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4/3/2022 | 사순절 다섯째 주일
눈을 주님께 돌려(II) Turn Your Eyes Upon Jesus
히브리서 12:1-11
오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We do this by keeping our eyes on Jesus, the champion who initiates and perfects our faith).” (2절) 또 3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고,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율법 시대에 제사장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믿음생활 했는지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마가복음 7: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이사야 29:13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시대이면 기원전 약 500-600년 전쯤 되거든요? 그 때 예배가 극도로 형식화되어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배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예배를 비판하시면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farce(우리 성경에 ‘헛되이 내게 예배 드리고’라고 나와 있음)’라는 말은 짧은 ‘소극(笑劇)’ ‘웃기는 연극’ 혹은 ‘코미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farce’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그 시대의 예배를 ‘코미디’라고 비판하셨을까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자들이 하나님과 아무 인격적(人格的)인 관계가 없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입에서는 “주여, 주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미안하지만) 난 너희가 누구인지 모른다(마태복음 7:7)”고 말씀하신다면, 이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the originator, the champion, the initiator and the perfecter of our faith’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요한복음 4:24)”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우리의 원대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라(마가복음 14:36)”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받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난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실존적(實存的)인 문제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고난의 때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을 받는 중에 당황스러워하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Dear friends, don't be surprised at the fiery trials you are going through, as if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 Instead, be very glad - for these trials make you partners with Christ in his suffering.” (베드로전서 4:12-13)
고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굉장한 말씀 아닙니까? 베드로는 고국을 떠나 타국에 와서 온갖 생존(生存)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겪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야단을 떨지 말라고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당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예수님의 ‘파트너(partners)’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주님의 제자들의 삶에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맞습니까? 우리에게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을 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the followers of Christ)’이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는데, 우리가 고난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의 때에 예수님처럼 그 고난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아내야 한다고 합니다(2절). 예수님이 고난을 참아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기쁨을 기대하셨기 때문이라(Because of the joy awaiting him, he endured the cross, disregarding its shame, 2절)”고 합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Jesus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앞에 차려 있는 기쁨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와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참고 견딥니다. ‘endure’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이 말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무작정 견디는 것이 아니라 ‘for the joy set before them(그들 앞에 놓여 있는, 혹은 차려 있는 기쁨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도 바로 ‘그 기쁨(the joy)’을 위하여 주어진 고난을 참고 견디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그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 기쁨’이 무엇이길래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 참으셨을까요?
한자성어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생이 다하면 좋은 일이 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성공, 출세, 이런 것들입니다. 다분히 물질 지향적(志向的)인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기대하셨던 ‘기쁨’은 어떤 것일까요? C.S 루이스(C.S. Lewis, 1898-1963, 영국)가 쓴 책 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1942년)’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참급 악마인 ‘스크루테이프’는 이제 막 악마생활을 시작한 조카 ‘웜우드’에게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해 자신이 평생 터득한 노하우를 전수해 줍니다. 그 노하우 중에 기쁨과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쿠르테이프’는 인간에게 ‘기쁨’이라는 감정 대신 쾌락을 가르쳐 주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쁨과 쾌락, 이 비슷하게 보이는 두 감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기쁨’은 친밀하면서도 진실한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이에 반해 쾌락은 은밀한 습관 혹은 중독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감정입니다. 막 걸음마를 배워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기쁨일까요? 쾌락일까요? 기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은 무슨 기쁨일까요?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희생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 놓여 있는 무슨 ‘기쁨’을 보았을까요?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의 회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29 말씀을 한번 보세요.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오래 전부터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의 아들과 같이 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아들이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쁨’은 자신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많은 형제와 자매를 얻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고 견디신 것입니다.
셋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아직 죽을 정도까지 싸워 보지는 않았습니다.” (3-4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지치고 낙심될 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들보다 더 큰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견디신 분이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참고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Jason Ever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Jesus didn’t suffer so we wouldn’t have to suffer. He suffered, so that we would know how to suffer(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고난 받은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단하지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간단한 말이지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반대로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지만, 우리는 고난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요.
