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7/2018 | 새해예배 설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God Who Makes Everything New
요한계시록 21:1-7
오늘은 2018년 새해 첫 주일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 예배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알았습니다. 적당한 예배 장소를 구하지 못했는데, 마침 전명수 장로님 댁에서 예배 장소를 내 주셔서 이렇게 새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예배는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 되기 때문에, 집에서 이 방송을 보면서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새해 첫 주 예배를 예배당에 가득찬 성도들과,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 연주, 그리고, 성가대와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드려야 하는데, 그동안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지내왔던 우리 마음에, 감사의 마음을 회복 시켜 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22장까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21장이니까 요한계시록 끝부분입니다. 악한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되고, ‘새하늘과 새땅’이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으로 오늘 말씀이 시작됩니다. 전에 있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요한은 이 ‘새하늘과 새땅’이 전에 있던 하늘과 땅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늘과 땅입니다. 그래서 ‘새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부터 내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바다는 용이 살던 곳입니다. 용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용이 살던 바다가 없어졌다고 하니까요. ‘새하늘과 새땅’은 하나님의 통치을 반대하던 세력들이 정복되고.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하게 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 (5절)”고 하신 말씀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ok, I am making everything new! Write this down, for what I tell you is trustworthy and true.”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고 한 이 말은 틀림없는 나의 진실한 말이니까 이 말을 받아 적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새해 들어서 새롭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새롭게 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지, 우리는 그 방법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새해 ‘resolution’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 말로 하면 ‘결심’이라고 할까요? “What is your resulution for the New Year?” 하고 물으면 새해를 어떻게 살 것인지 마음에 결심한 것이 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새해 ‘resolution’을 세운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결심이 얼마나 약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결심해도 그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잖아요? 마음은 먹었는데 3일 밖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어에도 이런 표현이 있다고 하네요. “I throw in the towel too soon.” 혹은 “I stick to nothing.” 이런 표현도 있다고 하네요.
우리가 새로워지기를 원하지만, 마음 먹은대로, 결심한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세요. 디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랍비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의회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최고로 존경 받는 사람으로 이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밤중에 찾아 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가지고 온 문제가 무엇이라고 예수님께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무엇이라는 것을 단번에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복음 3:3)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에 나옵니다. “Unless you are born again①, you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 / ①Or born from above 성경은 새로워진다는 말을 ‘거듭난다’ 혹은 ‘born again’한다라는 말과 같은 말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born again’이라는 말은 ‘born from above’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고 각주 (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결심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결심을 하지만 그 결심대로 되지 않아 포기하고 맙니다.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으로’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5:17-18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And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이 말씀 속에 사람이 새로워지기 위해 알아야 할 세 가지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은 믿는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둘째로, 성경이 말하는 새로워지는 삶이란 예전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철이 들어 말이나 행동이 전보다 조금 좋아지는 것을 새로워진다고 하지 않습니다. “The old life is gone and a new life has begun”입니다. 예전의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전의 삶과 새로운 삶 사이에 단절이 생긴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새로워지는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알고 행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Look, I am making everything new! (5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시는지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비겁하고 믿지 않는 자, 악을 행하는 자, 살인하고 음란한 자, 마술을 행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들에게는 유황이 타는 불못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8절) 라고 했습니다. 런 사람들은 ‘새하늘과 새땅’의 백성들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워진 사람들만이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면, 낡은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될 수 있다.” (마태복음 9:17) 예수님께서 “낡은 가죽 부대는 터져서 새 포도주가 담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여기서 말씀하신 ‘낡은 가죽 부대 (old wineskins)’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 (self-righteousness)’에 빠져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의 것을 고집하면서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 부대’로 만드시는 일을 끊임없이 하십니다. ‘새 부대’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새 부대’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10년 혹은 15년 안에 이 시대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도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확신은 지금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들을 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성전이 제 구실을 못했을 때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서 파괴해 버리신 하나님께서 다시 그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도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침략해서 파괴하지 않았나요? 그 때도 성전이 제 구실을 못했습니다. 그 때가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을 유대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유대인들은 요즘 말로 하면 ‘멘붕’에 빠졌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누가복음 12:56)?”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어떻게 계획하시고 진행하고 계시는지 여러분은 깨닫고 있습니까?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새 부대 (new wineskins)’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계획하시는 일들을 놓치는 일이 없이, 모두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7절 말씀에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children)”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가장 정상적일 때, 가장 완전했을 때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비정상적일 때도 있나요? 