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0/2018 | 송년예배 메시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누가복음 13:1-9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본문 말씀을 문맥(文脈)의 상황(context)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세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는 섬찟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실로암 타워가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무화과 나무 한 그루를 포도원에 옮겨 심었는데, 삼 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않아 주인이 실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개의 이야기가 각각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3, 5절)

예수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선동적 (煽動的)인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갈릴리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본보기로 갈릴리 사람 몇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면 그 때 희생된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실로암의 타워가 갑자기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도 엄청난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진과 쓰나미 (tsunami)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에 파키스탄과 인도의 접경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 엄청난 사상자가 났습니다. 그보다 더 엄청난 재난이 2004년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일어났습니다. 수마트라 앞 바다에서 쓰나미 (tsunami)가 일어나 인도양 연안의 여러 나라에 밀어닥쳐서 무려 십 육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 때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크리스마스를 경건하게 지내지 않고, 휴양지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쾌락을 좇던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이렇게 이런 말을 했다가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아니다!” (2, 4절) “No, and I tell you again that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too (그렇지 않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렇게 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엄청난 재난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과연 지금 식으로 이렇게 살아가면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자신의 삶을 반성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반면교사 (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행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compassion을 가짐과 동시에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Then Jesus told this story.” (5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이야기 역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이 사람은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을까요? 몇 년 전에 유행하던 “당연하지!” 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은 “당연하지!”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를 심어야지.” “당연하지!” “그러면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당연하지!” “이 사람은 무화과 열매를 기대했을 텐데?” “당연하지!”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삼 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그 사람이 화가 났겠네?” “당연하지!” “이 이야기가 한 해를 보내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지 않을까?” “당연하지!”

무화과나무는 보통은 그냥 길 가에 심겨 있는 나무입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기에 된 것은 그 포도원 농장 주인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와 여러분이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같은 목사님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라고 찬송시를 썼습니다. 한 때는 노예선의 선원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존 뉴톤 목사님이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 목사님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존 뉴톤 목사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라는 영국의 정치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영국 국회에서 노예제도법을 철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윌버포스가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던 사람이 바로 존 뉴톤 목사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존 뉴톤 목사님은 이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데 공헌했습니다.

그냥 길거리 아무 데서나 자라야 할 그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으로 옮겨 심긴 것처럼, 오늘 우리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5:2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주인은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기대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A man planted a fig tree in his garden and came again and again to see if there was any fruit on it, but he was always disappointed (자기 정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은 이 사람은 열매가 열렸는지 보려고 여러 번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실망했습니다).” (6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열매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0-21)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8)

열매를 맺고 안 맺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 책임(責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맡겨진 임무나 의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esponsibility’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응답할 수 있는 (respond) 능력 (ability)’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올바로 응답하는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16편에 ‘구원받은 자의 감사의 찬송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How can I repay the LORD for all his goodness to me)?” (12절) 하나님의 은혜를 이만큼 받았으면 그 은혜에 respond (응답)하고, 그 은혜에 repay (보답)하는 사람, 이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한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올바로 respond하지 못하고, 올바로 repay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5:5 말씀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다 (Master, we'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n't caught anything.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어떻게 시몬 (베드로)이라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응답했는지 그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오랜 그의 경험에서 나온 어부의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이라는 사람은 그날 아침에 자기의 경험을 송두리 채 뒤엎어 버렸습니다.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말씀하시는 그 분 앞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경험과 지식을 송두리 채 부정(否定)해 버린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발명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착상에서 나오는데, 이런 아이디어는 기존의 발상을 깨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상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창의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해왔던 대로, 늘 자기가 믿음생활 해 왔던 방식대로, 그렇게 믿음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한 단계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만일 베드로가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경험이나 자기 상식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but (그러나, 하지만)’ 이 한마디로 자기를 부정했을 때, 베드로는 자기 앞에 서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기 방식을 내려 놓지 않는 사람은 결코 창의적인 믿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믿어왔던 방식대로 믿음생활 고집한다면, 또 다시 우리는 열매 없는 믿음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창의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실망한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베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7절) 우리 말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단순히 무용지물이 아닙니다. 그냥 쓸모가 없는 나무가 아니라 자리만 차지하고, 땅만 버리는 해를 끼치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나무입니다. 한번은 윌리엄 버클리(William Barclay)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The most searching question we can be asked is, ‘Of what use were you in this world?')." ‘searching question’이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묻는 중요한 질문을 말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자신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 “나는 교회에 얼마나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빚을 갚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두 바다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고, 하나는 사해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이 맑습니다. 그 바다에 많은 고기가 삽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아무 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두 바다의 차이점은 한가지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끊임없이 물을 받아 아래로 흘려 보냅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지형상 물이 흘러 나갈 수 없는 바다입니다. 그 결과 하나는 생명의 바다가 되고, 하나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책임 있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열매가 맺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런 사람들은 죽음의 바다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놔 두십시오. 제가 나무 주위에 고랑을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만일 내년에 열매를 맺으면 놔 두시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 버리십시오.” (8-9절) 이 과원지기 덕분에 이 무화과 나무는 다시 일년 동안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중보 하시는 (intercede) 분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울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Reiner Maria Rilke, 1875-1926, 오스트리아)의 시 ‘엄숙한 시간 (Ernste Stunde)’이 바로 그런 시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걷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오늘 한 해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시간,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한 해 동안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기도 덕분에 또 한 해를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식으로 계속 살지 않겠다는,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며 책임 있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 