크리스천의 고난에 대하여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No healthy Christian ever chooses suffering. He chooses God’s will as Jesus did whether it means suffering or not (어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이라도 고난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고난을 의미하든 의미하지 않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뿐입니다).” 또 뉴욕에 있는 ‘리디머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는 팀 켈러(Tim Keller) 목사의 말도 한번 들어보시죠. “Jesus Christ did not suffer so that you would not suffer. He suffered so that when you suffer, you’ll become more like him. The gospel does not promise you better life circumstances; it promises you a better life(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음으로써 더욱 자기와 닮은 사람이 되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복음은 당신에게 좋은 삶의 환경을 약속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삶을 약속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면 훈계를 받게 마련입니다...... 훈계를 받는 바로 그 때에는 즐거움이 없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훈계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우리에게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올바른 길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7-8, 11절)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을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discipline’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훈련(discipline)’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요즘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점점 ‘discipline’이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여러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discipline’을 거부하는 이 시대의 풍조(風潮, fashion)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풍조에 알게 모르게 우리가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본회퍼의 말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값싼 은혜란 회개와 세례, 그리고 교회생활에 대한 훈련 없는 용서의 설교, 그리고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을 말한다).” 본회퍼는 이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것이 결국 교회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without church discipline(교회 생활에 대한 훈련 없는)’이란 말이 눈에 띕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들어 보세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3/27/2022 | 사순절 넷째 주일
눈을 주님께 돌려(I) Turn Your Eyes Upon Jesus
마태복음 4:1-11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부활주일까지 네 번에 걸쳐 ‘눈을 주님께 돌려(Turn Your Eyes Upon Jesus)’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지 모르겠습니다만, 설교자인 저는 이 제목을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3:14-16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And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들린다(be lifted up)’라는 말은 ‘십자가에 매단다’는 뜻입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2004)’에 나오는 이 장면을 한번 보십시오. 땅에 십자가를 놓고 그 위에 예수님을 못 박아서 십자가의 긴 쪽 기둥을 땅에 파 놓은 구멍에 맞추고 십자가 양쪽 가로지르는 막대기에 줄을 매달아 잡아당겨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lift up)’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옛날 광야 시대에 모세가 장대 끝에 뱀을 매달아 높이 들고 누구든지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상처가 나았던 것처럼, 나도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들리게 될 텐데,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원의 진리가 심오해도 지키기 어려우면 복음(福音, Good News)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눈을 주님께 돌린다’는 말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그 예수님께 삶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달았다고 하잖아요? 이 글을 총독 빌라도가 직접 썼다고 합니다(요한복음 19:19).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Pilate posted a sign over him that read,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쓰시오” 하면서 억지를 부렸지만, 빌라도는 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so that many people could read it)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썼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명패에 비록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씌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당신의 왕이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우리가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저 분이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당신의 구세주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세 가지 사탄의 유혹(誘惑, temptation)을 받으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1절에 있는 “그후,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유혹(시험)을 받으셨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놓치면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n Jesus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there by the devil.” ‘then(그 후에)’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라는 뜻입니다. 이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갔을 때,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제가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 예수님께서 제게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t should be done, for we must carry out all that God requires." So John agreed to baptize him(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3:15) 이 말을 듣고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지상(地上)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曠野)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을 하시면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게 하려고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아니, 어떻게 예수님에게 사탄의 유혹을 받게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사탄의 유혹 속에 하나님의 의도(意圖)와 목적(目的)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가지고 계시는 목적은 언제나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So if you sinful people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heavenly Father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마태복음 7:11) 이 말씀에서 ‘너희 아버지께 구하는 사람(those who ask him)’은 누구를 말할까요? 그 앞에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너희 아버지께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하지 말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약속을 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죽은 사람들 중에 왜 크리스천들이 없겠습니까? 