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022 | 시편 119편(VI)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Lord’s Word Stands Firm Forever

시편 119:81-96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열 한 번째 자음 [카프]와 열 두 번째 자음 [라메드], 모두 16절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저자는 하나님께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는 언제쯤 나를 위로하실 것입니까?” (82절) “주의 종이 얼마나 더 기다려야만 합니까?” (84절)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언제 벌하실 것입니까?” (84절) 여러분, 지금 저자가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는지 머리에 그려집니까? 저자는 자기 처지가 ‘연기 속에 있는 포도주 가죽부대’ 같다고 합니다(83절). 팔레스타인은 주로 모래 땅이어서 진흙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대신 짐승의 가죽을 말려 주머니를 만들어 물이나 우유, 포도주를 담았습니다. 이동 중에 가죽부대가 휴대하기 편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가죽 부대는 주로 부엌 천장에 매달아 놓습니다. 그런데, 연기 때문에 가죽 부대가 말라 쭈글쭈글하게 되고 갈라져서 오래 쓸 수 없게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저자는 기약 없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다 지친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저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불법(不法)으로 함정을 파 놓고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85절).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형의 사람이 있고, 개미형의 사람이 있고, 꿀벌형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형의 사람은 거미 줄을 정교하게 쳐 놓고 먹이감이 걸리기만 기다립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개미형의 사람은 열심이 일해서 모으기는 하지만, 자기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꿀벌형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모으지만 다른 사람과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행하게도 시편 119편의 저자 주변에 거미 같이 불법으로 함정을 파 놓고 그 함정에 빠지기만 기다리는 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 주변에 이유 없이 그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86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otect me from those who hunt me down without cause.” 마치 사냥개를 동원해서 짐승을 몰고 있는 광경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못살게 하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그가 뭘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렇게 못 살게 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고소(告訴)를 해야 하겠지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도 고소 제도가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고소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소 제도는 최소한 억울한 사람을 줄여보자는 제도이지, 이 제도가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좀 어이없는 말같이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없이 참는다면, 하나님은 그런 그를 기뻐하실 것입니다.......여러분이 선한 일을 하고 고난을 받을 때 인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19-20)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는다는 말은 잘못을 가리는 최종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내가 직접 나서서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제시하는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우리 주님도 고난을 받으셨지만, 고난을 받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하고, 이유 없이 주님의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으시고 그냥 참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참는 사람은 주님의 고난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을 읽으면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이 저자가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주는 언제쯤 나를 위로하실 것입니까?” (82절) “주의 종이 얼마나 더 기다려야만 합니까?” (84절)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언제 벌하실 것입니까?” (84절) 이런 절망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가 지금 ‘연기 속에 있는 포도주 가죽 부대 같이(83절)’ 터지고 갈라진 상태에 있지만, 여전히 주님의 법령들(말씀들)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83절). 자기는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의 계명들을 신뢰한다고 합니다(86절). 그들은 나를 끝장을 냈지만 나는 주님의 교훈들(말씀들)을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8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y almost finished me off, but I refused to abandon your commandments.” 그의 적들이 그를 거의 끝장을 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시편 119편의 저자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다시 한번 그려보세요. 충분히 성경을 버릴 이유가 되고, 충분히 교회를 떠날 이유가 되고, 충분히 하나님을 떠날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저자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한 번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One of the greatest needs in the church today is to come back to the Scripture as the basis of authority, and to study them prayerfully in dependance on the Holy Spirit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권위의 근거가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의지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말은 오늘날 교회가 점점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가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권위의 근거가 되는 성경을 소홀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시편 119편의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사람이 바로 성경을 자신의 삶의 최고의 권위로 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성경에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성경이 크리스천의 삶에서 크게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과 삶을 분리해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소홀하게 여기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서 영향력(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의 말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주의 말씀은 하늘에서 굳건히 서 있습니다.” (89절) 주의 말씀이 영원한 이유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근거한 것입니다. 저자는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주의 법도는 이 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들이 주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91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Your regulations remain true to this day, for everything serves your plans”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쉬운 성경에서 ‘your regulations’를 ‘주의 법도’로 번역했습니다. ‘regulations’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규칙’ 혹은 ‘규정(規定)’이라는 뜻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규칙’과 ‘규정’에 따라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지요?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큰 그림에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과 규정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존 행콕 타워(John Hancock Tower) 62층 맨 꼭대기에 올라가 보셨습니까? 거기서 보스턴 시내를 내려다보면 어떻게 보일까요? 보스턴이 전혀 달라 보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보스턴이 아닙니다. 구획(區劃)이 아름답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꼭대기에서 내려와서 보스턴 시내를 보면 길이 꾸불꾸불합니다. 반듯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이 세상은 지금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과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들의 권력도 들에 핀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다.” 이 말씀은 원래 구약성경 이사야 40:6-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살짝 자기 말을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말씀입니다(And that word is the Good News that was preached to you).”(베드로전서 1:24-25)

