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4/2022 | 대강절 메시지
길을 내는 삶 A Life Preparing The Way For The Lord
마가복음 1:1-8
오늘 대강절 둘째 주일에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400년 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희망의 촛불을 켜 주시고, 평화의 촛불을 켜 주심으로 자기 백성들과 소통(疏通)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밤, 하늘에서 들려온 천사들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쁨을 받으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또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이 말씀이 “Praise God in heaven! Peace on earth to everyone who pleases God(하늘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땅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에 시므온(Sime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때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5) 또 같은 시기에 살았던 안나(Anna)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6-37).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those who were looking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누가복음 2:38)’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good news for all the people, 누가복음 2:10)’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라오스(λαος)’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태복음 28:19)”고 명령하신 말씀에 나오는 ‘민족(ἔθνη)’과 같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같은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옵니다. 이 의는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We are made right with God by placing ou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is is true for everyone who believes, no matter who we are).” (로마서 3:22) 복음은 그가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조슈아 리브만(Joshua L. Liebman, 1907-1948)이라는 유대인 랍비가 쓴 ‘Peace of Mind(마음의 평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어느 날 한 현자(賢者)를 만났습니다. 그 현자는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청년은 “첫째는 건강, 둘째는 사랑, 셋째는 재물, 넷째는 아름다움, 다섯째는 재능, 여섯째는 권력, 일곱째는 명예라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나열했습니다. 그 청년이 나열한 목록을 본 현자는 “아주 훌륭한 목록이구만! 중요한 것부터 잘 나열을 했어! 하지만 자네는 아주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라고 하면서 그 청년이 만든 목록을 펜으로 벅 긁어버리고 거기다 ‘마음의 평화(peace of mind)’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This is the gift that God reserves for his special protégés, talent and health he gives to many. Wealth is commonplace, fame not rare. But peace of mind he bestows charily(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능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네. 재물을 주신 사람들도 많이 있고, 명예를 주신 사람들도 적지 않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으로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청년이 조수아 리브만이었습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가지고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의 내면 세계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수아 리브만은 그 책에서 이런 유대인들의 기도 하나를 소개합니다. “O God, Lord of the universe, heap worldly gifts at the feet of foolish people. Give me the gift of the untroubled mind(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 세상적인 선물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발 아래 쌓아 주시고, 저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십시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구약성경 이사야 9:6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는 기원전 8세기경 유다 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계산하면 2,8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 메시아 탄생에 대한 말씀과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시대에 대한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는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가 ‘한 아기(a child)’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에게 다섯개의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 중에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사르 샬롬(Shar Shalom)’입니다. 그 뜻은 ‘the one who removes all peace-disturbing factors and secures the peace(평화를 방해하는 모든 원인들을 제거하고 평화를 지켜주는 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예언한 ‘한 아기’의 탄생이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오래 전에 한 예언자가 가지고 있던 꿈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가사를 보세요. “(1절)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2절)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여러분,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하나의 주제(theme)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과 신약은 두 권이 아니라 한 권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일정한 패턴으로 주어집니다. 오래 전에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사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했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한 예언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땅을 사고 매매증서를 항아리에 넣어서 보관하라고 했습니다.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땅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비록 지금은 조국이 멸망하고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돌아와 무너진 조국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다의 역사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사르 샬롬’ ‘평화의 왕’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주시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샬롬’을 주실 분은 ‘사르 샬롬’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말의 표현이 참 좋지 않습니까? 예수님 ‘밖에서’는 하나님의 ‘샬롬’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샬롬’은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네가 오늘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하지만 너무 늦었다. 평화의 길이 네 눈에 보이지 않는구나 (How I wish today that you of all people would understand the way to peace. But now it is too late, and peace is hidden from your eyes)” (누가복음 19:42)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안타깝게 말씀하신 ‘평화의 길(the way to peace)’은 ‘사르 샬롬’이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의 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남긴다. 곧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하나님의 ‘샬롬’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의 성경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평안을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강절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이 ‘사순절에 드리는 기도’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기도하며 금식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그리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시간입니다(It is a time to be with you, Lord, in a special way, a time to pray, to fast, and thus to follow you on your way to Jerusalem).” 나우웬은 사순절이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을 따르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대강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반성하면서 ‘특별한 방식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강절에 생각해야 하는 ‘특별한 방식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 뒤에 나보다 훨씬 강한 분이 오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돌리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샬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기는커녕 하루 하루 살기에 급급합니다. 웬 일인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했던 말 그대로입니다. “For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21) 우리가 때때로 교회에서 필요한 일에 봉사하고 헌신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좀 생소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속적인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Martin Luther King, Jr.(1929-1968) 목사님을 잘 아시지요? 그는 조지아 아틀란타에서 태어나서 1968년, 39살의 젊은 나이에 테네시 멤피스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제시 잭슨(Jesse L. Jackson)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저격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로서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1955년 3월에 평범했던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알라바마의 몽고메리에서 15살 된 클로뎃 코빈(Claudette Colvin)이라는 당시 임신 중이었던 흑인 여학생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위원회가 고민하는 동안에 몽고메리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로자 팍스(Rosa Parks)라는 42살 된 흑인 여자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그 유명한 Montgomery Bus Boycott 운동으로 번지게 됩니다.