12/23/2018 | 성탄절 메시지 2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Who Was Born In Bethlehem, The House Of Bread

누가복음 2:1-14

세계 각 나라의 재미 있는 크리스마스 인사입니다.

영어로는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브라질어로는 펠리쓰 나딸 (Feliz Natal)
헝가리어로는 볼록 카락소니 (Boldog Karacsony)
이탈리아어로는 부옹 바딸리 (Buon Batale)
스페인어로는 펠리쓰 나비닷 (Feliz Navidad)
독일어로는 프뢸리히 베인아크텐 (Frohliche Weinachten)
스웨덴어로는 글래드 율 (Glad Yul)
프랑스어로는 즈와이유 노엘 (Joyeux Noel)
희랍어로는 칼라 크리스토게나 (Kala Christougena)
중국어로는 솅탄 쿠와일러 (Sheng Tan Kuailoh)
일본어로는 메리 구리수마수
러시아어로는 스로체스토봄 크리스토빔 (Srozhestvom Khristovym)
필리핀 따갈어로는 말리가양 빠스코 (Maligayang Pasko)
멕시코어로는 펠리츠 나비대드 (Feliz Navidad)
베트남어로는 니언지엡 노엘 쭉 지앙신 부이베에 (nhan dip noel chuc giangsinh vuive)
태국어로는 쓱 싹완 크릿쓰마아쓰 (ssuk ssan oan Christmas)
체코어로는 베셀레 바노체 (Vesele Vanoce!)
미얀마어로는 뾰쉰 차미엣바세 (Pyawshwen chanmyeitbazay)
한국어로는 메리 크리스마스 혹은 기쁜 성탄절 되세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Augustus)였습니다. 그는 BC 27-AD 14년까지 무려 41년 동안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였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통치 시대를 ‘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고 부를 만큼 로마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세금제도를 개선했고, 넓은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망을 구축하여 ‘모든 길을 로마로!’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인구 조사를 하도록 칙령 (decree)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시리아 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총독 구레뇨 (Quirinius)의 지시를 받아 자기들의 고향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아라는 여자와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는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기록한 완벽한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드라마가 재미 있으려면 구성이 치밀해야 합니다. 구성이 치밀하지 않고 엉성하면 보는 사람들이 “에이,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면서 재미없어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얼마나 구성이 치밀합니까? 만일 그 때 아우구스투스가 인구 조사를 하라는 칙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기를 낳았을 것입니다. 또 칙령이 조금만 일찍 내렸거나 늦게 내렸다라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기를 낳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타이밍에 인구 조사를 하라는 칙령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예수님께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이토록 강조하고 있을까요? 제가 베들레헴 마을에 가 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직선 거리로는 약 17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중간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다니지 않았던 그 당시의 관습을 감안한다면 약 230km 정도 거리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걸어서 간다면 약 10일은 가야 하는 거리에 있습니다.

