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2022 | 새해 메시지1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God Is Making The World New
로마서 12:1-2
202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 범(호랑이) 띠라고 하지요? 범 중에서도 ‘흑호(검은 호랑이)’ 띠라고 합니다. 호랑이는 용맹과 사나움과 힘으로 상징되는 동물입니다. ‘팬데믹’ 3년째로 접어드는 2022년 새해는 부디 독수리가 힘차게 날개를 치며 하늘로 비상(飛上)하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비상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팬데믹’에 대해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시각(視角)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을 인류를 향한 재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희망적인 사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는 새해가 되어도 절망적인 일들만 보일 뿐입니다. 반대로, ‘팬데믹’을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볼 때 현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긍정적인 사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통하여 엄청난 일들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훌륭한 건물에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모두 교회에 대한 이런 꿈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몇 개월 전에 저희 교회를 방문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대뜸 서울에 있는 자기 교회에 대한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를 건축 중에 있는데, 건축 예산이 얼마라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큰 교회를 짓느냐고 물었더니, 제 질문이 이상했는지 “교회를 크게 잘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많이 모이지 않겠습니까?” 하고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이 성경적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돌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가복음 13:2). 아무도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중심의 예배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건물 중심의 교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 건물, 많은 교인 수, 그리고 많은 교회 예산을 훌륭한 교회, 성공적인 교회의 지표(指標)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더 좋은 건물, 더 좋은 시설을 갖추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이런 교회들이 생각하는 목회에 대한 개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찾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식의 목회입니다.
문제는 교회에 대한 이런 개념이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자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마가복음 1:37-38) 예수님의 전도 방식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고, 숙소를 구해야 했습니다. 여간 힘들고 피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온 것입니다.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한 두 세 달 전에 이 지역 목사님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마침 제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 앞에서 무슨 설교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팬데믹 시대’에 대해 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교회에 대한 기존 개념이 바뀌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팬데믹 시대’를 통하여 도저히 바뀌지 않는 교회에 대한 고정된 개념을 바꾸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팬데믹 시대’가 끝나면, 그 때 교회는 현재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서 빨리 ‘팬데믹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하겠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형태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교회형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교회를 바꾸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섬기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라고, 건물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기동성(機動性, mobility)을 갖춘 교회의 모습일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니까 꽤 많은 목사님들이 제 설교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섬기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했고, 어떤 목사님은 케임브리지교회부터 한번 확 바꿔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무슨 특별한 목사도 아니고, 무슨 주목받는 목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학식이 많고 존경받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이 계시는데, 그런 목사님들이 ‘코로나 시대’ 혹은 ‘코로나 시대 이후’에 대한 대안을 마땅히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근에 우연히 한국에서 매우 주목받고 있는 한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교를 잘 하신다고 알려진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설교 내내 하시는 말씀이 교회 출석이 예전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목사님이 ‘팬데믹 시대’에 대한 대안(代案)을 가지고 있겠지 하면서 설교를 끝까지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코로나 시대에 교회들이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이런 현상을 그대로 보고만 있으면 결국 교회는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변회되어야 합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교회는 죽습니다. 교회 예배가 역동적(力動的)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도저히 교회에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역동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팬데믹 시대’에 대한 그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대안이었습니다. 예배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역동적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역동적인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목사님의 결론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보는 사람들을 모두 교회에 나오게 해서 교회당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목사님이기에 상당히 기대를 가지고 설교를 들었는데, 좀 실망했습니다. 그 목사님뿐만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이 어서 빨리 ‘팬데믹’ 이전으로 교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서 교회를 힘들게 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사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의 교회가 너무 좋았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의 설교에 열광하고, 여기 저기서 은혜 받았다고 하고, 목사님은 방송국에 나가서 영상 설교를 내보내고, 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하지만,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이 교회가 살 길이라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교회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까?
