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3/16/2018 | 사순절 27
나를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 God’s Amazing Plan For Me
시편 139:1-13
“예수님에게 생의 목적이 있으셨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생의 목적이 있으셨겠지요. 생각해 보면 생의 목적이 없다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의 목적’은 그 사람의 삶의 이유와 삶의 의미, 그 사람의 사명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삶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 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말도 되고, 사명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게는 무엇이 삶의 목적이었을까?” 하는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력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나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Christian’이라고 하는 말의 정의를 찾아 봤더니, 이런 정의가 있더라고요.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예수님의 인격을 우리의 삶 속에서 증명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알렉산더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전투에 나아가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행위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도망병을 잡으면 공개적으로 처형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한 병사가 도망치다 붙잡혀 알렉산더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 병사를 보니 파란 눈의 앳된 소년이었는데, 너무 불쌍해 보여 죽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병사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알렉산더가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어라고?” 소년 병사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병사의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과 똑같았던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화가 나서 세 번째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라고?” 놀란 병사가 “알렉산더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자 알렉산더가 달려가서 그 병사의 멱살을 휘어잡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네가 알렉산더라고? 네 이름을 바꾸던지, 네 삶의 태도를 바꿔라!”하고 호령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용기 없는 소년이 자기와 똑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정말 크리스천답게 살지 않으려면, 그냥 이름만 가지고 있을 생각히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생각이면, 크리스천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마가복음 10:45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even’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 윗절에서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대속물’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속물(代贖物)’이라고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대신 드리는 속죄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ansom’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몸값’ ‘보석금’이라는 뜻입니다. ‘보석금’이라고 할 때 ‘bail’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을 ‘ransom’으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그대신 우리는 풀려나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죄의 노예로부터 풀려나 자유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반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for many)’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어떤 사람들을 상대하셨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 가시는 곳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도 예수님은 서슴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땅은 유대인들에게는 들어가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도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이틀르 머물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40). 예수님은 지중해 연안 시돈과 두로 지방에도 가셨습니다. 이 지방 역시 유대인들은 들어가기를 꺼리는 이방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딸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한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기 위해 왔는데, 그 중에 시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아무 차별 없이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지혜의 말을 듣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24-25)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이 그저 아무 뜻 없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장차 예수님이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주님 (the Lord)’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ransom for many’라는 말씀 속에 이렇게 인종을 초월해서, 국경을 초월해서, 사상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말씀 속에 여러분과 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지만, 그 중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깨닫는 사람은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ransom’의 의미를 자신의 삶 속에 잘 적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산다면 결국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서 말씀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고백을 듣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살고 난 후에 이런 고백을 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습니까? 아쉽지만 그 때는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나의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언제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정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초월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빌립보서 4:7)’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대한 생각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9편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주께서 지금까지 나를 살피셨으니 주는 나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들을 아십니다. 주는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을 아십니다. 주는 나의 모든 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호와여, 주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는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주는 주의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이 지식은 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합니다” (1-6절)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 내가 언제 잠자리에 들어가는 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두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If I go down to the grave①, you are there.” (8절) / ①Hebrew to Sheol 내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실망에 빠지고,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추적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단 한순간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 엄청난 지식에 완전히 압도되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Such knowledge is too wonderful for me, too great for me to understand.” (6절)
