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9/26/2021 |
들꽃이 주는 교훈 Lessons From Wildflowers
마태복음 6:25-33
오늘로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설교 시리즈 마지막 설교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Sermon of the mountain)’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매슬로우(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1951년에서 1969까지 브랜다이스(Brandeis)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인간의 ‘욕구의 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지금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맨 밑에 생리적인 욕구(physiological)가 있고, 그 위에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가 있고, 그 위에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love/belonging)가 있고, 존중을 받고자 하는 욕구(esteem)가 있고, 맨 위에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self-actualization)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맨 아래 단계가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로, 그 단계가 충족되면 또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맨 밑에 있는 ‘생리적 단계’가 바로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합니다. 염려와 걱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두 가지 삶의 양식(modes)을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삶의 양식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살기 위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늘 불안하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떠나지 않는 삶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Isn't life more important than food, and your body more important than clothing)?” (25절) 누가 이걸 모르겠습니까? 음식이나 옷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목숨(생명)이 먹는 것이나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면 자신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맞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6:26, 마가복음 8:36, 누가복음 9:25)”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Life is not measured by how much you own, 누가복음 12: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유를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의 양식은 결국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0-32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들(those who have little faith)’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믿음이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 번째 삶의 양식은 삶의 목적을 잘못 설정하고 소유를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두 번째 삶의 양식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나 들에 피어 있는 꽃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새들은 씨앗을 심지도 않고, 먹을 것을 거둬들이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두지도 않습니다. 들에 핀 백합꽃은 옷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습니다. 랍비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사슴이 무화과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고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 없이 먹고 산다.”
예수님은 백합꽃이 입은 옷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새나 꽃들은 그들의 목숨(생명)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依存)하고 살아갑니다. 새나 꽃은 그들의 생명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살기 때문에, 먹을 것이나 입을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와 꽃들은 소유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나무에 열매들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오는 대로, 비가 적게 오면 적게 오는 대로, 날씨가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들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갑니다. 백합꽃이 입은 옷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는, 백합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옷을 입고 있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어 주신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와 명예와 지위를 자랑하는 사람이 만든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삶의 양식에 대하여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Chitrangada Sharan이라는 분이 ‘들꽃(wildflowers)’에 대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정원에서 잘 가꿔진 꽃의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런데 가끔은 들꽃들이 눈길을 끈다. 돌보는 사람도 없고, 물을 주는 사람도 없고, 관리를 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저런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저런 예쁜 꽃들을 피우는지, 들꽃들의 자태와 아름다운 색깔을 볼 때마다 경이(驚異)롭기만 하다. 들꽃처럼 우리도 스스로 어떤 환경에서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하겠지만......” 이 글을 쓰신 분은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들꽃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경이롭게 느껴진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들꽃의 아름다움은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살아가는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이름 없는 새들과 이름 없는 들꽃이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참새와 물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새야, 저 아래 땅 위에서 힘없이 걷고 있는 인간들을 좀 봐. 인간들은 왜 저렇게 염려하고 근심하는지 모르겠어. 참 이상하지 않니?”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참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우리처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가 봐!” 비록 어린 아이들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 감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0, 32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말이 26절에는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 때에 공급해 주십니다. 창세기 22:14에 나오는 ‘여호와이레(Yahweh-Yireh’라는 말이 이 말 아닙니까? “The LORD will provide(주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Where God guides, He provides(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그곳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광야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었습니까? 물과 옷과 신발과 음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생활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지난 사십 년 동안, 우리들의 옷은 해어지지 않았고, 발도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8: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양식의 삶에 대해서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삶의 양식은 삶의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는 삶의 방식입니다. 보세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이 말씀이 English Standard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하여 질 것이다).” 이 말씀에서 가장 강조되는 말은 ‘먼저(first)’라는 말과 “더하여 질 것이다(will be added)”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 줄 알고 그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매달리는 삶에는 항상 염려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은 곧 우리의 생명을 위하는 일입니다. 