러시아 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매한 앳된 청년들이 영문도 모르고 전쟁터에 불려 나왔다가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굶주림에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크리스천들이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죽음과 절망과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환난(trouble)이, 어려움(calamity)이, 핍박(persecution)이, 굶주림(hungry)이, 헐벗음(destitute)이, 위험(danger)이, 칼(threatened with death)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협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8:35, 37). 바울은 왜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바울은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이런 유혹을 받은 것은 우리를 위해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유혹을 받으셨을까요? 여기에 뭔가 큰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This High Priest of ours understands our weaknesses, for he faced all of the same testings we do, yet he did not sin(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15) 또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Since he himself has gone through suffering and testing, he is able to help us when we are being tested(주님은 유혹받는 자들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고난당하고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18)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유혹과 똑같은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또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간성이 얼마나 연약한지 아시고 직접 경험하셨기 때문에, 유혹받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 사탄으로부터 받으신 유혹이 어떤 유혹이었는지 보십시오. 첫 번째 유혹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능한 지도자가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벌써 세계는 십년이 넘도록 경제 불황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때 사람들은 경제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과거와는 달리 온 세계 경제가 맞물려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경제 사정이 나쁜데, 어느 한 나라만 경제 사정이 좋은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경제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서 경제를 살려주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유혹이 바로 그런 지도자가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두 번째 유혹은 자기 능력을 과시해서 인기있는 지도자가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지금은 능력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펙을 부풀리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스펙을 부풀리다가 거짓말이 드러나면 좀 돋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아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를 채용하는 이력서에 없는 경력을 있는 것 같이 허위로 기재했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요?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 유혹은 경배의 대상을 바꾸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자기를 경배하면 이 세상을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그 일이 잘못된 일인지 알지만 눈 딱 감고 한 번만 그 일을 하면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Do you really think it is weakness that yields to temptation? I tell you that there are terrible temptations which it requires strength, strength and courage to yield to(당신은 정말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연약함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유혹에 굴복하기 위해 힘과 용기를 요구하는 끔찍한 유혹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은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도, 힘센 사람도 누구나 유혹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들을 모든 정공법(正攻法)으로 정면 돌파하셨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물론 중요하지만 빵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람은 절대로 빵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나는 한 번쯤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는 거짓 편에 설 수 없다고 하시면서 “내가 경배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호수아 24:15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을 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바알 신에게 넘어간다고 해도)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사탄의 유혹이 지금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 유혹을 우리보다 먼저 받으시고 이 유혹을 이기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는지 노하우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 힘만 가지고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와 달리 죄가 없으신 온전하신 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을 이기신 분, 이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삶의 유혹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히브리서 4:16)
공자(孔子, Confucius, B.C. 551-479)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Our greatest glory is not in never falling, but in rising every time we fall(인간의 위대함이란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일어나는 데에 참 인간다움이 있다는 공자의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지, 공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일어납니까?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유혹을 받으셨지만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이기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눈을 주님께 돌리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삶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으로 넘어질 때마다 우리 눈을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in our time of need(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때에)’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분의 도움을 받기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3/20/2022 | 시편 119편(XI)
길을 잃고 방황할 때 When I Wander Away
시편 119:161-176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스물 한 번째 자음 [쉰(Shin)]으로 시작하는 여덟 절, 그리고 히브리어 마지막 자음 [타우(Taw)]로 시작하는 여덟 절, 이렇게 모두 16절입니다. 오늘로 시편 119편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는 주의 약속을 기뻐합니다(I rejoice in your word).” (162절) “나는 오직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 (163절) “나는 주의 말씀을 노래합니다(Let my tongue sing about your word).” (172절) “주의 법은 나의 기쁨입니다(Your instructions are my delight).” (174절) 저자는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사랑하고 노래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은 마음이 평안하여 아무도 그들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Those who love your instructions have great peace and do not stumble).” (165절)