African-American Community의 문제를 다루는 한 작은 위원회의 멤버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클로뎃 코빈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 운동을 이끄는 주요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간디(Mahatma Gandhi)에게서 배운 비폭력 저항 운동을 그의 투쟁 방식으로 채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줄 곳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성경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40:4-5 말씀이었습니다. “골짜기들을 메우고, 산과 언덕들을 낮춰라. 굽은 길들을 곧게 펴고, 험한 땅들을 평야로 만들라.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고 모든 사람이 함께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Fill in the valleys, and level the mountains and hills. Straighten the curves, and smooth out the rough places. Then the glory of the Lord will be revealed, and all people will see it together).”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예수님을 위해 ‘특별한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이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그렇게 ‘길을 내는 삶’을 살았기에 흑인들의 인권이 향상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지속적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특별한 방식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하나님은 때가 되어 그를 부르셨고,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르 샬롬’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God blesses those who work for peace, for they wi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마태복음 5:9)
11/27/2022 |
그리스도의 날이 다가옵니다 The Day of Christ Is Coming
로마서 13:11~14
여러분 어제 리뉴 집회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고 제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은혜 받은 처음 자리를 기억하실 겁니다. 제가 개척을 하고 담임 목회를 시작했을 당시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공감과 이해의 영역에서 조금 먼 듯한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청년 컨퍼런스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화려한 무대와 수백명의 청년들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빛이 구석에 있는 작은 자들의 자리를 비춰 주는 것 같은 따스함을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에 날서있던 감정들을 하나님께서 정리해 주시는 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 힘으로 하면 못하는 일이지만 하나님과 함께하기시에 주시는 힘입니다. 주방에서 묵묵히 음식을 만드신 그 섬김들, 밤잠을 설치며 가장 어려운 자리에서 미디어 사역과 전체 집회를 컨트롤 했던 스텝들. 기도의 자리에서 매주 간절함으로 함께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들,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을 섬겨준 찬양팀. 다음날의 집회를 준비하며 교회의 구석 구석을 치우고 정리한 우리 집사님들. 다 표현할수 없는 섬김이 리뉴 안에 가득했지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면 손해보는 일을 누가 자처해서 할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남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아낌없이 순종함으로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서 회복이 됩니다.
달력을 보며 벌써 한해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제가 8월의 여름에 보스턴에 왔는데 어느새 겨울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현재의 믿음이 더 깊어졌는지를 돌아보게 되는데요. 우리는 예배 드리러 나왔다고 해서 주님 안에 있다고 전제해서는 안됩니다. 헌신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건인데,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세속의 물결과 자기중심적 욕망에 휩쓸려 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시간들이 무한하지 않기에 선택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재림으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오는 때는 있지만 가는 때와 시기는 순서가 없습니다. 도적같이 온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부할 능력을 주시며 죽기를 각오하셨지요. 십자가에서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시며 사랑의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날이 다가옵니다. 주께서 오신다고 하신 시간표가 이미 2천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만큼 주께서 오실날이 가까워진 것이지요. 어둠이 깊어 질수록 낮이 가까워지는 것을 매주 마주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면,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주님은 약속대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오심’과 ’하늘로 올라가심’의 시간표는 이미 성취되었고, 우리는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으로 살아가고 있느냐’이지요. 그래서 자기욕망에 흠뻑 취해 사는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Κρόνος)에 따라 가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선물로 주어진 ‘선사된 시간’(Καιρός) 속에서 불확실한 세상을 한걸음 한걸음 믿음의 균형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의 명예를 지켜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대강절은 대강 대강 보내는 절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라는 뜻에서 보라색 스톨을 하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까지는 녹색 스톨을 하고 있었지요. 초록색은 생명을 더하고 성장과 소망을 표시하는 색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구요. 색깔이 달라지니까 굉장히 스타일리쉬한 줄 알았다구요. 그런건 아니구요. 절기별로 바꾸게 되는데 이번주부터 4주 동안은 보라색을 보시게 됩니다. 이 색은 오시는 왕의 위엄과 존엄을 의미합니다. 제가 다른 색으로 바뀔때 또 그 의미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대강절기를 보내며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잠에서 깨지 않으면, 깨지 못할 때가 옵니다.
