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20/2020 | 크리스마스예배/In Times Of Trouble 37
목자들의 이야기 The Story Of The Shepherds
누가복음 2:8-19
오늘은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팬데믹 상황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벌써 우리의 의식구조와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new normal’이 되고 있는 때에,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탄예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말씀이 신명기 8장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사십 년 동안, 여러분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시오. 주께서 그리 하신 까닭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드시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가, 여호와의 명령은 지키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소.” (2절) 광야생활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이 광야생활을 통해서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너희가 겸손하게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에 있었던 출애굽 때의 상황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지금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은 누구보다도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라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팬데믹을 핑계 대면서 나에 대해 감사할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있는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성탄의 은혜와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이 어느 찬송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이 찬송을 들으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이 찬송은 181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오스트리아의 ‘오벤도르프 (Obendorf)’라는, ‘잘스부르크(Salzburg)’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의 한 성당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습니다. 그 성당의 신부였던 ‘조셉 모르 (Joseph Mohr)’가 가사를 쓰고, 그 교회 성가대 지휘자였던 ‘프란츠 그루버 (Franz Gruber)’가 곡을 썼습니다. 교회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도록 심플한 멜로디로 작곡한 노래입니다. 이 찬송은 현재 300개 이상의 언어로 불려지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되었습니다. ‘오벤도르프’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고 합니다. 24일 전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거나 부르는 일도 없는, 인구 3,000명의 작은 마을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여행객들과 마을 주민들이 ‘Silent Night Chapel’에 모여 예배 드리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며칠 전에 한 기사를 읽었는데요.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라는 시리즈 기사였습니다. ‘레오폴트 코어(Leopold Kohr, 1909-1994, 오스트리아)’라는 사람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레오폴트 코어’는 경제학자이며, 법률가 (Jurist)이며, 정치학자이며, 철학자입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1937년에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면서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의 친구가 되었고, 2차 대전 중에는 뉴욕 저널에 반 히틀러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 파시즘과 싸웠습니다. 그가 쓴 대표작은 ‘국가의 붕괴(The Breakdown of Nations)’라는 책입니다. 그의 주장은 중앙집권적인 거대한 정부는 필요 없고 소규모의 사회조직을 구성하여 공동체적인 기능만 유지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구 10만명 정도의 대학 도시인 잘스부르크나 인스부르크(Innsbruck) 정도의 소도시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규모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서 인간의 삶과 자연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고향 잘스부르크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레오폴트 코어는 1983년에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킨 사람들에게 주는 Alternative Nobel Prize를 받았습니다.
이 글을 쓴 박홍규씨의 주장은, 이 레오폴트 코어의 고향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고 조용한 마을 ‘오벤도르프’라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 ‘오벤도르프’에서 불후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나왔고, 이 작은 마을에서 레오폴트 코어 같은 사상가가 나왔고, 바로 옆 마을 잘스부르크에서 모짜르트가 나왔고, 그리고 레오폴트 코어에게서 영감을 받은 프리드리히 슈마허 (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 영국) 같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슈마허가 1973년에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라는 책은 그가 레오폴트 코어의 집에 머물면서 썼다고 할 정도로 슈마허는 레오폴트 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큰 건물이나 호텔도 없고, 번쩍번쩍한 쇼핑 센터도 없는 작은 마을, 자동차 보다는 자전거가 어울리고, 걷는 것이 어울리는 작은 계곡의 마을 ‘오벤도르프’에서 처음 불려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지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밤에 구세주를 찬양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시끄럽고 화려한 파티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파티 없는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목자들의 이야기’는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무대는 베들레헴 근교의 들판입니다. 한 밤중에도 목자들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목자들이 지키고 있는 양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부자들의 소유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양들일 것입니다.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이 목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 무서워했습니다. 천사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10-12절) 천사들이 말을 마치자 하늘 군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4절) 사방이 조용해졌을 때 목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합시다.” (15절) 목자들은 서둘러 그 밤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목자들이 이 아기에 대하여 들은 것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 목자들의 이야기 속에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는 성탄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예수님 당시에 목자의 사회적인 지위는 어떠했는지 잘 모릅니다. 한마디로 목자는 매우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작년 ReNEW에 세미나 강사로 왔던 김동문 선교사의 글에 의하면 그 당시에 목자는 ‘극한 직업 (extreme job)’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는 아주 천한 직업이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 독일)의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Jerusalem in the Times of Jesus)>에 의하면, 당시 목자는 낙타몰이꾼, 당나귀몰이꾼, 마부, 뱃사공, 의사, 푸줏간 주인 등과 함께 천직으로 취급받았다. 베들레헴 지역의 양떼들은, 대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 부자들의 것이었다. 양떼의 주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양떼를 지켜야 하는 목자들의 삶은 다분히 독립적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 거친 직업이었다. 광야의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켜야 하고, 양을 훔치는 도둑들로부터 양을 지켜야 하는 목자의 직업은 낮과 밤, 뜬 눈으로 지내야 하는 험한 직업이었다. 이런 평판 때문에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들이었고, 목자의 사회적 신분은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들었던 증인으로 목자들을 내세운 것은 하나님의 충격적인 인물 캐스팅이었다.”
