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2022 | 부활절 메시지

눈을 주님께 돌려(III) Turn Your Eyes Upon Jesus

요한복음 12:20-26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을 영어로 ‘이스터(Easter)’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레저렉션(resurrectio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셨다(re+surge)’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크리스천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foundation)와 같습니다. 이 말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크리스천의 삶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언제, 어떤 인생의 위기를 만나 무너질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확장되던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을 가리켜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사도행전 9: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는 하나님의 도구(instrument)로써 그의 인생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We are more to be pitied than anyone in the world).” (고린도전서 15:14, 19) 이 말씀이 맞습니까? 

부활에 대하여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Our Lord has written the promise of resurrection, not in the books alone, but in every leaf in springtim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봄이 되면 죽었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파란 잎이 돋아나는 자연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톰 라이트(N. T. Wright, 1948-presen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essage of Easter is that God's new world has been unveiled in Jesus Christ and that you're now invited to belong to it(부활절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새로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고, 당신은 그 새로운 세상의 일원이 되도록 초청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앞에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몰랐을 때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후에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 인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본회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기 4개월 전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갇혀 있던 수용소에 연합군이 들어오기 불과 며칠 전에 교수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본회퍼의 전기(傳記)를 읽어보면 그의 사형을 집행했던 간수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본 일이 없다.” 본회퍼는 교수형을 받기 위해 끌려 나가면서 같이 갇혀 있던 동료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Good-bye. It is the end, but for me, beginning of life(안녕히 계세요.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의 묘비에는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Dietrich Bonhoeffer, a witness of Jesus Christ among his brethren)”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절 설교가 공식적으로 저의 마지막 부활절 설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성경 본문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 내용을 구상합니다. 제가 오늘 선정한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12:20-26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가장 잘 나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여러분의 삶은 진작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The Passover)’입니다. 이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이스라엘 내국인들과 해외에 나가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리고 이 축제를 구경하러 온 외국인들로 예루살렘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그리스’ 사람들도 유월절 축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순수한 그리스 사람들(Greeks)같아 보입니다. 말씀의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직접 질문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온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들의 질문에 대한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추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22-23) 이 말씀 속에 ‘유대인’ ‘그리스인’ 그리고 ‘크리스천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합니다. ‘표적(表迹)’은 ‘miraculous signs’이라고 번역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복음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당신이 표적을 보여주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 ‘지혜’라는 말을 영어로 ‘wisdom’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 말로는 ‘소피아(Sophia)’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하잖아요?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을 ‘philosopher’라고 하잖아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일찍부터 지혜를 사랑했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모두 그리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소크라테스(470-399B.C.), 플라톤(428-348B.C.),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 피타고라스(570-495B.C.) 등이 모두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선교를 가서 가장 놀랐던 것이 아네테 시민들이 날마다 광장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만난 사람들 중에 ‘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에피큐리안들과 스토익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때 이미 상당한 수준의 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인간의 삶을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생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눈에 비친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All the Athenians seemed to spend all their time discussing the latest ideas).” (사도행전 17:21)

예수님을 만나러 온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새로운 지식이나 새로운 사상을 배우기 위해 온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유대나라에 지혜로운 랍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유월절 명절도 구경할 겸 예루살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알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is planted in the soil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ts death will produce many new kernels—a plentiful harvest of new lives).” (24절)

예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해 줄 말은 이 말 밖에 없다. 너희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해 준 말 속에 너희들이 찾는 지혜가 모두 들어 있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I tell you the truth)”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꼭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경연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 부상(副賞)으로 책을 받았는데, 그 책 제목이 “The Seed Must Die(씨는 죽어야 한다)”였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한국의 손양원(1902-1950)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목사님 중 한 분이신데요. 손양원 목사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 목사님은 정말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진 분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의 별명이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어떻게 양아들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 양아들이 목사가 되어서 지금 L.A.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인터뷰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제가 최근에 ‘니콜라스 윈턴(Nicholas Winton, 1909-2015, 영국)’을 주인공으로 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체코를 점령한 나치는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난민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아이들까지 갇힌 난민 수용소의 실상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당시 29살의 은행원이었던 ‘니콜라스 윈턴’은 아이들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목숨을 내놓고 사비를 들여 아이들을 영국으로 빼돌려 입양을 시킵니다. 나치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이 일을 성사시켜 총 8번에 걸쳐 아이들을 기차에 실어 영국으로 보냅니다. 이렇게 빼돌린 아이들이 무려 669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번, 막 세계 제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250명의 아이들을 싣고 가던 기차가 멈추게 되고, 안타깝게도 그 아이들은 모두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를 모르게 됩니다. ‘니콜라스 윈턴’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껴 그 후 50년 동안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락을 정리하던 그의 아내가 오래 묵은 그의 수첩을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빼곡하게 그가 빼돌려 목숨을 구해 준 669명의 아이들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아내는 방송국에 제보를 합니다. 그래서 ‘니콜라스 윈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눈물과 감동 없이는 볼 수 없는 영상입니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idzS-K1LrPc)

