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2018 | 사순절 8

기도는 배워야 한다 Learning To Pray

요한복음 17:1-26

오늘 요한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전체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께 세가지 직책이 있다고 합니다. 왕으로서의 직책, 예언자로서의 직책,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직책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는 전 인류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한반 다시 들어 보십시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겠지만, 이 사람들은 계속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저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11, 20-21절)

“예수님의 기도가 참 크다, 예수님께서 큰 뜻을 품고 기도하셔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서 우리의 기도는 자기 문제 해결에 급급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기도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기 마련힙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생활이 쌓여지고, 우리의 기도가 성숙해지면, 자연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중보기도에 눈을 뜨게 되고, 온 세상을 품고 기도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몇 주 전에 설교 시간에 소개했던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 (Uchimura Kanzō, 1861-1930) 목사님 자꾸 생각납니다.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매사추세츠 애머스트에 있는 Amhurst College 재학 중에 그는 이런 마음을 품고 기도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의 비석에 이 글이 새겨 있다고 합니다. 큰 나무에 새가 깃들듯이,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인재들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함석헌 선생, 김교신 선생 등 한국교계에 영향을 끼친 큰 인물들이 나왔습니다. 특이하게도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은 조선의 청년들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조국와 세계를 섬길 큰 인물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인물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공부를 해 봤자 결국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성공의 도구로 쓸 사람이 아니라, 조국과 세계를 섬길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여러분 중에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뜻을 품고 공부하고 큰 뜻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전체가 대화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말씀 전체가 예수님과 하나님이 간에 나눈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 드립니다만, 기도에 눈을 뜨고, 성숙한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화식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런 기도입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마가복음 14:36) 누가 옆에서 이 기도를 들었더라면, 마치 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옆에 계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친구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듯이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친한 친구 만나서 얘기하는데 무슨 격식이 필요한가요? 약속 장소로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마음에 부담이 가나요? 그렇게 부담이 간다면 정말 친한 친구는 아닙니다. 친한 친구는 만나도 아무 부담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담 없이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걱정, 나의 고민, 나의 관심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긴장해서 억양이 높아지고, 경직될 필요 없습니다. 멋있는 말을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미리 사전에 각본을 짤 필요도 없습니다.

아시지요? 성경에 모세를 칭찬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만, 가장 인상 깊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여겼다는 말씀입니다. “The LORD would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a man speaks with his friend (하나님께서는 친구에게 말씀하시듯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1) 분명히 모세도 하나님을 그렇게 친근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친근하게 친구처럼 그렇게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데이빗 리빙스톤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교사이며 동시에 탐험가였습니다. 아프리카가 이 사람에게 큰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가 죽은 것이 알려졌을 때 아프리카가 그를 위해서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침대 모퉁이에 기도하는 자세로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앞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의자에 마치 누가 앉아 있었던 것처럼, 리빙스톤은 의자에 앉아 있는 분에게 뭔가 얘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전반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남김 없이 다 완수했다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자기 제자들을 지켜 달라는 내용입니다. 특히 자기 제자들에게 고난이 닥칠텐데, 고난 속에서도 그들을 지켜 주시고, 세상의 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의 제자들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분열되는 것은, 우리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분열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정말 우리가,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 그런지 2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것은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2/21/2018 | 사순절 7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 Christ-centered Prayer

역대하 20:1-12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날은 “기도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가?”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제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를 하라” 이런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Christ-centered prayer’입니다. 혹은 ‘God-centered prayer’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드러나 있느냐,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크게 드러나 있느냐에 따라서 ‘God-centered prayer’가 되기도 하고 ‘Problem-centered prayer (문제 중심의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기도에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이 크게 드러나 있고 문제는 작게 드러나 있으면 ‘Christ-centered, or God-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에 우리의 문제가 크게 드러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 있지 않으면 그 기도는 ‘problem-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에 비교하면 별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힘써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기도는 아니지만 ‘God-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마가복음 14:36)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의심의 여지 없이 ‘God-centered prayer’입니다. 연습 삼아 하나만 더 해 볼까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바울의 이 고백은 분명한 ‘Christ-centered prayer’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problem-centered prayer’가 아니라 ‘Christ or God cen-tered prayer’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금방 알아 듣습니다. “기도라고 해서 다 같은 기도가 아니구나! 앞으로 기도할 때 ‘God-centered or Christ-centered prayer’를 해야 하겠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Christ-centered or God-centered prayer’가 무엇인지 알아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역대하 20:1-12 말씀에 나오는 사람은 유대의 왕이었던 여호사밧이라는 사람입니다. 여호사밧은 35살에 왕이 되어 25 년 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열왕기상 22:42) 이 사람은 유대의 왕 중에 몇 안 되는 훌륭한 왕으로 평가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여호사밧에 대하여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올바른 일을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사밧은 처음 왕이 되었을 때에 그 조상 다윗처럼 살았습니다.” (역대하 17:3, 열왕기상 22:43) 여호사밧과 동시대 사람으로 북왕국의 아합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이 마온 사람과 함께 연합군을 편성해서 여호사밧에게 전쟁을 걸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사밧이 전쟁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연합군은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의 긴박했던 순간이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큰 군대가 사해 건너편에서 지금 왕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벌써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와 있습니다.” (2절) 이 소식을 들은 여호사밧은 두려웠습니다. 사람이 두려울 때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의 경우에는 위기의 순간에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칠 때 그 집이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 아니면 허술한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 하는 것이 드러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7:25, 27)

