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2021 |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다

부활절이 지나고(13)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8:1-4

성령 강림 후 이 땅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기고, 신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은 일은 예루살렘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9:31) 교회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하심이 있었고, 누구나 성령께서 이 공동체 안에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도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평안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안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폭풍전야(暴風前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청난 폭풍이 불기 전 날 밤이라는 뜻입니다. 그 전날 밤까지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엄청난 폭풍이 불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폭풍전야’를 영어로 ‘the calm before the storm’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아주 적절한 말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A great wave of persecution began that day, sweeping over the church in Jerusalem)(1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이란 스데반(Stephen)이 돌에 맞아 죽은 날을 말합니다. 유대인들, 특히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호시탐탐 교회를 박해할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스데반의 설교가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교회를 박해할 명분(名分)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의 무모함을 탓해야 할까요? 스데반은 자기가 맡은 구제 사역이나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밖에 나가서 설교를 하다가 화를 자초하게 되었을까요? 한 사람의 무모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습니다.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들 외에는 모두 박해를 피해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겨우 만들어진 신앙공공체가 이렇게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울(Saul)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Saul was one of the witnesses, and he agreed completely with the killing of Stephen). 사울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똑 같은 시각(視角)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스데반은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요. 사울은 그 때 그가 교회를 박해했던 일들을 두고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간증합니다. “한때는 저 역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습니다.” (사도행전 26:9-10)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울의 인생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사도행전 9:15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울은 이방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도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분의 삶을 반성해 보십시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다시 순교자 스데반에 대하여 생각해 볼까요? 얼핏 보기에는 스데반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박해의 명분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스데반의 설교가 아니었더라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또 다른 박해의 명분을 찾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교회를 운영하고 계시다면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고 평안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교회를 흩으려고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언제까지 평안을 누리며 한데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흩을 수 있는 방법이 박해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교회를 파괴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흩으신 것입니다.

몇 주 전에 ‘합킨톤 공원’에서 야외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설교 본문 말씀이 시편 95편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위대한 왕이십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도 그분의 것이며, 가장 높은 산들도 그분의 것입니다. 바다도 그분의 것입니다. 이는 주가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손으로 마른 땅도 지으셨습니다. 다 와서 엎드려 주를 경배합시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3-6절)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바다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마른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셨구나!” ‘마른 땅’은 ‘dry land’를 말합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황무지(the wastelands)’라고 나와 있습니다. 떨기나무(bush) 같은 것만 겨우 살 수 있는 황폐한 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마른 땅’을 만드셨을까요? ‘마른 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쓸 데 없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어보셨지요? “내가 빛을 만들고 어둠을 창조하였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이사야 45:7).” 빛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어둠이 있어야 합니까? 평화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재앙이 있어야 합니까? 좋은 일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절망이 있어야 하고 불행이 있어야 합니까? 그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application과 implication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을 읽고 application(적용)을 잘 해야 하지만, implication을 잘 찾아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와 원리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45장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함축적인 의미(implication)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 관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무의미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힘든 일이 있습니까? 절망적인 일이 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가 받은 박해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당시에는 아무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안디옥(Antioch in Syria)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으로 피신했습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교회를 흩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끝까지 나가 복음의 증인들로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의 연대감(solidarity)이 강했기 때문에 박해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신자들을 흩어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크리스천들을 찾아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충실했지만, 그가 했던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자들 사이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은 악명(惡名)이 높았습니다. 다메섹(Damascus)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Ananias)라는 주님의 제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9:13) 워낙 신자들 사이에 사울의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나중에 사울이 회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9:21). 

여러분, 이런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는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습니다(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ward me did not prove vain).” (고린도전서 15:9-10)