‘팬데믹’ 시간을 벌써 2년째 겪고 있고, 3월이면 3년째로 들어갑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까? 사람들의 의식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까? 사람들의 근무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일하는 형태가 바뀌니까 그 전에 그렇게 바꾸고 싶어도 바꾸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재택 근무를 많이 하게 되니까 출퇴근 때 교통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도시 집중의 인구를 교외로 분산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섬기는 교회’는 제가 처음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가복음 10:45 말씀을 보세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도(even the Son of Man)’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배소서 1:23, 4:12, 5:30, 고린도전서 12:27)’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에베소서 1:22, 5:23, 골로새서 1:18)’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서 섬기는 삶을 사셨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당연히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교회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동네 동네를 찾아다니셨던 것처럼, 교회도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기동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사람들을 찾아가는데 알맞은 구조가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도록 하는데 최적화된 구조입니다.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 스위스)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는 카톨릭 신학자이지만, 교황의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을 비판하는 등 카톨릭 신학의 개혁을 주장했던 학자입니다. 결국 한스 큉은 1979년에 그가 몸 담고 있던 튀빙겐(Tübingen) 대학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합니다. 한스 큉은 천재적인 신학자였습니다. 한스 큉 외에도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헨리 나누엔(Henri Nouwen, 1932-1966, 네덜란드)같은 학자들이 모두 신학적인 상상력이 뛰어난 천재 신학자들입니다.
한스 큉이 남긴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의 본질(本質)을 연구한 ‘The Church, 1967)’라는 책은 그의 업적 중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교회는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세상 속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사람들을 받들어 섬기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있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교회의 제도와 교리가 목적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본연의 사명에서 벗어나게 되면, 결국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위기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하나님을 섬겨 인간을 섬기며, 인간을 섬겨 동시에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The church should serve God and serve man, and serve man and serve God at the same time)”고 했습니다. 지금 그의 말 대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지 않습니까?
네덜란드의 선교 신학자 요하네스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 1912-1975)가 ‘The Church Inside Out(흩어지는 교회)’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은 1966년이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보다 활발한 ‘기동성(mobility)’과 ‘다양성(diversity)’을 갖추어야 하며, 평신도가 선교가 주체가 되어야 하며, 소집단들의 활용과 상호 협동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다고 하면서 기존의 하나님-교회-세상 대신 하나님-세상-교회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교회는 더 이상 선교의 주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샬롬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 안에 안주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 세상 속으로 흩어져야 한다는 것이 호켄다이크의 주장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에 두 사람의 신학자가 거의 같은 시기에 예언자적인 책을 냈지만, 그 때는 아무도 귀 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주장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듣기에 교회는 비대해 졌고, 교회는 세상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원로인 홍정길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거대한 공룡에 비유했습니다. 지금 50여년 전의 케케묵은 두 신학자의 주장을 꺼내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팬데믹 시대’에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의 주장을 통하여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 말씀은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이 시대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겉모습만 보지 말고, 이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께 일하시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바꾸고 계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이 ‘팬데믹 시대’를 통해서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교회를 바꾸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깨시민’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깨어 있는 시민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갈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이 되어서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12/31/2021 | 송구영신예배 메시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God Calls for Repentance
로마서 13:11-14
지금은 2021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시간입니다. 우리 앞에는 2022년 새해가 다가와 있습니다. 팬데믹을 3년째 맞이하는 이 시간, 목사인 나에게는 교우들에게 무슨 설교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고통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모두가 처음 겪는 일에 낯설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에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더욱 암담한 것은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다시 규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몇 명 이상 모일 수 없습니다. 가게도 문은 열지만 손님들이 뚝 끊어졌을 것입니다. 중국은 얼마 전까지 코로나바이러스를 완전 퇴치했다고 선언하더니,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시안(西安)’이라는 도시는 인구 1,300만명이 넘는 대도시인데, 지금 완전 봉쇄령(封鎖令)이 내렸습니다. 내년 2월에 베이징에서 열릴 동계 올림픽에 악영향을 줄까 봐, 시안 주민들을 일체 집에서 나올 수 없도록 시 전체를 봉쇄한 것입니다. 한 가구 당 한 명만 이틀에 한 번씩 생필품 구입을 위해 마켓에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에 있는 3,574개 학교가 문을 닫아 200만 명의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누적 확진자 수가 250명을 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발표를 믿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도시를 봉쇄할 정도면 그 도시 안은 이미 생지옥이 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 우리에게 닥칠 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매사추세츠 주에도 지난 월요일에 확진자 수가 13,791명이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 수는 25명 정도입니다. 도대체 이 코비드 바이러스 사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 앞으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문가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팬데믹 시대’에 대한 고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가 이 ‘팬데믹 시대’를 어떤 눈으로 봐야 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벌써 이 문제가 여러분의 고민거리가 되고, 함께 토론하는 주제가 되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 제목이 되었어야 합니다. 다들 그렇게 하고 계신가요?
