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2020 | In Times Of Trouble 22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I Am Your God

이사야 41:8-13

혹시 여러분, 이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고든 피 (Gordon D. Fee)와 더글라스 스튜어트 (Douglas Stuart)가 쓴 책인데요.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How To Read The Bible For All Its Worth”입니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손실하지 않고 성경을 온전히 읽는 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고든 피는 캐나다에 있는 리전트 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도 교수로 있었습니다. 더글라스 스튜어트는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습니다. 이 책은 전문가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먼저 저자가 이 구절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자기 멋대로 성경을 읽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문맥에는 두 가지 문맥이 있는데, 하나는 문학적인 문맥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문맥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어느 한 구절만 읽어서는 안 되고 앞뒤 문장을 잘 살펴서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문학적인 문맥을 따져서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문맥에 따라 읽어야 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이 성경이 언제 기록되었는지, 이 성경을 누가 기록했는지, 그 때 당시의 사회는 어떤 사회였고,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살펴서 읽어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41장 본문 말씀은 역사적인 맥락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서를 이사야 한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 그렇게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별로 없습니다. 보통은 이사야서를 1-39장, 40-55장, 56-66장, 이렇게 3등분합니다. 1-39장은 ‘제 1 이사야’라고 합니다.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40-55장은 ‘제 2 이사야’라고 하는데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구원의 대한 소망의 말씀들이 들어 있습니다. 56-66장은 ‘제 3 이사야’라고 합니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공평하고 정의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라는 꿈과 비전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 2이사야’에 속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포로생활 중에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1절). 하나님께서 지금 포로생활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불행을 해석하는 방법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내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욥이 불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에 대한 이런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 9:3)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으셨습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너희가 이런 불행을 당했다고 해서 나의 사랑에서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조국을 잃고 이렇게 타국에 와서 떠돌고 있다고 해서 너희에 대한 나의 관심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같은 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The Age Of Uncertainty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1963년에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갤브레이스 (John Kenneth Galbraith)가 1977년에 쓴 책의 제목인데, 그 말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불확실합니다. 우리의 삶도 불확실합니다. 불확실하니까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고, 불안합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 아닙니까? 하지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이 실제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말들이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말들인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크리스천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Omnipotent God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Omniscient God (무엇이든지 다 아시는 하나님)’ ‘Omnipresent God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렵고 힘든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리고 왔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이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9절)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邊方)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강대국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작은 나라입니다. 국제 질서가 바뀌는 대로 이집트의 영향권에 있다가, 앗시리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바빌로니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페르시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신약시대에는 로마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약소 국가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사람을 부르시고 선택하신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언자들을 선택하신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말씀들이 나옵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동역자로 선택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 사람은 정말 아닌 것 같다.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 데마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긴 사람이고,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다가 중간에 믿음의 길에서 돌아선 사람입니다. 성경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카로 갔다 (디모데후서 4:10)”고 했습니다. 아니, 유다나 데마를 선택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요한복음 15:16)”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믿음의 길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근시안적으로 보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bird’s-eye view’로 봐야 합니다. 우리 말로 ‘조감도(鳥瞰圖)’라고 합니다. ‘aerial view’라고도 하고 ‘helicopter view’라고도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관점 (view)을 ‘worm’s-eye view’라고 합니다. ‘벌레의 눈의 관점’이라는 뜻입니다. 벌레는 땅에 기어 다니기 때문에 ‘벌레의 눈’으로 보면 전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bird’s-eye view’로 전체를 봐야 보일 때가 많습니다. ‘bird’s-eye view’로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전체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 개역성경)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말씀이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doesn't take back the gifts he has given or disown the people he has chosen.” 또 GOD'S WORD Translation에는 “God never changes his mind when he gives gifts or when he calls someon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시편 46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1-3, 5절)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뛰놀고, 산이 요동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묘사하는 수사법 (figure of speech)입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계시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겁을 내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10절)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난 사람들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괜찮아, 잘 될거야.” “걱정하지 마.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다들 그래.” “힘들지? 얼마나 힘들겠어.” “툴툴 털고 일어나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이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말이 어려움 당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마.” “내가 붙들어 줄께.” “내가 함께 있어 줄께.” “내가 도와줄께.” 어려움 당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말들이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Don’t be afraid, for I am with you. Don’t be discourag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hold you up with my victorious right hand.” (10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용기를 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너를 붙들어 주겠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11절 말씀과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와 다투는 사람들, 너에게 대적하는 사람들, 너와 싸우는 사람들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큰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십니다 (With God nothing is impossible).” (창세기 18:14, 마태복음 19:26, 마가복음 9:23, 누가복음 1:37)

