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6/3/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7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II The Christian Way of Life
베드로전서 3:1-7
오늘부터 그 동안 사정 상 중단했던 베드로전서 강해설교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시작하려고 보니, 오늘 본문(本文) 말씀이 남편과 아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미 결혼하신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래에 허즈번드와 와이프가 될 청년들에게도 오늘 말씀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에 대한 사회적인 관습과 인습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2,000년 전에 기록되었고, 구약성경은 약간의 다른 의견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찍 기록된 성경은 B.C. 1,50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 중에 일찍 기록된 성경은 적어도 3,5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을 때 해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물론 어떤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성경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해석학적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지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각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달라서 어떤 사람은 이러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저러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나처럼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여러분에게 좋습니다.” 또 이 말씀 뒤에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이제 여러분이 편지에 언급한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에 관해 말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현재 겪고 있는 위기를 생각하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현재대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7:25-26)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결혼한 사람들은 모두 성경 말씀을 어긴 것이 되지 않나요?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해석의 단서(端緖)가 나와 있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위기를 생각하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현재대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7:26) “결혼한 뒤에는 이 세상에서 겪는 환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7:28)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결혼 생활에 골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The time that remains is very short. So from now on, those with wives should not focus only on their marriage).” (7:29) “세상 일에 마음을 쓰지 말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십시오.” (7:32-34) 여기 ‘위기’ ‘환난’이런 말들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을 때, 교회는 ‘위기’와 ‘환난’의 때를 맞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것이 대략 55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제외한 다른 복음서보다도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이 때 바울을 위시해서, 그 당시 교회에 흐르고 있었던 것은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임박한 종말론 (Imminent Eschatology)’이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는데, 결혼이니 뭐니 하면서 마음을 쓰지 말고 다시 오실 주님께 온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지내라고 한 것은, ‘임박한 종말론’이 팽배해 있던 그 시대에 필요했던 한시적(限時的)인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고 느낀 점은 여전히 베드로의 편지 속에 남성 중심의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 둘 중 누가 더 dominant한 위치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며, 그리스도로 옷을 삼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3:26-29)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 시대의 관습과 인습을 타파한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역시 그 시대의 제약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아내들은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십시오.” (에베소서 5:22)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됨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5:23) 이런 말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록 남편들에게 아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면서도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완전히 뛰어 넘지는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말씀도 그렇습니다. 아주 혁명적인 말씀이 나오는가 하면, 군데군데 여전히 남성 중심의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든지,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고, 남편의 권위에 순종했다는 표현들입니다. 바로 이런 점들을 보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역사적인 시대의 산물(産物)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쓴 편지는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아내들의 온전한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들이 그런 아내의 행동을 보지 않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아내의 행동이 남편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아내의 온전한 행동이란, 화려한 옷이나 보석으로 겉모습을 치장하려고 하지 않고,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을 가지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했던 믿음의 여자들을 보면 모두 보이는 외모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아름답게 꾸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어찌 아내에게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왜 아내들만 온전한 행동을 해야 하지요? 남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남편들에게도 똑 같이 요구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아내들만 온전한 행동으로 남편을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들도 온전한 행동으로 아내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마땅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들은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아내들은 남편의 권위 (authority)에 순종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했던 예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들고 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 (master)’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모두 사라의 본을 받아서 사라의 후손들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instance, Sarah obeyed her husband, Abraham, and called him her master. You are her daughters when you do what is right without fear of what your husbands might do (예를 든다면, 사라는 그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면 순종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남편들이 행하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올바로 행한다면 여러분은 사라의 딸들이 되는 것입니다).” (6절)
