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9/16/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3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hepherd.
시편 23편
9/9/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2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trength.
시편 59:9-11, 16-17
오늘은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시리즈 설교 두 번째입니다. 설교 제목은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오히려 낙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오늘 설교 말씀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어떤 한 부분만 떼어서 읽어도 괜찮은 말씀도 있지만, 대부분의 말씀은 앞 뒤를 살펴서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을 쓰여진 배경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영국의 성서학자 톰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1948-present)라는 분이 있는데요. 현재 The 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초대 기독교를 강의하시는 분입니다. 요즘에 Thomas Wright의 책들이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이 분은 목사들이 설교할 때 한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설교 본문으로 제시하는 말씀은 앞 뒤를 살펴서 읽을 수 있도록 충분히 길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분은 짧은 본문은 마치 유리 창으로 비치는 한 장면과 같다고 말합니다. 긴 본문은 그 장면과 함께 배경을 같이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한 장면을 잘 보려면 그 장면의 배경도 같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톰 라이트의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 시편 59편은 다윗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자기를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던 시편입니다.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의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다윗의 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자기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꼭 다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절망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Are any of you suffering hardships? You should pray. Are any of you happy? You should sing praises).” (야고보서 5:13)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는 환경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아무 걱정 없는 환경이 더 좋겠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요? 당연히 아무 걱정 없는 환경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무 걱정 없는 환경 보다는 고난의 환경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학기를 맞이하여 보스턴에 오신 신입생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고 성숙하게 가져 갈 수 있는 최적(最適)의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런 환경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전의 어떤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고난을 주셨으나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는 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명령을 배울 기회가 되었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words).” (시편 119:71, 현대어성경) 지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이 오히려 잘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고난 때문에 내가 성경을 펴서 읽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고난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만일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성경을 멀리하고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내가 잘나서 모든 것이 순탄한 줄 알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 (복음)이 세상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은 신약시대에 와서 온 세상으로 전파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 앞에 항상 ‘사도(使徒)’라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사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파하는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apostle’이라고 하는데, 이 말 역시 ‘to send (~로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말못할 고통이 있었습니다. 원인 모를 통증이 온 몸을 찌르는 것입니다. 이 통증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이 통증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고린도후서 12:9)”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나에게 통증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라는 것 아닙니까? 넌 그 아픔 (통증) 때문에 겸손하여 지고, 가 아픔 때문에 나에게 기도하고 있으니, 그 아픔을 통해서 나의 은혜가 너에게 차고 넘치고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항상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이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성경의 관점을 배우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라는 사람이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이 위험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말 같지만, 이 말은 결코 평범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또 지금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의 집을 군인들을 시켜 포위하고 있는 사울은 누구입니까? 사울은 왕이 없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첫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사울은 주변 국가들과 전쟁하면서 연전연승(連戰連勝)했습니다. 그것이 사울을 교만하게 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사울은 승전비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상 15:12).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시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왕으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아직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극비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이려고 군인들을 시켜 다윗을 감시하고, 다윗의 집을 에워싼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머지않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다윗이 왕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위기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은...... 혹시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의 믿음을 키우셔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나의 힘 (9, 17절)’ ‘나의 성벽 (9, 16, 17절)’ ‘나의 사랑 (10, 17절)’ ‘나의 인도자 (10절)’ ‘나의 방패 (11절)’ ‘나의 피난처 (16절)’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사용했던 말들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힘이시라 (You are my strength)”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이사야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지치지도 않으시고 피곤해 하지도 않으신다. 아무도 주의 크신 지혜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지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약한 사람에게 능력을 넘치도록 주신다. 아이라도 지치고 피곤해 하며, 젊은이라도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0:28-31)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faint.” (New Living Translation)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폐에 작은 글씨로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돈을 의지하고, 돈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구가 쓰여진 돈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돈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만, 그 돈에 쓰여진 하나님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신입생 여러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교제 (fellowship)’가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한 팀에 속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찬양하고, 자연스럽게 성경공부를 하고,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고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교제 (Christian fellowship)’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the fellowship with God)’도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생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資産)’입니다. 영어로, ‘assets’라고 하지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 (new strength)’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 않습니다.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그들은 독수리처럼 높이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새 힘’을 얻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사랑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그냥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에는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11절)”이라고 했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은 늘 내 옆에 계십니다” 이런 뜻이지요? 또 17절에는 “for you, the God who shows me unfailing love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변함없는 사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 (unfailing love)’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failing love’입니다. 꾸준하지 못합니다. 늘 부족한 사랑입니다. 충분하지 못한 사랑입니다. 결핍이 많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입니다. 모자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늘 차고 넘치는 사랑입니다. 중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좋지 않습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까? 힘이 나지 않습니까?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하나님은 그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내 옆에 계실 것입니다.