‘바라바 (Barabbas)’라는 1962년에 나온 옛날 영화를 보았습니다. 바라바는 예수님 대신 목숨을 구한 흉악한 강도입니다. 앤소니 퀸 (Anthony Quinn)이 바라바 역으로 나옵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 대신 살아난 바라바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도질을 하다가 붙잡힌 바라바는 절대로 살아나올 수 없다는 시실리 섬의 유황 광산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바라바는 거기서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유황 광산에서 만난 사하크 (Sahak)라는 사람과 함께 로마로 돌아와서 검투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하크라는 사람이 진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검투사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당신들이 믿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주변이 있으시지요. 마치 몸 안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법은 단 하나, 사랑입니다.” 

사하크가 담담하게 자기의 믿음을 말하는 이 장면이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몸 안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항상 우리 주변에 계시지만 (사도행전 17:24-28)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을 못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오른 손으로 너를 붙잡고 있다 (I am your God. Don’t be afraid, I am with you. II will hold you up with my victorious right hand)”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붙들고 계시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우리를 그분의 ‘victorious right hand’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8/30/2020 | In Times Of Trouble 21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시면 If The Lord Is For Me

시편 118:1-14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401장 ‘주의 곁에 있을 때’ 이 찬송가는 프랭크 데이비스 (Frank M. Davis, 1839-1896, 미국)라는 사람이 작사와 작곡을 한 찬송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분이 목사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이 남긴 이 찬송가는 가사도 훌륭하고 곡도 잘 써져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같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많은 위로를 주는 찬송입니다. 가사를 한번 보실까요? (1절) Savior, lead me, lest I stray, Gently lead me all the way; I am safe when by Thy side, I would in Thy love abide. Lead me, lead me, Savior, lead me, lest I stray; Gently down the stream of time, Lead me, Savior, all the way (주여,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 곁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저는 주님의 사랑 속에 살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제가 가는 모든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2절) Thou the refuge of my soul, When life's stormy billows roll, I am safe when Thou art nigh, All my hopes on Thee rely. Lead me, lead me, Savior, lead me, lest I stray; Gently down the stream of time, Lead me, Savior, all the way (주님은 저의 영혼의 피난처입니다. 삶의 폭풍이 일어날 때도 주님 곁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저의 모든 희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3절) Savior, lead me, then at last, When the storm of life is past, To the land of endless day, Where all tears are wiped away. Lead me, lead me, Savior, lead me, lest I stray; Gently down the stream of time, Lead me, Savior, all the way. Amen (주님, 마침내 삶의 폭풍이 지나가고 낮이 계속되는 땅으로, 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오늘 설교 본문 말씀은 시편 118편입니다. 이 시편은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가 누군지 알아야 그 시편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쓰는 한 절 한 절, 단어 하나 하나에 그가 처했던 상황과 그의 인생, 그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편 118편은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사미스트 (psalmist)’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미스트는 이렇게 그의 시편을 시작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2절)....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he is good and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 (그는 선하시고 그의 신실하신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가장 짧은 말로, 가장 적절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와서 “선하신 선생님” 하고 불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나를 선하신 선생이라고 부르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마가복음 10:18, 누가복음 18:19) 심지어 예수님도 자기를 선하다고 부르는 것을 금하시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선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도 선합니다 (창세기 1:18). 지금의 일그러진 세상을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생각도 선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29:11) 요한복음 3:16에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선한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도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러므로, 나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 나의 자존감이 무너졌을 때, 나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렸을 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니다. 내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은 나의 삶에 대해 좋은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 성경을 펴서 읽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alive)’, ‘운동력 (active)’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으면 힘든 시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나의 자존감도 살아납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 때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나님을 찬양한 이 사미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신다.” (5-7절)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In my distress I prayed to the Lord)”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까? 고통, 염려, 근심, 환난, 역경,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이런 것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이런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를 그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이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이 말씀의 뜻입니다.