이런 삶에는 걱정과 근심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렇게 우선 순위를 정해 놓고 이 우선 순위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이 모든 것들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하면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하면서 테이블 밑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꺼내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항아리 안에 주먹 만한 돌을 하나씩 넣었습니다. 돌이 가득 차자,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일제히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강사는 “정말입니까?”라고 되묻고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작은 자갈을 한 움큼 꺼내어 항아리에 집어넣고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자갈이 큰 돌멩이 사이에 난 틈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자갈이 가득 차자 강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그러자 학생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그러자 강사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를 한 움큼 집어 항아리 위에 놓고 항아리를 흔들었더니 돌멩이와 자갈 사이의 빈틈으로 모래가 들어갔습니다. “이제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학생들이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강사는 웃으면서 물 주전자를 꺼내어 물을 항아리에 붓자 항아리에 물이 스며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 학생이 번쩍 손을 들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삶이 아무리 바빠도 사이사이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실험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선 순위에 대한 중요성입니다. 만약 맨 처음에 큰 돌을 넣지 않고 먼저 자갈이나 모래를 넣었다면, 큰 돌은 넣지 못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일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바로 잡히면 염려와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은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이 삶의 우선 순서가 뒤바뀌면 우리는 다시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싸이게 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크리스천의 삶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유명하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사무엘하 7:8-9). 다윗도 그렇고 요셉도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게 해 주셨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이삭이 부자가 되려고 애쓴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거부(巨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창세기 26:12-14, 열왕기상 3:12-13). 크리스천은 높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낮은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마태복음 20:26-27, 마가복음 10:43-44).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양식을 여러분의 삶의 방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9/19/2021 |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시편 121편
오늘 읽은 시편 121편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시편입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시편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그 용도가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이 시편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유월절 같은 큰 명절에는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가면서 제물로 드린 양들을 어깨에 메고 갑니다. 고된 순례의 길이지만, 여기 저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만나면 이 시편을 같이 노래했습니다.
이 시편은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움(help)’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속에 나는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한자에서 사람을 뜻하는 ‘인(人)’자의 모양이 한 사람은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떠받쳐주는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 기댈 사람이 필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팬데믹의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소중한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친구가 필요하고, 함께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고, 함께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프랑스와 핀란드의 축구 경기가 있었습니다. 관중이 꽉 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 “저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우리 모두에게는 저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자기 편을 응원하고, 소리 지르고, 함께 웃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다가 이런 말씀을 읽었습니다. “The Lord is greater than the giants you face(주님은 당신이 만나는 거인들보다 더 위대하시다).” (요한일서 4:4) 그래서 정말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The one who is in you is greater than the one who is in the world(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자보다 위대한 분이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했을 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알았습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무서운 거인보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더 위대하신 분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If God is for us, who can ever be against us)?” (로마서 8:31)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이 이미 구약 성경 시편 118:6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The Lord is for me, so I will have no fear. What can mere people do to me)?” 이 시편에 나오는 말씀이 다윗에게 전해졌고, 예수님의 제자 요한에게 전해졌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 앞에 서 있는 무서운 자이언트를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을 보면 저 산에 신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삼각산이나 북한산, 계룡산에 가 보면 각종 신들을 섬기는 제단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했던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조상 때부터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We Samaritans claim it is here at Mount Gerizim, where our ancestors worshiped).” (요한복음 4:20)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 산들로부터 나의 도움이 온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1-2절) 이 시편을 쓰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진 분이 틀림없습니다. ‘나의 도움(my help)’이라는 말은 그가 개인적으로 도움을 경험했던 출처(source)를 말합니다. 이 시편을 쓰신 분은 그 도움의 출처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 하나님이 바로 ‘나의 도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믿는다면, 어렵고, 힘들고, 절망적인 일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실제적인 믿음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가 ‘보혜사’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희랍어 ‘파라클레이토스(παράκλητος)’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말 속에 ‘안위하다’, 훈계하다’, ‘권고하다’, ‘격려하다’, ‘도와주다’ 등 다양한 뜻이 있어서 어느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族)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들은 ‘우리 영혼에 따뜻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아이보리 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분’이라고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근심과 걱정에 싸이고, 마음이 불안해질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이 때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그의 통제 밑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이 말 대로 실천해 보시지요. 