재미있는 글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목자라는 직업이 나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목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미디언 광야로 보내 40년간 목자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가업(家業)으로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목자를 고용해서 양을 치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자는 남을 속인다, 남의 것을 훔친다, 거짓말을 잘한다는 식의 사회적인 편견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목자의 사회적인 신분은 ‘죄인’이었습니다. 재판장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을 만큼 신용이 없는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자들에게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목자들이 들은 성탄 메시지는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준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1969-현재)가 부른 ‘Jesus Born On This Day(오늘 예수께서 나셨네)’가 생각납니다. 이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가 어린이 합창단과 같이 부른 아름다운 성탄 노래입니다.
(1절) 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Today the glory of God shines everywhere/For all the world (오늘 세상에 한 아기가 나셨어요/오늘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비쳐요./온 세상을 위해)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ight and salvation/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오, 예수님이 오늘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이예요/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예요)
(2절) 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Behold the Savior is born/Sing of His love to everyone (보세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셨어요/보세요. 구세주가 나셨어요/모든 사람을 위한 그의 사랑을 노래해요)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avenly child in a manger/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ord and Savior (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구유에 누인 하늘의 아기/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예요)
(3절) 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Today the light of His birth/Fills us with hope/And brings peace on Earth (오늘 그를 기뻐해요/오늘 그의 탄생의 빛이/희망으로 우리를 채워요/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주네요)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ight and salvation/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빛이고 구원이예요/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예요)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입니다. 이 성탄 소식은 누구나 다 듣고 기뻐해야 하는 소식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탄절을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Let the Christmas catch you in a good mood!” 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May the magic of Christmas fill your heart all year long!”이란 말도 있고, “As for me, I like to take my Christmas a little at a time, all through the year.” “With joy-filled hearts, let’s continue the Christmas celebration all season long.” 어느 누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팬데믹으로 고생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크리스마스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들의 우울한 마음을 단번에 날려 줄 기쁜 소식입니다.