놀라운 것은, 그가 구출한 669명의 아이들이 6,000여명의 아이들로 불어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 아닙니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5-26절)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아테네 광장에서 날마다 토론을 일삼던 말씀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어떻게,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몹시 궁금합니다.

철학은 아무리 그 내용이 심오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철학책을 읽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철학은 사람이 만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바울은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했습니다. “헛된 말과 거짓 철학에 속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멀리하시기 바랍니다(Don't let anyone capture you with empty philosophies and high-sounding nonsense that come from human thinking and from the spiritual powers of this world, rather than from Christ).” (골로새서 2:8) 기독교의 복음과 비교해 보면 철학은 그야말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empty philosophies and high-sounding nonsense’입니다. 바울이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성경은 그 자리를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이라고 했습니다. 본회퍼도, 손양원 목사님도, 니콜라스 윈턴도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알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살았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 희생과 헌신을 거부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특별한 생각 없이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런 삶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다시 톰 라이트의 말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새로운 세상의 일원이 되도록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세상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4/10/2022 | 종려주일

사랑, 그 좁은 길 Love, the Narrow Path

빌립보서 2:6-11

‘사랑 그 좁은 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종려주일 예배의 자리에 오신 여러분의 발걸음을 축복합니다. 일상에서 무너졌던 우리의 감정과 마음이 예배 안에서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2019년 12월 1일에 바로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의 성가대 찬양이 ‘날 새롭게 하소서’라는 찬양이었습니다. “나 세상 살아갈 때에 한치 앞길도 보이지 않고 주저 앉은 채 눈물 흘릴 때 주님 날 만져 주시네” “내 십자가 지고 주 따릅니다 날 새롭게 하소서” 그날의 성가대의 아름다운 선율과 은혜의 가사가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 같아서 뭉클했던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6절로 8절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진정한 집을 떠나서 우리를 위해 성육신 하셨지요. 땅에서는 부모의 집으로부터 떨어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애를 보면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셨지요 (눅 9:58) 그리고 마침내 성문 바깥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9절로 11절에 보면 낮아지심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본문의 구조는 낮아짐과 높아짐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본문의 구절에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순종하심과 하나님의 행하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독교 용어로 케노시스 (헬라어: κενοσις; 영어: kenosis) 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케노시스의 삶은 참으로 좁은 길입니다. 인간 편에서 도무지 오를 수 없는 높은 길입니다. 지구상의 가장 돈이 많은 사람도 유명한 사람도 이것을 살 수 없으며, 권력을 지닌 사람도 오를 수 없는 길입니다.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 이루신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머물 때에 우리를 영광의 길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저에게는 소중한 기도의 흔적이 담긴 물건 하나가 있습니다. 장인 어른께서 수술실로 들어 가시기 전에 손에 쥐고 계셨던 십자가입니다. 믿음으로 사셨던 아버님이 남겨주신 기도의 선물인데 이 십자가는 저를 진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삶에는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까? 본문 6절로 8절은 예수님의 믿음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의 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모두가 높아지려고 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낮은 자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더 좋은 것을 이야기하고 더 풍요로운 것을 따르는 삶이 성공적인 삶이라 하는데 주님께서는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안에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위대하심을 겸손한 자들을 통해 드러내시지요.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내려놓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주님께 하듯 하는 믿음의 태도가 주님 안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며 위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기꺼이 감당해내고 싶은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부인하고 외면하며 그리스도의 지식을 채워갈 수는 없지요. 복음을 위한 고난을 외면한 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 내야 하는 이 십자가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함으로 이겨낸 성도들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게 되면 피어나는 꽃들이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핍박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하심 너머의 소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10)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만나고 세상의 파도에 밀릴 때마다 구주의 십자가를 돛대 삼아야 합니다. 그 파도를 예수님의 물과 피로 한번 여겨 보십시오. 복음을 위한 영광된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에 거룩함을 향한 무뎌진 감각이 회복되고 허망한 기대와 텅 빈 영광은 하늘의 소망으로 채워지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은 힘들고 버거운 고난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고난 중에도 우리가 믿음 안에 머무를 때에 십자가가 삶의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머리로 믿어지는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A.D. 2022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의 분기점을 B.C.