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3/31/2018 | 사순절 40
그는 살아나셨다! He Is Alive!
마태복음 28:9-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 여자들은 제자들에게 가서 외쳤을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습니다!” “He is alive!”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를 제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처음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던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거기서 만나 사명을 확인하려고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의 무덤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도 대제사장에게 가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의논한 끝에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너희들의 책임은 묻지 않은 테니, 나가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빈 무덤설 (The Theory of the Empty Tomb)’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는 ‘빈 무덤설’의 진상을 알고 있었고, 그 진상을 그의 복음서에 쓴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이번 사순절에 새벽 기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또 복음의 핵심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분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2)
정치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지금 한국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이 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인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범죄 사실을 입증할 자료들이 차고 넘친다고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저런 말을 해도,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자료들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할 충분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질문한다고 해도 제 나름대로 충분한 자료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부활은 한 두 사람이 경험했던 주관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는 실 시간으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고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그 이야기 속에 실명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6). 그리고, 어제 아침에도 제가 그렇게 설교했습니다만, 사복음서에 나오는 부활에 대한 말씀은 거짓말을 진짜처럼 가장하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의 저자들은 아주 자신 있게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광불휘 (眞光不煇)’라는 말을 설명했습니다. ‘진짜의 빛은 찬란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니까 부활의 첫 증인들이 여자들이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그 결과로 죽어야 하는 운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관점은 현재에 삶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는 관점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현재의 삶의 의미는 미래의 삶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됩니다.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 Driven Life)’는 바로 자신의 삶의 초점을 미래에 맞춰야 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쓴 책입니다. 이 책이 히트를 친 것을 보면, 기독교의 메시지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어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으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나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고린도후서 5:7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믿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당장에 실패했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실패가 영원히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지 삶의 미션을 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자기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마가복음 16:15, NIV) 한국어 성경에는 이 말씀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보스턴 다운타운에 있는 구세군 교회에 무슨 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래 층 로비에서 누구를 만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잠깐 기다리는 동안 정말 우연히 벽에 쓰인 이 성경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NIV 버전으로 써 있었는데, 말씀의 느낌이 정말 새롭게 다가오더라고요. ‘into’라는 접속사에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to the inside of (2) toward or in the direction of: (3) to a point of contact with 1번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되겠지요? 마치 게릴라처럼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번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세상을 향하여 가라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방향이 항상 세상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번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가서 적극적으로 세상과 접촉을 하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빛과 소금으로 살고, 거기서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24: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개역 개정 성경에는 이 말씀이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have found this man to be a troublemaker, stirring up riots among the Jews all over the world. He is a ringleader of the Nazarene sect.” 또 KJV 성경에는 “For we have found this man a pestilent fellow, and a mover of sedition among all the Jews throughout the world, and a ringleader of the sect of the Nazarenes”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들어가서 접촉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염 시켜라!”
그 어떤 의미로 해석을 하든 이 말씀의 의미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믿고 경험했던 사람들은 모두 역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죽은 듯이 살아간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삶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소망을 주고, 우리의 삶에 미션을 주셨습니다.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역동적인 삶을 살았듯이, 오늘 우리도 심장이 뛰고, 살아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30/2018 | 사순절 39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 God’s Wisdom Revealed
마태복음 28:1-8
십자가의 메시지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십자가를 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것과 믿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큰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21)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 to those who are headed for destruction! But we who are being saved know it is the very power of God. Since God in his wisdom saw to it that the world would never know him through human wisdom, he has used our foolish preaching to save those who believe.” 이 말씀 중에 ‘foolish’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십자가가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 “하나님은 어리석게 보이는 설교를 통해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교회 나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시간에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반문합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MIT에 다니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고모가 되겠네요. 고모가 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모는 크리스천입니다. 교회에 와 보니까 자기 조카들 또래 학생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집에 가서 조카에게 다음 주에 나하고 같이 교회 가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조카가 하는 말이 “What a waste of time!”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에 가자는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나이가 많아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기껏 많아 봐야 서른도 못되었을 텐데, 그 아이들이 자기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쩌다가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얼마나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까? 십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 얼마나 우습게 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천사가 그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와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라. 그리고 그가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예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라.’” (5-7절) 그래서 여자들이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역사의 시작입니다.