저는 ‘팬데믹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많이 있지만, 우리가 이 송구영신예배에 생각해야 할 것은, 그동안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려왔는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의 한 조항이라도 어기지 않고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항상 감시자(監視者)의 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주시(注視)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들의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허기진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 와서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결예식’을 어기고 있다고 거칠게 항의했습니다(마태복음 15:2).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바리새인들’의 열심 하나만은 인정을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의(義)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보다 휠씬 낫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20) 하지만, 그들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눈에는 이 ‘바리새인들’이 형식적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위선자(僞善者, hypocrites)들로 보였습니다. 겉에서 봤을 때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 올바른 정신과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믿음을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려고 하는 열심과 노력이 있습니까? 주일마다 교회를 출석하는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저는 그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늘 마음에 걸리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2:21-22에 있는 말씀입니다.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 But you know how Timothy has proved himself(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보내려고 하는)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예수님의 일에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이 성경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 우리가 그동안 어떤 믿음생활을 했는지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형식화되었을 때, 나라가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시리아로, 바빌로니아로 잡혀갔습니다. 성전 물건들을 약탈당했고, 성전은 이방인들의 손에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신 대로 종교 지도자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믿음이 되었을 때, 또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제 구실을 못했을 때, 성전은 다시 로마 군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가 서기 70년입니다. 지금 성전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이슬람의 ‘황금 돔 사원(The Dome of the Rock)’이 들어섰습니다. 성전은 서쪽 벽만 겨우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고 부릅니다.
저 역시 ‘팬데믹 시간’을 보내면서 목사로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지난 2년 동안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교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성탄절에 유아 세례를 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그동안 많이 자란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아이들이 안 본 사이에 엄청 많이 자랐다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팬데믹 시간’을 보내면서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과거에 우리가 했던 믿음생활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온 식구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끝나면 친교 시간이 있고, 청년부 모임 시간이 있고, 금요일에는 다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찬양하고, 간사님들이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서로 토론하고 했던 시간들이, 그 때는 몰랐지만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일부는 대면예배에 나오고, 일부는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하여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그동안 우리는 참 복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우리에게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동안의 우리의 믿음 생활에 대하여 반성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열정들이 다 사라졌는데도 우리는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진한 감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부르면 “오늘 참 잘하는데?”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이어져도 그 말씀에서 은혜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시간이 되면 늘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는 만족감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예배가 내 삶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Your worship is a farce, for you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너희는 사람이 만든 생각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너희가 드리는 예배가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냐).” (마가복음 7:7, 이사야 29:13에서 인용) 예수님께서 너희 예배가 잘못되었다고, 너희 예배가 죽어 있다고, 너희 예배가 형식화되어 있다고 뼈아프게 지적하시기 전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그렇게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 ‘팬데믹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회개를 원하고 계십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철저한 회개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형식적이고 죽어 있는 믿음생활을 해 왔던 우리의 지난 삶을 철저하게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Here there is no Greek or Jew, circumcised or uncircumcised, barbarian, Scythian, slave 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s in all.” (골로새서 3:11) 무슨 말인가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를 받은 사람도 받지 않은 사람도, 야만인도, 스키타이 사람도, 노예도, 자유인도,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런 구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 사상을 가지고 자기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이 최고의 문화 민족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모든 것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만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도 모든 것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전부(everything)’가 되고 있습니까?
‘You Are My All in All’이라는 노래를 다 아시지요? 1991년에 나온 노래인데요. Dennis Jerni-gan이 부른 노래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입니다.