마음이 흩어지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여러분의 마음을 꽉 동여매서 성령께서 통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나오는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은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He will not let you stumble).” (3절) 원래 이 ‘stumble’이란 말은 무엇에 걸려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괜찮겠지 하면서 발을 내 딛었는데, 그만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향’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지금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시편 121편의 사미스트는 이 때 나를 붙들어주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5-6절) 이 사미스트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지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는데 ‘내 오른편에서(at my right side)’ 나를 지키신다고 합니다. ‘오른쪽’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미스트는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7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재난’이라는 말은 ‘all harm’ ‘all evil’ ‘all danger’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일로부터, 모든 해로운 일로부터,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도움은 정해진 기한(expiration day)이 없습니다. 사미스트는 ‘지금부터 영원까지(from this time and forever)’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수많은 시편의 사미스트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편 118:8-9)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시편 18:31)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8)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우리는 단순히 마음에 위로를 받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 직접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부지런히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십시오(Be imitators of God, as beloved children).” (에베소서 5:1)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닮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 미국)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잃고 노예 주인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날짜를 모르기 때문에 그의 묘비에는 태어난 날이 없고 죽은 날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카버를 길러 준 주인은 참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고마운 사람을 만난 덕분인지 카버는 하늘이 주신 재능을 가지고 그 시대의 가장 탁월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됩니다. 그는 마태복음 5장 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한평생 이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 미국)으로부터 돈과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고 나와 함께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들을 무지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을 해 보자는 제의를 받아들여, 두 사람이 함께 학교를 짓고 교육 사업에 헌신합니다. 그 학교가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Tuskegee University)입니다. 카버는 그 학교 농학부 교수로 47년을 재직하면서 자기가 공부한 과학적인 지식을 농업에 접목하여 생산량을 늘리는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그 당시 남부 지방은 면화 재배가 주 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면화는 땅에서 질소를 빼앗아 가는 작물이기 때문에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면화 수확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흑인이나 백인이나 면화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카버는 콩 종류의 작물이 공기 중의 질소를 빨아들여 땅에 질소를 공급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땅콩을 재배하도록 농민들을 설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땅콩을 많이 먹던 때가 아니어서 땅콩을 심어도 소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버는 땅콩을 이용한 요리법을 직접 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유력한 사업가 9명을 초대하여 국, 샐러드, 닭고기,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대접했는데, 모두들 음식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카버는 그 자리에서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이 드신 이 음식들은 모두 땅콩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땅콩을 많이 소비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카버는 땅콩으로 요리할 수 있는 음식 105가지를 발표해서 땅콩 소비를 늘려 농부들의 수입을 늘렸습니다. 카버는 음식뿐만 아니라 몸에 바르는 크림, 구두약, 비누, 살충제, 화장품, 염료, 샴푸, 버터, 인쇄용 잉크, 접착제 등 무려 200개가 넘는 실용품을 발명했습니다. 땅콩 외에도 고구마를 이용한 118개의 실용품을 발명하여 미국 전체를 부요하게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푼의 로열티를 받지 않고 자기가 개발한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였습니다.
한번은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 카버에게 만약 그가 자기 회사로 온다면 새 연구소와 연봉 1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카버는 에디슨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비평가들이 카버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모든 돈을 가진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카버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만약 그 돈을 전부 갖는다면, 나의 사람들을 잊어버릴 지도 모르죠.” 조지 워싱톤 카버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명성과 부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상관하지 않았고, 오직 세상을 돕는 일에서 행복과 명예를 찾고자 했다(He could have added fortune to fame, but caring for neither, he found happiness and honor in being helpful to the world).”
저는 교우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지 워싱턴 카바 같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렇게 확정(確定)해 놓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조지 워싱턴 카바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9/12/2021 |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The Lord Gives Me Strength
이사야 40:26-31
오늘 읽은 이사야 40장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유다) 백성들이 바빌로니아(Babylon)라는 강대국에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 갔던 매우 절망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Zedekiah)는 신흥 제국이었던 바빌로니아를 무시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다가 결국 BC 586년에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의 두 아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처형을 당했고, 그는 두 눈이 뽑힌 채 바빌로니아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고, 노약자와 장애인을 제외한 청년들과 유능한 기술자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지식인들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나의 어려움을 몰라.”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 때, 얼마나 힘들고 외롭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 같은 생각을 하면서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 분명해.”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지 않아(27절)!” 하고 말입니다.
