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8/23/2020 | In Times Of Trouble 20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시편 42:1-8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20’ 시간으로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말씀은 ‘고라의 자손’이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라 (Korah)’는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반감을 품고 구데타를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고라’는 다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파입니다. 이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오고, 예배를 돕는 성가대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연주를 잘 해도 성전에서는 연주할 수 없습니다. 그외에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레위 지파 사람들이고,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도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곧 그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신 하나님께 불만을 갖는 것과 동일시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관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라’와 ‘고라’에게 동조했던 250명을 모두 심판하셨습니다. 이 250명은 모두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민수기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에 “3족(三族)을 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에 역심(逆心)을 품으면 그 사람의 친가, 처가, 외가를 역적으로 몰아 처벌한다는 뜻입니다. ‘고라’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성경에는 “그러나, 고라의 자손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However, the sons of Korah did not die that day, 민수기 26:11)”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 중에 시편 42편과 같은 훌륭한 시편을 쓴 사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시편 18:1)!”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편 22:19)!”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아, 정말 하나님을 이렇게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이렇게 찾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은 하나님이나,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동일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았는데,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고도 믿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지식을 믿고, 우리 지위를 믿고, 우리 가진 것을 믿고, 우리 힘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절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 외에 믿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출신 배경이 다른 사람보다 좋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배웠습니다.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로마 말까지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이스라엘에서 알아주는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discarded everything else, counting it all as garbage, so that I could gain Christ).” (빌립보서 3:8)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기독교의 진리는 버림으로써 더 가치 있는 것을 얻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버림으로써 부활하셨고,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 바울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버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도 우리가 믿는 것을 내려 놓기 전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고라의 자손’이 누군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는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1-2절)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역시 이렇게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가질 때까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려 놓는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큰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Why am I discouraged? Why is my heart so sad?)?” (6, 11절)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많이 자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끄덕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태복음 26:3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불안하고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갑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불안한 마음을 계속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여러분에게 염려가 있고, 걱정이 있고, 미래에 대하여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느냐, 가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These things dominate the thoughts of unbelievers, but your heavenly Father already knows all your needs).” (마태복음 6:30-32) 나중에 제자 베드로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7)”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은 그 때 산 위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배운 것입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지금 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5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 이런 것들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시인의 마음 속에도 불안이 있습니다. 낙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이 시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염려와 걱정과 불안이 몰려올 때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 hear the tumult of the raging seas as your waves and surging tides sweep over me.” 직역하면, “나는 성난 바다가 요동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파도입니다. 그리고 나를 휩쓸어가는 물결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물결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금방이라도 나를 뒤덮고, 금방이라도 나를 휩쓸어갈 파도와 물결이 이제는 주님이 보내신 파도와 물결이 되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더니, 상황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황을 지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크리스천이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시인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낙심과 불안을 이겨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5절)”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에서부터 세상을 이기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Here I stand, May God help me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미국)도 그렇습니다만, 마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을 통해서 그가 필요한 일꾼들을 불러내십니다. 루터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대학가에 토론 문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는 학교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마틴 루터도 자기가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채플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그 대자보 속에 그 당시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는 95개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히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교황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1521년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던 루터는 ‘보름스 의회 (Reichstag zu Worms)’에 소환을 받습니다. 루터에게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소환이었습니다. 그 때 루터는 황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Unless I am convinced by the testimony of the Scriptures or by clear reason (for I do not trust either in the pope or in councils alone, since it is well known that they have often erred and contradicted themselves), I am bound by the Scriptures I have quoted and my conscience is captive to the Word of God. I cannot and will not recant anything, since it is neither safe nor right to go against conscience.