셋째로, 천사들의 메시지에 이어 하늘의 군대 (the armies of heaven)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14절) 이 말씀에서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실까요?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FKCC 교우들이, 그리고 지금 팬데믹으로 고생하는 온 세상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평화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성탄의 소식을 들은 목자들이 그 시간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다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목자는 사회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재판장에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목자들이 자기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그런 것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현장을 떠나면 양들은 누가 지킬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목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서 베들레헴 마을에 가서 천사들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목자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All who heard the shepherds' story were astonished).” (18절) 'astonished'라는 말은 단순히 놀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번개를 맞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놀랐다는 뜻입니다.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 앞에서 목자들에 대한 어떤 불신도, 편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자들에게서 나는 양 냄새에 코를 막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이 성탄의 메시지를 듣는 우리에게도 모든 편견과 불신들이 해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12/13/2020 | 대강절 셋째 주일/In Times Of Trouble 36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라 Go, Tell The People What You Have Heard And Seen
마태복음 11:1-11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희망의 촛불과 평화의 촛불에 이어 오늘은 기쁨의 촛불을 켰습니다. 희망이 없고, 평화가 없고, 기쁨을 없던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으로 말미암아 희망과 평화와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사랑의 촛불을 켭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 줌이 마땅합니다 (We know what real love is because Jesus gave up his life for us. So we also ought to give up our lives for our brothers and sisters).” (요한일서 3:16)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참 사랑을 안 사람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지시하기를 마치시고,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그 곳을 떠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1절)”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생생하게 그 때 상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지시(指示)’라는 말씀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번역성경들을 보면 ‘지시’ ‘명령’ ‘분부’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두 위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무슨 일을 시키는 강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들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Jesus had finished giving these instructions to his twelve disciples”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할 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이런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제자들을 교육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선생님은 오직 한 분이고,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인데, 하늘에 계시다. 너희는 ‘지도자’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뿐인 그리스도시다.” (마태복음 23:8-10) 세상 사람들은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지도자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지만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선생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불릴 사람도 없고, 지도자라고 불릴 사람들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같은 동일선상(同一線上)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must have the same attitude that Christ Jesus had.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Instead, he gave up his divine privileges;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제가 처음으로 NLT 성경을 읽고 놀랐던 것이 ‘as something to cling to (뭔가 거기에 집착할 것으로)’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난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는 교만한 말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시를 받고, 모욕을 받을 때도 “난 하나님의 아들인데, 감히 나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예수님에게서 이런 ‘겸손’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신 그 시간에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인지 알아 오라고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오신다고 했던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가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6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심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그렇게 물어보라고 한 것은 확인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에게 확인이 필요했던 이유는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그려왔던 메시아 상과 너무 달랐습니다. 요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용사의 모습으로 오실 메시아를 꿈꿔왔는데, 막상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겠는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 시대가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여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고,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귀로 들었습니다)” 라고 너희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회복(restoration’입니다. 원래 자리로 돌려 놓는 것입니다. ‘희년(禧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년’은 50년째 되는 해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제도입니다. 종은 자유인으로 돌아가고, 땅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그래서 이 ‘희년’을 ‘Jubilee (기쁨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4:19에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NIV)”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에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가 곧 ‘희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희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21)”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설교들 듣고 나사렛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의 권위에 한 번 놀랐고, 그의 설교의 내용에 두 번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게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었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잘못된 삶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삶이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참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는데,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보지 못하는 사람을 소경, 맹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봉사라고도 불렀습니다. 심청이의 아버지 이름이 심봉사 아닙니까? 판소리 심청전의 클라이맥스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심황후 거동 보아라. 이 말이 지듯 말 듯 산호주렴을 거들 처 버리고 버선 발로 우루루루루 부친의 목을 안고 아이고 아버지, 심봉사 깜짝 놀라 아버지라니 누구요. 아이고, 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 무남독녀 외딸 하나 물에 빠져 죽은 지가 우금 삼년인디, 이것이 웬 말이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인당수 풍낭 중에 빠져 죽던 청이가, 살아서 여기 왔소. 어서 어서 눈을 떠서 소녀를 보옵소서. 심봉사가 이 말을 듣더니 어쩔 줄을 모르난디, 에이 내 딸이라니. 아니 내 딸이라니. 내가 죽어 수궁천지를 들어 왔는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이것 참말이냐.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 인고.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아이고,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제. 아이고 갑갑하여라. 어디 내 딸이면 좀 보자. 눈을 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허더니 만은, 그저 두 눈을 번쩍 딱 떴던가 보더라. 옳지 인제 알것구나. 내가 분명 알것구나. 내가 눈이 어두워서 내 딸을 보지 못했으나 갑자사월 초파일날 꿈속에 보던 얼굴 분명헌 내 딸이라. 죽은 딸을 다시 보니 인도 환생을 허여는가?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꿈과 생시 분별을 못허것네. 어제까지만 해도 맹인이 되여 지팽이를 집고 다니면 어데로 갈 줄 아느랴. 올 줄을 아느랴. 오늘부터는 새 세상이 되었으니, 지팽이 너도 고생 많이 허였구나. 너갈데로 잘 가거라. 피루루루 내던지고, 얼시구나, 절시구나, 좋구나, 지화자 자자자 좋을시고.”