이런 절망 중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이다. 나는 온 세계를 창조하였다. 나는 지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다. 아무도 나의 지혜를 측량할 수 없다(No one can measure the depths of my understanding).” (28절) 여러분, 이 짧은 네 문장으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 때 재료(材料, material)를 가지고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마가복음 9:23)”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입을 통해 고백이 되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으시다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지치고 피곤해합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퇴근하면 지치고 피곤하지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과제가 많을 때는 더 지치고 피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아시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11:28-30)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금방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치지 않는 활기찬 삶의 비결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나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交際, fellowship)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라는 말은 ‘understanding’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말로 ‘discernment’ 혹은 ‘percep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이 말을 “그의 명철(明哲)은 한이 없으며”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같은 뜻으로 시편 147:5에는 “His understand¬ing has no limit(그의 지혜는 한계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우리가 지금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지혜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시편 121편을 읽어보면 ‘watch over(지키다)’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Indeed, he who watches over Israel never slumbers or sleeps(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신다).” (4절)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심지어 너희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아신다(마태복음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even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all numbered [for the Father is sovereign and has complete knowledge].”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 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이렇게 관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요.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이렇게 관계하고 계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런 분인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어떻게 관계하시는 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어려움 당할 때, 힘들고 마음이 불안할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이 방법들은 모두 성경에 나와 있는 것들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슬퍼하며 울부짖으십시오. 웃음을 울음으로,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8-10)
“Come close to God, and God will come close to you.”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 노력을 게을리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으신(God-breathed, 디모데후서 3:16)’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부지런히 읽는 사람은 그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밖에 있는 것들을 사랑했던 삶을 고쳐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도표를 한번 보세요. 첫 번째 원은 내 마음의 중심에 내가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내 마음 밖에 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점들은 혼란스러운 나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가운데 원은 내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 밑에 있습니다. 내 주변의 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어, 질서가 잡힌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 번째 원은 내 마음의 의자에 내가 앉아 있고, 그리스도는 내 주변의 점들 중 하나입니다. 여전히 내 삶은 혼란스럽습니다. 이 잘못된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지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잘 따라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31절) 개역성경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희망을 둔다(hope in the LORD)’는 말입니다. NASB에는 ‘wait for the Lord’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새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 유명한 빌립보서 4:13 말씀을 아시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이 말씀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through him(그를 통하여)’ 혹은 ‘in him(그 안에서)’이라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스스로 힘을 얻는 삶이 아니라, 능력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분을 통해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새 힘(new strength, 31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통해서 얻는 힘과 하나님을 통해서 얻는 힘을 구별하기 위해서 ‘새 힘’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는 사람은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그런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31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가는 독수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새 힘’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스마트 폰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스마트 폰이 대중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마트 폰이 항상 충전이 되어 있어야 사용할 때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스마트 폰을 충전시킵니다. 우리가 ‘새 힘’을 얻는 원리도 똑 같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분을 통해서 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분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생각과 말씀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로라 월킨슨(Laura Ann Wilkinson, 1977-)은 2000년 9월에 있었던 시드니 올림픽 다이빙 10m 플랫폼 여자부에서 36년 만에 미국에 금메달을 안긴 선수입니다. 대부분의 사진 기자들은 중국이 메달을 싹쓸이할 것으로 보고 카메라 앵글을 중국 선수들에게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월킨슨은 예선에서 5위를 했고, 준결승에서도 5위를 했기 때문에 메달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쌍쉐와 리나는 준결승까지 9차례 다이빙을 모두 1, 2위를 했습니다. 결승전 직전까지 월킨슨과의 점수는 무려 43점이나 벌어져 있었습니다. 5번 다이빙을 하는 결선에서 월킨슨은 1, 2차 시기에서 역시 5위를 차지해 메달 가능성은 희막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3차 시기에서 난이도 2.7짜리 리버스 다이빙을 완벽하게 소화해서 최고 점수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4차와 5차 시기에서도 모두 1위을 차지하며 대역전에 성공하여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월킨슨이 이렇게 극적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상을 무릅쓰고 경기에 임하는 투혼과 여유, 그리고 그녀가 가진 신앙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연습 중 오른쪽 발이 세 군데나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발등 쪽으로 뼈가 불쑥 튀어나와 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연습에 지장이 있을까 봐 올림픽 후로 수술을 미루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도약 직전 미소를 머금은 채 관중석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응원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 오히려 불안감이 없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이빙을 할 때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외우면서 자신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투혼과 여유 그리고 신앙 외에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가 더 있는데요. 그것은 친구와의 우정(友情)입니다. 결선에서 4차 시기를 하기 위해 플랫폼에 올라가기 직전에 그녀의 코치는 월킨슨의 귀에 대고 “힐러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라”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힐러리는 윌킨슨과 함께 다이빙을 하는 친구였는데, 3년 전에 그만 교통사고로 숨진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코치의 주문에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경기에 임했고, 결국 역사적인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능력이 크신 분이라도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둡고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똑 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욥기 42:5) 하나님을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디 보스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9/5/2021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시편 23편
오늘 읽은 시편 23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설교의 왕자(The Prince of Preachers)’라고 불리는 스펄젼(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이 시편을 ‘시편의 진주(the pearl of psalms)’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1986)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으로 시편 23편을 읽으라는 처방을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아주 드라마틱했습니다. 드라마틱했다는 말은 그의 삶에 그루브(groove)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어려움 없이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맞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아무 일이 없는 편안한 삶이 아니라 드라마틱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다윗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시를 썼습니다. 그가 쓴 시들은 우리가 가진 성경에 시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 중에 다윗이 쓴 시편은 73편입니다. 그 시편들은 모두 다윗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던 시편들입니다.