아내들이 남편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 역시 오늘 우리의 관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직장에서도, ‘권위’라는 말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권위적인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인기가 없습니다. 리더십에도 ‘권위적인 리더십 (authoritative leadership’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 대신 ‘섬김의 리더십 (servant leadership)’이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섬기는 섬김의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는 “아내들은 남편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베드로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시대에 맞도록 해석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체적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남편들이 아내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e same way, you husbands must give honor to your wives. Treat your wife with understanding as you live together (마찬가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아내들과 함께 살아갈 때, 아내들을 이해심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7절)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 번역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편들에게 아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들도 남편에 대한 지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결혼(結婚)이 무엇인지, 결혼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결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결혼에 대한 최초의 성경 말씀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그를 도울 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이 잠든 사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에게서 꺼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아담에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말했습니다. ‘아,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므로,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보여주는 것은, 결혼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나에게 맞는 ‘도울 짝 (a helper suitable for him)’을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도울 짝’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동역자’입니다. 결혼해서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라고 ‘동역자’를 붙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임의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마태복음 19:6) 적어도 우리 크리스천 남편과 아내는 우리의 결혼 속에 이런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들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에 대하여,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서로 지식이 없습니다. 결혼한 남성의 심리는 어떤 것인지, 또 결혼한 여성의 심리는 어떤 것인지, 책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남편들은 아내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어떤 심리적인 변화가 겪는지, 또 몸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끝으로, 베드로는 아내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연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존중하십시오. 그리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7절) 여러분, 1세기에 살았던 베드로가 아내에 대하여 ‘honor’ ‘respect’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베드로는 아내에 대하여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he may be weaker than you are, but she is your equal partner in God's gift of new life (아내가 당신보다 육체적으로 약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내는 새생명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당신과 똑 같은 권리를 가진 파트너입니다).”
가정의 행복, 결혼생활의 행복은 우리의 ‘영성 (spirituality)’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결혼생활이 행복하면 기도의 채널이 뚫린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이 말씀이 맞습니다. 어쩌다가 아내와 불화가 있고, 말다툼이 있고 하면, 주일을 맞이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고, 입에서 설교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불문율(不文律)을 정했습니다. 주일이 되기 전에 서로 화해하고 마음을 풀기로요.
결혼생활이 행복하면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그렇습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하지 않으면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상대해 주지 않고, 무시하고, 무관심하면 결과적으로 서로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는 상대에 대한 지식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한 ‘honor’와 ‘respect’로 자존감을 높여 나가야 합니다.
5/27/2018 | 야외예배 설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He Will Certainly Care For You.
마태복음 6:25-34
오늘 야외예배를 맞이해서 싱그러운 대자연 속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기분이 새로운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자연 속에 들어오면 기분이 설레고 상쾌해 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①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② 나무들로부터 몸에 좋은 기운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③ 자연 속에 들어 옴으로 나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④ 그냥 기분이 좋으면 됐지 이유는 알아서 뭘 하나? ⑤ 정말 어려운 문제다. 여러분이 동의하든 안 하든 저의 대답은 ③번입니다. 한번 주변을 돌아 보십시오. 풀 한 포기, 이름 모를 들꽃, 그리고, 나무 한 그루까지, 5월을 맞이해서 제각기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고요. “왜 저 나무는 저기 서 있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구만!” 이런 것이 없습니다. 어느 때는 죽은 나무도 있고, 넘어져 있는 나무도 있는데, 그런 것까지도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립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마태복음 6장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딱 두가지입니다. 공중에 날아 다니는 새, 들에 피어 있는 백합 한 송이. 들풀 한포기, 누가복음에는 까마귀도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복음 12:24)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도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들일까 보냐! 얼마나 더 소중하게 여기시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지금 막 졸업식들이 끝났습니다만, 서부에 있는 어느 학교는 아직도 졸업식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왜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희생해 가시면서도 여러분을 후원하고 기르시는 것입니까?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아무도 안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니까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고, 손 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양주동 선생이 가사를 쓰고, 이흥렬 선생이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부모는 왜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시는 것입니까? 다른 이유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딸들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adoption)”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8:15). “You received God's Spirit when he adopted you as his own children. Now you call him, ‘Abba, Father.’”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이런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 말씀의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 (identity)’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아닙니까? 