You are my strength when I am weak (내가 약할 때 주님은 나의 힘이예요)
You are the treasure that I seek (주님은 내가 찾는 보물이예요)
You are my all in all (주님은 나의 전부예요)
Seeking You as a precious jewel (귀중한 보석처럼 주님을 찾고 있어요)
Lord, to give up I'd be a fool (주님을 찾는 일을 포기한다면 저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말거예요)
You are my all in all (주님은 나의 전부이니까요)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그 이름이 합당해요)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그 이름이 합당해요)
어느 새 우리는,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라는 고백을 잊어버렸습니다. 이 고백을 잊어버린 채 우리는 교회를 드나들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다닐 때, 아니면 대학에 다닐 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계신가요?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주님을 향한 고백은 어디로 갔습니까?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 시대를 탓해야 할까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가슴이 식어가고, 나는 형식적인 크리스천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 아니라 나의 많은 것들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노래 가사는 내가 주님을 찾는 일을 포기한다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라고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찾기를 중단해버린 바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3장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1-12절)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 시간’ 속에 주님의 의도(意圖)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팬데믹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팬데믹 시간’에 대한 주님의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깨닫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가혹한 말로 들리겠지만, 우리가 주님의 의도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올 때까지 ‘팬데믹의 시간’이 계속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우리의 믿음생활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으면 우리에게 ‘팬데믹 시간’을 주셨겠습니까? “This is all the more urgent, for you know how late it is; time is running out.” (11절) 그냥은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팬데믹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시면서 회개하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새로워져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둠의 옷을 벗고 주님이 입으라고 하시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제가 못다한 설교를 이번 주 새해 설교에서 계속하겠습니다.
12/26/2021 | 송년예배 메시지
다시 읽어보는 달란트의 비유 Rereading The Parable Of The Talents
마태복음 25:14-19, 24-30
팬데믹 시간을 보내면서 두 번째 맞이하는 송년예배입니다. 아직도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도 좀 느슨했던 규제가 다시 심해지고 있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제일 신뢰를 얻고 있는 앤서니 파우치(Anthony Fauci) 미국 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은 NBC, CNN 방송에 나와 새로운 변이 ‘오미크론(Omicron)’의 확산으로 미국은 힘든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오미크론에 관해 매우 분명한 한 가지는 그것의 놀라운 확산 능력과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미크론은 현재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산을 하나 넘었다 싶으면 다른 산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오미크론’이라는 산을 넘으면 또 어떤 산이 우리 앞에 나타날 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는 2021년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자기 종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21, 23절) 우리는 이 말을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했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이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시간입니다.
저는 이 팬데믹 시간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의 삶에 벌어지는 어떤 일도 주님의 허락이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욥에게 준 사탄의 시험도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맞습니까? 유명한 이사야 45:7 말씀을 아시지요?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 좋은 일에만 주님이 관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둡고 절망적인 일에도 주님이 관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일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주님의 목적과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 ‘달란트의 비유’를 읽어보면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잘 하였다” 이 주님의 말씀이 조금은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방관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다시 읽어보는 달란트의 비유’라고 정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뻔한 말씀으로 듣지 말고,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롭게 읽어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누가 ‘달란트의 비유’ 속에 나오는 키워드를 ‘reward’ ‘faith’ ‘service’ ‘risk’ ‘obedience’ ‘gifts’ ‘diligence’ ‘talents’ 이렇게 여덟 개로 뽑아 올린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들이 ‘달란트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시나요? 본문 말씀에 나오는 ‘달란트’는 화폐 단위가 아니라 무게를 다는 단위입니다. 한 ‘달란트’는 약 75파운드, 34킬로그램입니다. 은 한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 시세(市勢)로 알아보았습니다. 지금 은 한 파운드에 326달러거든요? 75파운드면 약 24,000달러입니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줬다고 하니까 122,000달러를 준 것입니다. 또 한 종에게 두 달란트를 줬다고 하니까 48,000달러를 준 것입니다. 한 달란트가 24,000달러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도 결코 적은 돈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종들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겼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따라’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He divided his money in proportion to their abilities(New Living Translation)”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기 재산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주인은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평소에 종들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가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 돈을 맡긴 것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왜 주인이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신 분들은 주인이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인은 전체 자기 재산을 여덟 개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능력이 많은 종에게 다섯 개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종에게는 두 개를 맡겼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종에게는 나머지 한 개를 맡겼습니다. 