또 계속 말씀을 읽어 보시지요. “주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을 지으셨으며,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You made all the delicate, inner parts of my body and knit me together in my mother’s womb).” (13절) 하나님은 나를 속속들이 모두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속품까지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속품을 조립해서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1:5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I knew you before I formed you in your mother’s womb. Before you were born I set you apart and appointed you as my prophet to the nations (내가 모태에서 너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나는 너를 알았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너를 구별해 세계 만민을 위한 예언자로 선정해 놓았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 전부터 (뱃속에 내가 생긴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하나님은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시나요? 이 사실을 믿고 안 믿고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또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 삶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예레미야 29:11)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선한만큼 나의 삶은 선한 결말을 가져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 속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나를 위해 ‘ramsom (대속물)’로 주신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나를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29)”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삶이 아무 의미 없이 길거리에 나뒹구는 삶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고, 그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습니다. 주저 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삶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3/15/2018 | 사순절 26
하나님의 어린양 The Lamb of God
로마서 3:21-26
오늘 말씀은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고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새 길'이 열렸다는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이 '새 길'은 이런 길입니다. (1)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되었던 길이다. (2)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온다. (3) 이 구원의 길은 차별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읽고 한가롭게 요점은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별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늘 들어왔던 평범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보냈습니다.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로마서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누구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바울이 드디어 로마에 거의 다 갔을 무렵, ‘브디올 (Puteoli)’이라는 곳에 도착을 했는데요. 여기서 바울은 크리스천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초청을 받아 일주일을 그곳에 머물면서 그들과 교제합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합니다. 로마에서도 이미 바울의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두에 환영 나와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크리스천 형제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만나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8:15)
이 크리스천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50% 이상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나머지는 ‘Non-Jewish people’ 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바울이 보낸 편지를 읽었을 것입니다. 유대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를 을 읽으면서 바울이 제시한 구원의 ‘새 길’에 대한 말씀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니? 율법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예수님 때문에 열렸다고?” “아니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예수님 여셨다고?” 하지만 이 사람들이 바울을 환영하러 이렇게 부두까지 나온 것을 보면, 바울의 편지를 충격적으로 받아 들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Non-Jewish people’에게도 바울의 편지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길이 너무 쉽게 열리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로마의 크리스천 형제 자매들에게 대하여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지만, 어떻게 그 미스터리가 다 풀리겠습니까? 이 정도로 남겨 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3-25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는 판단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내어 주셨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의로우심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이 이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소통의 채널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죄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을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주로 양을 드렸습니다. 양의 온순하고 순결한 모습이 제물로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제물을 고를 때는 신중하게 골랐습니다. 어린양 중에서 흠이 없는 양을 골랐습니다. 털에 다른 색이 들어 있지 않는 순백이어야 하고, 몸 어디에도 defect 된 부분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어린양을 제물로 골라서 제사장에게 가져 갑니다. 그리고, 두 팔로 양을 꽉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죄가 양에게 ‘전가 (im-putation)’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직접 칼로 양을 양을 죽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양의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이렇게 해서 속죄 제사를 마칩니다. 천년 넘게 지켜 온 유대교의 속죄 의식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해마다 똑같은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황소나 염소나 양의 피로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의식이 그들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더 이상 죄의식을 느끼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다시 제물을 드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4)
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몸을 드리신 제사를 통해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단 한 번의 제사로 그는 깨끗하게 된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We have been made holy through the sacrifice of the body of Jesus Christ once for all).” (히브리서 10:10, 14)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요한복음 1:29, 36)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면 한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 제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 드리는 어린양과 다릅니다. 그 양은 자기 죄를 용서 받고 싶어서 자기가 선택해서 제사장에게 가져 간 양입니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용서 받는 유대교의 속죄의식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런 의식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제물로 선택하신 어린양입니다. 이 제물이면 우리의 죄가 영원히 용서 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속죄 제물입니다. 제물은 제물인데, 어린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제물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준비한 양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서 양에게 죄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전가되는 것입니다. 칼로 양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가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베드로는 이 피를 ‘보혈(寶血)’이라고, ‘The precious blood of Jesus’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1:18-19에 있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전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조상이 물려 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베드로는 그 자신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속죄 의식에 너무나 익숙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한마디 말로 자신이 믿어왔던 유대교의 속죄 시스템을 모두 부정해 버립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조상이 물려준 헛되고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용서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구원의 새 시스템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대가로 지불한’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예수님의 보혈은 금이나 은과 같은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구원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가 그렇게 귀한 자리입니다. 결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눈에 올바른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로마서 5:1-2)
3/14/2018 | 사순절 25
놀라운 십자가 The Wonderful Cross!