다윗이 이 고백을 한 것은 모든 일이 잘 되는 승승장구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리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때였습니다. 언제 집 밖에 있던 칼과 창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위기의 때였습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하나님은 내 옆에 계신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타주에서 보스턴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들, 한국에서 보스턴으로 유학을 온 학생들,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나는 왜 집을 떠나고, 부모를 떠나서 이 낯선 도시에 와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이곳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맞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여기 좋은 학교에서 학문의 길을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뿐이겠습니까? 좀 더 넓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왜 내가 이곳에 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든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처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시려고 하는 계획이 있는 것 아닐까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외로운 도시에 내가 이렇게 와 있는 이유는, 이제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내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 틈에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환경 속으로 인도하신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외롭고 절망적인 환경 속으로 나를 몰아넣으신 것이 아닐까요?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하시고, 마침내는 나를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것 아닐까요?
32년 전에 저를 이곳 보스턴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지난 32년 동안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 세월 속에 어렵고, 힘든 시간들도 있었고, 좌절의 시간도 있었고, 외로운 시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어려운 시간들을 이기게 하시고, 지금 이 자리까지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클레아몬트를 떠나 보스턴으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저의 꿈과 희망을 내려 놓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꿈을 붙잡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동일하신 하나님과 함께 보스턴의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9/2/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1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The Lord Is Here Among Us.
시편 46:1-11
8/26/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5
산 믿음이냐, 죽은 믿음이냐? A Living Faith Versus A Dead Faith
야고보서 2:14-26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4절) “어리석은 여러분,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20절)
야고보는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면서 행동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 (the friend of God)’로 불릴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네가 아들을 낳게 된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 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습니다. 아내 사라는 90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다시 ‘라합 (Rahab)’을 예로 듭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고 있던 기생 (the prostitute)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이방인 여자입니다. 사람들에게 술도 팔고, 여관처럼 숙소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을 정탐하던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이 쫓기다가 ‘라합’의 여관으로 숨습니다. 이 때, ‘라합’은 그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을 숨겨 주고 거짓말로 추격하는 군인들을 따돌리고 스파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줍니다. 야고보는 그 때 ‘라합’의 했던 행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라합은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25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만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지 모르겠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거쳐 여리고 성으로 들어오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이시다 (여호수아 2:11)”고 고백합니다. 비록 소문을 듣고 하나님을 믿은 원시적인 믿음이었지만, ‘라합’은 자기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을 숨겨주는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동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으며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24, 26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are shown to be right with God by what we do, not by faith alone. Just as the body is dead without breath①, so also faith is dead without good works.” / ①Or without spirit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으로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그 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숨이 끊어지면 그 사람이 죽은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이 말씀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배우다 보니,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쉽게 간과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말씀이 아니지 않나요?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We are shown to be right with God by what we do, not by faith alone.”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뜻이잖아요? 마태복음 4: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이 말씀이 사람이 사는데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되고 빵은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빵도 필요하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지만 빵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꼭 있어야 한다는 뜻이잖아요?
야고보는 여기서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 된 사람이 옷이나 먹을 것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먹을 것을 좀 많이 드십시오’라고 말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15-16절) 야고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람 (a brother or sister in Christ, 15절)’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반드시 크리스천 형제나 자매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왜 이렇게 하고 계십니까? 이러다 감기 드십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시고, 끼니를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또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이런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경제적으로 힘들 사람들, 무슨 문제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잘 살고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제 곧 우리교회에서 장학헌금을 할 것입니다. 매년 장학헌금을 했습니다. 주변에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있는 사람들 다 잘 살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생활비를 아껴서 아껴서 써야 하고, 그래도 생활비가 모자라고, 학비를 내지 못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 임원들이나 팀장들, 간사님들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힘들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저에게 봉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아내가 꼭 이 자리에 와야 하는데 올 수 없는 사정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목사님께 전해 드리라고 준 것입니다. 제 아내가 보스턴에 있을 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는데, 교회에서 3회에 걸쳐 장학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받았던 장학금을 다른 사람들에게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봉투 안에 3,00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으로 우리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말로만 “난 하나님을 믿어!” 이렇게 말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십시오.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참된 믿음이고 진실한 믿음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우상을 믿는 사람들인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부상당한 사람 옆을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감싸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정성껏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Faith produces good works, but good works do not produce faith (믿음은 선한 일을 생산하지만, 선한 일은 믿음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믿음’과 ‘선한 일’과의 관계를 잘 정리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으로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Thus, by their fruit you will recognize them).” (마태복음 7:20) 여기서 ‘fruit (열매)’ 믿음이 생산하는 ‘선한 일’ ‘선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지만,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사람에게서 산 믿음의 예를 발견했습니다. 전영창 (1917-1976) 선생이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그냥 특별한 정신을 가진 교육가로만 알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직업선택의 10계’로 유명한 분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하여 조금 더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 분은 정말 훌륭한 그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이 분이 1947년에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우리나라 해외 유학생 1호이시더라고요.
