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8/22/2021 |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부활절이 지나고(18) After Jesus’ Resurrection
로마서 15:14-19
사도 바울이 남긴 선교 업적(業績)은 정말 엄청납니다. 이 놀라운 업적은 그의 옆에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업적을 자랑하거나 업적을 부풀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동역자들과 함께 끝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실 하려고 했습니다.
본문 19절에 “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파했습니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의 사역은 한마디로 ‘From Jerusalem to Illyricum(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번 그가 말하는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 지도를 보실까요? 직선 거리로 약 1,000마일(1,600km)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로마까지는 1,400 마일 정도 되고요. 요즘같이 교통 수단이 발달한 때에는 이 거리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배를 타고, 걸어서 가려고 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도로가 잘 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선교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과 강도들로부터 오는 위험, 내 동족들에게서 받는 위험, 이방인들에게서 받는 위험, 도시에서 당하는 위험, 황량한 광야에서 당하는 위험, 바다의 위험, 또한 거짓 신자들로부터 오는 위험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6-27)
“바울은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하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foundational question)’ 질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 그리고, 실수들이 생겨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일들이 모두 내가 누구인지 나 자신을 모르는 데서 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I am a special messenger from Christ Jesus to you Gentiles).” (16절) 우리는 단순히 “Who am I?”이렇게 묻지 말고 “Who am I in Christ Jesus?”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홀로 책상 앞에 앉아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 하고 질문해 보세요.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많은 문제들이 이 질문 앞에서 풀려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별것 아닙니다. 이 질문에 충실한 삶을 살면 거기에서 진정한 삶의 만족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둘째로,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8)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영국) 목사님이 쓴 역작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The Incomparable Christ, 2001)’라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처럼 위대하고 탁월한 분이 없었고, 그보다 더 깊은 영향력을 가졌던 분이 없으셨다. 그와 필적할 만한 상대는 영원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았기에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20)”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소중하게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에게 뭔가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을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에 대한 열정입니까? 전도에 대한 사명감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for his name’s sake)’입니다.”
저는 바울의 마음 속에도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이 마음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리스인이든지 미개인이든지 지식인이든지 문맹인이든지 가리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4-15) 이 말씀이 그가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the name above all other names)’이 되게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9). 바울이 빌립교 교회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인생 전부를 바쳤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인생 전부를 바쳐도 아깝지 않는 이름인가요?
셋째로, 우리는 바울이 자기 사명을 위해 어떤 헌신을 했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이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믿어 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은 내게 맡기신 것을 세상 끝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12)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I am not ashamed of it)”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it’는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로마서 1:16에도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전도자로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잘 사는 사람들이 많고, 또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 볼 때, 부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전도자들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의 삶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 말씀 속에 ‘주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what I have entrusted to him or what I have committed to Him)’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주님이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준다(guard)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The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연은 어떤 일이 어려움이 있어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서커스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처음으로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서커스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변수가 많겠습니까? 녹화를 했다가 내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대 뒤에서 다음 순서를 준비하는 배우에게 갑자기 돌발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동물들에게도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소품을 챙기는 데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황이 어찌 되었든 막이 열리면 서커스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데 고난이 따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클리프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들어가서 그 부족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문자가 없는 부족들에게는 문자를 만들어 주고, 그 문자로 성경을 번역해야 합니다. 한 선교사가 그 일을 하다가 죽으면 그 일이 중단됩니다. 그러면, 다음 선교사가 그 일을 맡아 계속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부족의 문자로 성경 번역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중단되지 않고 계속됩니다.