여호사밧은 어떤 행동을 보였습니까? “Jehoshaphat was terrified by this news and begged the LORD for guidance. He also ordered everyone in Judah to begin fasting. So people from all the towns of Judah came to Jerusalem to seek the LORD's help.” 야, 멋있지요? 여호사밧이 보인 이 행동이 저와 여러분이 보여야 할 행동입니다. 맞습니까? 우리도 여호사밧처럼 갑자기 어려움을 당하고, 위기를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잖아요? 이럴 때 저와 여러분이 보여야 할 행동이 ‘God-centered action (하나님 중심의 행동)’입니다.

백성들을 모아 놓고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여호와께서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세계 모든 민족의 나라들을 다스리십니다. 주께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도 주 앞에 설 수 없습니다 (O LORD, God of our ancestors, you alone are the God who is in heaven. You are ruler of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You are powerful and mighty; no one can stand against you)!” 우리가 이 여호사밧의 기도를 이 새벽에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여호사밧의 기도를 들으니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지금 적들이 연합군을 만들어서 쳐들어 오고 있는데, 지금 가슴이 뛰고, 숨이 차 오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지금 여호사밧의 기도를 듣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 누구도 감히 설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연합군이 쳐들어 오고 있지만, 그 연합군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God-centered prayer’입니다. 이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연합군의 침략이 아니잖아요?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입니다. “하나님, 큰 일 났습니다. 지금 연합군이 쳐 들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가까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린 다 죽습니다.” 이런 기도가 ‘problem-centered prayer’입니다. 두 기도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이고, 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기도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 드 기도가 엄청나게 다른 기도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저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십시오.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이 큰 군대를 당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보십시오. “O our God, won't you stop them? We are powerless against this mighty army that is about to attack us. We do not know what to do, but we are looking to you for help."

이 여호사밧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이 군대가 아무리 크다 해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이 전쟁은 너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다. 너희는 이 전쟁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 그저 너희의 장소에서 굳게 서 있기만 하여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역대하 20:15-17)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은 기도의 내용을 한번 바꿔 보세요. 기도할 때 기도의 초점을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문제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보세요. ‘problem-centered prayer’에서 ‘God-centered, or Christ-centered prayer’로 기도의 초점을 바꿔 보세요. 기도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2/20/2018 | 사순절 6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 Why Pray?

마태복음 6:9-15

여러분은 간혹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왜 기도해야 하지?”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기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기도는 나약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교회를 거쳐 간 사람 중에 한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일년 안식년으로 와 있는 바람에 우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서울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꽤 유명한 교수였습니다. 부인은 방송국에서 스크립트를 쓰시는 분이었습니다. 남편은 교회를 나오지 않고요. 부인만 교회를 나왔는데, 이분이 새벽 기도를 나오는 것입니다. 올 때는 다른 분이 라이드를 주시고, 집에 돌아갈 때는 제가 라이드를 드렸습니다. 자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래요. “저 아마도 내일부터 새벽기도 못 나올 것 같아요 남편이 새벽기도 못 나가게 해요. 전 어쩌면 좋아요?” 그 말을 듣고 저도 난감했습니다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강하게 말하세요. 난 새벽기도 꼭 나가야 한다고요.” 그리고 내려 드렸는데, 그 다음 날 이 분이 새벽기도를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살며시 침대를 빠져 나오려고 하는데, 남편이 발목을 꽉 잡더랍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충분히 당신 힘으로 살 수 있어!”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남편 얼굴을 똑바로 보고 “당신이 내 인생 책임 질 수 있어?” 그랬더니, 남편이 “아니!” “그럼 나 새벽기도 나가는 것 막지 마!” 그래서 다시 새벽 기도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까? 그 서울대학 교수는 기도는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꼭 그들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성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우리의 삶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삶의 공허함 (the emptiness of life)’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공허함을 하나님께서 채워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도서 3:1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우리 마음 속에 심겨진 ‘eternity’가 무엇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 혹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a point of contact’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막히면 우리는 ‘공허함’을 느낍니다. 소통의 채널이 열리면 우리는 ‘충만함’을 느낍니다.