미국에서는 드라이버스 라이선스가 증명서 (Identification Card)입니다. 드라이버스 라이선스가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해 주는 증명서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증명서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확실한 증명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입니다. 우리는 원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차여차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우리가 양자가 되었다는 (We were adopted as God’s children) 말씀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의 중요성을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운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돌보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를 위해서 아까운 것이 없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주셨는데, 무엇인들 아깝다 하시겠습니까 (Since he did not spare even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 won't he also give us everything else)?” (로마서 8:32)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베드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큽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 (유대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자기들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이유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지중해 연안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했잖아요? 이 사람들을 우리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Diaspora Christians)’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유대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베드로의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겼을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낯선 외국 땅으로 피난 가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무엇보다도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충고한 내용들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의 편지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7) 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얼마나 염려하는 일들이 많고, 걱정하는 일들이 많았겠습니까? 언제 로마 군인들이 들이닥칠 지 알 수 없는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그들은 하루 하루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했던 위로와 충고의 말씀은 “Give all your worries and cares to God, for he cares about you”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그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도, 걱정도, 불안도, 모두 맡기세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베드로의 이 말이 베드로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두 주님에게 배운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25-26, 30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He will certainly care for you)!” “아니, 하늘에 날아다니는 까마귀도,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너희는 나의 제자들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를 얼마나 더 잘 보살피시겠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Why do you have so little faith)!” 이 마지막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너무 근심과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불확실성 (the age of uncertainty)’이 우리에게 더 많은 걱정과 불안을 안겨 주는 것 같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미래도 불확실합니다. 단순히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어둡습니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감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때에 청년들은 다원주의 사상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왜 교회를 꼭 나가야 하는지, 왜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왜 꼭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설적으로,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확실한 것을 붙잡는 것 아닌가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일 아닙니까? 그래서 그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는 성경의 메시지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에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23-25)
이 ‘불활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앞으로 오는 시대에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야외예배를 맞아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그렇듯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삼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 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care) 계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존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gentiles)’이나 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5/20/2018 | 성령강림주일 메시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 Freedom in The Spirit
고린도후서 3:6-18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 때가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영어로는 ‘Pentecost’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로는 ‘Pentekoste’라고 하는데요. ‘fiftieth (50번째)’라는 뜻입니다. ‘유월절’ 다음 날부터 계산해서 50번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명절 중에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입니다. 크리스천들 중에도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한 날이 ‘오순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순절’이라는 말은 유대교 명절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성령강림절’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밖으로 뛰어 나가 자기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설명했을 때, 예루살렘에는 ‘오순절’을 지키러 온 많은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2:14부터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 여러분, 지금 저희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주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까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오늘 저희들에게 바로 요엘 예언자가 예언했던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2:14-18).”
