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6/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3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hepherd.

시편 23편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성경 낭독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대회는 성경 시편 23편을 감동적으로 잘 읽어서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사람을 선정하는 대회였습니다. 당연히 유명한 성우나 아나운서들이 많이 응모를 했고, 그 밖에 사회적으로 이름난 명사(名士)들이 많이 응모했습니다. 대회 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대회의 결과를 예측했습니다. 이번 대회는 누가 제일 유리할 것이라는 말들이 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올라가서 시편 23편을 읽는데 끝날 때마다 큰 박수가 나왔습니다. 정말 누가 잘 읽는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대회가 거의 끝날 무렵에 한 사람이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우승자로 예상했던 사람들이 이미 순서를 마쳤기 때문에 대회장이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사회자가 이 사람을 소개했는데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의 순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이렇게 낭독을 하는데, 처음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장내가 조용해졌습니다. 이 사람이 낭독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예상 외로 박수가 많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우승할 것이라고 자기들마다 우승자를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심사위원장이 나와 심사평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심사위원장은 우승자로 지목되던 사람들을 칭찬했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너무 아름다워서 이 시편을 읽기에 적합한 목소리였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무명의 사람에 대하여 심사평을 했습니다. “이 분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 시편에 나오는 목자가 누구인지 알고 읽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잘했지만, 우리 심사위원들은 이 분에게 1등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23편은 그렇게 유명한 시편입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이 시편의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 시편을 가사로 해서 작곡을 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 한국 작곡가 나운영 씨가 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찬양곡이 유명합니다. 여러분들도 대부분 여러 번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곡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참 아름다운 시편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읽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편의 말씀을 아름다운 캘리그라피 (calligraphy)로 써서 액자에 넣어 집을 장식합니다. 또 5절에 나오는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내 잔이 넘칩니다)!” 이 말씀은 머그 (mug)에 써 넣으면 참 어울릴 것 같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냥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말씀 이상입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삶과 죽음, 생사(生死)를 넘나들면서 이 시편을 썼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그 때 느꼈을 생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그리고 그가 생사를 넘나들면서 느꼈을 ‘the fragility of life (생의 연약함)’ 그리고, 그를 향하여 시시각각 조여 오는 ‘gravity of life (생의 중압감)’를 공감(共感)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시편 23편의 진가(眞價)가 드러납니다.
 
다윗은 날마다 위험 속에 노출되어 살았습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는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 어디에도 그가 숨을 곳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노년이 되었을 때도 그는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자기에게 칼을 겨눕니다. 자기와 함께 평생을 함께 싸워온 부하 장군들이 언제 그를 배신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그에게 하나님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 숨을 쉬고, 산소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처럼, 평생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호흡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 보세요. 그가 쓴 시편 62편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My soul finds rest in God alone; my salvation comes from him).” (1절) “그분 만이 나의 바위이시며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성벽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He alone is my rock and my salvation, my fortress where I will not be shaken).” (6절) “사람들이여, 항상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마음을 다 털어 놓으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O my people, trust in him at all times. Pour out your heart to him, for God is our refuge).” (8절)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시편 23편을 썼습니다. 마치 화가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듯이, 그는 펜을 들어 시를 썼습니다. 이 시 속에 그는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기르시는 한 마리 양이 되어 등장합니다. 이 시 속에 그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양을 인도하는 목자 (shepherd)로 등장합니다. 양은 성격이 온순합니다. 양은 그리 똑똑한 동물이 아닙니다. 시력이 나빠 멀리서 자기를 노리는 사나운 짐승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은 공격 무기가 없습니다. 뿔이 있긴 하지만, 앞을 향하고 있지 않고 뒤쪽으로 말려 있어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이런 양의 모습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는 나라를 통일했지만, 그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협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에 대하여도 미움이 없었습니다. 그의 적들은 그의 생명을 위협했지만, 그는 그들을 위협하지 않았고, 그들을 향해 칼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품은 온유했고 사람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성경 열왕기상, 하는 역대 왕들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 다윗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5:5)
 