며칠 전에 새벽 기도에서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16절)” “That is why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NLT)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않고 자신들을 나그네라고 생각하면서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implication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이 그런 것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3-4절) ‘새하늘과 새땅’에서 있는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 잘 안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 말씀과 정반대의 현상들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고, 이 일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교회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 보스턴)의 말이 생각납니다. “What is succes? To laugh often and much; to win the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affection of children;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to appreciate the beauty; to find the best in others;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자주 많이 웃고, 지성적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비평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거짓된 친구들로부터의 배신을 참고,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고,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것을 발견하고,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거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거나 사회조건을 개선하여어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남기고, 내가 세상에 살았음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더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일도 바로 이런 일이 아닐까요? 무슨 큰 일을 해서 ‘새하늘과 새땅’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작은 일을 통해서도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의 눈을 닦아주는 일,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는 일, 이런 일들도 충분히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2018년 새해가 아무 계획 없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그렇게 말하잖아요? “잠에서 깨어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The hour has come for you to wake up from your slumber because our salvation is nearer now than when we first believed).” (로마서 13:11)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새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을 부르시고, 우리교회를 부르실지 기대가 됩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기쁨으로 응답하고 참여하는 여러분과 또 우리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12/31/2017 | 송년주일예배 설교
내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 God Knows Me By Name.
시편 147:1-7
오늘은 201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2017년을 시작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 세월이 살같이 흘러갑니다. 한자에도 광음여류(光陰如流), 세월유수(歲月流水), 광음여전(光陰如箭)이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모두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또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3절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우네 (Time is now fleeting, the moments are passing from you and from me).” 또 성경 시편 90편에 보면 “우리의 인생이 날아가듯 빨리 지나갑니다 (시편 90:10)”라는 말씀이 나오고, 신약 에베소서에는 “세월을 아끼라 (5:16)”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를 어떻게 사셨습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올 해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을 겪으면서 맘 고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올해는 많은 사람들이 직장 문제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 facebook에 올려 놓았습니다만, ‘미국에서 한국인이 사는 법’이라는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직장을 얻지 못하고 ‘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 기간이 끝나 하는 수 없이 한국으로 귀국하고 있다는 내용의 동영상입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올해 사랑하는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렵고 힘든 일을 겪게 되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크리스천들도 힘든 일을 겪게 되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고 해서 그리 놀랄 것 없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편 147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시편 147편은 누가 쓴 것인지 저자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시편도 다윗이 쓴 시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이 150편 중에 73편이나 되니까 그럴만도 합니다. 하지만, 성서신학자들은 시편 147편은 다윗의 시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 147편은 무명의 저자가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시편 147편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이 시편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우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 그분께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지요.” (1절)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서 찬양이 중요한 이유는, 찬양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recognize)’ 것이기 때문입니다. ‘praise’라는 말 자체가 찬양의 대상에게 존경과 인정을 표현하는 것 아닙니까? 욥기를 읽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고도, 자식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죽는 참사를 겪으면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1:21)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의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세요? “누구든지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나도 귀하게 여기겠다. 그러나 나를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은 나도 그들을 깔보아 수치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겠다. 이는 내가 온 세계의 주인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하는 말이니 그대로 될 것이다 (I will honor those who honor me, and I will despise those who think lightly of me).” (사무엘상 2:30, 현대어 성경)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아너 (honor)’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너’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씀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 (Eli)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 때 제사장 엘리는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웠다고 했습니다. 매우 상징적인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엘리와 하나님 사이의 소통이 이미 단절된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때 엘리의 입에서 찬양이 끊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보다 자식들에 대한 정이 더 앞서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이 시간 송년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올 한 해,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떤 힘든 시간을 보냈든지 상관 없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아너 (honor)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인정해 주시고, 높여 주십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쉽게 절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크십니다. 그분의 분별력은 끝이 없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ow great is our Lord! His power is absolute! His understanding is beyond comprehension!”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beyond our comprehension (우리의 이해 밖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우리의 좁은 생각 속에 가둬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worm’s-eye view’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bird’s-eye view’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당장에 눈 앞에 있는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그의 자녀들의 삶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당장에는 내가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관점이 맞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어떻게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을까?” 