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018 | 사순절 새벽기도 4

이것들을 구하라! Ask For These!

시편 5:1-12

지금은 ‘사순절 (Lent)’ 기간입니다. 지난 수 십년 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사순절 새벽기도’를 드려 왔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때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우리는 새벽기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은혜롭게 잘 보내면 보낼수록 부활절을 맞는 기쁨이 배(倍)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예수님과 닮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 다윗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통해 내 뜻을 이룰 것이다 (사도행전 13:22)”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무엘상 13:14에 “The LORD has sought out a man after his own heart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내셨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신 그 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그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고 다윗을 마음에 들어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다윗은 하나님과 소통을 잘 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기도가 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셋을 다 잘했습니다. 그 증거는 다윗이 수많은 시편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가 쓴 시편은 시이면서 동시에 기도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5편이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지휘자를 따라 플루트에 맞춰 부른 노래’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수금 (하프) 연주의 달인(達人)이었습니다. 얼마나 연주를 잘 했으면 그의 수금 연주를 듣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던 사울의 마음이 진정되었겠습니까? ‘music therapy (음악치료)’라는 말이 생긴 지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이미 다윗 시대에 ‘음악치료’의 개념이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가 기원전 1,000년이면 우리나라의 고조선 때입니다. 그 때 이미 ‘음악 치료’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평생이 쓴 시편 중 성경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73편입니다.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시편도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수금 연주의 달인인 다윗은 자기가 쓴 시를 가지고 수금을 연주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 시를 가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시편 5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 했던 아침 기도입니다. 시에 아침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뒤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썼을 때, 그의 주변에 적들이 많았습니다 (8, 9절). 그 적들 앞에서 다윗은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도와 달라고 외치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 드립니다. 여호와여, 아침마다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니, 매일 아침 나의 소원들을 주께 아뢰고, 주님의 응답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2-3절)

여러분, 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이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자기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의심하는 사람을 ‘두 마음을 품는 사람 (a double-minded pers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야고보서 1:6-8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는 믿고 구해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는 자는 바다 물결같이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 무엇을 받을까 하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는 두 마음을 품어 자기가 하는 일에 방향을 못 잡고 헤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는 한 가지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 중에 오늘 말씀과 비슷한 시편이 시편 34편입니다. 다윗이 적들에게 쫓기고 쫓기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다윗은,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블레셋 군 진영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숨어 지냅니다. 그러다가 그만 정체가 탄로납니다. 시편 34편은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어느 날, 그동안 숨어 지내던 다윗의 정체가 탄로 나 다윗은 블레셋 왕에게 끌려갑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유명한 다윗입니다. 우리 진영에 숨어 들어 온 것을 알고 끌고 왔습니다. 우리 군대를 정탐하러 온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정말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 갑자기 그 앞에서 침을 흘리고 발작을 하면서 미친 사람 흉내를 냅니다. 블레셋 왕이 그 모습을 보고 “이런 미친 놈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놈이다. 당장 내쫓아라!” 그래서 다윗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습니다. 다윗은 그 때 그 순간을 시로 남겼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찾아 도움을 청했더니 내게 대답하시고, 내가 두려워하던 모든 것에서 나를 건지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은 빛이 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불쌍한 사람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시편 34:4-6) 하나님은 그의 생명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블레셋 왕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서 다윗을 살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그런 식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 드립니다. 여호와여, 아침마다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니, 매일 아침 나의 소원들을 주께 아뢰고, 주님의 응답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시편 5:2-3절) 여러분, 다윗의 이 기도를 들으면서 또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왕 (my King)’이라고 불렀다면, 자기는 왕의 통치를 받고, 왕의 명령을 듣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이것들을 위해 기도하라!” 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정말 ‘겨자씨만한 지식 (Knowledge of God as small as a mustard seed)’도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42:5 말씀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had only heard about you before, but now I have seen you with my own eyes.” 전에는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를 귀로 들은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눈으로 보고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expansion) 되었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고난을 당한 욥은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고,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는 아프고 힘들었지만 이것이 약이 되어서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전보다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욥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고난을 통하여 확장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struggle하는 중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한 차원 높은 지식으로 upgrade 되었습니다. 지금 힘들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sturuggle하세요. 하나님과 씨름하세요. 여러분이 겪는 고난과 역경, 고통과 아픔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욥에게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둘째로, 다윗이 그렇게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임재 속에 들어가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강하게 세워지는 비결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님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주님의 집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엎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내 주위에 적들이 많습니다. 주의 의로운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의 길을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7-8절) “Because of your unfailing love, I can enter your house; I will worship at your Temple with deepest awe. Lead me in the right path, O LORD, or my enemies will conquer me. Make your way plain for me to follow.” (New Living Translation)