또,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안합니까? 과거 어느 때도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이런 때가 없었습니다.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 직장을 찾아 헤맵니다. 경쟁이 치열합니다. 어려운 공부를 마쳐도 나를 환영하는 곳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uncer¬tainty)’이 이처럼 우리를 힘들게 했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던 전도서 3:11에 있는 말씀을 계속 읽어 보세요.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사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뜻이잖아요? 지금 우리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시대의 ‘불확실성’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우리에게 삶의 충만함을 얻게 하고,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불안을 이기고, 초조함을 이깁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마태복음 6장 본문 말씀을 볼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9-10절)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한번 돌아 보십시오. 살기 바쁩니다. 조금만큼도 마음의 여유들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수업 듣고 페이퍼 쓰고, 숙제하기 바쁩니다.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이들 기르고, 가사 일을 하기에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여러분의 마음을 집중하고 이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고 하시면서 삶에 찌들어 있고, 불안하고, 초조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삶의 focus’를 옮겨 주십니다. 맞습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를 이기게 합니다. 불안을 이기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 다음으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11절)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니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먹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삽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요? 굶어야지요. 돈을 못 벌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기도는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필요한 것이 없는 상황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God’s interven-tion (하나님의 개입하심)’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intervention’이 있으면 단번에 상황이 역전(逆轉)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두 번 째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12-13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죄의 고백,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시는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죄를 범했을 때, 죄의식으로 괴로워할 때,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나를 받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1:9) 기도를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2/19/2018 | 사순절 5

기도의 우선순위 The Priority of Prayer

마태복음 6:5-8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위선자’입니다. ‘히포크리트 (hypocrite)’라는 말이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연기하는 배우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각본에 있는 사람 역할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위선자’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5절). 기도를 ‘위선자’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위선자들’은 기도할 때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곳에서 합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하지 않아요? 이 사람들이 받은 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칭찬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입니다. “아이고, 기도 많이 하시네요.” “축복 받으셨어요.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안 돼요.” 이런 사람들의 칭찬입니다.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반대로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내가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받을 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받을 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사람들이 보는 장소에서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6절)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도,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은 다 아시고 모두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7절). 기도가 좀 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짧으면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늘어 놓는 사람은 ‘이방인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잖아요?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이방인’이 잖아요.

예수님은 ‘이방인들’ 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을 닮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Don't be like them, for your Father knows exactly what you need even before you ask him!” (NLT) 그럼 왜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데, 그렇다면 왜 기도해야 합니까? 이 말씀에 대한 대답이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기도의 우선 순위 (The Priority of Prayer)’입니다.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기도하면, 기도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알고 기도하면 기도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위선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떤 사람들이길래 사람들이 많이 보는 장소에서 기도하고 (5절), 어떤 사람들이길래 기도하면서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늘어 놓고 ‘이방인들’ 같이 기도한다고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까 (7절)? 이 ‘위선자들’이 어떤 사람들이길래 예수님께서 그들을 닮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8절)?

좀 더 쉽게 말해 볼까요? 제가 누구하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속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동안이나 저하고 시간을 내서 얘기를 나누었지만, 모두 피상적인 얘기,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얘기를 늘어 놓은 것입니다. 이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생기지 않습니다. ‘relationship’이 생기지 않습니다. 관계는 인격과 인격이 서로 만나야 그 때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시는 포인트는 “너희들 하나님 앞에서 진심을 감추고,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를 원하신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와 진실한 관계를 원하시나요?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진실한 relationship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관계를 싫어하십니다. 보세요. 잠언 15:2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는 악인을 멀리하시나, 의인의 기도는 들으신다 (The Lord is far from the wicked, but he hears the prayers of the righteous).” 쉬운 말씀 같지만 결코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악인이 누구이고, 의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의인’이라고 해서 착한 일 많이 하는 사람, 마음이 선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성경은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은 멀리하십니다. 악인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의인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는 우리는, 이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께 의인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일을 무엇보다 먼저해야 합니다. 무작정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의인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말씀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Don’t tear your clothing in your grief, but tear your hearts instead.” Return to the Lord your God, for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요엘 2:13) 옷을 찢는다는 말은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는 표현으로 옷을 찢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사람의 마음에는 회개하지 않은 죄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해야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자녀들과의 진실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 관계가 설정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그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것이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아까 남겨 놨던 질문 하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아시고 계시는데, 왜 기도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은 왜 친한 사람과 만나서 얘기하고, 커피 마시고, 영화도 보고, 볼링도 치고 같이 시간을 보내나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예,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쌓입니다. 관계는 쌓이는 것입니다. 한번 관계가 생겼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면 그 관계가 약해집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는 계속해서 쌓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나요? 아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신다면서 왜 기도하라고 하시나요? 기도를 통해서 우리와 관계를 쌓아 가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쪽에서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쌓아 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관계를 쌓아 가기를 원하십니다. 관계는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노력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8/2018 | 사순절 새벽기도를 앞두고 2