심봉사가 눈을 떠서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본 것이 이렇게 기쁜데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전에는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하여 알았습니까?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았습니까?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를 알았습니까? 사명을 알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비로소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회복의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삶에 희망이 생기고,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예수님 때문에 기쁨을 알게 되고,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기쁨과 감사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데비 분 (Debby Boone, 1956-현재)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데비 분은 ‘You Light Up My Life (내 삶을 밝혀 준 당신)’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입니다. 이 노래로 빌보드 차트에 10주 동안 #1 자리를 지켰습니다. 400만 장이 넘는 앨범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8년에 Grammy Awards ‘The Best New Artist’ 상을 받았습니다.
So many nights I'd sit by my window (수많은 밤을 창가에서 기다렸어요)
Waiting for someone to sing me his song (그의 노래를 불러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So many dreams I kept deep inside me (내 안 깊은 곳에 두었던 수많은 꿈이 있었죠)
Alone in the dark but now you've come along (홀로 어둠 속이었지만 이제 당신이 내게 왔어요)
And you light up my life (그리고 내 삶을 밝혀주었어요)
You give me hope to carry on (나에게 간직할 희망을 주었죠)
You light up my days and fill my nights with song (당신은 나의 낮을 밝혀주고, 나의 밤을 노래로 채워주었어요)
매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가사입니다. 데비 분은 지금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데, 지금도 현역 가수로 활발하게 공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Episcopal Church의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데비 분의 삶에 불을 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불을 밝혀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요한의 삶을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요한을 그렇게 칭찬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요한이 철저하게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따라 돌 듯이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하고요. 그 때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He came right out and said, ‘I am not the Messiah.’” (요한복음 1:20, 3:28)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을 많이 소유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앉게 되어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아름다워지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분인지, 그를 알고 난 후에 내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우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희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대강절 촛불이 환하게 켜졌으면 좋겠습니다.
12/6/2020 | 대강절 둘째 주일/In Times Of Trouble 35
새 날이 온다 New Days Are Coming
이사야 9:1-7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촛불 2개를 켰습니다. 전주에는 희망의 촛불을 켰고, 오늘은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희망이 생겼고,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구약성경은 말라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약속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런데요. 구약 마지막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약 400년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을 ‘신구약 중간시대(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합니다. 두 약속의 중간 시대라는 뜻입니다. 이 중간 시대는 영적인 암흑기(暗黑期)였습니다. 이 때에는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모스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이 땅을 주리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빵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배고플 것이다. 그 날에 아름다운 여자들 젊은 남자들이 목이 말라 지칠 것이다.” (아모스 8:11, 13) 물론 이 말씀은 아모스가 북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한 말이니까 중간기하고는 약 350년의 시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하신 이 말씀은 신구약 중간기에 살던 사람들의 영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는 흔한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늘 남편이 잘해 주면 아내는 고마움을 모릅니다.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는 상황을 만나보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잘 모릅니다.