로마서 5:1-8
오늘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하나님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 말씀을 통해서 알아 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셨습니다.” (8절)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바울은 또 5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whom he has given us).”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지 2,000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도 그의 자녀들의 마음 속에 이 사랑을 쏟아 붓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고 배웠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며,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For the LORD is right-eous, he loves justice; upright men will see his face).” (시편 11:7)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어떤 때는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기뻐하신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삶이 방자해 집니다. 방자한 사람은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무례하고 건방진 사람이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요한일서 4:8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또 요한복음 3:16 말씀도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하나님의 인자하심, 또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긍휼하심 등은 모두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나와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거든요.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혀 온 여자에게 사람들은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죄 없는 사람이 있거든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를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손에 들었던 돌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정죄하려는 사람들이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요한복음 8:1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 그렇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이 두가지 성품을 모두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듯 우리도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일을 눈감아 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불의한 일 앞에서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불의한 일을 눈 앞에 보면서도 그런 일에 개입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눈을 감아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해야 하는 일은 무슨 일인데요? 교회 모여서 찬송하는 일입니까? 교회 모여서 기도하는 일입니까? 어디서 그렇게 배웠습니까?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을 비쳐야 제 할 일을 하는 것 아닌가요? 여러분들은 절대로 불의한 일을 보고 눈을 감거나 피해 지나가면 안 됩니다. 자동차 사고가 났습니다. 그 옆에서 이 사고를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차 주인이 서로 필요한 information을 주고 받습니다. 서로 헤어지려고 하는데, 한 사람이 다가 옵니다. “내가 이 현장을 봤는데, 저 차가 잘못했다. 필요하다면 내가 증인이 되어 주겠다”고 하면서 이름과 연락처를 줍니다. 좀 오래된 일입니다만, 제가 경험한 일입니다. 이런 일은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증인이 되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아요? 그냥 지나쳐 집으로 와 버리면 편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일을 보고 못 본 척하거나, 귀찮다고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거든요? 정의의 칼만 휘두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잖아요?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 이런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십자가 위에서 정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이 perfect harmony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아시나요? 정의의 하나님을 만족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잖아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죽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잖아요? 그 덕분에 우리에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과 relationship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당시 사람들,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안달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그 때 광경이 잘 나와 있습니다. “Pilate asked them, ‘Then what should I do with this man you call the king of the Jews?’ They shouted back, ‘Crucify him!’ ‘Why?’ Pilate demanded. ‘What crime has he committed?’ But the mob roared even louder, ‘Crucify him!’” (마가복음 15:12-14) 이렇게 해서 이들이 원했던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를 거둔 것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유대인이 되었든지 그리스인이 되었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의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이겼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벽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죄를 심판해야만 하는 정의의 하나님과 우리를 용서하시려는 사랑의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The Wonderful Cross!” “놀라운 십자가!”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12/2018 | 사순절 23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 What The Cross Represents
누가복음 2:25-35
혹시 여러분, 성경 어디선가 ‘아사셀 (Azazel)’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구약성경 레위기 16:8, 10, 26에 이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사셀’이 광야에 살고 있는 악한 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속죄일에 드려지는 염소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 ‘아사셀’이 지명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모두 ‘아사셀’이라는 뜻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들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번역들, 특히 영문 번역들이 ‘아사셀’을 ‘scapegoat (희생양)’ 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생양’으로 번역할 때는 이 말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대속죄일 (Yom Kippur)’이 있습니다. 이 날 두 염소를 선정해 놓았다가 제비를 뽑습니다. 한 염소는 하나님께 드릴 ‘속죄양’으로 쓰고, 나머지 한 염소가 ‘아사셀’이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아사셀로 드려질 염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해 동안 백성들이 지은 모든 죄가 이 염소에게 얹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전가(轉嫁, imputation)’라고 합니다. 백성들의 모든 죄가 그 염소에게 옮겨간 것입니다. 그 염소에게 모든 죄가 옮겨가고 백성들은 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 염소를 데리고 광야로 갑니다. 이스라엘에 ‘아사셀 협곡’이 있다고 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찔한 협곡입니다. 그 염소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도록 그 협곡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죽거나 혹시 죽지 않는다고 해도 유대 광야에 살고 있는 표범이나 줄무늬 하이에나 등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죽습니다.