와! 굉장한 말씀입니다. 사방에 적들이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그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들어갔다는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자기 앞에 하나님의 성전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 때 그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주어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unfailing love (끊임 없는 사랑)’를 고백합니다. ‘In Touch Ministries’로 유명한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His peace and presence are required if we are to live victoriously, regardless of circumstances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관계 없이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평안과 임재하심이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강해지는 방법은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손에 쥔 사람,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강한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이 강하게 되는 길은 우리 스스로의 힘을 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3)”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는 자신의 힘으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in Him who strengthens me)’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강한 사람이 되는 비결은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임재하심 속에 서는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강한 사람이 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하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도 평범한 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것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를 잊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잖아요? “고침을 받은 사람은 모두 열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7)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감사 드렸습니다. 열 명 중에 한 사람이면 감사를 아는 사람이 10%는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00명 중에 한 사람이나 될까요? 그만큼 감사를 모르는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은 누구나 즐겁게 해 주소서. 언제까지나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해 주소서. 주님, 그들을 지켜 보호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11절) 여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즐거워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까?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해 주신 일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에 대한 감사입니다.

생각해 보면, 온통 모두가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벽을 깨뜨리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일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갈 때마다 이 감사의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경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100:4)”라고 했습니다. 감사야 말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그리고 감사야 말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는 만큼 우리의 기도 또한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숙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임재 속에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안에서 강하게 세워지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 감사로 드리는 찬양, 감사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십니다.


3/3/2018 | 사순절 16

성숙의 과정 The Refining Process

마태복음 26:40-46

어저께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히브리서 4:1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cannot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One who has been tempted in all things as [we are, yet] with-out sin.).”

이 말씀에 나오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sympathy (동정심)’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와 똑 같은 몸을 입으시고 3년 동안 세상에 사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피곤함을 아십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새벽 기도에 나왔다가도 깊은 잠이 듭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셨는지, 예수님을 혼자 남겨 놓고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우리의 배고픔을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즘엔 청년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걱정, 진로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걱정에 ‘sympathy’ 가지고 계십니다. 혼자 걱정 하지 마세요. 혼자 모든 걱정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세요. 찬송가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이 찬송가 좋아하시지요? 곡조도 좋지만, 가사가 참 대단해요. 1절에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모두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절 가사입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완벽한 가사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sympathy’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쓴 잔’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느냐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 ‘쓴 잔’이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잖아요? 왜 다른 방법을 물으셨을까요? 하나님과 단절되고 버림 받는 것이 무섭고 싫어서 그랬습니다. 예수님처럼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피해 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잖아요? 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희생 없이, 십자가 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짆아요? 비록 예수님의 겟세마에 동산의 기도와 그 깊이는 다를지 모르지만, 피하고 싶은 마음만은 똑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시간, 예수님은 매우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가 보여 주는 것은 비록 몸과 마음은 피곤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아주 견고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가가 그의 복음서에 잘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마가복음 14:36)’고 기록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마가만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바 (Abba)’라는 말은 아람어로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를 때 그 말 속에 아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이 들어 있습니다. 아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도는 한가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가할 때는 기도하지만 바쁠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기도를 건강할 때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피곤하고 힘들고 아플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기도를 실패한 사람들이, 뭔가 큰 일이 나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을 때, 자기 계획대로 잘 나갈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평소에 많이 해서 저축해 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사시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이상한 궤변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기도는 저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급할 때 기도하지 않고 은행에서 돈 찾아 쓰듯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몸 컨디션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분이 좋을 때다 기분이 다운 될 때나, 기도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얻는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반드시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과 희생이 반가운 손님이 찾아 오듯이 그렇게 오나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굉장한 아픔을 주고, 걱정과 근심을 안겨 줍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과 고뇌를 제자들에게 모두 털어 놓았습니다.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가복음 14:34)

하지만,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이 모든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로마서 5:3-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우리는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압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이 과정이 무슨 과정이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숙한 자녀로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보세요. ‘Suffering (고난)→ Perseverance (인내) → Character (인격) → Hope (희망)’ 여기 ‘희망’은 ‘Final Salvation (마지막 구원)’에 대한 희망입니다.