11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벌써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주어진 삶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저는 2010년 그 해를 잊지 못합니다. 외국에 나와 사랑하는 아버님을 갑작스럽게 떠나 보내 드리고 찬바람이 불던 그해 겨울 외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운 사명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무렵 성경대로 살아보자 외치시던 한국교회의 존경하던 목회자들이 한분 한분 별세하시는 소식을 들으며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를 제게 더 분명하게 주셨습니다. 주님의 시간표로 보니 이 땅에서는 슬픔이지만 하늘에서는 기쁜 날이었고, 주님의 품에 안기시는 믿음의 선배들을 잘했다 칭찬하시는 주의 음성이 제 안에 가득 찼습니다. 수고로운 삶을 살며 애썼다고 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그 시선을 분명히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때보다 더 가까워졌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는 죄와 어둠의 행실들을 볼때에 주님의 때가 더 가까이 있음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표를 알지 못하면,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가 준비없이 깊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신부는 한 명도 없을겁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너무도 태연하게 살아갑니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의 과실을 맺기 위해 사명으로 타오르는 신실한 예배자들을 찾으십니다. 사명감은 영적으로 어두워져 가는 시대속에서 빛이 투영되게 하는 것이죠.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은총의 빛이 비춥니다. 그 은총의 빛은 우리의 눈에 주님의 눈물이 차오르게 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삶의 옥합을 깨트리고 여인처럼 주님 발앞에 머무르십시요. 신실한 예배지들은 그날을 꿈꾸며 완전한 평화가 임하게 되는 그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무감각해져 있다면 이제 깨어나십시요. 깊은 밤이 오기 전에 깨어 나십시요
시편 108편에서 다윗은 전쟁을 앞두고 승리를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전쟁을 앞두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울까요? 마음이 오그라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불안한 상황과 시간속에서 하나님만 섬기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선을 주께 두는 것이지요. 다윗은 그의 시선을 보좌에 계신 어린양께 두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12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우리는 매일 살아가며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갑옷은 언제 입지요. 전쟁을 할 때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적군의 공격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갑옷을 입습니다.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 성도들은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지요(엡 5:9) 예배자들은 이 갑옷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빛은 죽음이 가져오는 상처와 어그러진 관계, 어둠의 행실들을 폭로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는 일은 사실 무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거스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손해를 보게 되는 일도 경험하고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빛의 갑옷은 세상을 향해 저항하게 합니다.
“한 처녀가 등대지기에게 시집왔습니다. 총각의 이름은 제이콥 워커(Jacob Walker)였습니다. 이 두 젊은이는 등대하나만 있는 외딴 섬 로빈스 리프(Robins Reef)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신부는 이런 데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1개월간이나 짐을 풀지 않았으나 혼자 떠날 수도 없어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 남편 제이콥은 폐렴이 되어 스태튼 아이랜드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하기 전에 제이콥이 남긴 마지막 말은 등대에 마음을 써달라.(Mind the light)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시체를 등대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 묻고 20대인 워커 부인은 등대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번 섬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북바쳐 오르는 고생과 고독의 연속이었지만 만 70세까지 41년간을 이 여성은 혼자서 등대를 지켰던 것입니다. 마음이 변하려는 때마다 언덕 위에서 등대에 마음을 쓰라는 남편의 음성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이 시대가 어떻습니까? 미디어 안에 음란과 죄악의 열매들이 얼마나 가득합니다.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에 중독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음란으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수많은 아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인터넷의 발전으로 음란물은 더 은밀하게 찾아오고 너무도 가까이 와 있습니다. 과거에는 접하기 위해 여러 단계를 넘어서야 했다면 이제는 생각지도 못하는 순간에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인터넷 기사만 보아도 도처에 음란물 광고가 뜹니다. 스스로 구하지 않아도 찾아오는데, 찾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광활한 어둠의 세계가 열려지겠습니까? 그래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질 때 즉시 회개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살전 5:22) 회개를 통해 순결한 옷을 세탁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옷은 더러워 지고 그리스도의 음성은 희미해 질것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세상속에서 견뎌 낼 수 있습니다. 원수의 위협에도 신실함으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고백하면서 세상의 어둠을 택하지 마십시요.