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May God help me. Amen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는 그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만약 그 때 루터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보았더라면 그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종교개혁은 물 건너갔을 것이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후퇴했을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시인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 때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납게 요동치는 파도 소리는 주님이 보내신 파도 소리가 되고,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은 물결도 주님이 보내신 물결이 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낙심과 불안을 토로했던 이 시인은 이렇게 시편을 끝냅니다. “But each day the LORD pours his unfailing love upon me, and through each night I sing his songs, praying to God who gives me life (하지만, 낮에는 주님이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에게 부어 주시고, 밤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8절)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던 이 시인이 낮에도 두렵지 않고 밤에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8/16/2020 | In Times Of Trouble 19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The Place Where We Now Stand
로마서 5:1-9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19’ 시간으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The Place Where We Now Stand)’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고 말합니다.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은 ‘because of our faith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 하나를 고른다면 ‘믿음 (faith)’라는 말이 아닐까요? 복음서에 ‘믿음’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중풍병으로 고통받는 자기 종의 병을 고쳐 달라는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가 믿은 대로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 (Go back home. Because you believed, it has happened).” (마태복음 8:13)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에게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복음 9:22) 왜 기도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움직여라’ 말할 것이다. 그러면 산이 움직일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7:20) 이 말씀 카드들을 한번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alive (살아 있고)’ and ‘active (활동적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omnipotent God), 전지하신 하나님 (omniscient God),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 계시는 하나님 (omnipresent God),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어찌 평범한 삶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믿음’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doctrinally)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감동이 없습니다. 척 프리만 (Rev. Chuck Freeman)이라는 분이 ‘HUFFPOST’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Noun faith’ is a form of mind control. It produces consumers. However, ‘Verb faith’ paints a starkly contrasting portrait. ‘Verb faith’ produces active, engaged citizens who express a here-and-now earthly heaven (‘명사로서의 믿음’은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과 같아서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동사로서의 믿음’은 이와 대조적으로 활동적인 시민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천국이 어떤 것인지 자신들의 삶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살아 있고, 활동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consumers (소비자)’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하는 건전한 ‘시민 (citizens)’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Chuck Freeman 목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those who express a here-and-now earthly heaven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표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면, 지금 우리는 엄청난 특권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는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십시오. 지금 2020년 8월 16일 현장예배에, 혹은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 속에는 온갖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앉아 있는 자리입니까? 집에서 컴퓨터를 켜 놓고 영상으로 예배를 보고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특별한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고 받아들였더니, 그 은혜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Because of our faith)’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해서, 그 일의 대가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어마무시하다’는 말을 합니다.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신조어(新造語)입니다.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정말 ‘어마무시한’ 일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8절)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별 느낌이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렇고, 교회에 가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렇게 이해는 하고 있지만 내가 왜 ‘죄인’인지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죄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들어 보시겠습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들 (values)’과 ‘목표 (goals)’가 달라서 서로 부딪게 되니까 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로마서 5:10)’라고 합니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원수였다고요. 그 때 우리는 몰랐지만, 우리는 ‘전능자’와 원수가 되어 ‘전능자’와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전능자’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2:12 말씀이 그 때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자손도 아니며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의 기업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지 않았습니까 (In those days you were living apart from Christ. You were excluded from citizenship among the people of Israel, and you did not know the covenant promises God had made to them. You lived in this world without God and without hope)?”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 (ransom)’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아무나 다 아들로 받아 주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요한복음 3:16)’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하신 일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팀 (God’s team)’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 프로 야구 좋아하는 분들 많이 계시지요? 한국의 류현진이라는 투수가 캐나다 토론토의 ‘블루 제이스 (Tronto Blue Jays)’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작년 시즌에 LA 다저스 (Dodgers)에서 성적이 아주 좋았습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LA와 계약이 끝나게 되어 어느 팀으로 갈 것인지 말이 많았습니다. 류현진이 좋은 투수이긴 하지만 나이도 많고 부상도 많아서 선뜻 나서는 팀이 없는 상황에서 투수 진을 보강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던 캐나다의 ‘블루 제이스’와 4년간 8,000만 달러 (한화로 930억원)를 받기로 하고 계약했습니다. 연봉 순위가 전체 메이저 리그 선수들 중에서 41위라고 합니다. ‘블루 제이스’에서는 엄청난 투수가 오게 되었다고, 류현진에 대한 어마어마한 마켓팅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막전에서 류현진이 그리 좋은 피칭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만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피드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안타를 많이 허용했습니다. 류현진으로서는 뭔가 자기의 진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많아서인지 두 번째 게임에 나가서도 패전 투수가 되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세 번째 게임에서는 이기고, 네 번째 ‘마이애미’와의 게임에서 승리 투수는 못되었지만 한 점 밖에 내 주지 않을 정도로 잘 던졌습니다.