마지막으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흩어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But the believers who were scattered preached the Good News about Jesus wherever they went).” 교회는 언제까지 평안을 누리면서 함께 공동체의 삶을 누리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 공동체를 흩어지게 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The Gathered and Scattered Church(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선교 신학자 호켄다이크(Johannes Christiaan Hoekendijk, 1912-1975)가 ‘The Church Inside Out’이라는 그의 책에서 처음 쓴 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하면 ‘뒤집어지는 교회’입니다. 이 책이 1966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교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이 1979년에 우리나라에 ‘흩어지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호켄다이크가 이 책을 출판된 지 13년이 지난 후에 출판된 것입니다. 호켄다이크는 이 책에서 기존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뒤집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gathered church(모이는 교회)’에 있지 않고 ‘scattered church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연대감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말씀을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켄다이크가 말하는 ‘사도적인 교회(the apostolic church)’ 다시 말하면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Ite, missa est(이테, 미사 에스트).” 카톨릭 교회에서 미사를 마친 후에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Go, you have been dismissed”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미사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Go, it is the sending [dismissal]!”이라는 뜻입니다. 미사는 끝이 났지만, 이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내보낸다는 말입니다. 사제가 이렇게 말하면 신자들은 “Deo gratias (Thanks be to God)!”라고 화답합니다. 나를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주심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교회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드라마틱합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똑 같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이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 드리는 이유는 흩어져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7/11/2021 | 사역의 우선순위를 정하다

부활절이 지나고(12)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6:1-7

옛 말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이롭거나 친근한쪽으로 마음이 쏠리기 쉽다는 뜻입니다, 또 비슷한 말로 “가재는 게 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 편이 되어 서로 사정을 봐 준다는 뜻입니다. 영어에는 ‘favorit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편애(偏愛)라는 말인데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치우치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신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구제 사역(긍휼사역)을 하는 중에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본토 유대인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차별한 것입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인데, 이 사람들은 몇 달 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순례를 왔다가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음식이 제 때에 공급이 되는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제 때 공급이 안 되고 소홀하게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교회를 운영하시고, 신자들이 물건을 함께 사용할 정도로 네 것 내 것이 없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했다고 해도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우리의 본성(nature)이 단번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완전히 변화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과 시행착오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성화의 과정(the process of sanct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일컫는 것입니다.

카톨릭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ce does not destroy nature, but perfects it).” 그가 쓴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 ‘인간’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3부로 되어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3부 ‘예수 그리스도’를 다 마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제자가 3부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아주 타락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은혜)이 인간의 본성을 온전하게 만들어간다고 보았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 많은 신자들이 모였지만, 그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그들도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별을 받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폴린 필립스(Pauline Phillips, 1918-2013)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비가일 밴 뷰렌(Abigail Van Buren)이라는 펜 네임으로 잘 알려진 분인데요.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church is a hospital for sinners, not a museum for saints(교회는 성자들을 위한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병원입니다).” 박물관에 가 보면 진열장 안에 오래 된 진귀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나 이런 사람이예요” 하면서 자기를 과시하지만 진열장에 들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처럼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성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모인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으나, 환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마태복음 9:12)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셨습니다. 의사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말씀이 교회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문제가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편애와 차별의 문제가 생겼을 때, 사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열 두 사도들이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라는 말은 사도들 외에 일반 교인들을 말합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받은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2-4절)

여러분, 사도들의 말은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교회의 정체성(identity)과 관계된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교회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마가복음 11: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이사야 56:7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을 둘러보셨을 때, 성전 안에서 비둘기를 팔고, 소와 양을 팔고, 외국 돈을 환전(換錢)해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 모습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장사꾼들처럼 보였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그곳을 ‘도둑들의 소굴’ 같다고 하셨겠습니까? 기도는 현실의 삶에서 염려와 근심을 가진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이기는(over¬come) 것입니다. 성전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어떻습니까?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병자와 앓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4:23)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즉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 가르치는 사역, 그리고 치유하는 사역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 정체성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정체성을 상실한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00년 전에 사도들이 교회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과부들’이 차별을 받은 것입니다. “The Greek-speaking believers complained about the Hebrew-speaking believers, saying that their widows were being discriminated against in the daily distribution of food.” (New Living Translation)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discrimination(차별)’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들이 기도 사역과 말씀 사역이 중요하다고 선언한 것은 음식을 배급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application’이라는 말이 있고 ‘implic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application’은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한다는 뜻이고, ‘implication’이라는 말은 그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폭 넓게 해석해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초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폭 넓게 해석해 보면, 말씀 사역과 봉사 사역(긍휼사역)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사역이 중요하냐 봉사 사역이 중요하냐 하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교인들의 수가 많이 늘었습니다. 일할 사람들이 부족하다 보니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차별받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양보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까요? 교인들의 수가 늘고 일할 사람들이 부족하면 사도들도 그 일에 매달려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일 그 때 사도들까지 모두 음식 배급하는 일에 매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교회는 기도 사역과 말씀 사역을 소홀하게 하게 되고, 교회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면 일반 자선단체와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일반 자선 단체와 다릅니다. 자선 단체는 선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Do you have the gift of speaking? Then speak as though God himself were speaking through you. Do you have the gift of helping others? Do it with all the strength and energy that God supplies. Then everything you do will bring glory to God through Jesus Christ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이 말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돕는 은사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당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1)