이런 다윗이 가장 불안했을 때,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가장 뼈저리게 느낄 때, 그리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도 적들로부터 중압감을 느끼고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1절) 목자이신 하나님은 지금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뿐만 아니라, 목자이신 그분 안에서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얻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 꼭 그렇습니다. ‘like defenseless sheep’ 처럼,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불안하고, 초초하고, 연약하고, 가진 것 없고, 스스로 나를 지킬 힘이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바로 다윗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똑 같았습니다. 다윗은 그가 연약할 때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힘이 강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했을 때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으로 (personally)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 고백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세요.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왜 채플이 있습니까? 병원에 왜 채플린이 있습니까? 사람이 병이 들면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집니다. 그가 의지했던 것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을 찾으라고, 그 때 기도하라고 채플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라고 채플린이 있습니다. 여러분, 감옥에 왜 채플린이 있습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집니다. 아무리 큰 소리치는 사람도 오랫동안 좁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 그 때 비로소 자신이 연약한 존재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때 도움을 받으라고 채플린이 있습니다.
 
지금 이곳 보스턴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보스턴에 던져진 한 마리 양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일생 중 지금이 가장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시기입니다. 학교에 가 보면 왜 그렇게 나보다 잘 난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들 틈에서 내가 그동안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자신이 꽤 잘 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악기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제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좀 도움을 줬습니다. 오디션 보는 데도 제가 따라갔습니다. 아주 자신 있게 연주를 잘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교수가 이 학생에게 또 한번 연주를 해 보라고 하면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그 교수가 아주 유명한 교수였습니다. 이 학생은 한국에서부터 그 교수를 지도 교수로 하고 싶어서 마 왔습니다. 며칠을 기다려서 그 교수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난 이미 제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너를 제자로 받아 줄 수가 없으니 다른 교수를 만나보라”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때 당장에는 이 학생이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게 이 학생에게는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나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한 이유는, 그의 목자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하나님 안에서 그는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갔더니, 그곳에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나는 양이 되어 그를 따라 살았더니 내가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연약할 때 하나님은 그의 ‘피난처 (refuge)’가 되시고, 때로는 강력한 ‘요새 (fortress)’가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할 때, 하나님은 그가 의지할 든든한 바위 (the rock)가 되었습니다. 적들의 공격이 빗발칠 때는 하나님은 적들의 공격을 막아 주는 ‘성벽 (shield)’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지치고 피곤할 때 그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 (rest)’을 얻었습니다. 그가 배고파 굶주릴 때 하나님은 그를 ‘푸른 초장 (green meadows)’으로 인도하시고, 그가 목마를 때는 ‘잔잔한 시냇가 (beside peaceful streams)’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다윗은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5절)”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my cup’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내 잔’이 항상 비어 있는 ‘빈 컵’일 수도 있습니다. ‘빈 컵’을 가진 사람은 항상 모자라고, 부족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결핍된 것이 많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의 컵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흘러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고백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컵’이 차고 넘쳐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나의 ‘컵’이 비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빈 컵’을 들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도 그 사람의 ‘컵’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차고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많이 베푸는 사람이 부자 아닙니까? 나의 ‘잔’이 흘러 넘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사람과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도 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마음을 터 놓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그런 방식으로 형성됩니다. 아까 인용했던 시편 62:8 말씀을 보십시오. “항상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마음을 다 털어 놓으십시오 (Trust in him at all times. Pour out your heart to him).” 이 말씀 속에 두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둘째는,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 놓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숨기는 것 없이, 마음 속에 감추는 것 없이 하나님께 모두 ‘pour out’ 하는 것입니다.
 
유학생활과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wilderness)’은 참 많이 닮았습니다. ‘광야’는 특별한 곳입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한 곳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한 곳이 ‘광야’입니다. 유학생활이 꼭 그렇지 않나요? 유학생활에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유학생활에서는 모든 일을 자기가 혼자 결정해야 합니다. 유학생활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 생활입니다. 이렇게 광야생활과 유학생활이 많이 닮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유학생활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여러분을 인도해 오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Surely your goodness and unfailing love will pursue me all the days of my life).”(6절) 하나님의 ‘goodness’ 그리고 하나님의 ‘unfailing love’ 이 두가지가 내 평생 나는 떠나지 않는다고, 나를 ‘pursue’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었기에 다윗은 이 두가지가 평생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렇게 확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9/9/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2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trength.