경건의 훈련이 주는 유익 The Profit of Godly Discipline

디모데전서 4:6-9

성경에 ‘훈련(訓練)’이란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훈련’은 말 그대로 ‘가르치고 익힌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iscipline’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disciple (제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 받았습니다. 모든 훈련이 그렇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을 배웠습니다. 광야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새벽마다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사람은 빵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신명기 8:3)” 는 귀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들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민족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한 개인도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미디언 광야에서 40년 간 모세를 훈련을 시켰습니다. 40년은 모세가 ‘자기 의 (self-righteousness)’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의 (God’s righteousness)’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미디언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모세는 80세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잠언 17: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도가니가 은을, 풀무가 금을 녹이듯, 여호와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신다 (Fire tests the purity of silver and gold, but the Lord tests the heart).”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test하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test하시는 과정을 우리는 ‘훈련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훈련이 혹독하듯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혹독하게,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이 훈련을 받으면서 잘 견디면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데모데전서 4:6-9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를 ‘멘토링’한, 제자 디모데를 훈련 시킨 말씀입니다. 여기에 ‘육체의 연습 (physical training)’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그 당시에 ‘physical training’이 유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강원도 평창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올림픽의 역사를 살펴 보면, 이미 BC 776년에 최초의 스포츠 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리스가 도시 국가 형태를 가지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도시 국가들이 출전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도시 국가들 간에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하기 위해서 4년마다 스포츠 제전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남자들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고요. 특이한 것은 모두 옷을 벗고 경기를 했다고 합니다. 경기 종목은, 처음에는 단거리 종목만 하다가 점차 중거리, 장거리 달리기도 포함 시키고, 복싱, 레슬링, 원반 던지기, 창 던지기, 전차 경기 등이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스포츠 제전이 서기 393년까지, 293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로마에 의해서 중단되었다가, 쿠베르탱이 근대 올림픽을 설립해서 다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스포츠 제전이 시작된 BC 776년은 중국은 춘추 전국시대에 해당하고,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활약하던 1세기는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많은 청년들은 운동경기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철학자 에픽테토스 (Epictetus, 55-135, 그리스)가 스포츠 선수로 입문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선수들이 겪어야 할 고충을 열거하면서 신중히 생각하라고 조언했던 글이 남아 있습니다.“누구나 올림픽 경기에 나가 우승을 하고 올리브 관을 쓰고 싶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렇다면 먼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행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선 모든 것을 규칙에 따라 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엄격하게 가려야 하며, 때로는 맛있는 것도 못 본 척해야 합니다.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지정된 시간에는 열심히 훈련하고, 찬물이나 포도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습니다. 의사의 처방에 따르듯 트레이너의 말에 완전히 몸을 맡겨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손을 다칠 수도 있고, 발을 삘 수도 있습니다. 흙먼지를 많이 마셔 기진맥진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혹독한 훈련을 받고서도 경기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경기에 나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글을 읽어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말,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Physical training is good, but.....”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청년들이 몸을 만드는 physical training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편지를 받아 읽는 디모데도 동시대의 청년들처럼 physical training에 열중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당시의 청년들은 미론 (Myron, BC 480-440, 그리스)의 ‘원반 던지는 사람’의 멋있는 몸을 생각하면서 physical training에 열중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physical training에는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몸을 만들면 건강에 도움이 되겠지요? 저도 physical training에 열중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팔뚝이나 어깨 근육을 보면서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칭찬해 주면 왠지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physical training이 주는 유익입니다. 청년들 중에는 혹독한 physical training을 견디어 내고, 운동 선수가 되어 스포츠 제전에 나가 월계관을 받는 영예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바울은 physical training도 좋지만, 정작 크리스천들이 힘써야 할 것은 ‘경건의 훈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경건’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 보면 대부분 ‘godly’라는 형용사를 씁니다. 명사형으로 하면 ‘godliness’가 됩니다. 이 말은 ‘god (하나님)’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godly’라고 하면 ‘하나님을 닮는’ 이런 의미가 됩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경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닮는 것이 경건입니다. 예를 들면, 거룩하심, 사랑, 인자, 자비, 오래 참으심, 진실하심, 선하심, 순결하심, 의로우심, 이런 하나님의 성품들을 닮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바울은 ‘경건의 훈련’을 하면 여러가지도 유익한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에도 유익한 것들 것 많지만, ‘이 세상이 아니라 앞으로 오는 세상 (in this life and in the life to come)’을 위해서도 ‘경건의 훈련’은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경건의 훈련’을 꾸준히 해 나가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잠깐만 생각해 봐도 몇가지 유익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받음으로써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육체의 훈련’과 ‘경건의 훈련’을 비교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이 두가지 훈련이 매우 닮았습니다. 두 가지 훈련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매우 닮았습니다. ‘육체의 훈련 (physical training)’을 받음으로써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경건의 훈련’은 영적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경건의 훈련’을 위해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하고 있는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너는 젊다는 이유로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 너의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도록 하라..... 온 맘을 다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며, 그대가 크리스천으로서 발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 너는 삶과 가르침에 주의해서, 늘 올바르게 살고 가르치기에 힘쓰라. 열심히 성경을 읽고 사람들을 권면하며 잘 가르치라.” (디모데전서 4:12-14, 15-16)

