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2018 | 사순절 35

우리의 큰 구원 Our Great Salvation

누가복음 7:44-48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 됩니다. 그리고 사순절도 이번 토요일로 끝이 납니다. 처음부터 출석하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이번 사순절에 부어주신 은혜가 많은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곤 했지만, 여전히 저에게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미스터리입니다. 미스터리라는 말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머리로도 이해 가 안 되고, 이성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감정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평생 가도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던 것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과 예수님의 인격과 삶 전체를 통해서,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속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지금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다. 또한 지금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다.” (누가복음 10: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when they were alone, he turned to the disciples and said, "Blessed are the eyes that see what you have seen. I tell you, many prophets and kings longed to see what you see, but they didn't see it. And they longed to hear what you hear, but they didn't hear it."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있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예언자들도, 왕들도 그렇게 보고 싶어 했고 듣고 싶어했지만,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미처 잘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예언자들도, 왕들도,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왕이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었던 솔로몬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언자들이, 솔로몬 같은 지혜가 많았던 왕이 그렇게 듣고 싶어 했고, 보고 싶어했던 것들을 지금 우리는 매일 듣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누가복음 말씀을 보실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살던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향유병을 들고 그 집에 갔습니다. 이 여자는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성경에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을 일을 했거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 대로 이 여자는 몸을 파는 prostitute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 누가 말릴 겨들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새인 시몬은 이 광경을 보면서 매우 불쾌했을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집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 어떤 집인데, 너 같은 여자가 들어 와?” 하면서 매우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 예수라는 사람이 예언자라면 저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저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예언자가 아닌 것이 틀림 없어! ”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셨는지 예수님께서 시몬을 부르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하지만)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 그것은 이 여자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 (47절) “A person who is forgiven little shows only little love, a person who is forgiven much loves much.”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알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5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빚을 갚을 길이 없었는데, 주인이 두 사람 모두 빚을 탕감해 줬다면, 누가 더 주인을 사랑했겠느냐?” 이 질문에 시몬은 “그야, 500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이 더 주인을 사랑했겠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대로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적게 탕감 받은 사람보다 더 많이 주인을 사랑했을 것이다. 적게 용서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얼마나 형편 없는 삶을 살았는지, 또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알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큰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니, 이 사람이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가사를 쓴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John Newton 목사는 한 때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노예들을 유럽 시장에 파는 노예선의 선원이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는 자리까지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전해 주는 책 한 권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그 책 이름이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1380-1471, 독일)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입니다. John Newton이 그의 고백을 담은 찬송시를 들어 보십시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자신을 구원한 것은 ‘the precious blood of Jesus’라고 고백하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그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가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전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조상이 물려 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8)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포인트는,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엄청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들이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죄의 값으로 지불 하고서야 용서 받을 수 있을 만큼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보통 제물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내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 아는 사람이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 (디모데전서 1:15)’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큰 죄를 용서 받은 사실을 안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완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일대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5:23). 이 말은 그가 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더 넓은 곳으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는 그의 복음에 대한 열망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큰 죄를 용서하셨다는 깨달음이 있는 자리가 곧 크리스천의 삶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감사의 자리이고, 사명의 자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용서 받았는지를 깨달은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 할 수 없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찬송가 151장)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어서 내 몸을 바쳐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2:6-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늘 위에 있는 그분의 보좌 곁에 우리를 앉혀 주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의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God made us alive together with Christ, and made us sit together in the heavenly places in Christ Jesus, so that in the ages to come He might show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 in His kindness toward us in Christ Je-sus).” (NKJV)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넘치는 부요함 (풍성함)’ 아닙니까? 어떤 성경에서는 ‘exceeding’이라는 말 대신 ‘surpass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무튼 영어의 표현이 참 구체적이고 디테일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를 보여 주시려고 하시는데요. ‘in the ages to come’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오고 오는 세대에’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시려고 하는데, 얼마나 그 은혜가 얼마나 부요한 지, 제대로 보여 주려면 오고 오는 세대에게 보여 줘도 다 못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십자가 위에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넘치도록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감사와 헌신을 드리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하나님의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를 갚을 수 없습니다.