성경 레위기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과 겹쳐 (overlap)집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 (The Lamb Of God)’이라는 말씀과 오버랩 됩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 1:29, 36에 두 번 나옵니다. 둘째로, ‘아사셀’로 드려지는 염소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유월절 저녁에 먹는 ‘유월절 양’과도 오버랩 됩니다. 유월절 양은 오랜 역사를 가진 이야기에서 유래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이것을 ‘출애굽 (The Exodus)’라고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열가지 재앙을 선포합니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것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그 때 바로의 첫째 아들도 죽습니다. 이 재앙 때문에 결국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 때 그 재앙 속에서도 이스라엘 집들은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스라엘 집에는 어린양의 피를 문틀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집들은 재앙을 피했습니다. 그 때를 기억하면서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아서 피를 내서 문틀에 바르고 고기는 저녁 만찬 때 먹었습니다. ‘아사셀’로 드려지는 염소와 유월절 양의 이미지가 오버랩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유월절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이스라엘 가정에서 유월절 양을 잡는 날 밤이었습니다. 유월절 양의 피와 고기가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살이 찢기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셋째로, ‘아사셀’로 드려지는 염소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와 오버랩 됩니다. ‘아사셀’로 드려지는 염소가 광야의 협곡에 버려져 죽듯이, 예수님은 히브리서 표현에 의하면 ‘영문 밖 (outside the city gates, 히브리서 13:12)’에 있는 골고다 언덕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아사셀’로 드려지는 염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전가되었듯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죄가 전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된 결과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에베소서 2:10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NLT 성경으로 읽어 볼까요?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직역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우리를 크리스천이 되게 하셨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데에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선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새롭게 창조 받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표 작품 (Masterpiece)입니다. 대표작이라는 것이 그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 아닌가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정말 많은 희생을 치루시고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편지에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썼을 때, 여기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이 아이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표적이 될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4-35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is child is destined to cause many in Israel to fall, but he will be a joy to many others. He has been sent as a sign from God, but many will oppose him. As a result, the deepest thoughts of many hearts will be revealed. And a sword will pierce your very soul.” (34-35절) 이 말씀은 요셉과 마리아가 장자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대로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제사장이 예수님을 팔에 안고 축복한 다음에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 말입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마지막 한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을 것이고, 그것이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창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과 아픔을 줄 것이라는 예언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은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싸인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눈을 들어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성경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들의 숨은 생각이 모두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을 반대하든지 (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든지, 십자가 앞에 선 사람들의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계획이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 안에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 안에 놀랍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 되기를 바랍니다.
3/11/2018 | 사순절 새벽기도 5
기도가 주는 영적인 유익 Spiritual Benefits of Prayer
시편 69:13-18, 29-32
여러분, 지금 ‘사순절 (Lent)’ 기간인데요. ‘사순절’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께 우리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기간입니다. 잘 보내고 계시지요? 새벽 기도에 열심히 참여하고 계시는 교우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냥 새벽 기도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 라이드로, 미디어로, 아침 식사로 참여하고 계시는 교우들께 감사 드립니다.
무엇이든지 자원해서 드리는 일은 힘들지 않고, 재미 있고, 성과가 있습니다. 공부가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보스턴에 와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자기 전공분야의 첨단 학문을 배우고, 전공 분야의 지식을 넓혀가면서도, 나의 전문 지식이 직업을 얻고, 나의 생계수단이 되고, 돈을 번다는 단순한 생각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보다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닦은 나의 학문이 조국을 위해서,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해서 공헌할 수 있고, 세상을 좀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지, 왜 교회에 나가는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고 습관적으로 믿음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생활의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더 깊이 알려는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빌립보서 3:7-8)”라고 했는데, 성경책이 내 손 안에 있어야 합니다. J. I. Packer가 쓴 ‘Knowing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같은 책이 내 주변에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새벽에 나와야 한다고 야단을 하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 이야기를 자꾸 합니다만,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쉬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카전서 5:17). “Pray without ceasing”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숨을 계속 쉬어야 하는 것처럼, 기도를 그치면 영적호흡이 당장에 끊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의 설교, 그의 편지에 나오는 말들은 책상에 앉아서 깊이 생각해 본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탁상공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나 편지글들은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의 말씀들을 해석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했던 말들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And do not 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마태복음 6:13)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temptation’이 너무 많습니다. 조금만 우리의 생각이 나태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면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악한 일에 가담하게 됩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한 일에 가담하지 않는 제일 좋은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계속 기도를 통해서 소통(疏通)하는 것이야 말로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2,000년에 제자들이 살던 시대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더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 18:1) NASB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en always ought to pray and not lose heart.” ‘men’이라고 했으니까 “사람은 항상 기도해야 하고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겠지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 없는 옵션이 아닙니다. 기도는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낙심할 일이 없습니까? 여러분에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없습니까? 우리 주변에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열 두 번도 더 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네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말씀드린 연장선에서 오늘 시편 69편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For the choir director: A psalm of David, to be sung to the tune ‘Lilies.’” 