제가 류현진이라는 아구선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류현진은 자기를 데려간 ‘블루 제이스’에게 자기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투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적으로 지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팀’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저를 뽑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저를 잘 뽑으셨다는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아직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해서 우리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1절) 이 말씀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팀’ 안에서 ‘as undeserved people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자기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류현진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 나가면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 생활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감당할 수 없는 이 특별한 자리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여기 ‘stand’라는 말은 단순히 ‘서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확실하다’ ‘견고하다 (firm)’ ‘굳건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외부의 어떤 상황이나 압박이나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2-4절 말씀이 그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 때문에 흔들리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상황만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우리의 좌표(座標)를 찾아보고 확인해야 할 때입니다.
8/9/2020 | In Times Of Trouble 18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 God Who Makes A Way Out
고린도전서 10:11-13
‘에드워드 모트 (Edward Mote, 1797-1874)’라는 영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 없이 불행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모트’는 살아 남기 위하여 가구 공장에 들어가 어린 나이에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런던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트’는 무심코 한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모트’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가구 공장에서 성실하게 일한 결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고, 어느새 가구 공장의 사장으로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종이에 적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부른 488장 찬송 가사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음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은혜가 넘치는 찬송 가사입니다.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어렵고 힘들 때)’ 시리즈 설교 18 번째 시간으로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 (God Who Makes A Way Out)’이런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모든 일들은 우리 조상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들이며,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11절)” 이렇게 시작됩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 (These things)’이 무슨 일이길래 이 일들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는 ‘본보기 (examples)’가 되고 후손들에게는 ‘경고 (warnings)’가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네 가지 일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조상들이 광야생활 하던 중에 우상숭배를 했던 일입니다 (7절). 이 일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둘째로,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 (sexual immorality)’에 빠졌던 일을 지적합니다 (8절). 이 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조상들이 하나님을 ‘시험 (test)’했던 일을 지적합니다 (9절). 이 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상들이 하나님께 ‘불평’했던 일을 지적합니다 (10절). 이 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많은 사람들이 멸망했습니다. 이 네가지 일들을 보면, 모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들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다 그렇게 했을 거야!”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어떤 때는 ‘원칙’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타협’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을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믿음생활 하는 사람을 “flexible하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바로 그 점을 지적합니다. “너희들을 상황을 핑계 대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너희 자신들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때 너희가 피할 길을 마련하고 계셨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거나 절망하면 안 됩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방 어디를 봐도 초나라의 노래뿐이어서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초나라의 ‘항우’가 한나라의 ‘유방’과 대치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심신이 지친 초나라 병사들은 고향의 노래를 듣고 탈영했습니다. ‘항우’ 역시 그 노래를 들고 한나라에 항복한 초나라 병사가 많음을 알고 절망했다는 말에서 ‘사면초가’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사면초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압박을 받아도 눌리지 않으며, 난처한 일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매를 맞아 넘어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We are pressed on eve-ry side by troubles, but we are not crushed. We are perplexed, but not driven to despair).” 크리스천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그런 상황에서도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서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다니엘은 왕이 새 법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 집 다락방으로 올라가 늘 하던 것처럼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방 창문은 예루살렘 쪽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다니엘 6:10) 왕이 도장을 찍었다는 ‘새 법’은 “앞으로 삼십 일 동안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를 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입니다. 이 법은 다니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하여 만든 법입니다. 이런 법이 통과된 것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늘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 달만 참으면 되는데, 이런 무모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니엘은 매우 총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새 법’을 어기고 자기가 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의 대답을 “그 방 창문은 예루살렘 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He went home and knelt down as usual in his upstairs room, with its windows open toward Jerusalem)”는 말씀에서 발견했습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했던 것은 무모한 행동이 아니라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찬양 중에 ‘My God Is So Big (내가 믿는 하나님은 아주 커요)’ 이런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절) My God is so big,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My God is so big,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He made the trees He made the seas He made the elephants too/My God is so big,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2절) My God is so great,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My God is so great,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The mountains are his The rivers are his The skies are his handy works too/My God is so great, so strong and so mighty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There's nothing my God cannot do For you (https://youtu.be/Aq1ZIC4lsEw)
둘째로, 우리를 위해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정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까?” 이런 의심을 합니다.