넷째로,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동역자들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큰 감동이 밀려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디모데는 마치 아들과 아버지처럼, 나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But you know how Timothy has proved himself. Like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 (빌립보서 2:22)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 대하여 “He has helped me”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고 “He has served with me”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할 때 디모데도 나와 함께 수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렇게 빌립보서를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를 믿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과 지도자들과 집사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 1:1) 나도 디모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기와 디모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동일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동역자를 대하는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동역자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예루살렘서 일루리곤까지(From Jerusalem to Illyricum)’ 그 광활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디도(Titus)라는 바울의 동역자가 있습니다. 디도는 그리스 사람인데,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되었고,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디도는 바울에게 ‘친아들’과 같은 사람이었고(디도서 1:4), 동료(fellow worker, 고린도후서 8:23)였습니다. 디도는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도는 주로 바울의 편지를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그를 크레타(Crete) 섬의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서로 만난 후, 이 부부는 평생 신실한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부에 대하여 “이 두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로마서 16:4)”라고 인정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끝으로, 바울이 전도자로 섬긴 기간은 서기 47년에서 57년까지 약 10여년 간입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천성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자기가 한 때 교회를 박해했다는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트라우마가 그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바울의 과거였지만, 여기에도 주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바울이 끝까지 자기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전도자들과 경쟁하는 조급한 마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반짝하고 일꾼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겸손했고, 다른 전도자들과 경쟁심을 버렸기에 10여년 동안 롱런(long-run) 할 수 있었습니다. 아볼로(Apollos)라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전도자와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나 아볼로나 여러분을 믿도록 하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게 하신 일꾼에 불과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3:5-6) “나는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집을 세우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로마서 15: 20) 이런 마음과 태도가 바울이 끝까지 자기 사명을 다 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하여 최후의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내 삶을 바쳤고, 이제는 이 땅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6-8)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그 시대의 엘리트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의 이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일을 선택하라!” 참 멋진 말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고, 자신이 인생을 다 바쳐도 후회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 바울을 생각하면서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세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분인가?” “나는 지금 가슴이 뛰는 일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8/15/2021 | 아테네 설교
부활절이 지나고(17)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7:22-28
오늘 말씀은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제2차 선교여행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다소, 더베, 루스드라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 드로아를 거쳐 빌립보, 데살로니카,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때가 대략 서기 50년 경으로 생각됩니다. 제2차 선교여행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최초로 유럽에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마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지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주께서 내게 맡기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 — 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사도행전 20:24)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대하여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이 로마서 1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I have a great sense of obligation to people in both the civilized world and the rest of the world①, to the educated and uneducated alike(나는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큰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 ①Greek to Greeks and barbarians 그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로마에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금방 모든 일이 잘 해결되면 로마교회의 파송을 받아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로마서 15:24, 28).
우리 생각이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 대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제가 1983년에 미국에 이민자의 신분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지내오는 동안 제가 가지고 있었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한동안 많이 절망했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을 주셨습니다. “너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대신 나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이 한마디 말씀으로 저의 마음은 회복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한 것은 서기 50년경이었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카, 베뢰아를 거쳐 오면서 같이 동행하던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 두고 혼자 아테네에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는 동안 아테네 시내를 돌아보았습니다. 아테네의 역사는 3,000년이 넘을 정도로 오래 된 철학자들의 고향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BC), 페리클레스(Pericles, 495-429BC), 소포클레스(Sophokles, 497-406BC) 등 쟁쟁한 위인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Academia)’가 아테네에 있고,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BC)가 세운 ‘리케이온(Lykeion)’도 아테네에 있습니다. 일종의 체육관이자 학교였고, 공공 모임 장소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중심에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는 언덕이 있는데, 그 중앙에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파르테논(Parthenon, BC 432년에 완공)’ 신전이 서 있습니다.
아테네 시내를 돌아본 바울은 수많은 신상(神像)들을 보면서 마음에 분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 역사적인 도시의 시민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때문에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날마다 토론을 벌이면서 진리의 하나님을 찾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상 밑에 새겨 있는 신상들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상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An Unknown God, ΑΓΝΩΣΤΩ ΘΕΩ)’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수많은 신들을 섬기면서도 혹시라도 우리가 모르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런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유대인들과 그리스인 신자들(the God-fearing Greeks)과 매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토론에서 바울은 “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까?”라고 문제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에피큐리안 철학자들과 스토익 철학자들(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과도 토론을 벌였습니다. 누가는 그 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습니다(사도행전 17:18). 에피큐리안들이나 스토익 철학자들 모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했고, 스토익 철학자들은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 행복인데, 그러기 위해서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진정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오는 것이라고 그들과 토론을 벌인 것입니다.