신구약중간 시대가 그랬습니다. 예언자의 소리가 그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영적으로 고갈되었습니다. 지금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 영혼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 절대로 소홀하게 여기면 안 되고요. 개인 기도에 힘써야 하고요. 성경읽기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적인 침체(a spiritual depression)’가 찾아오면 우리 삶에 어떤 힘든 일들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희랍어에 시간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χρόνος, cronos)’라는 말인데요. 특별한 의미가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라는 말입니다. ‘카이로스’는 어떤 결정적인 기회의 타이밍 (the right, critical or opportune timing)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때가 차매 (4:4)’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when the fulness of the time came(꽉 찬 시간이 되었을 때)’ 이런 뜻이거든요? 바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지쳐 있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의 ‘카이로스’였습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달래 주었고, 채워주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Amazement gripped the audience, and they began to discuss what had happened. ‘What sort of new teaching is this? It has such authority! Even evil spirits obey his orders!’” (마가복음 1:27)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옮기시고, 거기서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목, 요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이 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마태복음 4:13-16)마태는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사역의 본부로 삼으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marginal people(주변 인간들)’이 큰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전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고통의 땅에 그늘이 걷힐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지역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 살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짙은 그늘의 땅에 살던 백성에게 환한 빛이 비췰 것이다.” (이사야 9:1-2)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이 ‘한 아기(a child)’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기원전 745-695년까지 약 50년간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All right then,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the sign. Look! The virgin① will conceive a child!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이사야 7:14)/①Or young woman 이 말씀을 잘 보면, ‘virgin(동정녀)’이란 단어에 ‘young woman(젊은 여자)’이라는 주(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알마(almah)’로 되어 있는 것을 70인 역에서 희랍어로 번역할 때 ‘파르테노스(Parthenos, 동정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virgin’이라는 말에 ‘young woman’이라는 주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동정녀 탄생이라니? 말도 안 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동정녀’라는 말을 꼭 ‘virgin’으로 번역하지 않고 ‘young woman’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젊은 여자의 몸에서 내어 나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런 잘못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인카네이션(incarnation)’의 교리,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한복음 1:14)”는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대속(代贖)의 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는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이 교리를 지켜오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읽어보면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는 말씀인데요. “The children of God are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이는 혈통으로도 아니고, 인간의 결정으로도 아니고, 남편의 의지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3)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태어나듯이 예수님의 탄생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다윗의 가문을 선택하신 것뿐입니다. 인간의 결정에 따라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사도신경의 의미입니다.
지난 주간에 C. S. Lewis(1989-1963, 영국)의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루이스는 그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the Savior)’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둑에 서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손을 내 밀어주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그의 손을 잡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한 발은 땅에 딛고 있으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루이스의 이 말이 참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발이 모두 물에 빠져 있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한 분만이 물에 빠진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아기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7:14). 또 이사야 9:6에는 그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천사가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의 아내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태복음 1:21-23)
모든 말씀들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은 영원히 평화가 이어지는 세상이라고요. 그는 절망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요.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런 꿈을 가지고 메시아가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 때, 그녀가 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She talked about the child to everyone who had been waiting expectantly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누가복음 2:38)
2,000년 전에 살았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신구약 중간기의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도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와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어둠의 땅이 희망의 땅으로 바뀌고, 절망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 날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우리 나라가 그런 나라입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 항구에 첫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 미국)의 기도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십시오(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또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 선교사는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어떻습니까? 주변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꿈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믿음생활은 오로지 자기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에 대한 꿈과 열정을 잃어버리면서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대강절에 희망과 평화의 촛불이 켜진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기대를 지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꿈과 열정의 회복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시간들까지 이기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1/29/2020 | In Times Of Trouble 34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에베소서 5:15-20