와 A.D.나눕니다.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A.D.는 '안노 도미나이 (Anno Domini)인데요. 이는 라틴어입니다. 안노 (Anno)라고 하는 말은 '한 해 : year'라는 의미입니다. 도미나이 (Domini)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님 : of our Lord' 라고 하는 뜻입니다. 즉, in the year of our Lord, ‘주님이 다스리는 해’ 이것이 A.D.입니다. 그러니까 A.D 2022년은 주가 다스리는 해가 1세기부터 21세기로 확장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걷는 이들에게 주님의 통치하는 나라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삶의 모든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에 대한 두 죄수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처형하는데 가담한 군인들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강제한 유대 지도자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이때 한 죄수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의 기도를 들으며 더욱 비방하며 포악해졌습니다. 죄수의 입장에선 스스로 원망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향해서 너와 나를 구원해 보라고 했겠지요. 이 죄수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에 반응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편 죄수의 고백은 달랐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과 그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이때 평생 자신을 붙들고 있던 원망과 쓴 뿌리가 녹고 그 순간에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이 죄수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자기 곁에서 죽어 가며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뜬 이 사람에게 주님은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절대 소수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무심히 어제와 같은 일상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알아본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가장 깊은 절망의 상황에도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과거의 인식과 상처로부터 새날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삶과 이별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매일의 새로운 삶을 허락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십자가 사랑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생명의 힘이기에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지요. 다시 일어서는 힘이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위기라고 하지요.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도 손을 놓지 않고 서로를 지탱해 주는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면 우리가 잡은 손이 위기를 이겨낼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풍조를 볼 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도전이 있을까요? 첫째는 다원주의의 도전입니다. 진리의 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니 서로의 길을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것인데, 이는 기독교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지극히 겸손해야 합니다.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어떤 종교에도 없는 유일한 것이며, 그분의 속죄하심도 유일한 것이며, 그분의 부활하심도 유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세상에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이 예수님을 깊이 알고 겸손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두번째 도전은 물질주의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물질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 보아도 물질 세계의 질서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인간의 탐심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아닙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물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관대하게 사용하고 검소하게 자족하는 방식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욥1:21) 우리는 모두가 태어나고 돌아가는 두 사이의 짧은 순례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번째 도전은 윤리적 상대주의입니다. 이 시대는 상대주의가 문화를 잠식했고 교회 안에도 침투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 기준에 대해서 이제 혼란스러워합니다. 이러한 시대 풍조에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경적인 원리를 삶에 적용하고, 우리의 행동의 토대가 예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백하지만 순종하지 않는 삶은 인생을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이지요. 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 외에도 그리스도인에게 참 많은 도전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세상 풍조에 맞서기 위해서 성도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 4:13) 아멘! 본문의 말씀 9절로 11절에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나타납니다. 낮아지심으로 순종한 그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마음을 모른 채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허망한 기대에 차 있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나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인(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중심 없는 마음과 갈증을 잃어버린 예배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갈망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고 예배 드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와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머문 자리에는 예수님의 이름만이 남아야 하겠지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그것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일일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에 나의 선택과 말과 행동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도시는 수도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작은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로마를 위해 싸웠던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관습과 법을 따르며 로마의 특권을 누렸고,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이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당시에 빌립보 교회에는 다툼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를 섬기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저희 둘째가 뱃속에 있었을 때 아내가 하혈이 심해져서 몇차례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의사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할 수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권하더군요. 