교회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받은 사람(men who are well respected and ar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3절)’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men who are full of faith and the Holy Spirit, 5절)’ 일곱 사람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시 한번 교회의 긍휼사역이 어떤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을 선정하는 기준이 특별합니다. 일반 자선 단체에서는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뽑았습니다. 크리스천의 봉사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정된 일곱 사람들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인으로 개종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입니다. 모두 믿음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church gave them this responsibility and the apostles could spend their time in prayer and teaching the word(교회는 이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맡겼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3-4절) 이 얼마나 지혜로운 결정입니까?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생긴 ‘차별’ 문제도 해결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도 지혜롭게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 떼 선정된 일곱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 한 사람, ‘스데반(Stephen)’이라는 사람이 눈에 띕니다. ‘스데반’은 교회 역사 상 최초로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해서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일을 위해서 선정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스데반’은 밖에 나가서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다가 순교까지 하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 전체가 ‘스데반’이 그 때 했던 설교입니다. 그는 거침없이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이 메시아를 죽였다고 유대인들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화가 난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왜 그랬을까요? 

저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평신도와 사도들의 사역의 경계가 상당히 유동적(flexible)이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사도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일곱 사람 중 하나인 ‘빌립’도 그랬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설교는 사도들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목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일들이 목사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새 시대의 교회에는 맞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평신도들의 역량(力量)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좀더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교회를 위한 엄청난 자산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4/2021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활절이 지나고(11)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3:1-10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각자 필요한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아무도 부족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공동체 안에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사도행전 2:43). 여기서 두려운 마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에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공동체마다 평안하였고, 그 안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갔습니다(9:31).

그런 중에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를 합니다. 사도들은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기도 시간이 되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는 그날 기도 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일은 매일 일상처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문은 ‘미문(아름다운 문, the beautiful gate)’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문’ 앞에 늘 한 걷지 못하는 사람이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이가 40세가량 되었고(사도행전 (4:22), 부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집에서 쫓겨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지체 부자유자가 태어나는 것을 집안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로 이런 사람이 태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날마다 제 시간에 이 사람을 성전 문 앞에 갔다 놓았습니다(3: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they ap-proached the Temple, a man lame from birth was being carried in. Each day he was put beside the Temple gate, so he could beg from the people going into the Temple.” 여러분, 이 말씀에서 이 사람의 비인간적인 불행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물건을 운반해서 그 자리에 놓아두듯이, 사람들은 이 사람을 성전 문 앞에 갔다 놓았습니다. 해가 저물면 또 어디론가 이 사람을 데려다 놓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서 구걸을 했기 때문에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 때 두 사도는 이 사람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은 주목(注目)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eter and John looked at him intently.” ‘intently’라는 말에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in a firmly or steadfastly fixed or directed way, as with the eyes, ears, or mind(눈이나 귀, 마음을 대상에게 확고하게 고정해서)’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in a fully engaged or determined way that shows strength of purpose(강한 목적을 가지고 대상에게 완전히 결정적인 방법으로 관계해서)’라는 뜻입니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두 사도가 이 사람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아, 이 사람, 날마나 여기 앉아서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로구나!” 그날 두 사도가 이 사람을 바라보았던 시선(視線)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셨던 바로 그 시선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because He knew all people) 자기 자신을 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for he knew what was in man), 사람에 대해서 어느 누구의 증언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24-25)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두 사도가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 사람을 바라보았을 때, 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이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불행한 삶을 한 눈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이 사람의 불행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떳떳하게 한 가족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이 사람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미문’ 앞에서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 (누가복음 19:9-1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Jericho)에 살고 있던 삭개오라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목자들이 양을 키울 때 낮에는 풀을 찾아다니면서 풀을 먹이고, 저녁에는 양의 우리(fold)에 양들을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을 때 양의 수를 셉니다. 이 때 수가 모자라면 그 모자라는 양을 ‘잃어버린 양(the lost sheep)’이라고 합니다. 이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값을 물어내야 했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양’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길을 헤매고 있는지, 아니면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 먹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난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입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이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경멸의 대상이 되는 사람,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 이런 사람이 ‘잃어버린 사람(the lost man)’입니다.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사람, 이 사람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영국)은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한 그는, 붙잡혀 노예선에서 15개월 동안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다가 파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 독일)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을 읽고 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됩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찬송시를 써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나는 한 때 길을 잃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구원받았네. 나는 한 때 눈이 멀었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네).” 이 가사에서 뉴턴은 그가 한 때 목자를 잃어버린 양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사도는 이 사람에게 “우리를 보시오(Look at us)!”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뭔가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4-6절)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와!”하는 함성과 함께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어 두 사도를 에워쌌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꼭 붙들고는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베드로와 요한을 보러 ‘솔로몬 행각’이라 부르는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Peter saw his opportunity and addressed the crowd).” (사도행전 3:11)