시편 59:9-11, 16-17

오늘은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시리즈 설교 두 번째입니다. 설교 제목은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오히려 낙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오늘 설교 말씀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어떤 한 부분만 떼어서 읽어도 괜찮은 말씀도 있지만, 대부분의 말씀은 앞 뒤를 살펴서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을 쓰여진 배경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영국의 성서학자 톰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1948-present)라는 분이 있는데요. 현재 The 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초대 기독교를 강의하시는 분입니다. 요즘에 Thomas Wright의 책들이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이 분은 목사들이 설교할 때 한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설교 본문으로 제시하는 말씀은 앞 뒤를 살펴서 읽을 수 있도록 충분히 길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분은 짧은 본문은 마치 유리 창으로 비치는 한 장면과 같다고 말합니다. 긴 본문은 그 장면과 함께 배경을 같이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한 장면을 잘 보려면 그 장면의 배경도 같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톰 라이트의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 시편 59편은 다윗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자기를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던 시편입니다.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의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다윗의 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자기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꼭 다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절망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Are any of you suffering hardships? You should pray. Are any of you happy? You should sing praises).” (야고보서 5:13)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는 환경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아무 걱정 없는 환경이 더 좋겠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요? 당연히 아무 걱정 없는 환경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무 걱정 없는 환경 보다는 고난의 환경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학기를 맞이하여 보스턴에 오신 신입생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고 성숙하게 가져 갈 수 있는 최적(最適)의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런 환경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전의 어떤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고난을 주셨으나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는 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명령을 배울 기회가 되었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words).” (시편 119:71, 현대어성경) 지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이 오히려 잘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고난 때문에 내가 성경을 펴서 읽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고난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만일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성경을 멀리하고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내가 잘나서 모든 것이 순탄한 줄 알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 (복음)이 세상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은 신약시대에 와서 온 세상으로 전파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 앞에 항상 ‘사도(使徒)’라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사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파하는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apostle’이라고 하는데, 이 말 역시 ‘to send (~로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말못할 고통이 있었습니다. 원인 모를 통증이 온 몸을 찌르는 것입니다. 이 통증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이 통증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고린도후서 12:9)”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나에게 통증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라는 것 아닙니까? 넌 그 아픔 (통증) 때문에 겸손하여 지고, 가 아픔 때문에 나에게 기도하고 있으니, 그 아픔을 통해서 나의 은혜가 너에게 차고 넘치고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항상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이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성경의 관점을 배우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라는 사람이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이 위험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말 같지만, 이 말은 결코 평범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또 지금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의 집을 군인들을 시켜 포위하고 있는 사울은 누구입니까? 사울은 왕이 없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첫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사울은 주변 국가들과 전쟁하면서 연전연승(連戰連勝)했습니다. 그것이 사울을 교만하게 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사울은 승전비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상 15:12).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시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왕으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아직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극비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이려고 군인들을 시켜 다윗을 감시하고, 다윗의 집을 에워싼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머지않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다윗이 왕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위기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은...... 혹시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의 믿음을 키우셔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나의 힘 (9, 17절)’ ‘나의 성벽 (9, 16, 17절)’ ‘나의 사랑 (10, 17절)’ ‘나의 인도자 (10절)’ ‘나의 방패 (11절)’ ‘나의 피난처 (16절)’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사용했던 말들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힘이시라 (You are my strength)”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이사야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지치지도 않으시고 피곤해 하지도 않으신다. 아무도 주의 크신 지혜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지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약한 사람에게 능력을 넘치도록 주신다. 아이라도 지치고 피곤해 하며, 젊은이라도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0:28-31)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faint.” (New Living Translation)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폐에 작은 글씨로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돈을 의지하고, 돈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구가 쓰여진 돈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돈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만, 그 돈에 쓰여진 하나님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신입생 여러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교제 (fellowship)’가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한 팀에 속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찬양하고, 자연스럽게 성경공부를 하고,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고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교제 (Christian fellowship)’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the fellowship with God)’도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생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資産)’입니다. 영어로, ‘assets’라고 하지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 (new strength)’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 않습니다.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그들은 독수리처럼 높이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새 힘’을 얻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사랑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그냥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에는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11절)”이라고 했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은 늘 내 옆에 계십니다” 이런 뜻이지요? 또 17절에는 “for you, the God who shows me unfailing love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변함없는 사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 (unfailing love)’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failing love’입니다. 꾸준하지 못합니다. 늘 부족한 사랑입니다. 충분하지 못한 사랑입니다. 결핍이 많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입니다. 모자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늘 차고 넘치는 사랑입니다. 중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좋지 않습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까? 힘이 나지 않습니까?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하나님은 그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내 옆에 계실 것입니다.