요즘에는 마음이 불안하거나 하면 상담을 받거나 심리치료사(psychotherapist)를 찾습니다. 로마서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Now there is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5:1)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죄의식(guilty feeling)’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죄의식’에도 다양한 종류의 ‘죄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죄의식으로 힘들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무슨 죄의식으로 힘들어하든지 모두 용서를 받고, 마음에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큰 평화(great peace)’가 주어집니다. 이 평화는 내 속에 있는 모든 불안한 것들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시편 119편 저자가 ‘큰 평화(great peace)’라는 말을 쓴 이유입니다.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거짓된 것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I hate and abhor all falsehood).”(163절) 우리 말에 ‘혐오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 단어에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abhor’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참된 것을 선택하게 되고, 거짓된 것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의 바른 길을 발견하게 되고, 그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은 유익이 주어집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전문가들은 성경을 읽으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주어지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고 합니다. 둘째로, 성경 속에서 날마다 필요한 양식(nourishment)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셋째로, 성경을 읽으면 인생의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넷째로,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다고 합니다, 다섯째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 대답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우고, 인간 관계를 배운다고 합니다. 일곱 번째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로, 성경을 읽으면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고 합니다. 끝으로, 성경을 읽으면 삶의 지평이 넓어져서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또 사람들이 왜 성경을 읽지 않는지 그 이유에 대한 조사 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제일 큰 이유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성경 내용이 어려워서 읽지 않는다는 이유이고, 그 다음이 성경 내용이 고리타분하고 지루해서 읽지 않는다는 이유이고, 또 성경 내용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서 읽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 기도에서 누가복음 18:31-33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따로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인자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며 침 뱉음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인자를 채찍질한 후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별로 중요한 말씀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엄청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고난과 조롱,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은 결코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벌써 오래 전부터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서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율법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누구든지 구원을 받도록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로마서 3:21-22).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누가가 말한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이란 어디를 말할까요? 구약 이사야 53장 말씀을 한번 보세요.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움을 받았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3절)....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5절)..... 그러나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준 것은 여호와의 뜻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목숨을 죄를 씻는 제물인 속죄 제물로 삼으셨다. 그는 자기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뜻을 그가 이룰 것이다.” (이사야 53:3, 5,10)
이 말씀에서 ‘미움’ ‘멸시’ ‘아픔’ ‘고통’ ‘상처’ ‘짓밟힘’ ‘채찍에 맞음’이런 단어들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단어들은 누가가 말하고 있는 ‘조롱’ ‘모욕’ ‘침 뱉음’ ‘채찍질’ ‘죽음’ 이런 단어들과 정확하게 겹쳐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고난 받는 사람을 ‘속죄 제물’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 ‘속죄 제물’이란 말이 영어로 ‘ransom’이라는 말이거든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ransom’이라는 말은 마가복음 10:45에 나오는 ‘대속물(ransom)’이라는 단어와 정확하게 겹칩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고난 받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대속물’ 되신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알면 알수록 경이로운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176절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이 끝나는 마지막 절입니다. “나는 길 잃은 양처럼 길을 잃었습니다.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 내가 주의 명령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저자가 어쩌다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을까요? 그가 양처럼 길을 잃었다고 합니다. “I have wandered away like a lost sheep”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삶이 방황의 원인이 되었을까요?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f you want to know where your heart is, look where your mind goes when it wanders(지금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면 당신이 방황할 때 당신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라).”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방황을 하나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지 않아요! 우리의 삶에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는 굳세고 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자주 실수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편 119편의 저자가 양처럼 방황했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고 안심을 했습니다.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 내가 주의 명령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Come and find me, for I have not forgotten your commands)!”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prodigal son)’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저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면서도 다행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안심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정확하게 이사야 53:6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All of us, like sheep, have strayed away. We have left God’s paths to follow our own. Yet the Lord laid on him the sins of us all).” 이 말씀에 나오는 “죄악’이라는 말을 일반적인 말로 ‘sins’라고 할 수 있지만, 좀 더 전문적인 말로 하면 ‘iniquity’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God’s path(하나님의 길)’가 있는데 이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고 ‘자기의 길’을 걷은 것이 ‘iniquity’입니다. 이렇게 자기 길을 걷던 사람이 정신이 들어 “어서 오셔서 나를 찾아 주십시오”라고 간절하게 구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말씀을 읽고 끝내도 큰 은혜가 되는데요. 