보스턴 다운 타운에 있는 존 행콕 타워 (John Hancock Tower) 옆에 ‘삼위일체교회 (Trinity Church)’가 있습니다. 1877년에 지은 에피스코팔 쳐치 (Episcopal Church)입니다. 지은 지 오래 되었지만, 매우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교회로, 보스턴의 명소입니다. 이 교회는 특히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합니다. 화려하고, 정교하고, 아름답고, 예술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이 교회에 교구 목사 (the rector)로 있었던 필립스 브룩스 (Philips Brooks, 1835-1893)라는 목사님 때문입니다. 필립스 브룩스 목사님은 교육자로서도 유명해서 앤도버에 있는 명문 ‘Books School’을 세우신 분입니다. 필립스 브룩스 목사님은 탁월한 설교자로서 보스턴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브룩스 목사님이 한 달 간의 휴가를 얻어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여기 저기 성지를 돌아보다가 12월 24일 저녁에,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교회 (Church of The Nativity)’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브룩스 목사님은 이 예배를 통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1865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러 성탄절을 맞이한 브룩스 목사님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부를 찬송가를 하나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교회에’서 받았던 감동을 가사로 옮겼습니다. 이 가사를 그 교회 올갠 반주자 레드너 (L. H. Redner)에게 주면서 어린이들이 부를 찬송이니까 쉽게 곡을 붙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부탁을 받은 레드너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곡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꿈 속에서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이 곡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오 베들레헴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브룩스 목사님은 3년 전에 있었던 베들레헴의 감동을 기억하면서 미가 5:2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마을이지만 네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가 나를 위해 나올 것이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you, O Bethlehem Ephrathah, are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 Yet a ruler of Israel will come from you.”

이 선지자의 예언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들어 있는 유다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이 ‘베들레헴’에 밝은 빛이 비추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이 감동의 순간을 브룩스 목사님은 그렇게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영토에 속한 모든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하라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이 있었고, 다윗 가문의 사람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갔고, 거기서 아들을 낳은 것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700년 전의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국의 인구를 조사해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여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통치자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의 계획을 성취할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Bethlehem)’은 유대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탄생하셨습니다. 메시아는 예루살렘이나 로마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큰 도시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명성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메시아가 전혀 주목 받지 않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에서 탄생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beth (house)’라는 말과 ‘lehem (bread)’이라는 말이 합해져서 ‘The House of Bread’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떡집’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2,000년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두개골을 연구해서 얻은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공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진에 이런 설명이 붙었습니다.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얼굴이어서 누구나 쉽게 말을 걸 수 있고, 친해질 수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이다.”

예수님께서 특별할 것이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오히려 반갑지 않습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자기 자신을 보통 사람들과 동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귀신들렸어.’ 내가 와서 먹고 마시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을 봐! 탐욕이 많은 사람이야. 저 사람은 술꾼이야. 세리와 죄인의 친구야.’” (마태복음 11:18-19)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다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its results).” (마태복음 11:19) 내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준 것이 잘 한 일이냐, 잘 못한 일이냐 하는 것은 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빵을 먹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귀족도, 가난한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지위가 낮은 사람도 ‘빵’과 ‘떡’과 ‘밥’은 먹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영어 단어에 ‘availabl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ready for use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at hand (옆에 있어서 손 쉽게 이용할 수 있는)’ ‘accessible (쉽게 다가 갈 수 있는)’ ‘of use (도움이 되는)’ 이런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나 ‘available’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은 다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단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However, those the Father has given me will come to me, and I will never reject them).” (요한복음 6:37)

한 가지 더 ‘베들레헴’ ‘떡집’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단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죽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주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복음 6:35, 48-51) 조금만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빵을 먹고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빵을 먹고 밥을 먹으면 그것이 소화되면서 나에게 힘을 공급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것이 내 삶에서 실천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이 ‘인카네이션’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값싼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먹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만족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be hungry again.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요한복음 6:35)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내게 와서 귀를 기울여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며, 다윗에게 약속한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 (Why spend your money on food that does not give you strength? Why pay for food that does you no good? Listen to me, and you will eat what is good. You will enjoy the finest food. Come to me with your ears wide open. Listen, and you will find life. I will make an everlasting covenant with you. I will give you all the unfailing love I promised to David).” (이사야 55:2-3)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에 이사야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자기 백성들에게 전했던 말씀입니다.