이것이 ‘in proportion to their abilities(능력에 따라)’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주인은 공정하게 종들의 능력에 따나 자기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이지 결코 종들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오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어쩌다가 운이 좋아 저런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운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저런 자리에 앉으면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거든요? 그 일이 내 능력 밖의 일이라면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겼더라면 아마도 그 종은 다섯 달란트를 잘 관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종에게 그만한 능력이 없었으니까요. 이 사실만 잘 알아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열등의식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몇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처음에는 출마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정당 안에서의 경선을 치르면서 후보자가 추려졌습니다. 군소 정당의 후보까지 모두 여섯 일곱 명의 후보가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잘 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대통령으로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라야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한 판단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로마서 12:3) 이 말씀이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has allotted to each a measure of faith.” 또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has apportioned to each a degree of faith [and a purpose designed for service.]" 달란트의 비유에는 종들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다고 나옵니다. 로마서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할당(割當)해 주셨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할당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믿음의 분량이 많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한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자기 돈을 종들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도대체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종들에게 자기 돈을 맡겼을까요?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얼른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였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Immediately the one who had received the five talents went and traded with them, and gained five more talents, NASB).” (16절)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똑 같이 했습니다. ‘immediately(즉시)’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주인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주인이 오래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왔다고 한 것을(19절) 보면 종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떠나자마자 그렇게 서둘러서 ‘즉시’ 장사를 시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달란트의 비유’는 말 그대로 ‘비유(比喩, parable)’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느 집에서 있을 법한 일을 예로 들면서 “하늘 나라는 여행을 떠날 때, 종들을 불러서 자기 재산을 맡긴 사람과 같다(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맡은 종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또 그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잘 보고 주인에게 칭찬받도록 하라는 것 아닙니까? 주인의 돈을 맡은 종들이 즉시 그 돈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전진(前進)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하는 시급한 일입니다(누가복음 9:62, 60).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주인의 은 돈을 숨겼습니다(19절).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무서워서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24-25절).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읽어보면, 주인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이 주인을 오해(誤解)한 것입니다. 주인이 이 종에게 묻잖아요? “너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았느냐?” (26-27절)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에 실패할 것이 두려워했고 주인에게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받은 돈을 땅 속에 묻어 둠으로써 주인의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21, 23절)’이라고 칭찬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는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고, ‘쓸모 없는 종(30절)’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착하고 신실한 종이고, 어떤 사람이 쓸모 없는 종입니까? 주인의 의도를 잘 알고 주인의 뜻대로 즉시 장사를 했던 종들은 모두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주인을 몰인정한 사람으로, 주인을 무서운 사람으로 알았던 종은 ‘쓸모 없는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빌레몬 1:11)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Formerly he was useless to you, but now he has become useful both to you and to me”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NKJV에는 “He once was unprofitable to you, but now is profitable to you and to me”라고 나와 있습니다. ‘useless vs. useful’ ‘unprofitable vs. profitable’ 워드플레이처럼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리스 원어 성경에도 ‘아크레토스(achrēstos) vs. 유크레스토스(euchrēstos)’라고 나와 있습니다. 앞에 ‘a’가 붙으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책망을 받게 되고, 앞에 ‘eu’가 붙으면 유익한 사람이 되어 칭찬을 받습니다. 맞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쓸모 없는’ ‘무익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모두 ‘유크레스토스들(유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다섯 달란트를 받았느냐, 두 달란트를 받았느냐, 한 달란트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즉시 나가서 장사를 해서 한 달란트를 남겨 주인에게 두 달란트를 내 놓았다면, 그 종도 ‘유크레스토스’라는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2021년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새해에도 계속해서 힘든 팬데믹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지치기 쉽고 의욕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힘든 시간 속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다섯 달란트를 받았든지, 두 달란트 받았든지, 아니면 한 달란트를 받았든지,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먼 나라에 여행을 갔던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서 세 종을 불러 각자에게 맡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물은 것처럼(19절),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을 맡아 어떻게 관리했는지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큰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특히 ‘적은 일(a few things, 21, 23절)’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적은 일들’을 소홀하게 생각하고 낭비하기 쉽습니다.