이사야 53:6 말씀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iniquity’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합니다. ‘담당시키섰다”는 말씀이 ‘laid on him’입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에게 얹어 놓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입니다. 늘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면서 하는 일이 그 일이거든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자기의 죄를 제물 위에 얹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죄를 얹은 제물이 자기 대신 죽고 자기는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 제물을 드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3:6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iniquity’를 ‘그에게 얹어 놓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He)’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난 받는 종’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어떻습니까?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던 것이 그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운이 좋은(lucky)’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사람처럼 방황하다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가 방황을 끝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 익명의 ‘고난 받는 종’이 나의 ‘iniquity’를 대신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보다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 열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눌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히브리서 6: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여(We have this hope as an anchor for the soul, firm and secure).”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 배가 항해를 멈추거나 항구에 정박할 때 사용하는 ‘닻(an anchor)’입니다. ‘닻’은 갈고리처럼 생긴 매우 무거운 쇠덩어리입니다. ‘닻’은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안전하고 튼튼하게(firmly and securely)’ 붙들어 주는 장치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소망(hope of salvation)’은 마치 ‘영혼의 닻’을 내린 사람처럼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것은 예수님께 내렸던 우리의 ‘영혼의 닻’을 거두어 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배가 ‘닻’을 거두어 들이면 바람과 파도에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께 내리고 있는 우리의 ‘영혼의 닻’을 거두어 들이면 안 됩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방황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3/13/2022 | 시편 119편(X)
새벽에 주께 부르짖습니다 Early At Dawn, I Cry For Help
시편 119:145-160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열 아홉 번째 자음 [코프(Qoph)]로 시작하는 여덟 절, 스무 번째 자음 [레쉬(Resh)]로 시작하는 여덟 절, 모두 16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저자는 모든 삶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저자가 자기 자신의 문제만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기 시대에 대해 절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자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 눈에서 눈물이 홍수같이 쏟아져 내립니다. 이는 주의 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Rivers of tears gush from my eyes because people disobey your instructions).” (136절) 오늘 본문 말씀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신실하지 않은 자들을 보고 분노합니다. 이는 그들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Seeing these traitors makes me sick at heart, because they care nothing for your word).” (158절)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시대를 향한 저자의 아픔과 절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치가 존중되고 있습니까? 교회들이 이 시대의 풍조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전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세상에 대한 도전적인 자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이 시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제일 제 마음에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147절 말씀입니다. “내가 새벽 이전에 일어나 도움을 요청하며 울부짖습니다. 나는 나의 소망을 주님의 말씀에 두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rise early, before the sun is up; I cry out for help and put my hope in your words.”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에 대한 키워드 세 개가 있습니다. 기도(prayer)와 금식(fasting)과 자선(almsgiving)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간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주님과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으로 기도와 금식과 자선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 왜 주님과 가까워지게 될까요? 금식은 식욕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 중의 하나인 식욕을 절제함으로써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선을 하면 왜 주님과 더 가까워질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자선은 나만 바라보던 시선을 자기 밖의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생각하고 채워 줌으로써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떻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Come close to God, and God will come close to you).” (야고보서 4:8)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원하는 사람은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지금 사순절 새벽기도가 한창 진행 중에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참가한 교우들의 이름을 보면서 기도하는 것은 저에게는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요. 새벽에 기도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아무 때나 기도하라는 말씀도 있긴 있어요. 에베소서 6: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Pray in the Spirit at all times and on every occasion. Stay alert and be persistent in your prayers for all believers everywhere).” ‘무시로’라는 말은 ‘때를 가리지 말고 아무 때나(at all times)’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새벽에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언제, 어디서 기도하셨는지 알아보는 것은 즐겁고 의미있는 일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Before daybreak the next morning, Jesus got up and went out to an isolated place to pray)” (마가복음 1:35) 새벽 ‘미명(未明)’이라고 했으니까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어두컴컴한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an isolated place)’을 찾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때 그런 장소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을 대면하기에 제일 좋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간이 예수님께서 사역에 필요한 힘을 공급받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은 자기를 반성하는 기도를 드렸고, 사역의 방향을 점검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기도 시간을 통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사역을 점검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한 사람이 자기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를 사전에 예수님께 알려주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고 피신하라고 했습니다(누가복음 13:31).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은, 바로 기도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많은 시편 저자들이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기록했습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患難)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Each morning I will sing with joy about your unfailing love. For you have been my refuge, a place of safety when I am in distress).” (시편 59:16)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Satisfy us each morning with your unfailing love, so we may sing for joy to the end of our lives).” (시편 90: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It is good to proclaim your unfailing love in the morning, your faithfulness in the evening).” (시편 92:1)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시편 46:5)