성령을 체험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사람들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꿉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 오시면, 일상적인 일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꿈을 꾸고, 비전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삶은 메마르고 상상력이 고갈된 삶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개미 쳇바퀴 돌 듯이 같은 생활을 반복합니다. 그 어디에도 꿈과 상상력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오해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좀 이상해 지는 것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행동하는 것도 정상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기도한다는 명분으로 교회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어 단어에 ‘mundan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everyday (매일의)’ ‘common (보통의)’ ‘ordinary (평범한)’ ‘banal (새로운 것이 없는, 신선하지 않은)’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 ‘unimaginative (상상력이 없는)’이라는 뜻도 있고요. 좀 더 이 단어의 뜻을 얘기한다면, 이 ‘mundane’이라는 말에 ‘of or relating to this world as contrasted with heaven (세상과 관계되어 있다는 뜻으로 천국과 관계되어 있다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단어가 이 ‘mundane’이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유태인들의 얘기를 좀 한다면, 유태인들의 교육 방식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2014년에 ‘노아 (Noah)’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이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기독교인들이 큰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니까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막상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영화에 fantasy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영화를 보면서 비성서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감독한 대런 애러노프스키 (Darren Aronofsky, 1969-현재)에게 이런 비성경적이라는 비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나는 ‘노아’가 전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식의 성경 이야기를 듣고 성장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fantasy가 없고, 꿈이 없는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을 받고 자란 것입니다. 그 차이가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꿈이 없고, 상상력이 메마르면, 논문을 써도 탁월한 논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소설을 써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탁월한 소설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이 없는, 상상력이 메마른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늘 남이 해 놓은 것을 뒤따라 가기에 바쁩니다. 앨버트 아인스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이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 For knowledge is limited to all we now know and understand, while imagination embraces the entire world, and all there ever will be to know and understand (상상력은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식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지금 이해하고 있는 것에 국한 되지만, 상상력은 온 세상을 포용하고, 그리고 앞으로 알아야 할 것들과 앞으로 이해해야 할 것들까지 모두 포용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우리의 삶에 예언과 환상과 꿈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말씀이 성경 말씀에 나옵니다. 요엘 (Joel)은 B.C. 8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백성들의 삶이 피곤하고 힘들었을 때입니다.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기근과 재앙이 계속 되던 때였습니다. 이런 고난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미래에 있을 일들을 예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예언과 환상과 꿈을 꾸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게 되고, 젊은 청년들은 환상을 보게 되고, 어른들은 꿈을 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누구든지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날이 지금이라고,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했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예배를 통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것은 두가지입니다. 먼저 성령에 대한 여러분의 편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잘못된 사전 지식을 버려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에 예언과 환상과 꿈을 불어 넣는 일입니다. 성령은 지루하고, 일상적인 우리의 삶에 상상력을 불어 넣고, fantasy를 공급합니다.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모두 예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전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이 그들 앞에 열렸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목적이 주어졌고, 삶의 의미와 삶의 열정(熱情)이 주어졌습니다. 내가 이것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믿음과 확신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한 바른 생각을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소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함 (freedom)’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노예가 있어서 돈으로 사람을 사고 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노예는 물건과 같이 취급 되었기 때문에, 노예에게는 아무런 자유가 없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구약 성경 시대에도 노예가 있었고, 신약성경 시대에도 노예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thirty pieces of silver)을 받고 팔았다 (마태복음 26:15)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은 삼십이 바로 그 당시 노예 한 사람 값이었습니다. 누구나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스스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불렀던 사람이 있습니다. “나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특별히 선택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 약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소식입니다.” (로마서 1:1-2)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slave)이라고 불렀을까?”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유함’은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을 때 얻는 것입니다. 돈, 성공, 출세, 명예, 지위, 우리가 이런 것들에게 얽매이기 쉽습니다.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면 우리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이면,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사람은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빌립보서 4:11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 낼 줄도 알고, 부유함을 누릴 줄도 압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궁핍할 때나, 어떤 형편에 처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3:6-18을 보실까요? 이 말씀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새 언약 (The New Covenant)’의 일꾼이라고 하면서 ‘옛 언약 (The Old Covenant)’과 ‘새 언약’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을 상징하는 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옴으로써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 언약’이 맺어졌기 때문에 ‘옛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의식을 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율법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 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로마서 8:2에서는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 (the law of the sin and death)’이라고 했고, 복음을 ‘생명의 성령의 법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 왔을 때 그 얼굴이 빛이 났던 사실을 상기 시킵니다. 그 때 모세의 얼굴의 빛이 찬란해서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기를 겁을 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얼굴에 베일 (veil)을 썼습니다. 이 이야기가 출애굽기 34장에 나옵니다.