이미 우리는 잘못된 음식을 많이 먹었고, 잘못된 음식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이것이 건강에 좋은 ‘natural food (자연산 식품)’라고, 이것이 ‘organic food (유기농 식품)’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목사의 심정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의 귀가 열려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가 주는 빵을 먹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12/16/2018 | 성탄절 메시지 1

인카네이션 Incarnation

요한복음 1:9-14

설교 시작 전에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는 복음서는 어느 복음서일까요?” 보기를 드립니다. (1) 요한복음 (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3)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4)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한번 정답을 맞춰 보십시오.

성서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때를 대략 서기 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후에 기록될수록 문장도 세련되고, 등장하는 용어들도 다양합니다. 그 때 세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고, 문화와 사상적으로는 그리스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가 사용했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기를 원했던 복음서의 저자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도 이미 기원전 300년경에 그리스어로 번역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을 ‘70인역 (Septuagint)’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벌써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의 2세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100년에 걸쳐 번역 작업을 완성합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72명의 권위있는 유대학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지파에서 6명씩 대표 학자들을 파견했기 때문에 모두 72명의 학자들이 번역에 참여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과감하게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빼고, 이렇게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1-4) 여기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 (λόγος, logos)’입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로고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계속해서 ‘로고스’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로고스’ 사상을 잠시 빌려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지만, 정작 요한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14절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the Word became human① and made his home among us.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②. And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Father's one and only Son. / ①Greek became flesh ②Or grace and truth 직역하면,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로스’ 사상에는 이런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번역합니다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거 재미있는데?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그들은 생소하게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이 말씀을 읽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이 로고스가 인간이 되셔서 우리들 가운데 사셨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incarnare’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in’은 ‘into’를 말하고, 뒤에 나오는 ‘caro’는 ‘육체 (flesh)’를 가리킵니다. ‘육체로 태어나셨다 (to make flesh)’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집을 지으신 (made his home among us)’ 것입니다. 이 말씀이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The Word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with us (말씀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재미있는 번역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그가 번역한 The Message에서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 Word became flesh and blood, and moved into the neighborhood (말씀이 몸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아마도 이 말씀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곱개의 사인 (sings)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가나 (Cana)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1) 이 말씀에 나오는 ‘그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영광을 이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가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인 (sign)’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인을 보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사셨다 (And Christ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on earth among us, Living Bible)”는 ‘인카네이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예수님의 ‘인카네이션’이 주는 교훈은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겸손 (humility)입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도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나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대우, 더 좋은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전 아닙니다. 전 성공적인 삶을 원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에서도 어떻게 하면 정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성경적인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아, 예, 그럼요.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하면서 굽실거리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South Africa)가 말한 것처럼 바닥에 쏟아진 물이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것처럼, 그러다가 제일 낮은 곳을 발견하면 그곳에 고이는 것처럼, 겸손이란 제일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Just as water ever seeks and fills the lowest place, so the moment God finds you abased and empty, His glory and power flow in.” 성공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내 속에 영광을 채우고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공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람인데요. 헨리 나우엔 (Henri Nouwen, 1932-1996, Netherlands)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바드 신학대학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정말 잘 나가는 교수였습니다. 아무 일 없이 보장된 삶을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게 되는 날이 왔습니다. 그 질문은 “지금의 내 삶이 내가 살아야 하는 최선의 삶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삶이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곧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L’Arche Daybreak)’라는 장애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는 하바드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바드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던 것들을 장애인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죽은 후에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여기서 경험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을 이용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By giving words to these intimate experiences I can make my life available to others.” ‘Nouwen Society’에 속한 사람들은 나우엔이 보여준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자신들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한마디로 ‘downward mobility (하향 이동성)’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로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성)’의 삶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사회적인 지위나 조건을 더 높은 레벨로 끌어 올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downward mobility’의 삶은 어떻게 하면 나의 현재의 사회적인 레벨을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갈까 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 놓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그랬습니다. ‘upward mobility’의 삶을 내려 놓고,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선택했더니, 그가 죽고 나서 ‘Henri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의 삶을 흠모하고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우엔이 ‘L’Arche Daybreak’에서 경험했고 발견했던 것들을 책으로 펴 냈는데, 그가 쓴 책마다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모두 39권의 책을 썼는데요. 모두 800만권의 책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책이 28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인카네이션’의 삶은 겸손과 내려 놓음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성공을 지향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어느 삶이 더 가치 있는지, 어느 삶을 내가 선택할 것인지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번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후회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1-12절) 이 말씀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qualification)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o believe and to accept Him (그를 믿고 받아들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무심코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말들의 의미를 밝혀서 책으로 내는 일입니다. 이 일은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생활이 형식적인 생활이 되고, 믿음생활에 변화가 없고, 믿음생활에 능력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全人的)인 결단입니다. 우리의 지적인, 감정적인, 의지적인 결단을 말합니다. ‘holistic commitment’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전인적인 commitment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구원받는다는 값싼 구원을 선포했고, 또 그런 설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는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기독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망가질 것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아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교회가 출현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holistic commitment’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이 곧 나의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같은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카네이션’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식)’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downward mobility (하향이동식)’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크리스천 (Christian)’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2/9/2018 |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마가복음 1:1-11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전 주에는 소망의 촛불을 켰는데, 오늘은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생(生)에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진정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 (shalom)’입니다. 유대인들은 서로 인사할 때 ‘샬롬’하고 인사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당신에게 임하기를!” 이런 뜻입니다.
 