토론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는 바울을 보면서 에피큐리안들과 스토익 철학자들은 바울을 가리켜 “What's this babbler trying to say with these strange ideas he's picked up(18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이 말쟁이(수다쟁이)가 말도 안 되는 문제를 가지고 와서 지껄여 대는 거야?” 이런 말이 되겠네요.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18절) 이 사람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the Areopagus)’ 광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바울의 주장은 ‘무척 낯설고 새로운 것(some startling and strange things)’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명한 바울의 ‘아테네 설교’가 시작됩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면서 자기가 할 이야기는 아테네 시민들과 ‘연관성(relevancy)’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니 여러분들은 매우 종교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시내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새겨진 신상을 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23절) 이 말에 아테네 시민들은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상대방과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라면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가 마음을 열도록 접근하신 방법은 “나에게 물을 좀 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가 시작되어 마침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는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그런 물이 있다면 저에게 주십시오(요한복음 4:15)”라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요청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가까워진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 그들의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묵으면서 그들과 같이 일했습니다. 천막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3) 그들은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직업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 서로 열렸을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설교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레오바고’ 광장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아테나 여신을 섬기는 웅장하고 화려한 파르테논 신전이 서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신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신전 앞에서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의 한 유대인이 감히 신전과 아테나 여신을 향해서 도발(挑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터키에 성지 순례를 갔을 때, 미국에서 간 몇 사람들과 한국에서 온 분들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한 야외 극장을 보았습니다. 약 1/3 정도는 파괴된 상태로 있었지만, 상당한 규모의 극장이었습니다. 어떻게 설계를 했는지 음향이 마치 마이크를 댄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곳에서 에베소 시민들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사도행전 19:28)!” 하고 외쳤을 때 그 소리가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이 극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고 여전히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찬양을 시작할 때는 저의 목소리도 떨리고 저의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괜찮아져서 끝까지 찬양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셋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27절). 우리의 삶 속에 어느 것 하나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BC 6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시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28절) 아테네 시민 여러분의 삶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바울은 BC 3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28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많은 신상들처럼, 하나님은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 이런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았을까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할 때 배웠을까요? 아니면 고향 다소에서 은둔하고 있을 때 이런 소양을 길렀을까요? 언제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의 인문학적인 소양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크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경만 알면 돼!" 하면서 그 밖의 것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시대에는 인문학적인 소양이 더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그 밖의 소양들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지금 그런 소양들을 길러 놓으면 언젠가는 그것들이 복음을 전하고 설명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때가 반드시 옵니다.
넷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30절) 아테네 시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들이 세계에서 최고의 시민들이라는 지적인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아테네 시민들에게 바울은 과거 하나님을 몰라 우상을 섬겼던 삶을 회개하라고,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라고 촉구합니다.
다섯째로, 지금까지 아테네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한 사람을 시켜 온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이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31절)”라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이시라는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을 때,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테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해 바울을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부활하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고린도전서 1:23) 여기서 이방인이란 주로 그리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철학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nonsense’였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당신 말을 다시 들어보겠다고 하면서 ‘아레오바고’를 떠났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은 ‘nonsense’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는 인본주의적인 종교가 되고 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믿고 받아들일 때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가 됩니다. 부활의 메시지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은 냉소적으로 변했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ris), 그리고, 몇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날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아테네 시내에 다마리스의 이름을 딴 "Odos Damareos"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다마리스는 평생 자선사업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박해시대에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녀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좋겠지만, 어떤 때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귀한 때가 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그런 경우입니다.