누가 재미 있는 주장을 했습니다. 왜 부활의 소식을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들이 하필이면 여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저자들이 유대사회의 관습과 문화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기록한 복음서에 여자들이 이 중요한 장면에 등장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소식을 잘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것이 여자들이 등장하는 이유일까요? 그 당시 유대 관습에서는 여자들의 말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 되지도 않았답니다.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It was Mary Magdalene, Joanna,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everal other women who told the apostles what had happened.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0-11) 쉬운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복음서 저자들은 일제히 여자들을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한 첫 번 사람들이라고 기록을 했을까요? 베드로 같은 사람이 제일 먼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의 소식을 전달한 사람으로 하면 훨씬 더 좋지 않겠습니까? 복음서 저자들이 이런 뻔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여기서 ‘역설적인 증거’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5:1-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나는 전에 여러분에게 전해 준 바로 그 복음의 참뜻을 다시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지금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이 이 놀라운 복음 위에 바로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복음을 처음부터 되는 대로 믿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한마음으로 굳게 믿어 왔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먼저 내가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또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 부분이 중요합니다. “I passed on to you what was most important and what had also been passed on to me. Christ died for our sins, just as the Scriptures said. He was buried, and he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just as the Scriptures said.”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이 메시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전해 받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나에게 전달된 복음이 나에게서 끝이 나 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종교들이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 선행을 강조합니다. 선행을 많이 하면 그 공적이 쌓여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걸지 않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선행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구원 얻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질문의 대답으로 선행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에서는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할까요? 여러분, 잘 들으세요. 기독교에서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 어떤 선행도, 또 선행을 많이 해서 공적이 많이 쌓인다고 해도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너의 선행으로 너의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ransom (몸값)’이 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주 귀하신 분입니다. 죄가 없어요. 조그만 흠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ransom’이 되시기에 충분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복음 1:29, 36)”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분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가 십자가의 메시지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 같이 화면을 보면서 이 말씀을 읽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유대인이 되었든지 그리스인이 되었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
3/29/2018 | 사순절 38
일시적인 악의 승리 The Temporary Victory of Evil
누가복음 23:13-25
이제 사순절 기도회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은혜롭게 잘 지내 온 것을 감사 드립니다. 저에게 이번 사순절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다리가 불편해서 많은 시간을 집에 있다 보니, 말씀 준비에 더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하셨는데, 전 이 말씀이 저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받아 들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번 사순절이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순절 마치고 여러분에게 많은 간증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23장의 말씀은 총독 빌라도 (The Governor Pilate)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 준다는 말씀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를 대신해서 이 지역을 관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있는 날, 전 말 밤에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님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저 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어젯밤 꿈 속에서 제가 이 사람 때문에 몹시 고통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7:19) 꼭 아내의 말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빌라도는 빌라도 대로 예수에 대한 조사를 했을 것입니다. 빌라도 역시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유대 지도자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만한 정보력도 없이 어떻게 관할지역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빌라도 자기 나름대로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조사를 했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얻은 결론은 예수라는 사람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이 사람이 백성을 반역하도록 부추긴다고 하여 내게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너희 앞에서 조사를 해 보니 너희가 이 사람에 대하여 고소한 죄목을 찾을 수 없었다. 헤롯도 아무런 잘못을 찾아 낼 수 없어 그를 다시 나에게 보낸 것이다. 이 사람은 사형에 해당하는 어떤 잘못도 행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를 매질해서 풀어 주겠다 (14-16)”는 것이었습니다. 또, 같은 말씀이 22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악한 일을 저질렀느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했다. 따라서 매질만 하고 풀어 주겠다.” (22절) 빌라도의 의도는 확실했습니다. “Pilate argued with them, because he wanted to release Jesus.” (20절)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면 할수록 무리들의 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21절) “사람들은 자기들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했습니다.” (23절)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처럼 끈질기게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27:20절에는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군중들에게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요청하라고 시켰습니다.”