‘Suffering’이 없이는 이 과정이 시작이 되지 않습니다. ‘Suffering’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고난’은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이는 인내도 없고, 인내가 없이는 인격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고난’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여러분의 삶 속에 찾아 오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3/2/2018 | 사순절 15

겟세마네의 교훈 Lessons in Gethsemane

고린도후서 5:1-9

예루살렘을 여행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 보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올리브산이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겟세마네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입니다. 올리브산 자체가 절대 높은 산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해발 720m 정도이고, 올리브산은 이보다 조금 높은 해발 820m 정도입니다.

올리브산에는 말 그대로 올리브 나무가 많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아주 단단하고 강인한 나무입니다. 올리브 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열매는 식용으로 먹을 수 있고, 열매를 짜서 나오는 기름은 건강에 좋은 최고 품질의 기름입니다. 그리고, 나무는 아주 단단해서 목공이나 조각품을 만듭니다. 올리브 나무는 똑 바로 자라지 않고 줄기가 뒤틀리면서 자랍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받으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어느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올리브 나무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나무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겟세마네 동산 어딘가에 은밀한 예수님의 기도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늘 그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큰 올리브 나무 근처 어디였는지 모르지요. 제자들은 그 장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던 그 저녁에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될 수만 있다면 이 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고 (He wen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 갔다 (누가복음 22:39)”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과 조금 떨어져 혼자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북돋워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날 밤이었을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예수님의 괴로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He was in such agony of spirit.”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는 매우 근심하며 괴로워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4:33-34)’”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 날 밤에 그토록 괴로워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 힘들어 하셨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 밤에 괴로워하셨던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것 (to be separated from God)"이었습니다. 죽음을 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혀 있던 시간은 이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날 수로는 삼 일이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 속에 있었던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 속에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무도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 논리로 무장된 사람들이나,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예수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힘들고 아파하셨던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 때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 때가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속으로 들어 가 볼까요? 예수님께서 그 날 밤에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감당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 앞에 구원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상하지 않았던 문제가 생기고, 고통과 아픔, 실패와 좌절이 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도 고난은 예외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의 뜻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아픔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당장에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지금 손 놓고 계시는 것 아니야.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위해서 가장 완벽한 계획을 수행하고 계셔. 나는 지금 그 과정 속에 있는 거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와 십자가를 지시는 모든 과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힘들어 하시더니, 급기야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pro-ject는 착착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for we live by believing and not by seeing).”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간략하게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울 같은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볼까요? 사도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사도로 살아서 받은 눈에 보이는 보상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 말씀이 “우리가 거하는 땅에 있는 천막집이 무너진다”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천막집이니까 제대로 된 집이 아닙니다. 그것마저 무너집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면 사도의 삶이 그렇게 초라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게 천막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삶도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놀라운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나님은 그의 신실한 종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집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이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God himself has prepared us for this, and as a guarantee he has given us his Holy Spirit).” (5절) 예,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보증 (guarantee)’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공식 (formula)과 같은 것입니다. 공식은 답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식을 모르거나, 잘못된 공식을 사용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올바른 공식에 올바로 대입하면 정답이 나옵니다. ‘겟세마네 동산→ 순종→ 하나님의 뜻의 성취’ 이 공식에 대입을 하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 고난과 시련을 대입하고, 다시 거기에 순종을 대입하시면 ‘띵똥땡’ 하고 정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은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을 이깁니다. 예수님도 그런 믿음으로 사셨고, 사도 바울도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3/1/2018 | 사순절 14

또 한번의 기회 A Second Chance

요한복음 8:1-11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올리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1-2절)  예수님께서 전 날 성전 뜰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태가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긴장감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밤에 올리브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님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소통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반성해 보면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예수님은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언제 왔는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성전 뜰에서 기다리던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이 누군지 정확하게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다. “야, 이건 새로운 교훈이다.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본 적이 없어! 이 분의 말씀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이지?” (마가복음 1:27, 누가복음 4:32) 예수님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People Need The Lord)’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을 무웠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2,000전에도 그렇고, 그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공허함 (emptiness)’의 정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입니다. 이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갈급함을 느낄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그 이른 새벽에 성전 뜰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사람들 속에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먼저 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왁작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들 간음 현장에서 붙잡아 끌고 왔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얻기 위해 이렇게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6절) 무슨 뜻입니까? 지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끌고 온 것은 오래 전부터 기획해 왔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예수님을 trap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plot (음모)을 꾸며 온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음모에 보기 좋게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 바닥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조급하게 계속 묻습니다. “아니, 선생께서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시겠냐고 묻지 않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예수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기다립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7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떠나가고, 마지막엔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손에 들었던 돌을 놓고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양심에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은 이유는 자기들도 이 여자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들 (the religious people)’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겉에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이렇게 착하고, 선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는 온갖 나쁜 일을 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제가 반복해서 잔소리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 됩니다.” “성경 읽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늬만 크리스천이지 자세해 보면 크리스천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첫째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에 대하여 정죄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예수님은 이 여자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The love Jesus demonstrated at the Cross is unconditional. True love reaches out to the unlovely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랑이다.”