이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가 보낸 위로의 편지입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연대는 대략 로마에 대 화재가 일어났던 서기 64년경이라고 합니다. 그 때 크리스천들은 화재를 일으킨 범인들로 지목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베드로는 인간의 권력을 풀과 꽃에 비유하면서, 로마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겨우 한 철 피었다가 지는 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고난 중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I cannot too greatly emphasize the importance and value of the Bible study—more important than ever before in these days of uncertainties, when men and women are apt to decide questions from the standpoint of expediency rather than the eternal principles laid down by God, Himself(성경공부의 중요성과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영원한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쉽게 편의성이라는 관점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John Wanamaker(1838-1922)가 한 말입니다. 그는 ‘백화점의 왕’으로 불리고 있고 ‘pioneer in marketing(마케팅의 선구자)’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워너메이커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편의성’이라는 관점에 따라 살면 우리의 삶이 풀의 꽃과 같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영원한 원칙에 따라 살면 우리의 삶도 영원하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정해 주신 원칙에 따라 살면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하게 보이는 어떠한 것들도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명령들은 우주보다 넓습니다.” (96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ven perfection has its limits, but your commands have no limit(아무리 완전한 것이라도 한계가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말씀)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have seen that all [human] perfection has its limits [no matter how grand and perfect and noble]; Your commandment is exceedingly broad and extends without limits [into eternity].” “아무리 크고, 아무리 완벽하고,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도 인간이 이루어 놓은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계명)은 무한이 넓고 한계가 없어 영원에 이르기까지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동시에 이 얼마나 위험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그 당시 율법주의에 얽매여 살던 사람들에게 너희가 내가 하는 말을 받아들인다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주는 교훈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말이 진리라는 말씀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곧 우주보다 더 넓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30/2022 | 시편 119편(V)

왜 크리스천의 삶에 고난이 있는가? Why Is There Suffering In Christian Life?

시편 119:65-80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아홉 번째 자음 테트와 열 번째 자음 요드, 모두 16절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티 없이 맑아서 영원토록 견고히 서 있으며, 주님의 법규는 참되어서 한결같이 바르다. 주님의 교훈은 금보다, 순금보다 더 탐스럽고,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They are more desirable than gold, even the finest gold. They are sweeter than honey, even honey dripping from the comb).” (시편 19:9-10, 새번역) 시편 19편은 다윗이 쓴 시편인데요.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금에 비유하고, 벌집에서 뚝뚝 떨어지는 ‘송이꿀’에 비유했습니다. ‘단맛’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알파벳을 한자 한자 배울 때마다 그 글자를 과자로 만들어 꿀에 찍어서 아이들에게 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천 개의 은과 금보다 더 귀중하다고 합니다(Your instructions are more valuable to me than millions in gold and silver).” (72절)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노래 가사를 들어 보셨습니까?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pierced hand. Than to be the king of a vast domain And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예, 조지 베벌리 쉐아(George Beverly Shea, 1909-2013년, Canadian-born American)가 작곡하고 노래 부른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 가사입니다. 캐나다의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조지는 15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습니다. 뉴욕에 있는 호튼대학(Houghton College) 들어갔지만 때마침 시작된 경제공황으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보험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고객 중에 방송국 관계자를 알게 되어 NBC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가 굵직한 베이스로 ‘가라 모세(Go down, Moses)’를 불렀는데, 청취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경쟁을 뚫고 정기 출연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명예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는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아버지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매주 찬양을 하곤 했습니다. 호튼대학도 음악을 공부하기 싶어서 들어갔던 것입니다.