성경에 ‘맛사 (Massa)’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맛사’라는 지명에는 ‘테스트 (test)’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Is the LORD here with us or not)?” 하면서 하나님을 테스트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출애굽기 17:7).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필요한 것을 모두 공급해 주셔서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실까?” 하면서 하나님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니까 때때로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보세요. “하나님을 잘 믿어야 아무 소용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어. 여호와 앞에서 기도하고 회개해도 아무 소용없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잘되는 걸?” 말라기 3:14-15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 우리는 당신의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고 그에게 기도해야 하나요?” 욥기 21:14-15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욥이 친구 소발과 변론하는 중에 나온 말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런 사람들이 잘 되고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고난을 받느냐고 자기를 변론한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천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피할 길’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련해 주시는 ‘피할 길’은 ‘믿음의 눈’으로 봐야 보이는 길입니다. 왜 똑 같은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와서 열 사람이 보고한 것과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고한 것이 달랐을까요? 두 사람은 그 땅을 ‘믿음의 눈 (God’s point of view)’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사람들은 그 땅을 ‘사람의 눈 (human point of view)’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아니, 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가 자기 앞을 막았을 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면서 책망하셨을까요? ‘사람의 눈’을 가지고 보면 ‘사람의 일’만 보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봐야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보입니다.
바울이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라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한 ‘새로운 창조’ 혹은 ‘새로운 사람 (New Person,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은 어떤 사람일까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 (new point of view)’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이란 말이 있습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보입니다. 크리스천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7 말씀이 그 말씀 아닙니까?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눈에 보이는 것을 살지 않습니다).”
이 말이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 맞춰 보십시오. “내가 너를 이 백성과 이방인들에게서 구원할 것이며,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 (사도행전 26:18)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아그립바 (Agrippa)’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했습니다. ‘아그립바’는 헤롯 대왕의 손자로 ‘헤롯 안티파스’를 대신해서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라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어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빛의 세계를 보게 하고, 사탄의 세력에 매여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람의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눈’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gift)’입니다 (고린도후서 5:18). 선물은 우리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시는 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믿음의 눈으로 세상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이렇게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믿음의 눈’이 있어야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마련해 주시는 ‘피할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렵고 힘든 이 시기에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피할 길’은 어떤 것인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은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때입니다.
8/2/2020 | In Times Of Trouble 17
모든 위로의 하나님 God, The Source Of All Comfort
고린도후서 1:3-7
오늘 설교 제목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이 말이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he source of All Comfort (모든 위로의 근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를 입기 쉬고, 넘어지기 쉽고, 작은 일로도 실망하고 절망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위로를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 지방에서 당한 환난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해, 삶의 소망조차 없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8-9절)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환난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편안한 환경에서 누가 하나님을 찾습니까? 한자 숙어에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의 삶이 편안했더라면, 그리고 아무 문제가 없었더라면,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문제가 있으니까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그에게 문제를 안겨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크리스천의 삶에 주어지는 고통과 문제들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4절 말씀인데요. “하나님은 우리가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할 때 위로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여러 환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He comforts us in all our troubles so that we can comfort others. When they are troubled, we will be able to give them the same comfort God has given us).” 여러분, 이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지요? 우리가 환난과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이유는, 네가 이런 어려움 속에서 나의 위로를 받았으니 너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네가 받은 나의 위로를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이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으면 그 사람은 B급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이 위로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위로를 전했다면 그 사람은 A급 신자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시려고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다고요. 우리가 개인의 영성에 머물러 있으면 절대로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공동체 안에서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3:16-1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었고 이집트에서 너희가 당한 일을 보았다. 이제 내가 너희를 이집트의 고통에서 이끌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자기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고통 속에 개입해 들어오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고난의 시간을 끝내시고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자기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 것은 고난 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목사인 저는 저대로 교회의 앞날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때야 말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때야 말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면,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하나님일까요? 첫째로,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Immanuel, 마태복음 1:23)’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God is with us)”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말을 생각만 해도 마음에 흥분과 감동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세 단어가 있습니다. ‘omnipotent (전능하심)’ ‘omniscience (전지하심)’ ‘omnipresent (어디나 계심)’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Abiding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삶)’이란 말을 아직 기억하고 계시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사는 삶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삶입니다. 그 누구도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을 해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자 (omnipotent)’이시기 때문입니다.