8/8/2021 | 예루살렘 회의
부활절이 지나고(16)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5:1-6
오늘 설교의 소제목은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예루살렘에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모두 참석했고, 바울과 바나바가 참석했고요. 문제를 제기한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이 회의를 ‘예루살렘 공의회(The Council of Jerusalem)’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교회 역사가들은 서기 325년에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니케아(Nicaea)’에서 열린 회의를 ‘제1차 니케아 공의회(The First Council of Nicaea)’라고 합니다. ‘니케아’는 지금 터키에 있는 ‘이즈니크(Iznik)’입니다.
여러분, ‘니케아 공의회’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이 공의회를 주최한 사람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4-337) 황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 안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통치자의 입장에서 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다룬 중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the divine nature)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the human nature)에는 문제가 없으나 아리우스(Arius, 256-336)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키가 크고 군살이 없는 몸매에, 준수한 용모와 공손한 말투를 썼고, 여자들은 그의 정중한 예의와 금욕적인 외모에 감동했고, 남자들은 그의 지적 탁월함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안디옥에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늘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아들은 창조물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같지도 않고 원래 그는 아버지의 진정한 말씀이나 진정한 지혜가 아니며,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써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냥 말씀과 지혜 자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에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는 말씀이 아버지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지도 못하며, 그를 제대로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리우스의 이런 주장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폭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정통신앙을 변호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역시 서기 300년경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로부터 크리스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철학과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청년시절에 종종 광야로 나가 수도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말씀과 엄격한 규율과 삶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논리가 치밀했거나, 그의 스타일이 우아했거나, 정치적 술수에 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신념과 신앙에 따라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철저한 신앙생활, 사람들 속에 뿌리박은 신념, 그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원칙 등이 아타나시우스를 누구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서기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 모두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습니다.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에서 온 감독들이었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에서는 6명만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회의 장소인 니케아까지 가는 길이 멀고, 또 그리스어를 잘 몰라 참석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18명 중에 알렉산더 감독을 비롯해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감독들이 약 2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감독들도 이와 비슷하게 약 28명 정도였고, 나머지 감독들은 대부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양측이 잘 타협하겠지!” 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 때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 감독의 보좌관 자격으로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장로였기 때문에 공의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달에 걸쳐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했던 감독들이 차츰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에 가담하게 되어 투표에 붙인 결과 2명의 감독을 제외한 316명의 감독들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쪽에 투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감독들은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를 발표합니다.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begotten from the Father before all ages,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the same essence as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신 중의 신이며 빛 중의 빛이고, 참 신 중의 참 신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었으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입니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니케아 공의회의 진행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그 회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를 보면서 “만약 그 회의에 언변이 뛰어났던 아리우스가 참석했더라면 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그 회의에서 아리우스가 자기 주장을 조리 있게 설명해서 감독들을 설득했더라면, 회의 결과가 뒤집혔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금과 다른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서기 1세기의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한 회의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는 이 회의를 생각하면서 ‘니케아 공의회’를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회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이 회의의 안건은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안디옥 교회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 몇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안디옥 교회 소식이 전해졌지만, 바리새파 출신이었던 이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의 그런 행동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들의 눈에는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식사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그들의 옷차림과 말투도 못마땅했습니다.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형제로,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런 사람들에게는 먼저 율법 교육부터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문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면서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야기를 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모든 형제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했습니다(3절).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누가는 필요한 것 같지 않은 이런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누가가 이런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는 지금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선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베니게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신자들(크리스천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해외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의 ‘열린 마음(open mind)’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이곳 보스턴에 와서 사시는 여러분들, 그리고 유학생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열린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이 열린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서 크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 말씀을 통해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참석할 예루살렘 회의에 대한 전망(展望)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 회의에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희망적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의 환영을 받았습니다(4절).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회의가 열렸습니다. 먼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안디옥 교회의 사역을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고했습니다. 두 사람의 보고가 끝나자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은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토론(a long discussion)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교회를 세우겠다(마태복음 16:18)”라고 약속한 사람 아닙니까? 베드로의 존재감과 무게는 사도들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여러분,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로 모두 피난을 갔는데, 왜 예루살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 교회에 대표적인 지도자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이고,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제자 요한입니다. 갈라디아서 2:9에 보면 ‘James, Peter, and John, who were known as pillars of the church(교회의 기둥으로 알려진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쉽사리 예루살렘 교회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중에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이어 야고보가 베드로의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발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9절).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우리 사도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신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모두 질 수 없었던 짐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지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십니까?” (10절)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잠잠해졌습니다(12절). 더 이상 어떤 반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포석을 깐다’ 혹은 ‘복선을 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일들을 대비해서 미리 조금씩 힌트를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복선을 까는 데 천재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에 처음부터 마음이 열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몇 차례에 걸쳐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경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경험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포석을 깔아 두신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보자기 환상(a vision of a large sheet)’과 이어지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Cornelius, a Roman centurion)의 집을 방문했던 일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내가 왜 이방 사람의 집을 방문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안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0:34) 이 모든 일들은 이방인 선교를 위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깔아 놓으신 정교한 포석이었습니다.