모든 결정은 저희 부부의 몫이었지만 생명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지켜 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비록 과정이 힘들기는 했지만 둘째는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6개월때 갑자기 열이 오르면서 모유도 이유식도 입에 대지 못하고 계속 힘들어하더라구요.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외국에서 출산을 하고 모든 게 낯설었던 그때 아내와 저는 너무 무섭고 두려웠지요. 여러 명의 의사가 차례대로 와서 아이의 상태를 점검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지친 아이는 점점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고 의사들은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한다며 수술 동의서를 가지고 오더군요. 마음이 참 어려웠습니다. 담당 의사가 지금까지 응급환자 중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순간 아이가 고개를 떨구고 숨이 멈추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는데 처음 경험한 그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발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내는 마지막까지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며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삶을 전부 희생하게 되는 것 같아 무서워서 마지막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내어드리겠다는 기도를 망설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나의 고백이고 순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무거운 짐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고 의료진들이 급박하게 상황을 대면하는 것을 보니까 바로 무릎이 꿇어지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이 살려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면서도 깨어나지 못할까 봐서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세상의 것 구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 구하며 살아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부부의 동일한 기도가 간절히 드려지고 나니 차가워진 아이의 손과 하얗던 얼굴과 몸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하며 목에 있던 피고름이 터져 나오고 아이가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희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부부의 온전한 고백을 기다리신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소중한 생명의 무게 앞에 서 보니 세상의 성공도 부함도 명예도 모래 위에 쌓아 올려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의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은 유익없이 슬픔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일하십니다. 그 둘째 아이는 지금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고 가끔 저에게 어떤 목사가 되어야하는지 가감 없는 조언을 해주기도 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 앞에서 나의 순종을 기다리셨던 주님은 기댈 곳 없던 캐나다에서의 삶에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4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초기 기독 교회는 세례 받을 사람이 성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을 하고, 토요일 저녁에는 철야 기도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주일날에는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처럼 생명의 물이 되신 주님과 함께 세례를 통해 마음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는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씨가 심겨 지는 것이고, 부활의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구원을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대표적인 지도자 카프리안(Cyprian)은 ‘거듭남의 물로 이전 삶의 얼룩이 씻겨져 나갔다. 그리고 위로부터 임하는 고요하고 순결한 빛이 하나님과 화해한 나의 마음 가운데 스며들었다.’ Cyprian, Ad Donatum4 라고 고백합니다. 세례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고백하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보여지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늘 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여지는 것 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형편과 생활이 나아지면 편해질 수는 있지요. 그러나 인간의 실존은 나그네이기에 행복할 때도 불안해하는 불완전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지요.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옥중에서 기쁨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부활하심이 그의 공허했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영혼의 뜨거운 울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매년 고난주간에만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십자가 지고 주 따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우리의 삶에서 깨닫게 되면 고난의 그 끝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 내야 하는 외로움. 희망이 사라지고 소망이 사라졌을 때의 곤고함. 실패한 것 같아서 무너지고 깨어지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고백하셨던 주님의 그 음성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어둔 터널을 만나게 될 때 그 때에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감당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훈련이 없으면 단단한 믿음의 근육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연단이 없으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변함없이 기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 땅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내 영혼이 안전하기 원합니다. 좁은 길을 모두가 피해갈 때에 예수님이 걸어가신 좁을 길을 따라갑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믿음으로 통과합시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교회와 믿음의 공동체가 ‘사랑, 그 좁은 길’을 함께 걷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4/3/2022 | 사순절 다섯째 주일