방송국에 정기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때, 조지는 너무 너무 기뻤지만, 한편 자기 마음 한 곳에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도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찬양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때까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어머니에게서 며칠 전에 받은 찬송시를 보면서 조지는 피아노 앞에 앉아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머니가 그 노래를 듣더니, “얘, 오늘 그 찬송을 부르면 좋겠다. 엄마가 듣기엔 참 좋구나!” 이렇게 해서 즉흥적으로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송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준 이 찬송시는 저자가 R. P. Miller 여사로 되어 있습니다. 조지 어머니의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조지 어머니에게 준 찬양시인데, 아들이 방송국 정기 출연 놓고 고민하는 것을 보고 그 찬양시를 아들에게 준 것입니다.

결국 조지는 방송국 정기 출연의 기회를 거절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주신 재능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만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명예와 부를 거절한 조지에게 명예가 찾아옵니다. 조지는 모두 10번 Grammy Awards 후보에 올라갔는데, 두 차례 Grammy 상을 수상합니다. 1966년에 ‘The 1965 Best Gospel’로, 또 2011년에는 ‘2010 Lifetime Achievement’로 Grammy 상을 수상합니다. 그 후 조지는 1947년에 빌리 그레이엄 전도단에 합류합니다. 1973년에 한국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집회가 열렸을 때, 조지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송을 불러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쳤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이 그의 자서전 ‘Just As I Am(내 모습 이대로, 1998)’에서 평생 동역자이자 친구로 지낸 조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I have sometimes said that I would feel lost getting up to preach if Bev were not there to prepare the way through an appropriate song(나는 때때로 Bev가 적합한 찬양을 불러 내가 어떤 설교를 할 지 길을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설교 단에 올라가 막막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1983년, 74세가 된 조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굵은 베이스 음성으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불렀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때 그가 이렇게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 뜨거운 박수갈채도 예수님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조지 베벌리 쉐아는 정말 예수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 하는 것을 자기 삶으로 보여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똑 같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소중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7-8)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의 부르심이 소중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어떻습니까?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 후에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21) 이 부자 청년은 자기에게 예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하지만, 재산을 모두 포기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이 소중하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whatever things are gain to me)’을 포기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광신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핵심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위해 포기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번 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그가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출신 배경이 있습니다. 또 그가 공부했던 학문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는 그 당시 가장 존경받는 ‘가말리엘(Gamaliel)’이라는 율법학자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 아람어는 물론이고 그리스어, 로마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했습니다. 또 그가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들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이 이런 것들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그가 버린 것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출신 배경이나 학문적인 배경들이 모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버린 것들이 모두 복음을 전파하는데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가말리엘에게 받았던 학문적인 훈련들은 그가 로마서와 그 밖의 서신서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서를 보세요. 그가 얼마나 구원의 진리를 논리 정연하게 전개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전에는 이런 것들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것들이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사용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포기한다는 말의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저자는 고난이 주는 유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는 좋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주의 법령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1절) 이 말씀에 대한 다양한 번역성경들을 한번 보십시오. “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so that I might learn your decrees.” (New International Version) “It is good for me that I have been humbled that I may learn your commandments.” (Aramaic Bible in Plain English)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New Living Translation) ‘afflict’라는 동사는 ‘고통을 주다’라는 뜻인데요. Aramaic Bible에 보면 ‘afflict’라는 말 대신 동사 ‘humble’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고통은 그 사람을 낮추고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어떤 고통과 고난을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고통 중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자기를 겸손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같은 말씀이 6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고난 받기 전에는 내가 잘못된 길로 갔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I used to wander off until you disciplined me; but now I closely follow your word).” 여기서 우리는 고난 속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고난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dis¬ci¬pline’이라는 단어가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뜻과 먼 길을 가고 있는 나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나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훈계하지 않는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들이면 훈계를 받게 마련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아무 훈계가 없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이며 참아들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2:7-8) 우리가 받는 고난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크리스천은 습관적으로 성경을 찾아 읽습니다. 시편 저자가 하는 말을 다시 한번 들어 보세요. “I used to wander off until you disciplined me; but now I closely follow your word.” (New Living Translation)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따르게 합니다. 크리스천은 고난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크리스천은 고난을 자처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고난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깨닫기 위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합니다.