8/1/2021 | 교회의 모델 안디옥 교회
부활절이 지나고(15)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3:1-3
오늘은 이방인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누가 자신이 안디옥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지성인이었고, 역사 의식이 뛰어났던 누가는 안디옥 교회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생생하게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디옥(Antioch)’은 시리아(Syria)에 있는 안디옥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시리아에 속해 있었지만, 현재는 터키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안디옥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그 당시 주요 교통 수단이었던 배를 통한 이동(移動)이 용이했던 도시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의 3대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안디옥은 지정학적인 위치상 그리스(헬라) 문화와 동양의 문화가 서로 교차하는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에 박해를 피해 온 많은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확인할 때,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계획하신 일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주 전에 하나님의 관심은 ‘모이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를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안디옥 교회를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outpost)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열왕기하 19:31, 이사야 9:7, 37:32)”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The zeal of the LORD Almighty will accomplish this(NIV)” 혹은 “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NL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열심을 가지고 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흩으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열심을 가지고 추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열심이 성취되어 나가는 과정을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한번 돌아보세요. 예루살렘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필요에 따라 물건을 사용했습니다(사도행전 4:32, 34). 그들은 날마다 같이 모였습니다. 박해가 없던 때는 성전 뜰에 모였습니다(사도행전 2:36). 집집마다 서로 돌아가면서 식사를 하고, 주님의 성만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사도행전 2:46). 그 공동체 안에 끈끈한 ‘연대감(solidarity)’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이 공동체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흩어진 주님의 제자들은 어디든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안디옥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파견해서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을 알고, 고향 다소에 은둔해 있는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년 동안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킵니다. 그 때 이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붙은 이름이 ‘크리스천(Christians)’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섯 명의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외에 시므온(Simeon)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니게르(Nige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the black man(피부색이 검은 사람)’이라는 별명입니다. 이로 보아 시므온은 아프리카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구레네(Cyrene) 출신 루기오(Luciu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레네가 지금의 리비아에 속한 도시인 것을 감안하면, 루기오도 아프리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구레네에서 살다 온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나엔(Mana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이하게 마나엔은 헤롯 안티파스(King Herod Antipas)와 어렸을 때 친구라고 합니다.