거룩한 신부가 되기 위해 빛의 갑옷을 입고 기다립시다. 오늘은 예배를 드린 후에 주님의 마음으로 인사와 교제를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이 다가올 때에 케임브리지 공동체가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때를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도 인정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각자 다르게 지어 주셨습니다. 당신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칭찬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육신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죄의 본성이 바라는 정욕을 만족시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사단이 40일간 예수님을 유혹한 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인 욕망들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 지배하고 싶은 욕망, 매직 같은 인생을 꿈꾸는 욕망들입니다. 이러한 욕망을 버리는 것은 광야의 훈련입니다. 우리의 옛 생활, 어둠의 습관, 나의 고집과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절개 수술하는 것처럼 도려 낼 때에 아픔과 통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잘렸던 부위에 새살이 돋아나게 하시고 이전보다 더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두려워 말고 이전에 해 오던 습관의 옷을 버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기로 결정하실 때 죽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주시고 죽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깨어진 세상을 선택하고 죄를 선택하고 돈을 선택하고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만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스스로 죽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주님이 날마다 입혀 주시는 옷으로 마음의 옷장을 채우십시요. 부패하고 썩어질 것들을 옷장에서 꺼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고독한 기도는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끌어 안으시기 위해 자신을 아들을 죽게 내버려 주시면서 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세상속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영광에서 멀어진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질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3절 말씀은 성어거스틴을 변화시킨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의 뒤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날마다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수년동안의 눈물의 기도에도 어거스틴은 여전히 방탕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답답했던 어머니는 교회의 감독을 찾아갑니다. 어거스틴을 만나서 타이르고 혼내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을 한 것이지요. 감독은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스스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끈질기게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감독은 말합니다.“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이렇게 눈물을 뿌리는 기도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이 방황하며 죄의 열매를 맺고 지내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입었던 빛의 갑옷은 어두움에 거하던 아들을 돌아오게 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유언입니다 “내 몸은 어디에 묻어도 좋다. 그 일로 인하여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단 한 가지만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
“하나님에게는 먼 곳이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세상 끝 날에 나를 부활시킬 장소가 어디인 줄 모를까 두려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저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겨줄것이 이것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자녀들에게 우리의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제단앞에서 우리를 기억할수있는 그런 삶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11/20/2022 | 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를 아는 사람들 Those Who Know Being Grateful
누가복음 17:11-19
우리는 ‘감사의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보스턴에서 남쪽으로 약 40분 내려가면 ‘플리머스(Plimoth)’라는 도시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이 ‘추수감사절’이 시작된 ‘감사의 도시’입니다.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Puritans)’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타고 왔던 배 ‘Mayflower’는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한 후 그들을 낯선 땅에 남겨 둔 채 떠났습니다.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Wampanoag(왐파노액)’이라는 착한 인디언 부족을 만나 이들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플리머스’에 가면 이들이 도착했을 때 ‘1620’이라고 새겨 놓은 ‘플리머스 락(Plimoth Rock)’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그림들의 은인 ‘왐파노액’ 추장 ‘마사소이트(Massasoit)’가 이들이 건너온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동상 밑에는 ‘Massasoit, Great Sachem of the Wampanoags Protector and Preserver of the Pilgrims(위대한 왐파노액 추장 마사소이트, 필그림들의 보호자이며 보존자)’라고 새긴 동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착한 인디언들을 만난 덕분에 필그림들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옥수수 재배법을 배우고, 낯선 기후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어 그들을 맞이해 준 왐파노액 인디언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들에 나간 사람들은 야생 칠면조를 잡아오고, 크랜베리 열매를 따와 소스를 만들고, 바다에 나간 사람들은 대구(cods)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옥수수 빵을 구워 식탁을 차렸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영국 국교로부터 탄압을 받던 ‘청교도들(Puritans)’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낯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이들의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고, 이들을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디언들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청교도들의 삶의 모토는 예배(worship)와 규율(discipline), 그리고, 근면(diligence)과 청빈(frugality)입니다. 청교도들의 예배는 보통 5시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찬송이나 다른 것으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5시간 동안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은 은혜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2시간 정도 되었고, 설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3시간 정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5시간 후에도 그들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사회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토의했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던 것입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읽은 누가복음 17장 본문 말씀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열 사람은 당시의 관습대로 집에서 쫓겨나고, 공동체로부터 쫓겨나서 사마리아 땅과 갈릴리 경계를 맴돌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이곳을 방문하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면서 결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고 병이 나았다는 증서를 받아야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마을로 돌아가는 도중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기쁨이라는 말로 이들의 심정을 모두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한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누가는 이스라엘 사람 아홉 명과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을 선명하게 대조하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This man was a Samaritan).” (16절)