이 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있었을 때, 이를 끝까지 반대한 전영창 청년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턴 (William Linton, 1891-1960)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린턴은 전영창이 졸업하자 마자 그를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영창은 일본에서도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후꾸오까 감옥에 수감되고 투옥 1년 만에 5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전영창은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 1861-1930)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 때부터 영어공부에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합니다. 전영창은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미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편지를 써 주었고, 장학금까지 받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전영창은 1947년 4월 한국인 최초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을 갑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미시간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년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영창은 귀국을 서두릅니다. 그 때 학교 교수들과 학교 친구들은 전영창의 귀국을 극구 만류했다고 합니다. 귀국하더라도 졸업이라도 하고 가라고 만류했지만, 전영창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귀국하는 전영창을 위해 졸업식을 2개월 앞당겨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수들과 친구들이 5,000불을 헌금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돈이 후에 부산 복음병원을 짓는데 기초 자금 (seed money)이 됩니다.
1951년 1월 9일 전영창은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 비행장을 통해서 귀국합니다. 귀국한 전영창은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한 피난민 어머니를 목격합니다. 그 때 그 어머니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전영창으로 하여금 병원을 지어서 피난민들을 치료해 줘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부산 복음병원의 시초입니다. 그 때 전영창의 나이 34살 때였습니다.
그 후 그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생을 살아가다가 한 유명한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오라는 청을 거절하고, 1956년에 거창에 있는 폐교 직전의 한 실업학교를 인수하여 교육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 때가 전영창의 나이 39살 때였습니다. 지금은 그 학교가 명문 대안학교로 성장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의 믿음은 부산 복음병원을 만들어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했고, 거창고등학교를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섬기는 한국 교육의 대안으로 떠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의 아들 전성은씨가 한동안 거창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는데, 그 때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 전성은씨에게 “당연히 교육부 장관 자리를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죄송하다” 하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야고보서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만일 야고보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진실한 믿음과 거짓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비쳐 보고,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산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합니까? 불행하게도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8/19/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4
크리스천의 차별의식 Favoritism in The Community of Faith
야고보서 2:1-13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절),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다.” (5절),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6절), “주인 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7절), “모든 법 위에 우선 되는 법이 있습니다.” (8절), “한 가지 계명을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다 어긴 것입니다.” (9절)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자비를 베푼 사람은 후에 아무 두려움 없이 심판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3절) 이런 말씀들이 모두 중요한 말씀들이고,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저에게는 다른 어떤 말씀보다 1절에 나오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how can you claim to have faith in our glorious Lord Jesus Christ if you favor some people over others?” 직역하면,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favor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어찌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뜻이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입니다. 로마서 8:29에는 예수님은 ‘많은 형제 중 하나님의 맏아들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한 형제 자매를 차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이 좋은 옷에 값비싼 반지를 끼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때, 옷을 잘 입은 사람에게는 “이리 와서 여기에 앉으십시오”하면서 좋은 자리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힐끗 쳐다보면서 어디 앉든지 말든지 자리에 앉혀 주지도 않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왕 옷에 대한 말씀이 나왔으니까, 옷에 대한 얘기를 잠깐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배 때 나오는 옷차림은 검소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화려하거나 값비싼 옷이 아니라 소박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내가 입은 옷으로 나의 신분을 자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같이 무더운 여름에는 자칫하면 예배자의 복장으로 적합하지 않은 옷을 입기 쉽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라운드 티에 반바지 차림으로 오면 시원하고 좋기는 하겠지만, 예배자의 복장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 복장은 좀 격식이 있는 레스토랑에는 입장도 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한국 갔다 오면서 양복을 한 벌 샀습니다. 그 양복을 입고 교회에 왔습니다. 입던 양복이 아니니까 말끔하고 단정하지 않았겠습니까? 몇 분들이 눈치를 채고 “목사님, 양복을 해 입으셨군요.” “목사님, 새 양복이 멋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와서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그래요. 그래서 “아, 예....”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또 똑 같은 말을 합니다.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뭐라고 대답할 지 몰라서 “아, 예.....” 하고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한번 더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요즘에 비싼 것은 천이 반짝 반짝 빛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아, 왜 이러세요? 이 양복 비싼 것 아닌 것 알아요. 싼 데서 샀습니다” 그랬더니 훌쩍 사무실을 나가더라고요. 그 양복 볼 때마다 그 때 그분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납니다.