18세기에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영국)’라는 성공회 (Anglican Church, 영국 국교회)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나중에 이분이 감리교회를 창시하였는데요. 감리교회는 영국에서 탄생했지만, 미국으로 건너와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종교개혁 시대에 웨슬리 덕분에 영국 교회와 영국 사회가 성공적으로 개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훌륭한 분입니다. 이분이 마지막 임종을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The best thing of all is God is with us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았던 일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 일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어로 ‘goodbye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말은 “God be with ye”라는 말에서 온 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친구들과 헤어질 때 이 말에 의미를 담아서 “Goodbye”하고 상대방을 축복하는 인사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배경을 알고 계시지요? 성서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이 서기 60-70년 경으로 보기도 하고, 이보다 늦게 서기 90년대로 보기도 합니다. 기록 연대를 서기 60-70년으로 보는 것은 네로 황제가 기독교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서기 64년에 ‘로마의 화재’가 있었거든요? 네로는 그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리면서 크리스천들을 박해했습니다. 또 기록 연대를 90년대로 보는 것은 그 때가 로마 황제를 신격화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기록 연대를 어느 때로 보든지 요한계시록은 박해받는 크리스천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좌 가운데 계시는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가 흐르는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7)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 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3-4)
1세기에 살았던 크리스천들이 모진 박해를 견뎌내면서 얼마나 이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이 이런 기도로 끝이 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기록 22:20) 이 말이 아람어로 ‘마라나타’입니다. “Early Christians who lived under Ro-man rule would greet each other with the hopeful Aramaic word ‘Maranatha,’ meaning ‘The Lord is coming’ or ‘Come, O Lord.’ This encouraged others in a time of persecution (로마의 지배아래 있던 초기 크리스천들은 서로 인사할 때 아람어로 ‘마라나타’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혹은 ‘주님, 오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 인사가 박해 시대에 살던 크리스천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나눌 말씀이 또 하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9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풍족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And this same God who takes care of me will supply all your needs from his glorious riches, which have been given to us in Christ Jesus).” 이 말씀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And this same God who takes care of me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통하여 바울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같은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선교를 열심히 후원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자신들의 것을 내 놓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셋째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안식 (rest)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받는 고통을 함께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긍휼’이라는 단어가 바로 우리와 같이 고난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입니다. 같이 고난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 겪는 모든 고난을 같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를 돕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While Jesus was here on earth, he offered prayers and pleadings, with a loud cry and tears, to the one who could rescue him from death. And God heard his prayers because of his deep reverence for God. Even though Jesus was God's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In this way, God qualified him as a perfect High Priest, and he became the source of eternal salvation for all those who obey him.” (히브리서 5:7-9)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4:15-1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갑시다. 그 곳에는 은혜가 있으며, 우리는 때에 따라 우리를 도우시는 자비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알고 계시고, ‘때를 따라 (in our time of need)’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께 나아가 우리들의 약한 부분들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5:7을 아시지요?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우리 말 개역성경은 이 말씀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던 대상들이 누구였습니까? 1세기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얼마나 걱정과 근심이 많았겠습니까? 베드로는 우리의 고난을 함께 받으시고, 우리의 걱정을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걱정을 맡기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성경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작가로, 강연자로 활동했던 ‘팀 한셀 (Tim Hansel, 1941-2009)’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상황에 반응하는 당신의 태도를 바꿔라 (If you can't change circumstances, change the way you respond to them).” 지금은 우리의 태도를 바꿔야 할 때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기대와 소망을 품고 지금의 어렵고 힘든 상황을 넉넉하게 이겨 내시기 바랍니다.