저명한 스위스 출신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Elisabeth Kübler-Ross(1926-200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분은 임종에 대한 연구로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The most beautiful people we have known are those who have known defeat, known suffering, known struggle, known loss, and have found their way out of the depths. These persons have an appreciation, a sensitivity, and an understanding of life that fills them with compassion, gentleness, and a deep loving concern. Beautiful people do not just happen(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 패배를 알고, 고통을 알고, 투쟁을 알고, 상실을 알고, 깊은 곳에서 벗어날 길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동정심, 부드러움, 깊은 사랑의 관심으로 넘치는 삶에 대한 감사와 감수성, 이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삶에 대한 감수성, 이해력,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사랑과 관심, 이런 것이 우리가 겪는 고난(고통)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 아닙니까?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1/23/2022 | 시편 119편(IV)

내 노래의 주제 The Theme Of My Songs

시편 119:49-64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자음 [자인]으로 시작하는 8절, 자음 [헤트]로 시작하는 8절, 모두 16절 말씀입니다. 특이한 것은 한 절 한 절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란 단어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각 절 속에 ‘말씀’ ‘약속’ ‘법’ ‘법도’ ‘법령’ ‘교훈’ ‘법규’ ‘명령’ ‘규례’ 등 다양한 뉘앙스를 가진 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목적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뗄레야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는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냥 나에게 좋은 말씀으로, 나에게 유익한 말씀으로 생각하고 읽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해 준 말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16-17) 이 말씀을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쉬신 것입니다. 의역하면, 모든 성경 말씀 속에 하나님의 ‘숨’이 들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숨’을 나타내는 말은 ‘루아흐(רוּח)’입니다. 그리고, 헬라어에서 ‘숨’을 나타내는 말은 ‘프뉴마(πνευμα)’입니다. 이 두 단어는 ‘숨(breath)’ ‘바람(wind)’ 혹은 ‘영(spirit)’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숨’이 들어 있는 성경 말씀은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손을 빌려 기록되었지만,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숨’과 ‘영’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創造)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리면, 그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오직 그 물이 땅을 적셔, 그것으로 식물이 싹이 터 사람들의 먹을 양식으로 자라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그러하다. 내 말은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내 뜻을 이룬 뒤에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다한 뒤에야 내게로 돌아온다.” (이사야 55:9-11) 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어찌 내 삶이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변화의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또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양쪽에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며,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까지 알아 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13) “For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NLT)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NIV) 우리가 아플 때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약을 먹으면 금방 증세가 좋아지고 병이 낫습니다. 이 때 “It works!”라고 합니다. 약이 효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속에서 working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고, 지혜를 얻고, 그 말씀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시편 말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은 단순히 한편의 시(詩)가 아닙니다. 비록 시의 형태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한절 한절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Remember your promise to me; it is my only hope(저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것이 저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49절) 성경 속에 많은 약속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속에 있는 약속의 말씀들을 모두 세어보았더니 모두 365개였다고 합니다. 좀 인위적인 냄새가 납니다. Bill Bright가 쓴 ‘Promises(약속)’라는 책에서도 365개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CCC를 창립하신 분이지요. 그 책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Is your brand of Christianity truly the revolutionary first-century kind that helped turn the world upside down and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 If not, it can be and that is what this daily devotional guide is all about(당신이 믿는 기독교는 세상을 뒤엎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 그런 기독교입니까? 