시편 23편도 그렇습니다. 워낙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편이기 때문에 다윗이 평안하게 지냈던 때에 이 시편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시편 23편은 다윗의 생애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쓴 것입니다. 학자들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했을 때, 다윗은 차마 아들과 칼을 겨누고 싸울 수가 없어서 왕궁을 버리고 피난을 갔던 때가 있었는데, 시편 23편은 그 때 쓴 시편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지요? 하지만, 자세히 읽어 보면 시편 23편에 다윗의 처절하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이었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시편 23편을 읽으면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 시편 23편의 내용을 한번 찬찬히 들여다볼까요? 먼저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고백합니다. 목자를 ‘shepherd’라고 합니다. 양(sheep)을 herding하는 사람, 양을 지키고, 먹이고, 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마치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고백입니다.
이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의 시제(時制, tense)에 주목하면서 여기에 사용된 시제가 미완료(未完了, imperfect) 시제라고 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어떤 동작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나는 계속해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지금도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1:21) 또 이런 말씀이 생각나지요?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나는 어떤 형편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빌립보서 4:12) 이들이 이렇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계획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재의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께서 뜻이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사랑이 많고,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my shepherd)’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은 환경에 있을 때도, 내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을 때도, 변함없이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그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을 믿는 이상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과거에도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지금도 부족한 것이 없고, 앞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목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위키 백과사전(WIKIEPRDIA)에 양의 성질(性質)에 대하여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화를 잘 안 내고 온화한 성질을 가진 사람을 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온순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양을 온순한 동물이라고 생각지만 양은 매우 억세고 사나운 동물이다. 염소와 마찬가지로 고집이 세서 다른 동물에게 박치기를 하기도 하고 사람에게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기 때문에 양치기들도 애를 많이 먹는다.” 양은 성질도 좋지 않지만, 시력이 약해서 겨우 3m 정도 밖에 앞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넘어져 몸이 뒤집어지면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 없어서 목자가 도와줘야 한다고 합니다. 지난 2월에 호주 멜버른 북부 랜스필드(Lancefield)에서 오랫동안 버려졌던 메리노(merino) 종(種) 양 한 마리가 구조되었는데요. 발견 당시 털의 무게가 무려 35kg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양에게 목자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목자 없이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도 양에 대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으나(All of us, like sheep, have strayed away. We have left God’s paths to follow our own)” (이사야 53:6) 양에게 목자가 없으면 양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길에서 벗어나 엉뚱한 길로 갑니다. 목자를 잃은 양이 제멋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길(God’s path)’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들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인생의 정도(正道)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길이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잘못된 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정도를 떠난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줄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물가로 인도하신다(2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He renews my strength, 3절)”고 합니다. Amplified Bible에는 이 말씀이 “He refreshes and restores my soul (lif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절망하여 주저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for his name’s sake)’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3절)”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하나님의 명예를 떨어뜨리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윗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믿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스턴 생활이 두려울까요? 낯선 새로운 환경이 두려울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로마서 8:31)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4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est valley①,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 ①Or the dark valley of death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때도 하나님께서 나와 가까이 계셔서 나의 도움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독일 한 대학에 한 노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가 구사하는 언어가 10개가 넘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독일어, 영어, 불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에다 몇 개의 동양 언어까지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교수가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교수에게 어떻게 히브리어까지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그 교수는 40년 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당시, 대학시절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에게 기숙사 방을 같이 쓰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 친구는 유태인이었습니다. 사실은 그 친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지만, 나치는 유태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서 수용소로 보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고 두 시간쯤 지나면 꼭 무슨 주문 같은 것을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친구가 히브리어로 외웠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치 음악같이 리듬을 타는 그 시가 무척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그 친구에게 물었더니 구약성경에 나오는 시편 23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그 시편을 외우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 공부가 더 잘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그 교수도 친구에게 배워서 같이 그 시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사이 좋은 두 친구는, 공부하다 지겨워질 때쯤 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했습니다.