바울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죄와 사망의 법’을 위해 헌신했던 모세의 얼굴이 그렇게 빛이 났다면,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할 ‘생명의 성령의 법’을 위해서 헌신하는 우리의 사역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8-9절) 바울은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는 수건이 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주님께 돌아오면, 그 수건이 벗겨져서 모든 것을 환하게 알게 됩니다.” (15-16절)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17-18절) 누구든지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그 수건이 벗겨지는 것처럼, 누구든지 주님의 성령이 그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수건을 쓰고 희미하게 보던 사람이 수건을 벗고 맑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깨닫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제일 먼저 성령께서 이 말씀을 잘 깨닫게 해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깨닫는 ‘자유함’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함’의 한 예 (an example)에 불과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자유하게 한다는 말은 더 이상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소유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사람이 소유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는 소유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한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discarded everything else, counting it all as garbage, so that I could gain Christ).” (빌립보서 3:7-8)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삶에 들어 오시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I am a slave of Christ Jesus)”라고 고백했던 사도의 신앙고백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5/13/2018 | 부활절 일곱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On The Road to Emmaus
누가복음 24:13-27
두 사람이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11km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지 성경 어디를 읽어 보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글로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꽤 이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글로바’의 아내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도망 가고, 제자 ‘요한’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고, 용감한 몇 명의 여자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모든 일들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요한복음 19:25).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누구라고 하면 알 정도로 꽤 이름이 있었던 ‘글로바’가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면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매우 침통하고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같은 방향으로 가던 한 낯선 사람이 두 사람에게 얘기를 겁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이 낯선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보면 “But God kept them from recognizing him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 보지 못하도록 하셨다., 누가복음 24:16)”이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 중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 같은데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글쎄요. 무슨 일입니까?” 두 사람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모두들 그 분이 메시아라고 기대 했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오늘로 삼 일째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갔던 여자들이 하는 말이 무덤이 비어 있었고,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던 그 분의 제자들 중에 몇 사람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대로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참 답답하네요. 두 분은 왜 예언자들이 쓴 글을 믿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간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모세가 쓴 글에서부터 예언자들이 쓴 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성경 말씀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날은 벌써 어두워졌습니다. 두 사람이 말합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묵으시지요.” 이렇게 해서 그 날 저녁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묵게 되고,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열려 이 분이 예수님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두 사람이 말합니다. “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불타는 것 같지 않았는가?” (32절) 두 사람은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달려 갔습니다. 열 한 제자들과 그 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제자들에게 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오늘의 이 말씀을 화폭에 담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으로 이 말씀에서 느낀 감동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카라바조 (Caravaggio)가 그린 ‘Supper at Emmaus (1602-1603)가 유명하고, 네델란드의 마티아스 스톰 (Matthias Stom)이 그린 ‘Supper at Emmaus with Candlelighted (1633-1639)’도 유명합니다. 또 빛의 화가 렘브란트 (Rembrandt)가 그린 ‘A Supper at Emmaus (1648)’도 많이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들은 모두 두 제자가 식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했던 그 순간을 포착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엠마오로 가는 예수님과 두 제자를 그린 로버트 준트 (Robert Zund)의 ‘The Road to Emmaus (1877)’입니다. 준트는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든 늦은 오후 길을 예수님과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을 같이 걷고 있는 감동적인 장면을 그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저는 두 가지,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제 2차 대전 말기에, 중국 오지의 시골 길을 의심에 잠긴 한 사진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 주님! 주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여 주신다면 저는 믿겠습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에 들려 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런데, 그곳은 눈이 녹으면서 질퍽질퍽한 들판 길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에 따라 말에서 내려 그 질퍽질퍽한 들판 길을 장면을 찍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해 보았더니, 뜻밖에도 온유와 사랑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 사진이 한참 유행했습니다.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리빙 룸에 걸어 놓은 집들이 많았습니다. 그 액자에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God is the head of this house, the unseen guest at every meal and the silent listener at every conversation).”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가지고 끼어드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우리가 바라던 것들이 끊어지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쉽게 만나게 됩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왜 쉽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까?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예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Lord, You told me when I decided to follow You, You would walk and talk with me all the way. But I'm aware that during the most troublesome times of my life there is only one set of footprints. I just don't understand why, when I need You most, You leave me." He whispered, "My precious child, I love you and will never leave you, never, ever, during your trials and testings. When you saw only one set of footprints, It was then that I carried you."