이 지도자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일년 동안 집중적으로 양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연장자 순서로 세우거나 경험이 많은 순서 대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 중에서 세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으로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서론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왜,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이렇게 안디옥 교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가 안디옥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안디옥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동서 문화가 교차되는 요충지에 있는 안디옥 교회를 이방인 선교의 본부((headquarter)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안디옥에 수많은 인종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보스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화적으로나 도시의 구성원에서나 보스턴과 안디옥은 참 많이 닮았습니다. 보스턴은 수많은 인종들이 함께 사는 다문화, 다인종 도시입니다. 보스턴처럼 각 나라의 문화를 존중해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도시가 흔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교회가 위치한 케임브리지는 다인종 도시의 모델과 같은 도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스턴은 하나님의 선교적인 마인드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최고의 도시입니다. 요즘에 와서 ‘다인종 교회(multi-ethnic church)’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세워진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는 이미 ‘다인종교회’였습니다. 저는 보스턴에서 목회하면서 한국교회라는 담(barriers)을 넘지 못했습니다. 제가 못 넘은 이 담을 이제 다음 세대인 여러분들이 뛰어 넘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섯 명의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운 것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들은 모두 이방인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추진하려고 하면 먼저 지도자들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섯 명의 지도들 중에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사도행전 9:15에 이런 말씀이 있었잖아요? “사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선택한 나의 도구이다(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이제 바야흐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사울을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열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는 것은 사도행전을 읽는 큰 재미입니다.
셋째로, 안디옥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 분명한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 예배와 금식과 성령의 음성이 있습니다. 4절 말씀에는 금식이라는 말과 기도라는 말이 같이 나옵니다. 예배와 금식과 기도는 모두 교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입니다. 예배는 신자들이 같은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배가 매주 규칙적으로 열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예배를 소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 예배를 못 드리면 다음 주에 드리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금식(禁食, fasting)과 기도가 있습니다. 금식은 밥을 안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밥을 안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중요합니다. 금식은 식사를 끊음으로써 더욱 영적으로 민감(敏感)해지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안디옥 교회가 예배에 집중하고 금식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성령의 음성(a voice of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하고, 성경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령의 음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도 성령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답답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모를 때,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음성’은 우리에게 희생(sacrifice)을 요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혹은 ‘성령의 음성’은 반드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말은 나의 희생이 동반(同伴)되지 않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음성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넷째로, 그러면, 안디옥 교회가 들은 ‘성령의 음성’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여라.” (2절) 이 ‘성령의 음성’ 속에 희생이 들어 있습니까? “One day as these men were worshiping the Lord and fasting, the Holy Spirit said ‘Dedicate Barnabas and Saul for the special work to which I have called them.’” (New Living Translation) “While they were worshiping the Lord and fasting, the Holy Spirit said, ‘Set apart for me Barnabas and Saul for the work to which I have called them.’” (NIV) ‘set apart’라는 말은 바나바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시킬 수 있도록 따로 세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더 이상 너희 교회에 머물게 하지 말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내 놓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를 향한 ‘성령의 음성’은 안디옥 교회에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안디옥 교회가 더욱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시킬 수 있도록 두 사람을 ‘set apart’하라는 것이 안디옥 교회가 들은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안디옥 교회에 다섯 명의 지도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지도자들 중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가장 핵심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만약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번에 지도자들의 팀웍이 무너지고 지도력에 큰 공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것을 알았지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성령의 음성’은 반드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나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나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뿐만 아니라 제자의 삶 자체가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If any of you wants to be my follower,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가복음 9:23)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생각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모델과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운영하고 계신 분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대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outpost)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흩으셔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를 통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7/25/2021 | 바나바와 사울
부활절이 지나고(14)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9:26-31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사울(Saul)’이라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기록했습니다. 사울은 나중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고도 부르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Saul, also known as Paul,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이 말씀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쓰지 않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은 ‘asked for(묻다)’ ‘questioned for’ ‘prayed for’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이라는 이름에는 ‘small(작은)’ ‘humble(겸손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실제로 회심 후에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항상 겸손하게 낮췄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조산아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8-10) 이 말씀에서 ‘조산아(早産兒)’라는 말은 ‘제 때 나오지 않은 아이(one untimely born)’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사울은 극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가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만났다는 어떤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사울이 동시대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의 말 대로 그는 같은 또래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습니다(갈라디아서 1:14). 