다윗이 이 고백을 한 것은 모든 일이 잘 되는 승승장구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리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때였습니다. 언제 집 밖에 있던 칼과 창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위기의 때였습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하나님은 내 옆에 계신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타주에서 보스턴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들, 한국에서 보스턴으로 유학을 온 학생들,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나는 왜 집을 떠나고, 부모를 떠나서 이 낯선 도시에 와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이곳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맞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여기 좋은 학교에서 학문의 길을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뿐이겠습니까? 좀 더 넓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왜 내가 이곳에 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든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처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시려고 하는 계획이 있는 것 아닐까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외로운 도시에 내가 이렇게 와 있는 이유는, 이제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내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 틈에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환경 속으로 인도하신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외롭고 절망적인 환경 속으로 나를 몰아넣으신 것이 아닐까요?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하시고, 마침내는 나를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것 아닐까요?

32년 전에 저를 이곳 보스턴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지난 32년 동안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 세월 속에 어렵고, 힘든 시간들도 있었고, 좌절의 시간도 있었고, 외로운 시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어려운 시간들을 이기게 하시고, 지금 이 자리까지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클레아몬트를 떠나 보스턴으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저의 꿈과 희망을 내려 놓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꿈을 붙잡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동일하신 하나님과 함께 보스턴의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9/2/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1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The Lord Is Here Among Us.

시편 46:1-11

오늘부터 4회에 걸쳐서 보스턴에 온 신입생 여러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요 며칠 사이에 거리에 나가보니, 거리가 매우 복잡합니다. 차들이 평상시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여기 저기 큰 유홀 차들이 돌아다닙니다. 운전자들이 길을 잘 모르고, 또 큰 차들을 운전해 본 경험들이 없으니까 자연히 꾸물꾸물 할 수밖에 없고, 차가 많이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986년에 보스턴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입니다. 저는 그 전에 LA에서 2년 반 정도 살았습니다. 감리교 신학교인 클레아몬트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에서 공부하다가 보스턴 신학대학교로 transfer해서 왔습니다. 클레아몬트에서 아직 석사 과정을 다 마치지 않았지만, 바로 박사과정으로 받아 주고, 학점도 인정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보스턴대학으로 온 것입니다. 그 때가 8월 20일 정도 되었는데요. 새로운 도시에 오니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 벌써 날이 쌀쌀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생소한 보스턴 사람들이 보이는데, 벌써 코트를 꺼내 입었더라구요. 보스턴 시간으로 5시쯤 도착을 했는데, 우선 학교로 가봐야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스턴대학교 정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정문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보스턴 대학은 정문이 없었습니다. 학교 캠퍼스가 Commonwealth Ave. 선상 길 가에 늘어서 있었습니다. “야, 보스턴대학은 정문도 없는 학교로 구나. 클레아몬트 신학교는 정문도 있고, 캠퍼스도 아름다운데, 아무래도 학교를 잘못 온 것 같다. 그냥 클레아몬트에 있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더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저의 보스턴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타주에서 온 학생들은 어쩌면 보스턴에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제가 예배를 마치면 새로 교회에 오신 분들을 따로 제 사무실에서 환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인사도 나누고, 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대답도 해 드립니다. 어느 새로 오신 분이 계셨는데, 여러가지 궁금한 것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 새로 오신 분들을 영접하는 일을 하시는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그 집사님에게 집 렌트비는 한달에 얼마나 되고, 생활비는 얼마나 비싼 지, 이런 것들을 물어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정말 보스턴에 잘못 오셨습니다. 렌트비도 비싸고요. 물가는 아마 미국에서 제일 비쌀 겁니다. 또 겨울에는 굉장히 춥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보스턴에 새로 오신 분들에게 제가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보스턴에 정말 잘 오셨습니다. 누가 보스턴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말 듣지 마십시오. 사실이 아닙니다. 비록 학교에 정문은 없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학교들입니다. 그리고, 렌트비가 좀 비싼 편이고, 물가가 싸지는 않지만, 살아보면 그런대로 살아집니다. 보스턴은 처음에 정이 드는 도시가 아니라 살아갈수록 정이 드는 도시입니다. 저는 이제 제가 처음 미국에 와서 살았던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뷰엔나 팍이나, 클레아몬트보다 보스턴이 좋고, 케임브리지가 훨씬 더 좋습니다. 둘 중 어디에 살지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저는 당연히 보스턴을 선택할 것입니다. 보스턴 사람들을 ‘보스토니안 (Bostonian)’이라고 부르는데, 여러분도 곧 보스턴을 사랑하는 ‘보스토니안들’이 될 것입니다.
 