사미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신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6-7절)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하는 말씀과, “주님은 나의 분깃, 내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시편 119:57)” 라는 말씀입니다. NIV 성경에 이 말씀이 “You are my portion, O LORD; I have promised to obey your words.”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깃’이라는 말은 원래 유산을 나눌 때 자기에게 돌아오는 ‘몫’을 말합니다.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는 자기에게 돌아올 ‘몫’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몫’을 ‘port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시편 144편을 쓴 다윗은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사람, 백성은 복이 있다고 했고요. 세상에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사미스트들은 그런 유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나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한번 이렇게 큰 소리로 선언할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셔서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다 (The LORD is for me among those who help me)”는 말씀입니다. 나를 돕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궁핍하고 어려울 때 내가 가진 ‘resource (지원)’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resource’중에 내가 가진 지식이나 경력, 내가 가진 인맥(人脈)이 있고, 내가 가진 물질도 있고, 나의 gift (타고난 재능)나 talent (재주)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가할 때 내가 가진 resource가 얼마나 되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것들이 내가 궁핍하고 어려울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오늘 시편 118편을 쓴 사미스트도 어렵고 힘들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resource’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사미스트의 이런 점이 이 시편을 탁월한 시편으로 만들고, 이 시편을 읽는 사람들에게 영감 (inspiration)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man.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8절) 말씀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사미스트의 resource 중에 princes (고관)도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 사미스트는 고관을 찾지 않고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편을 읽고 은혜를 받는 이유는 그 말씀 속에서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생각해야 할 말씀은 이 사미스트가 어떤 이유로 하나님을 내 편이라고 고백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대뜸 하나님은 나의 편이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그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저는 5절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아,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이런 경험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편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크리스천은 기도를 통해서 믿음의 확신을 얻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기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두 말씀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편 118:6-7)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습니까?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31-34) 두 말씀이 똑 같습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은 시편 118편의 ‘바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자로서 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시편 118편 말씀에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시편 118편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시편입니다. 나는 모든 성경을 사랑하지만, 이 시편은 특별하게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시편입니다. 황제도, 군왕들도, 지혜자도, 모사도, 성자들도 나를 구원하지 못했지만, 이 시편은 나를 억누르는 많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건져 주었습니다 (This is my psalm, my chosen psalm. I love them all; I love all holy Scripture, which is my consolation and my life. But this psalm is nearest my heart, and I have a peculiar right to call it mine. It has saved me from many a pressing danger, from which nor emperor, nor kings, nor sages, nor saints, could have saved me. It is my friend; dearer to me than all the honors and power of the earth).”