3/25/2018 | 종려주일 설교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

베드로전서 2:21-25

전 주에 우리 교회 성가대에서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가 참 좋은 찬양입니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드디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네
그것은 나의 마음 모두를 주께 드리는 일 속에 있네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속에서
나의 삶을 모두 오직 주님께만 드리리, 오직 주님께만 드리리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한 적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모욕을 당해도 욕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당신 두고 봅시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다고 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꼭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에 ‘화목제물 (ransom)’이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두 강도는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흠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개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를 기준으로 해서 천 년, 아니 천 오 백 년이 넘는 제사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도 제가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BC 1,000년 혹은 BC 1,500년경이면 우리나라의 고조선 시대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유대나라의 역사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그들은 이미 문자가 있었고, ‘여호와’라는 유일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의 역사가 바로 그 때의 역사입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그 제사 중에 ‘화목 제사’가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때 제물로 드리는 것이 ‘흠 없는 어린 양’ 입니다. 베드로 역시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완벽한 ‘the sinless and spotless Lamb of God (죄가 없으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베드로전서 1:19)’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는 유대인들의 제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완전한 화목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은 그만큼 값진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에 써서 보냈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예루살렘에서 크리스천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조국을 떠나 주로 소아시아 지방에 피신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가 편지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 구원이 값진 구원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 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이 있으라 (마가복음 11:9)!”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직 사람을 한번도 태워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합니다. 왜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발견합니다. 혹시 여러분, 로마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을 읽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미 증언한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 길입니다. 이 길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길로 들어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1-22)

새롭게 열린 구원의 길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미 증언한 길이라고 하잖아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신 구원의 길에, footnote가 달린 것입니다. 학생들이 논문을 쓸 때, 자기 주장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이렇다는 주장을 할 때 아무 근거 없이 그런 주장을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대야 합니다. 그것이 footnote 아닙니까? 우리 말로는 ‘관주(貫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누가 다 큰 사람이 나귀 새끼를 타겠습니까? 아주 보기 드문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스가랴 9:9’ 이라는 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스가랴 (Zechariah)는 기원전 약 500년 경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언한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500년 전에 기록한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구원의 새 길은 이렇게 예언자들이 증언한 길입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 (The Passion Week)’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한 주간을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에 보면 “그는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으나,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털을 깎이는 양과 같이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야 53:7)” 고 했는데, 정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심문을 하던 총독 빌라도가 이상하게 여길만큼 예수님은 자기를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7:14).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만 자기를 변호하면 더 편해 질 수도 있고, 재판이 유리하게 돌아갈 수도 있는데,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복음서 여기 저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은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사형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 (wine drugged with myrrh)를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형이 집행 되는 과정에서도 한번 더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사형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려는 인간적인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5:23)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 어떤 것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 고통을 몸소 다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왜 (Why)?”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1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example’을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요. “A Christian is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받아 들이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으니까 우리도 예수님이 남기신 발자국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세상에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세상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앞으로 세상은 기술적으로는 더 발전하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나빠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쟁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말씀대로 살기를 거절한다면 더 이상 인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디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어디 내가 같이 시간을 보내줘야 할 사람은 없는가?” “내가 얘기를 들어줘야 할 외로운 사람은 없는가?” “어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는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없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에게 희망이 생긴다니까요.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죽을 우리 몸에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 있지만 예수님을 위해 항상 몸을 죽음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는 죽음이 활동하지만,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 “Through suffering, our bodies continue to share in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seen in our bodies. Yes, we live under constant danger of death because we serve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will be evident in our dying bodies. So we live in the face of death, but this has resulted in eternal life for you.”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이 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당신은 정말 예수님 같이 살고 있네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살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So we live in the face of death, but this has resulted in eternal life for you”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살아가는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에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 살면 돼!”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정말 우리교회에 나오는 청년들 중에 이 말씀처럼 살겠다는 청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 청년들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고급 인력들입니다. 어디서나 리더십을 가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들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Go into all the world (마가복음 16: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요. 이 사람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이 말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라는 말입니다), 의 (the righteousness)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으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 속에 들어가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We Are The Reason’ 이 노래 가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우리의 삶에 이런 가슴 벅찬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 죽겠다는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살 이유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목자를 찾아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목자를 잃어 버린 양처럼 이리 저리 방황하지 않고, 영혼의 목자에게 인생의 닻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방황하는 분들 있나요? 어디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인생의 한 과정으로 방황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황은 창조적인 방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방황이라면 끝을 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우리의 영혼들이 영혼의 목자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더 이상 방황을 계속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합니다 (We have this hope as an anchor for the soul, firm and secure).” 배가 항구에 들어와 닻을 내리면 파도가 쳐도, 바람이 불어도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닻을 내려야 떠내려 가지 않습니다. 우리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 분,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할 분입니다. 그 분에게 닻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이 ‘frim and secure (견고하고 안전)’해 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영혼의 닻을 내리고 있는가?” 하고 질문해 보십시오.