나치의 핍박이 점점 심해지자 그 친구는 학교를 그만두고 은신처에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지금 나치 비밀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자기는 가스실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수는 급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그 친구와 가족을 실은 나치의 트럭이 막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는 출발하는 트럭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트럭을 따라가는데, 고개를 내민 친구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친구의 얼굴은, 뜻밖에도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소리 높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친구는 미소를 지으면서 시편 23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던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같이 그 시편을 외우면서 자전거 페달을 더 힘껏 밟았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친구를 태운 트럭은 점차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친구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나치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다가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그 교수도 결국 군대에 끌려갔다가 러시아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대열에 낀 포로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습니다. 그 교수의 머릿속에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죽음의 길을 웃으며 떠난 그 친구처럼, 나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자.” 끌려온 포로들이 하나 둘 총알에 쓰러지고, 드디어 교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교수는 총을 겨눈 군인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연합군의 러시아 장교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도 같이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연합군 장교는, 유태인이었습니다. 장교는 그 사람을 풀어주라고 명령하면서 사형중지 서류에 사인을 했습니다. 놀라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장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정말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의 말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ifs(만약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자기 백성을 이렇게 지키신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양들에게 ‘풍성한 생명(an abundant life)’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0:10). 돈을 받고 고용된(hired) 목자는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덕분에 그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절)”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보스턴 생활을 통해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선한 목자’를 평생 여러분의 자산(資産, assets)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8/29/2021 |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라 Know That I Am God
시편 46편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보스턴에 새로 직장을 잡으셨거나 공부하러 온 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새로운 곳에 올 때는 항상 불안감과 기대감이 교차합니다. 보스턴에 새로 오신 분들 지금 많이 불안하시지요? 저도 1986년에 보스턴에 왔을 때 참 불안했습니다. “이곳에서 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나의 지도 교수는 어떤 사람일까?” 또 “보스턴은 물가가 비싸다는데 생활비는 모자라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걱정도 있지만, 동시에 보스턴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생활과 학업에 대한 기대가 있을 줄 압니다.
보스턴은 미국이 자랑하는 학문의 도시입니다. 수많은 대학들이 있어서 학교마다 학생들로 차고 넘치는,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보스턴은 참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어디를 가 봐도 보스턴처럼 고전적(古典的)인 것과 현대적(現代的)인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도시가 별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찰스강이 흘러 보스턴과 케임브리지의 경계를 이루고, 유명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있고, 전통의 레드삭스 야구단과 셀틱스 농구단이 있고,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풋볼팀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저의 신학교 은사 한 분이 보스턴을 방문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찰스강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목사, 파리의 세느강이 아름답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찰스강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만! 찰스강은 정말 아름다워!” 보스턴을 자랑하려면 이 외에도 끝이 없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네요. 바로 케임브리지한인교회입니다. 43년의 역사를 가진 케임브리지한인교회는 지금까지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예배와 아름다운 성가대, 그리고 청년부가 케임브리지한인교회의 자랑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말씀은 시(詩)이면서 동시에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에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불렀습니다. 시편마다 어떻게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어(指示語)가 있습니다. 시편 46편은 ‘A song to be sung by soprano voices①./①Hebrew according to alamoth’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소프라노 음성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어디선가 아름다운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힘. 어려움 당할 때마다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니, 땅이 마구 뒤흔들린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 산 저 산이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바다에 마구 폭풍이 몰아치고 미친 듯이 날뛴다 해도 그 물이 넘쳐 언덕들이 마구 요동한다 해도 우리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셀라)” (현대어 성경)
어떻습니까? 노래 가사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지 않습니까? 이 시편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주기 위해서 쓴 시편입니다. 이 시편 말씀이 새학기를 맞아 보스턴에 오신 분들에게도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시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이 시편을 쓴 사미스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계하시는 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힘이십니다. 어려울 때 언제나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1절) ‘피난처’는 급하고 위험할 때 뛰어가 피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갑자기 길을 가다가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면 사람들은 급하게 어디론가 피할 장소를 찾습니다. 여러분들은 급할 때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가지고 계신가요? 이 시편을 쓴 사미스트는 하나님이 자기의 ‘refuge(피난처)’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건강을 자신하던 사람도 언제 건강을 잃을지 모릅니다. 이런 연약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 네델란드)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코리 여사’라고 부릅니다. 