이제는 우리가 이 시편을 읽고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이겨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시편을 읽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의 편이 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하여 선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8/23/2020 | In Times Of Trouble 20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시편 42:1-8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20’ 시간으로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말씀은 ‘고라의 자손’이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라 (Korah)’는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반감을 품고 구데타를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고라’는 다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파입니다. 이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오고, 예배를 돕는 성가대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연주를 잘 해도 성전에서는 연주할 수 없습니다. 그외에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레위 지파 사람들이고,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도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곧 그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신 하나님께 불만을 갖는 것과 동일시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관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라’와 ‘고라’에게 동조했던 250명을 모두 심판하셨습니다. 이 250명은 모두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민수기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에 “3족(三族)을 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에 역심(逆心)을 품으면 그 사람의 친가, 처가, 외가를 역적으로 몰아 처벌한다는 뜻입니다. ‘고라’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성경에는 “그러나, 고라의 자손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However, the sons of Korah did not die that day, 민수기 26:11)”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 중에 시편 42편과 같은 훌륭한 시편을 쓴 사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시편 18:1)!”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편 22:19)!”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아, 정말 하나님을 이렇게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이렇게 찾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은 하나님이나,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동일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았는데,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고도 믿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지식을 믿고, 우리 지위를 믿고, 우리 가진 것을 믿고, 우리 힘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절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 외에 믿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출신 배경이 다른 사람보다 좋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배웠습니다.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로마 말까지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이스라엘에서 알아주는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discarded everything else, counting it all as garbage, so that I could gain Christ).” (빌립보서 3:8)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기독교의 진리는 버림으로써 더 가치 있는 것을 얻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버림으로써 부활하셨고,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 바울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버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도 우리가 믿는 것을 내려 놓기 전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고라의 자손’이 누군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는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1-2절)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역시 이렇게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가질 때까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려 놓는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큰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Why am I discouraged? Why is my heart so sad?)?” (6, 11절)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많이 자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끄덕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태복음 26:3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불안하고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갑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불안한 마음을 계속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여러분에게 염려가 있고, 걱정이 있고, 미래에 대하여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느냐, 가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These things dominate the thoughts of unbelievers, but your heavenly Father already knows all your needs).” (마태복음 6:30-32) 나중에 제자 베드로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7)”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은 그 때 산 위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배운 것입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지금 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5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 이런 것들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시인의 마음 속에도 불안이 있습니다. 낙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이 시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염려와 걱정과 불안이 몰려올 때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 hear the tumult of the raging seas as your waves and surging tides sweep over me.” 직역하면, “나는 성난 바다가 요동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파도입니다. 그리고 나를 휩쓸어가는 물결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물결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금방이라도 나를 뒤덮고, 금방이라도 나를 휩쓸어갈 파도와 물결이 이제는 주님이 보내신 파도와 물결이 되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더니, 상황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황을 지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크리스천이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시인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낙심과 불안을 이겨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5절)”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에서부터 세상을 이기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Here I stand, May God help me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미국)도 그렇습니다만, 마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을 통해서 그가 필요한 일꾼들을 불러내십니다. 루터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대학가에 토론 문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는 학교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마틴 루터도 자기가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채플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그 대자보 속에 그 당시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는 95개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히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교황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1521년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던 루터는 ‘보름스 의회 (Reichstag zu Worms)’에 소환을 받습니다. 루터에게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소환이었습니다. 그 때 루터는 황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Unless I am convinced by the testimony of the Scriptures or by clear reason (for I do not trust either in the pope or in councils alone, since it is well known that they have often erred and contradicted themselves), I am bound by the Scriptures I have quoted and my conscience is captive to the Word of God. I cannot and will not recant anything, since it is neither safe nor right to go against conscience.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May God help me. Amen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는 그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만약 그 때 루터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보았더라면 그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종교개혁은 물 건너갔을 것이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후퇴했을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시인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 때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납게 요동치는 파도 소리는 주님이 보내신 파도 소리가 되고,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은 물결도 주님이 보내신 물결이 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낙심과 불안을 토로했던 이 시인은 이렇게 시편을 끝냅니다. “But each day the LORD pours his unfailing love upon me, and through each night I sing his songs, praying to God who gives me life (하지만, 낮에는 주님이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에게 부어 주시고, 밤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8절)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던 이 시인이 낮에도 두렵지 않고 밤에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8/16/2020 | In Times Of Trouble 19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The Place Where We Now Stand