7/26/2020 | In Times Of Trouble 16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삶 Abiding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시편 91:1-2, 9-16
오늘 설교 제목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삶 (Abiding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입니다. 지금 저는 매주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말미암아 힘들어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하심을 전해 드리고, 왜 크리스천의 삶에 고난이 있는지, 고난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크리스천의 관점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시편 91편을 모세가 썼다고 주장하는 성서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과연 모세가 이 시편을 썼을까 하고 질문해 보면서 “그럴 것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 역시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는 그토록 원했던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했지만,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다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가장 높으신 분을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고 나의 피난처이신 여호와를 여러분의 보호자로 모셨으니 어떤 불행도 여러분을 덮치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재난도 여러분 집에 가까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천사들을 시켜 여러분을 지키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저들이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9-11절) 이 말씀이 사실일까요? 정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으면 어떤 불행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서울 합정동에 ‘양화진’이라는 외국인 선교사 109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자원해 왔다가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양화진’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요. 25세에 생을 마감한 ‘켄드릭 (Miss Rubye Rachael Kendrik, 1883-1908)’이라는 선교사의 무덤입니다. 그녀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을 모두 조선에 바치리라).” 그녀는 1905년에 캔사스에 있는 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선교 본부를 찾아가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22살 때였습니다. 하지만 규정보다 나이가 2살이 어리다고 해서 2년을 더 준비한 끝에 1907년 텍사스에 있는 엡웟청년회의 후원을 받아 조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역지는 황해도 개성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송도’라고 했습니다. ‘켄드릭’은 도착하자마자 한글을 공부하면서 개성성경학교에서 서툰 한국어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급성 맹장염을 앓게 되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정성과 주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켄드릭’은 1908년 25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를 후원했던 텍사스 엡웟청년회는 그녀와 서신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그녀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 기도했고, 맹장염 소식을 듣고는 그녀의 쾌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전한 편지 속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조선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놀랍게도 그녀의 말처럼 수많은 청년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켄드릭’ 선교사는 조선에 온 지 채 일년도 되지 않아서 제대로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도 못하고 그만 맹장염으로 죽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오스왈드 체임버스 (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는 그의 대표작 ‘주님은 나의 최고봉 (My Utmost For His Highest)’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하루하루 매일 큐티 책처럼 읽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편 91편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연구하라. 예수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라. 나사렛에서 조용하게 순종하며 지낸 30년의 세월을 연구하라. 3년 간의 공생애(公生涯) 사역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가 사역 중에 받으신 비방과 침 뱉음과 배신과 미움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 견디신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이 당하는 그 어떤 아픔도 주님의 고통과 비교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의 안전과 평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요란함과 분쟁과 두려움은 언제든지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절대로 우리의 삶의 상황들이 우리의 내면의 평강을 빼앗아갈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 (those who are under the shadow of almighty)’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방은 낮에는 햇빛이 강렬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늘을 찾게 됩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시편 121편 말씀이 그런 배경으로 써졌습니다. “여호와는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는 여러분의 오른편에 있는 그늘이 되십니다. 낮에는 태양이 여러분을 해하지 못하며, 밤에는 달이 여러분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5-6절)
사미스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을 달리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피난처에서 사는 사람 (1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요새로, 바위로 고백하는 사람 (2절)’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는 사람 (4절)’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으로 무장하는 사람 (4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보호자로 삼는 사람 (9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14절)’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 (14절)’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는 사람 (15절)’ 등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을 지킨다고 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도 덮치지 않고, 어떤 재앙도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재앙’이라는 말은 ‘plague’라는 말인데, 전염병을 말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본다면 그런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목사가 교인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예배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 절대로 걸리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정말 오늘 성경 말씀이 그런 뜻입니까?