George Vaillant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이고, 하버드 메디컬 스쿨 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Our lives are like the talents in the parable of the three stewards. It is something that has been given to us for the time being and we have the opportunity and privilege of doing our best with this precious gift(우리의 삶은 세 청지기 비유에 나오는 달란트와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당분간 맡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중한 선물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기회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12/19/2021 | 성탄 메시지2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들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누가복음 2:8-20
누가(Luke)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누가는 그리스 사람으로 시리아의 안디옥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안디옥에 교회를 세우고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일년 동안 가르친 적이 있는데(사도행전 11:26), 그 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는(골로새서 4:14)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 바울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신실하게 바울 곁을 지킵니다. 누가는 역사 의식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누가복음 1:3). 그는 예수님에 대한 자료를 모아 누가복음을 기록했고, 바울을 수행하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해 자료를 모아두었다가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누가복음의 기록은 역사가로서의 누가의 진면목(眞面目)을 한껏 드러낸 값진 기록입니다. 한번 그 말씀을 보실까요? “그 때에 아구스도(Augustus) 황제가 내린 칙령에 따라 온 나라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레뇨(Quirinius)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행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호적을 등록하러 고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으므로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유대 지방에 있는 다윗의 마을로 갔습니다. 이 마을은 베들레헴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등록하러 갔습니다. 마리아는 그 때에 임신 중이었습니다. 이들이 베들레헴에 있는 동안 아기를 낳을 때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습니다. 그것은 여관에 이들이 들어갈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1-7)
만일 누가의 이 기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의 역사적인, 정치적인, 사회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 잘 몰랐을 뻔했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지도 이유를 알 수 없을 뻔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세상은 참 시끄럽고 요란했습니다. 그 때 유대나라는 로마제국의 지배 밑에 있었습니다. 그 때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BC 63-AD 14))로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BC 100-BC 44)가 죽은 후 정적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 83-BC 30)를 물리치고 로마제국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 칭호에는 ‘숭고한 자’ ‘고귀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아우구스투스’가 시리아의 총독 ‘구레뇨(Quirinius)’의 지휘 아래 호적 등록을 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유대나라는 행정적으로는 시리아에 속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아우구스투스’는 세금을 더 거둬들이기 위해 그런 칙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유대인들은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등록하라고 했으니 그 일대에 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 같이 작은 마을에 갑자기 외지(外地)에 나가 살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오니까 막상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여관에 빈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저항심이 강한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로마인들에게 저항했습니다. 그 중에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은 살인과 방화(放火)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바라바(Barabbas)’같은 유명한 죄수(a notorious prisoner)가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7:16). ‘바라바’가 이렇게 유명했던 이유는 이 사람이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짜 메시아들이 끊임없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암하레츠(Am-ha' aretz)’라고 불리는 민중들 사이에는 조용히 기도하면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8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all those who were looking forward to the redemption of Jerusalem)’이 바로 ‘암하레츠(Am-ha' aretz)’들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는 형식적인 예식이 되어 버렸고(요한복음 2:12-17), 헤롯 왕은 무리하게 성전을 증축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46년째 공사 중이었습니다(요한복음 2:20).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대로 백성들은 목자를 잃은 양처럼 유리하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마가복음 6:34, 마태복음 9:36).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때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소란하던 때였습니다. 결코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때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대 이동이 있었고, 유대 민족들은 로마의 지배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반란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예배는 백성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뭔가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돌고 있던 때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뭇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 들고서 다 찬송하기를 평강의 왕이 오시니 다 평안하여라.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 고요하도다. 이 괴롬 많은 세상에 짐 지고 가는 자 그 험산 준령 넘느라 온 몸이 곤하나 이 죄악 세상 살 동안 새 소망 가지고 저 천사 기쁜 찬송을 들으며 쉬어라.” (112장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예수님의 탄생으로 소란하던 세상이 고요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 새 소망이 주어졌다는 찬송가 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때가 무르익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But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God sent his Son).” (갈라디아서 4:4)
누가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들이 한 밤중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그 기쁜 소식이 제일 먼저 목자들에게 들렸을까요?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불과 8.8km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입니다. 차로 가면 20분 거리 밖에 안 되고, 걸어가도 2시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고,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살았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이 들리지 않고 밤 중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먼저 들렸을까요?