눈을 주님께 돌려(II) Turn Your Eyes Upon Jesus

히브리서 12:1-11

오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We do this by keeping our eyes on Jesus, the champion who initiates and perfects our faith).” (2절) 또 3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고,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율법 시대에 제사장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믿음생활 했는지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마가복음 7: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이사야 29:13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시대이면 기원전 약 500-600년 전쯤 되거든요? 그 때 예배가 극도로 형식화되어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배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예배를 비판하시면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farce(우리 성경에 ‘헛되이 내게 예배 드리고’라고 나와 있음)’라는 말은 짧은 ‘소극(笑劇)’ ‘웃기는 연극’ 혹은 ‘코미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farce’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그 시대의 예배를 ‘코미디’라고 비판하셨을까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자들이 하나님과 아무 인격적(人格的)인 관계가 없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입에서는 “주여, 주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미안하지만) 난 너희가 누구인지 모른다(마태복음 7:7)”고 말씀하신다면, 이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the originator, the champion, the initiator and the perfecter of our faith’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요한복음 4:24)”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우리의 원대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라(마가복음 14:36)”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받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난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실존적(實存的)인 문제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고난의 때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을 받는 중에 당황스러워하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Dear friends, don't be surprised at the fiery trials you are going through, as if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 Instead, be very glad - for these trials make you partners with Christ in his suffering.” (베드로전서 4:12-13)

고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굉장한 말씀 아닙니까? 베드로는 고국을 떠나 타국에 와서 온갖 생존(生存)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겪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야단을 떨지 말라고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당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예수님의 ‘파트너(partners)’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주님의 제자들의 삶에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맞습니까? 우리에게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을 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the followers of Christ)’이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는데, 우리가 고난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의 때에 예수님처럼 그 고난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아내야 한다고 합니다(2절). 예수님이 고난을 참아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기쁨을 기대하셨기 때문이라(Because of the joy awaiting him, he endured the cross, disregarding its shame, 2절)”고 합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Jesus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앞에 차려 있는 기쁨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와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참고 견딥니다. ‘endure’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이 말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무작정 견디는 것이 아니라 ‘for the joy set before them(그들 앞에 놓여 있는, 혹은 차려 있는 기쁨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도 바로 ‘그 기쁨(the joy)’을 위하여 주어진 고난을 참고 견디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그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 기쁨’이 무엇이길래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 참으셨을까요?

한자성어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생이 다하면 좋은 일이 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성공, 출세, 이런 것들입니다. 다분히 물질 지향적(志向的)인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기대하셨던 ‘기쁨’은 어떤 것일까요? C.S 루이스(C.S. Lewis, 1898-1963, 영국)가 쓴 책 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1942년)’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참급 악마인 ‘스크루테이프’는 이제 막 악마생활을 시작한 조카 ‘웜우드’에게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해 자신이 평생 터득한 노하우를 전수해 줍니다. 그 노하우 중에 기쁨과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쿠르테이프’는 인간에게 ‘기쁨’이라는 감정 대신 쾌락을 가르쳐 주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쁨과 쾌락, 이 비슷하게 보이는 두 감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기쁨’은 친밀하면서도 진실한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이에 반해 쾌락은 은밀한 습관 혹은 중독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감정입니다. 막 걸음마를 배워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기쁨일까요? 쾌락일까요? 기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은 무슨 기쁨일까요?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희생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 놓여 있는 무슨 ‘기쁨’을 보았을까요?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의 회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29 말씀을 한번 보세요.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오래 전부터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의 아들과 같이 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아들이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쁨’은 자신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많은 형제와 자매를 얻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고 견디신 것입니다.

셋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아직 죽을 정도까지 싸워 보지는 않았습니다.” (3-4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지치고 낙심될 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들보다 더 큰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견디신 분이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참고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Jason Ever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Jesus didn’t suffer so we wouldn’t have to suffer. He suffered, so that we would know how to suffer(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고난 받은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단하지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간단한 말이지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반대로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지만, 우리는 고난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요. 

크리스천의 고난에 대하여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No healthy Christian ever chooses suffering. He chooses God’s will as Jesus did whether it means suffering or not (어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이라도 고난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고난을 의미하든 의미하지 않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뿐입니다).” 또 뉴욕에 있는 ‘리디머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는 팀 켈러(Tim Keller) 목사의 말도 한번 들어보시죠. “Jesus Christ did not suffer so that you would not suffer. He suffered so that when you suffer, you’ll become more like him. The gospel does not promise you better life circumstances; it promises you a better life(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음으로써 더욱 자기와 닮은 사람이 되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복음은 당신에게 좋은 삶의 환경을 약속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삶을 약속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면 훈계를 받게 마련입니다...... 훈계를 받는 바로 그 때에는 즐거움이 없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훈계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우리에게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올바른 길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7-8, 11절)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을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discipline’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훈련(discipline)’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요즘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점점 ‘discipline’이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여러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discipline’을 거부하는 이 시대의 풍조(風潮, fashion)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풍조에 알게 모르게 우리가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본회퍼의 말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값싼 은혜란 회개와 세례, 그리고 교회생활에 대한 훈련 없는 용서의 설교, 그리고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을 말한다).” 본회퍼는 이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것이 결국 교회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without church discipline(교회 생활에 대한 훈련 없는)’이란 말이 눈에 띕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들어 보세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3/27/2022 | 사순절 넷째 주일