하고 깜짝 놀라는 말씀들을 발견합니다. 신명기 8:4-5 말씀을 보십시오. “지난 사십 년 동안, 여러분의 옷은 해어지지 않았고, 여러분의 발도 부르트지 않았소. 부모가 자기 자녀를 단련시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도 여러분을 단련시켜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 두시오.” 광야생활 40년을 ‘worm’s-eye view’를 가지고 봐 보세요.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습니까? 불평과 원망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 당장에는 문제투성이였던 것 같은데, 하나님의 ‘bird’s-eye view’로 보니까 전혀 해석이 달라집니다. 광야 생활 40년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정말로 광야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았을까요? 정말로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신발은 닳아 없어지고, 옷은 해어지고, 고생이 이만저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광야생활을 돌아 보니까 모두가 축복이었고,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광야생활의 경험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했던 고생은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배고픔과 목마름은 아무 이유 없이 겪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돈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영어 번역 성경에 보면 5절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ll never comprehend what he knows and does (우리는 그가 알고 계시는 것과 그가 행하시는 일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33-34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은 참으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했던 말씀과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가 참으로 깊다고 하면서 ‘unfathomabl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깊이 (바닥)을 잴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아주 귀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귀했으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을 내주셨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서 볼 때 아주 ‘유니크 (unique)’한 사람들입니다. 나와 똑 같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니크한 삶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분은 별들의 수효를 결정하시며, 별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주셨습니다 (He counts the stars and calls them all by name).” (4절) 도대체 하늘의 별이 몇 개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많은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시고, 그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도 선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양들이 많든 적든 선한 목자는 자기가 돌보는 양들을 압니다. 단순히 얼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알고 이름을 부릅니다. 또 이와 같은 뜻으로 이사야 49:16에는 “나는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겨 놓았다. 네 무너진 성벽들이 항상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너는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언제나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구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을 리가 없겠지만, 우리의 이름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 놓았다고 (engraved)’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이름이 지워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 힘든 일이 있고, 고난이 있다고 해서 쉽게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비록 잠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는 있지만, 금방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때는 ‘worm’s-eye view’로 여러분의 삶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bird’s-eye view’로 여러분의 삶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전과 전혀 다른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3절 말씀에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신다”라고 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heals the brokenhearted and bandages their wounds.”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올 한 해 동안에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인간관계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마음이 상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사는 깨어진 마음입니다. 오 하나님, 상처난 가슴과 죄를 뉘우쳐 주님께 고백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경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깨지고 상처 받은 심령들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51편을 쓴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broken spirit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자의 심정으로까 승화 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예배자들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수사적(修辭的)인 표현이 아니라, 다윗의 경험 속에서 나온 진실한 고백입니다. “내 죄를 주께 고백하고, 내 잘못을 여호와께 말씀 드렸더니, 주님은 내 죄와 내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시편 32:5)
‘상한 심령’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worm’s-eye view’를 가지고 보면 내 마음이 깨지고 아플 때, 세상이 원망스럽고, 삶의 의욕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bird’s-eye view’를 가지고 보면, ‘아, 내 마음이 깨지고 아팠을 때, 하나님은 그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도록 나를 부르셨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일찍 깨닫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치유 (healing)’를 받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간에 첫째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계획하신 일들은 우리의 머리로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만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쉽게 절망하고, 쉽게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때때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borken spirit’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깨지고 상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147편을 통하여 송년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 중에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하면서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 중에 ‘worm’s-eye view’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가지고 계시는 선하신 계획과 목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비록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한마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생각하지도 않은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64:4, 고린도전서 2:9) 우리가 가진 ‘worm’s-eye view’를 버리고, 하나님의 ‘bird’s-eye view’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올 한 해 동안 내 삶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2018년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12/31/2017 | 송구영신예배 설교
어떤 때는 나가고, 어떤 때는 머물고 Sometimes We Will Move On And Sometimes We Will Stay.
민수기 9:15-23
오늘 추위에도 불구하고 송구영신 예배에 나오신 교우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뭔가 마음이 착잡해 지는 것 같습니다. 착잡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더 큰 이유는 한 해를 최선을 다해 살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믿음생활 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우리 중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생활도 좀 더 잘 해야 했습니다. 성경도 좀 더 성실하게 읽어야 했습니다. 교회 봉사도 더 잘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용서하고, 좀 더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성실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우리를 착잡하게 합니다.