예전 가수입니다만,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 중에 ‘꿈’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조용필이 직접 가사도 쓰고, 작곡도 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 등장한 사람은 고향을 떠나 꿈을 안고 화려한 도시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 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때론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괴로울 때는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옆에는 그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도시를 찾아왔던 꿈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이 텅 비는 허무한 가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인생입니다. 저마다 자기 살기에 바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뜨거운 눈물을 쏟고, 누군가가 잠을 자지 못하고 슬픈 노래를 불러도,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입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옆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삶이 버거울 때, 우리를 도와주는 분이 계시고, 우리가 위태할 때 피난처가 되시고,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1절 말씀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힘이십니다. 어려울 때에 언제나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원래 시편은 노래로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알라못 (alamoth)’에 맞춰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히브리 말 ‘알라못’이 무엇인지 해석을 못했습니다. 최근에 와서 이 ‘알라못’이라는 말이 ‘소프라노 (Soprano)’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은 ‘소프라노’ 목소리로 불러야 한다는 지시가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A song of the descendants of Korah, to be sung by soprano voices”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눈을 감고, 귀는 열고, 소프라노 음성으로 부르는 이 노래를 들어 보십시오.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So we will not fear when earthquakes come and the mountains crumble into the sea. Let the oceans roar and foam. Let the mountains tremble as the waters surge! Interlude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힘, 우리가 어려울 때 도우시는 분, 지진이 일어나고, 산이 바다로 무너져 내려도 두렵지 않아. 바다가 으르렁거리고, 거품을 내뿜어도, 사나운 파도에 산이 두려워 떨어도, 우리는 두렵지 않아).” (셀라) ‘셀라’라는 말은 잠깐 포즈 (pause)를 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듣기만 들어도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정말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분이 내 옆에 계셔서 보스턴 생활을 도와주시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보스턴 생활이 4년이 될 지, 아니면, 10년이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이 기간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절망도 하겠지요? 그럴 때 우리 손을 잡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때는 외로울 때도 있겠지요? 어떤 때는 몸이 많이 아픈 때도 있겠지요? 어떤 때는 잠시 피난처가 필요할 때도 있겠지요? 그럴 때, 오늘 성경 말씀처럼,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이 옆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시 오늘 말씀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런 말이 7절과 11절에 반복되 나오고 있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 말을 강조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들이 매우 다양하게 나옵니다. 이 시편에는 ‘만군의 여호와 (The Lord of Heaven’s Army)’라고 나와 있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은 ‘하늘 군대의 주인’이십니다. ‘지상의 군대’가 아닙니다. 이 시편이 기록되었을 당시, 세상에서 제일 막강한 군대는 바빌로니아의 군대이거나, 아니면 페르시아의 군대였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나중에 등장합니다. 이런 지상의 군대로 세상을 지배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군대이지만, ‘하늘의 군대’는 ‘세상의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군대입니다. 그 ‘하늘 군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 군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옆에 같이 있어도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옆에 있어도 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저는 참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신학교를 가지 않았더라면 법대를 갔을 것입니다. 법대에 가서 변호사나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만, 제가 신학교를 가는 바람에 법대에 가려고 했던 제 꿈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저를 어느 목사님의 변호사로 세워주셨습니다. 교단 안에 고소를 당한 목사님이 있었는데, 제가 그 목사님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교단 안에서 재판하는 것이어서 진짜 변호사를 대동할 수도 있지만, 목사 중에 변호할 사람을 세울 수도 있다고 해서 제가 그 목사님의 변호사가 되어 피고인 석에 앉은 것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 재판이 말도 안 되는 재판이기 때문에 기각 사유가 충분하다고 보고, 그 재판을 기각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장은 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결국 재판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상되었던 형 량을 줄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재판 마치고 제가 그 목사님께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목사님을 충분히 변호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늘의 군대의 주인’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앞길을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매사에 담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다고 믿었기에, 거인 골리앗과 싸우지 않았습니까?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겁 없이 일갈하는 말씀은 읽을 때마다 속이 시원합니다. “너는 나에게 칼과 큰 창과 작은 창을 가지고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시다. 너는 여호와께 욕을 했다. 오늘 여호와께서는 너를 나에게 주실 것이다.” (사무엘상 17:45-46)
 