아니라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매일의 영적 지침서가 바로 그런 목적으로 쓴 것입니다).” 매일 하루에 하나씩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면 1세기에 살았던 제자들의 삶과 같은 변화가 나에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마가복음 9:23)”는 말씀은 악한 영이 들어가 시달리는 아들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왔던 한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내가 고난을 당할 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 속에 빠져 있을 때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면 이 말씀이 실제로 나에게 working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저자는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명을 보존(保存)해 준다고 합니다(50절). 여기서 ‘보존하다’라는 말은 ‘revive’ ‘preserve’ ‘quicken’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내 생명을 유지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도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말씀의 힘입니다. 사람의 말도 때로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와 힘은 잠깐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고 안심을 주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명을 보존해 주는 힘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요한복음 14:27)”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고통 중에 있는 나를 위로하고 나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것은 일시적으로 나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의 힘을 불어넣어 자리에서 붙잡아 일으켜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의 말씀 속에서 나의 희망을 발견하는 일, 그리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 그 고난을 이겨내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서 일상적(日常的)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결코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설교 말씀을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1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Is there any encouragement from belonging to Christ? Any comfort from his love? Any fellowship together in the Spirit? Are your hearts tender and compassionate?” 이 말씀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격려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위로를 경험한 적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경험하고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이 질문을 여러분 자신에게 해 보십시오. 이런 경험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희망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이 고통 중에 있는 나를 위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일으켜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 속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법령들은 내 노래의 주제입니다. 내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내 노래의 주제입니다.” (54절) 하나님의 말씀이 내 노래의 주제(theme)라는 것입니다. 나는 노래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은혜. 축복. 위로, 희망, 감사에 대하여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노래는 기쁘고 신날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는 곳 어디서든지 내 노래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NLT 성경은 “내가 사는 곳 어디서든지”라는 말을 “wherever I have lived”라고 번역했고, NASB이나 NKJV은 “in the house of my pilgrimage”라고 번역했습니다. ‘pilgrimage’라는 말은 ‘순례(巡禮)’ ‘여정(旅程)’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살아온 길’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한번 지금까지 지내온 길들을 돌아보세요.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청년들은 청년들 대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들을 돌아보세요. 우리에게 이런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여기까지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거든요? 슬픔과 아픔과 눈물과 좌절과,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좋았던 때도 있었지만요. 시편 119편을 쓴 저자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늘 나의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한밤중에 내가 일어나 주께 감사드립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62절) ‘한밤중에(at midnight)’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사도행전 16:25에 나오는 ‘한밤중에’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파하려고 빌립보에 갔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두 사람은 ‘한밤중에’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한밤중에’라는 말은 뭔가 불안하고, 걱정이 되고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을 말합니다. 시편 저자는 ‘한밤중에’ 일어나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God’s righteous judgments, NKJV)’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지금 내 삶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한없이 불안합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니까 그 순간에 모든 불안이 감사로 바뀌고 노래로 바뀐 것입니다. 