눈을 주님께 돌려(I) Turn Your Eyes Upon Jesus

마태복음 4:1-11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부활주일까지 네 번에 걸쳐 ‘눈을 주님께 돌려(Turn Your Eyes Upon Jesus)’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지 모르겠습니다만, 설교자인 저는 이 제목을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3:14-16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And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들린다(be lifted up)’라는 말은 ‘십자가에 매단다’는 뜻입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2004)’에 나오는 이 장면을 한번 보십시오. 땅에 십자가를 놓고 그 위에 예수님을 못 박아서 십자가의 긴 쪽 기둥을 땅에 파 놓은 구멍에 맞추고 십자가 양쪽 가로지르는 막대기에 줄을 매달아 잡아당겨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lift up)’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옛날 광야 시대에 모세가 장대 끝에 뱀을 매달아 높이 들고 누구든지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상처가 나았던 것처럼, 나도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들리게 될 텐데,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원의 진리가 심오해도 지키기 어려우면 복음(福音, Good News)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눈을 주님께 돌린다’는 말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그 예수님께 삶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달았다고 하잖아요? 이 글을 총독 빌라도가 직접 썼다고 합니다(요한복음 19:19).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Pilate posted a sign over him that read,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쓰시오” 하면서 억지를 부렸지만, 빌라도는 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so that many people could read it)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썼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명패에 비록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씌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당신의 왕이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우리가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저 분이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당신의 구세주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세 가지 사탄의 유혹(誘惑, temptation)을 받으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1절에 있는 “그후,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유혹(시험)을 받으셨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놓치면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n Jesus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there by the devil.” ‘then(그 후에)’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라는 뜻입니다. 이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갔을 때,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제가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 예수님께서 제게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t should be done, for we must carry out all that God requires." So John agreed to baptize him(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3:15) 이 말을 듣고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지상(地上)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曠野)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을 하시면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게 하려고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아니, 어떻게 예수님에게 사탄의 유혹을 받게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사탄의 유혹 속에 하나님의 의도(意圖)와 목적(目的)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가지고 계시는 목적은 언제나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So if you sinful people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heavenly Father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마태복음 7:11) 이 말씀에서 ‘너희 아버지께 구하는 사람(those who ask him)’은 누구를 말할까요? 그 앞에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너희 아버지께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하지 말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약속을 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죽은 사람들 중에 왜 크리스천들이 없겠습니까? 러시아 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매한 앳된 청년들이 영문도 모르고 전쟁터에 불려 나왔다가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굶주림에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크리스천들이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죽음과 절망과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환난(trouble)이, 어려움(calamity)이, 핍박(persecution)이, 굶주림(hungry)이, 헐벗음(destitute)이, 위험(danger)이, 칼(threatened with death)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협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8:35, 37). 바울은 왜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바울은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이런 유혹을 받은 것은 우리를 위해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유혹을 받으셨을까요? 여기에 뭔가 큰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This High Priest of ours understands our weaknesses, for he faced all of the same testings we do, yet he did not sin(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15) 또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Since he himself has gone through suffering and testing, he is able to help us when we are being tested(주님은 유혹받는 자들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고난당하고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18)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유혹과 똑같은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또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간성이 얼마나 연약한지 아시고 직접 경험하셨기 때문에, 유혹받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 사탄으로부터 받으신 유혹이 어떤 유혹이었는지 보십시오. 첫 번째 유혹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능한 지도자가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벌써 세계는 십년이 넘도록 경제 불황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때 사람들은 경제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과거와는 달리 온 세계 경제가 맞물려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경제 사정이 나쁜데, 어느 한 나라만 경제 사정이 좋은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경제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서 경제를 살려주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유혹이 바로 그런 지도자가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두 번째 유혹은 자기 능력을 과시해서 인기있는 지도자가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지금은 능력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펙을 부풀리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스펙을 부풀리다가 거짓말이 드러나면 좀 돋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아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를 채용하는 이력서에 없는 경력을 있는 것 같이 허위로 기재했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요?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 유혹은 경배의 대상을 바꾸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자기를 경배하면 이 세상을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그 일이 잘못된 일인지 알지만 눈 딱 감고 한 번만 그 일을 하면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Do you really think it is weakness that yields to temptation? I tell you that there are terrible temptations which it requires strength, strength and courage to yield to(당신은 정말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연약함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유혹에 굴복하기 위해 힘과 용기를 요구하는 끔찍한 유혹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은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도, 힘센 사람도 누구나 유혹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들을 모든 정공법(正攻法)으로 정면 돌파하셨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물론 중요하지만 빵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람은 절대로 빵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나는 한 번쯤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는 거짓 편에 설 수 없다고 하시면서 “내가 경배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호수아 24:15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을 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바알 신에게 넘어간다고 해도)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사탄의 유혹이 지금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 유혹을 우리보다 먼저 받으시고 이 유혹을 이기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는지 노하우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 힘만 가지고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와 달리 죄가 없으신 온전하신 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을 이기신 분, 이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삶의 유혹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히브리서 4:16)