여러분, 오늘 주보 겉장을 한번 보십시오. 바다의 등대가 있는데, 사방에 사나운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등대가 무너질 것 같고, 등대 안으로 물이 들이닥칠 것 같습니다. 등대 밖으로 나와 사나운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보이는데, 매우 위태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말씀 5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dwell’이라는 말은 ‘~에 주소를 둔다’ ‘~에 산다’ 이런 뜻 아닙니까? 성이 되었든지, 도시가 되었든지, 등대 (lighthouse)가 되었든지, 하나님께서 그곳에 주소를 두시면, 그곳에 거주하시면, 그 곳은 안전합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city’라는 말 대신 여러분을 그 말씀에 넣어 보세요.  “God dwells in me” “God dwells in us”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견고합니다.
 
보스턴에 꿈을 안고 오신 여러분,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들에게 이 설교 시간을 빌어 충고 (advice)를 드립니다. 이곳 보스톤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교회 생활을 했는지, 또 어떤 식으로 믿음생활을 했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 앞에 보스턴이라는 새로운 ‘chapter’가 열렸습니다. 이곳 보스턴에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와는 다른 여러분의 스토리를 기록해야 합니다. 이곳 보스턴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제일 좋은 곳입니다. 그만큼 여러분은 지금 절실한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피난처가 되어 달라고, 도움이 되어 달라고, 힘이 되어 달라고,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늘 군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에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힘들 때마다, 지칠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이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조용히 하여라.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라. 나는 모든 나라들 위에 높임을 받을 것이며, 온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이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I will be honored by every nation. I will be honored throughout the world).” (10절)

8/26/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5

산 믿음이냐, 죽은 믿음이냐? A Living Faith Versus A Dead Faith

야고보서 2:14-26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4절) “어리석은 여러분,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20절)

야고보는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면서 행동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 (the friend of God)’로 불릴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네가 아들을 낳게 된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 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습니다. 아내 사라는 90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다시 ‘라합 (Rahab)’을 예로 듭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고 있던 기생 (the prostitute)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이방인 여자입니다. 사람들에게 술도 팔고, 여관처럼 숙소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을 정탐하던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이 쫓기다가 ‘라합’의 여관으로 숨습니다. 이 때, ‘라합’은 그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을 숨겨 주고 거짓말로 추격하는 군인들을 따돌리고 스파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줍니다. 야고보는 그 때 ‘라합’의 했던 행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라합은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25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만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지 모르겠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거쳐 여리고 성으로 들어오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이시다 (여호수아 2:11)”고 고백합니다. 비록 소문을 듣고 하나님을 믿은 원시적인 믿음이었지만, ‘라합’은 자기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을 숨겨주는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동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으며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24, 26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are shown to be right with God by what we do, not by faith alone. Just as the body is dead without breath①, so also faith is dead without good works.” / ①Or without spirit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으로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그 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숨이 끊어지면 그 사람이 죽은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이 말씀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배우다 보니,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쉽게 간과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말씀이 아니지 않나요?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We are shown to be right with God by what we do, not by faith alone.”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뜻이잖아요? 마태복음 4: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이 말씀이 사람이 사는데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되고 빵은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빵도 필요하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지만 빵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꼭 있어야 한다는 뜻이잖아요?

야고보는 여기서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 된 사람이 옷이나 먹을 것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먹을 것을 좀 많이 드십시오’라고 말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15-16절) 야고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람 (a brother or sister in Christ, 15절)’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반드시 크리스천 형제나 자매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왜 이렇게 하고 계십니까? 이러다 감기 드십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시고, 끼니를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또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이런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경제적으로 힘들 사람들, 무슨 문제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잘 살고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제 곧 우리교회에서 장학헌금을 할 것입니다. 매년 장학헌금을 했습니다. 주변에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있는 사람들 다 잘 살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생활비를 아껴서 아껴서 써야 하고, 그래도 생활비가 모자라고, 학비를 내지 못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 임원들이나 팀장들, 간사님들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힘들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저에게 봉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아내가 꼭 이 자리에 와야 하는데 올 수 없는 사정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목사님께 전해 드리라고 준 것입니다. 제 아내가 보스턴에 있을 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는데, 교회에서 3회에 걸쳐 장학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받았던 장학금을 다른 사람들에게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봉투 안에 3,00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으로 우리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말로만 “난 하나님을 믿어!” 이렇게 말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십시오.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참된 믿음이고 진실한 믿음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우상을 믿는 사람들인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부상당한 사람 옆을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감싸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정성껏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Faith produces good works, but good works do not produce faith (믿음은 선한 일을 생산하지만, 선한 일은 믿음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믿음’과 ‘선한 일’과의 관계를 잘 정리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으로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Thus, by their fruit you will recognize them).” (마태복음 7:20) 여기서 ‘fruit (열매)’ 믿음이 생산하는 ‘선한 일’ ‘선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지만,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사람에게서 산 믿음의 예를 발견했습니다. 전영창 (1917-1976) 선생이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그냥 특별한 정신을 가진 교육가로만 알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직업선택의 10계’로 유명한 분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하여 조금 더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 분은 정말 훌륭한 그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이 분이 1947년에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우리나라 해외 유학생 1호이시더라고요.