저자는 나의 인생 길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내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 5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길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발걸음을 주의 법규들을 향해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노래의 주제로 삼았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내 길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I pondered the direction of my life, and I turned to follow your laws.” (NLT) 정말 안타까운 일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방향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기 인생의 방향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정말 없습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의 저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내 노래의 주제로 삼았더니,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의 방향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성경읽기의 유익에 대하여 조지 뮐러(George Müller, 1805-1898, 독일)의 말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For the first four years after my conversion, I made no progress, because I neglected the Bible. But when I regularly read on through the whole with reference to my own heart and soul, I directly made progress. Then my peace and joy continued more and more. Now I have been doing this for 47 years. I have read through the whole Bible about 200 times, and I always find it fresh when I begin again. Thus, my peace and joy have increased more and more(개종한 후 처음 4년 동안 나는 성경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성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성경 전체를 읽었을 때 내 마음과 영혼에 큰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 후 나의 평화와 기쁨은 점점 더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47년 동안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 전체를 약 200번 정도 읽었습니다. 다시 성경 읽기를 시작할 때마다 항상 신선함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나의 평화와 기쁨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1/16/2022 | 새해 메시지3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시편 121:1-8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태어났을 때는 엄마, 아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소나 말 같은 동물들은 어미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비틀비틀하다가 이내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엄마의 젖을 먹어야 하고, 엄마의 품속에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일년이 넘어야 겨우 걸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도 부모의 사랑과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홀로 설 수가 없습니다. 결혼하고, 직장을 잡고 나서야 겨우 홀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지면 또 다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찬송가 67장 3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친구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지으셨고 사람의 마음에 영원의 감각을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하실 일은 다 깨달을 수가 없다(Yet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but even so,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NLT).” (전도서 3:11) 개역 성경에는 ‘영원의 감각’이라는 말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주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행하게도 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I thirst for God,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stand before him)?” (시편 42:1-2)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목마름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내면의 갈급함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목마름은 우리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신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알제리아)은 그의 책 ‘고백록(Confession)’에 이렇게 썼습니다. “Because God has made us for Himself,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Him(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그 분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시편 121편 말씀을 볼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시편들은 그 용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은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순례의 길은 고달픈 길입니다. 여러분, ‘산티아고 순례길(Comino de Santiago)’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을 걸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는 장장 780km에 이르는 긴 순례길입니다. 이 길을 걸으면 죄가 없어진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이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고, 스페인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면서 힐링을 목적으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들의 경우 일년에 적어도 세 번은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합니다. 보통은 제물로 드릴 양을 데리고 순례의 길을 갑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가 약 140km이고,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85km입니다. 보통 걸어서 5-6일 걸리는 길입니다. 순례자들은 시편 노래를 부르면서 예루살렘까지 등에 양을 지고 걸어갔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가니까 순례의 길이 즐겁고 고단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순례의 목적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보십시오.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꼭 맞는 노래 아닙니까? 순례의 목적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My help comes from the Lord, who made heaven and earth, 2절)”라는 가사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도움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최초로 밝혀진 것은 출애굽기 3:14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 이름은 ‘יהו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네 글자는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어서 발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네 글자로 된 하나님의 이름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who I AM)’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영어식 표기로 ‘Jehovah’라고 하는데, 이것은 발음을 하기 위해서 억지로 만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할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 ‘주님(The Lord)’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후에 이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ego eimi(에고 에이미)’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 하면 ‘I AM’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밤중에 바다를 건너가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마침 그 배에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람을 거슬러 노를 저으려고 애를 썼지만, 배는 앞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 누군가 바다 위를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유령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가복음 6:50, 마태복음 14: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They were all terrified when they saw him. But Jesus spoke to them at once. “Don't be afraid,” he said. “Take courage! I am here!①” / ①Or The ‘I AM’ is here; Greek reads I am. 위기에 빠진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곧 ‘스스로 있는 분’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will lift up my eyes to the hills [of Jerusalem]— From where shall my help come?”  