어떤 사이트에서 본 것입니다만, 직업 중에 ‘극한 직업(extreme job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벌목공, 원양어선 선원, 광부, 지뢰 제거반, 환경 미화원, 수색 구조원, 용접공, 정비공, 트럭 운전사, 택배 기사, 화상병원 의료진, 말벌 채집꾼, 해양 폐기물 수거반, 동물 사체 제거반, 하수도 맨홀 청소원, 버킹엄 궁전 근위병, 브라질 연구용 모기 채집가, 이런 직업들이 극한 직업들입니다. 일은 힘들고, 위험하고, 월급은 적은 직업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난 당시에도 ‘극한 직업들’이 있었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 1900-1979, 독일)가 쓴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 1969)’이라는 책에 보면, 당시 천한 직업으로 취급받은 직업들이 등장합니다. 낙타몰이꾼, 당나귀몰이꾼, 마부, 뱃사공, 의사, 푸줏간 주인, 어부, 목자 등이 천직으로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목자는 부정직하다는 사회 인식 때문에 법정에 증인으로도 세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그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들이었고, 구덩이에 빠져있어도 유대인들은 그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런 목자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신분은 ‘죄인’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죄인’ 취급당했듯이, 목자들도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목자로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이집트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살았던 모세는 여차여차하여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이라는 땅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목자로 40년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훈련시킨 기간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한 왕이었던 다윗도 어린 시절을 목자로 보냈습니다. 사울 왕에게 어린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참 인상 깊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던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서 양을 물어 가면, 저는 그 놈을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 냈습니다. 그 놈이 저를 공격하면, 저는 그 놈의 턱을 잡고 때려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7:34-35)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지키는 목자로 살면서 양 한 마리의 생명이 내 목숨을 걸고 지킬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자는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자를 잘 표현하는 말은 ‘humble’ ‘humbleness’ 혹은 ‘humility’라는 말입니다. 목자는 직업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지키고 있는 양에게 눈길을 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목자를 겸손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근처 들판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And there were shepherds living out in the fields nearby, keeping watch over their flocks at night).” (8절) 어떻습니까? 목자들이 있는 곳은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들판’입니다. 모두가 잠자는 이 시간에도 목자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양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도둑들이 와서 양을 훔쳐갈까 봐, 혹시라도 사나운 짐승이 양을 해칠까 봐 양들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갑자기 주님의 영광이 목자들을 둘러 비추면서 천사들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10-12절) 천사들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다고 하면서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는 증거까지 목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포대기에 싸여 있는 아기는 많이 있겠지만, 포대기에 싸여 구유(manger)에 누워 있는 아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천사들은 그 아기가 메시아임을 부인할 수 없는 빼박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천사들의 메시지가 끝나자 다시 천사들과 하늘의 천군(天軍)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among men with whom He is pleased, NASB).” (14절) 메시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메시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잘 읽어보면 메시아의 탄생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베들레헴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사회적인 평판(評判)이 좋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도 설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버리고 목자들이 전하는 성탄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맞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하나님의 ‘살롬’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목자들처럼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라고요.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 성탄의 소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교만한 사람들은 성탄의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 성탄의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메시아 탄생의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먼저 겸손한 목자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God opposes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야고보서 4:6, 잠언 3:34)”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대로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에게 성탄의 소식이 들립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성탄의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
12/12/2021 | 성탄절 메시지1
한 아기 때문에 For A CHILD Is BORN To Us
이사야 9:1-7
제이슨 듀크스(Jason C. Dukes)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kind of love that was so intently demonstrated at Christmas is truly amazing and life changing(크리스마스를 통해 보여준 사랑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정말 놀라운 사랑입니다).” 여러분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10)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보내 주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오늘 이사야서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BC 700년경의 유대 나라 역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사야라는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웃시야와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그 아들 므낫세까지 무려 다섯명의 왕들이 왕 위에 있었던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BC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사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때는 나라의 국운(國運)이 기울어 가던 때였습니다.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한 일이 있었고, 히스기야 왕 때에는 아시리아의 산헤립(King Sennacherib)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유다 왕국의 존폐의 기로에 섰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사야서에 기록된 내용들은 대체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내용들이 많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있을 새로운 세상, 곧 ‘공평과 정의’의 기초 위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과 희망의 말씀들이 선포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6절,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For a child is born to us)” 이 말씀입니다. Jason C. Dukes라는 분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났다고 했는데요. 정말 ‘한 아기’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변화하게 됩니다. 보세요. 고통받는 땅에 어둠이 걷히고,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보게 됩니다. 그 땅에 더 이상 고통이 없고, 더 이상 전쟁이 없는 날이 옵니다. 군인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신고 다니던 군화와 피로 얼룩진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 불에 사라질 날이 옵니다(5절).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사야 2:4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라마다 칼을 부러뜨려서 쟁기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들 것이다. 다시는 나라들이 서로 칼을 들지 않으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2:4)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는 약한 나라를 침략합니다. 얼마 전에 아시리아 제국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아시리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근처에 있는 약소 국가들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했던 고대 제국입니다. 한번 화면을 보십시오. 아시리아의 고대 도시들을 발굴한 현장에서 이런 끔찍한 전쟁 장면의 점토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습니다. 또 러시아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틈을 노려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식이 확장된 지금도 강대국들의 야만적인 침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야망과 욕망을 멈추게 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이 가능할까요?