오늘 읽은 민수기 9:15-23 이 말씀은 좀 특별한 말씀입니다. 광야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은 이동식 조립식 성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광야에서 이동할 때는 신속하게 해체해서 가지고 가고, 어디 머물 때는 신속하게 조립을 해서 성막을 세웠습니다. 성막 가장 안쪽에 법궤를 두었습니다.
성막을 세우던 날, 구름이 장막을 덮었습니다. 밤이 되면 그 구름은 불기둥처럼 보였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걷혀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 곳에 진을 쳤습니다. 성막 위의 구름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도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구름이 며칠 동안만 머물기도 했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이틀을 머물기도 하고, 한 달을 머물기도 하고, 일 년을 머물기도 했습니다. 구름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막 위에 머물던 구름이 걷히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길을 갔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들을 모두 열거하면서 “이런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처럼 악한 일을 즐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0:6)”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본보기’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 ‘examples’이란 말로 나옵니다. 개역 성경은 이 말을 ‘거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본보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민수기 9:15-23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하나의 ‘example’ ‘본보기’ ‘거울’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습니다.” (20절)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다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23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metimes the cloud would stay over the Tabernacle for only a few days, so the people would stay for only a few days, as the LORD commanded. Then at the LORD's command they would break camp and move on.”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길을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머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상상해 보십시오. 며칠 동안 행군을 했기 때문에 발들이 부르트고, 아이들이 칭얼댑니다.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도 안 되어서 구름이 걷혔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는 오랫동안 머물기는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계속 성막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길을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여건이 좋지 않은 곳에서 성막 위의 구름이 1년을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아요?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이 말씀을 적용해 봤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용을 ‘application’이라고 합니다만, ‘implic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implication’이란 말은 ‘imply’의 명사형입니다. 우리 말로 ‘암시하다’ 또는 ‘함축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함축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금방 행군을 하고 진을 친지가 얼마 안 되는데, 성막 위의 구름이 걷혀서 금방 다시 행군을 해야 할 때에도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꼭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문제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2018년 한 해를 시작해야 하는 우리에게 좋은 ‘example’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더욱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늘 내 생각을 앞세워 결정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2018년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말씀을 생각할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복음 16:23) 이 말씀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보다 앞서가지 말고, 예수님의 생각보다 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이 걸어가진 발자국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보다 앞서 행동했고, 예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기도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일을 저지르고 일이 잘 안 되면 그 때 기도를 하는 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새해에는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지 안으면 인내를 가지고 계속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을 먼저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화면을 보면서 오늘 주신 말씀을 소리내어 읽어 보겠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걷혀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 곳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다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막 위의 구름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와의 명령대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며칠 동안만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습니다. 어떤 때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구름이 걷히면,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구름이 걷히면,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성막 위의 구름은 이틀을 머물기도 하고, 한 달을 머물기도 하고, 일 년을 머물기도 했습니다. 구름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면,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다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민수기 9:17-23, 쉬운성경)
이 말씀이 2018년을 위한 우리들의 ‘example’입니다. 우리들의 ‘본보기’입니다. 우리들의 ‘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가정과, 계획하는 모든 일들 속에, 그리고 우리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12/24/2017 | 크리스마스 설교 II
한 아기 때문에 Because Of A Child Born To Us
이사야 9:1-7
오늘은 우리교회에서 드리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니까 한국에서처럼 설레는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어렸을 때 어른들을 따라서 새벽송 돌던 생각이 납니다. 손을 호호 불어 가면서 눈길을 걸어서 집집마다 새벽송을 돌았습니다. 그 집 앞에 가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부르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습니다. 집집마다 새벽송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찬송 소리가 나면 온 식구들이 나와서 같이 찬송을 부릅니다. 찬송을 마치면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 하기도 하고 “성탄절에 복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집은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집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다 불러도 나오지 않는 집도 있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4절까지 다 불러도 잠이 깊이 들었는지 안 나오는 집들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소중한 성탄절에 대한 기억들입니다.