이 16절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면 나머지 아홉 명은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늘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면서 그들이 사는 땅을 밟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랑하던 아홉 명 중에는 병을 낫게 해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감사가 쉬운 것 같지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전(反轉)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당연히 감사를 모를 것 같은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동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 감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무슨 의미가 있길래 성경에서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감사는 인간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합니다. 우리는 감사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자기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잊고 살고 있을 때, 이사야는 이렇게 그 시대를 한탄했습니다. “나귀나 소 같은 짐승도 제 주인을 알아보고, 자기를 보살피는 주인에게 고마워하는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는구나!” (이사야 1:3)
자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올바로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But giving thanks is a sacrifice that truly honors me. If you keep to my path, I will reveal to you the salvation of God." (시편 50:23) 무슨 말씀인가요? 감사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배입니다. 어떤 화려한 예배보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의 말 한마디가 최고로 가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나가는 ‘path(길)’이고,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감사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n ordinary life, we hardly realize that we receive a great deal more than we give, and that it is only with gratitude that life becomes rich(보통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베푸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는다는 사실과, 감사할 때만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Your faith has saved you).” (19절) 감사를 모르고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왜 나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모르니까 다음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할 지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랐기 때문에 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어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를 두고 “감사는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 배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감사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빌립보서 4:6)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말은 ‘감사함으로’라는 말입니다. NIV 성경은 이 말을 ‘with thanksgiv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말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When you pray) thank God for all he has done(너를 위해서 해 주신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렇게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이 있는 강력한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 삶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과 돌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있고 믿음생활이 풍성해집니다.
셋째로, 감사는 고통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Kōnosuke Matsushita, 1894-1989)’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기업가입니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파산하면서 한순간에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어린 마쓰시타도 다니던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어려운 살림을 돕기 위해 고향을 떠나 오사카에 있는 자전거 점포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어린 마쓰시타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스물 세 살이 되던 해에 마쓰시타는 100엔을 투자해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가 훗날 내셔널(National), 파나소닉(Panasonic)으로 알려진, 연 매출 5조 엔을 달성했던 ‘마쓰시타 전기(Matsushita Electronics)’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세계적인 기업가가 된 마쓰시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회장님, 큰 성공을 하게 되었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마쓰시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은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은혜, 둘째는 몸이 허약한 은혜, 셋째는 못 배운 은혜입니다. 저는 그 은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기자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네? 이것들이 하나님이 준 은혜라고요? 그건 모두 불행한 일이 아닌가요?" 마쓰시타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가난 덕분에 일찍부터 성실과 근면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몸이 허약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몸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마쓰시타는 직원들에게 사람들이 ‘마쓰시타 전기’는 무엇을 만드는 회사입니까?”라고 물으면 “마쓰시타 전기는 인간을 만드는 회사이지만, 전기제품도 만듭니다” 이렇게 말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시로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가 있다면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를 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라며 직원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것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가난과 허약함과 못 배운 것은 불행과 절망과 실패의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도 감사를 아는 사람들은 가난을 성실함으로, 허약함을 건강함으로, 매순간마다 못 배운 것을 배움의 시간으로 바꿉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을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 들어오는 축복의 통로로 삼습니다.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말씀(율례)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말씀은,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words. Your words are more valuable to me than millions in gold and silver).” (시편 119:71-72)
끝으로,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라는 시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에게는 외로움도 눈물도 아픔도, 절망도, 가시도, 슬픔도, 연약함도, 가난도,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8).