3/24/2018 | 사순절 34

십자가 후에 After The Cross

요한복음 14:16-19

성령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금방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요한복음 16:7)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됩니까?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지 않으면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고 ‘보혜사’께서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보혜사 (16절)’라는 말입니다. 본래 ‘보혜사’라는 말은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παράκλητος’라고 하는데요. ‘곁으로 부르다’ ‘도움을 청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번역하다 보니까 ‘Advocate (대변자)’ ‘Comforter (위로자)’ ‘Encourager (격려자)’ ‘Counselor (상담자)’ 등 여러가지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6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요. 쉽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자기는 하나님께로 가지만, 내가 너희를 버려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18절)”고 하시잖아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지만, 사실은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혹은 ‘보혜사’는 ‘진리의 영’입니다 (17절).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2:10).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며 때로는 대변자로, 때로는 위로자로, 격려자로, 상담자로 우리 곁에 계시는 그분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뜻을 잘 따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잘 깨달으면, 우리는 믿음생활을 바른 길을 따라 잘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 ‘보혜사’의 인도를 잘 받으면 우리는 진리의 길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일 많이 하는 오해는 성령을 인격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영어에서 성령을 말한 때는 언제나 ‘He’라고 남성 명사로 표현합니다. 절대로 ‘it’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는 명사에 성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παράκλητος’는 남성 명사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대명사로 표현하려면 ‘그분’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격이 있으시다는 말은 성령께서 감정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면 성령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지 않으면 성령께서 슬퍼하십니다.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방법은 성령의 인도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니까 우리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는 영이시니까 우리의 영의 채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성령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라는 말입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꽉 차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내 속에 성령이 꽉 차 있다’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부흥사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이 “아멘, 아멘”합니다.

성경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셨다.” (누가복음 4:1)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기를” (사도행전 4:8)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사도행전 6:3)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사도행전 11:24)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의 많고 적은 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 꽉 찬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이미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3 말씀을 쉽게 요약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즉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그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이미 내 안에 온전하게 들어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많고 적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지배하셨느냐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해 지배하신 상태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셨으면 우리는 그것을 ‘성령 충만한 삶 (The Spirit Filled Life)’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작은 차이라고 생각 되시나요?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생활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 충만’을 내가 성령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양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배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믿음생활에서 많이 넘어집니다. 사탄이 그런 사람을 공격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그런 때에 전혀 working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내가 구원 받았을 때 그때부터 이미 성령은 내 안에 계셨어요. 조금 계시고 많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얼마나 많이 지배하느냐, 적게 지배하느냐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은 제자들 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께서 제자들을 완전히 지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을 이렇게 잘 이해한 사람은 믿음생활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 생활에서 승리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서 working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성령 충만’을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양의 많고 적음이라고 생각하면, 여기서부터 성령에 대한 오해가 시작됩니다. 성령은 처음부터 우리 안에 온전히 계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유의 주체가 성령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얼마나 소유하는지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소유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소유하시면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소유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보세요. 성령께서 나를 소유하신다고 생각하면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되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 일을 하다가 시험에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주 시험에 걸려 넘어집니다. 나를 지배하시는 성령께서 일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일하는 것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즉 ‘십자가의 죽음 후에’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줍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아 가십시오. 잘못 배운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working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배운 지식이라야 우리의 삶에서 working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working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의 대변자가 되시고,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고, 격려자가 되시고, 상담자가 되시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23/2018 | 사순절 33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 A Personal Message from God