이사야는 이런 일이 ‘한 아기(a child)’가 탄생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이 찬송가 가사를 생각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가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같이 누리겠네.” 이 찬송가 가사처럼 선지자들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평화의 시대가, 이사야가 꿈꾸었고, 미가 선지자가 꿈꾸었던(미가 4:3) 평화의 시대가 ‘한 아기’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전사(戰士, warrior)가 나타나서 전쟁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탁월한 책략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당시에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전사의 모습으로 올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은 ‘한 아기’의 탄생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이름과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런 아이가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크리스천 부모라면 그 아이가 이름처럼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새벽기도에서 ‘오늘의 양식’을 읽고 있는데요. 12월 7일 오늘의 양식에는 ‘완벽한 이름(The Perfect Name)’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어떤 부부가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퇴원을 해야 하는데, 아이 이름을 어떻게 져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Baby Williams(베이비 윌리엄스)’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에는 ‘Micah(마이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Micah’라는 이름에는 “Who is like God(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누구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날 말씀을 쓰신 Marvin Williams라는 분은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완벽한 이름이 있다고 하면서 이사야 7:10에 나오는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The virgin will conceive a child!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여러분, 아시지요?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면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마태복음 1:23). 즉 마태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한 아기’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정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예수님께 딱 맞는 완벽한 이름 아닙니까?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정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죄인들의 친구(a friend of sinners, 마태복음 11:19)’라고 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복음 28:20).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던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정말 성경을 사랑했고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50년 동안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했던 총 길이가 290,000 마일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구를 열 바퀴 도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책은 모두 200권이 넘는다고 합니다. 화면을 한번 보시지요. 요한 웨슬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The best of it is, God is with us(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 두렵고,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자신 있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 예수님에게 주어진 이름 중에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도 예수님께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복음 14:27, 요한복음 6:20)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I am leaving you with a gift-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요한복음 14:27)
‘평화의 왕’을 영어로 ‘Prince of peace’라고 합니다. 히브리 말로 ‘Sar-shalom(살 살롬)’라고 합니다. ‘살롬’은 평화라는 뜻이고요. ‘살(sar)’은 다른 사람들과 질적으로 다른 리더(leader)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살-살롬’이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살롬을 위협하고, 살롬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 주시고 하나님의 살롬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롬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Sar-shalom’이신 예수님께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1914년 12월 24일, 독일 서부 전선 플뢰르베(Fleurbaix) 벌판에서 영국군과 프랑스 연합군은 독일군과 맞서 서로 참호를 파고 교전(交戰) 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영국군 병사들은 적진에서 들려오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100m 전방에 마주 대하고 있는 독일군 참호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가가 들려온 것입니다. 노래가 끝나자 독일군 병사들이 영국군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Merry Christmas, Englishmen! We not shoot, you not shoot(메리 크리스마스, 영국인들! 우리는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그 동안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영국군과 프랑스 연합군, 독일군은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에 총을 내려놓고 휴전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들은 마치 동네 친구들처럼 서로 담소를 즐기고, 술잔을 돌리고, 생활 필수품들을 나누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시작된 이 플뢰르베 벌판의 휴전 소식은 서부전선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심지어 어느 전선에서는 서로 축구경기를 했다는 소문까지 났습니다. 비록 이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벌이는 가장 잔혹한 전쟁까지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위대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크리스마스 휴전 이야기는 후에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2005)’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메리 크리스마스(Joyeux Noel)’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절망적이고, 암담하기만 합니다. 벌써 2년째 팬데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인류에게는 전쟁의 위협이 있고, 질병의 위협이 있고, 경제적인 위협, 헐벗음과 굶주림의 위협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인류에게는 경제적인 불평등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절망 속에서도 ‘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날’이 온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사야도 오늘 우리와 똑 같은 심정이었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 (7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새 날이 오게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열심히 추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일임으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