여러분, 혹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찬송이 만들어진 유래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는 1818년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산골 마을 오번돌프 (Oberndorf)에 성 니콜라스 교회 (St. Nicholas Church)가 있었습니다. 오번돌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날 저녁 교회에 성탄 축하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르간이 고장 났습니다.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오르간을 고치는 기술자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교회의 죠셉 모어 (Joseph Mohr, 1792-1848, 당시 26세) 신부는 교회의 반주자 겸 성가대 지휘자였던 프란츠 그루버 (Franz Xaver Gruber, 1787-1863, 당시 31세)를 찾아 가 오늘 저녁에 오르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르간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가 전에 크리스마스 노래 가사를 하나 써 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 가사에 당신과 내가 이중창을 부르고, 후렴 부분을 성가대가 합창으로 부를 수 있도록 곡을 붙여주세요. 오르간으로 반주할 수 없으니, 내가 기타로 반주하겠습니다. 오늘밤 자정 미사 때 써야 하니까 단순한 곡이 좋겠어요." 부탁을 받은 그루버는 모어의 아름다운 가사에 매료되어 악상이 절로 나왔다고 합니다. 세 시간 만에 곡을 붙였다고 전해 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찬송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약속대로 모어 신부가 기타를 치면서 테너를 맡았고, 그루버는 베이스를 맡았다고 합니다. 모어와 그부버의 이중창에 이어 교회 성가대가 후렴을 불렀다고 합니다. 맑고 단순한 멜로디로 된 이 찬송은 그날 저녁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찬송은 세계 130개의 언어와 193개의 버전으로 번역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크리스마스 찬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이 돼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만일 그 때 오르간이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만일 그랬더라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찬송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는 마거릿 미첼 (Margaret Munnerlyn Mitchell, 1900-1949, 미국)이 1936년에 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그 이듬 해인 1937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습니다.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습니다. 무명 작가가 쓴 방대한 양의 소설을 출판해 줄 출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거릿 미첼은 한 출판사의 직원에게 원고를 떠넘기다시피 맡겼다고 합니다. 원고를 읽던 이 직원은 곧 원고에 매료되었고, 출판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때 마거릿 미첼이 아무도 내 원고를 출판해 줄 출판사가 없다고 좌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원고를 억지로 떠맡았던 직원이 원고를 읽지 않고 한쪽에 쳐박아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더라면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대작 ‘바람과 함께 사리지다’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토머스 칼라일 (Thomas Carlyle, 1795-1881, 영국)이 쓴 명저 ‘프랑스 혁명사 (The French Revolution)’ 역시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습니다. 칼라일은 2년 동안 심혈을 기울려 쓴 수천 페이지의 원고를 이웃에 살고 있던 친구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1873, 영국)에게 한번 읽어 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집의 하녀가 원고 뭉치를 버리는 것으로 알고 난로에 불쏘시개로 쓰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칼라일은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을 방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집을 짓는 공사판에서 기술자가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 올리는 것을 보고 다시 ‘프랑스 혁명사’를 쓸 용기를 냈다고 합니다. 결국은 3년 후에 ‘프랑스 혁명사’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반드시 불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 때문에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고난은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Silent Night / Holy Night / All is calm And all is bright /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고요하고 거룩한 밤, 처녀 어머니와 아기 주변은 고요하고 빛이 나네)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 Sleep in heavenly peace / Sleep in heavenly peace (거룩하고 온유한 아기, 하늘의 평화 가운데 잠들어 있네)
이 찬송 가사에도 ‘아기 (child)’가 나옵니다만, 성경은 일제히 ‘한 아기’가 탄생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또 마태복음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쪽에서 그 아기의 별을 보고, 아기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복음 2:2)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이사야 9장 말씀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 9: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The government will rest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 ①Or Wonderful, Counselor
학자들은 이사야서가 대략 기원전 7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한 아기’의 탄생에 대한 예언과 성취의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한 아기’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환상(幻想)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강대국의 압제 속에서 고난을 받던 유대 민족들은 메시아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미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던 때 (기원전 722년)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앗시리아와 이집트와 신흥대국 바빌로니아의 틈바구니에서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지켜 보고 있던 때였습니다. 결국 남왕국 유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합니다.