공자(孔子, Confucius, B.C. 551-479)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Our greatest glory is not in never falling, but in rising every time we fall(인간의 위대함이란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일어나는 데에 참 인간다움이 있다는 공자의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지, 공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일어납니까?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유혹을 받으셨지만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이기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눈을 주님께 돌리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삶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으로 넘어질 때마다 우리 눈을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in our time of need(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때에)’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분의 도움을 받기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3/20/2022 | 시편 119편(XI)

길을 잃고 방황할 때 When I Wander Away

시편 119:161-176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스물 한 번째 자음 [쉰(Shin)]으로 시작하는 여덟 절, 그리고 히브리어 마지막 자음 [타우(Taw)]로 시작하는 여덟 절, 이렇게 모두 16절입니다. 오늘로 시편 119편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는 주의 약속을 기뻐합니다(I rejoice in your word).” (162절) “나는 오직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 (163절) “나는 주의 말씀을 노래합니다(Let my tongue sing about your word).” (172절) “주의 법은 나의 기쁨입니다(Your instructions are my delight).” (174절) 저자는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사랑하고 노래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은 마음이 평안하여 아무도 그들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Those who love your instructions have great peace and do not stumble).” (165절) 

요즘에는 마음이 불안하거나 하면 상담을 받거나 심리치료사(psychotherapist)를 찾습니다. 로마서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Now there is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5:1)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죄의식(guilty feeling)’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죄의식’에도 다양한 종류의 ‘죄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죄의식으로 힘들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무슨 죄의식으로 힘들어하든지 모두 용서를 받고, 마음에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큰 평화(great peace)’가 주어집니다. 이 평화는 내 속에 있는 모든 불안한 것들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시편 119편 저자가 ‘큰 평화(great peace)’라는 말을 쓴 이유입니다.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거짓된 것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I hate and abhor all falsehood).”(163절) 우리 말에 ‘혐오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 단어에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abhor’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참된 것을 선택하게 되고, 거짓된 것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의 바른 길을 발견하게 되고, 그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은 유익이 주어집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전문가들은 성경을 읽으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주어지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고 합니다. 둘째로, 성경 속에서 날마다 필요한 양식(nourishment)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셋째로, 성경을 읽으면 인생의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넷째로,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다고 합니다, 다섯째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 대답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우고, 인간 관계를 배운다고 합니다. 일곱 번째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로, 성경을 읽으면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고 합니다. 끝으로, 성경을 읽으면 삶의 지평이 넓어져서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또 사람들이 왜 성경을 읽지 않는지 그 이유에 대한 조사 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제일 큰 이유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성경 내용이 어려워서 읽지 않는다는 이유이고, 그 다음이 성경 내용이 고리타분하고 지루해서 읽지 않는다는 이유이고, 또 성경 내용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서 읽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 기도에서 누가복음 18:31-33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따로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인자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며 침 뱉음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인자를 채찍질한 후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별로 중요한 말씀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엄청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고난과 조롱,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은 결코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벌써 오래 전부터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서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율법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누구든지 구원을 받도록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로마서 3:21-22).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누가가 말한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이란 어디를 말할까요? 구약 이사야 53장 말씀을 한번 보세요.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움을 받았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3절)....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5절)..... 그러나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준 것은 여호와의 뜻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목숨을 죄를 씻는 제물인 속죄 제물로 삼으셨다. 그는 자기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뜻을 그가 이룰 것이다.” (이사야 53:3, 5,10)