2,000년이 지나서 오늘 우리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소망합니다.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에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인류의 지식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우리의 삶은 편리해졌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소외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늘고 있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적대관계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 나라가 겪는 문제가 단순히 한 나라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전체 인류의 운명과 직결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류는 평화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약 2,500 년 전에 한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이사야 9:6-7)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The government will rest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His government and its peace will never end.” /①Or Wonderful, Counselor 우리는 그 예언자가 예언했던 ‘한 아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이 아기에게 온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그는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1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본격적으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그 일을 미리 준비했던 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역사를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낙타 털로 만든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가죽 혁대를 맸고, 메뚜기와 들꿀 (石淸, wild honey)을 먹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의식주(衣食住)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상대나 해 주겠습니까? 오늘 센트랄 스퀘어에 이런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에게 호감이 가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아니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으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 와서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의 말을 사람들이 들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은 차림새도 이상하지만,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마태복음 3:2)”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요한에 대하여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3:1에는 “보아라. 내가 네 앞에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이런 말씀이 있고, 이사야 40:3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펴라’” 이런 말씀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뉴잉글랜드 노스필드 (Northfield) 출신으로 무디 (Dwight Lyman Moody, 1837-1899)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노스필드는 보스턴에서 서쪽으로 죽 가면 스프링필드에 속한 타운입니다. 무디는 노스필드 출신으로,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일학교 교사로 잠시 섬기다가 시카고로 이사를 합니다. 그가 설교자로, 부흥사로 활약한 곳은 시카고입니다. 시카고에 유명한 Moody Bible Institute가 있고, 무디가 섬기던 교회가 있습니다. 이름이 ‘무디교회 (The Moody Church)’인데, 초교파 교회입니다. 무디의 부흥 사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생키 (Ira David Sankey, 1840-1908)라는 훌륭한 찬양 사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디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생키로 하여금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놓도록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어려운 일 당할 때 (543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214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 (353장)’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 (419장)’ ‘양 아흔 아홉 마리는 (297장)등의 찬송가는 모두 생키가 작곡한 찬송가들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에든버러 (Edinburgh)에서 열린 집회 둘째 날, 그 날 무디의 설교 제목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무디는 생키에게 오늘 설교와 어울리는 찬송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생키는 무슨 찬송을 불러야 할 지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주머니 속에 신문에서 오려 둔 시가 한편 있지 않느냐?  이 시를 가지고 찬송을 불러라!” 이 시는 평생 병으로 고생하다가 39살의 나이에 고아원에서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클레페인 (Elizabeth Clephane, 1830-1869)이라는 여자가 시를 써서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마침 생키가 그 신문을 보다가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들어 그 시를 오려서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었습니다. 생키는 그 시가 하나님께서 주신 시라고 생각하고 즉석에서 곡을 붙여 집회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설교를 마친 무디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생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키, 그 찬송 내가 처음 들어 본 찬송인데, 어디서 났소? 이처럼 내가 감동을 받기는 처음이요.” 그 때 생키가 신문에서 오려 둔 쪽지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즉석에서 작곡한 이 찬송가는 그 후에 한번도 고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디와 생키처럼, 예수님과 요한은 그런 관계였습니다. 설교 전에 생키가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놓으면 이어서 무디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전했던 것처럼, 요한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예루살렘 사람들까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이런 사람들까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갈릴리 요단강까지 가서 세례를 받았다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니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매사추세츠 노스햄턴 (Northhampton)이라는 곳에서 목회했던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 1703- 1758) 목사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학자이고 저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미국의 제 1차 영적대각성 운동 (The First Great Awakening, 1735-1755)을 일으킨 주역이라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에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는 글을 읽고 제 머리 속에 그가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런 열정적인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원고를 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고 합니다. 요즘 같았으면 그런 설교자는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니까 비록 박력 없는 목소리로 하는 설교였지만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것입니다. 깜짝 놀란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의 말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마태복음 3:13-15)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요한이 먼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향하도록 해 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한 사람으로 자기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 빛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들을 비추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빛이 아니었고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 8)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이 때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마가복음 1:19-21) 그냥 눈 딱 감고 “맞습니다. 내가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 만큼 그 때 요한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요한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조사관을 파견할 정도로 주목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성공의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끔 저는 성경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왜 여기에 있지?” 로마서 12:3이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한 판단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Do not overestimate yourself)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우는 교훈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한 판단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은 ‘in accordance with the measure of faith God has given you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믿음의 척도에 따라)’ (NIV) ‘as God has allotted to each a measure of faith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할당해 주신 믿음의 척도대로)’ (NASB) ‘as God has apportioned to each a degree of faith’ (하나님께서 나에게 할당해 주신 믿음의 정도대로)’ (Amplified Bible) 이런 뜻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 (the measure of faith)’에 따라 자신을 평가했던 두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주인공이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모세가 들어갈 자격이 없다면 누가 그 자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그의 후계자로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여호수아에게 기쁨으로 안수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을 평가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맡길 사명은 여기까지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한 사람은 마더 테레사입니다. 1989년 어느 날, 테레사가 측근들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을 때 주변에서 만류했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수녀님이 지금 은퇴하시면 우리 자선회는 어려워집니다. 지금까지 수녀님을 보고 후원금을 냈던 사람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 때 테레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보다 더 겸손하고, 더 헌신적이고, 더 순종적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자선회는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God will find another person, more humble, more devoted, more obedient to him, and the society will go on)."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연(助演)이 있어야 주연(主演)이 빛이 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역할이 주연이신 예수님께서 빛이 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를 위해서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생각할 때, 단호하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했고 (7절),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했고 (7절),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요한복음 3:30)”고 말했습니다.
2,000년 전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위해서 길을 마련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빛나게 해 드려야 할 조연들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지 말고, 우리 각자 각자에게 할당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우리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12/2/2018 | 대강절 첫째 주일 메시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Until Our Lord Jesus Christ Comes Again