제가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Shadow Of The Almighty, 1958)’이라는 책입니다. 책 표지에 한 청년이 안데스 산맥에 올라 자기 앞에 펼쳐진 미지(未知)의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이 책의 저자인 ‘Elisabeth Elliot (엘리사벳 엘리엇, 1926-2015)’이라는 여자가 고이 간직하고 있던 자기 남편의 사진입니다. 엘리사벳은 이 책 외에도 ‘Through Gates Of Splendor (영광의 문을 통하여, 1957)’ ‘A Path Through Suffering (고난의 길을 통하여, 2003)’라는 책도 썼습니다. 2019년에는 유작으로 ‘Suffering Is Never For Nothing (고난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2019)’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엘리사벳은 1974년부터 ‘고든콘웰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를 하다가 2015년 매사추세츠의 매그놀리아 (Magnolia)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짐 엘리옷 (Jim Elliot, 1927-1956)’은 ‘휘튼 칼리지’를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남미 ‘에콰도르 (Ecuador)’ 선교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졸업 후에 짐은 동료 네 친구와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에콰도르’의 ‘Curaray River’의 ‘팜비치 (Palm Beach)’에 착륙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교를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다섯 청년들이 ‘아쿠아 (Acua)’ 인디언들에게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까운 청년들이 무모한 선교 계획을 실행하다가 살해당했다는 뉴스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Life Magazine에서는 10 페이지에 걸쳐 이 다섯 청년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제가 그 때 Life Magazine (1956년 1월 30일)을 찾아보았더니 이런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FIVE DO AND DIE (다섯 명이 하다. 그리고 죽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What an unnecessary waste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라며 무모한 선교 정책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엘리사벳’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는 전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제 남편은 이제야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녀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re is nothing worth living for, unless it is worth dying for (그것을 위해 죽을 가치가 없는 일이라면 그것을 위해 살 가치도 없습니다).”
삶에 대한 관점이 달랐습니다. ‘엘리사벳’이 본 남편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었고, 가치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짐 엘리엇’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그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엘리사벳’은 다시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찾아갔고, 그들은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이 생각하는 남편은 무모하거나 실패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제목의 책을 써서 남편의 삶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도전을 받았고,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그 축복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전쟁터에 나가도 총알이 피해가고,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리지도 않고, 위험에 처할 때는 천사들이 그를 지켜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병에 걸립니다. ‘루비 켄드릭’같이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급성 맹장염에 걸려 선교를 제대로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네 친구들도 무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중에 ‘존 파이퍼 (John Piper)’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복음에 대한 진실한 열정을 좋아합니다. 그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There is infinite, unending security in the almightiness of God — no matter what hap-pens in this life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하나님의 전능하심 속에 무한하고 끝없는 안전이 있다).” “In the darkest moments of our pain, God is hiding his weapons behind enemy lines (우리들의 가장 어두운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무기를 적의 배후(背後)에 숨기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가장 어렵고 힘들어 할 때, 적들의 배후에 치명적인 무기를 숨기고 계시다가 결정적인 때에 ‘하나님의 작전 (God’s Operation)’을 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에서 가장 어둡고 절망스러운 순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무기를 적들의 배후에 숨기신 무기는 ‘부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시작되자 단번에 모든 것이 역전되었습니다. 적들은 패배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한국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Affirmation of Faith)’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습니다 (We believe in the final triumph of righteousness and in the life everlasting).” 의가 불의에게 패배합니다. 불의가 의를 이기고 불의가 의를 정복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렇고, ‘루비 켄드릭’의 생애가 그렇고, ‘짐 엘리엇’의 생애가 그렇고, 또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고난과 역경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서 면제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 때 유일하게 보장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의 최후 승리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지금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참고 견디고 이겨내는 사람들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