<날 구원하신 주 감사>
(1절)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론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절)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절) 길가의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사랑의 가정 일용할 양식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4절) 내게 건강 주심 감사 또한 연약함 감사
햇빛을 주심도 감사 구름 또한 감사해
땀 흘리는 수고 감사 저녁의 안식 감사
부요도 가난도 감사 모든 것 다 감사해
11/13/2022 |
오병이어의 세가지 교훈 Three Lessons from the Five Loaves and Two Fish
마태복음14:13~21
벌써 성령강림절기 스물 세번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만 지나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기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개의 위대한 시간’이 있습니다.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성탄절은 주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죽으심과 다시사심으로 죄된 성품과 옛 기질들을 거부하고 철저한 신뢰와 순종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새로운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에서 주님의 빛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듯 했지만,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에는 그 빛이 가장 강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을 따르며, 세상에 그 빛을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그 빛은 우리 안에 있는 빛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게 될때에 세상을 향해 비춰집니다. 의존한다는 것은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약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린 생명은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나사렛이라는 숨겨진 동네에서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나사렛은 이름 없는 동네였으며,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무명의 시간으로 30년을 사셨습니다. 예수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셨더라면 고생하지 않고 먹고 사는 문제로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은 그를 목수로 살게 하셨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의 빛을 인성 안에 감추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본문의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건입니다. 야외에서 일어난 단체식사 사건이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대략 여자와 아이들까지 2만명으로 추정하는데, 수련회를 인도해본 경험으로 보면 이 인원이면 배급을 위해 적어도 훈련된 100명은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름도 모르는 한아이의 5개의 떡과 2개의 물고기로 모인 모든 사람을 풍성하게 먹이십니다. 언뜻 상상해 보아도 이 사건은 물위를 걷는 기적 같은 사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요한복음을 비롯해서 마태 마가 누가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행적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대에 이 말씀을 해석하기에는 이해할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기록한 기적에 대한 부분을 도려내고 성경을 보게 되면 현실에 눈에 가려져 그리스도의 신비가 감춰집니다.
2022년 한해가 조금씩 저물어 가는 이 시간에 보스턴 케임브리지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1. 오병이어의 표적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라고 시작합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의 순교 소식을 듣고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언하며 그 길을 예비했던 사람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예수께 세례도 주었습니다. 그런 요한을 예수께서는 많이 아끼셨습니다. 그런 그가 순교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예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모든 사람은 깨어진 세상에서 저마다 힘겨운 씨름을 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경쟁 사회속에서 패배감에 짓눌려 주눅들기도 하고, 인생의 어둡고 슬픈 터널을 지나가기도 합니다. 홀로 빈들에 나가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하기도 하고 풍요속에서 빈곤의 마음을 마주해야 할때도 있지요.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주님 앞에 갖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는 내 삶의 문제보다 더 크신 주님의 선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퓨리서치(Pew Research Center)가 경제 선진국 14개 국민들을 대상으로 코로나19가 종교와 가족 관계 등에 미친 영향을 조사했습니다.그 결과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국가가 종교적 신앙이 ‘강해졌다'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코로나19가 인류에게 삶과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날이 저물고 어둠이 깊어지는 시간에 일어납니다. 빈들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이고 허무함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주님이 계셨고 머무르셨습니다. 텅 비어 있는 곳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채워질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절대 한계상황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어둠의 시간이 주안에서는 밝아집니다. 하나님의 영이 가득해 지면 흑암이 가득하던 그곳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이 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일어난 신비는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확증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예수가 유월절 생명의 떡이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말씀합니다.
마가는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기 전에 모든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했다고 기록합니다.(막6:39) 이스라엘의 기후를 보면 우기와 건기로 나눠지는데, 건기는 4월 부터 10월까지였습니다. 이때는 잔디가 다 마르기 때문에 푸른 잔디 위에 무리를 앉히셨다는 것은 4월초인 유대인의 유월절 명절 직전에 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게 새로운 삶의 문이 열려지는 예표인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무리들의 삶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배고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인간의 삶의 허전함이 다 채워질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목자 없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죽음에 처하게 되는 매우 절망적이고 희망이 끊어진 상황을 뜻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불쌍히 여기다.’ 애끓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예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기적은 항상 영혼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로 오셨음을 오병이어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지요. 참된 신앙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예수가 복된 소식임을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뜨거운 사랑에 눈을 뜨고, 우리가 서로 나누어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긍휼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2. 오병이어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15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이 곳은 외딴 곳이고, 시간도 너무 늦었습니다. 사람들을 이제 보내어,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각자 사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필립얀시는 크리스챤 투데이(Christian today)에 기고한 논설에서 우리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 돈을 어떻게 쓰는가? 돈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는가?