이 말씀에서 ‘미움’ ‘멸시’ ‘아픔’ ‘고통’ ‘상처’ ‘짓밟힘’ ‘채찍에 맞음’이런 단어들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단어들은 누가가 말하고 있는 ‘조롱’ ‘모욕’ ‘침 뱉음’ ‘채찍질’ ‘죽음’ 이런 단어들과 정확하게 겹쳐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고난 받는 사람을 ‘속죄 제물’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 ‘속죄 제물’이란 말이 영어로 ‘ransom’이라는 말이거든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ransom’이라는 말은 마가복음 10:45에 나오는 ‘대속물(ransom)’이라는 단어와 정확하게 겹칩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고난 받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대속물’ 되신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알면 알수록 경이로운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176절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이 끝나는 마지막 절입니다.  “나는 길 잃은 양처럼 길을 잃었습니다.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 내가 주의 명령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저자가 어쩌다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을까요? 그가 양처럼 길을 잃었다고 합니다. “I have wandered away like a lost sheep”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삶이 방황의 원인이 되었을까요?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f you want to know where your heart is, look where your mind goes when it wanders(지금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면 당신이 방황할 때 당신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라).”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방황을 하나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지 않아요! 우리의 삶에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는 굳세고 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자주 실수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편 119편의 저자가 양처럼 방황했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고 안심을 했습니다.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 내가 주의 명령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Come and find me, for I have not forgotten your commands)!”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prodigal son)’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저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면서도 다행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안심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정확하게 이사야 53:6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All of us, like sheep, have strayed away. We have left God’s paths to follow our own. Yet the Lord laid on him the sins of us all).” 이 말씀에 나오는 “죄악’이라는 말을 일반적인 말로 ‘sins’라고 할 수 있지만, 좀 더 전문적인 말로 하면 ‘iniquity’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God’s path(하나님의 길)’가 있는데 이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고 ‘자기의 길’을 걷은 것이 ‘iniquity’입니다. 이렇게 자기 길을 걷던 사람이 정신이 들어 “어서 오셔서 나를 찾아 주십시오”라고 간절하게 구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말씀을 읽고 끝내도 큰 은혜가 되는데요. 이사야 53:6 말씀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iniquity’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합니다. ‘담당시키섰다”는 말씀이 ‘laid on him’입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에게 얹어 놓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입니다. 늘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면서 하는 일이 그 일이거든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자기의 죄를 제물 위에 얹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죄를 얹은 제물이 자기 대신 죽고 자기는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 제물을 드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3:6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iniquity’를 ‘그에게 얹어 놓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He)’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난 받는 종’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어떻습니까?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던 것이 그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운이 좋은(lucky)’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사람처럼 방황하다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가 방황을 끝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 익명의 ‘고난 받는 종’이 나의 ‘iniquity’를 대신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보다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 열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눌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히브리서 6: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여(We have this hope as an anchor for the soul, firm and secure).”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 배가 항해를 멈추거나 항구에 정박할 때 사용하는 ‘닻(an anchor)’입니다. ‘닻’은 갈고리처럼 생긴 매우 무거운 쇠덩어리입니다. ‘닻’은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안전하고 튼튼하게(firmly and securely)’ 붙들어 주는 장치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소망(hope of salvation)’은 마치 ‘영혼의 닻’을 내린 사람처럼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것은 예수님께 내렸던 우리의 ‘영혼의 닻’을 거두어 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배가 ‘닻’을 거두어 들이면 바람과 파도에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께 내리고 있는 우리의 ‘영혼의 닻’을 거두어 들이면 안 됩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방황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