이 모든 일은 성령께서 주도하고 계셨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이 불행한 사람이 걷게 된 일은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이 사람이 걷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이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3:12, 1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by faith in the name of Jesus)’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 네델란드)이 쓴 ‘예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1989)’라는 책이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한 책(Reflections on Christian Leadership)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깐 책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책에서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하여 세 가지 리더십을 말하면서 크리스천 리더들이 현실적이고, 유능하고, 멋있고, 능력있는 리더가 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나우웬은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은 첫째로 기도하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우웬은 현실 지향적인 목사들의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목사들은 목회 현장에서 당장에 필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능한 목사가 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영혼을 섬기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들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힘과 권위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리더는 예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고,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생명을 찾고 또 풍성히 찾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따르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들이 다른 사람을 인도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자신도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람이 걸을 수 있지? 말도 안 돼!”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그 대신 “오늘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지?” 하고 물어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이 사람이 걷게 된 것은 그동안 소외되었던 삶에서부터 공동체 안의 삶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제일 먼저 들어갔던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성전이었습니다(8절). 성경은 이 말씀을 통해서 이제 이 사람이 하나님 백성들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온전하게 회복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을 회복시켰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것이 헨리 나우웬이 말하는 영혼을 돌보는 리더십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놀라움 자체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두려워했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퍼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이 큰 표적을 행한 것을 알고 있소.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소. 하지만 이 일이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예수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경고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불러 절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다시 공의회 안으로 불러들여서 매질을 한 후에,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고 놓아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오히려 기뻐하면서 공의회를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4:16-18, 5:40-41)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헨리 나우웬이 말한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이 하나의 해답을 주지 않을까요? 우리는 기도하는 리더십, 영혼을 섬기는 리더십,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리더십을 이해하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력감에 빠진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의 현실적이고 유능하고 힘 있는 리더십이 아니라, 헨리 나우웬이 말한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 리더십이 있어야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6/27/2021 | 야외예배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 We Are The Flock Under His Care

시편 95:1-7

거의 일 년 반 만에 이렇게 야외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씨가 좀 덥기는 하지만, 그래도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니까 숨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맞은편 나무 숲에서 모였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서 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큰 아름드리 나무들을 키우려면 100년도 넘게 걸릴 텐데 왜 모두 베어버렸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95편 말씀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이 시편도 다윗이 썼을 것 같은데, 다윗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록 무명의 저자이지만, 이 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쓴 시편 한 절 한 절 속에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실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서기 51년경,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에 가서 설교할 때, 그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세계 모든 인류를 만들어 땅 위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4-28)