데살로니카전서 5:14-24

오늘 읽은 데살로니카전서 5장 말씀은 16-18절 말씀 때문에 유명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개역성경) 그런데, “바울이 왜 여기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데살로니카전서가 기록된 것이 서기 50년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카전서는 갈라디아서와 함께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이보다 약 20년 후에 기록이 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카전서가 기록될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두려움 대신 그들에게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설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장)’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신랑이 한 밤중에 신부를 데리러 오는데 언제, 몇 시에 올 지 모릅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한 밤 중에 갑자기 “신랑이 왔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는 기쁨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 처녀들은 신부가 아닙니다. 이 처녀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신부의 들러리들 (bridesmaids)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들러리들의 마음이 이렇게 설레는데, 자기를 데리러 온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은 얼마나 더 설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대강절을 맞이하는 성도의 마음이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신부의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읽은 데살로니카전서 5장은 이런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카전서 5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23절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날까지 (until our Lord Jesus Christ comes again)’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카전서 5장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바울의 부탁과 격려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카의 성도들에게 다섯 가지 부탁을 합니다.  
 
첫째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6절). 바울은 성도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Everything is peaceful and secure)’고 말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3절) 성도의 삶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면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의 때에 성도들은 깨어납니다. 고난의 때에 기도하고, 고난의 때에 성경을 읽고,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맞습니까? 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맞이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초짜 신자입니다.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 성경이 어떤 책인지, 기도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초짜 신자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은 고난을 맞이하면 하나님을 더 찾습니다. 야보고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받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Are any of you suffering hardships? You should pray. Are any of you happy? You should sing praises).” (야고보서 5:13)
 