이 말씀을 하나 더 볼까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Early the next morning he was back again at the Temple). 온 백성이 그분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2) 그날 새벽부터 성전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왜 그들은 그 시간에 성전에 나와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성전에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새벽이면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습관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시간에 미리 성전에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감동이 확 밀려오지 않습니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기도할 것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씩 기도하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모두 중보기도에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자기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목사님과 교회 장로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팀장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팀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더 나아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세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을 위해 많은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보세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But I have prayed for you, that your faith should not fail).” (누가복음 22:31-32) ‘중보기도’에 눈을 뜨면 자기만 위해서 기도하는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이 풍부해지고 그만큼 기도가 성숙해집니다. 자기를 위해서,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형제들을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기도할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면 대화가 끊어집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여러 번 만나고 친해지게 되면 그 때부터는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부터는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이야기거리가 되고, 서로의 관심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설정되지 않았을 때는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비를 잘 넘기면 그 때부터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는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도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새벽 기도가 주는 유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1: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떡 반죽에서 떼 낸 첫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 반죽덩어리 전체가 거룩합니다. 또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다 거룩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And since Abraham and the other patriarchs were holy, their descendants will also be holy-just as the entire batch of dough is holy because the portion given as an offering is holy. For if the roots of the tree are holy, the branches will be, too.”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이 거룩하니까 그의 후손들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반죽에서 일부를 떼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또한 이것은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도 거룩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우리 교회에 한창 새벽기도의 불이 붙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기도에 대한 도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 때 읽은 책 중에 ‘와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 중국)’라는 중국 교회 지도자가 쓴 책이 있었습니다. ‘와치만 니’에 대한 이단 논쟁이 있기도 했지만, 그가 쓴 책들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 중에 ‘새벽 기도의 유익’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저는 그 책자에서 로마서 11:16 말씀을 새벽 기도에 적용한 말씀을 처음으로 읽었습니다. ‘와치만 니’는 그 책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하루 전체가 거룩한 시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저는 그 때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이 있다면 그 때가 언제일까? 의심할 여지없이 청년 시절이다. 이 청년 시절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거룩하게 된다.”
후에 저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책을 읽으면서 본회퍼 역시 와치만 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회퍼가 ‘신자의 공동생활(Life Together)’이란 책을 썼는데요. 이 책은 히틀러 시대에 그가 지하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교재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entire day receives order and discipline when it acquires unity. This unity must be sought and found in morning prayer. The morning prayer determines the day(하루에 통일성이 있게 되면 하루에 전체에 질서와 규율이 생기게 된다. 이 통일성은 새벽 기도를 통해서 구해야 하고 발견되어야 한다. 새벽 기도가 하루를 결정한다).”
3/6/2022 | 시편 119편(IX)
어려움과 걱정이 나를 억누를 때 As Pressure And Stress Bear Down On Me
시편 119:129-144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열 일곱 번째 자음 [페(Pe)]로 시작하는 여덟 절, 열 여덟 번째 자음 [차데(Tsadhe)]로 시작하는 여덟 절, 모두 16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131절 말씀이 제일 눈에 띕니다. “내가 나의 입을 열어 헐떡거리며, 주의 명령들을 갈망합니다(I pant with expectation, longing for your commands).” 이 말씀은 시편 42:1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목이 말라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목이 말라 주를 찾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목마른 사슴이 가쁜 숨을 내 쉬면서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그토록 주님의 말씀을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은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됩니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목마름이 해소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eternity)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3:11)”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킵니다. 우리 안에 이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있어야 합니다.