이 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있었을 때, 이를 끝까지 반대한 전영창 청년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턴 (William Linton, 1891-1960)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린턴은 전영창이 졸업하자 마자 그를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영창은 일본에서도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후꾸오까 감옥에 수감되고 투옥 1년 만에 5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전영창은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 1861-1930)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 때부터 영어공부에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합니다. 전영창은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미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편지를 써 주었고, 장학금까지 받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전영창은 1947년 4월 한국인 최초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을 갑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미시간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년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영창은 귀국을 서두릅니다. 그 때 학교 교수들과 학교 친구들은 전영창의 귀국을 극구 만류했다고 합니다. 귀국하더라도 졸업이라도 하고 가라고 만류했지만, 전영창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귀국하는 전영창을 위해 졸업식을 2개월 앞당겨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수들과 친구들이 5,000불을 헌금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돈이 후에 부산 복음병원을 짓는데 기초 자금 (seed money)이 됩니다.

1951년 1월 9일 전영창은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 비행장을 통해서 귀국합니다. 귀국한 전영창은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한 피난민 어머니를 목격합니다. 그 때 그 어머니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전영창으로 하여금 병원을 지어서 피난민들을 치료해 줘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부산 복음병원의 시초입니다. 그 때 전영창의 나이 34살 때였습니다.

그 후 그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생을 살아가다가 한 유명한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오라는 청을 거절하고, 1956년에 거창에 있는 폐교 직전의 한 실업학교를 인수하여 교육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 때가 전영창의 나이 39살 때였습니다. 지금은 그 학교가 명문 대안학교로 성장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의 믿음은 부산 복음병원을 만들어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했고, 거창고등학교를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섬기는 한국 교육의 대안으로 떠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의 아들 전성은씨가 한동안 거창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는데, 그 때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 전성은씨에게 “당연히 교육부 장관 자리를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죄송하다” 하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야고보서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만일 야고보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진실한 믿음과 거짓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비쳐 보고,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산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합니까? 불행하게도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8/19/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4

크리스천의 차별의식 Favoritism in The Community of Faith

야고보서 2:1-13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절),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다.” (5절),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6절), “주인 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7절), “모든 법 위에 우선 되는 법이 있습니다.” (8절), “한 가지 계명을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다 어긴 것입니다.” (9절)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자비를 베푼 사람은 후에 아무 두려움 없이 심판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3절) 이런 말씀들이 모두 중요한 말씀들이고,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저에게는 다른 어떤 말씀보다 1절에 나오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how can you claim to have faith in our glorious Lord Jesus Christ if you favor some people over others?” 직역하면,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favor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어찌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뜻이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입니다. 로마서 8:29에는 예수님은 ‘많은 형제 중 하나님의 맏아들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한 형제 자매를 차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이 좋은 옷에 값비싼 반지를 끼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때, 옷을 잘 입은 사람에게는 “이리 와서 여기에 앉으십시오”하면서 좋은 자리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힐끗 쳐다보면서 어디 앉든지 말든지 자리에 앉혀 주지도 않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왕 옷에 대한 말씀이 나왔으니까, 옷에 대한 얘기를 잠깐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배 때 나오는 옷차림은 검소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화려하거나 값비싼 옷이 아니라 소박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내가 입은 옷으로 나의 신분을 자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같이 무더운 여름에는 자칫하면 예배자의 복장으로 적합하지 않은 옷을 입기 쉽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라운드 티에 반바지 차림으로 오면 시원하고 좋기는 하겠지만, 예배자의 복장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 복장은 좀 격식이 있는 레스토랑에는 입장도 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한국 갔다 오면서 양복을 한 벌 샀습니다. 그 양복을 입고 교회에 왔습니다. 입던 양복이 아니니까 말끔하고 단정하지 않았겠습니까? 몇 분들이 눈치를 채고 “목사님, 양복을 해 입으셨군요.” “목사님, 새 양복이 멋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와서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그래요. 그래서 “아, 예....”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또 똑 같은 말을 합니다.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뭐라고 대답할 지 몰라서 “아, 예.....” 하고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한번 더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요즘에 비싼 것은 천이 반짝 반짝 빛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아, 왜 이러세요? 이 양복 비싼 것 아닌 것 알아요. 싼 데서 샀습니다” 그랬더니 훌쩍 사무실을 나가더라고요. 그 양복 볼 때마다 그 때 그분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납니다.