이 때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강대국의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주고, 그들을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구원해 줄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사람들은 메사아를 강력한 힘을 가진 ‘전사 (Warrior)’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말씀하신 메시아는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6절을 보세요.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누가가 기록한대로 포대기에 싸여 말 구유에 누워 있는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12, 16). 700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Mighty Warrior’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연약한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정말 저 아기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아일까?” “정말 저 아기가 우리를 구원해 줄까?” “정말 저 아기가 평화의 왕 (Prince of Peace)일까?” “정말 저 아기로 말미암아 세상에 전쟁이 그치고 하나님의 샬롬 (shalom)을 나누는 세상이 될까?” 불행하게도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1-12)” 라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리스마스 (Christmas)’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 (Mass of Christ)’라는 뜻 아닙니까? 예수님은 여러 번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God blesses those who do not turn away because of me or who are not offended by me) (마태복음 11:6, 누가복음 7:23)”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기대를 걸어도 좋을만한 Warrior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한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 그리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님, 사람들이 그를 보고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르고,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던 예수님, 하지만, 그를 보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을 보고 마음에 offend를 받지 않는, 기분이 상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사야 말씀을 크게 두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7절에 나오는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왕권’이란 말은 ‘통치권’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이 ‘government (정부)’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권’이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왕권’이라는 말은 ‘메시아 정부’ ‘메시아 정권’이라는 뜻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 (메시아) 정부, 메시아 정권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말씀처럼 지금 그리스도의 왕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세상은 메시아 정권이 추구하는대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근에 와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갈등은 더 심화 되고, 세계는 전쟁과 폭력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부터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해 드리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메시야 정부가 추구하는대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 오는 일에, 세상에 평화를 증대시키는 (increase) ‘peace maker’들이 되어야 합니다.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큰 일을 해서 평화를 위해 일할 수도 있지만, 평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기 ‘평화’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peace’로 번역할 수 있지만, 다른 말로는 ‘wholeness’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말로 ‘온전’ 혹은 ‘완전’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네요. 평화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온전하게 하고, 완전하게 하고, 회복 시키고, 치유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눈으로 보면, 반드시 큰 일이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 해야 할 일이 널려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메시아 정부가 정의와 공평으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라고 합니다 (7절). 우리는 이 말씀에 나오는 ‘정의와 공평 (justice and fairness)’라는 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justice’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잘못한 것은 책망하고 옳은 것은 상을 주는 것입니다. ‘fairness’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입니다. 법의 적용도 공평하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도 공평하게 돌아 가고, 수고한 사람들이 그만한 대가를 받는 것이 공평입니다. 공평은 평등하고 다릅니다. 피자 한 판이 있는데, 먹을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1/3씩 먹으면 그것이 평등입니다. 공평은 배가 부른 사람은 좀 적게 먹고, 배가 많이 고픈 사람은 좀 많이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다 똑 같이 배가 고프다면 1/3씩 먹는 것이 평등이고 동시에 공평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평등의 개념이 아니라 공평의 개념입니다. “All who believed were together and had all things in common. They sold their property and goods and distributed them to all, according to their need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함께 쓰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눠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44-45) 이 말씀 속에 나와 있는 것이 공평의 개념입니다.
어떻게 이 ‘공평 (fairness)’의 개념을 세상에 실현하겠습니까? ‘공평’의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의와 공평’이야말로 메시아의 통치를 받드는 2개의 기둥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와 공평’을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공평’을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들을 서로 공유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9: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이라고 했습니다. NASB에는 “The zeal of the LORD Almighty will accomplish this”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루는 일, 정의와 공평을 이루는 일을 열심을 가지고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 일을 혼자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시고, 우리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이루는 일,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일은 하나님의 열심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12/17/2017 | 대강절 셋째 주일 설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요한복음 3:14-18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때 사랑을 상징하는 핑크색의 촛불을 켰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들어왔다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세상은 참된 사랑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시간은 멀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전형적인 (typical) 예를 찾아 보기 위해서 그 때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하면서 인간성의 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불평과 원망입니다.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왔느냐?” “먹을 것이 없지 않느냐?” “마실 물이 없지 않느냐?” “우리를 이곳에 매장 시킬 셈이냐?” “이 형편없는 음식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런 원망은 곧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자기들을 해방 시켜서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면적으로 부정(否定)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요? 