오늘날 이 시대는 돈 때문에 언제든지 주님을 버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초조해지지만 주님이 계시지 않는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은 더 벌고, 더 누리기 위한 삶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삶의 자리를 쌓아두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의 소유는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자신에게 주신 소명 만큼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창조의 순간에 돈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돈으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복의 개념을 성공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결정해 버렸고, 믿음의 개념도 물질의 척도로 생각하게 되는 유혹이 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소리 없이 대신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는데 인간은 세상을 돈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의 신앙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기적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수님 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표적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표적이 보여주는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크신 주님의 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내것을 나누고 베풀때 우리의 삶에도 2만명여 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는 오병이어의 풍성한 신비가 경험될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때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무엇을 얻을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고독한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마을로 가서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갈 필요가 없다. 내게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음식이 있는 세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처가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좀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되고, 처한 상황들이 어려울 때에도 현재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있어서 하나님의 품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을 마음에 넣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 주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빈들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취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채워줄 안식처가 세상에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안감을 잊기 위해서 더 화려한 세상속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안할수록 주님께 좀더 머무르십시요.
16 “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하여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찾아오고 마음의 변화가 찾아올때에 더 많은 것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은 그들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피를 공유한 온전한 나눔이었습니다. 빈들에 모인 모든 무리는 주안에서 한 가족이 된것입니다. 케임브리지 공동체 안에도 오병이어를 통한 예수님의 마음이 삶에 담아지는 풍성한 나눔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케 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세상은 불과 30초도 안되는 광고를 통해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입합니다. 소비자들의 결핍을 찾아내 이를 채우기 위한 수많은 광고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쏟아집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지 않으면 평생을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흔들리며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더 깊어지는 결핍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절망적일때 일수록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나면 평소보다 더 절박하게 기도하게 되고 마음을 쏟으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보면 비슷한 고뇌의 상황들 속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어린 아이 음성으로 ‘집어 들어 읽으라. 집어 들어 읽으라’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르며 하나님의 명령이라 생각하고 책을 펴 들고 읽었던 것이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2만여명이 모인 그곳은 날이 저물어가는 밤에 모두가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는 한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캄캄하고 암흑같던 그곳에 하나님의 전등이 켜지고, 온갖 음란과 더러운 것과 속된 것과 가증한 것들이 판치던 일들도 주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릴때 떡과 물고기는 이제 어두운 밤이 밝히는 주님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 모든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주님의 기적을 본 것입니다.
빈들에 모여 있던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며 선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던 하늘의 만나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루에 먹을양 만큼만 공급 받았습니다. 쌓아 놓은 양식이 나를 살리고 풍성하게 해줄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썩을 양식일 뿐입니다.
19 사람들을 풀밭에 앉게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다음에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떼어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20 모든 사람들이 먹고 배가 불렀습니다. 먹고 남은 조각들을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21 먹은 사람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3. 오병이어의 표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때가 찬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함께 있었고, 그 속에 하나님의 비밀과 놀라운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벳새다의 날이 기울어져도 그곳은 결코 캄캄한 빈 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공간, 시간 속에 구원의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백성들의 공동체는 예배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이야기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셨고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독사’라는 단어는 내가 생각한다는 뜻의 ‘도케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영어의 도그마(dogma)인데, 성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영광은 성육신 사건입니다. 예수는 고난 받으심으로 그분의 영광을 성취하십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성육신 하신 예수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영광이 드러납니다. (요 1:14) 성육신 하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시는게 사역 전체의 목적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6)
우리는 말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31)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 가운데 물고기와 보리떡이 끝없이 계속 생겨나는 풍요로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을 때 손에 들린 물고기와 보리떡은 끝없이 계속 생겨났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쌓아 둠’에서가 아니라 ‘나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눔을 통해 내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으나 하나님 나라로 보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입니다. 작은 헌신이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사용될 지 우리의 시선으로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때에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이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식어진 마음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하고 매일 반복되는 삶속에서 은혜와 실망의 경계선에서 고민하기도 합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빈들 같아서 멈추어야 할지 더 가야 할지 모를때도 있겠지요. 평범함의 자리를 두려워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 삶에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 밖에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온전히 순종하며 드려 보십시오. 그 작은 순종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더 큰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놀라기만 하는 신앙 생활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표정으로 반응하고 끄덕이면 안됩니다. 내가 그 기적의 현장을 이해하고 살아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줄지라도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 있던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만난 은혜의 현장이 우리의 삶에 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 멀리에서 누군가 받은 은혜를 구경만 하고 있던 잠자던 나의 마음을 깨우십시오. 하나님 내 손에 있는 것이 비록 작을지라도 혹은 너무 커서 주님께 전부를 드리기 어렵지만 이 모든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 쓰임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병이어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갈망하며 자들에게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저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시겠습니까?