로마서 5:1-9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19’ 시간으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The Place Where We Now Stand)’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고 말합니다.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은 ‘because of our faith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 하나를 고른다면 ‘믿음 (faith)’라는 말이 아닐까요? 복음서에 ‘믿음’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중풍병으로 고통받는 자기 종의 병을 고쳐 달라는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가 믿은 대로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 (Go back home. Because you believed, it has happened).” (마태복음 8:13)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에게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복음 9:22) 왜 기도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움직여라’ 말할 것이다. 그러면 산이 움직일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7:20) 이 말씀 카드들을 한번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alive (살아 있고)’ and ‘active (활동적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omnipotent God), 전지하신 하나님 (omniscient God),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 계시는 하나님 (omnipresent God),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어찌 평범한 삶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믿음’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doctrinally)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감동이 없습니다. 척 프리만 (Rev. Chuck Freeman)이라는 분이 ‘HUFFPOST’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Noun faith’ is a form of mind control. It produces consumers. However, ‘Verb faith’ paints a starkly contrasting portrait. ‘Verb faith’ produces active, engaged citizens who express a here-and-now earthly heaven (‘명사로서의 믿음’은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과 같아서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동사로서의 믿음’은 이와 대조적으로 활동적인 시민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천국이 어떤 것인지 자신들의 삶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살아 있고, 활동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consumers (소비자)’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하는 건전한 ‘시민 (citizens)’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Chuck Freeman 목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those who express a here-and-now earthly heaven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표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면, 지금 우리는 엄청난 특권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는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십시오. 지금 2020년 8월 16일 현장예배에, 혹은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 속에는 온갖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앉아 있는 자리입니까? 집에서 컴퓨터를 켜 놓고 영상으로 예배를 보고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특별한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고 받아들였더니, 그 은혜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Because of our faith)’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해서, 그 일의 대가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어마무시하다’는 말을 합니다.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신조어(新造語)입니다.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정말 ‘어마무시한’ 일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8절)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별 느낌이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렇고, 교회에 가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렇게 이해는 하고 있지만 내가 왜 ‘죄인’인지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죄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들어 보시겠습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들 (values)’과 ‘목표 (goals)’가 달라서 서로 부딪게 되니까 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로마서 5:10)’라고 합니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원수였다고요. 그 때 우리는 몰랐지만, 우리는 ‘전능자’와 원수가 되어 ‘전능자’와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전능자’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2:12 말씀이 그 때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자손도 아니며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의 기업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지 않았습니까 (In those days you were living apart from Christ. You were excluded from citizenship among the people of Israel, and you did not know the covenant promises God had made to them. You lived in this world without God and without hope)?”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 (ransom)’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아무나 다 아들로 받아 주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요한복음 3:16)’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하신 일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팀 (God’s team)’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 프로 야구 좋아하는 분들 많이 계시지요? 한국의 류현진이라는 투수가 캐나다 토론토의 ‘블루 제이스 (Tronto Blue Jays)’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작년 시즌에 LA 다저스 (Dodgers)에서 성적이 아주 좋았습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LA와 계약이 끝나게 되어 어느 팀으로 갈 것인지 말이 많았습니다. 류현진이 좋은 투수이긴 하지만 나이도 많고 부상도 많아서 선뜻 나서는 팀이 없는 상황에서 투수 진을 보강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던 캐나다의 ‘블루 제이스’와 4년간 8,000만 달러 (한화로 930억원)를 받기로 하고 계약했습니다. 연봉 순위가 전체 메이저 리그 선수들 중에서 41위라고 합니다. ‘블루 제이스’에서는 엄청난 투수가 오게 되었다고, 류현진에 대한 어마어마한 마켓팅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막전에서 류현진이 그리 좋은 피칭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만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피드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안타를 많이 허용했습니다. 류현진으로서는 뭔가 자기의 진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많아서인지 두 번째 게임에 나가서도 패전 투수가 되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세 번째 게임에서는 이기고, 네 번째 ‘마이애미’와의 게임에서 승리 투수는 못되었지만 한 점 밖에 내 주지 않을 정도로 잘 던졌습니다. 

제가 류현진이라는 아구선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류현진은 자기를 데려간 ‘블루 제이스’에게 자기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투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적으로 지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팀’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저를 뽑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저를 잘 뽑으셨다는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아직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해서 우리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1절) 이 말씀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팀’ 안에서 ‘as undeserved people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자기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류현진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 나가면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 생활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감당할 수 없는 이 특별한 자리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여기 ‘stand’라는 말은 단순히 ‘서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확실하다’ ‘견고하다 (firm)’ ‘굳건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외부의 어떤 상황이나 압박이나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2-4절 말씀이 그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 때문에 흔들리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상황만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우리의 좌표(座標)를 찾아보고 확인해야 할 때입니다.


8/9/2020 | In Times Of Trouble 18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 God Who Makes A Way Out