성도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평안하고, 안전할 때가 문제입니다. 이 때가 영적으로는 무뎌 있는, 영어로 ‘dull’이라고 하지요? 영적으로 ‘dull’한 때이고,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평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를 경계합니다. 영어로 ‘alert’라고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지금은 아니겠지 하면서 모두가 잠들어 있는 한 밤중에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처럼 오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11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encourage each other and build each other up, just as you are already doing.”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잘 해 온 것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사로를 세워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에서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나만 잘 하면 돼!” 이런 이기적인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나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격려하면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다섯 처녀들을 왜 충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안 됩니다. 기름이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이렇게 서로를 충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신랑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 때서야 자기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그 때 기름을 준비했던 지혜로운 처녀들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안 됩니다. 기름을 나누어 주다가 우리까지 기름이 모자랄 지 모릅니다. 가서 기름을 사 오세요!”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습니다. 그들이 뒤늦게 기름을 사왔지만 문이 닫혀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이 뭐지? 왜 거절하는 거지? 기름을 좀 나누어 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고 세워줘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위로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상대방을 세워주려고 해도 세워줄 수가 없는 critical point가 있습니다. 지금은 문이 열려 있지만, 문이 닫혀서 들어갈 수 없는 critical point가 있습니다. 그 때는 도우려고 해도 도울 수 없고, 상대방을 원망해도 어쩔 수 없는 때입니다. 저의 삶에, 여러분의 삶에, 우리의 삶에 이런 critical point가 있습니다. 그 때가 되기 전에, 서로 선한 충고를 하고 충고를 들어야 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서로를 세워주고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습니다.
 
셋째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16-18절). 저는 이 세 가지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in Christ Jesus)’라는 말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in Christ Jesus’라는 말을 ‘who belong to Christ Jesus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과,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슬퍼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고단한 삶을 살아왔든지 간에, 그 힘들었던 시간들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그 동안 힘들었던 일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에게는 힘들었던 시간보다는 신랑을 만나는 기쁨이 더 큽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종말론적인 기대와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4:4-5에 같은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Let your forbearing [spirit] be known to all men. The Lord is near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참음과 인내를 알게 하십시오. 주님이 가까이 와 계십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동안 참고 인내했던 힘든 시간이 끝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고난 중에도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을 옳게 잘 분별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이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한 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감사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2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우리의 믿음 하나만 보시고 우리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의 자리로 옮겨 주셨습니다).”
 
넷째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막지 말고, 예언의 말씀을 하찮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19-20절). 여기서 ‘막는다’는 말은 ‘억제하다’ ‘불을 끄다’ ‘억누르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들, 말씀하시는 것들을 실천으로,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격려하라고 말씀하시면 격려하고, 성령께서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시면 뒤로 미루거나 지체하지 말고 도우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시키시면 그 마음을 억제하지 말고 감동이 있는 대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번 ReNEW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체 집회 말씀이 좋았고, 세미나가 다 좋았다고 합니다. ‘좋았다’는 말은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전체 집회에서 은혜 받았고, 세미나에 들어갔다가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억누르지 말고 실천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Do not stifle the Holy Spirit”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tifle’이라는 말은 억제하거나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말씀드립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은 대부분 우리의 사명과 헌신과 결단에 대한 일들입니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성경께서는 많은 경우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상식에 벗어나는 일들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95% 이상은 그렇습니다. 5% 정도는 성령께서 상식에 벗어난 파격적인 일을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령께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의 사모님이 기도를 많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 사모님은 갑자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목을 붙들거나, 어깨에 손을 얹거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기분이 언짢지만 그냥 가만이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왜 이러시느냐고 언짢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모님이 “성령께서 장로님에게 가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런 일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고, 목사님은 목회를 접어야 할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막지 말라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또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성령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고 하면서 사람을 찾아가서 몰상식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정말 그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들었는지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자신을 지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3절). 우리의 영과 혼과 몸, 모두를 깨끗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몸과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 것처럼,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온 몸, 곧 영 (the spirit)과 혼 (the soul)과 육신 (body)’을 잘 지켜야 합니다. 금욕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 (spirit)’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몸 (body)’는 학대하거나, 막 굴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상에서는 영과 몸을 구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 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 이 말씀에서 ‘몸’은 단순히 ‘body’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전체를,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한 마디 말씀이 우리의 삶 전체를 컨트롤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 지 모르니까 깨어 있어야 하고요. 서로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서로를 세워줘야 하고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요.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하고요. 우리 영과 혼과 몸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