11/6/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6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본 An Example Jesus Has Set For Us
요한복음 13:4-5, 12-17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란 말이 있습니다. 환자에게 급격한 충격을 줌으로써 치료 효과를 얻는 방법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는 말씀을 읽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충격요법’을 쓰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이 그냥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공관복음(共觀福音, the Synoptic Gospel)’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실 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이 말씀이 나옵니다.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예수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것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한 종(servant)의 모습이었습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닦아주실 때까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발을 씻기도록 내 맡겼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주님, (어찌)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려고 하십니까?.....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6, 8절)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7, 8절) 이 말씀을 NIV 성경에서는 “Unless I wash you, you have no part with me”라고 번역했습니다. NLT 성경에는 “Unless I wash you, you won't belong to me”라고 번역했습니다. 둘 다 훌륭한 번역입니다.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f I don't wash you, you don't really belong to me(내가 너의 말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정말 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Good News Translation은 이 말씀을 “If I do not wash your feet, you will no longer be my disciple(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저는 더 이상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이 일이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an example of service)’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의 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주신 본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섬김’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그만큼 중요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10:45 말씀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기 위하여 왔다(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섬김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김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성 대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이 본성을 이기고 ‘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의 삶에는 5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섬김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의 삶은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섬기는 사람과 식탁에 앉은 사람 중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이냐? 당연히 식탁에 앉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사람으로 있다).” (누가복음 22:27) 식당의 종업원이 손님들에게 응대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바로 이 모습이 우리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은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Robert K. Greenleaf, 1904-1990)가 처음으로 주장한 리더십 스타일입니다. 그가 1977년에 ‘Servant Leadership’(종의 리더십)’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 ‘A Journey Into the Nature of Legitimate Power and Greatness(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의 본질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servant-leader is servant first, it begins with a natural feeling that one wants to serve, to serve first, as opposed to, wanting power, influence, fame, or wealth(섬기는 리더십은 섬기는 사람(servant)이 먼저인 리더십이다. 섬기는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자연스러운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힘과 영향력, 명성과 부를 원하는 리더십과는 정 반대이다).” 그린리프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게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견하고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 속에 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의 길이 들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리더십을 닮고 싶은 사람은 먼저 섬기는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꾸준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섬김에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말로만, 입으로만 말하는 섬김이 아니라 자신의 귀한 생명을 내 놓을 만큼 진정성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기 위하여 왔다(마가복음 10:45)”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주신 것은 섬김의 삶의 연장선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섬김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섬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4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선생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발을 씻겨줘야 해!” “나는 너희의 주님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발을 닦아줘야 해!” 예수님은 당연히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했면 어떻게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He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used to his own advantage,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그는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지 않고 종의 본성을 가지셨고 인간과 같이 되어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 (NIV, 빌립보서 2:6-7) 이 구절을 신학자들은 ‘The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겸손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43-44)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진정으로 높아지는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맞다는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오히려 반대로 그렇게 출세하려고 애쓰더니 마침내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리더십은 ‘self-seeking(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이기적인)’, ‘self-serving(자신을 섬기는)’, and ‘domineering(지배하는)’ 스타일의 리더십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깐 동안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참 인간의 길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길과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힘으로,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길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 길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Elisabeth Johanna Shepping(1880-1934, 독일계 미국인)을 아시지요? 우리 말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입니다. 미혼모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9살이 되어서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옵니다. 어머니로부터 냉대를 받은 쉐핑은 가까스로 간호학교에 들어가 간호사가 됩니다. 그리고 간호사로 일하는 틈틈이 뉴욕에 있는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1912년 32살의 나이에 간호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됩니다. 외국인이면서도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치마,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검정 고무신을 신으며, 쉐핑은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조선에서 쉐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조금 알려진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쉐핑에 대하여 이런 글을 썼습니다. “쉐핑은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사람들을 유익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쉐핑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한국에게 주었습니다. 그녀의 침대 머리 맡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 1930년경에 미국 장로교회는 전 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쉐핑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쉐핑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성공(SUCCESS)’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섬김(SETVICE)’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쉐핑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참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섯째로, 섬김의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17절) 이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축복입니다. 섬김의 삶은 누가 알아주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충격 요법’은 효과가 있었을까요? 여러분, 베드로가 쓴 편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기쁨으로 그들을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며, 돈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며, 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십시오(but being examples to the flock).” (베드로전서 5:2-3) 예수님 말씀 그대로 아닙니까?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절대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지도자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때마다 베드로를 바로잡아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충격요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의 ‘본(an example)’을 보여 주시면서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는데, 주님의 종인 우리가 당연히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섬김의 삶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면 여러분은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니까!”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지?” “왜 나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