이사야 53:10-12

여러분들은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기독교의 성스러운 심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고요.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무슨 신비한 능력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고요. 또 목에 차고 다니면 위험한 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먼저 있어야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저께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이작 와츠 (Issac Watts, 1674-1748, 영국)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가 쓴 찬송가가 (물론 찬송시를 말함) 우리 찬송가에 12개나 들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중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 (149장)’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1절)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힘입어 교만한 맘을 버리네.” (2절) “못박힌 손발 보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3절)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드리네.” (4절)

와츠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만한 맘을 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볼 때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와츠가 쓴 또 하나의 탁월한 찬송이 있습니다. 151장 ‘만 왕의 왕 내 주께서’입니다. 그 찬송시 후렴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가지고 있던 고통의 모두 사라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아니면 더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분들과 함께 처음으로 남미 코스타 리카 (Costa Rica)로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밖에 나가서 노방 전도도 했습니다. 국민의 95% 이상이 카톨릭을 믿습니다. 저는 그 때 까지만 해도 카톨릭도 예수님을 믿는 종교인데 95%가 예수를 믿는 나라에 무슨 단기 선교냐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 보니까 전도를 해야 하겠더라고요. 집집마다 방문 해 보았더니, 말이 카톨릭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선반 위에 무슨 부적을 모시듯이 올려 놨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어도 교회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도둑이 많고, 미혼모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마침 어느 교회가 비가 많이 와서 무너져 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데, 바닥이 흙입니다. 비가 오면 흙바닥에 앉기가 어려워요. 무너져 내린 벽은 자기들이 어떻게 손을 보겠는데, 벽을 손 볼 때 바닥에 시멘트를 깔았으면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단기선교 팀이 가서 바닥을 시멘트로 깔아줬습니다. 시멘트를 구입하는 비용을 우리 단기 선교팀이 부담했습니다. 현지에서 일하는 선교사님이 미리 그렇게 하기로 계획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시멘트를 물에 이기는 작업부터 우리 선교팀과 그 교회 교인들 몇 명이 같이 협력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교 팀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시멘트를 한 삽 뜨면 꽤 무겁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많으니까 몇 번 해 볼만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힘들어집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 찬송가 한 구절이 떠 올랐어요.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 나의 마음에 큰 고통 사라져” 이 찬송을 불렀어요. 그랬더니 우리 선교 팀이 따라 불렀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찬송을 현지 사람들이 알더라고요. 그래서 이 찬송을 모두 같이 불렀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바닥에 시멘트를 까는 힘든 작업을 마쳤습니다. 이 찬송가 부를 때마다 코스타 리카 교회 생각이 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성경 말씀이 보여 주는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 변경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첫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한 사람에게 지우셨습니다. 이 죄는 남의 것을 훔쳤다든지, 법을 어겼다든지 하는 죄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 없이 자기 멋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인간의 교만한 생각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자기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생각 아닙니까? 성경에서는 이것을 ‘교만 (pride)’이라고 하고, 이 ‘교만’을 죄라고 합니다.

‘교만의 죄’를 가장 쉽게 잘 보여 주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입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의 꿈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 간섭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 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간섭이 없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살아 본 결과는 파산이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교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 (The Original Sin)’라고 합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위선으로 이 ‘원죄’를 가리고, 어떤 사람들은 교양으로 자기 속에 있는 ‘원죄’를 가립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들 속에 있는 ‘죄’가 더욱 심각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위장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를 한 사람에게 지웠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셨는지 우리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God’s unconditional love)’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그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야 말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4:9-11) 이런 생각이 들어야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화목제물 (ransom)’으로 내 주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둘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예를 들어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e law of Moses was unable to save us because of the weakness of our sinful nature. So God did what the law could not do. He sent his own Son in a body like the bodies we sinners have. And in that body God declared an end to sin's control over us by giving his Son as a sacrifice for our sins.” (로마서 8:3) “우리의 인간성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진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 주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컨트롤 할 수 없다고, 죄의 지배의 종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많은 기적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예 (example)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충분히 우리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전서 5:7-9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주의하십시오. 원수 마귀가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5-6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는 믿고 구해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습니다.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이제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새벽에 우리에게 승리는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3/22/2018 | 사순절 32