오늘 다시 한번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년에 한번 추수감사주일을 지내고 그 후에는 감사를 잊어버리고 사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자는 취지로 한번 더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오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감사는 항상 해야 하는 것입니다.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황이 좋을 때나 상황이 나쁠 때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계획한대로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있다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그 이유를 잘 모를 수 있지만,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나의 삶을 보고 해석하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Be joyful always; pray continually;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카전서 5:16-18) 욥 같은 사람은 어떤가요? 그는 왜 자기에게 이런 고난이 주어지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자기는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고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욥이 깨달은 것은 비록 지금은 내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욥기가 42장까지 있는데요. 욥은 욥기가 끝나가는 40장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오늘 여러분 중에도 욥과 같이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겪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시간부터 나의 삶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속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바울은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갈라디아서 2:20)”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십니까?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의 길은 너희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이다).” (이사야 55:8)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후 왜 나의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의 삶 속에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에베소서 5장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바울은 여기서 크리스천의 삶에서 중요한 여섯 가지 가치 (values)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삶을 잘 살펴서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합니다 (15절). 둘째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16절). 셋째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합니다 (17절). 넷째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18절). 다섯째로,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라고 (Make music to the Lord in your heart) (19절)합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일에 감사하라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to God)”고 합니다 (20절).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크리스천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니까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 (the aroma of Christ)’가 나지 않고 ‘세상적인 냄새 (the aroma of the world)’가 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된 후에 크리스천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배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그 자리를 세상적인 가치들이 들어와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말하는 여섯 가지 가치 중에서 어느 것이 “아, 그렇구나!” 하고 마음에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모두 중요하지만요. 저는 세 번째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말씀과 여섯 번째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약 성경 27권 중에 바울이 쓴 편지가 13권입니다. 이 13권은 한 개인이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에 성경으로 인정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생의 말년에 쓴 편지들은 로마의 감옥에서 쓴 것들입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렇게 네 권의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 네 권의 성경을 ‘옥중서신 (The Prison Epistles)’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때 바울이 무슨 이유로 감옥에 갇혔는지 아십니까?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를 유대인들이 고소했습니다. 고소의 이유는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a ringleader of the sect of the Nazarenes)’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는 곳마다 이단 사상을 퍼뜨리고 유대인 사회에 분란을 조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5). 바울은 자기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니까 총독이나 왕에게 재판을 받지 않고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마칠 때까지 로마의 감옥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한번 바울이 당한 것과 같은 일을 여러분이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전파하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허무한 생각이 들겠습니까? 과연 그가 쓴 네 권의 옥중서신에 무슨 내용이 씌어 있을까요?
옥중서신을 읽어보면 바울이 자신을 ‘Paul, a prisoner of Jesus Christ (바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갇힌 사람)’라고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1, 에베소서 3:1, 또 골로새서 4:3이나 빌립보서 1:13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한 번도 자신을 ‘죄수 (a prisoner)’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항상 자신을 ‘a prisoner of Jesus Christ’라고 생각했습니다. 직접 그가 쓴 편지 구절을 읽어 보시겠습니까? “나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For this reason I, Paul, am the prisoner of Christ Jesus for you Gentiles.” (에베소서 3:1)
유명한 주석가 (commentator) 중에 매튜 헨리 (Matthew Henry, 1662-1714, 영국)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Even though Paul is in Roman captivity he refuses to think as a captive of men but applies it as a prisoner of Jesus Christ. Whence our grace comes- from our being apprehended of Christ Jesus. It is not our laying hold of Christ first, but his laying hold of us, which is our happiness and salvation. Paul literally states he is a captive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Paul, being a Christian saved by God has entered one into being captive. This captivity is comprised of and has led to grace, happiness, and salvation. Paul shows that even in the midst of a dark situation, through faith in the grace of God, it is possible to attain victory.”
어떻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는지 이 말씀에서 영감 (inspiration)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승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는 감옥 안에 있든지, 감옥 밖에 있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옥중서신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굉장합니다. 보세요. “Pray for us, too, that God will give us many opportunities to speak about his mysterious plan concerning Christ. That is why I am here in chains. Pray that I will proclaim this message as clearly as I should.” (골로새서 4:3-4)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God the Father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십시오).” (골로새서 5:20) 왜 그는 이렇게 감사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을까요? 그의 옥중서신을 읽어보면 왜 그가 감사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는지 세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데살로니카전서 5:17-18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면 모두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Be joyful always (항상 기뻐하라)!” “Pray continually (쉬지 말고 기도하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라)!” 바울은 분명하게 세 가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올바른 삶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명령은 옵션이 아닙니다. 명령은 반드시 해야 하는 requirement (필수사항)입니다. 학생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압니다. 학생들이 수업을 들을 때 선택과목이 있습니다. 선택과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서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이 있습니다. 그런 과목들을 ‘requirements’라고 합니다. 반드시 이 과목의 수업들을 듣고 학점을 따야 졸업을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감사는 다른 두 가지, 기쁨과 기도와 함께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과목입니다.