이 시편 기자는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산들(언덕들)을 보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가 보고 있는 예루살렘의 언덕들은 무슨 언덕들이었을까요? 성서 학자들은 그 언덕들이 ‘시온산(Mount Zion, 765m)’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곽 서남쪽에 ‘시온문(Zion gate, 다윗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나가면 시온산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시온산은 다윗 성이 시작되는 곳이고, 다윗 왕의 무덤이 있고,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고, 최후의 만찬 장소로 사용된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성지(聖地)입니다. 시온산에서 보면 예루살렘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온산은 한 지명(地名)이라기보다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눈을 들어 시온산을 바라봅니다. 나의 도움이 ‘시온산’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하면서 “아닙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이 시편 기자에게 “우리의 도움이 성전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도움은 그 어디에서도 아니고,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합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I AM’ ‘에고 에이미’, 예수님께서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안심해라. 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여호와이심을 드러냈던, 그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의 도움이 온다고 합니다. 우리를 돕는 힘이 역사와 전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는 힘이 웅장한 성전의 건물에서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는 힘은 오직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부터 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O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How blessed is the man who takes refuge in Him!, NASB).” (시편 34:8)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다윗인데요. 다윗은 이 시편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지 아주 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refuge(피난처)’는 위태할 때 피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위기에 빠진 사람이 ‘피난처’로 피하는 것처럼,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맞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가요?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보세요.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시편 118:8-9) 말씀을 더 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시편 46:1)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삶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시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346년-1352년 사이에 ‘흑사병(The Black Death or Pestilence)’이 유행했습니다. 그 때 7,500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약 2억명이 죽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리고, 1918년 2월-1920년 4월까지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 유행했습니다. 그 때 전 세계 인구의 1-3%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인류의 지식이 발달되지 않았고, 의학적인 수준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인류의 지식은 엄청나게 팽창했습니다. 의학적인 수준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2년을 넘어 3년째로 ‘팬데믹’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망자 수가 5.5백만명입니다. 과거에는 인류가 미개한 상태에 있어서 미처 질병에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어떤 가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 ‘팬데믹’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인류의 지식의 발전과 과학 문명의 발달이 결코 인류에게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류의 희망은 ‘스스로 있는 분’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불렀던 그 시편 노래 가사가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시온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왕자들(princes)’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인류의 지식과 의학의 발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Artificial Intelligence’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AI’의 발달로 인간의 삶이 편리해지고, 삶의 질이 높이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류의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류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팬데믹’을 통해서 인류에게 이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 중에 ‘펜데믹’이 몇 개월 안에 끝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 대로 이 지긋지긋한 ‘팬데믹’이 곧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이 끝나면 인류에게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어떤 분이 시편 37:5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렇게 은혜 받은 것을 썼습니다. “God has a reason for allowing things to happen. We may never understand His wisdom, but we simply have to trust His will(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지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지혜를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뜻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두 하나님의 통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이 이 모든 일을 자기 통제 속에 두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 네덜란드)은 세계 제2차 대전 때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갖은 고난을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입니다. 함께 수용소에 있던 그녀의 언니는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코리 텐 붐은 전범(戰犯) 국가인 독일로 들어가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Never be afraid to trust an unknown future to a known God(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불확실한 시대에 확실한 하나님께 여러분을 맡기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확실한 하나님을 여러분의 도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1/9/2022 | 새해 메시지2