바울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지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직접 관계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28절)” 셋째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시편을 쓴 사미스트(저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1절).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1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하십시오(Speak to one another with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 and make music in your heart to the Lord).”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서로서로 옆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인정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시편 100편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go into his courts with praise)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의 대문을 열어야 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뜰(courts)을 밟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미스트는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절)”고 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오랫동안 목회하고 설교하면서 얻은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 이것만 제대로 알면 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 잘 알고 지키면 충분합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감동적인 영상(https://youtu.be/Fe-6SRwMdWs)을 보았습니다. 2018년에 제작한 이 영상에 고양이 한 마리가 한 남자의 어깨 위에 올라가 얼굴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고 있고, 이 남자는 고양이의 행동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남자는 미국 캘리포니아 페어뷰 밸리(Fairview Valley)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라이언 콜먼(Ryan Coleman)이라는 사람입니다. 콜먼은 2018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 진화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화재로 80명이 숨졌고, 건물, 가옥 1만1천여 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산불 진화를 위해 현장에 투입된 콜먼은 우연히 불길에 갇혀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구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자신을 구해준 콜먼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목에 올라타서 온몸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화재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이 고양이는 줄곧 콜먼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콜먼은 이 동영상을 찍어 자기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무려 170만 번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고, 약 33,000명이 이 동영상을 공유했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을 구해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이 고양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의 여물통을 알지만, 이스라엘은 제 주인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Even an ox knows its owner, and a donkey recognizes its master’s care - but Israel doesn’t know its master. My people don’t recognize my care for them.” (이사야 1:3)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지으셨고, 지금도 나의 삶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그 목적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런 삶을 통해서 삶의 의미(意味)를 발견합니다. 

둘째로, 사미스트는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이 기르시는 양 떼들입니다(7절)”라고 고백합니다. 이 사미스트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잘 아는 다윗 역시 탁월한 사미스트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 다윗이 쓴 시편이 무려 73편이나 있습니다. 시편 전체가 150편이니까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편을 다윗이 쓴 것입니다. 참 대단합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2절) 예수님도 자신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요한복음 10:10) 

7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이 기르시는 앙떼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장을 떠나서는 살 수 없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내 멋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장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장에서 풀을 뜯고, 하나님의 목장에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를 기르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우리는 그 목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이제 좀 잡혀가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은 계속해서 경고를 하고 있지만, 점점 일상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매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다니고, 레스토랑에 가도 제법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우리 교회도 다음 주부터는 사전 등록을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매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 다과도 9월부터나 시작하려고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우리가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적으로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았습니다. 과학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21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3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때는 최소 5,000만명에서 최대 1억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불과 100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이 발달했고, 인간의 지식이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으로 여전히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시편 95편 오늘 본문 말씀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7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어에 ‘쉐마(shema)’라는 말이 있습니다. ‘듣는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hear’입니다. 그런데 ‘쉐마’라는 히브리 말에는 ‘hear and do or obeying(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번역된 영어 성경에서는 ‘쉐마’를 ‘listen’이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단한 존재들이 아니라,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붙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Yes,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Those who remain in me, and I in them, will produce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NLT).” (요한복음 15:5)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고 마지막에 “귀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 축복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준 선물입니다. 오늘 이 야외예배가 이 축복을 기뻐하고 같이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6/20/2021 | 최초의 신앙 공동체

부활절이 지나고(10)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2:40-47

지난 두 주에 걸쳐 ‘성령의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보혜사’, ‘파라클레이토스(παράκλητος)’라는 말입니다. 항상 우리 ‘곁에서(be¬side)’ ‘Advocate(편을 들어주는 자)’ ‘Comforter(위로를 주는 자)’ ‘Encourager(격려하는 자)’ ‘Counselor(조언을 해 주는 자)’ ‘Helper(도와주는 자)’ ‘Strengthener(능력을 주는 자), ‘Intercessor(중보자)’로 일하고 계십니다. 신자의 삶은 의지할 곳 없이 세상에 버려진 ‘고아’와 같은 삶이 아니라 항상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in us)’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7). 