- In The Story of The Footprint on The Sand (‘모래 위의 발자국’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Athens)에서 설교했을 때, 제일 먼저 꺼냈던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He is not far from any one of us.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사도행전 17:27-28)” 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교리적으로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어제 새벽 기도에서 요한일서 5장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심으로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We know that God's children do not make a practice of sinning, for God's Son holds them securely, and the evil one cannot touch them).” (요한일서 5: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요한복음 14:18)”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둘째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회심 (conversion)’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았는가?” (누가복음 24:32) 바로 이 마음이 뜨거웠던 그 시간이 이 두 사람에게 ‘회심’이 일어났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전에서 ‘회심 (conversion)’에 대한 정의를 찾아 봤더니,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a change of attitude, emotion, or viewpoint from one of indifference, disbelief, or antagonism to one of acceptance, faith, or enthusiastic support,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 태도와 감정과 관점(觀點)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회심’에 대한 정의를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최근에 일어난 일들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에게서 배운 말씀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모두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때 그들이 품었던 열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들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들의 식은 가슴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길에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가슴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던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화되는 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런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히 냉소적인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 측에서 보면 워낙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한동안 사울을 인정하지 않고 경계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회심’은 사람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요즘에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놓고, 뉴스에 ‘CVID’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Complete (완전한), Verifiable (검증할 수 있는), Irreversible (되돌릴 수 없는) Dismantlement (해체)’라는 뜻입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말이 ‘Irreversible’이란 말이지요. 한자로,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고 합니다. ‘회심’이란 그런 것입니다. ‘불가역적’입니다. 한번 ‘회심’이 일어났으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회심’을 했다고 하면서 예전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회심’이 온전한 ‘회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북한에게 ‘CVID’를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북한의 ‘회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회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한번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드렸으면 ‘불가역적’이 되어야 합니다. 한번 내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기로 결심했으면, 이것은 내 인생에 ‘불가역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 그랬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만일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6)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갈라디아서 2:2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나는 내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7-8) 그의 ‘회심’은 일시적인 감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Complete (완전한), Verifiable (검증할 수 있는), Irreversible (되돌릴 수 없는) Dismantlement (해체)’였습니다. 우리에게 ‘회심’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은 지금의 우리의 삶에 대한 이런 ‘해체’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주변에서 '회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많은데,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회심'한 사람들은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회심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존 웨슬리 (John Wesley)의 회심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우리는 생의 의미와 생의 가치를 상실한 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태국에서 ‘목청(木淸)’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목청’은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나무는 높이가 30-40m 정도 되는 나무도 있고, 무려 50m나 되는 높은 나무도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것입니다. 태국 현지인 한 사람이 50m나 되는 높은 나무에서 꿀을 따고 내려 오면서 너무 높아 무서워서 밑을 내려 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청’을 채취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피디가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청’은 위험한 일이어서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서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위험한 일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지금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우리 가슴에 열정을 불어 넣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내가 살 동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회심’함으로써 의미 있고, 가치 있고, 가슴 떨리도록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메시지입니까? 정말 여러분이 지금까지 결정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결정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삶에 ‘회심’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태국에서 ‘목청(木淸)’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목청’은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나무는 높이가 30-40m 정도 되는 나무도 있고, 무려 50m나 되는 높은 나무도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것입니다. 태국 현지인 한 사람이 50m나 되는 높은 나무에서 꿀을 따고 내려 오면서 너무 높아 무서워서 밑을 내려 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청’을 채취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피디가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청’은 위험한 일이어서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서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위험한 일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지금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우리 가슴에 열정을 불어 넣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내가 살 동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회심’함으로써 의미 있고, 가치 있고, 가슴 떨리도록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메시지입니까? 정말 여러분이 지금까지 결정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결정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회심’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5/6/2018 | 어버이주일/졸업예배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라! You Are The Light And The Salt of The World!