둘째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를 정죄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기회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1절)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도 예수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누가복음 19:9-10)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도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잘 믿고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잘못된 삶과 단절하고, 하나님의 ‘의의 도구 (instrument of righteousness) (로마서 6:13)’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 줌이 마땅합니다.” (요한일서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으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또 한번의 기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올바로 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미 이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가 헛되지 않도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한번의 기회’를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2/28/2018 | 사순절 13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고린도후서 7:8-12

오늘 요절 말씀은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godly sorrow)’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슬픔 (worldly sorrow)’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슬픔입니다. 그런데, 이 슬픔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슬픔은 ‘세상의 슬픔’인데요. 무슨 슬픔일까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슬픔, 억울한 일을 당한 슬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슬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슬픔, 이런 슬픔들이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세상적인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뜻이 잘 나와 있습니다.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영적인 죽음 (spiritual death)’을 가져 온다고 했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사람을 회개하게 만들어서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오늘 읽은 한 토막만 떼서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왜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오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교회들은 거의 모두 바울이 세운 교회들입니다. 교회들마다 그 교들의 독특한 역사가 있고,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고린도는 바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선교 전략지역으로 여기고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아무 예외적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본 이유는 환상 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For I am with you, and no one will attack and harm you, for many people in this city belong to me) (사도행전 18:10)”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선교 방식에 있어서도 고린도 선교는 특별했습니다. 바울은 ‘tent-making mission (천막제조 선교)’이라는 독특한 선교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바울의 선교방식을 따르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즉 선교지에서 직업을 가지고 선교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벌어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선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기서 평생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They once risked their lives for me. I am thankful to them (그들 부부는 나를 구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을 감수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들 부부에게 감사합니다).” (로마서 16:3)

이상이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대충 요약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용 면에 있어서 고린도 선교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7:8-9 상반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로 인하여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편지로 인해 잠깐이나마 마음 아파했다는 것을 알고는 나 자신도 후회를 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라니요? 그것이 무슨 편지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편지가 고린도전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자들 중에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보낸 또 하나의 편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눈물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편지입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A. D. 56년 경에 디도를 통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에 대한 실랄한 책망과 충고,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그 편지를 보내 놓고 매우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 강하게 편지를 쓰지 않았나?” “혹시라도 이 편지가 문제가 되어서 오히려 교회 문제가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내 편지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편지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을 돌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졌던 슬픔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었습니다.” (9절 하반절)

오늘 우리에게는 잘못한 것을 무조건 덮어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그냥 덮어 주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용서가 어떤 용서인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무조건 눈 감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덮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내셨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그 죄를 자기의 아들에게 전가 (imputation) 시켰겠습니까?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를 꺼내는 것은, 그 공동체 속한 모두에게 큰 아픔을 줍니다.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꺼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문제가 더 심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초기 단계에서 빨리 수술을 했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을, 수술할 시기를 놓쳐버려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힘든 치료 과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술을 해야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7:10에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to experience leads us away from sin and results in salvation. There’s no regret for that kind of sorrow.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우리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어제 한국 뉴스를 봤더니 또 한 사람이 자신이 연극인이라고 하면서 실명으로 TV 인터뷰에 나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실명으로 나를 밝히지 않으면 상대방이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하기 때문에 여자인 제가 실명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의 문제를 자꾸 말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드러내서 회개해야 할 문제인데, 그냥 덮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가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선자 (hypo¬crites)’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를 덮지 말고 입을 열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사순절이 그런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도 자신에 대하여 진진한 반성이 없었지 않습니까? 한번도 입을 열어 진지하게 회개의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11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더 이상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진지해졌을 뿐만 아니라 성의를 갖게 되었으며, 내가 지적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열심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나의 도움을 바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서 죄지은 사람을 처벌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현대어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