인간의 3대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의식주 (衣食住)’라고 합니다. 입는 것과 먹는 것과, 사는 집입니다. 옛날에는 하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입는 것과 먹는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조금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주변에 헐벗은 사람들이 많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여전이 집이 없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잘 곳이 없어서 밖에서 자야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여전히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고,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주변에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과거처럼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식주’가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가 됩니다. 옷을 입어도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밥을 먹어도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집에 살아도 어떤 집에 사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2,000년에 쓰여진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찾고 있느냐? 그런 사람을 보려면 왕궁에 가 보아라.” (누가복음 7:25)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그 시대의 지도자들과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여러분이 옷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한다면) 여러분은 악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4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esn't this discrimination show that your judgments are guided by evil motives (그렇다면 이 차별은 여러분의 판단이 악한 동기에 의해서 내려졌다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악한 생각’ ‘악한 동기’ ‘evil motives’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교회에는 내가 친할 사람이 없어.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나하고 수준이 맞는 것 같아! 저 사람하고 친구를 해야 하겠어!” 이런 생각은 아닐까요? 그래서 결국 교회 안에서 편을 가르는 마음이 아닐까요?
전 주에도 같은 말씀드렸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의 삶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고, 입는 것도 허름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차별 받는 이유가 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6-7절)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을 나와 아무 상관없는 말씀으로 읽고 지나가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고, 편을 가르고, 사람을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경제적인 이유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천국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5절)
한국에 손봉호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존경받는 분 중 한 분입니다.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입니다. 제가 그분의 책 중에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평신도로서 자기가 설교한 것들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그 분은 신학을 공부했지만, 목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의 성경 해석은 틀에 박히지 않은 신선한 데가 있습니다. 그분이 잠언 22:22-23 말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말아라. 가난한 사람들을 법정에서 절대로 짓누르지 말아라. 여호와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억울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 달라고 찾아올 때 이들의 하소연을 일일이 다 들어 주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신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절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기도하면 큰 일 납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이 놀랍게도 그 사람의 외모나 그 사람이 가진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오류(誤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Abraham)의 아내 사라 (Sarah)는 대단한 미인이었었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사라의 미모(美貌)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불려갈 정도였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 (Rebekah)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내가 둘이었는데, 야곱은 두 아내 중에 미모가 뛰어난 라헬 (Rachel)을 더 사랑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같은 사람들도 아내를 선택할 때 미모를 먼저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라같은 여자는 미모는 뛰어났을 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누구도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교인들을 대하면서도 지금도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우리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쳐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People judge by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사무엘상 16: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준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 (Saul)을 버리고, 이새 (Jesse)의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사무엘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들을 본 사무엘은 키 크고, 잘 생긴 엘리압 (Eliab)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같은 영적인 사람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기준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 (appearance)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같은 사람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만일 사무엘이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면,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 놓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사무엘은 즉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다윗 (David)에게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1475-1564, 이탈리아)의 대표작 가운데 ‘다윗 (David, 1504)’이라는 조각품이 있습니다. 명작입니다. 다윗이 손에 돌멩이를 들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는 순간을 포착해서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다윗을 잘 생긴 미남으로, 이상적인 비율로 균형미가 넘치는 남성으로 조각했습니다. ‘다윗’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비록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그런 사람으로 조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윗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발견하고 고쳐 나가야 합니다. 내 속에 사람에 대한 차별의식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잣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교묘한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쉽습니다. 이 사탄의 음성을 듣게 되면, 사람을 차별하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편을 만들게 됩니다. 결국 우리 주님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기준을 추방하고,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어렵지만,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부터 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를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