인간의 3대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의식주 (衣食住)’라고 합니다. 입는 것과 먹는 것과, 사는 집입니다. 옛날에는 하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입는 것과 먹는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조금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주변에 헐벗은 사람들이 많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여전이 집이 없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잘 곳이 없어서 밖에서 자야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여전히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고,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주변에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과거처럼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식주’가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가 됩니다. 옷을 입어도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밥을 먹어도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집에 살아도 어떤 집에 사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2,000년에 쓰여진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찾고 있느냐? 그런 사람을 보려면 왕궁에 가 보아라.” (누가복음 7:25)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그 시대의 지도자들과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여러분이 옷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한다면) 여러분은 악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4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esn't this discrimination show that your judgments are guided by evil motives (그렇다면 이 차별은 여러분의 판단이 악한 동기에 의해서 내려졌다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악한 생각’ ‘악한 동기’ ‘evil motives’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교회에는 내가 친할 사람이 없어.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나하고 수준이 맞는 것 같아! 저 사람하고 친구를 해야 하겠어!” 이런 생각은 아닐까요? 그래서 결국 교회 안에서 편을 가르는 마음이 아닐까요? 

전 주에도 같은 말씀드렸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의 삶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고, 입는 것도 허름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차별 받는 이유가 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6-7절)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을 나와 아무 상관없는 말씀으로 읽고 지나가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고, 편을 가르고, 사람을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경제적인 이유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천국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5절)

한국에 손봉호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존경받는 분 중 한 분입니다.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입니다. 제가 그분의 책 중에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평신도로서 자기가 설교한 것들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그 분은 신학을 공부했지만, 목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의 성경 해석은 틀에 박히지 않은 신선한 데가 있습니다. 그분이 잠언 22:22-23 말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말아라. 가난한 사람들을 법정에서 절대로 짓누르지 말아라. 여호와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억울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 달라고 찾아올 때 이들의 하소연을 일일이 다 들어 주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신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절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기도하면 큰 일 납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이 놀랍게도 그 사람의 외모나 그 사람이 가진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오류(誤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Abraham)의 아내 사라 (Sarah)는 대단한 미인이었었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사라의 미모(美貌)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불려갈 정도였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 (Rebekah)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내가 둘이었는데, 야곱은 두 아내 중에 미모가 뛰어난 라헬 (Rachel)을 더 사랑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같은 사람들도 아내를 선택할 때 미모를 먼저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라같은 여자는 미모는 뛰어났을 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누구도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교인들을 대하면서도 지금도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우리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쳐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People judge by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사무엘상 16: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준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 (Saul)을 버리고, 이새 (Jesse)의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사무엘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들을 본 사무엘은 키 크고, 잘 생긴 엘리압 (Eliab)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같은 영적인 사람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기준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 (appearance)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같은 사람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만일 사무엘이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면,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 놓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사무엘은 즉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다윗 (David)에게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1475-1564, 이탈리아)의 대표작 가운데 ‘다윗 (David, 1504)’이라는 조각품이 있습니다. 명작입니다. 다윗이 손에 돌멩이를 들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는 순간을 포착해서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다윗을 잘 생긴 미남으로, 이상적인 비율로 균형미가 넘치는 남성으로 조각했습니다. ‘다윗’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비록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그런 사람으로 조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윗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발견하고 고쳐 나가야 합니다. 내 속에 사람에 대한 차별의식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잣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교묘한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쉽습니다. 이 사탄의 음성을 듣게 되면, 사람을 차별하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편을 만들게 됩니다. 결국 우리 주님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기준을 추방하고,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어렵지만,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부터 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를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