코리 여사는 네덜란드 할렘(Haarlem)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을 숨겨 주다가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고난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함께 갇힌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이렇게 수용소 생활을 하던 중에 코리 여사는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홀로코스트(Holocaust)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석방된 뒤에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고,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를 다니면서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평생 동안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았던 그녀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녀가 쓴 책 중에 ‘주는 나의 피난처(The Hiding Place, 1971)’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The Hiding Place(1975)’ ‘Corrie Ten Boom: A Faith Undefeated(2013)’ ‘Torchlighters: The Corrie Ten Boom Story(2013)’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라는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코리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Never be afraid to trust an unknown future to a known God..... There are no ‘ifs’ in God’s Kingdom. His timing is perfect. His will is our hiding place. Lord Jesus keep me in Your will. Don't let me go mad by poking about outside of it(당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만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뜻 안에서 나를 지켜 주십시오. 주님의 뜻 밖에서 헤맴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의 확실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합니다. 이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를 확실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만약’이라는 말이 없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우리가 필요할 때에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어쩌다가 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목적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편 46편의 사미스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려도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2-3절) 여러분,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흔들린다는 말은 우리의 존재(存在)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사미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면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5절)”라고 말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여기서 ‘city’는 도시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는사람, 곧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을 말합니다. 코리 여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사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It cannot be destroyed. God will protect it(그런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그 분야의 권위자가 말하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사미스트는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와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Come, see the glorious works of the LORD). 주께서 이 땅을 폐허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는 온 땅에서 전쟁을 그치시고 활을 꺾으시고 창을 부러뜨리시며 방패를 불로 사르십니다.” (8-9절) 전쟁은 양 국가가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번 전쟁의 광기(狂氣)에 사로잡혀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면, 이긴 편이나 진 편이나 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재산 피해를 내게 됩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쟁의 광기로부터 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활을 꺾고, 창을 부러뜨리고, 방패를 불살라서 전쟁을 그치게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힘이 대단한 것 같이 보이지만, 팬데믹으로 온 세상이 일년 반이 넘도록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콧김으로 물이 쌓이고(By the blast of your nostrils the waters piled up), 파도는 언덕처럼 일어서며, 깊은 물은 바다 한가운데서 엉깁니다.” (출애굽기 15:8)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앞에 홍해바다(The Red Sea)가 가로막혀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강한 바람이 불게 해서 바다 한 가운데 길을 만드셨거든요? 그 때 불어온 바람이 ‘the blast of God’s nostrils’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콧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요.
사미스트는 “와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8절)”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여줄 것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구약 잠언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자는 성을 정복하는 자보다 낫다(Better a patient man than a warrior, a man who controls his temper than one who takes a city).” (잠언 16:32, NIV) 내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고, 나를 자제(自制, control)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잘 압니다. 그렇게 의심이 많고, 그렇게 고집이 센 우리를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들이 살아 있는 증인(證人)들입니다.
셋째로, 사미스트는 위기의 순간에 모든 인간적인 시도를 중지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라. 나는 모든 나라들 위에 높임을 받을 것이며, 온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이다(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I will be honored by every nation. I will be honored throughout the world).” (10절) 코리 텐 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How foolish of me to have called for human help when You are here(하나님께서 여기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모르고 사람의 도움을 구한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요).” 어렵고 힘들 때 동분서주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조용히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워서 그 뜻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코리 텐 붐 여사의 말처럼 그것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지 않았던 사람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하나님 대신에 자신의 많은 재산을 믿고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면서 점점 힘을 키워 간 사람을 보십시오!” (시편 52:7) 자기 힘을 믿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의 말씀이 됩니다.
학교에서는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精進)하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그 일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주일마다 예배에 빠지지 말고 나오십시오. 성경을 배울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입니다. 우리 다 같이 5절 말씀을 읽어 볼까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