문제는 어떻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느끼고 알아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인 음성(the inner voice of the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울 곁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라. 너는 로마에서 나를 증거할 사람이다(사도행전 23:11)”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이 바로 ‘성령의 내적인 음성’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내적인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로마서 8:16) ‘우리의 영과 함께’라는 말은 ‘with our spirit’ 혹은 ‘together with our spirit’이라는 말입니다. Douay-Rheims Bible에 이 말이 “For the Spirit himself gives testimony to our spirit, that we are the sons of God”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라는 말은 쉽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생각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인 음성’입니다.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가 전쟁에 참가하게 된 것은 13살 때 들은 하나님의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녁종이 울릴 무렵, 집 앞에 있는 마을교회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밝은 빛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후 프랑스의 위기가 깊어 가면서 그 음성들이 더 자주 들려왔고, 열 여섯 살 되던 때에는 구체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잔 다르크’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사실인지를 검증하는 심문이 열렸습니다. 한 심문관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데 왜 굳이 너를 보내 병력을 요구하시는 것이냐?” 그러자 ‘잔 다르크’는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전투는 프랑스의 아들들이 치르지만 승리는 그분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결국 영국 군에게 체포됩니다. 감옥을 지키는 영국군의 간수가 넌지시 ‘잔 다르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텐데, 너에게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이유가 무엇이냐?” 이 말에 ‘잔 다르크’는 “당신은 한번이라도 저녁 때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한 적이 있느냐?” 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보세요.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사도행전 2:44-45) 또 사도행전 4:32, 3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다 한마음과 한 정신으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그들 중에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또 “이건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는 사회 통제를 통하여 사유 재산을 금지하고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한다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주장한 사상입니다. ‘공산주의’의 핵심 주장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과 그와 동시대 사람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의 영향을 받아 역사는 계급투쟁을 통해 발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투쟁은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bourgeois)’와 피지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와의 투쟁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 투쟁 과정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게 되어 멸망하고 그 자리에 ‘사회주의’ 체제가 등장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적(過渡期的)인 경제 체제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유대인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대교 랍비였고, 아버지는 루터교로 개종한 변호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자유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고, ‘카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자유적인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마르크스’가 법학 외에 다른 학문에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는 그를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시켰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베를린 대학에서도 법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역사, 경제, 사회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베를린 대학은 ‘헤겔(Hegel)’이 오랫동안 교수로 있던 곳이어서 ‘마르크스’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척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상의 아이디어를 성경 사도행전에서 얻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히 종교적인 면에서도 유대교에서 루터교회로 개종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자기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공동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최초의 신앙공동체에 대한 반응은 “어?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게 어디 있어?” 이런 반응과 “어?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고? 이건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이런 반응입니다. 충분히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형성 과정을 보면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됩니다. 그리고, 외견상 이 공동체가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사용하셔서 듣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을 붙잡고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형제들이여,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Brothers, what should we do)?” (사도행전 2:37)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사도행전 2:38-39)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날, 믿은 사람의 수는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공동체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시편133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See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and sisters live together in harmony)!”(GOD'S WORD® Translation) 순례자들이 예배드리기 위하여 성소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다윗이 지은 시편(노래)입니다. 이 노래 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출현에 대하여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기 땅을 판 돈에서 얼마를 떼어 몰래 숨겨 놓고, 나머지만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을 팔아 받은 돈 가운데 얼마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그대의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소? 그런데 어찌하여 성령을 속일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You lied to the Holy Spirit..... You weren't lying to us but to God)”(사도행전 5:3-4) 결국 성령을 속인 일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갖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신앙공동체 운동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성령께서 주도(主導)하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Now to each one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is given for the common good).”(고린도전서 12:7)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사역 중의 하나가 ‘공동(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 이런 게 어디 있어?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한다고? 그리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준다고? 이거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맞습니다.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공동체의 모습이 공산주의에서 추구하는 공동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달라요. 공산주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상적인 경제 사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멸망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인간의 죄성,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간과(看過)하고 그것을 물리적인 힘으로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실패합니다.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사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우리를 거듭하게 하시기 전에는 어떤 공동체 실험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다 한마음과 한 정신으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사도행전 4:32) “집집마다 돌아가며 함께 모여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2:46-47)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교제가 있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음식을 같이 나누고 주님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칭찬이 잇달았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사도행전 9:31)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the church throughout Judea and Galilee and Samaria enjoyed peace [without persecution], being built up [in wisdom, virtue, and faith]; and walking in the fear of the Lord and in the comfort and encouragement of the Holy Spirit, it continued to grow [in numbers].”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고린도전서 말씀만 읽어 보더라도 교회 안에 벌써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케임브리지 교회 공동체가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우리 속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내고, ‘공동의 선(the common good)’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