그는 유대교 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었고, 신앙적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많이 갖춘 사람이었습니다(빌립보서 3:4). 그는 부모를 잘 둔 덕분에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2:28). 그리고, 그는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아람어, 그리스어, 로마 말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사도행전 21:37). 그의 스승은 ‘가말리엘(Gamaliel)’이라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사도행전 22:3).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울을 가르친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소신이 있고, 진취적이고,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유대 공의회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심문할 때, 이 사람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실 수도 있다고 혼자 소신 발언을 했습니다. 저는 사울이 이런 스승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심 후에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빌립보서 3:7)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특권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의 성공을 보장해 주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worthless rubbish(가치 없는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모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일어난 변화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사울을 보세요. 그가 버렸다고 말하는 로마의 시민권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었던 그리스어나 로마말은 그가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그의 목숨을 구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공부했던 학문적인 성취는 그가 쓴 편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같은 성경은 얼마나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됩니까? 그가 버렸다고 했던 것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들이었지만, 회심 후에는 이것들이 복음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목적이 바뀌고, 우선 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사울이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시리아의 다메섹(Damascus)으로 가는 도중에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밖에 나가서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피했습니다. 회심을 해서 마음에는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하나님은 ‘요셉’이라는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요셉은 ‘바나바(Barnabas)’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에는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꼭 이름처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의 뜻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Barnabas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strong in faith).” (사도행전 11:24) 대부분의 성경들이 바나바를 가리켜 “Barnabas was a good man”이라고 했는데, GOD'S WORD® Translation에 보면 “Barnabas was a dependable man(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믿음이 좋다는 사람 중에 “He is a good man” 혹은 “He is a dependable man”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좋은데 평이 안 좋은 경우가 많고, 믿음은 좋은 것 같은데 어딘지 가까이하기에는 먼 사람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착하고, 신뢰할 수 있고,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를 사울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나바는 신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사울의 회심이 진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을 때, 바나나가 사울의 회심을 보증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좋은 사람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사울을 위해서 이런 바나바라는 사람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잘 배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면 언젠가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 날이 꼭 올 것입니다.
언젠가 사울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For Christ's love compels me., 고린도후서 5:14)”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빚을 진 사울은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그의 설교를 듣고 분노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사울을 그의 고향 다소(Tarsus)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당장에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향에 숨어 지내야 합니까? 그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은둔 생활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다시 바나바로 하여금 다소에 있는 사울을 불러내게 하십니다. 바나바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시리아의 ‘안디옥(Antioch)’으로 갔습니다(사도행전 11:25) 사울의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은 바나바를 보내서 사울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때로 우리의 앞길이 절망적이고 막막한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바나바’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We can make our own plans, but the Lord gives the right answer).” (잠언 16:1)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인생의 위기 때마다 바나바를 보내셨다는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바나바는 그 때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 박해를 피해 피난 온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들은 유대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정체 불명의 크리스천들이 안디옥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브로(Cyprus)와 구레네(Cyrene) 출신 사람들이라는 것 밖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보내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이야기가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련된 일인 것을 알게 되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맞습니까? 만일 그 때 바나바가 조사원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때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회 문을 닫았더라면, 오늘 우리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바나바의 눈에 비친 안디옥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사도행전 11:23).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동역자를 찾았습니다. 그 때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고향 다소에 내려가 있는 사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교회를 1년 간 섬겼습니다. 그 1년이라는 기간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때 ‘크리스천(Christians)’이라는 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 11:26에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들이다!” 하고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 안디옥 교회 신자들은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략(The Divine Conspiracy)’이라는 책을 쓴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희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주께서 명하신 바를 실천하는 길을 열어 줄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윌라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은 올바른 크리스천으로서 살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또 누가 한 말인지 한번 맞춰 보십시오. “Jesus, a man who was completely innocent, offered himself as a sacrifice for the good of others, including his enemies, and became the ransom of the world. It was a perfect act(예수님은 완전히 결백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심지어 원수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위한 대속물이 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행위였다.” 마하드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 인도)의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찬양했던 간디가 크리스천들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나는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와 너무 다르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사도행전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세상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달라스 윌라드의 말처럼 성경을 펴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롭게 읽고 배우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