빌라도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사람들의 요구대로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대로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넘겨 주었습니다.” (24-25절) 예수님 대신 바라바가 석방되었습니다. 바라바에 대해서는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the man in prison for insurrection and murder). 빌라도는 바라바를 사형 시키고,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면서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허락했습니다. 그 말씀이 마태복음 27:24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 Way of Sorrows)’라는 좁은 골목 길을 지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악이 이겼습니다. 악한 세력이 이기고 선한 세력이 패배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2,000년 전에 예수님에게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까? 선한 사람이 꼭 성공하고, 선한 사람이 반드시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나요? “왜 악한 사람이 잘 되고, 선한 사람이 실패하는가?” 하는 질문은 오늘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욥이 가지고 있었던 질문도 바로 이 질문 아니었습니까? 욥의 친구들은 반대로 욥을 공격했지요? “욥, 네가 바르게 살았다면 네가 이런 고통을 받을 리가 없다!” 욥의 친구들은 이런 인과응보의 법칙을 가지고 욥을 공격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잘못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욥에 자기의 고난과 고통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욥의 이야기 아닙니까?
결론을 말하기 전에 빌라도라는 사람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려고 합니다. 빌라도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는 잘못되었다는 것이 크리스천들의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에 그 고백이 나오지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는 선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리들의 고함 소리에 겁을 먹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끝내 빌라도가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사형 시킬 권한이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8:11)
우리가 빌라도에게서 얻는 교훈은 진리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의 나약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점에서 빌라도는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빌라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지키지 못하고 비겁하게 돌아선다든지, 눈을 감는다든지, 현장을 벗어난다든지 하는 일은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 역사를 얼마나 후퇴시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비난을 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이 장면에서 빌라도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오히려 이용하셨습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님을 끝까지 지켜 냈더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성취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의 나약함과 비겁함은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빌라도가 끝까지 예수님을 지켰더라면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도록 하셨으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결국 유대 지도자들의 의도했던 대로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는데, 그들의 의도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악한 세력의 승리는 영원한 승리가 아니라 일시적인 승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악한 세력의 승리는 채 3일을 가지고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3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악한 세력이 영원히 승리한다면,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악한 세력이 영원히 승리를 하고 선한 세력이 영원히 패배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be strong and immovable. Always work enthusiastically for the Lord, for you know that nothing you do for the Lord is ever useless).” (고린도전서 15:58)
그렇습니다. 악의 승리는 일시적인 승리였고, 영원히 승리한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악한 세력들이 꾸민 계획대로 된 것 같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모든 상황이 끝이 난 것 같지만, 여러분, 확실하게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어 죽으시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는 것은 ‘성경대로 (just as the Scriptures said)’ 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악한 세력들의 의도 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 대로 된 것입니다. 악한 세력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3/28/2018 | 사순절 37
하나님의 마음 The Heart of God
요한복음 3:10-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이야기는 구약성경 민수기 21장에 나와 있습니다. 광야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Kadesh)’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기회가 왔지만, 에돔 (Edom)이라는 나라가 길을 내 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에돔하고 싸우지 말고 길을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칠 대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거요? 여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소. 이 형편 없는 음식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독사를 보내 물게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하던 사람들이 모세에게 와서 제발 이 뱀들을 없애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급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 보고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가 니고데모가 잘 알아들지 못하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단 구리뱀을 처다보면 다 살아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내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가 올 텐데, 누구든지 나를 쳐다 보는 사람은 다 구원을 얻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쳐다 본다’는 말은 일종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소망을 둔다’ 혹은 ‘믿는다’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요한복음 3:16 말씀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잠깐 묵상해 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죄가 관영한 세상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막힌 세상이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리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된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둘째로,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싫어 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30:18, 시편 98:9).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면서도 동시에 죄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딜레마에 빠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이 충돌한 것입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것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은 이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요한복음 1:29, 36)”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낸 것은 우리의 죄를 그가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법을 어겼다든지, 윤리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든지 하는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죄를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 죄일까요?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혼자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런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죄를 ‘원죄 (the original Sin)’라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기 전에 모두 그런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아니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비록 말한 대로 온전히 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지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모두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 전가 (imputation)된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같이 죽은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죄인인 우리가 죽는 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께서 모두 치르셨습니다.