우리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우리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올 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감사함으로’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불뱀들 (poisonous snakes)’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다급한 사람들은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를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9) 모세는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그것을 쳐다 보는 사람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So Moses made a snake out of bronze and attached it to a pole. Then anyone who was bitten by a snake could look at the bronze snake and be healed!” ‘구리로 만든 뱀’으로부터 무슨 능력이 나왔습니까?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나았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사람은 낫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말대로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나았고,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4절) ‘The Son of Man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lifted up’이란 말은 ‘lifted up on the Cross’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 매달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때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분을 보고 믿는 사람은 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Good News’입니다. 아주 쉬운 ‘구원의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렸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학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누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다’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말씀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inspite of)’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상’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일들이 있습니까? 세상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은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화제입니다. “도대체 AI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며칠 전 신문에서 ‘AI가 쓴 해리포터 (Harry Potter)’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해리 포터’는 영국 작가 조앤 롤링 (Joanne K. Rowling)이 쓴 판타지 소설입니다. 모두 7편으로 끝이 난 소설입니다. 그런데 AI가 후속편을 썼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인 저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해졌습니다. 지금의 목회 형식과 교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는 변화된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불과 10년 후만 되어도 세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세상으로 발전되어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한 교회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만한 능력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말로만 하신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에는 ‘His one and only Son (NLT, NIV)’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 보면 ‘His only begotten Son (NASB)’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 말로 ‘독자’ 혹은 ‘외아들’이라는 말이 좋겠네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자’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부부를 통해서 태어나셨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가정에 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가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 방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7). 그래서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 (mager)에 뉘어야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을 낳은 어머니가 그런 형편이었다면 두고 두고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우리의 생각이 바뀝니다. 아기를 낳았는데, 어디 마땅히 뉘일 곳이 없어서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뉘어 놓은 것이 우리에게는 참 안 됐고, 가슴이 아픈 일이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우리에게는 불행하게 보이는 일도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일들이 됩니다.
아무 것도 사랑할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lifted up on the cross)’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 시키는 ‘화목제물 (ransom)’이 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은 F. M. Lehman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글로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는 별 위에까지, 아래로는 지옥에까지 미치는, 오, 측량할 수 없는 강한 하나님의 사랑! 얼마나 풍성하고 순결한지요!) “Nor could the scroll contain the whole, Tho' stretched from sky to sky.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비록 두루마리를 하늘에서 하늘까지 펼친다고 해도 다 쓸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풍성하고 순결한지요!)
성경을 쓴 저자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경에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New Living Translation)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10,000 달란트 빚진 사람의 이야기 (마태복음 18:23-34)’를 아십니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자기는 10,000 달란트 (375 tons or 340 metric tons of silver)의 빚을 갚지 않아도 좋다는 은혜 입었으면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약 3개월치 임금에 해당)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집어 넣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 내려 왔습니다 (Love came down)!”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시려고, 사랑이 내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Dear friends, since God loved us that much, we surely ought to love each other (이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요한일서 4:10-11)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진리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일서 3:18-19)
요한복음 3:16 말씀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증거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축구 (football) 선수 중에 팀 티보우(Tim Tebow)라는 쿼터백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플로리다 대학 축구에서 이미 역전승의 기적을 일으키는 선수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아이패치에 John 3:16이라고 쓰고 경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팀에 입단할 때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티보우는 패싱이 약하고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축구에서는 통했지만, 프로팀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혹평을 하는 전문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를 데려가는 프로팀이 없을 것이라고들 했지만, 2010년에 그는 덴버 브롱코스 (Denver Broncos)에 입단합니다. 프로팀에서는 아이패치에 아무 것도 쓸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John 3:16이라는 숫자를 쓰는 대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티보잉 (Tebowing)’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냅니다.
2012년 1월 8일 결승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피츠버그 스틸러스 (Pittsburgh Steelers)와의 경기에서 3쿼터까지 점수가 23:23이었습니다. 티보우는 4 쿼터에서 다시 기적을 일으킵니다. 티보우는 전문가들이 약하다고 지적했던 패싱으로 터치다운을 성공 시킵니다. 그 경기에서 기록한 10개의 패싱 총 길이가 316 야드였습니다. 평균 31.6 야드였습니다. 그날 그 경기 시청률이 31.6%였다고 합니다. 덴버가 승리한 후에 구글에서 도대체 요한복음 3:16에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무려 1억 2 천 번이나 검색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티보우처럼 드라마틱하게 요한복음 3:16 말씀을 세상에 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각자에게 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알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티보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그 분을 자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