고린도전서 10:11-13

‘에드워드 모트 (Edward Mote, 1797-1874)’라는 영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 없이 불행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모트’는 살아 남기 위하여 가구 공장에 들어가 어린 나이에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런던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트’는 무심코 한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모트’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가구 공장에서 성실하게 일한 결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고, 어느새 가구 공장의 사장으로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종이에 적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부른 488장 찬송 가사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음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은혜가 넘치는 찬송 가사입니다.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어렵고 힘들 때)’ 시리즈 설교 18 번째 시간으로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 (God Who Makes A Way Out)’이런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모든 일들은 우리 조상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들이며,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11절)” 이렇게 시작됩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 (These things)’이 무슨 일이길래 이 일들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는 ‘본보기 (examples)’가 되고 후손들에게는 ‘경고 (warnings)’가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네 가지 일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조상들이 광야생활 하던 중에 우상숭배를 했던 일입니다 (7절). 이 일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둘째로,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 (sexual immorality)’에 빠졌던 일을 지적합니다 (8절). 이 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조상들이 하나님을 ‘시험 (test)’했던 일을 지적합니다 (9절). 이 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상들이 하나님께 ‘불평’했던 일을 지적합니다 (10절). 이 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멸망했습니다. 이 네가지 일들을 보면, 모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들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다 그렇게 했을 거야!”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어떤 때는 ‘원칙’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타협’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을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믿음생활 하는 사람을 “flexible하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바로 그 점을 지적합니다. “너희들을 상황을 핑계 대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너희 자신들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때 너희가 피할 길을 마련하고 계셨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거나 절망하면 안 됩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방 어디를 봐도 초나라의 노래뿐이어서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초나라의 ‘항우’가 한나라의 ‘유방’과 대치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심신이 지친 초나라 병사들은 고향의 노래를 듣고 탈영했습니다. ‘항우’ 역시 그 노래를 들고 한나라에 항복한 초나라 병사가 많음을 알고 절망했다는 말에서 ‘사면초가’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사면초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압박을 받아도 눌리지 않으며, 난처한 일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매를 맞아 넘어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We are pressed on eve-ry side by troubles, but we are not crushed. We are perplexed, but not driven to despair).” 크리스천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그런 상황에서도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서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다니엘은 왕이 새 법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 집 다락방으로 올라가 늘 하던 것처럼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방 창문은 예루살렘 쪽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다니엘 6:10) 왕이 도장을 찍었다는 ‘새 법’은 “앞으로 삼십 일 동안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를 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입니다. 이 법은 다니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하여 만든 법입니다. 이런 법이 통과된 것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늘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 달만 참으면 되는데, 이런 무모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니엘은 매우 총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새 법’을 어기고 자기가 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의 대답을 “그 방 창문은 예루살렘 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He went home and knelt down as usual in his upstairs room, with its windows open toward Jerusalem)”는 말씀에서 발견했습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했던 것은 무모한 행동이 아니라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찬양 중에 ‘My God Is So Big (내가 믿는 하나님은 아주 커요)’ 이런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절) My God is so big,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My God is so big,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He made the trees He made the seas He made the elephants too/My God is so big,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2절) My God is so great,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My God is so  great,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The mountains are his The rivers are his The skies are his handy works too/My God is so great,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For you (https://youtu.be/Aq1ZIC4lsEw)

둘째로, 우리를 위해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정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까?” 이런 의심을 합니다.

성경에 ‘맛사 (Massa)’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맛사’라는 지명에는 ‘테스트 (test)’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Is the LORD here with us or not)?” 하면서 하나님을 테스트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출애굽기 17:7).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필요한 것을 모두 공급해 주셔서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실까?” 하면서 하나님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니까 때때로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보세요. “하나님을 잘 믿어야 아무 소용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어. 여호와 앞에서 기도하고 회개해도 아무 소용없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잘되는 걸?” 말라기 3:14-15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 우리는 당신의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고 그에게 기도해야 하나요?” 욥기 21:14-15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욥이 친구 소발과 변론하는 중에 나온 말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런 사람들이 잘 되고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고난을 받느냐고 자기를 변론한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천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피할 길’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련해 주시는 ‘피할 길’은 ‘믿음의 눈’으로 봐야 보이는 길입니다. 왜 똑 같은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와서 열 사람이 보고한 것과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고한 것이 달랐을까요? 두 사람은 그 땅을 ‘믿음의 눈 (God’s point of view)’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사람들은 그 땅을 ‘사람의 눈 (human point of view)’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아니, 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가 자기 앞을 막았을 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면서 책망하셨을까요? ‘사람의 눈’을 가지고 보면 ‘사람의 일’만 보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봐야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보입니다.

바울이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라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한 ‘새로운 창조’ 혹은 ‘새로운 사람 (New Person,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은 어떤 사람일까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 (new point of view)’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이란 말이 있습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보입니다. 크리스천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7 말씀이 그 말씀 아닙니까?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눈에 보이는 것을 살지 않습니다).”

이 말이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 맞춰 보십시오. “내가 너를 이 백성과 이방인들에게서 구원할 것이며,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 (사도행전 26:18)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아그립바 (Agrippa)’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했습니다. ‘아그립바’는 헤롯 대왕의 손자로 ‘헤롯 안티파스’를 대신해서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라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어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빛의 세계를 보게 하고, 사탄의 세력에 매여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람의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눈’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gift)’입니다 (고린도후서 5:18). 선물은 우리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시는 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믿음의 눈으로 세상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이렇게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믿음의 눈’이 있어야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마련해 주시는 ‘피할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렵고 힘든 이 시기에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피할 길’은 어떤 것인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은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