마태복음 5:13-16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예배를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 졸업하는 교우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두 번째는 부모님께 감사 드려야 할 것입니다. 보스턴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타주에서 왔거나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입니다. 여러분들을 타 주에, 혹은 외국에 보내 놓고 부모님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맘 고생 많으셨겠습니까? 또 여러분들이 건강하게 학업을 마치도록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겠습니까?
‘어머님의 은혜’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 가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윤춘병 작사, 박재훈 작곡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감리교 목사님들 입니다. 윤춘병 목사님 (1918-2010)은 교회 역사학자로 존경 받는 목사님 이고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박재훈 목사님 (1922-현재)은 캐나다에 계시는 목사님 인데, 최근까지도 왕성하게 작곡 활동을 하시고 계시고요. 동요 작곡자로 많이 알려진 목사님 입니다.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이렇게 시작되는 ‘구슬비”, “송이 송이 눈꽃 송이 하얀 꽃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꽃송이” 이렇게 시작되는 ‘눈꽃송이’, 이런 동요를 지으신 목사님 입니다. ‘어머님 은혜’는 이런 가사로 시작합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키우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1절)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2절)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님의 큰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 드리자/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3절)”
부모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도 넓습니다. 저도 어머님 살아 계실 때는 저를 위해서 어머님께서 늘 기도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고마운 줄 몰랐습니다. 엄마니까, 엄마는 당연히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까 새삼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뭔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한 시간이나 넘게 하셨다고 합니다. 비록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씀이었다고 해도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님의 소망은 한가지입니다. 고생 안 하고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모님들의 소망을 더 거룩한 소망으로 승화 시켜야 합니다. 올바른 인생의 목적을 설정하고, 나만 잘 되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미리 우리의 삶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근대 철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년-1626년)은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거미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조형미가 있고, 균형미가 있는 거미줄을 치는지 참 신기합니다. 거미줄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날아가던 새나 곤충들이 날아가다가 거미줄에 걸립니다. 그러면 거미는 숨어 있다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새나 곤충을 꼼짝 못하게 거미줄로 옭아매서 잡아 먹습니다. 거미와 같은 사람이란, 거미처럼 비상한 지능과 재주가 있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남을 유인하고, 음모를 꾸미고, 해치고, 빼앗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로, 베이컨은 개미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함을 상징하는 곤충입니다. 성경에도 "게으른 사람은 개미가 하는 것을 잘 보고 지혜를 얻어라. 개미는 지도자도, 장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에는 먹이를 준비하고, 추수 때에는 그 음식을 모은다 (잠언 6:6-8)"는 말씀이 있습니다. 개미가 열심히 일하여 양식을 모읍니다. 마찬가지로, 개미와 같은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여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만 다른 사람의 필요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이컨은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꿀벌은 열심히 일하여 꿀을 모아서 자기만 먹고 살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게 꿀을 줍니다.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에게도 유익을 줘서 열매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인간에게도 꿀을 선물합니다. 꿀벌과 같은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자기만 복되게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거미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미 같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도 잘 되고, 모든 사람이 잘 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16절) New Living Translation 영어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착한 행동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비춰서 볼 수 있도록 하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크리스천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good deeds (착한 행동)’를 다른 사람들이 보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도,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사는 목적도 따지고 보면 ‘good deeds’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good deeds’라는 것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타고 난 인간성이 변화되어야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먼저 변화되기 위해서요. 그래서 우리가 ‘good deeds’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요.
바로 이 점이 우리 기독교가 ‘인본주의 (humanism)’와 다른 점입니다. ‘humanism’은 인간의 능력과인간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상 체계를 말합니다. 자연히 ‘인본주의’는 인간의 가능성에 큰 가치를 부여 하게 되고, 인간의 자율성과 자아 실현, 자유 의지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데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성이 악한 인간은 본성이 변화 되기 전에는 ‘good deeds’를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신본주의 (theocentricism)’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인간의 본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 되지 않으면 ‘good deeds’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이 변화 되어야 비로소 ‘good deeds’를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good deeds’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good deeds’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세상에 들어가서 행해야 하는 ‘good deeds’는 마치 소금과 같은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13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의 역할은 음식을 신선하게 썩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입니다. 식품을 소금에 절여 두면 오랫동안 두고 먹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닷물의 염도가 몇 %인지 아십니까? 평균 3.5%인데, 바닷물은 썩지 않습니다. 생리 식염수 (Saline solution)의 염도는 몇 %인지 아십니까? 0.9%입니다. 사람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 염도에 맞춘 것입니다. 이 정도의 염도만 유지되면 실온에 둬도 썩지 않습니다.