둘째로, 감사는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6-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모든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라. 그리고 그가 해 주신 모든 일을 생각하고 감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 하나님의 평화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이다).”
이 말씀 속에 ‘능력 있는 기도’와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for you (그가 너를 위해서 하신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 말씀이 기도생활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일에는 좋은 일도 있지만 궂은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궂은 일도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그렇고, 찬양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고 찬양이 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치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 낼 줄도 알고, 부유함을 누릴 줄도 압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궁핍할 때나, 어떤 형편에 처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빌립보서 4:11-12) ‘감사하는 법’이라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만족하는 법 (how to be content with whatever I have)’이라는 말로 나와있습니다. 만족한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Meister Eckhart (1260-1328, 독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자이며, 철학자이며, 신비주의자 (mystic)로 불리는 다양한 필드에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f the only prayer you ever say in your entire life is thank you, it will be enough (당신의 전 생애에 드린 유일한 기도가 ‘감사합니다’라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의 기도가 충분한 이유는 이 기도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humble’한 사람입니다. 물이 낮은 곳을 찾아 그곳에 고이듯이, 이런 사람은 항상 자기를 낮은 위치에 갔다 놓습니다.
이제 감사절은 지났습니다. 하지만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3:15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볼까요? “그러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우리의 입술의 열매입니다."
11/22/2020 | 추수감사주일 /In Times Of Trouble 33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Troubles
시편 116:1-14
오늘은 추수감사절 주일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go into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시편 100:4)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감사와 찬송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와 찬송’을 예수님의 버전으로 말한다면 ‘신령과 진정 (in spirit and in truth, 요한복음 4:24)’이라는 말입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이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같이 나눌 말씀은 시편 116편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나도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사미스트 (psalmist)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세요. “나는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1절) “주께서 도와 달라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1절) “주께서 나에게 귀를 기울이셨으므로 (Because he bends down to listen)” (2절) 상대방의 말이 잘 들리지 않으면 상대방 쪽으로 몸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우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들으신다는 표현입니다. “주는 내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 내셨고, 나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셨으며, 나의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8절) 참 이 사미스트가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낯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내가 부르짖고 하소연하면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정말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견고한 삶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알고 있으면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 금방 도와 달라는 기도가 입에서 나옵니다. 며칠 전에 한국에 있는 어느 청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OOO입니다. 평상시 연락 잘 안 하다가 필요할 때만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 청년이 보스턴에 있을 때 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메일을 쓰지 않고 보다 친숙한 말로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an intimate relationship)’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일이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가 어색하고 힘이 듭니다. 이 ‘친밀한 관계’를 우리는 ‘인격적인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라고 하기도 하고 ‘친밀한 교제 (a close fellowship)’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노아 (Noah)’에 대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is is the account of Noah and his family.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창세기 6:9) 그 때 땅 위에 사는 사람 중에 노아 한 사람만이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노아는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2016년 5월 26일, 영화 감독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1946-현재)가 하바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저는 그의 연설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은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무찌를 악당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이 세계엔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민족 간의 증오, 계급 간의 증오, 정치적 증오, 종교적 증오가 있습니다 (Love, support, courage, intuition. All of these things are in your hero’s quiver, but still, a hero needs one more thing: A hero needs a villain to vanquish. And you’re all in luck. This world is full of monsters. And there’s racism, homophobia, ethnic hatred, class hatred, there’s political hatred, and there’s religious hatred).” 그는 졸업생들을 이 시대를 살아갈 영웅들이라고 했습니다. 영웅의 화살통에는 사랑과 지원, 용기와 직관이라는 화살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영웅에게는 당연히 무찌를 악당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스필버그의 연설을 특별한 연설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무찌를 악당들이 많기 때문에 스필버그는 졸업생들에게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악당이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힘든 일이 없고,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잘 되는 세상을 원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고, 풍랑이 일어나지 않는 편안한 세상을 원합니다. 그런데, 스필버그의 연설은 다르지 않습니까? 