이 시편 69편을 어떻게 노래로 불러야 하는지 합창 지휘자에게 주는 지시 (instruction) 사항입니다. 아마 그 당시에 ‘백합’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시편은 그 노래 곡조에 맞춰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노래를 모르니까 맞춰 부를 수가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쉬운성경에는 이 시편은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다윗의 시’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봐서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은 즐겁고 행복한 때를 노래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시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많은 은혜가 되는 이유입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잖아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한 자격이 없다.” 그렇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들은 다윗이 쓴 시편에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통찰력 (insight)을 얻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기도가 주는 영적인 유익’입니다. 저는 오늘 시편 69편에 나와 있는 네 가지 기도가 주는 유익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유익들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유익들을 기도하지 않으면 모두 놓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하면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첫째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 줍니다. ‘intimate (친밀한)’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제가 기억하는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노아 (Noah)’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This is the account of Noah and his family.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 (창세기 6:9) 직역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이것은 노아와 노아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흠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가까운) 교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호의를 기다리면서 주께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주의 크고도 크신 사랑으로 확실한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13절) 여러분, 다윗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도의 말들을 주목해 보세요. “주님의 호의를 기다립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in your unfailing love)’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시오.” “확실한 구원 (sure salvation)을 베풀어 주십시오.” “내게로 가까이 오셔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18절) “내 마음이 괴롭고 몹시 아픕니다.” (29절) 지금 다윗이 사용하고 있는 이런 말들은 하나님과 ‘close (intimate) fellowship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쉽게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이런 말 대신 영혼 없는 형식적인 말들이 나옵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만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친밀한 단어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둘째로, 기도의 유익은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해 줍니다. 기도는 우리를 반성하게 하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회개하게 합니다. 한번 다윗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님은 내 어리석음을 잘 알고 계시니, 내 죄를 주님 앞에서는 감출 수 없습니다.” (5절)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분 앞에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숨겨진 것들을 다 말씀 드리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전문적인 용어로 ‘confession (고백)’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정금 같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정금은 아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금을 말하잖아요? 지금 한국에 ‘Me Too’이 번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누구에게 말할 수 없어서 가슴에 숨겨두었던 일들을 하나 둘 공개적으로 꺼내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어디까지 어떻게 전개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워낙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다른 일보다 먼저여야 하니까 다른 말은 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냥 이러다가 수그러드는 일이 된다면 아예 처음부터 ‘Me Too’ 운동이 시작되지 말았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되고,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지 결과가 주목됩니다. 가해자 중에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나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아무리 가해자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런 결과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살한 사람의 평소 친구들 조차 그 사람의 장례식에 가는 일이 조심스러워서 꺼리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기도는 가해자나 피해자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confess’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confess’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해자도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confess’하면서 하나님께서 상처를 싸매 주시는 치유를 경험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 32편은 다윗이 가해자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confess’하는 시편입니다.
적절한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결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겨 놓았던 부끄러운 일들을 ‘confess’함으로서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정금 같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삶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기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 역시 우리를 정결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고난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고난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셋째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하나님을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provider (공급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신기하게도 시편 69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수소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흐뭇하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30-31절) 우리가 그 과정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 시편이 처음에는 어두운 기도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기도가 찬양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기도한 것들을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그가 처한 상황을 이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것들을 들어 주시고 공급해 주시는 ‘provider’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provider’라는 사실을 다른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크리스천’은 다른 것 아닙니다.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성숙한 크리스천입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중에도 끝까지 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이런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우리 믿음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인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 보겠습니다. “겸손한 자가 이러한 일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3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humble will see their God at work and be glad. Let all who seek God’s help be encouraged.” 여기서 ‘the humble (겸손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고난 받는 사람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마음이 낮아지잖아요?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시편 69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 속에 자기와 동일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자기와 똑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합니다. 나를 도와 주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여러분도 도와 주실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기도가 자기 안에서 머물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 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