 책에 나오는 방황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이 오늘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크리스천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찬란한 빛이 있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라!”는 ‘전도자’의 말은, 적어도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어디에 길이 있는지 혼란스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리키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적어도 저에게는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성경은 어두운 시대를 밝혀 주는 등불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깜깜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고,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7절) NIV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말씀이며, 동시에 이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함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스스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가치들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를 포기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저는 새해 첫 주일을 맞아 눈에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이 성경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들을 얻으려고 애썼던   물질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아직도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에 대한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특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 보면 결국 돈 때문이었습니다. 돈에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은 돈이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소유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 진실, 섬김, 헌신, 희생, 천국, 하나님,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또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으니까 이런 것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확신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證據)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추구해서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입고 있든지, 몸을 벗어 버리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9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7-8)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가 추구했던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 발견했습니다.

둘째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맞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10절)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위선적(僞善的)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위선자를 영어로 ‘hypocrites’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stage actor (무대 위의 배우)’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각본에 나와 있는 대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지만, 착한 사람처럼 연기를 해야 합니다. 자기는 슬프지 않지만 슬픈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기 보다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죄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의의 길을 따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진실한 길을 걸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지불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하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비록 그 길이 아무도 가지 않는 좁고 외로운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길을 기꺼이 선택합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눈으로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하는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청년의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돈을 많이 모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에 의하면, 이 청년은 그 나이에 이미 사회의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8:18).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21) 하지만,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청년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제시했던 “나를 따르라!”는 삶의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갈릴리 어부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어부들 역시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어부들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어부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나를 따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 이 말씀을 들은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결단을 미루어왔습니다. 여러 번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단을 미룬 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젠 대답을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수는 많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이 때에, 우리는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습니다. 결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정말 나는 이렇게 살아서 행복할까? 만족할까?” 하는 질문이 계속 생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가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이 ‘구름 떼’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눈에 보는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했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닙니다.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