악당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운이 좋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는데, 스필버그의 연설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누가복음 8:23-25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잠깐 배 안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 사이에 갑자기 광풍이 불어 호수를 내리쳤습니다. 물이 배안으로 들어오면서 금방이라도 배가 침몰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잠든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성난 파도를 꾸짖었습니다. 거짓말처럼 즉시 바람이 멈추고 호수는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Where is your faith)?”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우리는 바람이 없고 잔잔한 호수 같은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한번 발상을 전환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미친 바람이 불고 거센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볼 기회입니다. 광풍과 풍랑은 우리의 믿음이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예배입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면서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 추수 감사 예배입니다. 예전 교인들은 추수 감사 헌금을 추수한 곡식으로 드렸습니다. 추수 감사절이 되면 부자들은 교회에 올 때 소달구지에 쌀을 가마니로 싣고 와서 감사 헌금을 드렸습니다. 올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답답하고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활동이 제한되어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다 보니 마음이 울적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팬데믹 (pandemic)’ 현상으로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추수감사절 예배라니...... 우리에게 무슨 감사할 것이 있을까요? 우리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과 실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고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립니다.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지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의 믿음생활의 초점이 교회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든 일주일을 버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이 패턴이 깨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생활의 초점이 교회가 아니라 가정으로, 직장으로, 실험실로, 비지니스 현장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교회가 되어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설교해도 안 되던 일들이,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 개개인의 삶의 현장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 (Puritans)이 ‘플리머스 (Plymouth)’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는 ‘케이프 코드 (Cape Cod)’에 정박을 하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아서 그곳에 내리지 못하고 ‘플리머스’ 쪽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영국에서 출발했던 항구 이름이 Plymouth였다) 지금 ‘플리머스’에 가면 그들이 내렸던 장소에 ‘1620’이라고 새겨진 ‘플리머스 락 (Plymouth Rock)’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타고 왔던 ‘Mayflower’는 고장 난 곳을 수리하고 며칠 후에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선장이 이곳은 살 곳이 못되니 같이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영국 국교인 ‘앵글리칸 처치 (Anglican Church or Episcopal Church)’의 폐단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형식과 권위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 대로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102명 중 41명이 ‘청교도 분리주의자들 (the Puritan Separatists)’이었고, 나머지 61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strangers)’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을 보내면서 이들 중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행여나 이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을 알게 되면 호전적인 인디언들이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모든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 하는 감사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이 드리는 감사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드리는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드리는 감사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드린 감사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로 약속의 땅 ‘세겜’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12:7). 하지만, 그 땅에는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다시 식구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야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하박국의 감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고,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드렸던 감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습니다 (사도행전 16:25).
시편 116편을 쓴 사미스트는 죽음의 밧줄이 그를 옭아맸고, 무덤의 고통이 그를 덮쳤다고 합니다 (3절).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을 믿는 일이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I believed in you, so I said, ‘I am deeply troubled, Lord (나는 주님을 신뢰했기에 ‘주님 저는 지금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I believed in you”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I believed in you”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크리스천이 받는 고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이런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 감사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크리스천에게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미국 생활에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왜 이렇게 말 끝마다 “Thank you”가 많습니까? 심지어 벌금을 내면서도 “Thank you”라고 합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감사절이 시작한 나라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어디를 급히 가다가 무심코 뒤를 봤더니 경찰 차가 정지 신호를 보내면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차를 세웠더니 까만 선글래스를 쓴 키가 큰 무섭게 생긴 경찰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창문을 내리고 그 날 따라 왜 그랬는지 “Thank you!”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경찰이 “Thank you? For What?” 하면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Thank you for giving me a ticket”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경찰이 저를 잠시 바라보더니 “Ok, you go. Be careful next time” 하면서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 그 경찰에게 “Thank you” 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보스턴은 감사의 도시입니다. 여기서 추수 감사절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의 피 속에 믿음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이 DNA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여호와께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12절) 우리에게 단 한 순간도 감사의 이유가 없는 순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