화해의 메시지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

고린도후서 5:14-21

새해가 벌써 한 주일이 지났습니다. 새해에는 밝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들입니다. 새로운 변이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지난 1월 5일에 감염자가 30,000명이 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사망자 수가 전에 유행했던 바이러스보다 적다는 것입니다. 학교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게들도 백신 접종 카드를 보여야만 입장할 수 있도록 규제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암울한 소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미처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지금 세상을 바꾸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바꾸고, 우리의 잘못된 관행들을 바꾸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를 바꾸고 계십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5장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말씀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말씀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씀은 “하나님과 화해하라(20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Be reconciled to God(NIV, NKJV, NASB)”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ew Living Translation은 이 말씀을 “Come back to God(하나님께 돌아오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reconcile’이라는 말은 라틴어 ‘reconciliāre’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make good again’, ‘repair’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좋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자기 시대를 향해서 선포했던 말씀입니다. 예언자 호세아가 자기 시대를 향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호세아 14:1)”고 했고,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요엘 2:12)”고 했고, 아모스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아모스 5:6)”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이사야 55: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은 그만큼 그 시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시대를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바쳤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언자들이 살던 시대에는 ‘바알’과 ‘아세라’라는 신이 축복, 생산, 풍요를 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은 남성 신이고 ‘아세라’는 여성 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 때, 그 땅에는 이미 ‘바알’과 ‘아세라’ 신이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유목민으로 살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습니다. 삶의 환경이 좋아졌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삶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습니다. 며칠 전에도 누구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음식점에 가서 30불 이상 되는 메뉴는 손이 떨려서 주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큼 잘 한다는 음식점들은 30-40불 정도는 줘야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로 기도하는 일이 옛날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가 앓고 있는 질병도 그렇습니다. 몇 몇 질병을 빼고는 모두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수명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점 하나를 더 지적한다면, 진리(眞理)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사람들은 절대 진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철학과 종교가 이 절대 진리는 찾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크게 근대주의적(modernism)인 사고 방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리에 대한 개념과 진리에 대한 접근 방식이 ‘모더니즘’ 시대와 확실하게 구별된다는 뜻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핵심 단어는 ‘다원주의(pluralism)’라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말입니다. 진리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진리만 존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풍조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로마서 12:2)”라고 했던, 바로 이 시대의 ‘패턴(pattern)’이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풍조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현상은 이 시대의 정신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왜 꼭 교회는 오전 11시에 가야 하는 거지?” “왜 진리는 성경 속에만 있다고 하는 거지?”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거지?” “왜 기독교만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거지?”

그 강도는 다를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살던 1세기의 시대 정신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유명한 사이먼 그린리프(Simon Greenleaf, 1783-1853, 미국), 시에스 루이스(C.S. Lewis, 1898-1963, 영국)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 시대의 탁월한 기독교 변증론자들(apologists)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사(大使, ambassadors)’는 자기 나라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외교를 맡아보는 최고 직책을 맡은 사람을 말합니다. 대사는 자기가 파견된 주재국(駐在國)에 대하여 자국(自國)의 의사를 전달하는 임무를 가지며, 국가의 원수와 그 권위를 대표합니다. 바울은 ‘대사’라는 말을 사용해서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들의 사명과 역할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의 대사’의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요? 첫째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17절).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 말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창조’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사물을 보는 ‘관점(point of view)’이 바뀐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인 관점(worldly point of view)’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Christocentric point of view)’으로 사물을 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관점’이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얻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누가복음 19:8) 예수님 시대에 여리고라는 마을에 살고 있던 삭개오라는 사람의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삭개오는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이란 주로 ‘물질 중심의 관점’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물질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의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눈에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전에 그가 속여 빼앗았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보인 것처럼, 이제 삭개오의 눈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관점이 바뀐 사람이라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삭개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인상 깊게 생각한 것은, 관점의 변화가 반드시 오랜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삭개오의 관점이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교회에 나온 지 얼마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지요? 상관없습니다. 삭개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분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관점이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형식적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배우고 깨닫는 대로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관점’이 바뀔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될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가 있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1절)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5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We must live for Christ who died and was raised for us). 이 말은 곧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 돌아오라(Come back to God, 20절)!”는 ‘화해의 메시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은 너무 나갔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했듯이, 이 세상도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 마저도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상대적인 하나님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각자가 추구하는 진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Come back to God(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이라는 성경 말씀이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까?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 시대를 향해 외쳤던 것처럼, 이제 이 시대를 향해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 여러분들이 이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가 있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For God made Christ, who never sinned, to be the offering for our sin, so that we could be made right with God through Christ so that we could be made right with God through Christ).”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있는 가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나 우리가 이 세상에 화해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말씀을 읽을 때, 마치 큰 결단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마치 나의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일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하나님과 멀어진 이 세상에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화해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즉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팬데믹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어떻게 이 세상을 향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과 이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