영리한 사냥꾼들은 날씨가 가물어 시냇물이 마르면 사슴들이 물을 찾아 내려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사냥꾼들은 사슴이 내려오는 길에 덫을 놓습니다. 덫에 걸리면 크게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하지만 목이 마른 사슴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을 찾아 내려옵니다. 여기에 중요한 믿음 생활에 대한 통찰(insight)이 있습니다. 시간이 많고,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은 ‘갈망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고,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바쁘고 분주해서 도무지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경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잠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않으면 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없어 견딜 수 없는 사람,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맞습니까?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네 가지 유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순진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Even the simple can understand, 130절)”고 합니다. 여기서 ‘the simple’이라는 말은 ‘the minds of ordinary people(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성경에는 ‘the ignorant(무지한 사람)’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자는 평범하거나 무지한 사람이라도 성경을 읽고 그 뜻을 깨우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빛이 비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빛이 그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는(illuminate)’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비범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도, 비록 그 사람이 무지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춰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보통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아주 비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 깨우치거나 이해하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창의력도 뛰어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 속에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나와 있는 것 같아서 참 신기한 말씀입니다. New English Translation에 보면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Your instructions are a doorway through which light shines. They give insight to the untrained(주님의 말씀은 빛이 비치는 출입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들의 마음에 통찰력을 줍니다).” 정말 굉장한 말씀 아닙니까? 이 ‘통찰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膳物)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133절)”고 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오판하는 것은, 자기의 의지와 결심을 가지고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심하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죄는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어야 해결될 정도로 그 힘이 셉니다. 그만큼 죄의 힘은 대단합니다. 저자는 죄의 힘을 이기기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Guide my steps by your word.”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길을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나 나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2:21에 있는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여기서 ‘모범’이라는 말은 ‘example’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선명하게 본을 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았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했지만 보지 못했다.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 싶어했지만 듣지 못했다.” (마태복음 13:17)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겨 놓으신 선명한 발자취를 보고 따라가면 되지만,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까지도 따라서 살 ‘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Guide my steps by your word” 라고 소원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셋째로, “내가 보잘 것 없고, 무시를 당하고, 작아 보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세워준다(141절)”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am insignificant and despised, but I don’t forget your commandments.”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합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서 존재감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저자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럴 때 나의 ‘자존감(self-esteem)’이 얼마나 떨어집니까?
지난 주 설교에서 소개했던 에머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If I have lost confidence in myself, I have the universe against me).”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면 상대방이 하는 말이 모두 자기를 무시하는 말 같이 들리고, 자기에게 시비를 거는 말로 들리고, 자기를 따돌리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모두 자기를 공격하는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되라고 합니다. 되도록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말을 할 때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하고 “죄송합니다” 이런 말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지만 그렇게 해서 얼마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but I don’t forget your commandments (하지만, 나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나의 자존감이 떨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나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어떤 전문가의 말이 아니라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심으로 내가 그 말씀을 듣는다면 그 말씀들은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나를 세워주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구속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Do not be afraid, for I have ransomed you. 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내가 아무리 무시를 받고 자존감이 떨어져도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정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나를 받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인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어쩌면 바울도 자존감이 떨어져 힘든 때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판단하겠습니까?" (로마서 8:31, 33-34)
마지막으로, “어려움과 걱정이 나를 억누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143절)”고 합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고 중압감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로, 사업상의 문제로, 학업의 문제로 억눌릴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술을 마시면 해결이 되나요? 그 순간에는 잠깐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술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술이 깨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HuffPost’에 2014년 11월 6일에 실렸던 글인데요. 예전에는 ‘Huffington Post’라고 했는데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100가지 방법이 있다고 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 열 가지만 뽑아 소개하겠습니다. (1) 약 6분 간 책을 읽기입니다. 이 방법이 의외로 스트레스 해소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68%나 감소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2) 모차르트 음악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의 라우셔(Frances Rauscher) 교수팀이 1993년 ‘네이처(nature)’지에 모차르트 음악이 두뇌와 감성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모차르트 효과(Mozart Effect)’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모차르트 음악은 잘 정리된 선율로 신체 안정을 꾀하는 부교감 신경을 자극하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맥박 수가 느려지고, 피부 온도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은 학생들은 뇌기능이 향상되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성적이 40%가 높게 나왔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바흐와 요한 슈트라우스 곡들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3) 다른 사람을 포용하기 (4) 교회의 성가대에서 찬양하기 (5)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기 (6)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7) 새 소리나 바람 소리, 물 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듣기 (8)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9)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10) 산책하기 등입니다.
그런데요. 시편 119편의 저자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그런 방법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냈습니다. “I find joy in your commands(나는 주님의 명령으로부터 기쁨을 얻습니다).” (143절)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명령’이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두 말에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명령(commands)’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말이잖아요? 명령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데서 오는 ‘순종의 기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은 나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이 있어야 이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 기쁨이 얼마나 크길래 이 기쁨을 가지고 모든 삶의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아니면 어려움입니까? 핍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로마서 8:35-37) 환난이나 어려움, 핍박,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이런 것들이 내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보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걱정이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이 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발견합니다. 저자는 이 기쁨을 가지고 삶에서 오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립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순종의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순종의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기쁨’으로 여러분을 억누르는 모든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넉넉히 이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