넷째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값싼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맞습니까?
모세가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았습니다. 그런다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두 살아났습니까? 아니잖아요?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 보는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끝내 쳐다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쳐다 보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누구나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쳐다 보는 사람이, 이 말은 예수님이 정말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이 열려 있지만, 누구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17절)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New Living Translation)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4:10-11) 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함 (actions)’으로 사랑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직접 행함으로 보이셨습니다.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ransom으로 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영감 (inspiration)을 얻어야 합니다.
3/27/2018 | 사순절 36
복음의 능력 The Power of The Gospel
데살로니카전서 2:1-12
오늘 말씀은 비교적 긴 말씀인데요. 하지만,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1-2절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카 선교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씀입니다. “You know how badly we had been treated at Philippi just before we came to you and how much we suffered there”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카에 가기 전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We had been badly treated’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참 안 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빌립보서 루디아를 얻었고, 간수 가족을 얻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의 seed들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간수 가족을 얻기 위해서 바울과 실라에게 고난 받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요셉의 고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 개인적으로 보면 고난 받은 일들이 참 안 됐지만, 결과적으로는 요셉의 고난이 자기 가족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카 선교에서도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데살로니카에 도착한 바울과 실라는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3주 에 걸쳐 유대인들과 성경을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 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 중에 바울과 실라의 전도를 받아 상당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리스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왔고, 적잖은 귀부인들도 바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 중에 바울과 실라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법을 어겨가며 예수라 하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다 (사도행전 17:7)”고 하면서 관가에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야손 (Jason)’이라는 좋은 사람을 만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데살로니카의 크리스천들은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전도를 못하게 된 것을 알고 바울 일행을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이런 배경이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3-12절 말씀은 바울이 자기의 심정을 공개한 말씀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1) 우리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악한 생각도 품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3절). (2)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검증을 받았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4절). (3) 자신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다고 합니다 (4절). (4) 자신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거나, 돈을 바라거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5절). (5)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권위를 사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6절). (6) 전도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다고 합니다. (9절). (7) 자신이 흠없이 거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10절) (8) 자신이 전한 교훈은 사람들을 높여 주고, 위로하는 것들이었으며, 하나님을 위해 선한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친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합니다. (12절)
여러분, 오늘 말씀에 열거된 말씀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에게 전도자의 자질과, 사명과 전도자의 삶과 성도들에 대한 예의에 대한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크리스천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 한번 요약해 볼까요? 한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탁월합니다. 탁월하다고 하는 것은 그 메시지의 중요성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둘째로, 복음은 내용이 쉽고 간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이렇게 고백했잖아요? “Oh, how great are God's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 How impossible it is for us to understand his decisions and his ways!” (로마서 11:33)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매우 쉽고 간단합니다. 어린 아이들도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복음은 효력이 확실합니다. 어디서는 working하지만, 어디서는 working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는 working하는데, 누구에게는 working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자리, 어느 장소에서도, 누구에게나 working합니다. 요한복음 1:12이 그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넷째로, 복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충분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다른 또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 하나로 충분합니다. 어떤 환경 속에 있든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어떤 위기 속에 있든지, 무슨 문제가 있든지, 복음은 그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모자람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이 이렇게 탁월하고, 쉽고, 확실하고, 충분한 것은 알겠는데, 그 복음의 능력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데살로니카전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이 거짓말을 합니다. 사기를 칩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의 생활이 건전하지 않아서 비난을 받습니다. 아니, 복음을 들은 사람이 왜 그렇게 삽니까? 복음을 듣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 사람 스스로 복음에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증명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삶이 예사롭지 않지 않습니까? 사도로서 쓸 데 없는 권위를 행사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대하는 것에 예의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전한 교훈은 건전하고 창조적입니다. 사도들은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곧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들의 이런 생각과 삶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는데,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억지로 그렇게 한다면 위선자들이 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지속적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 그의 삶이 변화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변화된 마음, 생각, 말과 행동, 변화된 가치관을 밖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강력한 복음의 능력에 대한 증명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