또한,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적당한 소금이 들어간 음식은 맛이 있습니다. 음식은 간을 잘 맞춰야 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음식은 싱거우면 맛이 없습니다. 물론 음식이 짜면 먹기도 어렵고,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6년 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 진귀한 사진이 실렸는데요. 아마존 정글에서 나비 (Dryas iulia butterflies)가 거북이 눈에 앉아 있는 사진입니다. 처음엔 그냥 이 사진이 신기하게만 보였는데, 알고 봤더니, 나비가 거북이 눈에 앉아서 거북이 눈물을 빨아 먹는 것입니다. 나비들이 꽃에서는 소금을 섭취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북이 눈물에 들어 있는 소금기를 빨아 먹는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지혜입니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세상에 들어가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신선하게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생의 의미와 기쁨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소금의 질 (quality)을 잘 유지해야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quality’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크리스천의 ‘quality’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소금이 되어 버립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4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때문인지 모르지만, 선조(先祖)들은 교회를 지을 때 언덕 위에다 지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어디서든지 잘 볼 수 있도록 그런 자리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15절) 됫박 안에 등불을 넣어 두면 주변을 밝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등불도 조만간 꺼지고 맙니다. 그러나, 등불을 등잔 위에 올려 놓으면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바다에 방향을 잡아 주는 등대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이 환하면 등불을 밝혀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변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올해는 어느 학교에 누가 와서 졸업식 연설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년 전에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1946-현재)가 하버드에 와서 졸업식 연설을 했습니다. 꽤 긴 연설이었는데요.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은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무찌를 악당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이 세계엔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민족 간의 증오, 계급 간의 증오, 정치적 증오, 종교적 증오가 있지요. 이것들은 여러분들이 무찔러야 할 악당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악당들이 많다고요. 그래서 이 시대는 그들을 무찌를 영웅들의 출현을 기다린다고요. 그의 연설 속에 위트가 있고, 번쩍이는 시대에 대한 통찰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졸업생 여러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세상에 꼭 필요한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되십시오. 어디를 가든지,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십시오. 하지만, ‘거미’같은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개미’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꿀벌’같은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자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한가지 소원입니다.
스필버그의 연설처럼,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행운아들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든지, 세상은 거짓, 위선, 불법, 이기주의, 차별의식 등으로 오염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하면, 이 세상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힘든 시대에 태어났다고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할 일 많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목적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소금 같은 사람으로 살고, 빛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유지해야 하고, 빛은 계속해서 주변을 밝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크리스천의 정체성 (identity)을 유지해야 합니다. 소금이 ‘quality’를 유지하고 짠 맛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금이 녹아야 합니다. 녹아서 자신이 없어져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자신이 녹아 없어지지 않으면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고, 자신이 타서 없어지지 않으면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제발 어렵게 학위를 받았으니, 이 학위가 나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발판이 되리라는 세상적인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이 소금으로, 빛으로 섬겨야 할 자리를 찾아 낮은 곳으로 내려 가십시오. 마음 속에 성공에 대한 유혹이 들어 올 때는 주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이 교회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이곳 케임브리지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학창 시절을 보냈던 이 교회, 여기서 믿음의 친구들을 만났고, 여기서 여러분의 꿈과 장래의 희망을 가지고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누었던 여러분의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여기서 성경을 펴 놓고, 간사님들과 팀원들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었던 이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갔던 아름다운 예배와 찬양이 있는 이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이 교회는 늘 그 때마다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