십자가의 중심부 The Heart of The Cross

마태복음 27:45-54

아이작 와츠 (Issac Watts, 1674-1748, 영국)가 쓴 찬송가 중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아이작 와츠는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찬송시를 썼습니다. 아이작 와츠는 어릴 때부터 찬송시를 짓는 천재성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하루는 예배 시간에 시편을 인도자와 회중이 교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니 어린 아이작 와츠가 시편 교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 온 아버지는 아이작 와츠가 예배 시간에 시편 교독을 하지 않은 이유를 대라고 하면서 아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가 잘못된 것을 꾸짖었습니다. 그 때 아이작 와츠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그 시편에는 음악이 없고 운 (rhyme)도 맞지 않은데, 그런 시편을 굳이 따라 할 이유가 없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화가 난 아버지는 “네가 다윗보다 다 똑똑하단 말이냐? 그러면 그 시편보다 더 좋은 찬송시를 써 봐라” 하면서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아이작 와츠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아이작 와츠는 14살도 되기 전에 5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와츠에게 12년 동안 시를 쓰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런 가정에서 아이작 와츠는 찬송시를 쓰는 데 탁월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찬송가에 아이작 와츠가 쓴 찬송시가 12개나 들어 있습니다. 그가 쓴 대표적인 찬송가 중에 ‘웬 말인가 날 위하여 (143장)’이 있습니다. 그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돌아가셨나” (1절)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2절)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3절)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립니다” (4절)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5절)

이 찬송시에 흐르고 있는 은혜와 영성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찬송가 가사처럼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정말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였다고 했습니다 (45절).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시간에 밝게 빛나던 해마저 빛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9:4-5)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그 때 해가 빛을 잃었던 것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은 ‘우주적인 슬픔’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삶은 캄캄한 밤과 같은 어두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매우 어둡고 우울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절규하는 말씀이 나오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둡고 우울한 장면이지만 우리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시간이고, 소중한 장면입니다. 비록 어둡고 우울한 장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이 장면은 없어서는 안 될 장면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방법 밖에 없었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생깁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뭔가 꼭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를 볼 때 생기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에서 보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예수님의 앞을 막은 것은 십자가가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Get away from me, Satan! You are a dangerous trap to me.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마태복음 16:22-23) 이 말씀을 바울 버전으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크리스천의 삶은 세상적인 혹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항상 이기적이고 불완전합니다. 항상 적을 만들고, 경쟁해야 하고, 갈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방식은 평화를 가져 옵니다. 자기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좋게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불완전합니다. 그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외에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control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control을 벗어난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저께 제가 도표를 보여 드렸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또 십자가 아래서 일어났던 일 하나 하나가 이미 구약 성경에 특히 시편 22편에 세밀한 부분까지 예언되어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control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God was in control perfectly at the Cross!”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결코 용서하실 수 없는 정의 하나님, 하지만 동시에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무 갈등 없이 완벽하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모두 그 아들에게 전가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의의 하나님께서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심으로써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탄은 힘을 잃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를 짓게 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노예로 살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심으로 사탄은 그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완벽하게 패배한 것입니다. 사탄은 무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어저께 아침에 읽었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But thank God! He gives us victory over sin and death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고린도전서 15:56-57)

마지막으로, 만일 십자가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났다면, 그것 만으로도 훌륭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50-51절 말씀입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며칠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나마 말씀 드렸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언약 (The New Covenant)’을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 이전에는 이 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에게만 이 길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던 이 길이 이제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길을 ‘새 길 (the new way)’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By his death, Jesus opened a new and life-giving way through the curtain into the Most Holy Place.” (히브리서 10:20).

지금 우리는 이 ‘새 길’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합니다. 교회 오면 예배 시간에 목사의 인도를 받기는 합니다만, 목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의미가 다릅니다. 목사 역시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새 길’을 따라 교우들과 같이 하나님께 나가는 성도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 ‘새 길’이 우리 앞에 열림으로써 어떤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읽어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도우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입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와 도우심을 받읍시다.” (히브리서 4: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