이 말씀 속에 ‘경건의 훈련’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삶의 자세, 계속 성장하는 삶, 가르침과 삶이 다르지 않도록 일치 시키는 노력, 성경읽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삶 등이 ‘경건의 삶’을 훈련하는 내용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Physical training을 받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듯이, ‘godly training’을 받지 않은 사람이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충고했듯이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도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하는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And athletes cannot win the prize unless they follow the rules).” (디모데후서 2:5) 이 말씀이 주는 implication이 무엇입니까? ‘physical training이 그렇듯이, ‘godly training’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모든 훈련의 핵심은 ‘절제 (self-control)’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맨 먼저 1,500m에서 금메달을 딴 쇼트트랙 선수가 이 시간 이후에 무엇이 가장 하고 싶냐고 묻는 질문에 중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이젠 햄버거 하나만 먹어도 되겠죠?”라고 했습니다. 또 남자 1,000m에서 동메달을 딴 선수는 뭐라고 했습니까? “오늘만큼은 라면에 밥을 말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경건의 훈련’을 받으려면, ‘절제’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습관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은 대부분 ‘영적 훈련’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제는 그런 삶의 방식을 바꾸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 복종 시키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크리스천으로, 좋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만 가지고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한 후에 했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주님이 바로 정의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그 날에 주님은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7-8)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울은 그 자신이 전도자로서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했던 고난의 삶을 ‘선한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I have fought the good fight”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했던 악한 세력들과 믿음을 지키면서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웠던 그의 저력(底力)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가 꾸준하게 훈련했던 ‘godly training’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디모데에게 충고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꿋꿋이 하십시오.” (디모데후서 4:5)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전도자로서 겪는 모든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이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고난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건의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승리의 면류관 (winning prize)’을 받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는 것이 선수들의 최고의 영광이듯이, ‘경건의 훈련’을 잘 받은 사람에게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전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은) 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8) 저와 여러분을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싫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어서 익숙하지 않지만, ‘경건의 훈련’이 좋은 것은 알지만, ‘경건의 훈련’에 집중하면 다른 일에 지장이 있을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지만,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점을 따는데, 선택 과목이 있고, 필수 과목이 있습니다. 선택 과목은 반드시 그 과목을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과목 대신 다른 것을 들어도 됩니다. 하지만, 필수 과목은 반드시 학점을 따야 합니다. 그래야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경건의 훈련’은 크리스천으로서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 과목입니다. 이 과목을 하지 않으면 좋은 크리스천으로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과목을 하지 않으면 많은 profit (유익함)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내일부터 사순절 새벽 기도가 시작됩니다. 매일 아침 새벽 5:35에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날 것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영적으로 성장 시키려고 하시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육체의 훈련’이 주는 유익이 크지만, ‘경건의 훈련’이 주는 유익은 이보다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